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파묵을 읽었다.

어떤 남자가 어떤 여자를 사랑하는 얘기다.

오랜 기다림에 사랑을 얻은 듯하지만 여자는 사고로 죽는다.

이런 단순한 얘기를 800페이지나 써냈다.

1권에서는 사랑으로 불타오르는 심정의 묘사가 좋았고

2권에서는 "때로"란 제목의 챕터가 기억에 남는다. 

'위장에는 점심 때 먹은 음식, 목덜미에는 햇살, 머릿속에는 사랑, 영혼에는 조급함, 그리고 가슴에는 아픔이 있었다.'

-> 이런걸 잘도 쓴다.(질투가 남.)

그리고 케말이 퓌순의 집에 찾아간 8년을 요약한 '때로' 챕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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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말없이 앉아 있었다. 때로 타륵씨는 우리처럼 텔레비전에 나오는 프로그램을 지루해하며 곁눈으로는 신문을 읽곤 했다. 때로 비탈길에서 아래로, 자동차 한 대가 경적을 울리며 시끄럽게 내려갔고, 그러면 우리는 모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동차가 지나가는 소리에 귀를 쫑긋 세웠다. 때로 비가 오면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를 들었다. 때로 "날씨가 정말 덥네."라고 했다. 때로 네시베 고모는 재떨이에 담배가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부엌에서 하나 더 불을 붙여 피웠다. 때로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퓌순의 손을 십오 초나 이십 초쯤 바라보고 그녀에게 더욱 반하기도 했다. 때로 텔레비전에서 그때 우리가 식탁에서 먹고 있던 음식을 소개하는 광고가 나오기도 했다. 때로 멀리서 폭발 소리가 들려왔다. 때로 네시베 고모가, 때로 퓌순이 식탁에서 일어나, 난로에 석탄 한두 개를 던져 넣었다. 때로 다음번에는 퓌순에게 머리핀이 아니라, 팔찌를 갖다 줘야지 하고 생각했다. 때로 모두 함께 영화를 보다가 내용을 잊어버리고는, 눈은 텔레비전을 향한 채 니샨타쉬에서의 초등학교 시절을 떠올렸다. 때로 네시베 고모가 "보리수 차를 끓여줄게!"라고 했다. 때로 퓌순이 아주 달콤하게 하품을 해서, 그녀가 온 세상을 잊고 자신의 영혼 깊은 곳에서 더 평온한 삶을, 마치 무더운 여름날 차가운 우물에서 두레박으로 물을 끌어당기듯, 끌어당겼다고 생각할 때가 있었다. 때로 이제는 더 앉아 있지 말아야지, 일어나야지, 하고 나 자신에게 말했다. 때로 맞은편 집 아래층에서 늦은 시간까지 일하는 이발사가 마지막 손님을 보낸 후 빠르게 덧문을 내리는 소리가 밤의 정적 속에서 온 동네에 울려 퍼졌다. 때로 단수가 되어 이틀 동안 물이 나오지 않았다. 때로 석탄 난로 속에서 불길이 아닌 다른 움직임이 보이기도 했다. 때로 네시베 고모가 단지 "올리브유를 넣어 만든 콩 요리 좋아하지, 다 없어지기 전에 내일 또 와!"라고 말했기 때문에 다음 날도 그 집에 갔다. 때로 미국-러시아 전쟁, 냉전, 밤에 보스포루스를 지나가는 러시아 전함들, 마르마라 해의 미국 잠수함 등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때로 네시베 고모가 "오늘 저녁은 아주 덥네!"라고 했다. 때로 퓌순의 표정을 보며 그녀가 몽상에 빠져 있다는 것을 알고는, 그녀가 상상하는 나라에 가고 싶어졌으며, 나 사진, 나의 삶, 나의 과묵함, 식탁에 앉아 있는 나의 모습이 무척 절망적이라고 생각했다. 때로 식탁에 있는 물건들이 산이나 계곡, 언덕, 고원, 구덩이처럼 보일 때도 있었다. 때로 텔레비전에 나오는 우스운 것을 보고 모두 함께 웃는 순간도 있었다. 때로 우리 모두 동시에 텔레비전에 몰입하는 것이 굴욕적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때로 이웃집 아이 알리가 퓌순의 품으로 파고들어 그녀에게 안기는 것이 나를 화나게 했다. 때로 타륵 씨와 남자 대 남자로, 음모나 속임수에 대해 말하듯 교활한 분위기에 낮은 목소리로, 경제 상황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때로 퓌순이 위층으로 올라가 한동안 아래로 내려오지 않으면 이것 역시 나를 불행하게 했다. 때로 전화벨이 울렸지만, 잘못 걸려온 전화일 때도 있었다. 때로 네시베 고모가 "다음 주 화요일에 호박 후식을 만들어 줄게."라고 했다. 때로 청년 서너 명이 축구와 관련된 노래를 부르고 소리를 지르며 비탈길에서 아래로, 톱하네 쪽으로 가기도 햇다. 때로 나는 퓌순이 난로에 석탄을 넣는 것을 도와주었다. 때로 부엌 바닥에서 바퀴벌레가 다급하게 뛰어가는 것을 보았다. 때로 야경꾼이 집 현관문 바로 앞에서 호루라기를 불었다. 때로 퓌순이, 때로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기도 시간 일력'에서 날짜가 니난 낱장을 하나하나 뜯었다. 때로 아무도 보지 않을 때, 식탁에 놓여 있는, 세몰리나로 만든 헬와를 한 수저 더 먹었다. 때로 텔레비전 화면이 잘 나오지 않으면 타륵 씨는 "얘야, 한번 점검해 봐라."라고 했고, 퓌순이 텔레비전 뒤에 있는 버튼을 만지고, 나는 뒤에서 바라보았다. 때로 "담배 한 대 더 피우고 가야지."라고 말했다. 때로 시간을 완전히 잊고는 '지금'의 안으로, 부드러운 침대에 드러눕는 것처럼 팔다리를 쭉뻗고 퍼져 앉아 있곤 했다. 때로 카펫 안에 있는 세균, 벌레, 기생충들을 알아챘다고 생각했다. 때로 텔레비전 프로그램 사이에, 퓌순은 냉장고에서 차가운 물을 꺼내고, 타륵 씨는 위층 화장실에 갔다. 때로 냄비에 버터로 요리한 호박 돌마, 토마토 돌마, 고추 돌마를 이틀 저녁에 걸쳐 먹기도 했다. 때로 저녁을 먹은 다음 퓌순이 식탁에서 일어나, 레몬의 새장으로 가서 친구처럼 이야기를 나누면, 나는 그녀가 나와 이야기를 한다고 생각했다. 때로 여름날 저녁, 퇴창으로 날아 들어온 나방 한 마리가 전등 주위를 미친 듯이 빠르게 돌았다. 때로 네시베 고모가 이미 오래되었는데 처음 들었다며 동네의 소문(예를 들면 전기공 에페의 아버지는 유명한 도둑이었다는)을 꺼내기도 했다. 때로 그곳에 있다는 사실을 잊고, 정신을 잃고 마치 우리 둘만 있는 듯 퓌순에게 나의 모든 사랑을 보여 주며, 오랫동안 열정적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때로 골목에서 자동차가 조용히 지나갔고, 단지 창문이 떨리는 것으로만 그 사실을 눈치채기도 했다. 때로 퓌루즈아아 사원에서 기도 시간을 알리는 소리가 들여왔다. 때로 퓌순이 뜬금없이 식탁에서 일어나, 비탈길이 보이는 퇴창 밖을 마치 간절한 그리움으로 기다리고 사람이 있다는 듯 한동안 바라보면, 내 가슴이 아파 왔다. 때로 텔레비전을 보면서 전혀 다른 생각(예를 들면 우리가 배 안에 있는 식당에서 만난 승객들이라는 상상)을 했다. 때로 여름날 저녁, 네시베 고모가 위층에 있는 방에 테미즈 이시펌프로 파리약을 뿌렸고, 식당에소 '싸악 한번 뿌리면' 파리가 죽곤 했다. 때로 네시베 고모가 옛 이란 왕비 쉬레이야 이야기를 꺼내고, 샤의 아이를 낳지 못했기 때문에 이혼한 그녀의 슬픔과 유럽 상류사회에서의 그녀의 삶에 대해 말해 주었다. 때로 타륵 씨는 텔레비전을 보며 "저 파렴치한 놈이 또 나오네!"라고 했다. 때로 퓌순은 이틀 연달아 같은 옷을 입었는데, 그래도 내게는 다르게 보였다. 때로 네시베 고모가 "아이스크림 먹을 사람 있어?"라고 물었다. 때로 맞은편 아파트에 사는 누군가가 창문 쪽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을 보았다. 때로 안초비 튀김을 먹었다. 때로 케스킨 씨네 사람들이, 세상에는 정의가 있고, 죄인들은 이 세상이나 저 세상에서 꼭 벌을 받는다고 진심으로 믿는 것을 보았다. 때로 우리는 아주 오랫동안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때로 단지 우리뿐만이 아니라, 모든 도시가 정적에 휩싸였다. 때로 퓌순이 "아빠, 제발 식탁에 차리기 전에 집어 먹지 마세요!"라고 했고, 그러면 나 때문에 그들조차 식탁에서 편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때로는 반대로, 모두들 아주 편하게 행동한다는 걸 깨달을 때도 있었다. 때로 담배에 불을 붙인 후 눈을 화면에 고정한 네시베 고모가, 손이 뜨거워질 때까지 성냥불을 든 채 끄는 것을 잊어버렸다. 때로 오븐에서 요리한 스파게티를 먹었다. 때로 에쉴쾨이에 있는 공항을 향해 하강하는 비행기가 밤의 어둠 속에서 굉음을 내며 우리 위를 지나갔다. 때로 퓌순은 긴 목과 가슴의 윗부분이 보이는 셔츠를 입었고, 나는 텔레비전을 볼 때 그녀의 아름다운 흰 목에 내 눈이 머물지 않도록 주의했다. 때로 퓌순에게 "그림은 어떻게 돼 가?"라고 물었다. 때로 텔레비전에서는 "눈이 오겠습니다."라고 했지만 오지 않았다. 때로 커다란 유조선의 다급한 뱃고동 소리가 슬프게 들려오기도 했다. 때로 먼 곳에서 총소리가 들려왔다. 때로 누군가가 옆집 대문을 세게 두드려서, 내 뒤에 있는 장식장 속 커피 잔이 떨리기도 했다. 때로 전화벨이 울렸는데 레몬은 그것이 암놈 카나리아라고 생각했는지 흥분하며 지저귀었고, 우리는 모두 함께 웃었다. 때로 어떤 부부가 손님으로 오면, 나는 약간 부끄러워졌다. 때로 타륵 씨는 위스퀴다르 여성 합창단이 텔레비전에 나와 옛날 노래를 부르면 앉은 채로 따라 불렀다. 때로 좁은 골목에 자동차 두 대가 맞닥뜨려, 두 운전자가 고집을 피우며 길을 내주지 않은 채 입씨름을 시작했고, 욕설을 했으며, 종국에는 자동차 밖으로 나와 치고받는 싸움을 했다. 때로 집에, 골목에, 모든 동네에 마법적인 정적이 흘렀다. 때로 저녁때 뵈렉과 소금에 절인 다랑어 외에 대구도 사서 가져갔다. 때로 우리는 "오늘 날씨 정말 춥지, 그렇지?"라고 말했다. 때로 타륵 씨가 식사를 마친 후 미소를 지으며 호주머니에서 페라흐 박하사탕을 꺼내 우리에게 한 개씩 나눠 주었다. 때로 문 앞에서 고양이 두 마리가 거세게 야옹거리다가, 나중에는 비명을 지르며 싸움을 했다. 때로 퓌순이 내가 그날 가져온 귀걸이나 브로치를 그자리에서 달았고, 식사 때 나는 낮은 목소리로 아주 잘 어울린다고 그녀에게 말했다. 때로 텔레비전에 나오는 사랑 영화에서 상봉과 키스 장면이 보이면, 우리는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잊어버리기도 했다. 때로 "음식에 소금을 조금만 넣었어, 원하는 사람은 입맛에 맞게 더 넣어."라고 네시베 고모가 말했다. 때로 먼 곳에서 번개가 치고 천둥이 울렸다. 때로 보스포루스에서 오래된 배의 날카로운 뱃고동 소리가 우리 가슴에 슬프게 와 닿았다. 때로 펠뤼르에게 알게 되어 농담도 약간 주고받았던 배우가 텔레비전에서 영화나 연속극 혹은 광고에 등장하면 퓌순과 눈이 마주치기를 바랐지만, 그녀는 눈길을 피하곤 했다. 때로 정전이 되면, 어둠 속에 앉아 우리가 피우는 담배의 붉은 끝을 보았다. 때로 누군가가 문 앞에서 혼자 휘파람으로 옛날 노래를 부르며 지나갔다. 대로 네시베 고모가 "아, 오늘 밤은 담배를 너무 많이 피웠어."라고 했다. 때로 퓌순의 목에 눈길이 갔고, 저녁 내내 더 이상 그곳을 보지 않기 위해 그리 힘들이지 않고 나 자신을 억눌렀다. 때로 순간적으로 깊은 침묵이 흐르면, 네시베 고모가 "어디에선가 누군가 죽었나 봐."라고 했다. 대로 타륵 씨의 라이터가 켜지지 않으면 나는 그에게 새 라이터를 선물할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때로 네시베 고모가 냉장고에서 무언가를 가져오면서, 그사이 영화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고 우리에게 물었다. 때로 달그츠 골목에서 바로 우리 맞은편에 있는 집에서 또 부부 싸움이 이어났고, 남편이 아내를 때렸는지 우리 마음까지 와 닿는 비명 소리가 들여왔ㄷ. 때로 겨울날 밤에 보자 장수가 방울을 흔들며 "뵈퐈 보오오자아아."라고 고함을 지르며 문 앞을 지나갔다. 때로 네시베 고모가 "오늘은 아주 기분이 좋은가 봐!"라고 내게 말했다. 때로 몸을 뻗어 퓌순을 만지지 않기 위해 나 자신을 겨우 억눌렀다. 때로, 특히 여름 저녁이면, 바람이 불어와 문이 서로 부딪혔다. 대로 자임을, 시벨을, 옛 친구들을 생각했다. 때로 식탁에 있는 음식에 파리가 앉으면 네시베 고모가 신경질을 냈다. 때로 네시베 고모는 타륵 씨를 위해 냉장고에서 광천수를 꺼내면서 "자네도 마실래?"라고 내게 물었다. 때로 아직 11시도 되지 않았는데, 야경꾼이 호루라기를 불며 문 앞을 지나갔다. 때로 그녀에게 "널 사랑해!"라고 말하고 싶어 견딜 수 없었지만, 그저 라이터로 담배에 불을 붙일 수밖에 없었다. 때로 바로 지난번에 가져온 라일락이 여전히 꽃병에 있는 것을 알아보기도 했다. 때로 침묵이 흐르고, 이웃집 창문이 열리고, 누군가 밑으로 쓰레기를 던졌다. 때로 네시베 고모가 "마지막 남은 쾨프테를 누가 먹나 볼까요?"라고 했다. 때로 텔레비전에 나오는 장군들을 보며 나의 군대 생활을 떠올렸다. 때로 단지 나뿐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깊이 느끼곤 했다. 때로 네시베 고모가 "오늘 저녁 후식이 뭔지 맞춰 봐."라고 했다. 때로 타륵 씨가 사레들리면 퓌순이 자리에서 일어나 아버지에게 물을 건네주었다. 때로 퓌순은 내가 몇 년 전에 선물한 브로치를 달기도 했다. 때로 텔레비전에서 화면과는 전혀 다른 설명이 나온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때로 퓌순이 텔레비전에 나오는 연극인이나 문학인, 교수에 대해 내게 질문을 했다. 때로 나도 식탁에 있는 더러워진 접시를 부엌으로 가져갔다. 때로 우리 모두의 입에 음식이 들어 있기 때문에 식탁이 조용했다. 때로 누군가가 먼저 하품을 하면, 그를 보고 다른 이들도 하품을 하기 시작했고, 그것을 깨달으면 이 일에 대해 이야기하며 웃었다. 때로 퓌순이 텔레비전에 나오는 영화에 얼마나 집중하고 몰입했던지, 나는 그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때로 고기 구운 냄새가 저녁 내내 집 안에 남아 있었다. 때로 그저 퓌순 옆에 앉아 있다는 것 때문에 아주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때로 나는 "언제 보스포루스로 저녁 먹으러 가요."라고 말문을 열었다. 때로 삶이 다른 곳이 아니라 바로 그곳, 그 식탁에 있다는 느낌에 휩싸였다. 때로 텔레비전에서 어떤 이야기가 나오면, 전혀 모르는 주제라고 해도, 예를들면 아르헨티나에 있는 사라진 왕의 무던, 화성에서의 중력, 사람이 숨을 쉬지 않고 수중에서 얼마나 버틸 수 있나, 오토바이가 이스탄불에서 왜 위험한가, 위르귑에 있는 요전의 굴뚝이 어떻게 형성되었나 등의 주제에 대해 논쟁을 했다. 때로 강한 바람이 불어와 창문에서 윙윙거리는 소리가 났고, 난로 연통에서도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때로 타륵 씨가 그 집에서 50미터 떨어지 보아즈케센 골목으로 오백 년 전에 파티흐 술탄이 전함을 통과시켜 할리치 만으로 끌어내리게 했다는 이야기를 하며 "그가 그 일을 할 때 열아홉 살이었다네!"라고 했다. 때로 퓌순이 식사를 다 하고 식탁에서 일어나 레몬이 있는 새장으로 가면, 나도잠시 후에 그녀 곁으로 갔다. 때로 '오늘 저녁에도 오길 잘했다.'라고 혼잣말을 했다. 때로 타륵 씨가 깜박 잊은 안경이나 신문 혹은 복권을 가져오라고 퓌순을 위층으로 보냈고, 그럴 때면 네시베 고모는 식탁에서 "전등 끄는 것 잊지 마라!"라고 위층에 대고 소리를 쳤다. 때로 네시베 고모는 파리에 있는 먼 친척의 결혼식에 갈 수 있을 거라고 했다. 때로 타륵 씨가 격한 목소리로 "조용히 해봐!"라고 하면, 집 안에서 나는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들어 보라며 천장을 가리켰고, 그러면 우리는 모두 위층에서 들려오는 것이 쥐나 도둑이 내는 소리인지 궁금해하면서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때로 네시베 고모가 남편에게 "텔레비전 볼륨이 적당해요?"라고 물었는데, 타륵 씨는 나이가 들수록 귀가 잘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때로 우리 사이에 아주 긴 침묵이 흘렀다. 때로 창가에 눈이 쌓이고, 인도가 얼어붙었다. 때로 폭죽이 터지면 우리는 모두 식탁에서 일어나, 하늘에 수놓아진 색들을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았고, 나중에는 열린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화약 냄새를 맡았다. 때로 네시베 고모가 "잔은 채울까, 케말?"하고 물었다. 때로 나는 "네가 그린 그림을 볼까, 퓌순?"이라고 하며 그림을 보러 갔고, 그렇게 그녀와 함께 그녀의 그림을 보며 내가 행복하다고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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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맥을 먹다

소맥을 만다
섞는 걸 만다고 하는 이상한 세상
많은 쪽이 작은 쪽을 잡아 먹는 당연한 세상
오늘도 그만둘까 생각했다
그만두는 대신 소맥을 만다
그만뒀어도 소맥을 말았을 것이다
매일 습관적으로 소맥을 말고 있으니 삶이 돌돌 말리는 것을 말릴 수가 없다
술에 혀는 꼬이지만 삶이 뒤틀려 꼬이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1:9로 2:8로 3:7로도 말고 어떤날은 반반으로 만다
소주의 비율이 높아질수록 술은 달고 삶은 쓰다
황금비율이니 꿀 맛이니 하며 마신다
삶이 아니면 죽음인 일
나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
부끄러움을 모르고 소맥을 만다
부끄러움을 잊으려고 소맥을 마신다
소맥은 쏘맥이라 불러야 맛이지만
여전히 살아서 쏘맥을 말고 있는 나는 쑥맥은 아니다
병이 사람과 사랑을 병들게 하고
가지런히 놓인 술병이 나와 내 사랑을 병들게 한다
빈 앞자리와 마주 앉아 텅빈 소백을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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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크리스마스

세계 최대의 명절​
남의 생일을 이렇게까지 축하해도 되나
​키스와 섹스와 크리스마스는 만국 공통어
아기 예수와 같은날 태어났던 사람들은 모두 흙으로 돌아갔지만
아기 예수만은 해마다 다시 태어나고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는 각설이도 아닌데 죽지도 않고 다시 돌아온다
늙은 산타클로스는 하늘에 닿으려는 빌딩 꼭대기 집무실에서​
푹신한 회장님 의자에 몸을 기댄채 눈을 감고
나이는 먹고 몸에 힘은 빠지는데 남의 생일에 사서 고생하던 일을
전 세계 인구가 점점 늘어나니 점점 늘어만 가는 선물 상하차 일을 혼자서 하던 옛날을
붉은 코를 깜빡거리며 졸음 운전을 하던 루돌프와 함께 하던 시절을
함께 고생했던 동료들과 이 세상에 없는 아이들을 생각한다
주식회사 산타클로스는 일 년에 한 번씩 파견직 산타클로스와 단기 알바 산타클로스를 채용하고
주소록 작업을 하고 비정규직 산타클로스의 임금을 계산하는 또 다른 비정규직 산타클로스들을 기간제로 채용한다
모든 결재서류에는 사슴뿔로 만든 직인이 찍히고​
루돌프의 자리는 자동차가 차지했다
뿔을 잃은 사슴은 슬피 울었다
메리크리스마스 메리크리스마스 메리크리스마스
모든 일에는 대가가 있다
부모는 세금을 내고 아이들은 선물을 받는다
메리크리스마스 메리크리스마스 메리크리스마스
메리는 메롱과 같은 말이고 해피하지 않아도 해피크리스마스
메리크리스마스 메리크리스마스 메리크리스마스
내일이면 실직할 수 천 만의 산타클로스와 그 가족들도
일자리를 잃은 루돌프와 친구들도
메리크리스마스 메일크리스마스 매일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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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선에 산불이 났다. 원인 조사 결과 등산객 또는 약초꾼들이 불을 피운 흔적을 발견했다. 등산객들이 뭘 끓여 먹는 경우는 별로 없고 약초꾼들이 몇 년 전에 드론을 이용해서 도라지 씨를 많이 뿌렸다는 이야기가 들리는 걸로 봐서는 약초꾼들 때문인 것 같다. 불이 났던 당일날 비가 약간 왔다. 불 피워놓고 뭔가 끓여 먹고 방심했겠지. 불은 한 순간이다. 인간에 대한 믿음이 무너지는 순간이다. 나도 그런 사람일 수 있다는 것이 두렵다. 

 불이 밤에 나는 바람에 퇴근했다가 다시 정선으로 올라왔다. 워크숍에 간다고 부산가는 길에 안동까지 갔다가 돌아온 친구도 있다. 차에서 대충자고 불 끄러 올라갔다. 잔불이 남아서 또 올라갔다. 여전히 잔불이 남아서 또 올라갔다. 3일 동안 네 번 산 꼭대기에 올랐다. 한 번 빨았는데도 산불잠바에서는 불냄새가 난다. 피곤해서 입술에 헤르페스가 발생했다. 불은 다 껐고 대상포진이 아니라 단순 포진이라 다행이다.

임계로 근무지를 옮긴지 거의 두 달이다. 심신이 안정을 찾았다. 몇 년 만에 찾아온 안정이다. 화가 나지 않은 상태에서 쓰는 일기도 오랜만이다. 하지만 내 신상에 어떤 급격한 변화가 있을지 모르니 지금 이 순간을 아껴줘야지. 집에서 출퇴근 하는 것만으로 술과 담배가 줄었다. 아내 얼굴을 매일 보는 것이 행복하다. 봄에 메인 파트만 외워뒀던 코타로 오시오의 황혼을 다 외웠다. - 나는 끈기가 있는 편이다. - 생활에 어떤 루틴이 생겼다. 의사가 얘기한 일상을 찾았다. 대성공이다.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들이 다 얼굴 좋아보인다고 한다. 사실이다. 아내가 인상적인 말을 했는데, "너는 술을 많이 마시는 때가 있었을 뿐이지 몸이 안 좋았던 적은 없어." 맞는 말이다. 건강하게 태어난 것에 감사한다.

장인어른 70세 생일이라 지난 주말에 서울 다녀왔다. 27일은 할아버지 제사다. 엄마 가게는 1월 한 달간 영업정지를 당했다고 한다. 위로해 주고 와야겠다. 이제 장사 그만하시고 가만히 쉬라고 할 수 없는 노릇이다. 엄마 입장도 그렇고 내 입장도 그렇다. 입장과 노릇과 현실은 같은 말이다. 한 분야 한 직장 한 우물을 판 장인어른의 안정된 노후 생활과 - 장모님이 백화점 VIP란 얘기를 들었다. - 한 우물을 팠지만 일을 그만두면 땟거리가 없는 엄마의 입장을 생각해 본다. 사람들이 얘기하는 노후대비를 생가해본다. 이제껏 생각해보지 않은 분야다. 나랑 지후는 어떻게 될까? 어제 강릉부동산 사이트를 같이 보면서 우리가 가질 수 없는 집과 땅들을 실컷 봤다. 아내는 체념하여 입버릇으로 이번생은 집 없이 가는 거라고 한다. 내가 짜증나도 지금 이 일을 그만두지 못하고(공무원 연금이 뭔지) 다른 곳에서 새로운 시작을 못하는 것도 결국은 이런 생각들과 관계있다.

 이렇게 나이를 먹는건가? 그렇다면 남들보다 늦었다. 상관없지만.

 안정속에도 피로와 불안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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믹스커피를 먹다

막대기형 비닐 포장의 끝부분을 뜯는다
가스렌지 위에선 물이 끓는 소리
주전자 주둥이를 나오면서도 살아서 끓고 있는 물을 종이컵에 붓는다
믹스커피는 종이컵에 팔팔 끓인 물이라야 맛있다는 돌아가신 외할머니의 말
할머니 제삿날에는 여전히 믹스커피가 상 위에 놓인다
한 모금 한 모금 입 안 가득 달콤한 향이 돌고
식도를 타고 미끄러져 내려가는 물큰한 단내
끈적해진 피가 몸 안에 흐르고 심장 박동을 따라 머릿속까지 닿으면
내 어린날 믹스커피를 타주던 엄마 얼굴이 떠오르고
비로소 하루가 시작된다​
죽음과 삶 사이에서
엄마의 엄마와 엄마 사이에서
퇴사와 출근 사이에서
먹다와 마시다 사이에서
끊을 수 없는 당신과 모닝 커피를 한 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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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불

단풍 지는 계절도 아닌데 산이 탄다
끝을 모르고 끝까지 탄다
불이 다 꺼지고도
잎이 울고 가지가 울고 그루터기가 운다
타서 울고 미처 다 못타서 울고
홀로 타지 못해서 운다
붉은 산의 황홀과 참혹할 수록 아름다운 일
그 찰나의 순간에 새가 울고 들짐승이 운다
마지막엔 사람도 운다
울던 사람이 나무가 되고 타버린 나무가 사람이 되고
사람과 나무가 모여 산이 되고
이런일들이 모여 세상이 된다
흔적없이 타버린 흔적을 남긴다
모두가
울었던 흔적을 세상에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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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브 월드

세계는 나를 보지 않아도 나는 세계를 본다
뉴욕 양키즈 스타디움을 넘어가는 홈런볼을 따라가다 비친 하늘에서
아프리카 초원에서 벌어지는 기린의 발길질과 암사자들의 굶주림에서
눈이 녹아가는 히말라야의 풍경을 찍어올린 SNS 사진에서
불타는 열대우림을 다룬 뉴스 클립에서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을 모국어로 쓰는 작가가 쓴 소설 속에서
세계의 비참과 절망, 환희와 희망은 너무도 생생하게 나와 함께 있다
세계는 숨 쉬는 것처럼 나와 같은 시간에 존재한다
눈 앞에서 생생하지만 손 쓸 수 없는 거리만큼 떨어진 곳에 세계가 있다
내 속엔 세계가 있지만 세계 속엔 내가 없거나 그 반대인 일
세계는 세계 나는 나
서로가 각자의 길 위에 있고
나는 다른게 사는 법을 배운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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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컴퓨터로 쓰는 거 오랜만이다.

 12월이 됐다. 어제 알고서 아, 12월이구나, 했다. 세월은 지나가기만 하지만 숫자는 지나가기만 하지는 않는다. 곧 다시 1월이다. 계절도 다시 돌아온다. 세월은 지나가기만 하지만 어떤 명사들은 되돌아온다. - 지나가기만 하지는 않는다. -

 임계로 옮겨서 한 달을 지냈다. 보기 싫은 사람 얼굴을 안 보게 됐고, 일도 줄고, 아내 얼굴도 매일 보니까 우울감과 화를 많이 떨쳤다. 지난달엔 술을 한 번만 마셨다. 무지하게 피우던 담배도 하루에 한 갑 이하로 줄었다. 내 몸에 간만에 찾아온 긍정적인 변화다. 매일 왕복 70km를 출퇴근 하느라 차에 넣는 기름값이 정선 있을 때, 술값보다 적게 든다. 아주 좋다.

  내가 갑질 신고한 사람은 양양으로 발령났다. 징계 같은 건 없겠지. 99.8% 장담한다. 산림청 후진 클라스다. 애초에 세상이 후졌으니 별 수 없는 일이다.

 99.9%를 말할 때는 100%랑 비슷한 느낌인데, 99.8%는 100에서 많이 비는 느낌이다. 0.1 차이가 크다. 세상에 100%란 건 이미 진행된 일 밖에 없으니 99.9%는 100%랑 같다, 는게 내 생각이다. 생각나는 대로 막 적다 보니까 이렇게 적게 됐다. 적으면서 생각하는지, 생각하고 적는지 모르겠다. 예전에 어떤 영화(넘버 쓰리)에서 한석규가 이미연한테 50.1%만 믿어도 100% 믿는거라고 했던 게 생각난다. 

 의사를 네 번 만났는데, 만날때마다 일상생활만 잘 유지해보라고 한다. 그 일상생활이라는 말이 뭐라고 출근했다가 퇴근하고 아내랑 저녁 먹고 낮에 땀 흘린날은 저녁에 씻는 보통의 일로 위로가 된다. 책도 몇 권 읽었다. 밤에는 아내 옆에서 기타도 치고 게임도 하고 유투브도 본다. 이런 게 일상생활이다. 정선에서는 술만 있고 생활이 없었다.

 정선에서 어떻게 살았던건지 잘 기억도 나지 않는다. 회사 동료들도 내 생각을 안 하고 나도 동료들 생각을 안한다. 직장이란 일이 아니면 부딪칠 일 없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곳이고 사람은 이렇게 쉽게 망각하는 존재다. 좋다.

  아무 생각 없이 지내는 지금의 안온함을 당분간은 유지하고 싶다. 뭐라도 적고 싶어서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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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반을 먹다

장날,
읍내 한구석의 식당
나보다 20년 이상 더 산 형들과 밥을 먹는다
전국 어디에나 있는 서울식당
전국 각지에서 모인 우리들
골고루 먹고 한 끼 때우라는 백반
생선구이와 된장찌개가 나오는 백반
초로의 식당 주인이 주문도 받지않고 차려주는 백반을 먹는다
아직은 술이 세월을 쓰러뜨리지 않았기에 소주도 한 병 먹는다
먹는 입은 지금이지만 말하는 입은 옛 일을 씹는 자리
형들이 좋았다는 옛날은 언제였나
나의 옛날보다 오래된 옛날 얘기를
나는 알기도 하고 모르기도 하는 시절을 안주로 삼킨다
사람이 넷이니 두당 반 공기씩
밥 두 공기 추가하고
소주도 한 병 더 시키는
오후 한 시,
어른의 식사​
AND

갑질신고를 하고 근무부서를 옮겼다. 근무지까지 차로 편도 40분 거리지만 집에서 출퇴근하니까 마음이 좋다. 40개월만에 자의반 타의반으로 정선 읍내를 벗어났다.

​화는 다소 가라 앉았다. 잠들었다가 새벽에 욕하면서 잠에서 깨는 일도 횟수가 줄었다. 시간과 약효가 같이 작용한 것이리라. 시간이 약이고 약도 시간이다.

​왜 그렇게까지 화가 났을까? 나는 알고 있다, 고 생각하지만 내가 어렴풋이 인지하거나 전혀 인식하지 못한 이유도 있을 것이다. 사실 이 화가 언제부터인지도 모르겠다. 삶이란 그런 것이라고 하면 다 그런 것이 된다. 삶이란 그런 것이다. 웃긴다.

​의사가 일상생활만 잘 유지해 보라고 한다. 일상이 뭐고 생활이 뭔지 그 말이 위로가 된다. 사무실에서나 집에서나 딱 할일만 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무력하게 유투브와 함께 한다.

전국체전 달리기 영상을 몇 개 봤더니 육상관련 영상이 많이 따라와서 높이뛰기며 멀리뛰기 같은 것을 본다. 뜀박질 하는 사람들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마음이 차분해진다. 가만히 보고 있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나도 달리기를 해볼까. 육상 동영상을 보는 와중에 마이클 존슨의 400미터 세계 신기록이 깨진 것을 알았다. 그걸 알고서 나 이제는 시대에 뒤떨어졌구나, 생각했다. 인간새 세르게이 부브카의 장대높이뛰기 기록이 깨진 것도 최근에 알았다. 인간사에 깨지지 않는 기록이란 없는 것이다. 깨지지 않는 인간도 없다.

​농촌 생활자에서 도시 생활자로 돌아온지 5년이다. 부지런히 몸을 놀리며 내 몸뚱이로 뭔가를 하는 일에서 급격하게 너무 멀어졌다. 직업적인 영향도 크다. 내가 주로 하는일이 법에서 어긋나지 않게 누군가에게 일을 맡기고 그 결과를 문서로 보고해서 기록으로 남기는 일이다. 좀 바보같다. 지난주에 아주 오랜만에 아내랑 떡볶이랑 순대를 사 먹고 생각했다. 돈으로 하는 일은 떡볶이 일 인분을 사 먹는 것조차 달콤하고 나는 달콤한 세상 속에 너무 깊숙히 들어왔다. 

단골 커피숍에서 커피 사 마시면서 적는다. 달콤한 세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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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률

1년에 두 번 구입하는 로또 복권이 1등에 당첨될 확률
10년만에 탄 비행기가 추락해서 죽을 확률
또는 하늘에서 떨어진 냉장고에 깔려 죽을 확률
하필 내가 지나가는 순간에 다리나 터널이 무너질 확률
연쇄살인자가 되거나 반대로 내가 당할 확률
살거나 죽을 확률
까마득한 확률
순식간에 사랑에 빠질 확률
그보다 빠른 속도로 사랑이 식어버릴 확률
그 사랑이 다시 불타오를 확률
아득한 확률을 바라거나
빗겨가는 일로 산다
AND

가을

모기를 잡았다
흰 벽지에 피가 묻었다
침으로 닦아냈지만 핏자국이 남았다
내 피이거나
당신 피이거나
둘이 섞인 피이겠다
당신과 나와 모기가 함께 여름을 났다
당신과 나만 남아서 함께 겨울을 맞는다
이 작은 방에 함께 흔적을 남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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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요일이 재덕이 삼촌 60세 생일이었다. 어른들 모시고 저녁 먹는 자리에 아내랑 같이 다녀왔다. 메뉴는 소고기. 요즘은 꼭 그렇지 않지만 특별한 날에는 소고기. 나한테 축하 한 마디 하라고 해서 길게 말할 건 없고 아버지나 다름없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진심이다. 19살 차이나는 삼촌에게는 부담되는 말이었을까? 10년 전에 농사짓는다고 강릉 내려왔을 때 같이 살 게 해준 것 말고도 고마운 게 많은 삼촌이다. 재덕이 삼촌 밑으로 삼촌이 둘 더 있는데, 예전에는 별 감정 없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둘 다 각자의 자리에서 나한테 잘해줬다. - 나이 순서대로. ^^ - 나이드신 분들이 많아서 질질끌지 않고 짧게 끝났지만 아내가 고생이 많은 자리였다. 가끔 발생하는 시월드 자리에서 방긋방긋 웃는 아내가 고맙다.

 작은 엄마가 생일 취떡을 잔뜩 싸줬는데,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지금이 먹을 게 별로 없던 시절이라고 생각하면서 오늘 아침까지 맛있게 먹었다. - 냉장고엔 아직 남아 있다. - 삼촌이랑 작은 엄마부부는 쯕 건강하고 행복했으면 좋겠다. 진심이다.

 회사에서는 계속 화가 난 상태다. 화가 나서 오늘 새벽에 짐 싸서 내려왔다. 계속 정선에 있게 되더라도 출퇴근 할 계획이다. 참다참다 갑질 신고도 했다. 너무 많이 참아서 병이 왔다. 주말 내내 유투브 보면서 짜증만 냈다. 잠시만 틈이나면 회사에서 짜증났던 일이 머릿속을 가닥 채운다. 내 짜증을 내가 아니라도 컨디션 안좋은 아내가 듣는다. 너무 바보같다. 어제도 원래는 오늘 아침에 정선 가려다가 아내한테 너무 악영향만 가는 거 같아서 자녁에 정선 올라왔다가 미친놈 만나는 바람에 이렇게 됐다. 결국 이렇게 될 일이었다.

 화가 가라앉질 않는다. 지난 목요일엔 옆방 팀장 하나가 손가락을 까딱까딱 하면서 나를 불러서 손가락 잘라버릴까 생각을 했다. 산불진화 장비를 사는데 동료가 그 물건이 맞다고 해서 샀더니 다른 업체 제품이었다. 금요일에는 퇴근하고 천금같은 내 시간에 물건 찾으러 관대에 들렀는데 알고보니 강릉원주대였다. 이 건도 내가 낮에 동료에게 주소 보여주니 맞다고 했던 건이다. 아내는 몸이 안 좋다는데. 집에 있어야 될 시간에 엄한데 가서 30분을 헤맸다.

C8 싹 다 불질러버릴까.

상담 받으러 병원 가는 길에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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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내가 있고
당신이 있고
내가 있고
당신은 없고
내가 있고
세상이 있고
내가 없고
세상이 있고
내가 없어도 세상이 있고
당신이 없어도 세상이 있고
당신과 나는 같은 말인지 다른 말인지
세상과 세계는 같은 말인지 다른 말인지
나 이외의 세계에도 당신은 있고
당신 이외의 세계에도 나는 있고
나를 제외한 세계에도 내가 있고
당신을 제외한 세계에도 당신이 있고
당신과 나는 같은 말인지 다른 말인지
있음과 없음은 같은 말인지 다른 말인지
나는 어디 있는지 당신은 어디 있는지
사람들은 다 어디 있는지
세계는 어디 있는지
찻잔 안에 있는지 하늘 아래 있는지
찻잔과 하늘은 같은 말인지
AND

간절하게 대충 살기 위해서 회사를 계속 다니기로 했다. 간절하게란 말이 왜 들어갔는지 모르겠다. 대충살기 어렵단 뜻인가? 정년이 보장된 회사를 그만두면 돈 문제가 간절해진다. 어느날의 메모에 생활의 동력이 없다,고 적었다. 대충 산다면 그런 거 없어도 된다. 그저 대충 살기 위함이 삶의 원동력이 될 수 있다.

어제 빗속을 걷던 모자간의 대화를 들었다. <엄마, 난 먹을 게 없어지면 그냥 자살할거야. 야, 그땐 농사지으면 되지.> 돼지열병에서 시작된 대화였겠지. 그때가 오면 농사는 마음대로 지을 수 있나? 아들보다 엄마쪽이 순진하단 생각을 했다. 살던대로 살다가 다 같이 죽는 게 대충 사는 거 같다. 세상의 비참에 대해서 얘기하다가 조카뻘의 회사 동료 하나가 자기는 다 같이 멸망하는 건 상관 없다고 했다. 그게 대충 사는 것이겠지. 

하던 일 계속하면서 지금 사는대로 사는 것. 서초동이나 광화문에 나갈 사람은 주말마다 나가고, 먹방 유투버들은 계속 열심히 먹고, 비건인 친구는 계속 비건으로 살고, 내 아내는 우울과 괜찮음을 반복하고, 나는 술에 취했다 깼다를 반복하고, 시덥잖은 일기를 블로그에 계속 남기면서 사는 게 대충 사는 것이겠지.

온종일 천정만 들여다 보고 누워 있는 날이 있다. 이것도 싫고 저것도 싫고 싫은 것들 중에 내가 제일이다. 이렇게 생이 허무로만 밀려들기도 하는 여유가 있다. 나에게 그런 여유가 있다는 사실이 싫다. 이 여유를 즐기는 게 대충 사는 것이겠지.

영화 조커를 보고 아내에게 조커처럼 살아야겠다고 했더니 조커처럼 살지 말라는 게 영화의 교훈이라고 했다.

대충 살기로 했다. 간절하게.
AND

수제비를 먹다

반죽을 만든다
전라도 밀가루와 강원도 수돗물
이런 이십일 세기
달걀은 집에 없고
소금은 깜빡했다
이런 살림살이
이런 정신머리
반죽이 손에 묻지 않을 때까지
뭐든 자꾸 치대면 정이 떨어진다
멸치 국물을 내는 동안
마늘을 다지고
감자 양파 호박 고추 대파를 손질한다
국물에 들어갈 순서대로 손질하고 싶은 내 마음의 순리
멸치를 건져낸 국물에 재료를 넣는다
어떤 모양이든 될 수 있는 반죽을 대충 뜯어 넣는다
벼는 익으면 고개를 숙이고
밀가루 반죽은 수면위로 떠오른다
이러거나 저러거나 내 삶은 한 번도 익어보지 못했다
사랑의 모양이 아니라 이리저리 뜯긴 상처뿐이지만
호박을 더 작게 썰어넣을 걸 그랬다는 내 말에
그렇다고 하는
당신과 마주앉아 후후 불어가며 먹는
수제비는 사랑이니까
뜨거워 입천정이 다 까져도
당신이 맛있다고 하면
그게 사랑이니까
비가오든 안오든
뭔가는 먹어야 하니까
치댈수록 끈끈해지는 당신과
비 내린 다음날 수제비를 먹는다
AND

만두국을 먹다

마주 앉은 사람은 설렁탕을
나는 만두국을 먹는다
뽀얀 뼛국물 안에
고기를 갈아 속을 채운 만두가 잠겨 있고
남의 살을 먹는 주제에
먹으면 피가 잘 돈다는 파도 잔뜩 넣었다
마주 앉은 사람이 고기를 건져 먹다가 웃는다
나는 만두를 건져 먹다가 웃는다
살다보면 누군가와든 마주앉아 뼛국물을 먹는 일이 있다
친한 친구나 덜 친한 친구
처음 보는 사람 또는 자주 보는 사람
연인이거나 연인이었던 사람
방금 이혼 수속을 마친 전 아내
누군가와는 마주 앉게 된다
지금 내 앞에선
곧 나를 떠날 사람이 웃는다
뼛국물을 삼키며 웃는다
입안에서 만두가 터지고
만두에선 시큼한 김치맛이 난다
AND

조카뻘의 직장 동료랑 열정에 대한 얘기를 했다.

어제 같이 걷다가 운동장에서 불을 밝히고 축구를 하는 사람들을 봤다. 조금 있다가는 족구클럽 사람들이 족구 하는 걸 봤다. 밤 10시 경의 일이다. 올해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29살 친구가 자기는 족구하는 사람들 같은 열정이 없어진지 오래된 것 같다며, 저런 사람들보면 부럽다고 했다. 나는 잠깐 생각해보고 어렸을때부터 열정이 없었던 것 같다고 한 다음 웃고 말았다.

열정이란 게 불같은 사랑과 비슷한 걸까? 기타를 처음 시작해서 하루에 10시간을 치기도 했던 일을 열정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내 동료가 그런 열정을 얘기한 거라면 그 친구가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한 것도 열정에 포함된다. 20대 중반에 지금 아내 만난다고 용인에서 술 먹다가 택시타고 대학로 왔던 생각이 났다.

열정 얘기를 마음속에 담고 있다가 또 다른 조카뻘의 직장 동료랑도 열정 얘기를 했다. 공무원 시험 합격한 사람들을 보면 눈이 동태 눈인 경우가 대부분이고 자신도 열정으로 공부한 게 아니라고 했다. 얘기의 결론은 가장 열정이라고 할 수 있는 열정은 사랑 뿐인 것으로 났다.

그리고 나는 동태눈깔로 회사 다니고 있다.

평생을 가져가는 열정이 있나? 그런 사람들도 있긴 한 거 같다. 혜은이 노래도 생각나고, 열정이 있으니 울었을 것이다. 안개속에서든 어둠속에서든.

처음 열정을 얘기했던 친구는 서울시 공무원 시험에도 합격해서 서울시로 가기로 했다. 계절마다 한 명씩, 잘 가라.
AND

돈까스를 먹다

아프리카 돼지열병이 유행하고
돼지들은 영문도 모르고 죽어가는데
나는 나랑 사장님 뿐인 가게에서 돈까스를 먹는다
세상에 흔한 비오는 오후 네 시에
비 오는 오후 네 시보다 흔한 돈까스를 먹는다
언제부터 돈까스가 흔해졌나
언제부터 돼지고기가 흔해졌나
사람보다 흔한 돼지고기
흔해지고 나면 전멸의 바이러스가 퍼지기 좋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하군
만날 딴 생각만 하고 있는 나를 닮았다
묵직한 소스가 뱃속에 달콤하게 퍼진다
안도감을 주는 맛이군
어떤 돼지들은 죽고 나는 살았다
어떤 사람들은 죽고 나는 살았다
살아서는 세상에 믿을 놈 하나도 없다고 생각한 날
혼자서 돈까스를 먹는다
모질게 살겠다고 모듬으로 먹는다
AND

생강차를 먹다

 

점심으로 뼈해장국을 먹고

후식으로 생강차를 마시는 오후

대추차를 마시려고 했는데 대추가 다 떨어졌대서

대추차를 못 마시고 생강차를 마시는 오후

조카뻘 나이의 동료와 마주앉아 해장을 말하고

각자의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며 생강차를 마시는 오후

생이 가볍길 바라며

찻잔 위에 둥둥 떠 있는 잣을 씹는 오후

찻잔 바닥엔 무거운 생각같은 생강조각

일부러 끝까지 비우지 않은 찻잔 속을 들여다 보게 되는 오후

AND

이대로 산다면

.....
이대로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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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10 - 일기

그때그때 2019. 9. 10. 17:50
누추함을 조각조각 이어붙인 것 같은 삶, 이라고 최근에 적었다.

아내의 우울이 나에게로 옮겼다. 그렇다고 아내가 쾌활한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둘 다 깝깝한데, 내가 더 깝깝하다. 바위에 꽂힌 엑스칼리버를 뽑아내려는데, 손이 칼손잡이에 붙어서 도무지 떨어지지 않는 느낌이다. 칼도 못 빼고 손도 안 떨어지는 찝찝함. 아직 울지 않았지만 이런 기분은 운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하필 이럴 때 토요일 당직이었다. 일요일 아침에 집에 내려갔다. 각자 자기 할 거 하면서 놀아도 아내랑 조금이라도 더 같이 있는 게 내 정신 건강에 좋다. 

'유열의 음악앨범'을 봤다. 정해인 멋있더라, 목소리도 좋았다. 정해인도 우울할 때가 있겠지. 영화는 만날 사람은 만나고 헤어질 사람은 헤어진다, 는 얘기다. 그 사이사이에 선택이 있다. 라디오 영화라 봤는데, 나보다 네 살 많은 사람들 이야기라 어느정도 몰입이 됐다. 

갑자기 든 생각인데, 있기 싫은 곳(정선)에 있는 것도 배우자와의 사별만큼은 아니지만 스트레스 지수가 높다. 그런 사람들이 잔뜩 있는 회사가 어떻게 잘 굴러가겠나.

어제 윗줄까지 적었다.

오늘은 몸살이 났다. 출장을 가느라 운전을 하는데 무릎이 뜨거웠고, 잠시 커피 마시다 화장실에 들렀는데 오줌에서 피로의 냄새가 났다. 요오드 냄새 같은거라고 해야하나? 암튼 그런 게 있다.

추석에 근무가 잡혔다. 9월 중순인데 추석이라고 산불근무를 서게됐다. 근무서라고 하는 사람이나 그걸 중간에서 커트하지 못하는 사람이나 근무 서는 놈이나 똑같다. 

피곤한 계절이다.

근무는 안서게 됐다.

그래도 피곤한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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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기 위해 싸는지
싸기 위해 먹는지
먹고 살기 위해 싸는지
먹고 싸기 위해 사는지
AND


변화

가을로 가는 주말
아내는 우울병에 걸렸고 
멀리서 친구가 다녀갔다
다른 친구와는 커피를 마셨고
아내랑 호수를 한 바퀴 돌고서
바다 옆에 한참을 있었다
뭔가 변해야겠다고 생각했다

AND

아기소나무
가리왕산 정상(바람에 치우친)
정선 제2교
사마귀
강바닥
폐허(투구꽃?)
가리왕산 하봉
강바닥(가을)
강바닥(겨울)
겨울지붕
분비나무 새잎
치앙마이

AND

마른꽃

매번 사랑이 끝나고나면
열병이 지나간 자리에 피어오르는 마른 꽃
온 몸 구석구석 간지럽게 마른 꽃
피지도 않고 저물지도 않는  꽃
마른 꽃
살아 있지 않지만
살아온 자리자리 기억하라고 피어나는 마른 꽃
작은 기억의 흔적마다 마른 꽃
간지러운 기억들 잊으려 긁은 자리마다
상처로 피어오른
마른 꽃

AND

사거리에서

어느 방향에서건 최초의 파란불이 있었을 사거리 신호등
순서를 지켜 길을 건너는 자동차와 사람들
뜻없이 걷다 붉은 신호등이 사거리 한 모퉁이에 나를 멈춰 세웠을 때
문득,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생각했다
시작이 있었으니 끝도 있을 것이고
그게 지금이라면 좋겠다 생각했다
신호가 바뀌고 내게 다가오거나 내게서 멀어지는 사람들
다시 신호가 바뀌고 나를 지나치는 자동차들
한 번 더 신호가 바뀌었을 때,
굳었던 마음이 풀리고 길을 건너는 대열에 합류했다
뜻없이 걷다가 시작도 끝도 중요하지 않은 사거리에서
다시 붉은 신호를 만났을 때
문득,
이대로 계속 나아가도 좋겠다 생각했다
AND

치앙마이에서 쓴다.

오늘밤 비행기로 여길 떠난다.

치앙마이는
기념품 가게 악어들도 합장을 하고 있고 들개가 많은데 개들이 대체로 말랐다.
야시장이랑 - 낮에는 더워서? - 마사지 가게가 많다
풀밭에 땅콩이 많고 - 밥 볶을 때 땅콩기름을 쓴다고 함. 짜장면에 돼지기름 쓰는 거랑 비슷한 느낌. - 나무들이 크고 시원시원하다.


치앙마이에서는
멀티플렉스 극장에서 영화 '기생충'을 봤다. 초중반이 지루했지만 마지막에 몰아칠 때는 임팩트가 있었다. 남의 집을 제집처럼 생각했다가 사단이 나는 스토리.
온통 태국어에 사진도 몇 장 없는 메뉴판이 있는 식당에서 저녁 사 먹었다. 두 가지는 제대로 나왔는데 족발덮밥 대신 모닝글로리 볶음이 나왔다. 맛있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발마사지를 받았다. 시원했다.
인피니티 풀이 뭔지 알았고 거기서 수영했다. 좋았다.
먹고 걷고 먹고 걷고 먹고 걷지 않고 먹기도 했다. 주로 먹었는데 다 맛있었고, 아내 입맛에 맞아서 좋았다. - 난 대체로 뭐든 다 잘 먹음 - 볶음밥 먹느라 국물 쌀국수는 몇 번 못 먹었다.

우리나라보다 물가가 싼 나라에 와서 그 나라 사람들은 시세로 사 먹는 밥을 싸다고 생각하면서 사 먹는 일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잘은 모르지만 우리나라보다 물가 비싼 나라도 별로 없지. 깊게 생각하지 말아야지. 계획이 없는 게 최고의 계획일 수 있듯이 생각이 없는 게 최고의 생각일 때도 있으니까.

아내의 결정에 따라서 앞으론 비행기 타고는 제주도도 안 가기로 했다. - 기후 위기에 악영향을 주는 일을 줄이겠다고 함 -

며칠 잘 놀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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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울 또는 생의 허망은 빈틈이 없어 보이는 삶에서도 작은 구멍을 찾아서 기어이 밀고 들어온다.

​ 체험만 하다가 끝나는 인생, 이라고 얼마전에 적어뒀다. 특별히 잘 하는 게 하나도 없고 돈도 없고 당장 내년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고 하고 싶은 건 많은데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는 아내의 우울과 관련이 있고, 내 우울과도 관련이 있다.

 누구나 한 가지씩은 특출나게 잘하는 것이 있다고 말은 쉽게 하지만 모두가 '생활의 달인'에 나오거나 이름을 떨치는 예술가나 유명인사가 될 수는 없다. 대부분의 삶은 자기가 잘 하는 게 뭔지도 모르고 그냥 흘러가는 삶일 것이다. 

 나도 마찬가진다. 살면서 직업으로 삼거나 돈을 벌었던 여러가지 일들처럼 농사를 지었던 2년도 체험들 중에 하나 뿐이었을까, 생각하면 뜨끔하고 우울하다. 농사 지을 때 농사에 100프로 집중하지 못했다. 그러지 못할 여러 조건들이 있었지만 내가 좀 더 기술이 있고 생각이 있고 농사에 적성이 있었다면 '체험'이란 단어를 떠올리진 않았을 거다. 그렇다고 지금 일은 천직이라 생각하고 초집중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냥 어영부영 산다.

​ 기술자나 전문가가 되지 못하는 삶. 근데 그게 어때서!

​ 인류는 망해가고 있지만 인류의 시작부터 세상은 다 서로에게 기대서 - 착취라는 말도 좋다. - 돌아가고 있고 모두가 어느 부분에선가 지금의 세상을 떠받치고 있다. - 기여하고 있다, 는 말도 좋다.

​ 어제 '정원가의 열두달'을 읽었다. 카렐 차페크는 정원을 가꾸고 글을 쓰고 그의 형은 삽화를 그리고 출판사에서는 책을 만들고 사람들이 책을 읽는다. 시간이 흘러서 한국의 출판사에서 번역을 해서 출판하고 절판된 것을 다시 복간해서 출판하고 서점과 도서관으로 책이 옮겨지고 나는 빌려읽은 책을 반납하고 누군가는 또 그 책을 읽고 그 책 속에서 내 머리카락이나 눈썹을 발견하기도 할 것이다. - 어쩌면 말라붙은 고추가루를 발견할지도 모른다. - 이 모든일에 연루된 수 많은 사람들과 만남이 세상을 지탱하고 있다. 세상의 모든 일이 이런식이다. 고리는 끊어지지 않는다.       

​ 왜 이런 얘기를 썼냐면 어제 저녁에 회사 사람 하나가 나한테 욕하길래 나도 같이 욕했다. - 나는 술을 안 마셨고 상대방이 혼자 술에 취한 상태라서 때리지는 않음 - 나는 마음의 어느 구석에 나한테 못되게 굴면 가만히 안 있는다, 란 문장을 품고 있다. 나한테 먼저 욕한 사람도 마음속에 뭔가를 품고 있는데, 그게 터져나왔을 것이다. 이해는 하는데, 이해만 한다. 그래도 때리지는 말아야지.

​ 우리 회사에 일용직 아저씨들까지 50명 정도가 다니는데, 각자 자신들의 체험으로 살아온 50명이 있다보니 당연히 여러가지 갈등이 있다. 생이 끝날때까지 아니, 인류가 끝날때까지...

​ 생이 어지러운 친구 하나가 좋은 삶은 헷갈리지 않는 삶인 것 같다고 했는데, 좋건 나쁘건 어중간하건 헷갈리면서 가는게 삶이고 살아 있으면 누구나 다 어떤 삶을 산다, 는게 내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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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번 국도 새벽 한 시

길을 건너다 죽은 죽은 고양이
길을 건너는 고양이
또 죽은 고양이
또 길을 건너는 고양이
눈치를 보다 길을 건너는 고양이
두리번 거리는 고라니
차에 치일 뻔한 고라니
또 두리번 거리는 고라니
길 옆으로 느리게 숨는 고라니
천지사방 고요속에 내 자동차와
자동차 전조등 빛과
고라니와 고양이
죽지 않았으면 살아있는
고양이와 고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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