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아버지한테 다녀왔다.
아버지가 아픈 이후로 아버지 만나고 돌아오면 늘 기분이 안 좋다.
아버지랑 같이 있을 때 기분이 안 좋은 건 아니다.
어제는 혈압약 복용과 관련해서 간단한 피검사를 받았다. 아버지 담당의사를 처음 만났다. 전화상으로는 아버지가 깜빡거리는 건에 대해서 잠깐 얘기했었고 아스피린도 처방해 달라고 했었댔다. 의사는 치매 진단검사 결과를 봐야 알겠지만 혼자서 생활이 가능하니 나쁜 상태는 아니고 술을 끊었기 때문에 점차 좋아질수도 있으며 '글리아타민'이란 뇌 영양제는 본인도 처방해 줄 수 있으니 약 떨어졌을 때마다 신경과에 방문할 필요는 없다고 시원시원하게 얘기했다. 의사가 아버지에게 달력을 가리키며 오늘이 몇일이냐고 물었을 때, 아버지는 잠깐 머뭇거렸지만 21일이라고 정확하게 답했다. 때려 맞춘걸 수도 있지만 - 병원 가기전에 오늘이 21일이라고 세 번 정도 얘기했다. - 대답 잘하셔서 좋다고 생각했다.
병원에 다녀와서 전날 저녁에 사온 소불고기를 데워서 아침밥을 먹었다. 18일이 아버지 생일이었다. 아버지 생일은 엄마가 꼭 챙겼고 보통 이모들이랑 모여서 밥을 먹었다. 올해는 코로나도 있고 부러진 엄마 팔이 붙지 않은 관계로 패스하기로 했다. 내년이 칠순이다. 내년에는 아버지 상태랑 상관없이 친척들 여럿이 모여서 밥을 먹겠지. 어쩌면 그게 아버지 생전에 마지막으로 여럿이 모인 즐거운 날일지도 모른다. 그날은 술을 한 잔 드셔도 괜찮지 않을까?
밥 먹은 그릇 씻고, 저녁 때 드실 곰탕 국물 끓여 놓고, 요일 약통에 약 세 알씩 잘 담아서 아버지 가방에 넣고 주무시는 거 보고 아버지 집을 나왔다.
아버지랑 병원에 있을때부터 내 담당이 아닌 일로 업무 전화가 자꾸 와서 짜증이 났다. 사무실 동료는 우리 아버지도 아닌데 내가 지것까지 챙겨줘야 되나, 생각하니 화가 더 올랐다.
청량리에서 강릉 오는 한 시간 반 동안 슬픈 노래를 들으면서 화를 삭였다. 집에 와서 보니 휴대전화 충전기가 안 보였다. 서울에 두고 온 줄 알고 바로 마트에 가서 새걸 샀다. 알고보니 서울갈 때 가져갔던 옷 아래 깔려 있았다. 내 부주의함에 또 화가 났다.
요즘은 약 먹을 때가되면 아버지가 먼저 전화하기도 한다. 긍정적인 변화다. 저녁에 엎어져서 게임하고 있는데, 아버지한테 전화가 왔다. 자신있는 목소리로 약 먹었다고 해서 확인해보니 아침에 드셔야 되는 약을 드셨다. 내가 먼저 전화해서 오늘 저녁은 약 드시지 마세요,라고 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게 화가 났다.
- 아버지 저녁은 뭐 드셨어요?
- ..........
- 아버지 저녁은 뭐 드셨어요?
- 뭘 먹긴 뭘 먹어 그냥 먹었어.
곰탕 국물이 있길래 그거랑 먹었다고 하시면 되는데, 그 말씀을 못하시니 화가 나서 약간 언성이 높아졌다. 아내가 옆에서 듣고 있다가 나를 진정시켰다. 방금 뭘 먹었는지는 아는데, 그 단어가 기억 안나는 아버지가 나보다 더 답답하겠지. 그래도 자꾸 뭘 드셨는지 묻게 된다. 아버지는 출근한 날 점심에는 '제육볶음'을 자주 드시는 거 같고 저녁은 거의 '김밥'을 드시는데, 내가 먼저 얘기하지 않으면 그 말을 못 떠올린다. 잘 모르실걸 알면서도 계절도 날짜도 요일도 자꾸 묻게 된다.
아버지 얼굴 보면서 얘기해보면 괜찮은거 같다가도 약은 언제 어떤 걸 먹어야 하는지, 방금 뭘 드셨는지, 오늘인 무슨 요일인지 모르는 아버지 목소리를 들으면 안 괜찮다는 걸 알게된다. 우리 아버지 아프구나. 아버지한테 언성 높인게 미안해서 베란다에서 담배 피우러 나가서 바로 전화했다.
- 아버지, 약도 잘 드시고, 술도 잘 끊었고 지금 잘하고 있어요.
- 어, 그래. 칭찬을 받으니 좋다.
- 예, 아버지. 푹 주무시고, 내일 출근 잘 하시고 아침 약 드실 때 또 전화할게요. 그리고 아버지, 약은 제가 약 드시라고 전화했을때만 드세요.
- 어, 그래. 알았어. 잘 지내.
'잘 지내'란 말이 가슴을 때리고 또 하루가 갔다. '잘 지내'란 말은 평소에 자주 연락 안했던 나에게 내려진 벌이다. 자꾸 화가 나는 나에게 내려진 벌이다.
아버지가 아픈걸 알고 아버지 얘기를 쓰기 시작하면서 기록을 남기는 자식이 있어서 다행인가, 생각한 적 있는데. 다행이란 말조차도 그저 내 만족이다. 기록이 내게 위로가 된다.
어제는 화가 났다. 그러지 말아야지. 아버지한텐 화내지 말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