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만나고 돌아가는 길이다. 청량리에서 출발한 기차가 양평에 닿기 전에 글을 끝내야지, 생각한다.

 어젯밤 11시 반에 신월동에 도착해서 여전히 내 삶에서 가장 긴 세월의 지분을 갖고 있는 588 종점 근처 여관에서 잤다. 잠든 아버지 깨워서 그 옆에서 자고 싶지 않았다.

 오늘은 아버지 실업급여 1차 수급일이다. 사람들이 많이 너무 많이 몰려서 교육은 일찍 끝났다. 아버지 서류를 대신 작성하면서 둘러보니 고용센터 직원이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몰라서 어쩔 줄 모르는 사람이 두 명 있았다. 내가 없었으면 아버지도 그 그룹에 포함됐겠지. 실업급여 교육을 담당한 직원은 일과 사람에 찌들어 지쳐있고 실업급여 타러 온 사람들 사이로는 나라에서 주는 돈을 받을 수 있을까, 하는 불안과 의구심이 흘렀다. 2015년 겨울에 실업급여를 타 봤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고용센터에는 항상 어떤 절박함이 흐르고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피로감을 두르고 있게 된다. - 현재 정식 명칭은 <고용플러스센터> -

 고용센터를 나와서는 인터넷뱅킹을 신청했다. 은행을 나와서는 병원에 가서 약을 처방받았다. 오늘 만난 의사는 차트를 쭉 훑어보더니 치매인지 아닌지 빨리 확정이 되어야 지금 먹는 혈액순환 비타민약(글리아타민)이 아니라 정식 치매약을 먹을 약을 먹을 수 있다고 알려줬다. 그렇게 되지 않길 바란다.

 병원을 나와서는 밥을 먹었다. 내가 밖에서 먹자고 했더니 아버지가 오리집에 가자고 했다. 오리집주인이 오랜만에 오셨네요, 했다. 조기축구 동료들이랑 자주 가던 집인가 보다. 로스가 뭔 뜻인지 모르지만 오리로스를 먹었다. 아버지는 세상 일의 많은 뜻을 잊거나 잃어버렸으니까 로스의 뜻이 중요하진 않다.

 식당을 나와서는 아버지 집에 갔다. 약을 챙겨드리고 매일 하는 얘기를 또 반복했다.
- 아버지, 약은 제가 전화했을 때만 드시고요.
- 티비를 보더라도 무슨 얘기를 하는지 집중해서 보시고요.
- 남들이 무슨 얘기를 하면 뭔 말을 하는지 잘 들으시고요.
- 아버지는 지금 잘하고 있어요.

 아버지는 원래도 욕망이 드러나지 않던 사람인데 지금은 욕망이 아예 없어진 거 같다. 단 하나 의무감으로 생각하는 건 엄마한테 매달 돈을 보내고 싶다는 것인데, 실업급여 다 받고 나면 그것도 끝이다.

 남은 생을 멍하게 보내지 않기 위해선 뭔가 집중할만한 재미있는 걸 찾아야 하는데, 쉽지가 않다. 아버지랑 티비를 보면서 낱말 맞추기 게임 같은 걸 하는 내 모습을 상상해봤는데, 그렇게 하려면 아버지가 강릉 와서 살아야 하고 막상 강릉 와서 살면 지금보다 아버지에 대한 신경을 덜 쓸지도 모른다. 그러니 엄마 말대로 아직은 아버지가 서울에 있는 게 나을지 모른다.

 친구 가게에 와서 아버지 공인인증서를 만들다가 실패했다. 그 과정에서 아버지랑 통화하면서 목소리가 커졌다. 아버지한테 화가 난 건 아니다. 목소리를 높이고 나면 수화기 너머 아버지가 괜히 주눅 드는 거 같아서 기분도 안 좋고 반성하게 된다. 공인인증서 만들기는 월요일에 다시 시도하면 된다.

 아버지랑 그냥 같이 있으면 괜찮은데, 뭔가를 하려고 시도하면 진이 빠진다. 진이 빠지고 기분이 안 좋은 상태로 적는다. 

 청량리에서 강릉으로 가는 ktx산천 859열차는 아직 양평역에 닿지 않았다. 굿.

 오늘자 아버지 부정 요인
 - 밥 먹기 전에 엄마랑 통화했는데, 밥 먹던 중에 통화한 거 잊어버리고 또 전화하려고 함

 긍정요인
 - 계절을 헷갈리면 끝이라고 하니, 알았다고 함(그리고 지금이 겨울이라 대답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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