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를 마시다 - 좋습니다 -

테이블 위 커피잔 안에
내게 커피를 내려준 당신이 들어있는 일이,
좋습니다
좋다는 말은 너무 쉬운 말이지만
가장 정직한 말이기도 해서
굳이 다른말로 바꾸고 싶지 않습니다
당신이 커피콩을 갈고
물을 끓여 잔을 데우고
당신은 먹지도 않는 커피를
오직 저를 위해 내려주는 모습이
이 커피잔 안에 흐리고 선명하게
모두 들어 있습니다
커피 맛있습니다,
거짓이 아닌 말에
많은 것이 포함된 말에
두번째로 정직한 말이라
바꾸고 싶진 않은 말에
웃어주는 당신이
참 좋습니다

AND

친구랑 친구 아이가 다녀갔다. 친구 아이가 바다보면서 핸드폰 하고 싶다고 했다고 한다. 친구는 서울에 10억 아파트가 있고(빚은 다 갚았는지 모르겠으나) 양쪽 부모님들이 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다. 나랑 학교를 같이 다닌적은 없는데, 한 동네에 오래 같이 살았고 친구 부모님이랑 우리 아버지는 아직도 그 동네에 산다. 어렸을 때 이 친구가 말 없이 소주 먹고 싶다고 연락와서 말 없이 소주 두병씩 먹고 헤어졌던 적 있는데, 만나면 그때 얘기를 하곤 한다. 좋았다고. 친구가 좋았다고 하니 나도 좋았다. 친구 아이는 올해 6학년인데, 마음이 좀 아파서 먼저 친구가 혼자 왔을 때 걱정을 많이 했었고 나도 얘기 듣고는 신경이 좀 쓰였었다. 삽당령에서 만나서 셋이 등산을 했다. 시간은 짧지만 오르막이라 힘든 코스인데 어린이가 끝까지 잘 올라왔다. 친구는 이 코스가 두번째인데, 먼저 다녀간 이후로 자꾸 생각이 났다고 했다. 자꾸 생각이 난다는 건 열망, 의지, 살아있음이다. 바다보면서 핸드폰 하고 싶다는 마음도 살아있음이다. 산을 내려오면서 아이에게 유명해지고 싶다고 했더니 바로 관종이란 답이 돌아왔고 맞다고 했다. 유명해지고 싶다는 말도 살아있음이다. 아이도 나도 항우울제를 먹지만 살아있으니 예쁜것도 보고 숯불에 고기도 구워 먹는다. 친구는 위스키를 먹고 나는 소주랑 맥주를 마셨다. 아이는 맥주병은 갈색 소주병은 초록이니 둘을 합치면 나무가 된다는 명언을 남겼다. 밤이 깊은 후에는 화로에 장작불 붙여놓고 놀았다. 술과 불. 사람을 흥분시키는 두 가지. 아이는 반만 즐거웠고 어른 둘은 풀(full)로 즐거웠다. 나는 불을 보면 금각사랑 남대문에 불지른 아저씨를 생각한다. 이거 위험 요인인걸. 아침에 라면 먹고 해산했다. 아이에게 숲속에서 보낸 하루가 좋은 기억이 되었으면 좋겠다. 십년 후나 이십년 후에 어제일을 즐겁게 기억하고 싶다.

집에 도착해서는 아내 운전기사 노롯을 하고 있다. - 대기중에 이 글을 쓴다. - 살아 있으니 운전기사 역할도 한다. 체념인가

술 취해서 또 여기저기 전화했는데, 병이다. 고쳐야지.

AND

나비의 춤

하얀 나비 한 마리 눈 앞을 지나갔다
숲속을 산책중이었다
여름으로 가는 시작의 숲에서
꽃 이름을 딴 껌 냄새가 올라왔다
무심결에 손을 뻗었고
나비는 내 손아귀에서 부서졌다
다른 손을 뻗을수도 있었는데,
슬퍼서 잠깐 울었다
그때 바람이 불었고
나무들이 떨었다
나비를 쥔 손이 펴지질 않았고
나비들이 내게 몰려들었다
온 몸에 달큰한 향기가 번졌다
무섭고 기분좋았다
꽃으로만 꽃으로만
나비들과 함께 자고 일어나며 세월을 보냈다
밤새 찬바람이 불었던 날
어느 나무 아래서 눈을 떴다
손 안의 나비도
날 덮어주던 나비들도 떠났다
서러워서 조금 울었다

-> 동화로 쓸까 생각.

AND

차갑거나 뜨거운

한 개 뿐인 건 조심해야한다
뇌 심장
함부로 놀리거나 굴리면 안된다
혀 배꼽 배꼽 아래
두 개 있는 건 둘 다 잃으면 안된다
팔 다리 눈 귀 배꼽 아래
하나일 때도 둘일 때도 있는 내 마음
차가운 마음과 따뜻한 마음
하나일 때도 둘일 때도 있는 당신
차가운 몸과 뜨거운 몸
그리하여 사랑은
차가워도 뜨거워도 하나
허나,
하나뿐인 건 조심해야 한다

AND

운동하고 씻고 집을 나섰다. 은행에서 만원을 찾고 복권방에 들러서 로또복권을 샀다. 잔돈 오천원을 새지폐로 받았다. 이번주 느낌이 좋군. 남대천을 따라 걸으며 물고기들의 춤을 봤다. 오늘 하늘이 좋군, 자외선이 강해도 반짝이는 공기가 좋다. 낚시하는 사람들, 저게 잉어떼라며 멀리서 강을 내려다보는 사람들을 지나서 어제 세워둔 자동차를 찾아서 강릉역으로 갔다. 13시 30분 친구들이 도착했다. 오징어가 한 마리 만원이라 오징어회는 다음에 먹자고 하고 마트에 들러서 장을 봤다. 돼지고기 네 팩 포함 17만원. 넷이 다 먹을 수 있나? 생각했다. 암튼 산에 올라왔고 자동차로 온 친구가 합류했다. 다 모였으니 이제 시작이다. 나무랑 산이랑 하늘 구경하고 내려오는 길에 자동차 타이어 터지는 소리가 났다. 올라가면서 다음달 월급 받으면 타이어 바꿀 계획이라고 했는데, 말이 씨가 됐나? 다행히 오랜만에 비포장을 타면서 돌에 부딪친 앞쪽 바닥 커버가 찢어진 일이었다. 가위로 터진 부분을 잘라냈다. 안좋은 조짐이기도 하고 아무일도 아니기도 하고 좋은 조짐이기도 한 사건이다. 하루는 대체로 이런일들의 연속으로 흘러간다. 숯불에 고기구워 먹기 시작했다. 맛있다. 얘기 얘기 웃음 웃음 고기 고기 술 술 불 불 별 별. 넷이 즐겁게 다 먹었다. 이런게 친구겠지. 푹 자고 다음날. 산을 내려와서 국밥을 먹고 자기차로 돌아갈 친구는 줄을 서서 닭강정을 사고 기차로 돌아가는 둘은 번갈아 화장실을 가고 바닷가에 잠깐 커피 가게에 잠깐 친구 하나 집으로 돌아가고 대관령에 잠깐 다시 바닷가에 잠깐 하늘도 바다도 예쁜날. 이틀연속 반짝이는 날은 드문데. 좋은 징조인가, 생각나서 맞춰본 복권은 꽝. 강릉역에서 토스트를 먹으며 또 한 번 즐겁고 포옹 후 15시 30분 차로 해산. 집에와서 운동하고 씻고 기타치고 놀았다. 23시 30분엔 다시 강릉역에 왔다. 서울갔던 아내가 돌아왔다. 주말에 잘 놀았다. 내일은 출근.

-> 2021년 6월 12일 남대천변 접시꽃.

AND

독촉

멋진 얘기를 하지 않는 사람의 얘기를
글로 남길 수 있을까?
일테면 배려하는 것만이 사랑은 아니란 말
내가 처음 들은 그 말은 배려야 말로 사랑이란 말이었는데
사랑 = 배려, 인지를 알고 싶은 시절은 아니다
오늘 나는 두 사람에게 전화를 했고
둘 다 자기가 한 얘기를 모른다 했다
기억하고 있는 자의 책임에서
나는 두 사람을 책임지고
그들의 말은 달랐다
사랑이 궁금한 내가
이별의 황혼인 이들과 말을 섞지 말았어야지
우측엔 빈택시
좌측 강변엔 운동하는 사람들
나는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AND

아버지 꿈

제삿날. 기억에 없는 대궐 같은 시골집. 친척들이 다 모였다. 돌아가신 할머니도 보이고 친척들과 이런저런 대화. 엄마도 기분 좋아보이고. 나쁘지 않았다. 나는 창가에 편안하게 걸터 앉아 있고 갑자기 소 냄새가 났다. 아버지랑 jd 작은 아버지가 긴 복도를 지나 전 부친 기름 냄새가 남은 마루로 들어왔고 나는 농담처럼 아버지가 오시니까 소냄새가 나네, 라고 했다. 할머니까지 모든 사람들이 즐겁게 웃었다. 아버지랑 포옹을 했는데, 아버지 넥타이를 보고 문득 우리 아버지 치매지, 떠올랐다. 아버지를 안은채 아버지 귀에 대고 아버지 오늘이 몇월 몇일이죠, 묻는데. 울음이 터졌고 그 장면에서 깼다. 사랑인가?

2021년 6월 8일 아침 3시 30분.

-> 낮에는 예쁜걸 보고 밤에는 격정과 걱정이 묻은 꿈을 꿨네.

AND

또 곰이 겨울잠 자듯 자버렸다. 몇 번을 깼는데 깨자마자 다시 잠들길 반복했다. 누군가를 취조하고 있는데 당최 실마리가 풀리지 않는 꿈이 계속 이어졌다. 다시 꿈속으로 돌아가 정답을 찾고 싶었다. 새벽 두 세 반, 다섯번 쯤 같은 꿈에서 깼을 때 포기했다. 포기가 빠른건가?

토요일엔 ds랑 ssy를 만났고 잘 마시고 놀았다. 남의 인생에 내 말을 보태는 것에 대해서 생각했다. 요즘 많이 하는 생각이다. 말을 하는 쪽도 듣는 쪽도 과하면 안되겠지. 과하지 않은것이 친구일까? 연예인들 얘기가 대화의 주제가 되는것도 같은 경우다. 결국은 니(내) 할일이나 잘해(하자)가 된다.

ds랑은 그냥 이렇게 살면 되지란 말로 헤어졌다. 인생이 다 잘 풀릴 순 없지만 살아있는 게 중요하다는 결론이다. 언젠가부터 나를 지배하고 있는 이 생각에 안네 프랑크를 예로 들때가 많다. 저녁 뉴스를 틀어놓고 운동을 한다. 수 많은 죽음이 귓속에 들어왔다가 숨을 내뱉을 때 빠져나간다. 죽으면 다 소용없다. 내 이런 생각은 살고자 하는 의지가 아니라 체념인가 싶기도 하다.

출근전에 실외 베란다에서 - 우리집의 자랑 - 아버지 약 드시라고 통화하고 담배 피우다가 아내의 완두콩을 유심히 들여다봤다. 꽃 피었던 자리마다 콩 꼬투리가 달려 있다. 많은 생의 운명이 그러하다. 구시대의 유물같은 사람이 되지말자 생각했다. 나는 어떤 꽃을 피웠나? 꿈속의 정답을 찾았어야 했나? 아버지는 어떤 꽃을 피웠나? 뭔가 어지럽게 시작되는 여름이다.

AND

잘해주는 것에 대한 생각

어젯밤 공부 모임 마치고 j랑 길을 걷다가 말했다.
- 이 집이 팥빙수를 잘해준다던데.
- 전 여기는 한 번도 안 가봐서 팥빙수 좋아하세요?
- 아니오. 잘 해주는 걸 좋아하죠.
- 아, 예...
어제는 대수롭지 않은 대화라고 생각했는데, 지나가며 흘리듯 한 말에 팥빙수 좋아하냐고 물어봐 준 마음이 좋다. - 고마운 건 아니고 좋다. -

당연한 얘기지만 나한테 잘해주는 곳, 잘해주는 사람이 좋다. 친구는 나한테 잘해주는 사람이고 단골집은 나한테 잘해주는 곳이다. 나한테만 잘해주는 건  찐사랑인가? 엇나간 사랑인가?

첫 줄 대화의 팥빙수 가게, 영일군이랑 만나면 가는 양갈비를 구워주는 가게, 기름을 삼 만원만 넣어도 화장지를 주는 주유소 - 내가 잘해주는 곳의 예로 들곤 함 - 는 표면적인 잘해줌이고 진짜 잘해주는 건 좀 느낌이 다르다.

토요일 아침 나한테 잘해주는 곳 두 곳에 다녀왔다. 카센터랑 이발소. 카센터랑 이발소에 들어갈 때는 오랜만에 왔습니다, 라고 하고 나오면서는 항상 고맙습니다, 라고 한다. 오늘도 그랬다. 들를 때마다 항상 고맙게 생각하기 때문에 그 말이 저절로 튀어나오는데, 두 가게 사장님 모두 제가 고맙죠, 라고 받아줬다. 내가 모르고 스스로 할 수 없는 분야인 자동차와 수리와 이발을 친절하게 해주시니 고마운 것인데, 서로 고마운 마음이 있다면 그건 수리비와 이발비를 떠나서 참 좋은일이다. - 이발하면서 이 아저씨 돌아가시면 어디가서 머리 자르지? 면도까지 해주고 만 삼천 원 이발비는 너무 싼 게 아닌가? 생각했다.

지금은 나한테 잘해주는 봉봉방앗간에 왔다. 아르바이트 하시는 분이 이발했는지 물어봐 주고 커피도 늘 두 잔 내려주고 안 바쁠때는 세 잔도 내려주는 좋은 곳이다. 대표님도 내가 커피 좋아하는 걸 알아서 그런건지 누구에게나 그런건지 늘 커피 더 마시고 가라고 한다. 지금 첫 번째 커피가 비어가고 있다. 잠시후엔 한 잔 더 드릴까요, 한 잔 더 주시겠습니까, 둘 중에 한 마디로 한 잔 더 마시게 된다. 좋다.

대접받는 걸 좋아하는 나는 누구에게 잘해주고 있나? 솔직함에 대한 강박을 핑계로 매일 독설만 늘어놓고 다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그리고 유명해지고 싶다.(유명해지면 대접받을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런지도. 적어 놓고도 웃기네.)

짤은 사무실 마당 6월 층층나무 - 내 나무2

AND

<술 때문은 아니고 뇌에 찌꺼기가 있음.
경증치매고 PET상 알츠하이머로 보임. 젊으면 진행이 빠른 경우가 많음.
기억력약은 한알반 두 달 먹고 최종적으로는 두 알고 늘릴것임 - 현재 쓸 수 있는 약은 이것뿐
맥박이 느리다 - 계속 느리다면 약을 바꿀수도 있음
집에서 혈압 재볼 것 - 혈압약 받는 병원에서 혈압약 줄일 수 있는지 확인>

오늘 아버지 약타러 병원가서 의사에게 들은 내용이다. 동생은 충격을 받았고 나는 그러려니 하고 엄마는 여전히 보험료가 걱정이고 아버지에게 치매란 말이 나쁜 것이 아니고 아버지는 치매라고 하니 아버지는 그러려니 한다. 아버지가 그러려니 하는 사람이라 좋다. 나는 아버지의 그러려니 하는 점을 닮았다. 술을 정말 잘 끊었고 약만 잘 드시면 된다는 얘기는 만날 때마다 열 두 번도 넘게 하고 있다.

아버지는 뭔가 깔끔하게 하지 못해서 그렇지 혼자서 씻고 혼자서 밥 먹고 혼자서 청소하고 혼자서 은행에도 간다. 오렌지를 사 드시기도 한다고 한다. 의사가 하루에 두 번 맥박을 재는 것이 좋겠다고 해서 혈압계를 사와서 혼자 해보시도록 했는데, 어설프게나마 혈압을 쟀다. 아침 저녁으로 체크라하니까 매일 저녁에 전화해서 혈압 체크했는지 확인하면 된다. 그 핑계로 하루에 두 번 전화하게 됐다. 잘된것도 잘못된것도 없다. 아버지 머릿속에 찌꺼기는 물건의 명칭을 관장하는 부분에 쌓인것인지 물건, 운동 갔다온 장소, 매일보는 드라마 제목 같은 건 전혀 떠올리지 못한다. 기억하지 못하는게 아니라 머릿속엔 있는데 말로 안나오는 건가? 그게 기억하지 못하는 건가?

이틀에 한 번은 아버지를 만나는 둘째 이모는 아버지 만나면 많이 답답하다고 하는데, 나는 자주 보지 않으니까 그리고 나는 그러려니 하는 사람이니까 아버지는 원래도 약간 어설펐으니까 아버지가 많이 답답하진 않다. 엄마는 아버지 만나러 서울 온 날은 잔소리를 많이 해서 저녁때가 되면 목이 쉰다고 한다. 사랑인가? 기대인가? 욕심인가? 암튼 엄마도 그런 마음을 조금은 놓아야 한다.

어제 고교동창들 만났다. 대충 27년 된 사이다. 5인방 중에 넷이 만났는데, 먼저 강릉에서 NH만났을 때도 말했던 거지만 특별히 생활고에 시달리지도 않고 감옥에 가거나 크게 다치거나 죽은 일도 없이 만날 수 있다는 게 대단하다는 생각이다. 다들 이 세상에 잘 안착했다고 해야 하나? 이 얘기를 했더니 KH가 맞다면서 그렇지만 그러니까 더욱 조심해야 한다고 했다. 맞는 말이다.

아버지는 구치소도 갔다오고 일리걸로 미국에도 갔다오고 빚에도 시달리고 생의 말년에는 치매에도 걸렸지만 결과적으로는 크게 잘못하거나 잘못된 일 없이 살았다는 생각이다. 예외도 있겠지만 살아있으면 온전하게 산 것이다. 언제부턴가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큰 포션을 차지하고 있다.

아버지 파이팅!!

-> 목이대병원근처 열영합발전소 굴뚝. 서울 살때 많이 좋아핬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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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에 겨운 초록을 매일 본다. 좋은 마음이 한 시간은 간다. 험난한 삶에 그것만으로도 복에 겹다.

뭔진 모르지만 유명해지고 싶다. 유명해질 거란 희망을 여기저기 떠들고 다닌다. jk형이 명쾌한 답을 줬다. '외로워서 그래' 아내에게 그 얘길 했더니 아내도 명쾌한 답을 줬다. '야 인간은 원래 다 외로....' 나랑 놀아주는 사람들에게 항상 감사하며 살아야지.

달라질 게 없을 줄 알았지만 회사로 돌아왔어도 달라진 건 없다. 회사에선 나도 달라지지 않을 거니까 당연하다. 다만 회사 외적으로는 매일 운동을 하고 일주일에 두 번의 모임이 있다. 자세히 모르는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 어떤 자극을 준다.

어느 시점부터 나도 지쳐버려서 아버지랑은 하루에 한 번만 통화한다. 아버지 머릿속은 여전히(영원히) 알 수 없고 이모를 통해 듣는 몇 가지 소식을 종합해보면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 아침에 내가 먼저 전화하지 않으면 아버지가 먼저 전화하는 것만 해도 고마운 일이다. 아버지가 '어, 일우냐' 하면서 전화받을 때 굉장히 반가워하는 게 느껴진다. 우리 아버지 외롭구나 그동안 외로웠구나, 감정이 가슴을 후벼 판다. 아버지, 전화 더 자주 할게요.

12세대가 두 개 동에 모여 사는 옥천 연립은 얼마 전에 우리 집 계량기가 고장 났다고 해서 교체했고 나는 모르는 수도 공사를 했는데 그 후에 우리 집 변기에서 물 새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고- 변기 옆에 물 잠그면 괜찮음 - 어제는 아랫집에 사는 줄은 몰랐던 아줌마가 자기집 부엌에 물 샌다고 우리 집 문을 두드렸다. 집주인한테 전화해서 일련의 상황을 알려야 할 것 같은데 전화하기가 너무 싫다.

출근, 전화처럼 싫어도 해야 하는 일이 있고 막상 해보면 별것 아닌 경우가 많으니 변기도 확실하게 고치고 주인한테 전화도 해야지. 근데 그게 오늘은 아니다.

-> 삽당령 박달나무 채종원

AND

시간의 왼편

왼쪽은 시간의 반대방향
왼쪽으로 노를 저어라
갈림길의 왼쪽을 선택하라
오른쪽으로 부는 바람에 맞서라
왼뺨을 먼저 맞고 오른뺨을 내밀어라
대면하고자 하는 자의 반대편에 서라
그 쪽은 필히 왼편일터이니
과거의 실패는 과거의 일
현재를 사는 당신은 성공의 반대편에 서라
그게 왼편이고
거슬러 가는 길에는 거짓이 없다

AND

생선구이를 먹다 - 임연수 -

임연수를 굽는다
해산물의 원산지를 읽으러 간 마트에서 값이 싸서 샀다
누군가에 의해 먹기좋게 손질되고
플라스틱 포장에 랩을 씌우고 원산지와 가격까지 붙인
러시아산 해동 임연수 소금은 국내산
중반부로 향해가는 21세기의 증명일 뿐이니
가격표를 보고 오늘 아침 9시에 해동했다는 사실까지 알 수 있다는 사실에
절망하진 말자
임연수는 이면수 어느 동네에서는 새치라고도 부르고
먹을때마다 생각하는 건 아니지만
가끔은 생각나기도 하는 연수는 옛 애인의 이름
러시아에서는 형편이 어려워 못 사 먹는 사람도 있을
임연수 네 덩어리를 아내랑 맛있게 먹는다
삼 천원 어치 죄책감이 사라진 접시엔
약간 탄 지느러미와 뼈,
통칭 비린내라고 하는 생선 냄새만 남았다

AND

곰이 겨울잠 자듯이 잤다.
술도 안 마셨는데. 피곤했나?
곰이 강가에서 물고기 잡아 먹듯이 무력을 떨쳐야지.
이마에 뿔이 났다.
최근에 나쁜 생각을 한 적이 없으니 벌을 받은 건 아니다.
언젠간 곪아 터지겠지.
예전엔 수시로 돋아나던 뿔이니 신경쓰지 말아야지.
오늘의 첫 활동으로 귀를 판다.
귀지는 노란색이 아니라 누런색인데 그것도 정확한 색 표현은 아니다.
갈색과 노란색의 그라디에이션인가? 옅은 노랑인가?
rgb 숫자로 내 귀지 색깔을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 세상 어딘가에는 있을 것이다. 그게 위로가 되지는 않는다.
참어. 버텨. 최근에 위로가 된 말이다.
근데 나는 왜 위로 받아야 하지.
인간은 왜 위로 받아야 하나?
위로의 반대편에 있는 것이 정확히 떠오르진 않는다.
귀지를 모아서 변기에 집어 넣고 똥을 눈다. 어제 뭘 먹었더라?
귀지, 똥, 코딱지, 땀, 잠까지
몸은 정신보다 정직하다.
변기 물을 내리고 물을 한 잔 먹는다.
기브앤 테이크.
귀 파는 도구 끝에는 앵그리버드가 화내고 있지만 나는 화가 난 건 아니다.
현재시간 12시 51분. 자 오늘을 시작하자.



AND

돈까스를 먹다

밤으로 가는 시간
늦은 해장으로 돈까스를 먹는다
혼자 온 손님은 나뿐이고
맞은편의 젊은 부부는 아이에게 고기를 잘라 준다
수프 깍두기 된장 단무지가 먼저 나온다
- 이것 참 한국적이군
이어서 돈까스 두 쪽이 나온다
- 돈까스도 나만큼 외롭진 않군
한 개를 급하게 먹는다
이제 좀 공평하다
어제는 술을 마시기 위해서 술을 마셨다
삶이 순탄치 않을 때마다 그렇게 된다
기억을 잃도록 마셔도 바뀌는 건 없으므로
다음날은 뭘 먹어도 해장이 된다
해장 돈까스 해장 햄버거 해장 라면
해장에 고기의 때가 묻지 않은 음식이 없다
- 깊게 생각하지 말아야지
칼을 움직일 때마다
어디 부딪쳤는지 모르는 손등의 멍이 얼얼하다
어제 술상대를 해준 청년에게 질투를 느꼈던가
나는 그이에게 오만하게 굴었던가
튀김옷과 돼지고기가 따로 노는 돈가스를 내 생활에 비유하고 싶진 않다
- 이러니 저러니 해도 맛있군
잘 먹었다는 인사는 거짓이 아니었으니
그거면 됐다

AND

산 정상

내 숨소리와 바람소리
거친 숨 잔잔해지면
어디선가 이름모를 새 울음소리

AND

위스키를 먹다

위스키를 안 마셔봐서
위스키같은 게 뭔지 몰랐는데
당신과 어긋나게 앉아서
멀리 물 너머의 불빛을 바라보며
위스키를 마시는 지금이
위스키 같은 봄밤이구나
소주를 마시면 소주같고
맥주를 마시면 맥주같은
막걸리를 마셔도 상관없을
그렇지만 위스키를 마시는
일렁거리는 봄밤이구나
너는 잡히지 않는 사람
봄은 다가오다 사라지는 계절
목도 가슴도 타오르는 밤
그저,
위스키만 마신다

AND

뒷고기를 먹다

강원도 강릉
마포라는 간판이 붙은 고깃집
육식은 세계 공통
뉴욕이면 어떻고 모스카우면 어떤가
맛있다고 소문난 집에 와서
주먹 모듬을 시킨다
주먹고기란 말도 뒷고기란 말도 모듬이란 말도
이상하게 정이가는 말이다
숯불이 들어오고
돼지 껍데기도 구워주는 정성
고기를 구워주는 사장님은 무슨죈가 생각하지만
빛인지 어둠인지 모를 인생
지금 이 순간만이라도 대접받고 싶다
사장님은 테이블 사이를 오가느라 바쁘고
테이블마다 솓구치는 소줏잔이 바쁘다
술 사주면 형이라는데
항상 술을 사주는 형이랑
그래서 나이로도 형이지만 항상 형인 사람과
두 시간 후면 잊을 말을 떠들며 술을 먹는다
- 고기는 죄가 없어요
- 언젠간 내가 형의 형이 될게요
명칭도 모르는 고기 앞에서 되지도 않는 말만 떠든다

AND

4월 끝이네.
5월 3일 출근이다.
40일 정도 쉬었다. 잘 쉬었단 생각이다.
여기저기 떠들고 다녔던 것처럼 더 쉬면 정말로 회사 그만두고 싶을 거 같아서 그만 쉬고 복귀하기로 했다.

약을 잘 먹고 있고 최애 커피가게에도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 지금도 봉봉에 앉아 있음 - 운동을 꾸준히 했고 술도 끊이지 않고 마셨다. 아버지 일도 순서대로 진행되고 있다. 단막단막 적어보니까 정말 다 잘되고 있네.

항우울제는 세 알로 늘어났고 대상도 없는 욕을 하면서 운동을 하고 기억을 잃기 위해서 술을 마시고 아버지는 경증 치매가 확정 됐다. 짤막짤막 적어도 나아진 것도 없다.

모든 체념하는 삶이 그러하듯이.

나는 나대로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흘러갈 뿐이다. 이 문장에는 좋은 감정도 나쁜 감정도 없다.

엊그제 태백에서 친구가 다녀갔다. 내 글을 좋아해줘서 내가 좋아하는 친구다. 5년만에 봤고 그 사이에 둘 다 나이의 앞 자리가 하나씩 늘었지만 아무런 위화감 없이 잘 놀았다. 그 친구 글이 잘되서 유명해지면 유명한 사람이랑 옛날부터 친구인 것이 너무 좋을 거 같다고 농담으로 말했는데. 글이 잘 되는 거랑 상관없이 그 친구가 즐겁게 지내면 좋겠다. 나도 그래야겠지.

어제 친구를 강릉 터미널까지 태워주는 길에 함께 봤던 초록이 좋았다. 미세먼지 때문에 쾌청한 공기도 아니었고 비가 내릴 듯 흐린 하늘이었는데 그 때문에 길가에 목련이랑 벚나무 은행나무 이파리가 가장 원초적인 초록인 4월 중에서도 비정상적으로 또렷하게 예뻐서 기분이 좋았는데, 둘이 같이 그런 걸 느꼈다. 기억해 둔다. - 아내는 바빠서 차 안에서도 풍경이 아니라 카톡을 많이 들여다 봄 ㅠ.ㅠ -

휴가가 끝났으니 어디로든 돌아가자.

-> 휴가끝 첫번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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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술을 먹다

크림 새우에 연태 고량주를 먹는다
세상과 상관없이 당장 눈 앞이 호화롭다
옛날에 좋아하던 사람이랑 이렇게 먹었댔다
그이는 결혼을 했고
지금은 지금 좋아하는 사람이랑 먹는다
하얀 병에 담겨 있어서 하얀술이라 불렀던 술
이름에 연태가 들어가는 이유를 모르는 술
크림 새우도 왜 크림 새운지 모른다
갑자기 그 유래를 아는 명태가 떠오르는 건 왜일까
한 잔 마시니
식도까지 열대의 과일향이 타고 내려간다
- 아 좋네요
- 예 좋네요
아 좋고 예 좋으니
뭐가 좋은지 묻지도 않는 게 사랑일까?
안주로 나온 새우가 몇 마린지 세지 않고 먹는 지금이 그때보다 여유롭지만
사실은 그때가 더 좋았을까
의심하지 않는 것이 사랑이지만
사실은 의심하는 것이 사랑이고
마스크를 턱에 걸치고 술을 먹는 세상이라도
살아야 사랑도 하니
하얀술을 먹는 지금이 사랑이다
그 사람 생각을 해도 지금은 눈앞의 당신이 사랑이고
거리낌 없이 하얀술을 한 병 더 시킬 수 있는 지금이 좋다

AND

피자를 먹다 - 적절한 식사

아버지 머릿속을 찍은날
아버지랑 피자를 먹는다
단 둘이 피자 먹은 일을 새겨두고 싶은
내가 먹자고 했고 아버지도 좋다고 했다
2인 세트라는데 파스타까지
좀 많은가 싶었는데 다 먹었다
남은 한 쪽은 아들 먹으라해서
내가 좀 더 먹었다
혈연의 증명을 배부름으로 할 필요는 없지만 과식했다
아버지랑 나 사이는 과했던 적 없이 모자라기만 했다
뭐가 모자랐을까
뭔가는 모자랐고
그 모자람은 과했을까
하여, 과한 것도 모자란 것도 문제다
과함이 모자란 삶을 살던 아버지는
모자람이 과한 사람이 됐다
모자람과 과함은 같은 말
그 반댓말은 적절함
적절할 수 있다면 적절하고 싶다
허나, 적절하다는 건 잘난놈들의 후일담
그러니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은 지금이
내 생애 적절한 순간인지도 모른다
눈 앞의 먹을것에 집중하지 못한채
기억을 잃은 사내와 기억하고 싶은 사내의 식사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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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어조림을 먹다 - 헤어진 사랑

엄마, 아버지, 나
셋이 앉아서
고등어조림을 먹는다
혼자사는 아버지 집에서,
아버지는 방금 했던 말도 기억 못 하는 사람이 됐고
어머니는 여전히 사랑스럽다
30년 전에 한 그릇 천 오백원 하던 순댓국 먹던 얘기랑
그 집 다대기가 좋았단 얘기를 들으면서
희미하게 기억나는 그때 그 식당 아주머니는 이미 세상에 없겠구나 생각하면서
십년 전에 이혼했으니 당신과 나는 남이란 얘기를 하는 엄마가
경기도 오산에서 서울 신월동까지 냄비째 끓여온 고등어 조림은
사랑인가, 헤어진 사랑인가 생각하면서
두 사람 이혼 하던 날 셋이 함께 먹은 육천원짜리 순대국을 생각하면서
아버지의 치매와 엄마의 우울증
힘든날이면 정신을 잃도록 술을 마시는 나
가족력 같은 걸 생각하면서
양념이 잘 스며든 뜨거운 무를 씹고
양념이 묻지않은 생선의 흰 속살을 크게 한 입 베어 문다
고등어는 비리고
먹고 사는 일은 그보다 더 비리고
그래서 온갖 양념이 필요하고
그 양념이 헤어진 사랑인가
온통 질문 뿐이지만
밥 한 그릇 금방 먹었다

AND

육사시미를 먹다

먹는 게 사랑이라면
인류는 사랑으로 가득차서 걷잡을 수 없었을텐데
당신과 육사시미를 먹고 생각했다
당신은 처음이라고 했지만
날카로운 소고기를 두 점 먹었다
나는 먹고 싶었던 것이기에 나머지를 맛있게 먹었다
사랑입니까
당신은 아니라고 했다
그럼 무엇입니까
당신은 또 아니라고 했다
아무것도 아닙니까
당신은 모른다고 했다
이 소고기의 죽음은 무엇입니까
당신은 고개만 저었다
사랑도 아니고
그래서 아무 것도 아닌날에
사랑입니까 사랑입니까 되묻는 날에
얇게 저민 육사시미를 사랑처럼 먹었다

AND

호두과자를 먹다

1호선 청량리역 승차장 가판대
세 개에 천 원 짜리 약과랑 한 망에 천이백 원 짜리 구운계란 사이에
계란과 우유로만 반죽해서 차가운 상태에서도 굳지않고 부드러운
무방부제 무색소
8개 이천원짜리 호두과자를 먹는다
고급진 호두과자 전문점도 많고
온갖 빵과 과자가 넘쳐나는 세상에
고속도로 휴게소도 아닌 곳에서
누가 사 먹을까 싶던 호두과자를
내가 사 먹는다
좋아하지도 않고 맛있다 생각해 본 적도 없는 호두과자를
세상에서 가장 소외된 호두과자를 먹는다
하나 먹으면 물리는
두 개 먹고 남은 여섯개를 차마 못 먹는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호두과자를 먹는다

AND

팔자

팔자가 늘어졌다
떵떵거리며 사는 놈들을 생각하면 이런 생각이 들리없는데
하루 벌어 하루 살아가는 사람들만 생각하니
4월 바람부는 일요일 오후
막연히 바다를 향해 걷는 내 팔자가 늘어졌다
며칠전 앞도 뒤도 없는 삶에 대해 누군가 말했고
그렇더라도 살아있다면 무언가는 있을텐데
내 앞은 어디고 내 뒤는 어딘가
앞은 바다 뒤는 집 집은 생활 생활은 팔자
강따라 곳곳에 자리잡은 강태공들마냥
개 데리고 산책 나온 앞에 걷는 아주머니마냥
멀리서 함성을 지르는 축구하는 사람들마냥
주책없이 피어오르는 푸른 잎들마냥
앞도 없고 뒤도 없는 파도마냥
내일도 내년에도 변할 것 없는
내 팔자가 늘어졌다

AND

피검사 흉부엑스레이 심전도 뇌mri 뇌파검사 인지검사

아버지가 여섯 가지 검사를 했다. 아홉 시 반에 시작해서 세 시 반에 마쳤다. 아버지는 병원 일 있을 때마다 내가 서울로 오는 것에 대해서 미안한 마음이 있는 것 같다. 그럴 필요 없다. 엄마도 나한테 그런 마음이 있는데, 엄마도 그럴 필요 없다.

4월 14일이 의사 얘기 듣는 날이다. 아버지가 치매인 건 명확한 사실이지만 그때는 좀 더 명확해진다. 무언가를 전문가의 입을 통해서 정확하게 듣는 일은 안도감을 준다. 바뀌는 건 아버지가 제대로 된 치매약을 먹을 거라는 것뿐이다.

오전 검사 마치고 점심으로 무교동 낚지를 먹었다. 아버지랑 같이 먹은 가짓수가 점점 늘어난다. 기억할만한 식사는 아니었다.

mri검사까지 시간이 비어서 스타벅스에서 돌체라떼를 마셨다. 아버지 덕분에 오랜만에 스타벅스에 갔다. 아버지는 내일이면 오늘 나랑 커피 마신 일을 기억 못하겠지만 처음이자 마지막 스타벅스일 것이다. 아버지랑 기억할만한 곳에 가고 싶었다. 내 욕심이다.

돌체라떼 같이 마시면서 아버지 인생이 달콤했던 시절도 있었겠지 생각했다. 아버지는 날 만나면 어렸을 적 얘기를 많이 한다. 오늘은 시골에서 면서기 할 뻔했던 일이랑 내가 영등포구 도림동에서 태어난 얘기, 직장인 문래동에서 집인 도림동이 가까워서 가끔 집에 와서 점심을 먹기도 했다는 얘기를 했다. 아버지가 28살까지의 일이다. 아버지랑 매일 통화하고 자주 만나니까 아버지가 무슨 얘기를 하다가 그거그거 하면서 머뭇거릴 때, 무슨 말을 하려는지 거의 안다. 어차피 하시려는 얘기가 거기서 거기라 누구라도 알 수 있지만 아버지를 조금은 아는 것 같아서 좋다.

돌체 라떼 먹은 걸 기억해 둔다.

아버지, 다음엔 기억할만한 걸로 먹어요.

p.s.
이대목동병원 신경과 프론트에 간호사 중 한 명이 모두에게 친절했던 것을 기억해 둔다. 나라면 매일 퇴근후에 독주를 마셔야 스트레스가 풀릴 것 같은 일을 하는데, 치매환자들이 많고 노인들 뿐인 병동에서 너무 밝고 친절해서 임팩트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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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치를 먹다

감자탕에 소주, 밥까지 볶아 먹고도
2차로 꼬치집에 와서 또 먹는다
너무도 당연한 풍족
당연한 건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꼬치는 닭꼬치 닭꼬치는 염통
염통 꼬치를 먹는다
6개의 꼬치에 각각 7개의 작은 심장이 가지런히 꼽혀있고
42개의 목숨값이 단돈 1만원도 하지 않는다
이 나라에만 2억 마리의 닭이 죽은듯 살아있고
1년에 1억 마리의 닭이 먹기 위해 죽어나가니
너무도 당연한 값싼 안주
소주 한 잔에 목숨 하나씩
소주 때문인지 심장 때문인지 목이 타들어간다
둘이 앉아 소주를 스무잔 쯤 마시고
너무도 당연히 남은 심장은 버려진다
2만원을 계산하고
싸구려 술 한잔보다 값싼 하루가 끝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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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 내 적응장애와 상세불명의 우울 에피소드로 - 의사는 자세히 듣지 않는다 - 30일간 병가 중이다. 어제 어느 라디오 프로 오프닝에서 지금 현재의 행복지수를 1부터 10까지 중에 어쩌구저쩌구 했다. 아내한테 넌 몇 점인지 물었더니 6점이라 해서 놀랐다. 나는 내가 5점이라고 생각했다고 했더니 아내가 놀랐다. 아내 생각에 나는 2점 정도인 것 같다는 것이다. 내 기준에 아내는 8점은 된다.

기준점에 대해서 생각했다. 나의 행복 기준이 아내보다 높은 곳에 있는 건 낙천적인 성격에 기인한다. - 아내는 아니라고 할 듯 - 아버지만큼은 아니지만 생을 가볍게 대하는 아버지의 낙천성을 나는 어느정도 물려받았다.

아버지에 대해서 생각했다. 엄마 말마따나 아버지는 너무 낙천적이고 긍정적이어서 치매가 빨리 왔을 수도 있다. 내 핏속에는 아버지의 낙천성과 엄마의 걱정이 섞여있다. 어느쪽이 작용했다고 확신은 못하지만 항우울제를 먹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먼저 서울 갔을 때, 본인을 가정폭력범으로 신고한 아내와 이혼하겠다는 친구와 '나에게 못되게 굴면 가만히 안둔다'는 기조에 대해서 얘기를 나눴는데, 이후 아무 연락도 없는 걸로 봐서 친구는 이혼하지 않을 것 같고 나도 내 돈 들여 법 절차를 두 번 진행하고도 떼 먹힌 전세 보증금 50만 원을 못 받은 처지다. 내가 지금 병가를 쓴 것도 나를 화나게 만든 몇몇 사람들에 대해서 갚아주는 의미가 있는데, 결국 아픈 건 나다. 뭐가 잘 안되네.

암튼 직장에서 자꾸 문제가 생기니 내 문제도 있겠지 싶어서 상담을 받아볼까 한다. 그냥 이렇게 지내다가 병가 마치고 어영부영 출근할 수도 있겠지.
갚아주는 일을 만들지말고 살아야지.

누군가의 불운을 간절히 바라는 건 아니지만 마음 한켠에 그런 마음이 있는 내가 싫다.

AND

순대를 먹다 2

가위로 순대 자르듯 회사를 자른날
혼자서 순대를 먹는다
겉으론 호기로웠지만
속마음은 잘게 썰려 내 뱃속으로 들어오는 염통같다
말랑말랑한 허파를 씹는다
나는 그만큼도 질기지 못했다
간땡이가 부었단 소리를 들었으니
간도 목이 메도록 먹어본다
순대를 남기고 오뎅 국물 한 컵을 벌컥 들이킨다
순대 1인분이 오늘 하루만큼 무겁다

AND

짬뽕밥을 먹다


누구의 애인도 아닌 사람과 짬뽕을 먹는다
애인이 있는 나는 밥을
애인이 없는 그이는 면을 먹는다

상관관계도 없이,

짬뽕과 짬뽕밥은 국물맛이 다르다는 얘기가
색을 칠한듯 새빨간 중국산 김치 얘기로 이어진다

- 김치 왜 안 먹어요
- 김치가 흥미진진하지 않네요

단무지는 맛을 알아도 먹지만
뻔한 맛의 김치에는 젓가락이 안간다

이유도 없이,

약간은 흥미진진한 사람과 짬뽕밥을 먹는다
나는 중국산 김치같은 사람이고
마주 앉은 사람은 남도의 김치같은 사람이다

짬뽕은 맛이 있거나 없지만
맛없지 않다고 다 맛있진 않고
지금 먹는 짬뽕맛이 딱 그러하다

짜증나지도 우울하지도 복잡하지도 않은 날들이어서
짜장면도 울면도 볶음밥도 아닌
니맛도 내맛도 아닌
전혀 흥미롭지 않은 짬뽕밥을 먹는다

짬뽕과 짬뽕밥 중에 어느쪽 국물이 더 흥미진진한가
나와 당신 중에 누가 더 흥미진진한가

내 마음 모르겠는데,

앞사람은 짬뽕을 반 이상 남겼고
나는 짬뽕밥을 바닥까지 먹는다

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