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OG ARTICLE 그때그때/아버지생각 | 80 ARTICLE FOUND

  1. 2024.04.30 20240430 - 4월의 끝에 아버지 보고 온 생각
  2. 2024.04.16 20240416 - 그냥 써 보는 일기
  3. 2024.03.25 20240325 - 여전한 위기의 중년, 아버지 생각
  4. 2024.03.12 20240312 - 아버지, 엄마, 흐르는 시간, 어깨 통증
  5. 2024.02.05 20240205 - 어깨 통증, 위기의 중년, 아버지 생각
  6. 2024.01.28 20240128 - 잘 지내고 있는 아버지 생각
  7. 2024.01.19 20240119 - 잘 지내야 될텐데, 아버지 생각
  8. 2024.01.15 20240115 - 요양원과 아버지 생각
  9. 2024.01.08 20240108 - 신년, 나이 먹음, 아버지 생각
  10. 2024.01.03 20240103 - 신년, 아버지 생각
  11. 2023.12.26 20231226 - 크리스마스와 아버지 생각
  12. 2023.12.18 20231218 - 주말에 만나고 온 아버지 생각
  13. 2023.12.12 20231212 - 사흘만에 만난 아버지 생각
  14. 2023.12.09 20231209 - 삼 주 만에 만난 아버지 생각
  15. 2023.11.20 20231120 - 보고 싶다고 하는 아버지 생각
  16. 2023.11.05 20231105 - 두서 없이 적어보는 아버지 생각
  17. 2023.10.30 20231030 - 내가 옆에 있으면 좋겠는 아버지 생각
  18. 2023.10.15 20231015 - 치매가 무르익어가는 아버지 생각
  19. 2023.10.08 20231008 -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아버지 생각
  20. 2023.09.11 20230911 - 아버지랑 같이 사는 모습이 그려지지 않는 생각
  21. 2023.08.30 20230830 - 8월이 다 간 아버지 생각과 짜증
  22. 2023.08.27 20230827 - 서울 다녀온 생각
  23. 2023.07.31 20230731- 여름과 에어컨과 아버지 생각
  24. 2023.07.26 20230726 - 멀리서 생각만 해보는 아버지 생각
  25. 2023.06.19 20230618- 주말에 아버지 만나고 돌아와서 생각
  26. 2023.06.13 20230613 - 거처를 얼른 옮겨야 하는 아버지 생각
  27. 2023.05.15 20230515 - 떠오르는대로 적어보는 아버지 생각
  28. 2023.04.24 20230424 - 엄마, 아버지 생각
  29. 2023.04.22 20230422 - 오랜만에 서울 올라와서 생각
  30. 2023.04.12 20230412 - 산불과 아버지와 나와 자연

 엊그제 아버지 보러 다녀왔다.
 서울 가는 아내 강릉역에 내려주고 단골 커피집에서 모닝세트 먹으면서 요양원에 전화했다. '이따 두 시 쯤 갈게요.'
 집에 와서 멍하게 있다가 시간이 두 시 반이 된 걸 알았다. 이렇게 아버지를 잊게 되는구나 점점 불효자가 되는구나, 생각하면서 헐레벌떡 아버지한테 갔다. 아버지에게 가는데 장인어른한테 전화와서 요양원 도착할때까지 통화했다. 하나의 나 두 개의 아버지.
 아버지가 생활하는 4층에서 아버지 만난 게 두 번째다. 아버지 방에 가보니 아버지는 세상 편안한 얼굴로 자고 있었다. '아버지' 하고 작게 불러서 아버지를 깨웠다. 침대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켜 드리고 방 밖으로 나와서 방문 나오자마자 있는 응접실(?)에 자리를 잡았다. 아버지는 횡설수설했고 나는 아버지를 마주보고 앉았다가 옆에 앉았다가 하면서 같이 셀카도 찍고 방금 찍은 사진도 같이 봤다. 아버지는 계속 횡설수설하고 나는 계속 아버지 잘하고 있다고 얘기하는 반복이었다. 그 반복이 지금 나와 아버지의 관계다.
 
  헤어질 시간을 귀신같이 아는 아버지가 이제 가라고 하길래 소파에 앉은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아버지를 안았다. 내가 '아이고 아버지' 하면서 아버지 등을 살짝 두드렸는데 아버지도 내 등을 두드리면서 '어, 어일우' 하고 그날 처음으로 내 이름을 불렀다. '아버지, 내 이름 안 잊어버렸네' 했더니 아버지가 '너는 안 잊어버리지' 했다. 아버지는 내가 아버지를 깨웠을 때 '아이고, 네가 왔구나' 라고 했다. 아마 그때부터 무의식적으로 내 이름을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헤어질때는 덤덤했는데 집에 와서 치킨 시켜서 혼자 맥주 마시다가 많이 울었다.
 서울에서 아버지 만나고 헤어질 때 아버지가 나에게 '수고했다'단 말을 자주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때가 좋은 시절이었다. C8. 어제 이 생각을 하면서 또 울었다.
 아내에게 이 얘기를 했더니 나랑 아내랑 같이 아버지 보러가면 아버지가 나만 알아보고 자기는 누군지 잘 모르는 것 같다고 했다.
 
 아버지가 내 이름은 잊어도 좋지만 내가 본인 아이란 걸 오랫동안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버지, 돌아오는 일요일에 또 보러 갈게요. 제 이름 또 불러주세요.

AND

아버지가 요양원에 간지 세 달 됐다. 일주일에 한 번씩 꼬박꼬박 아버지 보러 갔다. 요양원은 1층에 사무실이 있고 3층, 4층을 생활관 및 프로그램실로 쓴다. 아버지는 4층에서 생활한다. 지난 일요일엔 1층에 있는 면회공간이 춥다고 4층에서 아버지 만나라길래 아버지의 공간에 처음 가봤다. 아버지가 위에서 만나는 건 처음이라면서 좋아했다. 아버지는 본인 침대가 여기라며 방 들어가자마자 바로 오른쪽에 있는 침대를 가리켰다. 4인 1실인 아버지 방 티비에는 ebs에서 학생들 가르치는 프로그램이 나오고 있었다.

학교 선배가 요양원 처음 차렸을 때 죽음을 너무 자주 접해서 스트레스가 많다고 했었는데, 아버지 있는 요양원도 40여명 어르신들 중에 우리 아버지처럼 몸을 잘 가누는 입소자는 거의 없는 분위기였다. 아버지 만날때마다 '이 양반 심심하구나' 생각이 드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공간 전체에 삶이 꺼져있는 냄새가 흐르고 있었다.

아버지 요양원에 입소해서 큰 스트레스는 덜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버지 만나고 나면 늘 마음이 가라 앉는 이유가 이 죽음의 냄새에 있었나? 생각한다.

세계 인구는 폭증하고 있고 노인 인구도 폭증하고 있고 과인구는 지구에 해가 될 뿐이니 특정 조건에서 본인이 원하면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세상이 올 수도 있겠구나 생각해본다. 아내가 가끔 어떻게 죽지?를 묻기에 이런 생각을 하나보다.

산림 기사 따려고 공부하고 있다. 2015년부터 산에서 일했고 16년에 산림청에 입사했다. 울적한 마음에 자격증 하나 갖고 싶어서 공부 시작했는데, 어렵다. 1차 cbt는 가볍게 붙었는데 2차 필답 준비가 어렵다. 마음가짐의 문제다. 내 삶에 산림기사가 절박하지 않기에 열심히 한다고 하지만 절박하게 외워지지 않는다. 한 번에 합격하고 싶고 산림기사를 따면 산림경영기술자 초급을 바로 받을 수 있으니까 그 마음으로 열심히는 한다. 27일 2차 필답 시험인데 조금 더 전력을 다해보려 한다.

아내랑은 잘 지낸다. 최근에 나랑 살아줘서 고맙단 생각을 많이하게 됐다. 나이 먹어서 그런 것 같은데, 그렇다고 그 마음이 거짓은 아니다.

아는 선생님이 포남동에 7080라이브를 인수했다기에 갔었다. 사장님이 나를 반가워 해주셔서 기분 좋았다. 나중에 주문진에 사는 선장님 한 명이 손님으로 왔는데, 작년에 무슨 축제 노래자랑에서 1등 하셨던 분이라고 했다. 사장님이 나한테 노래 하라고 해서 한 곡 했더니 잘한다고 또 하라고 해서 다섯 곡을 연달아 불렀다. 이 선장님이 내 노래를 듣고 삘 받아서 노래 하시는 중에 가게를 나왔다. 7080 라이브에서 노래 배틀 할 뻔한 인생이라니. 웃음이 나왔다.

조카들보러 구리에 한 번 다녀올까 싶다. 이런 생각 하는게 처음이고 최근이다. 나이 먹어서 그렇다. 동생 아내에겐 미안하지만 엄마가 하지 말라는 거 다 하게 해주는 나쁜 삼촌 노릇 좀 하고 싶다. 애들한테 그렇게 기억되고 싶다.


전반적으로 울적하지만 그래도 살아간다.

AND

 얼마 전에 춘분 지났고 내 생일은 추분무렵이니까 세상에 태어나 45년 6개월을 살았다. 마흔 다섯 살이면 중년인가? 생각해본다. 내 생각엔 40대부터 50대까지 중년이다. 60대가 중년인지는 그 나이가 되면 생각하자.

 어깨 통증은 거의 사라졌다. 정말 다행이다. 완전히 끝난것은 아니고 내 몸 안에 잠재되어 있다. 그 점이 짜증과 두려움을 유발한다. 요즘은 다시 허리가 아프려고 한다. 2년 전에 처음 찾아왔던 허리 통증도 두 달 정도 지나니까 사라졌지만 내 몸 속에서 웅크리고 있을 뿐이었구나. 다리까지는 저리지 않으니 다행이다. 어깨 아픈 이후로 운동을 안했다. 운동을 안 하는 게 좋을지, 적당히 하는게 좋을지, 그 적당히는 얼만큼 인지, 모르겠다.

 심각하게 우울하진 않은데, 계속 침체된 상태다. 출근하기 싫지만 출근을 해야하고 퇴근 후에는 누워서 유튜브로 베토벤 들으면서 만화 본다. 가끔 기타를 손에 잡지만 금방 내려놓게 된다. 이게 위기의 중년이다. - 진짜 위기의 중년들이 웃겠다. - 나아지겠지. 빨리 벗어나고 싶다.   

 아내가 내 옆에 있어서 다행이란 생각을 많이 한다. 독신 중년이야 말로 진짜 위기의 중년이 아닐까?

 두 번 앞의 일요일에 친구를 만났고 지난주 금요일에 다른 친구를 만났다. 친구 만나도 술 마시는 일 뿐이지만 그것도 약간의 위로가 됐다.

 커피랑 담배 중에 하나를 끊고자 하는 생각이 계속 있다.

 

 2주전에는 동생이 아버지 보러 왔다. 아버지 주려고 가족들 사진첩을 가져왔는데, 아버지는 어느 사진에도 집중을 못했다. 아버지는 한 번도 동생 이름을 부르지 못했다. 동생이 약간 충격 받았다. 그렇지만 그 애가 본인 아들인 건 알아봤고 애들이라고 하면서 손주들 얘기를 했다. 엊그제는 아내랑 아버지 보고 왔다. 아버지는 쉴새 없이 이런저런 얘기를 했는데, 핵심은 아내가 보고 싶다, 추석 성묘 행사 때 사람들 보고 싶다, 본인은 잘 지낸다, 이 세 가지다. 아버지 손을 잡고 아버지 얘기를 듣는다. 아버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추론하면서 듣는다. 본인 얘기가 다 끝났다는 생각이 들면 아버지는 이제 그만 가라는 얘기를 한다. 요양원에서 면회 시간은 30~40분 정도가 좋다, 고 했는데 아버지는 그 시간을 귀신같이 안다.

 아버지 제가 갈 수 있는 한 계속 보러 갈테니까 계속 지금처럼 잘 지내세요. 추석 때는 같이 바깥 구경도 하자구요.

 아버지와 나, 아직까지는 서로의 삶에 어떤 원동력이 되는 상태다. 생각해보니까 그건 좋네. 

AND

 아버지가 요양원에 간지 두 달 가까이 됐다. 일요일마다 아버지 만나러 갔는데, 한 번 빼고는 늘 아내가 함께 갔다. 고맙고도 고맙다. 아버지 머릿속에는 마누라 - 평소에 아버지가 잘 안 쓰던 표현인데 치매 이후에 많이 씀 - 한 번 봤으면 좋겠다는 것과 작년과 재작년 추석 성묘 때 일가친척들 많이 모였던 기억, 할아버지 제사 때 손주들 - 아버지는 그냥 애들이라 함 - 봤던 기억이 깊게 남아있다. 아버지는 날 만날때마다 마누라, 애들(손주들), 강릉에 다 모인것(성묘) 얘기를 한다. 삶에 대한 희망이나 열망까지 나가지 않더라도 어떤 기억이 있다는 것이 아무 기억도 없는 것 보다는 낫다,는 게 내 생각이다.

 엄마한테 아버지가 엄마 보고 싶어한다 했더니 버스 타고 당일치기로 강릉 한 번 오겠다고 했다. 요즘 엄마는 홍콩 h지수 연계 ELS 때문에 마음에 큰 데미지를 입었다. 까먹은 돈은 그냥 돈이지만 문제는 심리적 타격을 잘 극복하는 일인데, 그 극복이 주위에서 말해주기는 쉬워도 당사자에게는 무척 어려운 일이다. 그나마 심적 타격이 크겠구나, 생각해주는 사람이 주위에 있는 것만해도 다행이다. 엄마 주위에는 이모들이 있고 내가 있다. 엄마는 요즘 집안일 알바를 가는 날이 아니면 그냥 누워있다. 엄마 힘내요.

 회사 동료 어머님이 곧 돌아가실 지경이 됐다. 지난주에 만난 의사가 네 달을 얘기했다고 한다. 이 형(회사 동료)은 시골 동네에서 유명한 효자다. 이 형이 어제 사무실에 며칠만에 출근해서 처음으로 한 얘기가 본인이 의지할 곳이 엄마랑 아내랑 두 갠데 이제 하나 밖에 없어서 어떡하냐,는 것이었다. 매우 공감했다. 내가 의지하는 것도 아내랑 엄마 두 사람이다. 죽음은 피할 수 없지만 그들이 심적으로 무너지는 일은 막아야 겠구나 생각했다. 

 아버지가 의지할 곳은 나인가 요양보호사 선생님인가 둘 다인가?

 출근길에 라디오 뉴스에서 20회째를 맞는 횡성한우 축제 소식을 들었다. 작년에 횡성한우 축제 한다는 소식 들은 게 얼마 안된 것 같은데, 또 같은 축제를 한다고 한다. 이것이 나이 들면 시간이 빨리 흘러가는 일이다. 지난해에 내 삶에 아무일도 없었기 때문에 시간이 빨리 흘러간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너무 많은 일들이 있었기 때문에 시간이 빨리 흘러간 것도 아니다. 나이 먹을수록 지나간 시간들을 압축하거나 압축해서 잊는 폭이 커지는 느낌이다. 새해가 시작하고 일주일만 지나도 '올해가 다 갔구나' 생각하는데, 올해의 남은 시간들이 큰 폭으로 압축될 것을 알기 때문인 것 같다.

 모든 생명이 시간을 다르게 인식하는 일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어깨 통증은 많이 나았다. 4주 연속으로 주말에 서울 가서 주사 맞았다. 선생님이 2주 후에 예약 잡아 주면서 안 아프면 그만 오라고 했다. 2월 초에 아프기 시작해서 너무 아파서 아무 것도 못한 게 열흘 정도고 현재는 일상 생활은 가능하다. 다만 팔에 약간의 통증이 남아 있다. 2주 후에는 그 약간의 통증도 사라지길 바란다. 나이 먹으면 다 아프기 시작한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는데, 건성으로만 넘겨 듣던 그 말을 실제로 아픈 몸에 새기는 게 나이 먹는 일인가 보다. 

 회사 다니는 일이 정말 지겨워서 정말정말 그만두고 싶은데, 내 나이에 이 지역에 이 정도 돈을 받는 이만한 직장이 없기 때문에 못 그만두고 있다. 회사 동료들이나 친구들과 웃으면서 이런 얘기를 나누면서 나도 세상에 흔한 사람이라는 걸 느낀다. 내가 남들과 같은 생각을 하고 뻔한 얘기를 하는 사람이라는 게 심적 안정감을 줄 때가 있다. 이런 감정이 나이 먹을 수록 더 강하게 다가온다. 어렸을 때는 튀고 싶었는데 말이지.

 건강 문제로 - 수면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 - 담배랑 커피 중에 하나를 끊어볼까 생각한다.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도 나이 들었다는 증거다.

AND

 두서 없이 적어 본다.

 토요일에 아내 운전 연습을 겸해서 봉화에 있는 국립백두대간 수목원에 갔다. 정말 잘 생긴 암컷 호랑이를 봤다. 기분이 좋아졌다. 겨울 나무도 종류별로 많이 봤다. 춘양면에 방 잡고 읍내에 있는 분식집에서 라면 둘, 김밥 한 줄, 김치전 한 장(5,000원)까지 도합 16,000원 어치를 저녁을 먹었다. 너무나 맛있었다. 호랑이를 본 일까지 좋은 일이 연속으로 있었다. 로또는 이번주에도 꽝이었다. 오는길 가는길에 조수석에 앉아서 오른쪽 사이드미러 들여다보느라 많이 피곤했지만 아내의 운전이 많이 늘었다.

 어제 아버지 만나고 왔다. 1시간 가까이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데, 직원분이 면회는 30분 정도만 하면 좋겠다고 했다. 야속하단 마음과 다행이란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아버지는 요양원에서 계속 지내야 한다는 사실에 적응중이다. 명절에 아버지를 데리고 엄마한테 같이 갈지 말지 계속 고민중이었는데, 아버지는 가고 싶은 눈치라 내가 힘들어도 같이 가는 쪽으로 마음이 굳어진다.

 그리고 나는 한 달 째 어깨가 아프다. 어제는 한 잔 하고 술 취해서 잠들었는데도 어깨가 아파서 자다 깼다. 아내가 나를 안타깝게 지켜봐줬다. 사랑이다. 내가 아버지 얼굴 보러 간 걸 포함해서 아픈 사람 지켜봐 주는 게 사랑이다.

 오늘 아침에 폭설 때문에 출근하다가 차를 돌려서 집으로 왔다. 돌아온 김에 병원에 들렀다. 의사 선생님이 엑스레이 상으로는 어깨에 아무 문제가 없다고 한다. 다행이다. 진통제와 근육이완제(+위장약)를 처방 받았다. 서서히 재활 하면 좋아지겠지. 긍정적으로 생각해본다. 사무실에 처리할 일이 있어서 2시에 출근하긴 했는데, 어떻게 돌아갈지 막막하다. 35번 국도 타고 삽당령 정상을 오르는데, 내려오는 제설차 4대를 마주쳤고 미처 눈을 다 치우지 못하고 있었다.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눈을 뚫고 출근을 했나, 후회막심이다. 

 몸이 아프니까 자연스럽게 <위기의 중년> 이 떠올랐다. 자포자기 하듯 어깨 치료도 게을리하고 매일 적당히 지내면서 저녁엔 술 마시고 운동도 안 하다보면 <위기의 중년>이 아니라 만성적으로 우울을 끼고 있는 <체념한 중년> <망가진 중년>이 되겠구나 생각했다. 그렇게 되는 일이 너무도 쉽겠구나 생각했다. 나를 생각해서도 지금 상태로 무너지면 안되겠지만 아내를 생각하면 더욱더 <건강한 중년>이 되려고 노력해야 한다. 최소한 노력하려는 시늉이라도 해야 무너지지 않을 것 같다. 

 어제 오랜만에 친구 만나서 한 잔 했다. 친구는 아버지 가업을 이어서 농업으로 새출발을 하려고 한다. 세상은 홀로 살아가는 곳이지만 기댈 곳이 있고 그 기댈 곳이 가족이라면 기대는 것이 좋다, 는 게 내 평소 생각이다. 친구한테 그 얘기를 해줬다. 친구는 중년은 다 위기라고 했다. 맞는 말이다. 친구가 아버지한테 농사 잘 배워서 돈도 적당히 많이 벌고 나한테 맛있는 것 많이 사주면 좋겠다.

 이 기록을 남기는 동안 계속 어깨가 아프다. 저녁에 약 한 봉지 더 먹어야겠다. 근데 이 폭설속에 오늘 집에 내려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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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엄마가 아버지 보고 갔다. 혼자 살때보다 말끔해진 아버지가 ‘여기가 서울 학교보다 좋다.’ 고 했다고 한다. 엄마는 아버지에게 그 얘기를 듣고 안심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서울 데이케어센터보다 지금 요양원이 더 좋다는 얘기다. 또 아버지 행색이 - 혈색과 차림새 - 좋아서 당연히 펑펑 울 줄 알았던 엄마가 울지도 않았다니 좋은 일이다.

 수요일에 요양원 간호 선생님한테 전화를 받았다. 요양원에서 6일간 관찰한 아버지에 대해서 이런 저런 얘기를 해주면서 <불결행위> 란 말을 꺼내서 그 단어 때문에 충격 받았다. 아내 얘기로는 불결행위가 공식 용어라고 한다. 암튼 그 내용은 오줌을 아무데나 눈다는 것이었다. 이미 혼자 살때도 비슷한 경우가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한동안은 그러지 않았기에 갑작스러운 환경 변화 때문에 그런가, 생각했다. 자는 곳도 바뀌고 전화기도 없어지고 주위 사람들도 익숙하지 않을테니 당연한가, 생각했다. 그리고 걱정하고 걱정하고 걱정했다.

 어제는 엄마랑 작은 아버지 두 명이 아버지 얼굴을 봤다. 나는 그들을 요양원까지 안내만 해주고 아버지에게 얼굴을 보이진 않았다. 오늘은 나랑 아내가 아버지 만나러 갔다. 엄마에게 들은대로 아버지는 괜찮아 보였다. 혈색이 좋았고 옷도 말끔하게 입고 있었고 면도도 깔끔했다. 앞으로는 팬티에 똥을 묻히고 있을 일도 없으리라. 원체 까다롭지 않은 양반이라 요양원 생활에 금방 적응을 한 것 같다. 아버지는 강원도가 좋고 강원도 사람들이 착하다는 얘기를 반복했다. 횡설수설은 숙명이지만 본인이 고향에 와 있다는 걸 아는 것만으로도 치매가 끝까지 가진 않은 것이다. 평범하게 생각하면 아버지는 끝난 사람이 됐지만 요양원에는 요양원에서의 삶이 있다. 그렇게 삶은 계속되고 그 삶은 아버지가 ’그래도 살아야지‘란 말을 자주 한 것과 이어진다.

 오늘 아버지랑 30분 정도 같이 있었다. 앞으로도 시간 날 때마다 아버지 보러 가야겠다. 앞으로도 같이 가주겠다는 아내의 마음이 참 고맙다. 아버지를 만나는 횟수가 만나는 시간보다 중요하단 생각이다. 그렇게 아버지의 계속되는 삶에 내가 있어야겠다. 집에서 요양원까지 걸어서 5분거리다. 직장도 요양원도 가까운 게 좋다.

 걱정했는데 아버지 잘 지내서 정말 다행이다.

AND

오늘 아버지를 요양원으로 보냈다. 아버지는 2020년 여름에 이미 머릿속이 까마귀 고기를 먹은 상태였고 2021년 초에 정식으로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았다. 오늘이 오기까지 엄마랑 나에게 긴 여정이었다.

수요일에 퇴근하고 강릉발 청량리행 기차를 탔다. 목요일에 청량리발 강릉행 기차를 아버지랑 같이 탔다. 힘들단 말이 무슨 소용인가 싶지만 힘들다. 아버지는 기차에서 조금도 눈을 감제 않았고 양평 조금 지나서 도시 이미지가 사라지자마자 강릉 냄새가 나는 것 같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 냄새 타령을 했다. - 만종역 근처에서도 평창역 근처에서도 같은 말을 했다. 아버지 나이 73세, 23년을 고향인 강릉에서 보내고 나머지 50년을 서울에서 살았어도 고향이 좋은건가? 생각했다. 오늘 오전에 아버지 태어난 동네까지 드라이브를 했다. 아버지는 본인이 거기서 태어나서 어린시절을 보냈다는 것도 모른다. 그래도 <강릉> 이라는 단어 한 마디가 주는 포근함을 느끼는 것 같았다. 어린시절을 보낸 곳은 몰랐지만 본인이 다녔던 초등학교는 알아봤다. 아직 치매가 끝까지 가진 않았다.

먼저 서울 왔을 때 미처 정리하지 못한 일들을 했다. 통장 하나랑 신용카드를 없앴다. 아버지 명의의 휴대전화를 해지했다. 요양원에서 휴대전화 사용을 반대하기에 내 이름으로 번호 하나 새로 만들어서 아버지에게 주는 계획은 보류했다. 요양원에 44명의 노인이 있는데, 그들이 다 휴대전화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보니 요양보호사 선생님들 입장에선 끔(깜)찍하긴 하다. 어제 저녁에 작은 고모를 만났고 오늘 점심은 작은 아버지 내외랑 함께 먹었다. 고모도 삼촌도 숙모도 치매였던 할머니의 경험치가 있기에 - 할머니는 요양원에서 거의 10년을 살았다. - 아버지의 치매 상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진 않았다. 좋은 일이다. 아내도 나를 걱정하는 아버지의 멘트 - 일우가 고생이 많다. - 를 옮겨주면서, 정신줄을 완전히 놓치는 않은 것만해도 어디냐고 했다. 아내는 며칠 전에 그 말을 하면서 눈물을 글썽였다.

아버지는 나 결혼하고 우리집에 처음 와봤다. - 엄마도 2012년에 한 번 와 본게 전부고 장인어른과 장모님은 한 번도 딸 집에 못 와봤다. - 아버지는 출가한 큰 아들 집에 처음 온 날 그 집에서 자고 다음날 아들 집 앞에 있는 요양원에 갔다. 뭔가 운명적으로 느껴진다.  

양말을 신으라고 했더니 장갑을 발에 끼우고 있던 아버지, 며느리를 사모님이라 부르는 아버지, 찬물에 믹스커피를 휘젓고 있던 아버지, 끓이지도 못할 라면을 사 놓던 아버지, 맨 얼굴에 면도 하느라고 일회용 면도기를 잔뜩 사 놓던 아버지, 치매 걸리고도 가끔은 막걸리를 사 마신 아버지, 바지 후크랑 모든 옷의 지퍼를 다 망가뜨린 아버지, 빤쓰를 안 입고 있을때가 많던 아버지, 나에게 ‘니가 고생이 많다’는 말을 많이 한 아버지, 나랑 있으면서 ‘엄마는?’ 이라면서 전처를 많이 찾았던 아버지, 나랑 같이 순대국도 먹고 해장국도 먹고 치킨도 먹고 커피도 먹고 서울에서의 마지막 밥으로 백화점 식당가에서 냉면을 먹은 아버지, 먹는 모양새가 많이 어설프지만 젓가락질은 여전히 잘 하는 아버지

우리 아버지 잘 지내야 될텐데… 이 말이 절로 나온다. 사랑이겠지. 사랑이 무슨 소용인가 싶지만 사랑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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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는 지난주에 또 길을 잃었다. 아버지 집에서 걸어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신정동 파출소에서 전화 왔다. - 까치산역까지 걸어갔다가 방향을 잃고 신정동까지 갔을거라 추측해본다. - 아버지를 발견하고 아침 7시 30분에 전화해 주고 집에까지 데려다 준 친절한 경찰이 아니었다면 우리 아버지 얼어 죽었을지도 모른다.

 요양등급 내용변경한 건 3일에 처리가 됐고, 이버지가 길을 자꾸 잃으니 요양원 진행을 서둘렀다. 아주 다행히 집 바로 근처에 있는 요양원에 빈 자리가 하나 있어서 입소(이용?)를 결정했다. 서류 준비 때문에 목요일 오후부터 바빴다.

 아버지 신분증을 엄마가 갖고 있어서 금요일 7시 차를 타고 경기도 오산에 갔다. 시속 110킬로 미터로 달리는 버스 안에서 눈을 감고 잠들면서 '기사와 나 뿐인 고속버스에서 운전자가 졸면 둘이 같이 죽겠구나' 단순 명료한 죽음을 생각했다.

 엄마는 제사 준비 중이었다. 제주(祭主)가 치매에 걸렸어도 본인 형님과 이혼한 전 형수님 집에서 지내는 제사가 중요한 삼촌들 꼴 보기 싫다. 점쟁이가 제사는 계속 지내는 게 좋겠다고 하니까 그 말 듣고 본인 몸이 엉망인데도 혼자서 제사 준비하는 엄마도 문제다.

 데이케어센터에서 아버지 데리고 나와서 은행 세 곳 들르고 요양원 입소용 건강검진 받고 고지혈증 약 문제로 의사랑 상담했다. 우체국에서 어떤 할머니가 우리 아버지 어디 아프냐고 해서 치매라고 했더니 본인은 치매 안 걸릴라고 뭣두하고 뭣두하고 하면서 계속 말을 걸길래, '할머니도 치매 걸리고 싶어요?' 말할까 하다가 속으로 이 할머니도 치매 걸리길.... 하고 저주를 퍼붓고 말았다. 은행에서는 이름을 본인이 써야 한다고 하고 보험료 자동이체 때문에 전화한 콜센터에서는 치매라도 본인이 직접 전화해야 한다고 하고, 정신없이 다니다가 농협 체크카드 잃어버려서 농협 다시 들르고 자꾸 짜증이 치미는데, 아버지는 계속 멍하고, 중간중간 내가 목소리를 높일때마다 내 눈치를 보는 것 같은 아버지를 보니까 더 화가 나고 기분이 너무 안 좋았다.

 아버지랑 밥 먹다가 순대국에 소면 사리를 두 번 넣어 줬는데, 너무 맛있게 먹길래 잘 드시니까 좋네, 진짜 좋네, 라고 했는데 말이 끝나자마자 '진짜 좋다'는 내 말이 진심이라 눈물이 났다.

 고모(아버지 누나)가 전화해서 요양원에 가면 학대도 많이 하고 죽으러 가는거라던데 어떻하니, 하길래 엄청 짜증이 났지만 좋게 좋게 얘기했다. 전국에 장기요양인정자(아버지처럼 요양 등급 받은 사람)가 100만명 정도 된다. 고모 생각대로라면 나는 백 만명이 요양보호사한테 학대받는 나라에 살고 있네. 무지(無知)가 무섭고 본인 위주로만 생각하는 무지는 더 무섭다. 그리고 요양원에 가면 요양원에서 죽을 가능성이 높으니까 죽으러 가는 거 맞다. 

 아버지는 자꾸 엄마를 찾았다. 엄마는 경기도 오산에 있고 엄마도 많이 아프고 앞으로 자주 못 볼거라고 말해줬다. 강릉으로 간단 얘기를 들은 아버지는 <강릉>이란 단어에 몰두했다. 치매에 걸렸어도 고향은 고향인가?

 회사에 일이 있어서 더 빨리 진행은 못하고 19일에 입소할 계획이다. 여기저기 전화하고 여기저기 왔다갔다하는 일이 너무 힘들다. 아버지 요양원 입소 과정을 빨리 끝내고 싶다. 서울 가는 것도 이번주면 끝이다. 아버지가 요양원에 가고 나면 나는 어떤 기분이 들까?

 아버지 요양원 가고나면, 엄마가 괜찮은 사람 만나서 홀가분한 상태로 재혼해서 편하게 살면 좋겠다는 생각을 몇 번 했다.  


많은 아버지 컷 중에 베스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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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월 10일이다. 지난주 금요일에 '1월 5일이구나, 벌써 새해가 5일이나 지났네, 5일씩 몇 번만 더 지나면 올해가 끝이네, 올해도 다 갔구나' 생각했다. 올해가 다 갔다고 생각하는 날짜가 나이 먹을수록 점점 빨라진다.

 토요일에 서울 갔다가 일요일에 돌아왔다. 아내랑 함께 했다. 아내 부모님, 아내 오빠 가족과 점심을 먹었다. 1월 13일 생일이 지나야 17살이 되는 조카 아이가 고등학교 조기 졸업하고 카이스트에 합격했다. 지나간 아버님 생일과 조카 아이 축하 식자다. 만 17세면 앞으로 10년 동안 놀고나서 앞으로 어떻게 살까 생각해도 좋겠단 생각이다. 종로 한 복판에 있는 중국집에서 이것저것 먹었는데, 크림 새우가 맛있었고, 아버님과 조카 아이가 짜장면을 많이 남겼다. 풍족함이 흘러 넘치는 시대지만 여전히 음식을 남기는 일에 대한 거부감이 크다. 아버님, 앞으론 그러지 말자구요. 생애 처음 가본 블루보틀에서 커피까지 마시고 어머님이 싸주신 월병이랑 찹쌀떡 챙겨서 - 어머님 사랑 - 아내랑 신월동으로 왔다. 
 
아내는 오랜만에 시아버지를 만났다. 1박 2일 동안 아버지를 지켜본 아내는 아버지가 그럭저럭 심각하진 않은 것 같다고 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다만 혼자서 못 지내는 사람이 됐을 뿐이다. 아버지랑 순대국집 두 곳에서 순대국을 먹었다. 두 곳 모두 주인이 나랑 아버지를 알아보는 집이다. 우리 아버지가 온전치 못하다는 것도 알고 있는 집이다. 장사하는 사람들이야 별 생각 없겠지만 나는 왠지 모르게 그들의 시선이 부담 되기도 한다. 아내까지 셋이라서 이번 주말은 그 부담감이 강하지 않았다. 아버지를 만나면 아버지랑 뭔가를 먹어야 하고 아버지가 순대국을 가장 무난하게 잘 드시기에 순대국 집엘 간다. 다음 주말에도 어쩌면 그 다음 주말에도, 내가 아버지를 만나는 모든 날에. 순대국은 실제로 우리 집안의 소울 푸드이기도 하고 - 엄마가 나 임신중에 순대국과 코카콜라를 많이 먹음, 네 다섯 살 때부터 가족 외식으로 시장에 순대국 먹으러 갔던 기억이 있음. - 뚝배기에 담긴 국밥 이미지 자체가 소울 푸드란 말과 어울린다. 일요일 점심 먹고 나서는 아버지랑 둘이 호수공원을 한 바퀴 돌았다. 먼저 아버지랑 호수 공원 돌았던 게 언젠지 모르겠는데, 아버지는 확실히 그때보다 훨씬 멍한 사람이 됐다. 호수공원을 돌고 공원 옆 스타벅스에서 커피 한 잔씩 마셨다. 예전에 스타벅스 돌체 라떼 같이 마셨던 게 기억났다. 아버지는 나에게 순대국과 스타벅스로 기억되겠구나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아버지에게 잊혀질 것이다.

 뇌동맥류 수술을 했고 올해 또 칼을 댈 일이 있을 거라고 점쟁이가 말했다는 엄마, 위암 수술을 했고 치매에 걸린 아버지, 유방암 수술을 한 어머님, 심장이 뛰게 하는 보조기구 시술을 받고 담낭 제거를 기다리는 둘째 이모, 담당을 제거한 친구 어머니, 다리에 심각한 수술을 한 친구 아버지, 왼쪽 어깨를 올리지 못하는 친구, 아킬레스건이 끊어진 친구, 다리에 큰 수술을 한 친구, 수시로 오줌을 누러가야 하는 또래 친구들, 갑작스럽게 허리가 아프고 다리가 저렸던 나, 새해 들어 왼쪽 어깨가 아프더니 팔까지 저리기 시작하는 나, 40세 무렵에 노안이 시작된 아내, 암 수술을 받은 내 또래 사람들, 갑자기 죽은 40대 사람들, 점점 늘어난다는 2, 30대 치매 환자들. 늙고 병드는 일을 생각한다. 어디까지가 삶이고 어디까지가 삶이 아닌가, 언제부터 죽음이고 언제까지가 죽음이 아닌가. 

 45세, 어느날 갑자기 쓰러져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나이다. 혼란한 국제 정세와 내가 살고 있는 곳이라 그런지 더 혼란하게 느껴지는 국내 정세를 생각하면서 짜장면을 많이 남긴 가족들과 끝까지 배가 고팠을 안네 프랑크 누나, 서대문 형무소에 갇혔던 독립투사들을 생각하면서 언제든 이상하지 않을 나의 죽음 같은 걸 생각한다.

 가족 모임도 좋았고 아버지를 만난 것도 좋았다. 아내랑 함께 해서 더 좋았다. 불편을 감수하면서 시아버지랑 함께 있어준 아내에게 고맙다, 고 생각하면서도 급작스런 나의 죽음 같은 걸 생각하는 1월이다.

스타벅스 블론드 바닐라 더블샷 라떼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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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일부터 2일까지 아버지랑 함께 있었다. 오늘 첫 출근 했다. 아버지랑 3박 4일은 진짜 힘드네. 신년 카운트다운 할 때, 나는 연기대상 프로그램 틀어놓고 웹툰 보고 있었고 아버지는 잠들어 있었다.

 아버지랑 순대국, 치킨, 갈비, 삼겹살을 먹었다.

  31일 낮에는 동생이 아버지 집에 다녀갔다. 살아가는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1일에는 목욕탕에 갔다. 
  1일 밤에는 뭔가 견디기 힘들어서 밤 11시에 잠든 아버지를 두고 집을 나와서 모텔에 가서 잤다. 2일 아침에 아버지는 내가 어제 같이 누웠었단 사실도 잊었다.
 엄마는 2일 낮에 막내 이모 - 내 사랑 명옥이 이모 - 랑 같이 다녀갔다. 막내 이모랑 살아가는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아버지 보러 온게 아니라 많이 아픈 언니 보러 온 거였다. 아버지는 데이케어 센터에 있었다. 엄마는 아버지 드시라고 고구마를 삶았다. 

 새해 첫 진료라 그런지 병원에 사람이 많았다. 두 시간 기다려서 아버지 뇌가 점점 위축되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약간 바뀐 처방전을 받았다. 의사가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고 했다. 내가 의사 선생님 만난게 17시였는데, 아버지 뒤로 16명이 대기중이었다.

 아버지는 매운 양념 치킨을 잘 먹었고 얼큰 순대국을 제일 맛있게 먹었다. - 처음에 잘 못 먹길래 매운 건 시키지 말자, 생각했는데 뜨거워서 그랬던 거였다. - 목욕탕을 좋아했고, 목욕탕에 가서 보니 빤스를 안 입고 있었다. 엄마 언제 오는지 자꾸 물었지만 엄마를 만나지는 못했다. 내 동생의 존재를 잊은 줄 알았는데, 잊지 않았다. - 센터 선생님들 빼면 엄마, 나, 내 동생 이렇게만 확실하게 아는 것 같다. - 

 아버지는 증상을 늘어놓는 게 무의미한 완숙한 치매 환자가 됐다, 어느새. 아버지에게 섬망과 환청이 없어서 다행이다, 그나마. 

 12월 18일에 접수됐다고 연락온 요양등급내용변경에 대한 답변이 오지 않는다. 기다린다. 설이 2월 10일 경이니까 1월 중순까지는 공단에 연락하지 않고 기다려보기로 한다. 아버지가 갈 요양(병)원 알아보는 중이다. 엄마 마음이 편한 곳으로 하기로 한다. 아버지에게 요양원 얘기를 하면 무슨 말인지도 모르면서 알아서 하라고 한다. 아버지랑 오래 같이 있었더니 아버지한테 니가 고생이 많다, 고맙단 말을 많이 들었다. 알아서 하란 말에도 고맙단 말에도 맴이 찢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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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에서 2박 3일 보내고 어젯밤에 강릉으로 돌아왔다. 새벽에 다섯 번 깨고 아침에 일어나서 출근했다. 피곤하다.

 23일 저녁에 아버지랑 치킨 먹었다. 올들어 세 번째인데 아버지가 먼저 두 번보다 맛있게 먹었다. 아버지 먹는 모양새가 어설퍼서 순살 치킨을 시켰다는 점은 섭섭하지만 24일 아침에 아버지 집에 도착했을 때, 아버지가 반쯤 먹고 남았던 치킨도 다 먹었고 맛있다고 했기에 만족했다. 앞으로 아버지랑 치킨은 페리카나 순살 반반으로 고정하기로 한다.

 여러가지 정황상 아버지는 23일 오전에 휴대전화를 잃어버렸다. 그리고 못 찾았다. 나는 23일 밤에 친구랑 술을 먹고 친구네서 잤는데, 택시에서 내리고서 휴대전화 잃어버린 걸 알았다. 다음날 아침에 전화기 어떻게 찾을지 약간 막막했는데, 택시에 뒀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하고 카카오T 사용 기록을 ARS로 조회해서 택시 기사분과 통화를 했고 친절한 택시 기사분 집이 마침 신월 1동(아버지 사는 동네)이라서 파출소에서 전화기를 찾았다. 휴대전화 잃어버리기는 치매에 걸리나 안 걸리나 마찬가지네, 생각했다.

 23일에 나를 재워준 친구네 집은 역곡역 부근이다. 고등학교 때 이 친구네 집에 많이 갔다. 그때 친구는 온수동에 살았다. 서울에서 벗어났지만 삶의 터전이 많이 바뀌진 않았다. - 돈 없는 집들은 다들 조금씩 서울 바깥으로 밀려난다. - 술이 꽤 취해서 들어갔는데도 어렸을 때 느꼈던 특유의 친구네 집 냄새가 났다. 같은 사람이 살고 있어서 그렇다. 나이 먹고는 부모님과 함께 사는 친구네 집에 갈 일이 거의 없기에 집안의 냄새가 바뀌지 않은 점이 인상적으로 느껴졌다. 친구한테 얘기했더니 그런가, 하고 말았다. 본인 집 냄새를 본인은 모르는 법이다. 나는 남의 집에 갔을 때, 그 집 특유의 냄새(atmosphere)에 대해서 얘기하는 경우가 있는데, 막상 우리집 냄새에 대해서는 들은 기억이 없다. 지금 엄마집에 가면 나는 냄새가 어릴적 우리집 냄새일까? 궁금하네.

 크리스마스 이브에는 아버지랑 목욕탕에 갔다. 아버지가 정말 오랜만이라고 하면서 좋아했다. 아버지와 나는 59.5kg 노인과 82kg 중년이다. 아버지 체중은 위암 수술 후에 5kg 정도 줄었다. 벗은 아버지 몸은 보기에 많이 야위었다. 아버지는 내 몸이 보기 좋다는 맥락의 말을 했다. 아버지랑 열탕에 몸을 담그고 매주 일요일마다 목욕탕에 가던 어린날을 떠올렸다. '응답하라 1988' 같은 것. 그때는 어지간한 집은 다들 일요일에 목욕탕에 갔기에 목욕탕에서 친구들을 만나기도 했다. 아버지는 비누칠도 어설펐다. 45세의 크리스마스 이브에 71세 아버지 몸에 비누칠 해준 걸 기억해둔다.

 아버지랑 순대국도 먹고 만두도 먹고 한우소머리곰탕도 먹었다. 아버지는 머핀도 먹고 두유도 먹었다. 아버지에게 내년에는 요양원에 가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무슨말인지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거기도 사람들이 많은지, 같은 걸 물어보고는 니 알아서 하라고 했다. 아버지는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 내일 학교(데이케어센터)에 가는지 계속 물었다. 나는 그냥 기계적으로 같은 대답을 하고 아버지는 같은 말을 또 묻고의 반복이다. 아버지는 니가 고생이 많다는 얘기도 반복해서 했다. 아버지랑 이런 얘기를 나눌때 마음이 찢어지는 정도는 아닌데, 충분히 상처받는다.

 아버지 집에서 잉글랜드 프로축구 하이라이트랑 영화 러브 액츄얼리를 봤다. 잉글랜드 축구는 빡세고, 러브 액츄얼리는 늘 사랑스럽다. 삶은 빡세고 사랑스럽다. 아버지랑 같이 있을 때, 대학 후배한테 전화가 왔다. 명절이라 전화했다고 했다. 고마운 일이다. 내 말투의 기계같은 면 때문에 후배가 '형, AI에요?' 물었지만 정말 고맙다. 날 생각해서 먼저 전화를 해준거니까. 내가 좋아하는 형 중에 한 명(ys형)은 가끔 내가 전화하면 항상 '일우야 고맙다'고 한다. 나도 후배에게 '고맙다'고 했다. 이런 게 삶의 사랑스러운 면이다. 꼭 먼저 연락줘서 고맙다고 하지 않아도 누군가의 전화를 귀찮게 느끼지 않는 것도 - 때로는 귀찮게 느끼더라도 - 삶의 사랑스러운 면이다. 20대 중반에 친구들 전화 잘 안 받은 적 있는데, 그때 아버지가 니 생각해서 전화하는데 널 생각한다는 게 고마운 일이니 친구들 전화오면 전화 잘 받으라고 나한테 한 마디 한 적 있다. 아버지가 내게 남긴 유일한 삶의 교훈이다. 아버지는 그런 마음으로 살았고 나도 그런 마음으로 산다. 내 전화 잘 받아주는 친구들이 항상 고맙다.

 12월 30일부터 1월 2일까지 아버지랑 함께 한다. 아버지 다시 만날 때까지 아버지한테 별일 없어야 할텐데. 아버지 만나면 목욕탕도 가고 치킨도 순대국도 먹고 병원도 가고 휴대전화도 내 이름으로 새로 장만하려고 한다.

 엇나가지 말고 체념하지 말고 물의를 일으키지 말고 살아야지. 세 개가 같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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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금요일에 의료보험공단에서 전화가 왔다. 공단직원이 치매는 장기요양 5급이라도 시설급여가 가능하다는 얘기를 해줬다. 몰랐다고 알려줘서 고맙다고 금방 신청하겠다고 답했고 오늘 내용변경 신청했다. 팩스 보내고 나서 얼마후에 신청완료 카톡이 왔다. 공단 직원이 장기요양 내용변경신청 어떻게 하라고 했을 때, 나는 되묻지 않고 한 번에 알아들었다. 모든 보호자가 나와 같지는 않을 것이다. 건강보험공단에서 장기요양 등급 담당하는 일은 극한직업이구나, 생각했다.

 아버지는 12일에 봤을 때보다 더 멍해졌다. 만날 때마다 더 멍해진다. 그저 멍한 상태다. 14일에는 데이케어센터에서 돌아온 후에 길을 잃었다. 이번에도 친절한 이웃 덕분에(이번엔 엄마가 사례를 했다고 함) 집에 돌아왔다. 어떤 경로로 길을 잃었는지 모르겠다. 아버지를 보고 아버지 생각을 할 때마다 왜 이렇게 갑자기....란 소용 없는 질문이 반사적으로 튀어 나온다.

 어제 12시에 엄마가 오산 집으로 돌아가고 내가 아버지 집을 나올때까지 4시간 30분 정도 아버지랑 단 둘이 같이 있었다. 아버지 좀 누우세요, 하니 아버지는 누웠고 바로 잠들었다. 잠에서 깬 아버지는 티셔츠 위에 티셔츠를 겹쳐 입으려는 시도를 했다. 왼쪽 팔을 먼저 넣고 티셔츠를 뒤로 돌려서 반대쪽 팔을 넣으려고 시도했다. 재킷이 아니라 티셔츠를. 그 모습을 아버지 뒤에서 10분 정도 지켜보다가 그렇게 입는 옷 아니라고 알려줬다. 화를 내는 말투는 아니었다. 체념하는 말투긴 했다. 체념은 무정함이다. 아버지 치매 확정되고 나서 나와 아버지의 거리는 처음부터 그랬다. 아버지는 내 말을 정확히 못 알아들었지만 옷 입는 시도는 멈췄다. 내가 말 안했으면 한 시간도 그러고 있었을거라 생각한다.

 텔레비젼 켜는데 십 분, 바지 입는데 십 분, 티셔츠 (거꾸로) 입는데 십 분, 두유에 빨대 꽂는 일에 십 분. 아버지의 시간은 이렇게 흐른다.

 엄마는 배 안고프다고 해서 아버지랑 둘이 순대국을 먹었다. 아버지는 먹는 모습도 만날 때마다 어설퍼진다. 그걸 보는 일이 힘들다. 힘들다.

 아버지가 요양원 가는게 맞는건지 모르겠다. 그러자고 결정을 했는데도 모르겠다. 모르겠다.

AND

 어제 인터넷으로 장기요양등급 변경 신청했고 오늘은 아버지 인지검사 날이다. 1년에 한 번 하는 인지검사를 두 달 전에 받았어야 했는데, 스텝에 꼬여서 1년 2개월 만인 오늘 받았다. 강릉에서 8시 30분 기차를 탔고 이대목동병원에 도착했을 때, 검사실 앞에 엄마가 혼자 앉아 있었다. 엄마를 꽤 오랜만에 보는데 포옹도 안 하고 서로 손만 잡았다. 나도 엄마도 아버지 때문에 마음이 지친 영향이다. 사실 아버지 때문에 지치기론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이다. 현재 심장 문제로 이대목동병원에 입원해있는 둘째 이모는 수시로 아버지 오산으로 데려가서 같이 살라는 얘기를 한다. 이모같은 외부 스트레스 요인이 아니더라도 엄마 스스로 갖고 있는 이혼한 전남편에 대한 책임감이 크다. 알지 모르겠지만 아버지 걱정 많이 한다고 나한테 따로 얘기한 적 있었고, 오늘도 아버지 생각하면 잠이 안 온다고 비슷한 맥락의 얘기를 했다. - 엄마, 알아요.

 아버지는 지난 일요일에 길을 잃었다. 한밤중에 어떤 이유로 신정동까지 걸어 갔는지 모르겠다. 오늘 엄마 얘기를 들어보니 엄마랑 아버지가 통화할 때 아버지 주변에 있던 친절한 이웃이 신월1동 파출소를 - 동네에서는 길을 잃어 버리지 않으니까. 혹은 엄마랑 통화 안했으면 어떻게든 걸어서 집으로 돌아왔을지도 모른다. - 목적지로 택시 태워줬다고 한다. 지금은 시도조차 못할 일이지만 예전에 경기도 오산에 혼자 가다가 지하철인지 버스인지 잘못타서 길을 잃은 적이 한 번 있다. 아버지가 치매 걸리고 길을 잃은 게 엊그제 케이스까지 공식적으로 두 번이다. 기록해둔다. 걱정된다.

 인지검사 선생님이랑 상담하고 - 인지검사 선생님이 갑자기 보호자가 바뀐일로 당황하길래, 저 아주머니는 이혼한 전처라고 말해줬다. - 셋이 병원 근처 식당에서 밥을 먹었다. 셋이 밥 먹을 때마다 아버지랑 엄마 이혼하던 날 생각이 난다. 셋이 밥 먹는 거 오랜만인데 별 감흥이 없었다. 나랑 엄마랑 둘 다 아버지에게 지친 탓이다. 엄마가 맛없다 해서 그런지 맛있게 먹은 내 결론도 맛 없는 한 끼였던 게 됐다. - 엄마의 말 한마디, 그 영향력을 생각한다. - 나는 아버지에게 배부르면 그만 드시라고 했고 엄마는 그 반대였다. 아버지는 처음엔 배 부르다고 밥을 남겼다가 엄마 얘기에 꾹꾹 눌러담은 밥 한 공기를 다 먹었다. 이게 더 깊은 애착의 힘인가?

 밥 먹고 아버지 담당 선생님 만났다. 의사는 아버지의 인지능력이 급격히 나빠진 것에 대해 우려를 표하면서 머리 mri를 찍고 결과를 본 후 약을 바꿔보자고 했다. 1년에 3점 정도 떨어지면 보통이라고 하는 30점 만점짜리 인지검사에서 오늘 아버지는 9점을 받았다. 2년 전에는 19점. 1년 전에는 17점이었다. 의사 선생님이 아버지의 치매 치료(?)에도 건강보험 산정특례를 적용해줬다. 우리 아버지, 나도 엄마도 모르는 사이에 작년 이맘때보다 훨씬 이름없는 식물같은 사람이 됐네. mri는 오늘 못 찍고 촬영 동의서만 썼다. 19일 아침 7시 30분에 촬영인데, 동생이 시간 된다고 해서 동생에게 맡겼다. 다행이다. 오늘은 피검사 소변검사 심전도 검사를 순서대로 했다.

 검사실 옮겨 다니다가 아버지 가방이랑 목도리를 엠알아이 촬영 동의서 쓴 곳에 두고 왔다. 그 사이에 아버지 약 사러 갔던 엄마는 신용카드를 약국에 두고 왔다. 두 건 다 빨리 알아채고 찾아오긴 했지만 누가 누굴 돌보는건지, 심각하다.

 병원 나와서 오목교역 근처에 신한투자증권에 갔다. 엄마가 갖고 있는 증권계좌 정리가 목적이다. 엄마가 창구 직원에게 증권계좌가 있는 유래에 대해서 구구절절 설명하려고 하길래, 내가 이 사람(엄마) 명의로 증권계좌가 있는지 있다면 정리하고 싶다고 말했고, 그 다음 진행은 일사천리였다. 오늘 한 일 중에 꽤 잘한일이다. 오래전에 집에 돈이 하나도 없을 때, 동생 등록금 마련한다고 80년대부터 갖고 있던 포항제철 주식 팔기 위해서 증권회사에 엄마랑 같이 온 적 있다. 그때 생각이 났다. 그때 포철주식 판 돈이 딱 동생 등록금이 었다고 엄마가 말해줬다. 그때 엄마 나이가 지금 내 나이보다 어리다.

 엄마는 이모가 입원해있는 병원으로 돌아가고 나는 아버지를 데이케어센터에 데려다줬다. 기차 시간이 남아서 친구한테 들렀다. 이 친구 엄마가 우리 엄마랑 동갑인데, 폐에 종양이 두 개 있고 두 달 후에 그 종양이 얼마나 커지는지 봐야 암인지 아닌지 알 수 있다고 한다. 나이 먹고 손상되는 내장을 생각한다. 손상되지 않는 삶이란 무엇인가? 나도 가끔 위축성 위염이 찾아오면 소화가 안되는 기분과 함께 가슴이 답답한 증상이 온다.

 낮에 만난 친구한테만 얘기하고 말까하다가 여기 적는다. 아버지 소변검사 하는데, 오래 걸렸다. 좌변기가 있는 화장실 한 칸에 들어가서 내가 시범을 보여주고 나서도 한참 후에야 아버지가 소변검사를 이해했다. 아버지랑 나랑 음경 모양이 닮았다. 씨발 핏줄. 이런 생각을 했다. 친구 아버지는 돌아가신지가 10년이 넘었는데, 친구도 어느날 아버지랑 본인 음경이 닮은 걸 알았다고 한다. 씨발 핏줄. 한 번 더 생각했다.    

 청량리역에 앉아서 쓰다가 집에 돌아와서 마저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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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서울 와서 데이케어센터에 내년도 센터 이용 계약서랑 아버지 투약 의뢰서 등 서류 몇 가지 전달하고 센터 선생님 한 분과 면담 시간을 가졌다. 이 선생님은 아버지에게 굉장히 호감을 갖고 계신 선생님이고 센터에서 간호부장이다. 요즘은 아버지 면도도 직접 해주신다. 아버지도 키 큰 선생님이라고 하면서 자주 언급했더랬다. 센터에서는 당연하게도 최근 몇 달 사이에 아버지의 인지능력이 급격히 나빠진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장기요양등급을 4등급으로 받고 요양원으로 모셔야 할 것 같다고 했다. 아버지의 신체는 여전히 요양원에서 살기에는 너무 건강하지만 내 결정 혹은 결심은 세상에 흔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저녁엔 친구 만나서 한 잔 했다. 처음 들어갔던 술집에 가방을 두고 와서 그 가방을 찾아둔 친구를 오늘 아침에 다시 한 번 만났다. 아침부터 버스랑 지하철을 갈아타고 한참 걸어서 경기도 부천에 있는 친구네 집까지 찾아가는 일이 번거롭게 느껴지지 않았다. 어른이 되서 여유가 생긴건가? 어젯밤이랑 오늘 아침엔 모텔 욕실에 있는 욕조에 몸을 담갔다. 오랜만에 포근함. 하룻밤 4만원 짜리 방에 욕조가 있는 게 맞나? 잠깐 생각했다. 물론 오래된 모텔이고 방도 후지긴 하다.

 오늘 오후엔 센터에서 아버지 모시고 와서 아버지랑 순살 닭 튀김도 먹고 축구도 봤다. 오늘은 달콤한 양념이 묻은 치킨을 시키는 실수를 하진 않았다. 다만 맛이 별로 없었기에 다음번엔 브랜드 치킨을 한 번 시켜 드려야지, 생각했다. 아버지는 닭을 맛있게 먹었다. - 물론 먹는 모습이 점점 어색해지고 있다. - 콜라는 나 한 모금 아버지 한 모금 먹고 싱크대에 버렸다. 잘한 일이다. 아버지는 축구를 집중해서 못 봤고 내가 뭔가를 얘기하면 다른 얘기만 했다. 내일 엄마가 온다는 얘기를 50번 정도 해줬다. 얼마전엔 본인 전화번호를 묻길래 100번 넘게 얘기해줬다. 집에 들어오는 도어락 비번을 순간 잊어서 센터에서 돌아와서 집에 늦게 들어오게 됐고 그것 때문에 번호를 물었으리라 추론해 볼 뿐이다. 우리 아버지는 무얼로 사는거지? 어떤 의미로는 살아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 어제 '계산된 삶' 을 읽었고 지금은 '수확자들'을 읽고 있어서 이런 생각을 한 거겠지. 살아 있으면 살아야 해서 사람이다.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말자.

 다음주엔 서울에 두 번 와야되고 그 다음주에도 그 다음주에도 서울에 온다. 약간 힘든데, 번거롭게 느껴지진 않는다. 나이 먹어서 그런게 아니고 아버지를 제외한 나머지 내 삶이 매우 심플하기 때문에 그리고 수시로 서울에 올라오는 일이 머잖아 끝날 것을 알기에 그렇다는 걸 안다.

 아버지가 나랑 엄마랑 센터 선생님들 빼고는 다 잊어가는 것 같기에 동생에게 아버지가 너를 잊는 것 같으니 수시로 전화 하라한 게 삼 주 전이다. 아버지 전화기 통화 목록을 쭉 들여다 봤는데, 아버지 친구 한 명은 며칠전의 통화기록에 이름이 있는데 동생 이름은 쭉 없었다. 동생은 나보다 번잡한 삶을 사니까, 아이 두 명 키우는 게 힘들겠지, 생각했다. 그래도 섭섭한 마음이 있다. 아버지랑 친했던 건 내가 아니라 동생인데.

 아버지는 삼 주 전보다 더 멍해졌지만 아직? 나를 잊지는 않았다. 본인 아이를 잊는다는 건 본인 아이를 잃는 일만큼이나 심각하구나 생각해본다. 아버지 저를 오래 기억해 주세요. 엄마는 저보다는 더 오래 기억해 주시고.

 청량리에서 강릉 가는 표를 끊았다고 생각했는데, 강릉발 기차표를 끊었기에 환불 후 강릉가는 기차표 예매하고 잠깐 비는 시간에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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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박 2일로 서울 다녀왔다. 2박 3일로 갈랬는데, 데이케어센터 선생님과의 면담을 금요일에 전화로 하는 바람에 서울 나들이 일정이 하루 줄었다. 하루만큼 덜 피곤해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먼저 만났을 때 아버지가 맨 얼굴에 일회용 면도기를 갖다 대길래 아버지 집에 있던 일회용 면도기는 다 내 짐가방에 넣고 싸구려 도루코 면도기랑 면도날 4개를 검정 봉지에 담아서 데이케어센터 들어가는 문에 묶어뒀다.
 아버지가 빨대 꽂아 먹는 두유를 잘 못 먹길래, 쉽게 먹을 수 있는 다른 음료를 찾아보려 했는데 마땅치 않아서 빨대가 딸려있는 베지밀b를 사놓고 아버지한테 빨대 꽂아서 하나 드렸다. 두유를 먹던 아버지는 빨대가 두유팩에서 절반정도 빠져나오니까 먹기를 멈췄고 나는 빨대 끝이 두유팩 바닥에 닿도록 조치한 다음 아버지가 다 먹도록 유도했다. 아버지가 단 걸 좋아하는 거 같아서 베지밀 a가 아니라 b를 골랐다.
 토요일에 아버지 집에 도착했을 때, 아버지가 믹스커피 두 봉지를 찬물에 타고 있길래 물 끓여서 한 잔 타드리고 다음날도 한 잔 타줬다. 단 음식이 당기는 건가, 생각했다.
 자주 가는 순대국 집에서 밥을 먹었다. 남자 사장님이 전부터 지켜봤는데 아드님이 아버지한테 참 잘한다고 하면서, 본인은 저녁에 아들이랑 한 진 해야겠다며 말을 걸었다. 이버지가 치매고 요즘 많이 안 좋다고 간략하게 대꾸해줬다. 내가 아버지한테 하는 차분한 말투가 이 아저씨에게 좋게 느껴졌으리라. 우리한테 말 안 걸었으면 좋았을텐데. 다음번에 또 이 집에 갈 수 있을까? 원래 가려고 했던 청국장 집이 휴무였을 때부터 스텝이 꼬였다.
 아버지가 치킨을 먹고 싶어한다는 걸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기에 배달앱에 이버지집 주소 저장하고 치킨 시켜먹었다. 일반 순살 후라이드를 시켰다고 생각햤는데 했는데, 치킨에서 단맛이 났다. 실수다. 아버지는 오랜만에 먹는다면서 맛있게 먹었다. 어설프게 먹는 아버지 모습을 보면서 순살을 시키길 잘했단 생각을 했다. 아버지, 다음엔 짭짤한 걸로 먹자구요. 아버지는 오랜만이라거 하면서 콜라도 맛있게 먹았다.
 나는 누워서 웹툰을 보고 아버지는 쉴 새 없이 떠들었다. 나는 중간중간 그러냐고 대꾸를 했다. 아버지가 무슨 얘기하려는 건지 잘 모르니 대답이 더 건성이 된다. 아버지는 내 대답이 건성인 걸 모르니 계속 얘기했다. - 돈 들고 튄 계주가 제주도에서 붙잡힌 스토리 같았다 - 다음엔 집중해서 들어봐야겠다.
 아버지가 잠깐 자는 동안 나는 침대 아래 누워서 웹툰을 봤고 내가 잠깐 자는 동안 아버지는 집안을 끝없이 돌아다니면서 뭔가 정리를 했다.
 이틀동안 아버지는 딱 한 번 나한테 큰 소리를 냈다. 집에 들어와서 현관문을 잠그지 않으니 바람에 자꾸 문이 열린다고 도어락에 달린 동그란 버튼 눌러서 문 잠그라고 했더니 그걸 모르는 사람이 어딨냐면서 나한테 화를냈다. 먼저 방에 오줌 눴을 때도 그랬었지. 말 조심해야겠다.
 아버지는 옷 갈아 입는다는 개념을 잊었다. 먹고 싶어서 라면과 커피믹스를 샀지만 물 끓이는 걸 모른다. 물 끓일줄 몰라서 차라리 다행이다. 순대국이 충분히 짰는데, 밥 한 숟갈 먹고 아버지의 젓가락은 자꾸 양파 찍어 먹으라고 준 된장을 향했다. 여전히 집애서 신발을 신고 있으려고 한다. 짧은 미국 생활의 영향이다. 옷을 타이트하게 입고 싶어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그 이유는 모르겠다. 동생이 연락을 자주하지 않아서 그런지 어떤 때는 본인 작은 아이의 존재를 잊은듯 보였다. 아버지가 요양원에 가면 나보다 동생쪽이 상심이 클테니 연락 자주 하라고 해야겠다. 이런 생각도 나만의 착각이려나?

 나랑 있을 때 뭐라도 자꾸 떠드는 아버지는 안심이다. 평소에 얼마나 외롭겠나. 통화할 때 자꾸 언제 오냐고 보고 싶다고 한다. 치매가 오고 나서야 발현된 아버지의 진심이 두렵기도 하지만 나를 보고 싶어힌다는 건 날 잊지 않은거라 안심 쪽이 두려움보다 크다.

 이번 주말이랑 다음 주말엔 엄마가 아버지한테 간다고 하는데, 내가 힘들까봐 아버지한테 가는 엄마가 치매 아버지보다 더 걱정이다.

 운동과 술로 스트레스를 푼다. 8시에 퇴근하고 운동왔다. 했던 얘기 또 하고 또 하고 또 하는 아버지처럼 끝없이 반복되는 계단 위에서 계단 구르는 속도를 올렸다 늦췄다 하면서 쓴다.

돈 4억 5천 8백이 이렇게 너저지분한 세상을 나는 살고 아버지는 잊고 산다.

 

AND

 1박 2일로 서울 다녀왔다.

 아버지는
전복죽을 잘 먹었다. 매운 순대국을 반 정도만 먹었다. 추어탕을 아주 맛있다고 하면서 먹었다. 한 개에 천 원하는 시장 빵집 머핀을 단 거라 하면서 맛있게 먹었다. 두유를 먹는데, 빨대를 꽂을 줄 몰랐다. 혼자 있을 때는 이리저리 해보다가 결국 빨대를 꽂아 먹긴 하는 것 같다. 청바지가 입고 싶다고 하면서 츄리닝 위에 청바지를 입었다. 바지를 벗으라는 말을 못 알아들었다. 자크 올리라 했는데, 자크가 뭔지 몰랐다. 청바지 단추를 못 채워서 내가 도와줬다. 먼저 입던 바지에 있던 허리띠를 갈아입은 바지로 옮기지 못했다. 이건 혼자 있을 때 이리저리 해봐도 못했을 것 같다. 틀니 끼우는데, 1분이상 걸렸다. 반팔 입고 밖에 나가려고 했다. 물론 날이 춥진 않았다. 살아야지,란 말을 또 했다. 요양원에서 사는 것도 사는 건가 생각했다. 머리빗을 구두주걱으로 쓰려고 했다. 친구에게 전화 해본다고 하면서 티비 리모콘을 집어 들었다. 일회용 면도기를 맨 얼굴에 들이댔다. 비눗물을 얼굴에 묻히고 면도하라고 했는데, 비눗물이 뭔지 잘 못 알아 듣는 것 같았다. 며느리를 사모님이라 했다. 이름을 잊어서 그런가보다. 오늘 아침에 본인 피를 빨아 먹고 퉁퉁해진 모기를 10마리 이상 잡았다. 모기가 피 빨아 먹은 것에 대해서 뭐 어떠냐고 했다. 아침엔 8시에 일어났고 낮잠을 자지 않았다. 그리고 엄마는 언제 오는지 자꾸 물었다.

 아버지는
나에게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이 있다. 아직 내 이름을 잊지 않았다.

 나는
많이 피곤하다. 내일 출근하기 싫다.  

아버지 집 티비 다이 아래. 쓰지는 않는데 예뻐서 이렇게 해 놨다고, 보기에 좋더라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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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요일에 아버지 만나러 갔다가 일요일에 돌아왔다.

 2주 전과 비교해보면 아버지는 변한게 없다. 더 나빠질 거리가 얼마든지 있는데, 변한 게 없다는 건 좋은 거다. 강릉에 사는 아버지 사촌 누나가 - 나한테는 오촌 고모 - 치매에 걸렸단 소식을 들었다. 고모는 무서워서 집에서 못자고 옆집에 가서 재워달라 하고 - 옆집에서 몇 번 재워줬다 함 - 손가방에 들어있는 물건들을 꺼냈다 넣었다하길 반복한다고 한다. 아버지는 갑자기 길을 잃어버리는 사람이 될 수도 있고 한겨울에 반바지를 입고 외출을 하는 사람이 될 수도, 먼저처럼 집 안 아무데나 오줌을 누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 치매가 무섭다.

 토요일 저녁에 전복죽을 맛있게 드시길래 기분이 좋았다. 일요일 오전에 혼자서 계속 횡설수설 얘기해서 들어드렸다. 무슨말을 하려는지 알 때도 있고 전혀 모르겠는 때도 있다. 외로운 우리 아버지 계속 떠드시라고 계속 추임새를 넣어드렸다. 점심에 무한리필 고깃집에 갔다. 일반 삼겹살 집에 갔어도 괜찮지만 어쩐지 아버지랑 무한리필 고깃집에 한 번은 가고 싶었다. 내 욕심이다. 아버지 접시 위에 올려 놓은 갈비를 맛있다고 하면서 잘 드셨다. 위암 수술 끝나고 6개월 지난 이후로는 먹는 양이 조금 늘어난 거 같기도 하다. 
 
 점심 먹고 서서울호수공원을 걸었다. 아버지가 기분이 좋은지 뭐라뭐라 계속 얘기하길래 계속 추임새 넣어드렸다. 왼손, 오른손 바꿔가며 아버지 손을 잡고 걸었다. 공원에는 연인들, 가족들, 강아지랑 나온 사람, 텐트 안에서 쉬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랑 아버지도 가족들 범주에 포함된다. 아버지가 치매에 걸리는 바람에 뒤늦게 아버지랑 일상적이라고 할 수 있는 - 또는 일반적인 -  공원 산책 같은 걸 해본다. 밥을 같이 먹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 와중에 엄마는 약간 소외되고 - 엄마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 사는게 쉽지가 않다.
 
 12월 초에 아버지 인지검사가 있다. 인지검사 전에 장기요양등급 4등급 받는 건으로 데이케어센터 선생님들과 상담을 하고 4등급을 받게 된다면 '재가'  등급을 ' 요양' 등급으로 변경 신청해서 아버지를 요양원으로 보내는 게 가장 현실적인 선택이다. 가장 좋은 선택은 아버지가 나랑 같이 살면서 주간보호시설에 나가는 일이고 그 다음 좋은 선택은 내가 매주 토요일마다 아버지를 만나러 가서 일요일에 돌아오는 것이다. 강릉과 서울은 가깝고도 먼 거리다. 아버지는 혼자서는 지내기 어려운 사람이 됐지만 누군가 옆에 있기만 하다면 요양원에 갈 정도는 아닌 상태다.
 
 최후 또는 최종 선택으로 아버지가 요양원에 간다면 나는 아버지를 자주 찾아가진 않을거다. 내 역할은 거기까지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아버지를 요양원으로 보내는 선택이 꺼려지는 건 누군가 옆에 있으면 괜찮을 거 같은 아버지를 바라보는 자식의 정이다. 아직까진 아버지가 나랑 엄마는 알아보니까 젓가락질도 잘 하니까 맛있는 걸 먹으면 맛있다고 하니까. 공원 산책 중에 나무 사진을 찍는 나에게 나도 그거 해달라고 하니까. 거의 모든 명사와 이름을 잊었고 며느리를 사모님이라고 하지만 어떤날은 정신이 맑은 것 같기도 하니까. 답을 알지만 아직 시간이 남아 있으니까.  2번째 정답인 강릉이사를 추진할까? 답에 체크를 하지 않고 이리저리 머리만 굴리고 있다.

나도 그거 해달라해서 찍은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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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박 2일 아버지랑 같이 있다가 헤어지고 인생 첫서브웨이 샌드위치를 먹은 날, - 짰다. 앞으로 안 먹을 듯 - 청량리역에서 강릉가는 ktx 기다리면서 쓴다.

 어제 아버지가 냉장고 좌측 구석 커피 믹스 상자에 오줌 눈 걸 발견했다. 위쪽을 벗겨놓은 커피 믹스 상자를 요강으로 착각한걸까? 엄마도 같은 자리에서 한 번 목격 했다고 했으니 아버지가 화장실이 아닌 곳에 오줌 눈 게 확인된 것만 두 번째다. 오줌 닦아내고 세제로 장판 닦고 커피믹스 80개 정도를 수돗물에 헹구면서 '아버지, 화 내는 게 아니에요, 오줌을 화장실에 눠야지 여기다 누면 어떡해요.' 계속 떠들었다. 아버지는 본인이 그럴일이 없다면서 바락바락 우기다가 아버지 혼자 사는 집에 아버지가 아니면 누가 그러냐는 내 얘기를 듣고 우기기를 멈췄다. - 나랑 아버지랑 같이 멈췄다고 봐야겠지. - 아버지가 오줌 싼 자리에 식탁을 집어 넣었다. 엎으려 들어가지 않으면 그 자리에 갈수 없으니 앞으로 그 자리엔 오줌 누지 않길 바란다. 내 바람대로 됐으면 좋겠다. 락스+ 페브리즈, 엊저녁부터 창문을 열어뒀음에도 오늘 오후에 아버지 집을 나올 때까지 아버지 집에서는 찌린내가 났다.

 어제 저녁엔 육개장을 먹고 오늘 점심엔 장어를 먹었다. 아버지는 지난주보다 먹는 모습이 더 어설퍼 보였다. 순대국만큼 익숙하지 않아서인가? 아버지는 본인이 뭘 먹는줄도 모르는데, 장어를 먹을 때보다 기본으로 나온 된장국에 밥 말아서 먹는 게 더 편해 보이는데, 장어집에 간 건 아버지랑 같이 먹은 가짓수를 늘리기 위한 내 욕심일 뿐인가, 생각했다. 장어 구워주던 아주머니가 아버지랑 내 대화를 듣고 이버지가 치매인 걸 알았고 나랑 눈 마주쳤을 때 서로 얼굴로만 웃었다. 앞으로 아버지랑은 순대국만 먹기로 한다. 아버지는 치매 걸린 이후로 밥 먹을 때 냅킨을 콧구멍에 자꾸 갖다댄다. 콧물이 흐른다고 느끼기 때문인데, 실제로 콧물이 나진 않는다. 예전엔 그런가보다 했는데 요즘은 그 모습을 보면 속으로 화가 나기도 한다. 내가 화 날 이유가 있나? 아버지가 알츠하이머성 치매란 게 짜증나서?

 지난 수요일에 술 먹고 아버지랑 통화하다가 아버지한테 짜증을 냈다. 아버지도 목소리를 높였다. 나는 많이 취했기 때문에 언성 높이며 통화했던 이미지만 남았다. 다음날 통화 시간을 확인해 보니 6분이었다. 내가 만취 했을 때의 애증 시간. 아버지와 나의 거리. 고작 6분. 다음날 아침에 아버지가 어제 본인이 화를 낸 것 같다고 하길래. 그런 일 없고 다 괜찮고 잘 하고 있다고 했다. 아버지에게도 본인이 언성을 높인 이미지는 남아 있었나보다. 아버지는 그 통화를 영영 잊었지만 나는 여기에 기록으로 남겨 놓으니 영영 잊지 못할지도 모른다.

 아버지 상태가 점점 안 좋아지기 때문에 일요일에도 돌봄 서비스를 하는 데이케어센터를 알아봤는데 좀 더 적극적으로 알아봐야겠다. 요양병원은 아직 너무 이르다. 엄마랑은 계속 얘기 중이고 동생에게도 이런 상황을 전달했다. 근데 어쩌면 요양병원이 이르지 않은건지도 모른다. 이것저것 많이 알아봐야겠다.

 장어 먹고 아버지랑 한참 걸었다. 아버지가 이런저런 얘기를 혼자서 떠들다가 '이렇게 살아 뭐하나 생각이 들지만 살아야지.' 라고 했다. 왜 살아야 되는데요? 물으니 대답을 못하길래. 살았으니까 살아야지요. 했다. 아버지가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게 약간 놀라웠다. 내가 살아야 한다는 글을 많이 쓰는 게 아버지 유전인가? c8 유전자.

 아버지랑 한 동네 사는 아버지 친구가 한 명 있는다. - 아버지한테 잘해주는 정말 고마운 아저씨다. - 아버지가 그 아저씨 얘기를 자꾸 하면서 전화도 안 한다면서 짜증을 냈다. 그러면서 지갑이랑 텔레비젼 리모콘을 번갈아 들면서 여기서 찾으면 된다고 했다. 휴대폰이 어떻게 생긴건지도 모르는 사람이 된 아버지 전화기로 그 아저씨한테 전화했다. 잠깐 통화하더니 친구한테 간다고 해서 나도 아버지 집을 나왔다. 그게 오후 세시다. 아버지 친구도 아버지한테 많이 지쳤을텐데. 그래도 가끔 아보지를 들여다 봐주시니 고맙다.

 우리 아버지는 정신이 나갔고 외롭고 살고 싶다.

 어제 집을 나와서 강릉역 가는 길에 비가 시작됐다. 서울가면 비 안오겠지 싶어서 비 맞고 15분을 빠르게 걸었다. 청량리역에 내렸을 때 비가 오지 않았다. 굿. 아버지는 이런 판단을 하지 않는 사람이 됐지. 오래전에.

 오늘 아침에 서서울호수공원을 계통없이 돌았다. 공원 사이즈랑 조경을 보면서 돈이 좋구나 서울이 좋구나 같은 걸 생각했다. 미루나무를 잊고 싶지 않아서 바닥에 떨어진 미루나무 잎을 찍었다. 한 친구에게 가을이 무슨색인지 물으니 낙엽색이라 했다. 나도 이미 낙엽의 나이다. 그럼 우리 아버지는 부서진 낙엽인가? 공원을 나와서 스벅에서 라떼를 마셨다. 스벅 회장이 극렬한 시오니스트라는데, 내가 이래도 되나 싶었지만 살아야지, 정신에 따라서 그냥 먹었다.

 일요일 아침. 한적한 찻집에서 커피를 마시며 전쟁도 인생도 사랑도 세상 모든 것이 끝이 언제일진 모르지만 끝이 있다는 건 안다는 일에 대해서 생각했다.

미루나무 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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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집에 오랜만에 왔다. 내가 담배 사러 나갔다 온 사이에 잠든 아버지 침대 옆에 누워서 쓴다.

어젯밤에 아시안 게임 야구랑 축구에서 한국이 금메달을 땄고 밤 사이에 중동에선 전쟁이 났다. 전 세계에 큰 전쟁이 두 개인 어지러운 세상이다. 나를 제외한 전 인류가 치매에 걸린 세상을 생각해본다. 아버지 때문에 스트레스 받아서 그렇다.

추석 연휴에 집에서 혼자 쉬었다. 아내는 영국에 갔고 엄마도 아버지도 연휴 다음주에 만나기로 마음 먹었기 때문이다. 가족이라는 책임감에서 잠시 떨어져있고 싶었다.

어제 엄마 집에 갔다. 오산 터미널에 내려서 엄마집까지 1.2킬로미터 정도를 걸었다. 오산은 중국 사람들의 도시다. 돈 벌어서 건물을 산 사람도 많다고 한다. 수 많은 양꼬치집과 젊은 외국인 여자가 그려진 다방과 술집, 미용실 간판을 보면서 오산은 한동안 인구가 줄어드는 문제는 없겠구나 생각했다. 중국도 저출산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으니 그것도 길진 않겠다. 그리고 대로변에 데이케어센터가 많이 보였다. 치매 문재는 전국 공통이다. 오랜만에 엄마 만나서 엄마가 차려준 저녁밥을 먹었다. 엄마 앞에서는 더 잘 먹어야 된다는 생각이 있다. 엄마는 65살 치곤 많이 늙었다. 젊어서 고생한 결과다. 그 결과물을 투자 실패로 절반 가까이 날리게 생겼다. 그 마음 고생으로 최근에 더 늙었다. 아이고 우리 엄마.

아침에 아버지한테 왔다. 어제 아침엔 통화를 했는데, 오후엔 전화가 안됐다. 단순히 전화기가 꺼진 거였으면 좋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아버지는 전화기에서 유심을 빼버렸다. 온 집안을 샅샅이 뒤지면서 10리터 쓰레기 봉투 다섯 개를 소비하고 쓰레기통까지 뒤졌지만 못 찾았다. 티월드에 가서 유심 다시 받으려 했는데 신분증이 없어서 안된다. - 티월드 네 군데를 돌았는데 연휴라 문을 안 열었고 마지막엔 전화 해보고서 영업중인 곳에 방문했다. - 다행인 건,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아버지 신분증을 엄마가 갖고 있다는 것이다. 10일이 아버지 병원 가는 날이다. 유심 문제는 그날 엄마가 진행하면 된다. 나는 조만간 평일 휴가 쓰고 서울 와서 아버지 핸드폰 해지하고 내 명의로 알뜰폰 개통해서 아버지한테 주기로 마음 먹었다. 치매에 걸린다는 건 본인 명의가 점점 없어지는 일이다.

아버지는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사람이 됐다. 내가 주말마다 올라오거나 일요일에도 운영하는 데이케어센터로 옮겨야 한다. 당분간 내가 주말마다 올라오면서 새로운 센터를 알아봐야 한다. 강릉에 일요일에도 운영하는 센터가 있다면  아버지 이사를 추진하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다.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사람이 된 아버지는,
뭐가 뭔지 모른다. 머리빗을 구두주걱으로 쓴다. 남의 말을 더 안 듣게 됐다. 한 음절씩 인지시켜도 문장을 이해할까 말까다.일상적인 대화가 불가능한 사람이 됐다. 점심 먹다가 이마가 왜 까졌냐 물으니 자동으로라고 대답했다. 티비로 프로 축구를 보는데 공이 어디 있는지는 모르고 유니폼 색깔만 하얀거 파란거 하면서 말했다. 아버지가 하얀거라 한 유니폼 색깔은 빨강이었다.
긍정적인 건, 많은 이름을 잊었지만 내 이름은 잊지 않았고 사람들 얼굴은 잊지 않았다는 것과 지금 사는 신월동에선 길을 잃어버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축구 보다가 '축구는 전쟁이다' 라고 쓴 플래카드가 화면에 잡히니까 따라 읽었다. 그러니까 한글 읽는 법을 잊지 않았다.

오늘 저녁까지 같이 먹고 강릉으로 돌아오려 했는데, 내일 점심까지 같이 먹기로 했다. 오늘 기차표를 취소하고 내일 기차표를 끊었다. 아내에게 아버지의 9월 전기요금 고지서를 찍어 보냈다. 요금 계좌이체 때문이다. 이런 별것 아닌 일들이 다 스트레스다. 어제 신었던 양말 오늘도 신길 다행이라 했더니 아내가 웃었다. 그걸로 오늘 최고의 위로를 받았다.

아버지 만날 때마다 너무 힘드네.

순댓국집 아버지. 뭔가를 먹는 동작도 많이 어설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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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말에 아버지 만나고 왔다. 먼저 만났을 때보다 더 수척해졌다. 위암 수술 영향일 뿐 몸에 어떤 문제가 있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밥을 먹는데, 억지로 다 드실 필요 없다는 말을 자꾸하게 되고 아버지도 알았다고 하면서 억지로 다 먹지는 않는다. 이렇게 대화가 통하는 일은 좋다. '아버지, 조기 축구 사람들 중에 아버지 좋아하는 사람이 없으니까 일요일에 심심해도 거기 가지 마세요.' 본인도 그 사실을 알고 알았다고는 하지만 다음주 일요일에 아버지는 거기 또 가겠지. 이것도 대화는 통화는 일인가? 아버지가 밥을 많이 남기기 때문인지 나도 억지로 다 먹지 않는다. 나도 올해들어 먹는 양이 좀 줄었다. 여전히 술 마실 때는 많이 먹게 되지만 어렸을 때 많이 먹던 것 생각하면서 배가 터지도록 먹지 않아도 금방 배가 부르다. 나이 먹어서 그렇다. 곧 마흔 다섯이 된다. 아버지가 마흔 다섯이었던 건 1997년 정도인가.

 우리집은 90년대 초반엔 이미 돌이킬 수 없게 망했고 97년 말에 IMF 사태가 났고 나는 98년 1월에 군대를 갔다. 아버지는 대충 마흔 살 즈음부터 수입이 없었네. 지금 마흔 살은 굉장히 팔팔한 이미지지만 - 40대 초반에 첫 결혼을 하는 사람들도 많으니까. - 아버지 세대의 마흔 살은 뭔가를 새롭게 시도하지 않을 나이였을 것 같다. 아버지 나름대로는 어떤 노력이 있었을 거라 생각한다. 
 
 식당을 나가려고 일어서는데, 아버지랑 같이 사는 모습이 그려지지 않았다. 서울로 직장을 옮긴다는 내 계획이 실현된다면 신월동에서 대중교통으로 왕복 3시간 20분 출퇴근을 하고 퇴근길에 운동하고 집에 돌아와서 아버지랑 잠깐 대화를 나누고 아버지 간식 챙겨주고 같은 방에서 자고 아침에 씻고 출근하면서 아버지에게 데이케어센터 잘 다녀오시라고 하고 토요일 저녁이랑 일요일에는 아버지랑 호수공원을 산책하기도 하고 맛있는 거 사 먹는 반복. 그 모습이 그려지지 않은 게 아니라 내가 그렇게 살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게 맞다. 아버지를 매일 보는 삶을 내가 감당할 수 없을 것 같다,는 공포 또는 확신.

 그래서 슬퍼졌다. 아내에게 카톡을 보내고 나니 또 슬퍼졌다. 9월 시작하고 달력 넘기자 마자 탁상 달력 9월 22일 칸에 '어일우 연가 쉬고 싶다' 라고 적어 뒀는데, 마흔 다섯의 나는  진짜로 좀 쉬고 싶다.

아버지는 치매 걸리기 전에도 아기 같이 해맑은 구석이 있었고 지금도 그렇다. 직접 보고 왔지만 사진으로 봐도 건강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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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 집 벽에 5월까지는 커다란 달력이 걸려 있었다. 날짜, 요일 개념은 없지만 아버지가 그 달력에 동그라미도 치고 '병원' 같은 단어를 적어 두기도 했고 내가 손가락으로 날짜를 가리키면서 오늘은 무슨 요일이라고 하면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6월에 아버지한테 갔을 때, 달력이 없어졌다. 날짜 가는 줄 모르고 한 장씩 찢다가 끝까지 넘어가 버린 것이리라. 새 달력 구해 드려야지 생각은 몇 번 했는데, 그러지 못하고 있다. 없어도 그만인 물건이니 간절하게 생각하지 않는건가? 내 일 아니니까, 란 생각인가?

 일요일 오후에 아버지랑 1시간 통화했다. 이렇게 길게 통화한 경우는 처음이다. 날짜랑 요일, 학교 가는 날, 지금은 밤인지 낮잊지 계속 헷갈려 하길래 계속 알려주면서 얘기 들어줬다. 마지막엔 내 목소리가 살짝 높아지기도 했지만 통화는 온화하게 잘 끝났다. 아버지 얘기를 잘 들어보니까 점심 때 즈음 조기축구 멤버들이 밥 먹는 식당에 혼자 찾아가서 그들과 함께 밥을 먹었고 밥을 먹으면서 그들이 따라주는 술을 마셨고 집에 돌아와서 술기운에 낮잠을 잤는데, 긴 낮잠을 자는 바람에 머릿속에 깊은 혼란이 온 것 같다. 외로워서 그런거다.

 지금 다니는 데이케어센터가 참 좋긴한데, 일요일에도 문을 여는 곳으로 옮겨야 하나, 생각했다.

 내일이 아버지 병원 가는 날이다. 위암 수술 경과를 보게 된다. 벌써 수술하고 6개월이 흘렀다. 올해 초에 정말 힘들었지. 아버지 건강 상태로 봐서 결과는 좋을 것 같다. 오늘 내일 바빠서 동생에게 부탁했는데, 동생이 알겠다고 한 것을 엄마가 본인이 맡겠다고  했고, 동생도 엄마한테는 회사일이 바쁘다고 한 모양이다. 뭔가 기분이 안 좋다. 지난주 토요일에 아버지가 정확한 말로 '준석이 본지 오래됐어.' 했다. 동생은 애도 둘이고 삶이란 건 누구나 다 바쁘지. 그래도 기분이 안 좋다. 서울로 직장 옮기는 걸 계속 추진해야겠다.

 월요일에 출근하자 마자 회사 그만둘까 생각했는데, 순식간에 수요일이다. 다들 그러고 사는거겠지. 근데, 진짜 그만두고 싶다. 다 때려치우고 싶다. 산에 들어가고 싶다는 게 아니라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상태로 가만히 있고 싶다. 그게 직장인들의 주말인건가? 곧 마흔 다섯살이 되는데, 이제야 나도 보통 직장인과 비슷한 생각을 하는건가? 모르겠다.

 어제를 포함해서 최근에 아내한테 두 번 화냈다. 아내가 부탁이란 말로 자꾸 본인 일 심부름을 나한테 시킨다. 어제는 울화가 치밀어서 밤 10시에 와퍼 두 개 시켜 먹었다. 체할뻔했다. 울화가 치미는 사랑이란 말을 가끔 하지만. 나를 폭식으로 몰고가지 마라. 그러지 마라. 그러지 마라. 날 그냥 내버려둬라. 복권 사라는 얘기 말고 내가 너에게 하는 유일한 부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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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에 기차 타고 서울 갔다가 새차 뽑은 거 찾아서 토요일 밤에 내려왔다. 친구들도 만나고 아버지도 만나고 엄마도 잠깐 만나는 일정이었다.

데이케어 센터 선생님들 만나서 아버지 관련 얘기를 주고 받았다. 아버지는 일단 건강하다. 내가 보기에도 센터 선생님들이 보기에도 현재 아버지의 치매는 정체기다. 이 정체기가 쭉 오래 갔으면 좋겠다고 간호부장 선생님이 말했다. 내 마음은 잘 모르겠다. 센터의 간호부장 선생님이 아버지가 처음 센터에 갔을 때부터 아버지에게 많은 신경을 써 준다. 어떤 결이 맞는거겠지. 항상 고맙습니다.

아버지랑 순대국 먹는데, 아버지가 연신 깍두기를 집어 먹으면서 이런거 먹은지가 언젠지 모르겠다고 반복해서 말했다. 데이케어센터 식단표를 보니 배추김치가 80프로 열무김치가 20프로다. 깍두기를 오랜만에 먹은 게 맞다. 아버지가 영 정신줄을 놓은 건 아니라 안심인가? 잘 모르겠다.

사물의 이름을 잊은 것을 시작으로 시작된 아버지의 치매 증상은 최근에 사람 이름도 잊는 것으로 번졌다. 밥 먹으면서 아버지한테 몇 가지 이름을 확인했다. 내 이름, 동생 이름, 엄마 이름은 잊지 않았다. 그리고 나머지 이름은 다 잊었다. 혹시나 싶어서 동생 큰 아이 이름을 물어봤는데, 어호연이란 이름을 잊지 않았다. 아버지 인생에서 마지막으로 외웠을 이름이다. 아버지 인생에서 손주가 태어난 것이 굉장히 큰 사건이었구나, 싶었다. Fucking blood. 혈육…..이란 단어를 떠올렸다.

엄마한테 잠깐 들렀다. 막내 이모 생일이라 함께 밥 먹고 돌아온 둘째 이모랑 이종사촌 동생, 셋째 이모랑 이모부를 만났다. 잠깐 만났으니까 잠깐 대화했고 그 대화가 무탈하게 흘러갔고 약간의 농담과 걱정과 인간에 대한 존중이 섞여 있었다. 운전해서 강릉 돌아오는 차 안에서 어떤 만족감이 있었다. 인간은 서로에 대한 존중 같은 것에서 만족감을 얻는다. 그 존중의 방법이 커뮤니케이션이다.

금요일 밤에 남현이 만났을 때, 예전에 남현이에 대해서 쓴 일기를 보여줬다. - 나도 그런 걸 쓴 줄 몰랐다가 최근에 알게 됐다. - 투박하게 쓴 글인데, 남현이가 좋아했다. 내가 친구에 대한 글을 쓴 게 나에게는 우정의 증명 같은 거고 친구가 그 글을 잃고 좋아한 게 커뮤니케이션을 통한 만족감 같은 거다. 남현이가 지금 만나는 애인 잘 만난거 같다고 얘기했다. 남현이는 내가 빈말 잘 안 하는 걸 아니까, 본인의 연애가 종중 받는걸 느꼈을거라고 생각한다. 선비처럼 살 수는 없지만 욕보다는 좋은 말을 많이 해야지 생각했다.

영일군이 새차 사는 거 전적으로 도와줬다. 영일군은 직업상 자동차랑 관련된 일로 친구들 도와주는 거 좋아하긴 하지만 일정 때문에 술 한잔 못 사주고 내려와서 미안하네. 강릉으로 출발하기 전에 고맙다고 문자 보냈는데, 별 말씀을 답장이 왔고 담에 내가 한 잔 사기로 했다. 영일이가 운동 얘기 자동차 얘기 어린이 얘기하면 나는 맞장구 쳐주면서 들어주는데, 이런 것도 존중의 방법이다. 일단은 워낙 친구니까 뭔 얘기든 다 들어주겠지만.    

31일이 아버지 위암 수술 6개월 경과 건강 검진이다. 월말에 회사에 좀 바쁜일이 있긴한데, 방법을 찾아서 30일 밤에는 올라가 봐야겠지. Fucking blood. 아버지, 금방 또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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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요일에 서울 가서 아버지 집에 들렀다가 에어컨 틀어놓고(7시간 후 꺼짐) 나와서 친구 만났다. 친구 만나던 중에 데이케어센터에서 돌아온 아버지에게 전화와서 '에어컨 건드리지 마시고 내일 아침에 만날거다' 라고 했다. 아버지가 아이처럼 좋아했다. 아버지가 날 만나는 일에 아이처럼 좋아하는 반응을 보일 때, 내 마음에는 커다란 부담과 그와 같은 크기의 안심이 함께 자리한다. 둘 다 무겁다. 일요일 아침에 아버지를 만났다. 에어컨 리모콘에 건전지가 사라졌다. AAA건전지가 들어가는 리모콘인데, AA건전지가 방에 나뒹굴고 있었다. 아버지 옷장을 찾아보니 아버지가 리모콘에서 빼 놓은 AAA건전지가 있었다. 토요일 오후에 아버지는 혼자 에어컨 리모콘을 만지작 거리다가 뭔가 잘 안되서 건전지를 빼고 새 건전지를 사서 끼워보려는 시도까지는 했다, 는 걸 알 수 있다.
 
 아버지가 배고프다 해서 오전 10시에 순대국 먹었다. 아버지가 맛있다고 했다. 아버지는 이번에도 한 그릇 다 먹지는 못했다. 위암 수술의 영향인데, 많이 먹지 않는 편이 좋다고 생각한다. 아버지 뚝배기에서 고기 꺼내서 간장 소스에 찍어드렸더니 맛있다고 하면서 잘 드셨다. 아버지는 소스에서 약간 단맛이 나는 것도 얘기했다. 아버지랑 밥 먹는 건 이 정도면 만족한다. 은행에 가서 돈 찾아서 지갑에 채워드렸다. 지갑에 돈이 없으면 불안한 어떤 사람들의 심리를 정확히는 모르지만 아버지는 카드 쓰는 것보다 현금 쓰는게 익숙하고 카드 쓰다가 카드 잃어버리는 것 보다 현금 쓰는게 나은 것 같다. 슈퍼에 가서 카스타드 케잌이랑 과자 두 가지 골랐다. 과자 중에 '사브레'는 '단거...'라고 하면서 아버지가 골랐다. 
 
 에어컨 9시간 후에 꺼지도록 설정하고 아버지 집을 나왔다. 3시 기차를 탔다. 기차 타기전에 아버지한테 전화해서 에어컨 건드리지 말라고  했다. 아버지는 알았다고 했다. 리모콘을 옷장에 넣어뒀지만 아버지는 금방 찾아낼거다. 아버지가 집에 도착했냐고 하길래, 거의 다 왔다고 했다. 앞으로 두 시간을 더 가야하지만 청량리역까지 왔으니 거의 다 온거다. 어제 저녁이랑 오늘 아침에 아버지랑 통화했다. 아버지는 어제 서울에 갑자기 폭우가 쏟아진 걸 알고 있었다. 에어컨은 건드리지 않았다고 했는데, 진짜 안 건드렸는지는 알 수가 없다. 내가 에어컨에 관해서 물어보니까 자꾸 핸드폰이 주머니에 있다는 얘기를 했다. - 손에 들고 나랑 통화하고 있는데. -
 
 아버지는 에어컨을 정말 좋아하던 사람이다. 그런데, 전기 콘센트에 플러그 꼽는 법도 잊고 리모콘을 다룰 줄도 몰라서 혼자서는 에어컨을 틀지 못한다. 누군가는 딱하다고 할 것이다. 우리 아버지 딱한가? 우리 아버지 딱하네. 사상 최고의 더위에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 더워서 죽는 일을 생각한다. 그게 우리 아버지다. 데이케어센터 선생님들이랑 한 때는 같이 살았던 가족들이 있어서 지독하게 외롭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 아버지 혼자 어떻게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 8월 말에는 병원도 한 번 가야하니 8월에는 아버지를 두 번은 만나야겠다. 그런다고 달라질 건 없지만 그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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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달엔 타이밍이 잘 안 맞아서 아버지를 못 만났다. 이번주 토요일에 올라갔다가 일요일에 내려오는 기차표를 끊어놨다. 아버지 치매 컨디션이 안정적인 것 같아서 하루 세 번 이상 하던 전화통화를 두 번으로 줄였다. 내가 먼저 전화할 때랑 아버지가 먼저 전화할 때가 있는데, 아버지가 먼저 전화할 때가 아버지 컨디션이 더 좋다고 봐야겠지. 최근에는 내가 먼저 전화할 때가 많은데, 그냥 그런가보다 한다.
 
엄마는 2주 전에 아버지한테 다녀왔다. 당신도 아버지 걱정을 많이 하고 있다는 얘기를 나에게 했다. 걱정 좀 덜 했으면 좋겠다고 내가 답했다. 엄마가 아버지에게 신경 쓰는 건 같이 살았던 정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둘째 이모가 자꾸 엄마에게 아버지 돌보란 얘기를 하다고 한다. 내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 한 엄마가 아버지를 돌볼 일은 없을 거니 엄마가 그런 얘기 좀 안 들었으면 좋겠다. 또 언젠가는, 동생이 엄마가.... 어쩌구 저쩌구 하길래 아버지 일에 엄마를 자꾸 연루시키려고 하지 말라고 - 문자로 보냈으니 동생이 내 짜증을 알았을 것 같진 않다. - 했더니 알았다고 했다. 동생은 나에게 섭섭했을까? 아닐거라고 생각한다.
 
어젯밤에 아버지한테 전화가 안 오길래 내가 먼저 전화했더니 통화중이었다. 엄마랑 통화중인가 싶어 5분 후에 다시 전화했다. 둘째 이모가 전화를 받았다. 둘째 이모가 종종 아버지 집을 둘러본다. 아버지 먹을 것을 챙겨준다. 정말 고마운 일이다. 이모가 보일러 전원을 꺼놔서 뜨거운 물이 안나온 관계로 그게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아버지가 몸을 씻지 않았다는 것과 데이케어센터에서 돌아오는 길에 막걸리를 한 병 사왔다고 알려줬다. 엄마한테 그 얘기를 했더니 너무 속상해 했다고 했다. 나는 '이미 끝났는데, 어쩌겠어요.' 라고 했고 이모도 놔둬야지 어쩌겠냐고 했다. 이모랑 전화 끊고 엄마한테 전화할까 하다가 같이 울 것 같아서 전화하지 않았다. 엄마가 엄청 잔소리를 했을테니 아버지가 막거리를 먹진 않았을거다.
 
오늘 아침에 아버지한테 전화해서 막걸리 얘기랑 샤워 얘기를 했다. 아버지는 약간 역정을 내면서 잘 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나는 아버지 말이 끝나자 마자 '저는 아버지 걱정 안해요. 엄마가 걱정하지.' 했다. 아버지가 이모랑 엄마를 싸잡아서 '여자들이.....' 어쩌구 저쩌구 계속 횡설수설하길래 정확하게 알아들을 때까지 '저는 아버지 걱정 안해요'라고 했다. 엄마는 아버지에게 이거해라 저거해라 잔소리를 한다. 나는 아버지에게 잔소리는 안하고 잘하고 있다고만 한다. 엄마는 아버지를 걱정하고 나는 아버지를 걱정하진 않는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것이 사랑이라면 나는 아버지를 사랑하지는 않는 것 같다.

무심결에 나온말에 본심이 있다. 나에게 아버지는 이미 끝난 사람이다. 그런데 나는 왜 아버지에게 전화를 하고 아버지를 만나러 가나? 인류애도 정도 아니다. 연민도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나를 위해선가? 나의 무엇을 위해서? 생각 좀 해봐야겠다.
 
우기 끝나고 이제 여름 시작이지만 아버지의 여름도 나의 여름도 이미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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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곤하다. 지난주에 몰아치는 일정이었다. 충주 출장이 두 번 있었고 두 번째 출장을 마치고는 강릉이 아니라 서울로 갔다. 금요일엔 친구들 만나고 토요일엔 아버지 만났다. 나도 마찬가지지만 친구들은 어떻게든 살고 있다. 그건 아버지도 마찬가지다. 살아있으면 살아야 하는게 인생이라 그렇다.

 아버지는 많이 야위었고 순대국 한 그릇을 70%정도만 먹었다. 위 절제술의 영향이다. 영양제라도 드시게 해야 할까? 종합영양제를 사서 저희 아버지 좀 챙겨주세요, 하고 데이케어센터에 맡기면 아버지가 지금보다는 건강해 보일까? 나이탓도 있겠지만 건강한 70대 초반 아저씨들에 비해서 아버지는 그냥 보기에도 많이 쇠약해 보인다. 아프면 그렇다. 아버지는 코 밑에 수포가 잔뜩 생겼다가 가라앉는 중이었다. 엄마한테 전화해서 물어보니 젊었을 때부터 피곤하면 코 밑에 같은 증상이 있었다고 한다. 독감 후유증이거나 면역저하 같은 것이겠지. - 아버지 낫고 있는 중이니까 얼굴 그만 만지세요.

 지금 같은 페이스로 아버지 몸이 약해지면 2~3년 후에는 요양병원에 가야할 판이다. 그때까지 직장을 서울로 옮겨서 아버지랑 같이 살까, 생각해봤다. 아버지가 뭘 잃어버리거나 어딘가 안 좋거나 할 때마다 둘째 이모한테 부탁할 순 없는일이니까, 아버지 거처를 강릉으로 옮기면 집 나온 아버지가 수시로 길을 잃어버리고 실종된 사람을 찾는 문자에 아버지 이름이 나올까 걱정되니까, 아버지가 요양병원에 들어가면 나는 아버지를 자주 찾아가지 않을 거니까 몇 년 정도 아버지랑 같이 사는 것도 괜찮단 생각이다. 그냥 생각뿐이다. 계획대로 되는 건 거의 없으니까.

 엄마는 악몽을 자주 꿔서 머리맡에 칼을 두고 잘까 생각한다고 한다. 아마 그 원인은 은행직원 말만 듣고 홀랑 가입한 ETF가 반토막이 났기 때문이겠지. 엄마는 예전에도 머리맡에 칼을 두고 자서 두통이 사라진 적 있다고 한다. 걱정이지만 무속신앙 같은 것이라도 의지할 것이 있어서 다행이다. 아버지는 의지할 것이 없다.

 - 아버지 저희 주말에 얼굴 볼거에요.
 - ……..
 - 아버지 제가 토요일에 갈거에요.
 - ……..
 - 아버지 저희 금방 만날거에요.
 - 아이고 좋아라.

 날 만난다고 하니까 아이처럼 아이고 좋아라 하는 아버지를, 본인 때문에 서울 올라오느라 내가 힘든걸 아는 아버지를, 그래도 아버진데 니가 해야지(목적어 없음) 라고 하는 아버지를………

 직장(옮김)도 아버지(거처)도 돈(없음)도 다 어렵다. 이 세 가지가 연결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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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침 6시 30분에 아버지한테 전화왔다. 어제 두 시 넘어서 잤는데. 새벽에 전화 오는 건 흔한일이다. 아버지는 엄마한테도 새벽에 전화를 한다. 엄마는 아버지한테 애 자는데, 왜 전화하냐고 나한테 전화하지 말라고 한다는데, 아버지는 그 말을 듣자마자 잊는 사람이 됐고 나는 새벽 다섯시라도 아버지한테 전화가 오는 쪽이 마음이 놓인다. 아버지는 학교(데이케어센터) 가려고 집 앞 골목에 나와 있다고 했다. ‘아버지 아직 한 시간 반 남았어요. 미리 나가 계시지 마세요.‘  30분 후에 또 전화가 왔다. 같은 말 반복, 30분 후에 또 전화가 왔다. 같은 말 반복. 또 전화오기 전에 내가 먼저 전화했다. ’미리 나가 계시지 마세요.‘ 반복. 일요일 낮에 통화했을 때, 아버지 목소리가 쉬고 있음을 느꼈다. 오늘 아침엔 목이 더 쉬었다. 얼마전에 아버지가 이불을 다 치웠다는 소식을 들었다. 날씨가 변덕인데 아무것도 안 덮고 주무신데다가 보일러도 전기장판도 활용할 줄 모르니 감기는 당연한 결과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일 때문에 충주 본사에 갔다가 오는 길에 데이케어센터에서 전화가 왔다. 아버지 목이 많이 붓고 열이 나는 상황이니 병원에 가봐야 할 것 같다는 내용이다. 일감으로 둘째 이모를 떠올렸다. 엄마를 통해 이모한테 부탁해서 내일 아침에 이모랑 같이 병원에 가는 방안이다. 엄마가 아버지 병원 혼자 갈 수 있다고 해서 센터에 얘기해서 아버지를 일단 병원으로 보냈다. 그 병원 간호사랑 통화하기까지 아버지랑 몇 번의 통화가 오고 갔다. 그 병원은 여전히 불친절하다. - 먼저는 감기로 병원에 갔는데, 치매약을 처방해 줬다. - 거기도 거기의 사정이 있겠지. 나랑 통화한 간호사는 자식 새끼들은 뭐한다고 치매 노인을 혼자 병원에 보내나, 같은 생각을 했을 수도 있다.

 아버지는 병원비를 내지 않고 처방전을 받지 않았고 병원에 휴대전화를 두고 나왔다. 결국 둘째 이모가 현장에 투입됐다. 가까이 살아서 다행이긴 한데, 이모가 일일이 챙겨줄수는 없다. 내가 챙기는 게 낫다. 아버지 전세 만료되면 바로 강릉으로 오는 게 낫겠다고 100프로 확신했다. 아버지는 점점 중증으로 가고 치매 상태에 비해서 신체는 매우 건강하다. 언제까지가 될 진 모르지만 아버지 몸 건강한 동안에는 주말에 아버지랑 함께 할 사람이 필요하다. 그게 나다. 아내는 ’우리가 해야지 아버지잖아‘라고 하지만 - 참 고마운 말이다. -  나도 언제까지 아버지와 함께 할 수 있을진 모른다. 아버지는 병원을 나와서 데이케어센터에 돌아갔다. 센터에서는 저녁 식사 시간이 지났지만 남은 밥이 있어서 아버지 저녁 챙겨줬다. 너무 고마운 일이다. 센터에 간호부장 선생님이 아버지에게 애정을 가지고 있다. 아버지도 당연히 그 애정을 알고 그 선생님이 휴가로 며칠 센터에 출근하지 않았을 때, 목소리에 불안감이 있었다. 본인 직업에 춭실할 뿐일수도 있지만 너무 고마운 선생님이다.

 지금 내가 느끼기엔,
 엄마에겐 엄마의 삶이 동생에겐 동생의 삶이 있고 나에겐 아버지랑 함께 하는 나의 삶이 있는 것 같다.

 오늘 아버지 병원 가는 일로 전화 통화 20번 넘게 했고 고속도로에서 계속 전화기 붙들고 있었다. 그러다 교통사고로 내가 훅, 갈 수도 있었다.

 아버지랑 계속 통화하다보면 진이 빠진다. 힘들어서 한 잔 하고 싶은 날인데, 집에서 혼자 맥주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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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일에 엄마 생일 축하 겸 오산에 간 걸 시작으로 어제 저녁 친구 결혼식까지 2박 3일 수도권 일정을 마쳤다. 피곤하네.

 13일에 아버지랑 뼈해장국 먹었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아버지는 뼈에서 살을 발라내는 일이 서툴다. 먹는 일에 절차가 포함되는 건 - 아내 말로는 복잡한 건 - 가급적 안 먹던가 내가 많이 도와드리거나 해야겠다. 14일에는 짬뽕 먹었다. 섭이라고 하나? 통칭 홍합이라 부르는 것이 한 그릇에 네 개 뿐이라 아버지가 뼈해장국 보다는 수월하게 먹었다. 오랜만에 먹으니 맛있다고 해서 기분 좋았다. 아버지는 혼자 식당에서 밥을 먹지 않는다.(못한다.) 13일 저녁에 동네 친구들하고 술 먹고 14일 오전에는 아버지 침대에 누워서 쉬었다. 침대에 누워서 아버지 뭐 하시나 좀 살펴보니 중간중간 어떤 메모들을 하고 그걸 제외하면 그냥 의자에 앉아 있었다. 아버지의 시간을 생각해본다. 시간 개념이 사라져 가는 사람의 시간. 달력과 시계 보는 법이 헷갈리는 사람의 시간. TV리모콘을 잘 못 다루시길래 볼륨과 채널 컨트롤을 한 참 알려줬지만 아버지는 계속 이게 뭔지를 물었다. 어떤 때는 본능적으로 채널을 돌리고 그게 안될 때는 그냥 틀어져 있는 채널을 틀어놓는 듯하다. TV가 틀어져 있어도 TV를 보는 것은 아니고 실수로 셋톱박스라도 끄면 티비를 못 보는 실정이다. 지갑에 돈이 있었으면 하시길래 13일에 돈 10만원 찾아서 넣어드렸다. 14일에 몇 번이고 돈이 없다고 말하길래 나도 몇 번이고 어제 돈 찾았기 때문에 지갑에 돈이 있다고 말해줬다. 위암 수술 영향인지 63~65kg정도 나가던 체중이 60kg으로 줄었다. 데이케어 센터에서 먹는 것 말고 따로 뭘 챙겨 드시는 것 같진 않다. 많이 먹어서 좋을 건 없다. 12일에 엄마집에 갔다가 동생 아이들을 오랜만에 봤는데, 8살 먹은 큰 조카 아이랑 아버지는 어설프게 몸 쓰는게 비슷하다. 다만 조카 아이는 점점 제 몸을 잘 컨트롤 하게 되겠지. 엄마, 이모, 내가 자꾸 반복해서 아침에 샤워하라는 얘기를 하니까 아침에 샤워를 하게 됐다. 그 동안은 샤워 꼭지로 물이 나오게 하는 법을 몰라서 샤워를 못한것 같다. 해서 물을 틀면 샤워 꼭지로만 물이 나오게 조치했다. 뼈해장국의 뼈를 잘 못 발라드시는 거, 티비 리모콘을 잘 못 다루는 거랑 같은 맥락이다. 아버지는 앞으로 점점 더 많은 일들에 도움이 필요하다.

 내일 아버지 병원 가는 날이다. 엄마가 간다고 한다. 데이케어센터에 약을 전달하는 일도 엄마가 해주기로 했다. 전처가 치매약을 데이케어센터에 전달해주는 모양새가 내가 보기에는 좋지 않다. 막상 엄마는 그런일이 아무렇지 않을수도 있다. 가급적 아버지 치매 진행을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은 엄마가 힘들면 안된다는 내 마음이다. 엄마는 내가 힘들면 안되고 나는 엄마가 힘들면 안된다. 사랑이다. 1957년 음력 3월 25일이 엄마 생일이다. 12일에 내가 만든 생일축하 노래 불러줬는데, 엄마가 좋아했다. 아버지 거처를 강릉으로 옮기는 문제가 계속 머릿속에 있는데, 이번에도 내 뜻을 관철시키지 못했다. 하지만 언젠간 아버지는 내가 사는 지역으로 오긴 해야한다. 아직까지 길을 잃어버리진 않으니까 느긋하게 생각하기로 한다.

 어제 친구 결혼식에서 축가 불렀다. 사랑도 건강해야 한다. 건강하게 사랑하라고 방명록에 적었다. 대학 동기들 선후배들 잔뜩 만났다. 살아있으니 다시 만나게 되서 반가웠다. 다들 군데군데 아프고 많이 늙었다. 74년생 동기 Y형 딸아이가 너무 예뻤는데, 그 아이가 결혼식 후에 노래 아저씨랑 사진 찍는다고 해서 최근 들어 가장 기뻤다. 내 폰으로도 한장 찍고 아이 엄마 폰으로도 한장 찍었다. 박제해 둬야겠다. 이쁜 애들은 기쁨을 준다. 동생 가족도 엄마집의 작은방에 이불 깔아놓고 자기들끼리 꽁냥꽁냥 잘 놀더라. 그런게 동생이 살아가는데 큰 힘이 되겠지. 

 살아있으니 만나게 되고 살아있으면 다들 살아간다. 이건 체념의 일종은 아니다. 나는 살아 있다는 게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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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토요일 저녁에 아버지랑 순대국 먹었다. 보통은 아버지만 특을 시켜드렸는데, 나도 특 시켜 먹었다. '특' 이란 말에 자꾸 의미를 부여하는 게 웃기지만 서로에게 특별한 존재라 그런걸로 치기로 했다. 배부르면 다 먹지 않아도 된다고 했더니 아버지가 남겼다. 아버지가 순대국 남긴 거 처음 봤다. 아직까지 위암 수술의 여파가 남아 있다고 봐야겠지. 혼자서는 순대국을 못 사 먹게 된 아버지. 앞으로는 아버지 만나면 메뉴 고민하지 않고 무조건 순대국 먹는 걸로 정했다. 아버지가 페브리즈를 손에 분사해서 화장품 처럼 얼굴에 바르길래 그러면 안된다고 몇 번이고 말했다. 아버지가 본인 몇 살이지 나한테 물어봤다. 아버지가 나한테 고맙다고 했다. - 살짝 눈물이 났다. - 아버지랑 같이 있으면 아버지가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건지 많이 들으려고 한다. 아버지랑 프로축구 울산vs포항 후반전을 TV 중계로 봤다. 게임은 명승부였는데, 아버지는 TV화면에 전혀 집중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세탁기를 못 돌리는 사람이 됐다. 예전에 동생 와이셔츠 다려주던 아버지 모습이 생각난다. 일요일에 드시라고 전복죽을 사 놓고 갔는데,  아버지는 먹지 않았다. - 못했다. -  
 
 아버지랑 헤어지고 엄마집에 왔다. 다 커버린 아기새가 늙은 어미새와 아비새 둥지를 번갈아 방문하는 모양새다. 엄마는 본인은 잘 살고 있으니 걱정 말라고 했다. 진짜 잘 사는 거 맞나? 엄마에게는 오산에서 살면서 형성한 엄마만의 세계가 있긴 하다. 엄마가 딸기 갈아줬다. 엄마가 끓여놓은 김치찌개랑 밥을 먹었다. 엄마가 김치를 싸줬다. 김치 싸주면서 김이랑 깡통햄도 같이 줬다. 나는 아버지를 챙기는데, 엄마는 여전히 자식들을 챙기고 있네. 어미새는 늙어서도 아기새를 돌본다. 아버지도 아버지지만 엄마를 잊으면 안된다. 우리집에서 엄마집까지 210km, 별 것 아닌 거리다. 엄마를 자주 봐야겠다. 엄마랑 둘이 여행가는 프로젝트는 마음속에 항상 살아 있다. 
 
 곧 장모님 70세 생일이다. 장모님의 아기새는 요즘 울적하다. 나도 울적한지 오래됐다. 다 잘 될거라고 하니까 나의 작은새가 웃었다. 그래서 나도 웃었다. 그 웃음으로 내가 산다. 장인어른이 나한테 전화 안한지 좀 됐다. 굿. 각자 본인 부모님 챙기면서 사는게 결혼생활이겠거니 한다.
 
 3월에 좀 덥더니 어느덧 날씨가 제자리를 찾았다. 출퇴근길과 현장에서 봄을 맞아 요동치는 산과 나무를 본다. 예쁘다. 4월에게 자리를 내주는 중이지만 여전히 계절의 여왕은 5월이다. 그러니까 아직까지는 괜찮다. 자꾸 괜찮다고 하는 글을 쓰고 있는 나를 안다. 다 잘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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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끈한 토요일 오후, 친구 가게에 앉아서 아버지 데이케어센터에서 돌아오는 거 기다리면서 쓴다.

 어제 서울 왔다. 어제 친구한테 차 보여주고 - 좋은 가격에 잘 샀다고 함 - 오늘 저녁에 아버지랑 순대국 먹고 - 이버지 얼굴 본지가 좀 됐고 토요일 저녁부터 일요일까지가 아버지가 혼자 있는 시간이라 일요일에 혼자 먹을 죽과 빵을 사 놓으려고 한다. - 밤에는 엄마한테 가서 이런저런 얘기 좀 하다가 내일 아침에 강릉으로 출발하는 작전이다. 아직까진 순조롭다.

 어제는 동네 친구들이랑 저녁 먹었다. 집에서 아내와 별 대화가 없는게 40대 중후반 기혼 남자의 보통인가, 생각했다. 건스짱은 현장을 강릉으로 옮기려고 한다고 하면서 '그래야 너라도 보지' 라고 했다. 그 말이 마음속에 울린다. 만날 친구도 별로 없는게 40대 중후반 기혼 남자의 보통인가. 나도 너라도 보고 너도 나라도 보고 그런게 친구 사이겠지. 강릉에 대학 동창이 한 명 있어서 가끔 얼굴 보는게 나한테 위로가 된다. 그 친구도 그럴거다. 애들이라도 자주 보게 다시 서울 살면 어떨까 생각도 해봤지만 부질없는 생각인 걸 안다.

 내가 간다고 했더니 아버지가 들뜬 목소리로 추임새까지 넣어가면서 오랜만에 본다고 말한게 좋았다. 아버지는 아직 나를 잊지 않았고 나를 반겨주는 사람이다.

 오늘 강릉에선 6촌 형(얼굴본지 오래됨) 큰 아이 - 7촌 조카(애기때 얼굴보고 못 봄) - 결혼식이 있고 화성시에선 이종사촌 동생 결혼식이 있다. 5월 14일엔 친구가 결혼한다. 이런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 모르겠지만 긍정적이지만은 않은 이런 세상에서 다들 사랑도 하고 결혼도 하는 게 신기하다. 내가 결혼해서 사는 것도 마찬가지고. 어떤 세상에 살더라도 사랑이 있는 한은 희망이 있고 전성기라 부를 수 있는 것 같다.

 아침에 일찍 깨서 서서울 호수공원을 한바퀴 돌았다. 공원안에 식물들이 다 이뻤고 미루나무가 특히 이뻤다. 나에게는 아내를 포함한 직계 가족과 식물에 대한 사랑이 있구나 생각했다. 그러니까 다 텅 비어버린 것 같고 다 잘못되거는 것 같아도 핏속 어딘가에는 뭔지 모를 희망이 있다.

 아버지 전기요금 계좌이체하고 핸드폰 충전기 잘 되는 거 확인했다. 이제 순대국 잘 먹는것만 확인하면 되겠네. 이렇게 쓰고 나니까 한결 가벼워졌다.

서서울 호수공원 미루나무. 포지션의 동명 노래를 흥얼거림. 노래가 나왔던 드라마에서 엄정화가 연기를 참 잘했던 게 기억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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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강릉에 불 났다. 산에서 시작했으니 산불이라고 하나보다. 2017년부터 2019년까지 국유림관리소 산불 담당자였다. 정선은 산불이 자주 나지 않지만 소소하게 산불이 발생하고 동해안 쪽 대형산불 지원을 포함해서 현장에 많이 갔다. - 담당자니까 당연하겠지. - 처음 산불 현장에 갔을 때, 말로만 듣던 산불을 직접 보는 것에 대한 신기함이 있었는데 그때 한 번 뿐이었다. 직업인 입장에서는 산불현장에 가면 울화가 치민다. 힘든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나무들 타는 걸 보면 속이 상하다. 잿더미인 산을 보면 윗줄과 다른 종류의 울화가 치민다. 세상이 끝난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뭐 여튼 그렇다. 어제 산불은 건물을 많이 태웠다. 터전이 타버린 사람들은 이루고자 했거나 이루었던 모든 것이 한 번에 무너진 느낌이겠지. 전쟁의 결과가 그러할 것이다. 아직 살면서 그런 느낌을 받아본 적은 없으니 다행인걸까? 언젠가 내게도 모든 게 무너지는 날이 올까? 다들 그러지 않으려고 사는 것이다. 

 아버지는 본인이 무너진 걸 모르는 채 무너져버렸다. 그건 불행 중 다행인건가? 어제 아버지 친구가 대전에서 아버지를 찾아왔다. 핸드폰 충전하는 법을 잊어서 수시로 전화기가 꺼져있는 아버지 핸드폰 통화목록이나 카톡 대화창에 그 친구분 이름을 많이 봤다. 엄마한테 물어보니 예전에는 한 동네 살아서 자주 만났던 친한 사이라고 했다. 아버지 친구는 아버지가 요양병원 같은 곳에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면회라는 단어를 썼고 내가 그런게 아니라고 알려줬다. 아버지의 얘기에 따르면 데이케어센터에서 아버지를 데리고 나와서 같이 저녁을 먹고 산책을 한 걸로 추정된다. 아버지는 친구랑 저녁도 잘 먹고 호수공원에서 산책했다는 얘기를 어제 네 번 오늘 아침에 두 번 했다. 그만큼 좋았단 얘기겠지. 아버지를 찾아 주셔서 고맙다고 했더니 니가 더 고맙다고 했다. 고맙단 말 오랜만에 들었다. 그 말이 말이 위로가 됐다. 고맙단 말을 위로의 말로 등록해둔다. 출근길에 데이케어센터에서 전화가 와서 아버지 전화기가 꺼진걸 알았다. 다행히 센터 직원이 출근하다가 시장통에 있는 아버지를 발견해서 같이 센터에 왔다고 한다. 그러지 않았더라도 아버지 혼자 센터에 찾아갔을 것이다. - 집에서 센터까지 100미터 안됨. - 길을 잃어버리지 않는 것만해도 정말 다행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조금은 맘 편하게 강릉에서 아버지 생각을 할 수 있다. 그렇더라도 전세 계약기간 종료되는 10월에는 강릉으로 옮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 엄마가 반대하더라도. - 

 비가 내리지 않았으면 강릉 전체가 쑥대밭이 됐을수도 있다. 자연 앞에 선 인간의 나약함을 항상 생각하면서 살려고는 하는데, 아무것도 아닌 사소한 일들 때문에 그 사실을 자주 잊는다. 오늘 원하지도 않고 필요하지도 않은 저녁식사 자리에 희생양으로 가게 되서 기분이 안 좋은 찰나에 가지 끝에서 새로 시작하는 층층나무 잎을 봐서 고맙다는 말 만큼이나 위로가 됐다.

20220412 시작하는 층층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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