참치회를 먹다 2
지진, 홍수, 산불, 가뭄
먼 나라에서 일어난 자연재해 뉴스를 볼 때마다
비싸고 맛있는게 먹고 싶다
별 다섯개 호텔 음식은 못 먹지만
먹어야겠다 생각할 때 참치회를 사 먹을 수 있는 형편은 되니
나는 행복하다
인류에 식량난이 닥쳤음에도
굶어죽지 않았다고 살아 남았다면
풍요의 시대를 그리워하면서
가장 많이 생각날 거 같은 음식
그 음식이 김치찌개나 제육볶음인 건 싫어서
참치회를 먹는다
불순한 마음이 죄스럽고
어떤게 맛있는 건지 참치맛도 모르지만
주방장 앞에 앉아서
가마도로니 뭐니 하는 얘기를
듣는둥 마는둥 하면서 참치회를 먹는
나는 행복하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한 잔 살 수 있어서
그 사람이 나랑 같이 먹는 걸 싫어하지 않아서
나는 행복하다
참치를 먹을 때는 먼 나라와 내 이웃의 불운이 떠오르지 않아서
나는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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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3.23 20210323 - 어쩌다 하나씩
- 2021.03.18 20210318 - 한 동안 못 만나는 아버지 생각
- 2021.03.12 20210312 - 어쩌다 하나씩
- 2021.03.11 20210311 - 어쩌다 하나씩
- 2021.03.04 20210304 - 치매 확정과 아버지 생각
- 2021.02.26 20210226 - 어쩌다 하나씩
- 2021.02.26 20210226 - 어쩌다 하나씩
- 2021.02.23 20210223 - 어쩌다 하나씩
- 2021.02.22 20210222 - 어쩌다 하나씩
- 2021.02.17 20210217 - 어쩌다 하나씩
- 2021.02.16 20210216 - 명절끝에 아버지 생각
- 2021.02.12 20210212 - 어쩌다 하나씩
- 2021.02.10 20210210 - 어쩌다 하나씩
- 2021.02.09 20210209 - 어쩌다 하나씩
- 2021.02.03 20210203 - 어쩌다 하나씩
- 2021.02.01 20210201 - 어쩌다 하나씩
- 2021.01.29 20210129 - 아버지 생각
- 2021.01.26 20210126 - 어쩌다 하나씩
- 2021.01.15 20210115 - 아버지랑 엄마 생각
- 2021.01.14 20210114 - 어쩌다 하나씩
- 2021.01.14 20210114 - 어쩌다 하나씩
- 2021.01.13 20210113 - 어쩌다 하나씩
- 2021.01.11 20210111 - 아버님 생각에서 이어진 아버지 생각
- 2021.01.08 20210108 - 어쩌다 하나씩
- 2021.01.05 20210105 - 아버지 생각
- 2021.01.05 20210105 - 어쩌다 하나씩
- 2021.01.01 20210101 - 어쩌다 하나씩
- 2020.12.28 20201228 - 해넘이 생각
- 2020.12.22 20201222 - 아버지 생각
- 2020.12.21 20201221 - 어쩌다 하나씩
3월 3일에 병원 때문에 아버지한테 다녀왔고 29일에 병원 때문에 다시 만난다. 최근 10년간 아버지 만난 횟수보다 지난 6개월간 만난 횟수가 더 많다. 연을 끊지 않은 부모가 아프다는 건 그런건가?
아침에 약드시라고 전화를 한다. 오늘 뭐하실 건지, 날씨가 어떤지, 몇 시에 주무셨고 몇 시에 일어나셨는지 같은 걸 묻는다. 통화는 길어봐야 2분이다. 요즘은 저녁약을 안 드시니까 여러번 통화 안 해도 되는데 정오쯤 또 전화를 하게 된다. 밥은 뭘 드셨는지 운동은 다녀오셨는지 지금 뭐하시는지 같은 걸 묻는다. 통화는 길어봐야 2분이다. 저녁에도 생각나면 전화를 하게 된다. 오늘 잘 보내셨는지, 저녁은 뭐해서 드셨는지, 지금 TV에서 뭐가 나오는지 같은 걸 묻는다. 통화는 길어봐야 2분이다. 내 질문에 답하는 것 말고 아버지가 많이 하는 얘기는 '운동을 많이 하는까 몸 상태가 좋다.' '난 괜찮은 거 같다.' '잘 지내' 같은 말이다. 오늘 아침 출근길 중간에 커피 마시다가 전화했는데, 아버지가 '지금 그.... 출근... 그래 출근하는 중이야?'라고 물었다. 아버지는 출근이란 단어가 생각나서 기분 좋은 거 같았다. 낮에 전화한다고 하고 전화 끊었다.
아버지한테는 그저 잘하고 있다는 말만 반복할 뿐이다. 요즘은 10시에 자서 7시에 일어난다고 하는데, 아버지는 시간 개념을 잊어버렸기 때문에 믿을 수 없는 일이다. 다만 지난 7년간 24시간 경비일 하느라 많이 못 잔 것을 지금 푹 주무시는 걸로 아버지 기억력이 조금이라도 돌아오면 좋겠다. 당신 눈 앞에 지금 먹고 있는 반찬이 있는데 아들이 전화로 뭐 드시고 있냐고 물어보면 그 단어가 생각나지 않아서 그거 먹고 있다고 대답하는 아버지 본인이 제일 답답할 수도 있다.
아버지랑 자주 통화하니까 내 목소리에 힘이 없으면 아버지가 바로 알고 뭔 일 있냐고 한다. 별일 없다고 하지만 뜨끔하다. 그렇지만 아버지가 내 목소리를 듣고 내 상태를 짐작할 수 있다는 건 좋은 일이다. 핏줄끼리 할 수 있는 찐 걱정인가? 피는 뜨겁고 진한 이미지인데, 줄이라는 말로 두 사람의 피를 잇는다고 생각하면 울컥 솓아오르거나 왈칵 무너지는 이미지가 떠오른다. 혈연이란 말도 그렇고 그다지 아름다운 이미지는 아니다. 핏줄에 대해서 쓰니가 꼰대가 된 거 같다.
뭔 일 있냐는 질문에 (회사에서 짜증나는 일로 상태가 안 좋지만) '별일 없고 다 잘되고 있다. 아버지도 잘하고 있다'고 하고 만다.
요즘 다시 무슨 말을 할 때마다 말의 앞이나 끝에 욕이 붙는다. 아내 얘기로는 <C8 망할 놈의 새끼들>이 한 세트로 쓰인다고 한다. 그렇다는 건 말을 꺼내기 전 머릿속의 생각에도 욕이 붙는다는 얘기다.
아버지 생각을 많이 한다. 'C8, 아버지 29일에 만나요' 아버지를 욕하는 건 아니다.
내 욕 들어주는 아내한테 미안하다. 망할 놈의 새끼들을 욕하는 거지 아내를 욕하는 건 아니다. 그래도 미안하고 고맙다.
양갈비를 먹다
친구랑 양갈비를 먹는다
양꼬치는 먹어 봤어도
양갈비는 친구 덕에 생전 처음 먹는다
세상에서 공짜 밥이 제일 맛있고
고기는 내가 갖다 먹는 무한리필집 보다 누가 구워주는 집이 더 맛있다
친구의 푸념을 들으며 고기를 씹는다
나도 누군가를 씹고 싶지만
오늘은 말 들어주는 날이라 생각하고
장단 맞춰 고기만 씹는다
얘기를 들어주고 술과 고기를 얻어먹는 사이가 친구인가 하는 생각은
집에 가면서 하기로 한다
아이가 커갈수록 생은 무겁고
생이 무거울수록 술은 가볍다
이혼 같은 말이 오고가지만
어떤 말도 생보다 무겁지 않고 술보다 가볍지 않다
마치 양갈비와 같다
돌아오는 길
빗속에서
먹을 땐 몰랐던 생 비린내를 맡았다
고등어조림을 먹다
외할머니에게서 엄마에게로
엄마에게서 나에게로 전해지고
나에게서는 대를 이어 전해질 일 없는 고등어조림을 먹는다
대통령이 아이 둘만 낳으랬다고 둘만 낳은 부모님
아버지, 엄마, 나, 동생
네 식구가 한 자리에 앉아 밥을 먹는다
마지막으로 넷이 밥을 먹은 건 20년 전일까
엄마 나이가 지금 내 나이 때의 일이다
넷 중 아무도 정확히 기억 못하는 옛 일이다
방금 들은 말도 기억하지 못하게 된 아버지 덕분에
오늘이 넷이 함께 먹는 마지막 밥은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엄마 말 잘 듣는 아이가 돼서 열심히 먹었다
동생도 같은 생각인지 그릇을 금방 비웠다
같은 재료 같은 레시피에도 엄마 거에선 엄마 맛이 난다
할머니의 고등어조림을 먹던 엄마도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괜찮다고 괜찮을거라고
부모님 이혼했던 그날처럼 뿔뿔이 헤어져 혼자 걷는 옛 동네
친구들과 어울리던 '꼬치&소주'는 '치킨&호프'로 바뀌고
외롭던 내 봄밤을 밝혀주던 가게 앞 아기 벚나무는
20년 전 내 나이만큼 자랐다
지난주 금요일이랑 어제 서울 다녀왔다. 어제는 아내도 같이 다녀왔다. 그리고 아버지는 치매 판정을 받았다. 코로나로 한동안 멈췄던 업무를 다시 시작했기 때문인지 양천구치매안심센터는 환자와 보호자로 붐볐다. 작년 11월에 받은 검사와 보호자 작성 서류를 바탕으로 의사랑 면담을 했다. 나랑 의사 나랑 아버지 또 나랑 의사의 순서다. 목동이대병원 교수가 센터장인데 그 사람이랑 면담을 해서 안심했다. - 대단히 세속적인 이유다. 그런 삶을 살지 않았는데, 그런 상황에 처하는 것은 없으니 내가 어떤 부분에서는 매우 세속적이란 걸 인정하고 넘어가자. 세속은 세속적인 단어니까 보편적이라고 할까 -
면담 내용
- 아버지는 혼자 산지 오래됐다. 가족들은 작년 여름에서야 아버지가 안 좋다는 걸 눈치챘고 그러고 나서야 아버지에 대해서 신경쓰기 시작했다. 현재 아버지는 숫자, 문자 등 많은 것을 상실한 상태고 언제 길을 잃어버리거나 한밤 중에 집 밖을 배회할지 모른다. 나이가 어리고(우리나라 70세) 알츠하이머 초기 증상이 보이기 때문에 피검사, MRI 검사를 받고 그 결과에 따라 PET란 것도 받아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성격이 너무 온순하다는 것은 현재로써는 아주 긍정적인 요소지만 급작스럽게 성격이 바뀔 수도 있다.
-> 40년 넘게 살면서 최근에서야 아버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고 있다는 걸 실토하는 면담이었다. 약간의 죄책감과 그것에 대한 부정이 계속 왔다갔다 한다. 동생은 본인이 결혼하고(2015년) 아버지가 완전히 혼자가 되면서 치매가 왔다는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다. 핏줄이란 그런 것이다.
결론
- 우리 아버지는 치매다. 혼자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 등급이 어떻게 나올지는 모르지만(안 나올 수도 있겠지) 요양급여를 신청해야 한다.
-> 예상은 했지만 의사가 치매라고 말했기 때문에 가슴속에 아주 작은 희망은 이제 없다.
엄마는 본인이 아버지와 함께 할 수 없음을 다시 한번 말했다. - 엄마, 알고 있으니까 자꾸 얘기하지 않아도 돼요. - 잘 안 되겠지만 아버지에게 책임감을 느끼지 않으려 노력하는 게 엄마의 할 일인 거 같다. 그리고 오늘 엄마는 몸살이 났다.
나는 전체 진행을 총괄하고 아버지의 거주지 이전이나 요양급여 신청, 실업급여 계속 수급 등 중요한 결정에서 엄마와 동생의 구심점 역할을 해야 한다. 어제 엄마가 말하길 본인은 나처럼 차분할 수가 없다고 했는데, 내가 차분할 수 있는 건 - 회사 동료들도 아버지랑 나랑 통화하는 걸 들으면 어떻게 아버지한테 그렇게 차분하게 말을 잘할까,라고 함 - 아마 아버지에게 깊게 베인 것 같은 애정은 없기 때문이다. 병원 예약 날짜 통지가 올 때까지 아버지 약 드시라고 전화하면서 기다릴 뿐이다. 치매로 확정이 됐기 때문에 더 이상 기다리는 초조함은 없다.
마음이 답답하기도 하고 내가 모르던 정보를 들을 수 있을까 싶어서 아버지 치매인 얘기를 여기저기 하고 다닌다. 며칠 전에 정선에서 일할 때 알던 아저씨를 우연히 만나서 아버지 얘기를 했더니 사람 사는 게 다 비슷하다는 답을 들었다. 집에 틀어박힌 13살 아이를 걱정하는 친구도 그렇고 이혼 준비 중이라고 톡을 보낸 친구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돈 걱정하는 엄마도 그렇고 사돈이 신경 쓰이는 아버님도 그렇고 다들 걱정 속에 산다. 걱정이 격정까지 가지 않더라도 거기에 삶이 있다.
진단에서 병원 예약까지 양천구치매안심센터의 시스템은 효율적으로 보였고 담당 의사는 매우 친절했다. 는 것을 기록해 둔다. - 그 뒤에 LH공사 직원들이 시흥에 땅을 산 것 같은 꼼수가 숨어있지는 않을 것이다. 적고 보니 생각이 너무 나갔다. -
최근 며칠 아버지랑 같이 지낸 엄마가 파악한 아버지 증상
- 핸드폰이든 지갑이든 그게 뭐든 한 번 쓰기만 하면 어디에 뒀는지 몰라서 자꾸 찾는다
- 돌아가신 외삼촌 잘 지내는지 물어봄
- 본인 나이 모름, 계산도 못함
아버지.............
찰밥을 먹다
오늘이 그날이라 그걸 먹는다는 아버지랑
대보름이라 찰밥을 먹는다
보름전 명절에 만든 전이며 나물이며 같이 먹는다
어떤 건 냉장고 안에서 쉬기도 했지만
나만 먹고 아부지는 안 잡수면 되니까
그냥 먹는다
- 아버지 이 고사리 약간 쉬었네요
-...
- 아버지는 드셨어도 쉬었는지 몰랐을거야
- 어, 난 모르지
핀잔인지 아닌지 모를 내 말에
그저 그렇다고만 하는,
아버지 밥그릇에 하나 남은 육전을 얹는다
가족의 증명은 같이 먹는 것
혈연의 증명은 닮은 먹성
무병장수를 기원할 수 없는 아버지와 함께 무병을 기원하는 찰밥을 먹는다
복받으라는 밥에 든 콩, 팥, 밤 따위를 씹는다
어제 다녀간 엄마가 해두고 간 찰밥을 먹는다
담배를 피우는 오후
2021년 2월 26일 오후 한 시 청량리 역 광장
여기는 흡연구역 저기는 금연구역
비둘기들에게 둘러 쌓인 채 콜라도 없이 햄버거를 먹는 남자
나랑 눈이 마주치자 입을 닦는 시늉을 하는 그 남자
영상 15도 날씨에 한겨울 점퍼를 입은 그 남자
나를 뜷어져라 쳐다보다가 담배를 꺼내 무는 그 남자
그 옆에 자판기 커피를 마시는 남자
아무도 없는 곳을 향해 반갑게 손을 흔들고 내 옆을 지나간 남자
주위엔 헐거벗은 채 치솟고 있는 빌딩 빌딩 빌딩
햄버거를 먹은 남자가 역사로 들어가고
커피를 마시던 남자는 초코파이를 먹는다
그 옆에서 땅콩을 까 먹는 여자
오늘이 대보름이지
커피를 마시던 남자와 땅콩을 먹던 여자도 사라지고
비둘기들은 분주하고
여름이 오고 있다는 아버지의 말을 생각하며
여기는 금연구역 저기는 흡연구역 팻말 근처에서
여기는 어디고 저기는 어딘가
타워크레인엔 누가 타고 있고
공사중인 빌딩 벽에 매달린 건 누구인가
고개를 돌리니 커피를 마시고 있는 또 다른 남자
그 옆에 주섬주섬 담배를 꺼내 무는 남자
비둘기들은 계속 분주하고
누군가 바닥에 빵 덩어리를 던지고
비둘기들은 더 분주하고
빌딩은 소리높이 치솟고
담배 연기가 모인 곳을 찾아가
아무것도 모른채
가만히 담배를 피우는 오후
딸기를 먹다
만날 할인하는 것만 사 먹기 싫어서
9000원짜리가 아닌 9800원짜리 딸기 바구니를 집었다
어제 물건은 800원이 싼 건가,
내가 집은 딸기가 800원치는 더 신선해 보이는군,
바구니는 반납이 안된다고 해서
죄스러운 마음이 들었지만
먹고 사는 게 잘못이란 위안으로 그냥 사왔다
씻어 먹어야 한다는 아내 말을 웃어 넘기고
딸기를 먹는다
윗줄엔 큰 딸기가 아랫줄엔 작은 딸기가 있다
마트에 물건이 있으면 그때가 제철인 세상도
눈속임으로 딸기를 포장하는 일도 웃기지만
지금 먹는 딸기는 상쾌하고 맛있다
맛있지만 더 맛있으라고 설탕에 찍어 먹는다
딸기에선 왜 딸기우유 맛이 안나지? 말해놓고
답을 아는 질문을 한
늙어버린 내가 웃겨서
멈추지 않고 딸기를 먹는다
마트에 더 이상 딸기가 안 나올때까지 자꾸 사 먹고
집안 한구석에 딸기 바구니를 쌓을 일을 생각하면서
계속 딸기를 먹는다
초밥을 먹다
초밥을 먹는다
한 개 삼 백 육 십원
서른 개 15,490원이 20프로 할인으론 안 팔려서
30프로 할인해서 10,840원이 된 초밥을 먹는다
뭘 하고 하루를 살았는지 열 시가 넘도록 아직 저녁을 못 먹었다
포장을 벗기자 길고 피곤했던 하루만큼 오래된 냄새가 난다
달걀, 게맛살이 많고
생선은 광어뿐인 초밥을 먹는다
당신과 함께라서 일까?
맛있다
겉도는 삶이라도 먹어야 삶이니
삼 백원씩 세어가면서
사이좋게 반씩 먹었다
쩌리가 떨이를 먹었다고 하니
아직은 쩌리가 아니라며 당신이 웃고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하며 웃는다
둘이 마주보고 그냥 웃는다
모난 놈
네잎 클로버를 찾다가
잎이 다섯 개인 친구를 찾았다
네잎짜리도 모난 놈 소리를 들었을텐데
다섯잎짜리는 오죽했을까
클로버의 꽃말을 떠올린다
세잎은 행복 네잎은 행운
그리고 다섯잎은 지독한 외로움
흔한 행복을 뒤로하고 행운을 찾다가 외톨이가 됐다
손에 쥔 클로버가 꼭 나와 같다
모난 놈에 외톨이지만
너무 멀리는 가지 말고
흔한 행복속에 살자
멀리서보면 알아채지 못하도록
행복과 행운의 반댓말은
우리끼리만 우리끼리만
은밀하게 은밀하게
산길을 걷다가 길을 잘못 들었다. 잘 아는 길인데, 엄마랑 통화하면서 아버지 얘기하는 중에 자연스럽게 그렇게 됐다. 전화 끊고 나서도 아버지 생각하면서 무심히 걷다가 한참 후에야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의 반대편으로 온 것을 알았다. 내 갈 길을 아는데도 이런저런 이유로 다른 길 위에 서 있기도 하는 것이 인생이다.
명절 연휴에 아버지랑 같이 지낸 엄마에게 들은 아버지 부정적 요인
- 한계가 없이 먹는다
- 지갑이나 핸드폰을 찾는다며 자꾸 가방을 뒤진다
- 하루에 돈 50만 원을 찾았는데, 어디에 썼는지 모름
긍정요인
- 동생이 아버지 은행 공동 인증서 만듦(Thanks, Bro)
- 카톡으로 영상통화를 시도해봤는데, 전화를 잘 받으심
약을 못 챙겨 먹는다. 잘 안 씻는 것 같다 외에도 새로운 증상들이 추가된다. 가방을 뒤진다는 얘기를 듣고 자꾸 짐가방을 싸던 할머니 생각도 나면서 '우리 아버지 이제 되돌아올 수는 없겠구나' 했다.
아버지는 길을 모르는 사람이 됐다. 나아갈 수도 되돌아 갈수도 없다. 그래도 어딘가에 서 있으니 인생인가? 잘 모르겠다.
치매안심센터에서 받은 검사는 코로나로 결과도 알지 못한 채 멈춰있고 - 전화를 한 번 더 해봐야겠다. - 치매든 경도인지장애든 정확한 의사 소견이 있어야 지금 먹는 비타민 같은 약이 아니라 치매약을 먹을 텐데. 엄마는 다른 병원 알아보지 말고 자꾸 좀 더 미루자고 한다.(치매 보험금 때문인가) 요양원 하는 선배랑도 통화해보고 여기저기 이것저것 알아보고 있다. 아버지 본인은 답답하지 않아서 다행인데, 엄마랑 나는 답답함을 느낀다.
엄마랑 아버지는 같이 살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 같이 산다면 엄마가 먼저 병에 걸릴 거 같다고 함 - 결국은 아버지에 대한 여러 가지 일들을 내가 결정해야 한다. 어떡할까.
하루에 두 번에서 세 번 아버지 목소리를 듣는다. 아버지 목소리는 매번 밝다. 그게 좋다.
떡국을 먹다
떡국을 먹는다
해가 바뀌었고
농사짓는 친구가 멀리까지 떡을 보냈다
벼농사를 지어도 정미소가 없으면 쌀을 못 만들고
쌀이 있어도 떡집이 없으면 떡을 못 먹는다
멸치, 달걀, 마늘, 대파까지 내 손에서 나온 건 하나도 없다
그러니 오늘 내가 떡국을 먹을 수 있는 건
설날 아침에도 배달하는 가스집 사장님까지
다들 돕고 사는 때문이다
지금 사는 모양이 어려서 상상했던 미래는 아니지만
살아 있으니 나도 누군가를 돕는거라 생각하며
그러니 됐다는 위안으로
떡국을 끊이고
한 살 더 먹는다
오리로스를 먹다
주물럭과 훈제는 뭔지 알아도
로스는 뭔 뜻인지 모르는데
오리 로스를 먹는다
세상의 많은 뜻을 잃어버린 아버지가 먼저 먹자고 했다
넷이서 먹는 양을 둘이서 가볍게 먹는 먹성이 혈연의 증명이다
오랜만에 오셨다는 식당주인의 말에 나를 아들이라 소개하는 아버지
아버지에게 내가 모르는 사람이 될까봐
자꾸 말을 건다
- 아버지
- 응 왜
- 로스는 왜 로스에요?
- 몰라
- 로스트(roast)의 로슨가?
- ....
- 아버지 이제 드셔도 돼요
- 응 그래
기억에는 로스(loss)가 있지만
아직은 카드 결재하는 법을 잊지 않은
아버지가 계산했다
이유도 모르고 죽은 오리는 죄가 없고
이유를 잃어버린 아버지도
이유를 아직 못 찾은 나도 죄는 없다
장칼국수를 먹다
겨울
점심
사람들 모이지 말라는 시기에
별로 친하지도 않은 동료와 장칼국수를 먹는다
전염병과 불편함을 장칼국수 한 그릇 먹고 싶은 마음이 이겼다
어느해 이맘 때,
이별에 취해
대관령 자락 어딘가에서 길을 헤메다
막장과 배추만 넣고 끊인 칼국수를 얻어먹은 일이 있다
멸치국물에 냉이, 버섯, 감자까지 들어간 국수 맛이 그때만 못하다
사람들이 줄을 서서 먹기도 하는 곳이니
이 국숫집이 영업집이라 그런건 아닐 것이다
김치맛도 그때만 못한 것이 국숫집 주인 탓은 아닐 것이다
최씨 삼형제 중에 막내에게 시집와서
전쟁통에 남편 먼저 보내고
다음 대의 최씨 삼형제를 혼자서 키웠다는
국수를 내어주던 할머니의 주름진 몸짓이
장칼국수란 말 안에 남았다
잊어버릴 일 하나 없을것 같은 쨍쨍한 겨울날은
혼자서라도 장칼국수를 먹고 싶은 날이 있다
아주머니라 불렀더니 할머니가 아니라 좋다고 했던 할머니 얼굴이
입안에 남은 칼칼함처럼 아련할 뿐이다
상품권
문상이 문화상품권인건 십년전에 알았는데
마상이 마음의 상처인건 방금 알았다
라디오에서 마상을 경품으로 줄 순 없으니
만날 마상이란 말을 듣고도 뭔말인가 했다
백화점 vip들 지갑엔 백화점 상품권이 가득
두 달에 한 번 피를 뽑는 내 휴대전화엔 각종 모바일 상품권이 가득
뭐든 가득찬 세상에는 상품권도 가득
마음에도 상품권이 있다면
그 상품권을 다 네 마음과 바꿀텐데
내게 마상을 알려준 너에게
마상을 알게된 날
그 뜻을 알게된 죄로 마상을 입었다
총알오징어를 먹다
총알오징어 8마리 만원
쌀 때 사 먹으라고 마트에서 문자도 보내주는 편리한 세상
주머니에 여윳돈이 있는 동료 덕분에
총알오징어를 먹는다
제대로 살아보지도 못한 아기 오징어들은 찜통 속에서 무슨 생각을 할까
죽은 것이 무슨 생각이 있으며
이런 생각은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물이 총알보다 빠르고
총알은 어린것을 먹는 부끄러움을 숨겨주는 말
내장 째 먹어야 맛있다는 얘기가 한 두 번 오가고
바닷속 오징어 떼를 생각하는 사이에
금새 솥이 비었다
남의 삶을 먹어야 자기 삶이 온전해지는 세상
나도 오늘밤 누군가에게 잡아 먹힐지 모른다
아버지 만나고 돌아가는 길이다. 청량리에서 출발한 기차가 양평에 닿기 전에 글을 끝내야지, 생각한다.
어젯밤 11시 반에 신월동에 도착해서 여전히 내 삶에서 가장 긴 세월의 지분을 갖고 있는 588 종점 근처 여관에서 잤다. 잠든 아버지 깨워서 그 옆에서 자고 싶지 않았다.
오늘은 아버지 실업급여 1차 수급일이다. 사람들이 많이 너무 많이 몰려서 교육은 일찍 끝났다. 아버지 서류를 대신 작성하면서 둘러보니 고용센터 직원이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몰라서 어쩔 줄 모르는 사람이 두 명 있았다. 내가 없었으면 아버지도 그 그룹에 포함됐겠지. 실업급여 교육을 담당한 직원은 일과 사람에 찌들어 지쳐있고 실업급여 타러 온 사람들 사이로는 나라에서 주는 돈을 받을 수 있을까, 하는 불안과 의구심이 흘렀다. 2015년 겨울에 실업급여를 타 봤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고용센터에는 항상 어떤 절박함이 흐르고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피로감을 두르고 있게 된다. - 현재 정식 명칭은 <고용플러스센터> -
고용센터를 나와서는 인터넷뱅킹을 신청했다. 은행을 나와서는 병원에 가서 약을 처방받았다. 오늘 만난 의사는 차트를 쭉 훑어보더니 치매인지 아닌지 빨리 확정이 되어야 지금 먹는 혈액순환 비타민약(글리아타민)이 아니라 정식 치매약을 먹을 약을 먹을 수 있다고 알려줬다. 그렇게 되지 않길 바란다.
병원을 나와서는 밥을 먹었다. 내가 밖에서 먹자고 했더니 아버지가 오리집에 가자고 했다. 오리집주인이 오랜만에 오셨네요, 했다. 조기축구 동료들이랑 자주 가던 집인가 보다. 로스가 뭔 뜻인지 모르지만 오리로스를 먹었다. 아버지는 세상 일의 많은 뜻을 잊거나 잃어버렸으니까 로스의 뜻이 중요하진 않다.
식당을 나와서는 아버지 집에 갔다. 약을 챙겨드리고 매일 하는 얘기를 또 반복했다.
- 아버지, 약은 제가 전화했을 때만 드시고요.
- 티비를 보더라도 무슨 얘기를 하는지 집중해서 보시고요.
- 남들이 무슨 얘기를 하면 뭔 말을 하는지 잘 들으시고요.
- 아버지는 지금 잘하고 있어요.
아버지는 원래도 욕망이 드러나지 않던 사람인데 지금은 욕망이 아예 없어진 거 같다. 단 하나 의무감으로 생각하는 건 엄마한테 매달 돈을 보내고 싶다는 것인데, 실업급여 다 받고 나면 그것도 끝이다.
남은 생을 멍하게 보내지 않기 위해선 뭔가 집중할만한 재미있는 걸 찾아야 하는데, 쉽지가 않다. 아버지랑 티비를 보면서 낱말 맞추기 게임 같은 걸 하는 내 모습을 상상해봤는데, 그렇게 하려면 아버지가 강릉 와서 살아야 하고 막상 강릉 와서 살면 지금보다 아버지에 대한 신경을 덜 쓸지도 모른다. 그러니 엄마 말대로 아직은 아버지가 서울에 있는 게 나을지 모른다.
친구 가게에 와서 아버지 공인인증서를 만들다가 실패했다. 그 과정에서 아버지랑 통화하면서 목소리가 커졌다. 아버지한테 화가 난 건 아니다. 목소리를 높이고 나면 수화기 너머 아버지가 괜히 주눅 드는 거 같아서 기분도 안 좋고 반성하게 된다. 공인인증서 만들기는 월요일에 다시 시도하면 된다.
아버지랑 그냥 같이 있으면 괜찮은데, 뭔가를 하려고 시도하면 진이 빠진다. 진이 빠지고 기분이 안 좋은 상태로 적는다.
청량리에서 강릉으로 가는 ktx산천 859열차는 아직 양평역에 닿지 않았다. 굿.
오늘자 아버지 부정 요인
- 밥 먹기 전에 엄마랑 통화했는데, 밥 먹던 중에 통화한 거 잊어버리고 또 전화하려고 함
긍정요인
- 계절을 헷갈리면 끝이라고 하니, 알았다고 함(그리고 지금이 겨울이라 대답함)
홍어회을 먹다
홍어회를 먹는다
좋아하지 않지만
앞에 앉은 사람이 좋아서
몇 점 먹어본다
여전히 입에 맞지 않지만
앞에 앉은 사람이 홍어를 좋아해서
오랜만에 만난 그 사람이 여전히 좋아서
입에 물고 우물거린다
서로가 참지 않았던 그날로부터
매 순간 내 안의 불을 삭이고 살았다
뱃속의 말은 꺼내지도 못하고
맛있다는 말만 한 번, 두 번
앞에 앉은 사람은 울지도 웃지도 않고
나도 울지도 웃지도 못하고
콧등이 시큰거리거나 말거나
삭힌 홍어회만 씹는다
어제가 할아버지 제사였다. 최소인원이 모였다. 삼촌 둘이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고 엄마, 아버지, 나 셋이 엄마집에서 잤다.
남은 제사음식으로 셋이 앉아서 아침을 먹었다.
- 탕국이 시원하네
- 아들, 시금치 더 먹어라
- 당신, 조기 한 마리 더 먹어
밥을 다 먹고 이렇게 밥 먹을 일이 별로 없다는 얘기를 했다. 나랑 엄마가 제 수명을 살아도 앞으로 얼굴 보는 건 40번 정도겠다. 아버지까지 셋이 앉아서 밥을 먹는 건 이번이 마지막 인지도 모른다.
아침 먹고 아버지랑 서울에 왔다. 고용센터(고용보험 관련), 신한은행(퇴직금 관련), 신한카드(소득공제 관련) 등의 일처리를 했다. 아버지 집에 와서는 요일 약통을 다시 채워드렸다. 아버지 워크넷이랑 고용보험 회원 가입하고 구직등록까지 마치니 오후 여섯 시였다.
오늘 확인한 우리 아버지 부정적인 모습
- 자동차 안전벨트를 잘 못 채움
- 지하철 타고 내릴 때 교통카드가 핸드폰 지갑에 있는지 돈지갑에 있는지 헷갈림
- 고용센터에서 교육 듣는데 집중을 못해서 체크만 하면 되는 걸 못함(나는 밖에서 지켜보고 고용센타 직원이 해줌)
긍정적인 부분
- 낙관적이다(항상)
- 본인 인지능력이 정상이 아닌 걸 알고 있다
앞으로 구직활동할 일이 걱정이다
아버지랑 둘이 있을 때 아버지가 한 얘기
- 내가 미국 가기 전에 돈 아낄려고 담배 끊었잖아
- 내가 미국에 한 이 년 있었나?(일리걸로 가있었음) 올림픽 때 왔잖아(아버지 월드컵이요). 미국에 있을 때 엄마한테 한 번인가 돈도 보냈어.
- 너희도(나랑 동생) 그렇지만 엄마가 고생을 많이 했어. 그래서 뭐라고 해도 가만히 있잖아
- 엄마가 고생을 많이 했어. 그래도 지금 정도면 성공한 거지(집이 있는 상황을 말하는 듯)
아버지는 빚에 쫓길 때 많이 힘들었고 그 문제가 해결됐을 때 많이 기뻤다. 그리고 아버지는 엄마에게 미안함이 많다.
아버지 일처리를 다 마치고 엄마랑 카톡이 오갔다
- 아들 수고했어. 조심해서 내려가.
- 수고는 뭘 알았어요. 이모들이랑 주말 즐겁게 보내세요. 오늘 셋이 같이 아침 먹은 게 자꾸 기억에 남네
- 그래, 엄마도 너무 좋았어
'엄마도' '너무' '좋았어'
이 대화에 울컥했다.
이유
썩어 없어지지 않는 쓰레기를 만들어내기 시작한 순간부터 인류는 멸망하기 시작했다
그게 고기든 석유든
인간은 기름을 먹고 사는 동물
밤이 밝아졌을 때부터
세상의 모든 이유는 인간의 이유
김치전을 먹다
한 장에 오천원
셋이 앉아 한 장에 소주 다섯 병을 먹는 김치전을 먹는다
김치전은 집에서 해 먹어도 맛있지만
술은 밖에서 사 먹는 게 맛있다
소주 한 병 사 천 원
비쌀수록 맛있는 소주를 입 안에서 굴리며
나와 내 앞사람과 그 옆사람이 굴러가는 얘기를 한다
마주앉은 세 사람이 세상이라면
글러먹은 세상이 굴러가는 얘기를 한다
빈병이 굴러다니기 전에
한 장 더 시킨다
가게 주인은 말이 없고
솔직히 이집 김치전은 맛이 없다
맛 없다면서 한 장 더 시키는 이유는 뭔지
김치전을 먹기 위해 소주를 먹는지 소주를 먹기 위해 김치전을 먹는지
답을 아는 뻔한 질문이지만
확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탕수육을 먹다
탕수육을 먹는다
오늘은 월급날이다
부자가 된 것 같은 기분에 돼지고기 튀김이 먹고 싶었다
혼자서 대(大)자는 무리고 중(中)자를 시킨다
- 소스는 따로 주세요 -
돼지고기와 밀가루와 기름
튀김은 순수함의 결정체
그 순수를 양조간장에 찍어 먹는다
익숙한 향이 주는 안도감에 긴장이 풀린다
- 맥주도 한 병 주세요 -
전염병이 도는 세상이라
식당엔 나와 주방장 뿐
TV에선 무관중의 프로야구 중계
아웃카운트가 하나 늘어날 때마다 고기 한 점과 맥주 한 모금
의미 없는 규칙, 그래야 할 것 같은 기분
- 잘 먹었습니다 -
튀김은 절반 이상 남았고 야구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오늘의 기분도 아직은 제자리에 있는데
집으로 향하는 텅빈 거리
입안에 간장 냄새만 남았다
어제 아내가 장인어른이랑 통화하다가 통화 말미에 우리 아버지의 치매 증상에 대해서 알렸다. 언젠가는 말씀드려야지, 통화가 한 시간 넘게 이어지는 바람에 예기치 않게 얘기가 진행됐다. - 아버님이 먼저 시댁 어른들 괜찮은지 물어봤을 것이다. - 아버님이 나 바꾸라고 해서 잠깐 통화했다. 며칠전에 나랑 통화했을 때, 내가 아무말도 안 한 것에 조금 섭섭함을 느낀 말투였다. - 아내가 본인 부모는 본인이 알아서 하는거지, 라고 말한 것에도 약간 충격 받으셨을지도 모른다. - 상황이 심각하지 않으니 너무 걱정하시지 말라고 태연하게 얘기했다.
통상적으로는 시집간 본인 딸이 힘들어질 수 있으니 걱정하는 것이 정상이고, 아버님은 통상적인 사람이다. 어머님이 암투병도 하셨고, 평소에도 건강에 관심이 많으시니 걱정이 되는 것이 당연하다. 진작에 알려드리지 않은 것이 죄송했다. 헌데,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사돈이 아프든 말든 아무소식 없으니 그저 잘 지내겠구나 생각하면서 사는 게 아버님, 어머님한테는 더 좋을 것이다. 암튼 그렇게 아버지 소식이 사돈댁에 알려졌다. 어서방 자네 어깨가 무겁게구만 열심히 살어, 란 말을 들으니 진짜 어깨가 무거워지는 것 같았다. '열심히 살어'는 아버님이 자주하는 말인데, 당신 성에 차지 않을 뿐인지 나도 아내도 열심히 살고있다.
요즘 내 관심분야는 아버지다. 아버지는 지난달 30일로 일을 그만뒀다. 지금 상태라면 먼저했던 경비일이 마지막 직장이다. 앞으로 아버지는 마지막인 것만 많아지는 삶 속에 있을 것이다. 월급은 잘 들어왔고, 퇴직금은 아직인데, 조금 알아보니까 퇴직금은 따로 통장이 있어야 하는 것 같아서 먼저 통화했던 사무실 직원과 다시 한 번 통화해야 할 거 같다. 15일에는 나랑 같이 고용센터에 갈 계획이다. 실업급여를 신청하는 건 좋은데, 현재 아버지 상태로 구직활동이 가능할까? - 구직활동을 증빙해야 실업급여가 나옴 - 뭐 어떻게든 되겠지. 양천구치매안심센터 간호사랑 한참을 통화했다. 의사 선생님이 진단검사 결과를 알려줘야 하는데, 코로나로 치매안신센터의 많은 활동이 멈춰있는 상황이라 언제 연락할지 모르겠고, 본인들도 환자 가족들의 답답한 상황을 알고 있으나 어쩔수가 없다는 내용이다. - 지금이라도 대학병원에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하나? 엄마랑 상의 좀 해봐야겠군 - 통화하면서 여러가지 생각이 머릿속에 새겨진다. 아버님이 말한 '어깨가 무겁다'는 이런 걸 내가 챙기는 상황을 말하는 건가? 그런거라면 아직 어깨가 무겁지는 않다.
우리 아버지 현재 긍정 요인
- 밥을 혼자서 잘 끓여 드심
- 규칙적으로 매일밤에 잠을 자게 됨
- 엊그제 혼자 은행에 가서 ATM으로 마지막 월급 들어왔는지 확인함
- 라디오를 듣기 시작했다고 함
- 아침에는 약 네 알, 저녁에는 약 한 알이란 걸 알 때가 있음
- 계절을 헷갈리진 않음(내 생각엔 이게 제일 중요)
우리 아버지 현재 부정 요인
- 외롭다, 여전히, 아마 앞으로도
아버지 힘내세요. 어깨가 무거워져도 열심히 도울게요.
도시락을 먹다
올해 나온 쌀로 지은 밥
이런걸로 사기를 치진 않겠지
형형색색의 반찬
세상은 무지개 빛이 아니다
허겁지겁 먹는데
밥알이 입안에서 뒹군다
내가 농사지은 쌀로
지어 먹었던 밥은
간장이랑만
김치랑만
대충 아무렇게나 먹어도
속이 든든했는데
포장지의 엄마 미소로
나를 유혹했던 밥이
맛이 없다
최저임금 6030원
최고급 편의점 도시락 3500원
집에 쌀도 있고
벌어둔 돈도 있지만
지난달에 실직하고
불안한 미래 때문에
나이 40에
태어나서 처음
편의점 도시락을 먹었다
-> 2016년 1월
2020년 12월 31일에 아버지 병원 때문에 엄마가 아버지한테 다녀갔다. 내가 갔어도 되지만 12월의 마지막 날 아버지랑 같이 있고 싶지 않았고 12월 초에 내가 한 번 다녀왔기 때문에 마지막 날은 엄마가 아버지를 만나기로 했다.
엄마가 속상하다고 전화했는데, 엄마가 얼마전에 새로 사다준 겨울 점퍼의 단추를 아버지가 다 뜯어놨고 옷도 많이 찢어져 있다고 했다. 아버지 본인이 잘못한 일에 대해서 뭐라고 하면 입을 꾹 다물고 있다고 했다. 듣기만 해도 속상한데, 옆에서 본 엄마는 오죽했을까? 입을 꾹 다물고 있다는 얘기에 할머니가 떠올랐다. 할머니 치매 초창기에 당신 듣기 싫은 얘기를 하면 입을 꾹 다물었댔다. 나한테 잔소리하지 말라는 표정으로 눈만 껌뻑거리면서 유난히 다부진 모양으로 입을 굳게 닫고 있던 할머니 얼굴이 생각난다. 아버지는 할머니와 피가 섞인 사이는 아니니까 입을 다물고 있는 일이 유전은 아니겠고 치매 환자의 일반적인 모습 중에 하나겠지.
'치매' '단추' 키워드로 검색을 해봤다. 정답은 나오지 않았다. 검색 결과로 추측하건대, 아버지는 단추를 푸는 일에 어려움을 겪다가 급기야 화가 나서 단추를 다 뜯어버렸다는 결론에 닿았다.
- 엄마, 아버지한테 화내지 마시고 다 잘하고 있다고 하세요.
- 화난 건 아닌데 자꾸 목소리가 커지니 어떡하냐?
병원에 다녀온 결과 아버지 약 목록에 고지혈증 약이 추가됐다. 올해 칠십이다. 혈압, 아스피린, 고지혈증 약은 평균적인 진행이다. 약 드시라고 그때그때 알려드려야 하는 건 보통의 진행은 아니다. 대답을 못할걸 알면서도 오늘 몇 시에 일어났는지 밥때 뭘 드셨는지 자꾸 묻게 된다.
- 어.... 몇시?..... 어두울 때 일어났어.
- 어.... 그 뭐냐.............
- 국수! 그게 먹고 싶어서 어........ 그 뭐냐.....
- 고추장이랑 양념해서..........
- 아버지, 비빔국수요.
- 어, 그래.
기록을 보니 아버지가 치매 증상을 보인 이후에는 한 달에 한 번은 아버지를 만나고 있다. 아버지가 아프지 않았다면 명절이랑 제사 때, 1년에 세 번 정도 만났을 테니까 아버지가 80살까지 산다고 해도 횟수로는 서른 번 정도 얼굴을 볼 예정이었다. 엄마 얼굴 보는 일도 그 정도였을텐데, 아버지 때문에 엄마 얼굴을 좀 더 자주 보게 돼서 다행인 건가?
이번 주에,
아버지는 기초연금 문제로 동사무소에 가야 되고 실업급여 문제로 고용센터에 가야 된다. 고용센터는 다음주나 다다음주에 나랑 같이 가는 게 나을 거 같다.
14일이 할아버지 제사다. 둘째 삼촌이 식구들을 모으고 싶어 한다는 얘기를 엄마에게 전해듣고 헛웃음이 나왔다. 코로나보다 무서운 게 조상인가? 아무튼 그때 맞춰서 아버지 관련 일처리를 몇 가지 하기로 한다. - 약, 고용보험, 퇴직금 - 엄마는 할아버지 제사 전후로 아버지랑 열흘 정도 오산에서 같이 지낼까 고민 중이라고 한다. 같이 있으면 자꾸 목소리가 커진다고 하면서도 잠깐 같이 지낼까 고민하는 마음이 사랑일까?
모르겠다.
반대말 - 육식 -
치킨의 반대말은 닭
돈가스의 반대말은 돼지
스테이크의 반대말은 소
영양탕의 반대말은 개
동물의 반대말은 인간
음식의 반대말도 인간
인간의 반대말은 육식
육식의 반대말은 멸종
멸종의 반대말은 삶
삶의 반대말은 다시 육식
청국장을 먹다
1월 1일,
아내가 자는 동안 두 끼를 먹었다
아침은 남아있던 된장국
점심은 새로 끓인 청국장
허기가 진 것도 아니었는데
허겁지겁 먹었다
새 날엔 새로 끓인 것을 먹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 해피뉴이어
늦게 일어난 아내도 청국장을 먹는다
- 잘 먹었어
새 날, 오래된 관계
새 마음, 해묵은 실패
새로 끓인 찌개, 되돌릴 수 없는 나이
갈팡질팡하며 영원한 첫날을 산다
해가 넘어간다. 2000년 이후로 해가 바뀔때마다 그 숫자를 받아들임에 현실감이 떨어진다. 2020년이 됐을때, 그 느낌이 특별히 더 강했는데, 2021은 좀 더 현실감이 없게 느껴진다. 어렸을 때 좋아했던 미래 소설과 SF 영화들보다 미래를 살고 있다.
24일에 아버지가 해고통지를 받았다. 10시 쯤 약 드시라고 전화했는데, 황급한 목소리로 좀 있다가 전화할게,라고 해서 해고통지 중인 거라고 짐작했다. 아버지랑 관련된 부분은 계획 또는 예상에서 어긋남 없이 진행중이다. 어긋남이 좀 있어야 하는데, 걱정이다.
같은날 오전에 자동차 검사를 받았고 오후에 헌혈 하고 돌아오다가 잠깐 정신줄 놓은 사이에 가벼운 사고가 났다. 90프로 이상 내 책임이다. 산타할아버지가 선물 준비하는 좋은 날에 안좋은 일이 겹쳤다. 가벼운 접촉이라 다행이다. 운전하던 두 사람은 서로 괜찮은지만 묻고 각자의 보험회사에서 온 두 사람이 일사천리로 일을 진행한다. 횟집에서 인간이 양식한 활어회를 먹는것처럼 세계가 나를 양식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액땜이라 했다. 뭔 액땜이냐고 했더니 2021년 액땜이라 한다.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 주변에서 다들 좋게 얘기해주니까 좋게 생각하기로 한다. 앞 차에 타고 있던 두 사람이 대인처리를 했다고 하는데, 자동차 번호판이 약간 구겨지는 가벼운 접촉사고였으니 실제로는 아프지 않길 바란다. - 교통사고 냈(났)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다. 나도 죄짓고 살기는 틀린 사람이라 다행인건가 -
연휴 내내 누웠다가 엎드렸다를 반복하며 게임과 유튜브를 왔다갔다 했다. 나이 마흔 셋에 이럴수 있는 여유가 있다는 게 다행스런 일이지만 어떻게 생각하면 불행한 일이기도 하다. 만들던 노래는 멈춰 있고, 매일 강박적으로 붙잡고 있던 기타연습도 손에서 떠났다. 책이라도 읽어볼까 하면, 그게 다 뭔 의민가 싶다. 찝찝한 기분이 가시질 않는다.
오늘이 아버지 마지막 출근날이다. 현재 아버지 상태라면 아버지가 월급을 받는 직장에는 마지막으로 출근하는 날이다. 지금 건물에서 경비일을 7년 반동안 했다. 24시간 근무서고(중간에 두 시간 정도 잠) 다음날 쉬고 또 24시간 근무서는 일의 반복. 아버지는 지겹지 않았을까? 언젠가 '너무 외로운 고슴도치가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가시를 다 뽑고 너구리랑 친구가 됐다.'는 얘기를 들었다. 지겨움과 외로움은 같은 말이다. 아버지는 외로웠을 것이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아버지가 소속된 경비 용역회사 사무실 직원과 통화했다. 아버지가 아픈건 술로 문제가 있었던 6월에 이미 알았고, 아프지 않았으면 계속 가고 싶었지만 계약기간이 끝나서 재계약을 안하는걸로 했다고 한다. 퇴직금도 매년 정산했던 것이 아니라서 7년치를 한꺼번에 준다고 하고 만 65세 이전 취업했기 때문에 실업급여 수급 대상자라고 한다. 잠깐 통화했을 뿐인데, 차분하고 조심스러운 말투에서 우리 아버지 참 괜찮은 회사에 다녔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가 정상이 아니란 걸 알았을 때, 바로 퇴사 조치할 수도 있었을텐데 6개월을 봐줬다. 고마운 일이다. 내가 아버지 아들인 것도 아버지한테 다행인 일이길 바란다.
아버지는 돈을 모아두는 인생을 살지 않았고 엄마는 당장 고정 수입이 없어져 매달 나가는 보험료가 큰 걱정이다. 엄마는 꽤 심란하겠지만 아버지는 회사 그만두게 된 것에 크게 신경쓰지 않는듯 보인다. - 물론 속으론 안 그럴수도 있다. - 희망적으로 생각하면, 일이야 다시 구하게 될 수도 있고 당장은 매일매일 규칙적으로 주무실 수 있게 되서 좋다고 생각한다.
올해 나는 운이 좋아서 전세계 인구로 따지면 100명 중에 한 명꼴로 걸리는 코로나에 걸리지 않았다. 살아 있는다는 건 복권보다 확률이 높은 행운일 뿐이다. 그저 운이 좋아서 올해도 살아 남았다. 살았으니 살아야 한다. 무력해도 살아야 한다. 어쨋든 살아야 한다.
몇 가지 결심들로 올해를 넘어 내년으로 가본다. 일단 담배는 사 놓은 한 갑만 마저 피우기로 하자. 체중감량해서 약간은 건강해지도록 해야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무력해지지 말아야지.
술을 많이 마신 다음날엔 내가 어제 술자리에서 누군가에게 무례하게 굴지는 않았는지 생각하게 된다. 실제로 그런 경우는 거의 없지만 - 가끔은 있음 - 자꾸만 이런 의심이 드는 것은 평소에 내가 무례하거나 무례한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조심해야지. 운이 좋아서 살고 있으니 겸손하게 살자. 이것도 새해 결심에 추가한다.
어제 아버지한테 다녀왔다.
아버지가 아픈 이후로 아버지 만나고 돌아오면 늘 기분이 안 좋다.
아버지랑 같이 있을 때 기분이 안 좋은 건 아니다.
어제는 혈압약 복용과 관련해서 간단한 피검사를 받았다. 아버지 담당의사를 처음 만났다. 전화상으로는 아버지가 깜빡거리는 건에 대해서 잠깐 얘기했었고 아스피린도 처방해 달라고 했었댔다. 의사는 치매 진단검사 결과를 봐야 알겠지만 혼자서 생활이 가능하니 나쁜 상태는 아니고 술을 끊었기 때문에 점차 좋아질수도 있으며 '글리아타민'이란 뇌 영양제는 본인도 처방해 줄 수 있으니 약 떨어졌을 때마다 신경과에 방문할 필요는 없다고 시원시원하게 얘기했다. 의사가 아버지에게 달력을 가리키며 오늘이 몇일이냐고 물었을 때, 아버지는 잠깐 머뭇거렸지만 21일이라고 정확하게 답했다. 때려 맞춘걸 수도 있지만 - 병원 가기전에 오늘이 21일이라고 세 번 정도 얘기했다. - 대답 잘하셔서 좋다고 생각했다.
병원에 다녀와서 전날 저녁에 사온 소불고기를 데워서 아침밥을 먹었다. 18일이 아버지 생일이었다. 아버지 생일은 엄마가 꼭 챙겼고 보통 이모들이랑 모여서 밥을 먹었다. 올해는 코로나도 있고 부러진 엄마 팔이 붙지 않은 관계로 패스하기로 했다. 내년이 칠순이다. 내년에는 아버지 상태랑 상관없이 친척들 여럿이 모여서 밥을 먹겠지. 어쩌면 그게 아버지 생전에 마지막으로 여럿이 모인 즐거운 날일지도 모른다. 그날은 술을 한 잔 드셔도 괜찮지 않을까?
밥 먹은 그릇 씻고, 저녁 때 드실 곰탕 국물 끓여 놓고, 요일 약통에 약 세 알씩 잘 담아서 아버지 가방에 넣고 주무시는 거 보고 아버지 집을 나왔다.
아버지랑 병원에 있을때부터 내 담당이 아닌 일로 업무 전화가 자꾸 와서 짜증이 났다. 사무실 동료는 우리 아버지도 아닌데 내가 지것까지 챙겨줘야 되나, 생각하니 화가 더 올랐다.
청량리에서 강릉 오는 한 시간 반 동안 슬픈 노래를 들으면서 화를 삭였다. 집에 와서 보니 휴대전화 충전기가 안 보였다. 서울에 두고 온 줄 알고 바로 마트에 가서 새걸 샀다. 알고보니 서울갈 때 가져갔던 옷 아래 깔려 있았다. 내 부주의함에 또 화가 났다.
요즘은 약 먹을 때가되면 아버지가 먼저 전화하기도 한다. 긍정적인 변화다. 저녁에 엎어져서 게임하고 있는데, 아버지한테 전화가 왔다. 자신있는 목소리로 약 먹었다고 해서 확인해보니 아침에 드셔야 되는 약을 드셨다. 내가 먼저 전화해서 오늘 저녁은 약 드시지 마세요,라고 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게 화가 났다.
- 아버지 저녁은 뭐 드셨어요?
- ..........
- 아버지 저녁은 뭐 드셨어요?
- 뭘 먹긴 뭘 먹어 그냥 먹었어.
곰탕 국물이 있길래 그거랑 먹었다고 하시면 되는데, 그 말씀을 못하시니 화가 나서 약간 언성이 높아졌다. 아내가 옆에서 듣고 있다가 나를 진정시켰다. 방금 뭘 먹었는지는 아는데, 그 단어가 기억 안나는 아버지가 나보다 더 답답하겠지. 그래도 자꾸 뭘 드셨는지 묻게 된다. 아버지는 출근한 날 점심에는 '제육볶음'을 자주 드시는 거 같고 저녁은 거의 '김밥'을 드시는데, 내가 먼저 얘기하지 않으면 그 말을 못 떠올린다. 잘 모르실걸 알면서도 계절도 날짜도 요일도 자꾸 묻게 된다.
아버지 얼굴 보면서 얘기해보면 괜찮은거 같다가도 약은 언제 어떤 걸 먹어야 하는지, 방금 뭘 드셨는지, 오늘인 무슨 요일인지 모르는 아버지 목소리를 들으면 안 괜찮다는 걸 알게된다. 우리 아버지 아프구나. 아버지한테 언성 높인게 미안해서 베란다에서 담배 피우러 나가서 바로 전화했다.
- 아버지, 약도 잘 드시고, 술도 잘 끊었고 지금 잘하고 있어요.
- 어, 그래. 칭찬을 받으니 좋다.
- 예, 아버지. 푹 주무시고, 내일 출근 잘 하시고 아침 약 드실 때 또 전화할게요. 그리고 아버지, 약은 제가 약 드시라고 전화했을때만 드세요.
- 어, 그래. 알았어. 잘 지내.
'잘 지내'란 말이 가슴을 때리고 또 하루가 갔다. '잘 지내'란 말은 평소에 자주 연락 안했던 나에게 내려진 벌이다. 자꾸 화가 나는 나에게 내려진 벌이다.
아버지가 아픈걸 알고 아버지 얘기를 쓰기 시작하면서 기록을 남기는 자식이 있어서 다행인가, 생각한 적 있는데. 다행이란 말조차도 그저 내 만족이다. 기록이 내게 위로가 된다.
어제는 화가 났다. 그러지 말아야지. 아버지한텐 화내지 말아야지.
선잠을 자다
청량리에서 강릉오는 한 시간 반 동안 잠깐 졸았다
선잠이란 말이 어울리지 않는 나이에도 기차안에선 졸게 된다
어린날 청량리에서 무궁화 기차를 타고 외할머니 살던 경북 영주에 갈 때도 열차 안에서 졸았다
그때는 너무 어려서 선잠이란 말이 어울리지 않았다
한때는 내게도 이 예쁜 말이 어울리는 시절이 있었다
선잠은 서서자는 잠인지 잠깐자는 잠인지 아니면 잠깐 서서 자는 잠인지
선잠이란 말을 아는 내가 옛날 사람은 아닌지
열차가 잠깐 멈췄을때 아버지랑 외삼촌들이 먹던 가락국수가 제천역이는지 안동역이었는지
어린 내게 호의로만 가득했던 시절
잠깐의 꿈 속에는 은밀한 비밀조차 없었는데
아버지랑 병원 들렀다 돌아오는 길의 선잠 안에는
깨고 나니 흔적도 없이 사라진
옛 이름과 그때의 사랑, 세상에 나만 아는 비밀이
열차 한 칸을 가득 채운다
잊기만 하는 아버지를 뒤로하고
우락부착한 중년 남자의 생활로 돌아가는 길에 잠깐 졸았다
아버지는 당신의 꿈 속에 살고
나는 지금 그 꿈 속에서 온 삶을 다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