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넘어간다. 2000년 이후로 해가 바뀔때마다 그 숫자를 받아들임에 현실감이 떨어진다. 2020년이 됐을때, 그 느낌이 특별히 더 강했는데, 2021은 좀 더 현실감이 없게 느껴진다. 어렸을 때 좋아했던 미래 소설과 SF 영화들보다 미래를 살고 있다.
24일에 아버지가 해고통지를 받았다. 10시 쯤 약 드시라고 전화했는데, 황급한 목소리로 좀 있다가 전화할게,라고 해서 해고통지 중인 거라고 짐작했다. 아버지랑 관련된 부분은 계획 또는 예상에서 어긋남 없이 진행중이다. 어긋남이 좀 있어야 하는데, 걱정이다.
같은날 오전에 자동차 검사를 받았고 오후에 헌혈 하고 돌아오다가 잠깐 정신줄 놓은 사이에 가벼운 사고가 났다. 90프로 이상 내 책임이다. 산타할아버지가 선물 준비하는 좋은 날에 안좋은 일이 겹쳤다. 가벼운 접촉이라 다행이다. 운전하던 두 사람은 서로 괜찮은지만 묻고 각자의 보험회사에서 온 두 사람이 일사천리로 일을 진행한다. 횟집에서 인간이 양식한 활어회를 먹는것처럼 세계가 나를 양식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액땜이라 했다. 뭔 액땜이냐고 했더니 2021년 액땜이라 한다.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 주변에서 다들 좋게 얘기해주니까 좋게 생각하기로 한다. 앞 차에 타고 있던 두 사람이 대인처리를 했다고 하는데, 자동차 번호판이 약간 구겨지는 가벼운 접촉사고였으니 실제로는 아프지 않길 바란다. - 교통사고 냈(났)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다. 나도 죄짓고 살기는 틀린 사람이라 다행인건가 -
연휴 내내 누웠다가 엎드렸다를 반복하며 게임과 유튜브를 왔다갔다 했다. 나이 마흔 셋에 이럴수 있는 여유가 있다는 게 다행스런 일이지만 어떻게 생각하면 불행한 일이기도 하다. 만들던 노래는 멈춰 있고, 매일 강박적으로 붙잡고 있던 기타연습도 손에서 떠났다. 책이라도 읽어볼까 하면, 그게 다 뭔 의민가 싶다. 찝찝한 기분이 가시질 않는다.
오늘이 아버지 마지막 출근날이다. 현재 아버지 상태라면 아버지가 월급을 받는 직장에는 마지막으로 출근하는 날이다. 지금 건물에서 경비일을 7년 반동안 했다. 24시간 근무서고(중간에 두 시간 정도 잠) 다음날 쉬고 또 24시간 근무서는 일의 반복. 아버지는 지겹지 않았을까? 언젠가 '너무 외로운 고슴도치가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가시를 다 뽑고 너구리랑 친구가 됐다.'는 얘기를 들었다. 지겨움과 외로움은 같은 말이다. 아버지는 외로웠을 것이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아버지가 소속된 경비 용역회사 사무실 직원과 통화했다. 아버지가 아픈건 술로 문제가 있었던 6월에 이미 알았고, 아프지 않았으면 계속 가고 싶었지만 계약기간이 끝나서 재계약을 안하는걸로 했다고 한다. 퇴직금도 매년 정산했던 것이 아니라서 7년치를 한꺼번에 준다고 하고 만 65세 이전 취업했기 때문에 실업급여 수급 대상자라고 한다. 잠깐 통화했을 뿐인데, 차분하고 조심스러운 말투에서 우리 아버지 참 괜찮은 회사에 다녔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가 정상이 아니란 걸 알았을 때, 바로 퇴사 조치할 수도 있었을텐데 6개월을 봐줬다. 고마운 일이다. 내가 아버지 아들인 것도 아버지한테 다행인 일이길 바란다.
아버지는 돈을 모아두는 인생을 살지 않았고 엄마는 당장 고정 수입이 없어져 매달 나가는 보험료가 큰 걱정이다. 엄마는 꽤 심란하겠지만 아버지는 회사 그만두게 된 것에 크게 신경쓰지 않는듯 보인다. - 물론 속으론 안 그럴수도 있다. - 희망적으로 생각하면, 일이야 다시 구하게 될 수도 있고 당장은 매일매일 규칙적으로 주무실 수 있게 되서 좋다고 생각한다.
올해 나는 운이 좋아서 전세계 인구로 따지면 100명 중에 한 명꼴로 걸리는 코로나에 걸리지 않았다. 살아 있는다는 건 복권보다 확률이 높은 행운일 뿐이다. 그저 운이 좋아서 올해도 살아 남았다. 살았으니 살아야 한다. 무력해도 살아야 한다. 어쨋든 살아야 한다.
몇 가지 결심들로 올해를 넘어 내년으로 가본다. 일단 담배는 사 놓은 한 갑만 마저 피우기로 하자. 체중감량해서 약간은 건강해지도록 해야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무력해지지 말아야지.
술을 많이 마신 다음날엔 내가 어제 술자리에서 누군가에게 무례하게 굴지는 않았는지 생각하게 된다. 실제로 그런 경우는 거의 없지만 - 가끔은 있음 - 자꾸만 이런 의심이 드는 것은 평소에 내가 무례하거나 무례한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조심해야지. 운이 좋아서 살고 있으니 겸손하게 살자. 이것도 새해 결심에 추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