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지 해장국을 먹다

소주 한 병을 채 안 마시는 밤이 있다
겨울밤 해장국 집에 혼자 앉아서
선지를 뒤적거리면서
피의 근원 같은 걸 생각하는데
계엄령을 내린 대통령 맘은 알겠어도
그 악당을 지지하든 안하든
요즘 젊은이들 마음은 도통 모르겠는
얼어붙었던 발가락이 대충은 녹은듯하고
국밥에서 올라오는 김이 문득 역하게 느껴져서
끝내 한 잔을 남기고 깍두기만 씹는
그러다가 혀를 씹는
결국 피맛을 느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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볶음밥을 먹다

볶음밥을 먹는다
파기름을 내고
계란을 두 개 깨고
식은밥에 간장을 한 숟가락
설탕 소금 후추를 넣고 볶았다
하늘이 점점 더 흐려지고
강풍주의보가 내린 일요일 오후
아직 밥 때는 아닌데
배가 고프다는 아내랑 볶음밥을 먹는다
가끔 서로를 바라보면서 말 없이 먹는다
집안과 아내, 밥의 온기가 뒤섞였다
세상의 모든 행복이 지금 이 공간에 있다
이 볶음밥은 파 볶음밥인가 달걀 볶음밥인가
아니면 간장 볶음밥인가
사랑하는 사람과 마주 앉아 볶음밥을 먹고 
주인공이 그 길로 죽으러 간 소설의 제목이 뭐였더라
나는 죽으러 갈 곳이 없고
자고 일어나면 출근할 곳이 있고
거기가 내 자리라는 걸 안다
맛있다는 얘기를 듣고
어째선지 울컥한다
먹는 것은 살겠다는 것이니까
살아야지 살아야지 속으로 반복하면서
좀 짜지않아, 묻고
맛있다는 얘기를 한 번 더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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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간을 먹다

엄마 돌아가시고 세 달
자꾸 생간이 먹고 싶다
엄마랑 추억 중에 간과 관련된 건 없는데도 그렇다
핏줄이 끊어져 피맛이 당기는 것인가 생각하며
소 간을 먹는다
단지 엄마 핑계로 술 한 잔 하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물컹한 간 한접시와 소주 한 병이
물렁한 마음에 스며들고
소를 잡을 때 소가 운다던데
나는 울었던 소를 먹으면서 운다
엄마 한 번 생각하고
소주 두 잔 먹고
소주 한 잔에 간 두 점씩 먹는다
두 배로 슬퍼지고 네 배로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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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국수를 먹다

경기도 오산 시장 한복판 사거리 모퉁이
다들 줄 서 기다렸다가 먹는 집에서
엄마랑 칼국수를 먹는다
지역 명물 칼국수를 엄마는 몇 번이나 먹었고
나는 처음이다
엄마는 칼국수가 먹고 싶었고
아들이랑 같이 먹고 싶었다
멸치 육수 굴물에 양이 많은 평범한 칼국수
엄마는 본인 그릇의 면을 내 그릇에 덜어준다
엄마는 그러고 싶었다
나는 엄마 기분 좋으라고 맛있게 먹는다
배가 좀 부르지만 끝까지 다 먹는다
줄을 서서 먹을 맛은 아닌데 왜 줄을 서서 먹는가
생각하면 먹는다
어제는 엄마 생각하다가 울었고
오늘은 기다리던 엄마를 만났는데
칼국수 그릇에 얼굴을 묻고 몰래 울다가
엄마 얼굴 보고 웃는다
엄마 말 잘 듣고 씩씩하게 살아야지
20년 전 결심을 다시 한 번 되뇐다
돌아오는 길 내내 엄마 손을 잡고 걸으며
마음 속에 엄마 엄마, 엄마줄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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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댓국을 먹다 2 - 아버지랑 먹다 -

아버지랑 순댓국을 먹는다
국에 들어간 순대는 너무 뜨거운지 아버지가 잘 못 먹는 걸 알기에
고기만 순댓국에 내장 한 접시를 시켰다
아버지 국에 다대기 소금 새우젓 들깨가루 후추를 넣고 밥도 반 공기 말아준다
아버지는 고기 한 점 먹고 국물 한 입 먹고를 반복하고
나는 접시 위에 돼지 내장을 하나씩 하나씩 아버지 뚝배기에 넣는다
아버지 뚝배기 안의 고기가 줄지 않고
아버지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자꾸만 먹는다
아버지가 고기를 먹을 때 숟가락 위 고기에 새우젓의 새우를 한 두 마리씩 얹어준다
나도 이 새우같이 작은 시절이 있었겠지
아버지는 군말없이 먹는다
아니, 맛있다고 하며 먹는다
이런 걸 먹은지가 언젠지 모르겠다고 하며 먹는다
이건 질리지도 않는다고 하며 먹는다
나만이 아버지에게 내가 누군지 묻지 않는다
아버지가 내 이름을 부른 어떤 날에 나는 주루륵 울었지만
오늘 아버지는 내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아버지의 시계는 멈춘지 오래고
아직 나의 시간은 흐른다
바닷바람을 맞은 아버지가 좋다고 하니
정말 좋은 것이고
아버지가 좋다니 나도 좋지만
구워 줘도 잘 먹지도 못하는 소갈비가 아닌
배 터지게 먹는 순댓국으로 사랑을 다시 정의하는 이 시간이
까맣게 까맣게 타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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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겹살을 먹다

아내랑 삼겹살을 먹었지
동네 식당에서
둘이서 삼인분을 시켰지
밥 한 공기는 아내가
소주 한 병은 내가 먹었지
그러니 둘이서 오인분을 먹었지
둘이서 두런두런 먹었지
배를 두드리며 이 골목 저 골목 두런두런 걸었지
이런 얘기 저런 얘기 두런두런 나누면서
체육 공원 벤치에 앉아서 
여전히 배를 두드리며 공원에 나온 다른 삶들을 보았지
남들은 필생을 살고 우리는 허투루 사는 것 같았지
삼겹살에는 삶도 있고 살다도 있다는 허튼 생각을 했지만
기분이 좋아지진 않았다

AND

양갈비를 먹다

중국식 양갈비집에서 호주산 양갈비를 먹는다
혼자 중국술을 따라가며 먹는다
사장님은 이런 내가 익숙하고
나만 내가 뭐하는 짓인가 생각하는데
세계가  뒤섞인 자본주의 앞에 온 세상이 평등하다
취하고 나니 씹는 기분만 남는다
고기를 씹고 만두를 씹고 하얀술을 씹는다
머릿속으로 사람들을 씹다가
휴대전화 키보드를 씹고
오타가 난 자음과 모음을 씹는다
끼리끼리 온 사람들은 지들끼리 마시느라 내쪽은 쳐다보지도 않는다
나만 그들을 바라보는 일방적인 관계
알딸딸해지니 부서져 버리는 관계
숯은 벌겋고 만두 접시는 비고
빈꼬치는 쌓이고 술병도 비고
언젠가 세상이 끝날때까지 마시자고 했지만 
먼저 세상의 끝을 본 친구를 생각하고
다들 각자 살아간다는데
나는 어디를 살고 있는지
c8 c8 c8
한 번도 씹지 않고 누르는 단어
c8 c8 c8

AND

냉면을 먹다

마지막 서울
마지막 백화점
마지막 기차역
마지막 냉면
마지막에 근접한 아버지와
냉면을 먹었다
마지막은 처음으로 이어지고
아버지에게 내 이름을 말할때마다
하얀 도화지에 새로 쓰여지는
나는 아버지의 처음이자 마지막 사랑
아버지는 그저 나의 아버지
계산을 하며 마음속으로만 마지막이네요, 인사를 남기는
사장은 내 얼굴을 모르지만
나는 사장 얼굴을 아는
단골에 근접한 가게에서
물냉면 곱빼기를 먹으면서
아버지를 부를 때
아버지, 아버지 두 번씩 부르고
두 배로 배가 부르고
두 배로 마음 아팠다

AND

연태 고량주

혼자서 연태 고량주를 먹는 밤
가게엔 양꼬치 집 사장님과 나 뿐
대화는
오늘은 왜 혼자왔어요, 와
양갈비 두 개 주세요, 뿐
혼자와서 두 사람 치를 먹는 게 서럽진 않다
이 집에서는 후식으로 물만두도 먹어야 한다
파인애플 향이 식도를 파고든다
사탕수수를 먹어보진 못했지만 사탕수수 향인지도 모른다
사실 이 술은 수수로 만든다
사실 자세히 모른다
모든 일의 유래를 몰라도 그냥 사는 게 삶이다
인간이 돌도끼를 던질때부터 그랬을거라고 위안 삼는다
유래도 모르지만 투명한 술병이 예뻐서 그냥 먹는다
소 중 대 중에 중자 병이 예쁘다
예쁜걸 좋아하는 것도 원래 그런 일이다
연태땅이 어디 붙어있는지도 모른다
간도, 연해주가 어딘지 모르는 것과 같다
혼자 마셔도 술병이 빈다
술의 순리가 살아가는 순리
갈비를 뜯을 때 물만두를 시키고
이것도 살아가는 순리
그냥 마시자
한 병 더 마시자
아무말 없이
아무말 없이




AND

냉동 삼겹살을 먹다

오병이어 식당
일요일엔 열지 않을 이름이지만
어째선지 문을 열었기에 냉동 삼겹살을 먹는다
묵은지랑 저민 감자가 좋고
된장이랑 쌈채소도 훌륭하다
두 번째 찾아온 식당
사장님은 내가 다섯 번은 온 줄 안다
둘이 오인분을 먹고
숫자 순서가 바뀌었지만
2와 5는 한통속이니 이것도 기적이라고 한다
예수님은 5와 2로 5천명을 먹었지만
현실에선 7만 6천원이 두 사람을 먹였다
전쟁통이 아니더라도
먹고 사는 게 기적인 줄 알기에
지금 이 순간을 기적이라 한다
7만 6천원의 기적이라 한다

AND

짬뽕을 먹다

해장도 아닌데
혼자서 짬뽕을 먹는다
물과 단무지가 셀프다
조리마저 셀프인 세상에 곧 올 것 같다
짬뽕,
썪였단 뜻이고 썩은 건 아니다
당근양파돼지고기오징어조갯살고춧가루가 국물에 섞여있다
띵동띵동 배달접수 소리 이어지고
홀에는 나와 파리와 짬뽕 그릇 뿐이다
파리를 애써 쫓지 않는다
다들 먹고 살자고 애쓴다
단무지는 너무 짜서 두 개만 먹고 만다
대부분의 삶에는 짠내가 나고
알고보면 짜장면도 단맛보다 짠맛이다
건더기를 다 먹고 국물을 한 모금 들이킨다
재료맛이 안나고 맵고 짜기만 하다
다음엔 오지 말아야겠다
그래도 국물을 한 모금 더 먹는다
짬뽕 곱빼기 만 원, 세월이 그러하지만 비싸단 생각이 들고
삶에도 입안에도 맵고 짠내가 번진다

AND

염소탕을 먹다

아내가 몸에 좋은 거 그만 먹고 다니라 했는데
살다살다 염소탕도 먹어본다
염소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보양식으로 개 대신 염소를 먹는다는 것도 아는 어른이다
염소가 새끼를 빨리친다는 얘기며
요즘 염소값이 비싸다는 얘기를 들으며
수육을 먼저 먹는다
따끈따끈 말캉말캉
식당 벽에는 염소 고기의 효능이 붙어있고
나는 세상에 기여한 일 하나 없는데
염소 고기가 이리 맛있어도 되나
간에 좋다는 염소 고기를 소주랑 같이 먹는다
이런걸 상충한다거나 쌤쌤이라 하나
개이득 상황은 아니다
고기가 냉동이 아니라는 주인의 말
그래서 더 맛있다는 동료의 말
몸에 좋다 생각하고 먹으니 진짜 몸에 좋은 것 같고
편의점 김밥을 먹으면서도 그게 몸에 좋다는 생각을 할 수는 있지만
그러지 않는 것이 세상의 룰이고
삼 천 원과 만 오 천 원의 차이가 자본주의다
뽀얀 국물을 보며 우유가 귀했던 시절 얘기를 하다가
친구의 화를 돋운 친구 아내의 구찌 스니커즈 가격이면
염소탕을 몇 번 먹겠나 생각해보고
염소탕 가격이면 굶는 사람들 몇 끼를 먹을 수 있는지까지 갔다가
더 무던해질 것도 없이 나이들어 담담해진 나를
한탄하기 전에
다 잊고자
취해버렸다

AND

막국수와 만둣국

막국수에서 만둣국으로 넘어가는 경계에서
당신은 올해의 마지막 막국수를
나는 찬 계절의 첫 만둣국을 먹는다
당신과 나
차가움과 뜨거움
막국수와 만둣국
만두피와 만두속
물막국수와 비빔막국수
식초와 설탕
이것은 세상에 흔한 이분법
찬 계절에도 막국수를 먹는 내 사랑
따뜻한 내가 차가운 널 덮어줄게
갈라지는 계절마다 내 안에 그대로 있어요
이것은 세상에 흔한 사랑

AND

일요일 아침의 내장국밥

끈적함은
여름 때문인가
국밥 때문인가
씻지 않은 나 때문인가
국밥에 소주를 마시는 커플 때문인가
전생에 부부였어도 좋았을 사람과 내장국밥을 먹는다
(순대)내장국밥
괄호가 앞에 붙은 메뉴
닭국밥 소머리국밥 순대국밥도 있는데
앞에 앉은 사람이 내장국밥이라 해서 나도 따른다
씻지도 않고 식당으로 나온 건
편안함인가 급박함인가
몇가지 반댓말을 떠올려보고
내장은 (의외로) 반댓말이 없다
반대가 없는 사랑을 생각해보고
다대기를 넣으며 많은 말들에 반댓말이 없다는 걸 깨닫고
소주를 마시는 커플이 부럽고
그들처럼 소주를 시키고 싶지만
고단함이 대범함을 지운 시절이고
나는 사랑이 끝난 사람이고
일요일이 길기 때문이다

AND

야채 김밥을 먹다

지하철 가판대
야채 김밥 1500원
원자재값 상승으로 부득히 200원 인상된 가격
부득이와 부득히는 햇갈릴 수 있는 세상
마침 천 원짜리 한 장과 오 백원 짜리 동전 하나가 있어서
언젠간 먹어 보고 싶던 김밥을 먹는다
새벽부터 어딘가에 모여서 그 김밥을 싸고
김밥을 은박지로 감았을 손과
그 손을 가진 사람들의 삶과
그 사람들이 사는 동네를 생각하다
그들의 고향도 생각해 보고
내 고향은 어딘가, 하면서 김밥을 먹는다
김밥속의 연근이며 시금치며 단무지가 내 입까지 들어오는 경로를 생각하며
세계의 질서에 기여하는 사람들을 세포처럼 꼽아보며
김밥을 먹는 나도 그 중에 하나인 것을 알지만
그렇지 않았으면 하는 못된 마음으로
못된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으로
김밥을 먹는다
2000원에 한 봉지에 여덟 개가 들은 호두과자 옆에 쌓인 김밥을
한 줄
사 먹는다

AND

식빵을 먹다

식빵을 먹는다
식탁겸 책상에 앉아서
며칠 전 슈퍼에서 하나 남은 것을 사면서 속으로 럭키를 외쳤다
그때 몇 개 집어 먹고 방치해둔
푸른 곰팡이가 보이진 않지만
부패를 향해 달려가는 식빵을 먹는다
바다 건너편의 전쟁과
육이오 전쟁 때 피난 가던 사람들과
안네프랑크를 생각하며 식빵을 먹는다
유관순은 여전히 누난데
외국 사람이라 그런지 먼저 살다 갔어도 아무도 누나라고 하지 않는 안네 프랑크를 생각하며
마음속으로 누나라 불러보며
식빵을 먹는다
먹다가 목이 메서 물을 먹는다
커피를 끓여도 되지만
지금은 그러고 싶지 않다
내게는 충분하다고 느끼는 이 정도 풍요에 만족하는 편이지만
안네프랑크에게는 쪽방에 숨어살면서 행복했냐고 물을 수 없다

AND

데운밥을 먹다

냉동실
갓 지어 얼렸어도 얼린 밥
얼린밥은 지나간 일
데운밥을 먹다가
당신과 얼린밥을 녹여 먹던 일을 생각하고
플라스틱 용기에 담겨 전제란지에 들어간 밥알들의 운명같은 것도 생각하다가
당신도 데운밥을 먹을 일을 생각한다
두 사람 두 개의 숟가락 두 개의 데운밥
한솥에서 나왔지만 서로의 온기가 되지 못한 일
한통속이라 생각했지만 사실은 둘이었던 일
둘이었다가 혼자가 된 일
육인용 밥솥에 가득지어 얼려둔 밥을
하나씩 꺼내 먹는 일
데운밥을 먹다가
지나간 사랑이 되는 일

AND

우동을 먹다

우동을 먹는다
이름처럼 둥근 면발
동으로 끝나는 다른 음식은 뭐가 있지?
당장은 오뎅만 떠오르고
우동 국물엔 오뎅이 들어있다
얘네들 이름처럼 동글동글하게 살고싶다
뜨겁지도 않은데
후후 불어가며 우동을 먹는다
꼭 그래야 하는 건 아닌데
그렇게 되고마는 일은 어디에나 있다
그것이 순리라면
우동 면발 삼키듯 순리대로 살고 싶다
먼길 다녀오는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당신과 함께 우동을 먹는다
순리가 의식이 되고 의식이 종교가 되고
내 마지막 종교가 당신이라면
그것이 사랑인가
물어보는 순간 사랑이다(우동이다)

AND

소나무와 육회

오래된 절에 가서
그 절보다 오래 살았다는 소나무를 보고
육회에 술을 먹었다
희석식 소주에선 솔향이 났고
날고기에선 대웅전의 오래된 나무 냄새가 났다
나보다 오래된 사랑에는
그럴리 없는 일들이 넘쳐흐르고
어려서 실던 집은 길로 바뀌었다
나보다 오래되지 않은 생활에는
뻔한 일들이 가득하고
그 아득한 뺄셈에,
아침에 본 나무를 생각하며
술만 먹는다
눈물은 잊고
날고기에 낮술만 먹는다

AND

두부조림을 먹다

일요일 아침
두부 한 모 800그램 1870원
열 네 등분 하고 살짝 구워서
두 줄로 깔고 양념장을 넣고 졸인다
지난주에 당신이 맛있다고 했기에
정확한 수치의 양념장을 만든다
깼다가 다시 잠든 당신 종아리를
열린 문틈으로 바라본다
이 세상 것이 아닌듯 가늘다
혼자 먹는 아점
한모 다 먹으면 돼지라 핀잔 들을까 싶어
윗줄에 있던 일곱 조각, 반모만 먹는다
맛있다
잠에서 깬 당신도 밥을 먹는다
한 조각, 십사분의 일모를 먹고
배 부르다고 한다
맛있다고 한다
체중은 나의 절반
허벅지는 나의 4분의 1
두부는 나의 7분의 1
숫자로 계량되는 당신
.....
넘치는 것은 사랑이다

AND

푸딩을 먹다

밤 11시 38분에 푸딩을 먹는다
아내가 자기는 먼저 먹었다고 한다
푸딩은 말랑하고 달다
돈까스나 카레는 유래나 조리법을 알지만
푸딩은 이름만 아는 먹거리다
푸딩은 이름이 예쁘다
푸딩푸징푸딩푸딩
퐁당퐁당퐁당퐁당
아내가 술취한 나에게 준 푸딩은
작은 병에 담겨 있다
아내는 내가 취했는지 알까?
어디서 얻어온 푸딩을 자정이 다 된 시간에
내게 주는 것이 사랑인지 묻는다
사랑이야?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지만
뭘 자꾸 확인하냐며 역정을 내는 아내에게
머릿속으로만 얘기한다
사랑인지 묻는 순간 사랑이다
푸딩은 달고 말캉하다
사랑은 항상 푸딩같진 않지만
사랑인가 생각하는 순간 사랑이다

AND

커피를 마시다 - 좋습니다 -

테이블 위 커피잔 안에
내게 커피를 내려준 당신이 들어있는 일이,
좋습니다
좋다는 말은 너무 쉬운 말이지만
가장 정직한 말이기도 해서
굳이 다른말로 바꾸고 싶지 않습니다
당신이 커피콩을 갈고
물을 끓여 잔을 데우고
당신은 먹지도 않는 커피를
오직 저를 위해 내려주는 모습이
이 커피잔 안에 흐리고 선명하게
모두 들어 있습니다
커피 맛있습니다,
거짓이 아닌 말에
많은 것이 포함된 말에
두번째로 정직한 말이라
바꾸고 싶진 않은 말에
웃어주는 당신이
참 좋습니다

AND

생선구이를 먹다 - 임연수 -

임연수를 굽는다
해산물의 원산지를 읽으러 간 마트에서 값이 싸서 샀다
누군가에 의해 먹기좋게 손질되고
플라스틱 포장에 랩을 씌우고 원산지와 가격까지 붙인
러시아산 해동 임연수 소금은 국내산
중반부로 향해가는 21세기의 증명일 뿐이니
가격표를 보고 오늘 아침 9시에 해동했다는 사실까지 알 수 있다는 사실에
절망하진 말자
임연수는 이면수 어느 동네에서는 새치라고도 부르고
먹을때마다 생각하는 건 아니지만
가끔은 생각나기도 하는 연수는 옛 애인의 이름
러시아에서는 형편이 어려워 못 사 먹는 사람도 있을
임연수 네 덩어리를 아내랑 맛있게 먹는다
삼 천원 어치 죄책감이 사라진 접시엔
약간 탄 지느러미와 뼈,
통칭 비린내라고 하는 생선 냄새만 남았다

AND

돈까스를 먹다

밤으로 가는 시간
늦은 해장으로 돈까스를 먹는다
혼자 온 손님은 나뿐이고
맞은편의 젊은 부부는 아이에게 고기를 잘라 준다
수프 깍두기 된장 단무지가 먼저 나온다
- 이것 참 한국적이군
이어서 돈까스 두 쪽이 나온다
- 돈까스도 나만큼 외롭진 않군
한 개를 급하게 먹는다
이제 좀 공평하다
어제는 술을 마시기 위해서 술을 마셨다
삶이 순탄치 않을 때마다 그렇게 된다
기억을 잃도록 마셔도 바뀌는 건 없으므로
다음날은 뭘 먹어도 해장이 된다
해장 돈까스 해장 햄버거 해장 라면
해장에 고기의 때가 묻지 않은 음식이 없다
- 깊게 생각하지 말아야지
칼을 움직일 때마다
어디 부딪쳤는지 모르는 손등의 멍이 얼얼하다
어제 술상대를 해준 청년에게 질투를 느꼈던가
나는 그이에게 오만하게 굴었던가
튀김옷과 돼지고기가 따로 노는 돈가스를 내 생활에 비유하고 싶진 않다
- 이러니 저러니 해도 맛있군
잘 먹었다는 인사는 거짓이 아니었으니
그거면 됐다

AND

위스키를 먹다

위스키를 안 마셔봐서
위스키같은 게 뭔지 몰랐는데
당신과 어긋나게 앉아서
멀리 물 너머의 불빛을 바라보며
위스키를 마시는 지금이
위스키 같은 봄밤이구나
소주를 마시면 소주같고
맥주를 마시면 맥주같은
막걸리를 마셔도 상관없을
그렇지만 위스키를 마시는
일렁거리는 봄밤이구나
너는 잡히지 않는 사람
봄은 다가오다 사라지는 계절
목도 가슴도 타오르는 밤
그저,
위스키만 마신다

AND

뒷고기를 먹다

강원도 강릉
마포라는 간판이 붙은 고깃집
육식은 세계 공통
뉴욕이면 어떻고 모스카우면 어떤가
맛있다고 소문난 집에 와서
주먹 모듬을 시킨다
주먹고기란 말도 뒷고기란 말도 모듬이란 말도
이상하게 정이가는 말이다
숯불이 들어오고
돼지 껍데기도 구워주는 정성
고기를 구워주는 사장님은 무슨죈가 생각하지만
빛인지 어둠인지 모를 인생
지금 이 순간만이라도 대접받고 싶다
사장님은 테이블 사이를 오가느라 바쁘고
테이블마다 솓구치는 소줏잔이 바쁘다
술 사주면 형이라는데
항상 술을 사주는 형이랑
그래서 나이로도 형이지만 항상 형인 사람과
두 시간 후면 잊을 말을 떠들며 술을 먹는다
- 고기는 죄가 없어요
- 언젠간 내가 형의 형이 될게요
명칭도 모르는 고기 앞에서 되지도 않는 말만 떠든다

AND

하얀술을 먹다

크림 새우에 연태 고량주를 먹는다
세상과 상관없이 당장 눈 앞이 호화롭다
옛날에 좋아하던 사람이랑 이렇게 먹었댔다
그이는 결혼을 했고
지금은 지금 좋아하는 사람이랑 먹는다
하얀 병에 담겨 있어서 하얀술이라 불렀던 술
이름에 연태가 들어가는 이유를 모르는 술
크림 새우도 왜 크림 새운지 모른다
갑자기 그 유래를 아는 명태가 떠오르는 건 왜일까
한 잔 마시니
식도까지 열대의 과일향이 타고 내려간다
- 아 좋네요
- 예 좋네요
아 좋고 예 좋으니
뭐가 좋은지 묻지도 않는 게 사랑일까?
안주로 나온 새우가 몇 마린지 세지 않고 먹는 지금이 그때보다 여유롭지만
사실은 그때가 더 좋았을까
의심하지 않는 것이 사랑이지만
사실은 의심하는 것이 사랑이고
마스크를 턱에 걸치고 술을 먹는 세상이라도
살아야 사랑도 하니
하얀술을 먹는 지금이 사랑이다
그 사람 생각을 해도 지금은 눈앞의 당신이 사랑이고
거리낌 없이 하얀술을 한 병 더 시킬 수 있는 지금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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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자를 먹다 - 적절한 식사

아버지 머릿속을 찍은날
아버지랑 피자를 먹는다
단 둘이 피자 먹은 일을 새겨두고 싶은
내가 먹자고 했고 아버지도 좋다고 했다
2인 세트라는데 파스타까지
좀 많은가 싶었는데 다 먹었다
남은 한 쪽은 아들 먹으라해서
내가 좀 더 먹었다
혈연의 증명을 배부름으로 할 필요는 없지만 과식했다
아버지랑 나 사이는 과했던 적 없이 모자라기만 했다
뭐가 모자랐을까
뭔가는 모자랐고
그 모자람은 과했을까
하여, 과한 것도 모자란 것도 문제다
과함이 모자란 삶을 살던 아버지는
모자람이 과한 사람이 됐다
모자람과 과함은 같은 말
그 반댓말은 적절함
적절할 수 있다면 적절하고 싶다
허나, 적절하다는 건 잘난놈들의 후일담
그러니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은 지금이
내 생애 적절한 순간인지도 모른다
눈 앞의 먹을것에 집중하지 못한채
기억을 잃은 사내와 기억하고 싶은 사내의 식사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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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어조림을 먹다 - 헤어진 사랑

엄마, 아버지, 나
셋이 앉아서
고등어조림을 먹는다
혼자사는 아버지 집에서,
아버지는 방금 했던 말도 기억 못 하는 사람이 됐고
어머니는 여전히 사랑스럽다
30년 전에 한 그릇 천 오백원 하던 순댓국 먹던 얘기랑
그 집 다대기가 좋았단 얘기를 들으면서
희미하게 기억나는 그때 그 식당 아주머니는 이미 세상에 없겠구나 생각하면서
십년 전에 이혼했으니 당신과 나는 남이란 얘기를 하는 엄마가
경기도 오산에서 서울 신월동까지 냄비째 끓여온 고등어 조림은
사랑인가, 헤어진 사랑인가 생각하면서
두 사람 이혼 하던 날 셋이 함께 먹은 육천원짜리 순대국을 생각하면서
아버지의 치매와 엄마의 우울증
힘든날이면 정신을 잃도록 술을 마시는 나
가족력 같은 걸 생각하면서
양념이 잘 스며든 뜨거운 무를 씹고
양념이 묻지않은 생선의 흰 속살을 크게 한 입 베어 문다
고등어는 비리고
먹고 사는 일은 그보다 더 비리고
그래서 온갖 양념이 필요하고
그 양념이 헤어진 사랑인가
온통 질문 뿐이지만
밥 한 그릇 금방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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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사시미를 먹다

먹는 게 사랑이라면
인류는 사랑으로 가득차서 걷잡을 수 없었을텐데
당신과 육사시미를 먹고 생각했다
당신은 처음이라고 했지만
날카로운 소고기를 두 점 먹었다
나는 먹고 싶었던 것이기에 나머지를 맛있게 먹었다
사랑입니까
당신은 아니라고 했다
그럼 무엇입니까
당신은 또 아니라고 했다
아무것도 아닙니까
당신은 모른다고 했다
이 소고기의 죽음은 무엇입니까
당신은 고개만 저었다
사랑도 아니고
그래서 아무 것도 아닌날에
사랑입니까 사랑입니까 되묻는 날에
얇게 저민 육사시미를 사랑처럼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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