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잠을 자다
청량리에서 강릉오는 한 시간 반 동안 잠깐 졸았다
선잠이란 말이 어울리지 않는 나이에도 기차안에선 졸게 된다
어린날 청량리에서 무궁화 기차를 타고 외할머니 살던 경북 영주에 갈 때도 열차 안에서 졸았다
그때는 너무 어려서 선잠이란 말이 어울리지 않았다
한때는 내게도 이 예쁜 말이 어울리는 시절이 있었다
선잠은 서서자는 잠인지 잠깐자는 잠인지 아니면 잠깐 서서 자는 잠인지
선잠이란 말을 아는 내가 옛날 사람은 아닌지
열차가 잠깐 멈췄을때 아버지랑 외삼촌들이 먹던 가락국수가 제천역이는지 안동역이었는지
어린 내게 호의로만 가득했던 시절
잠깐의 꿈 속에는 은밀한 비밀조차 없었는데
아버지랑 병원 들렀다 돌아오는 길의 선잠 안에는
깨고 나니 흔적도 없이 사라진
옛 이름과 그때의 사랑, 세상에 나만 아는 비밀이
열차 한 칸을 가득 채운다
잊기만 하는 아버지를 뒤로하고
우락부착한 중년 남자의 생활로 돌아가는 길에 잠깐 졸았다
아버지는 당신의 꿈 속에 살고
나는 지금 그 꿈 속에서 온 삶을 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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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고기를 먹다
아버지랑 둘이 앉아서 아침부터 불고기를 먹는다
국도 없고 다른 찬은 김치 하나다
어제는 아버지 생일이고 엊저녁에는 나 혼자서 같은 걸 먹었다
아버지 사는 모습은 볼때마다 안됐지만
밥은 먹어야 그렇게라도 산다
불과 고기
맛이 없을 수가 없는 조합
인류의 번영 과정을 떠올리게 되는 조합
아버지랑 뭘 먹을때는 가급적 그 음식의 기원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는데 잘 되지 않는다
아버지는 이미 쇠락했고 나도 쇠락하는 나이다
각자의 전성기를 모두 흘려보낸 두 사내가
오래된 식탁에 마주앉아 먼저 태어난 사람 70살 생일밥을 먹는다
아버지는 잠들고
나는 왔던 길을 돌아 멸망으로 향한다
돼지국밥을 먹다
아버지랑 병원 근처 국밥집에서 돼지국밥을 먹는다
이 고기가 어떻게 내 앞에까지 왔는지
왜 바닷가에 있는 부산같은 대도시에서 돼지국밥이 유명한지
서울 변두리에 부산돼지국밥집이 있는 것이 합당한 일인지
떠오르는 생각들은 일단 잊고
먹는일에 집중한다
마주앉은 아버지는 방금전 일도 잊는 사람이 됐고
다행이라면 옛날에 태어난 나를 잊지는 않았다
- 아버지.....
- 어, 왜?
말을 이을 수 없어서 국밥에 고개를 묻는다
뜨거운 김이 안경에 서리고 뺨을 달군다
- 아버지, 맛이 어때요?
- 응, 맛있어.
- 역시 한국 사람은 따뜻한 국밥이죠?
- 응, 맛있다.
- 아버지.....
- 어, 왜? 나 괜찮아.
말을 이을 수 없어서 식어버린 뚝배기에 고개를 묻는다
자꾸만 고개를 묻는다
컴퓨터로 쓰는 거 참 오랜만이다. - 찾아보니 일 년 만이다. -
하루에 두 번 이상 아버지랑 통화하고 있다. 아침 저녁 약은 꼭 먹어야 하기 때문에 두 번이 기본이다. 중간중간 별일 없는지 전화하기도 한다. 일단 전화를 받아야 안심이 되는데, 전화를 안 받는 일은 거의 없다. 다행이다.
건강은 누구도 자신 못한다고 그렇게나 건강하던 아버지가 4번이랑 5번 디스크 사이가 터진 것도 모르고 그저 다리가 많이 저린 줄 아는 사람이 됐다. 허리수술은 잘 됐다. 다행이다.
술을 안드신지는 세 달 이상 됐다. 스스로 어떤 결심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잘 하고 있다.
양천구치매안심센터에서 선별검사랑 진단검사를 했다. 선별 검사 결과지를 보고 아버지 머릿속에 어떤 부분들이 사라진 걸 알았다. 진단검사 결과는 의사랑 얘기해야 한다고 하는데, 코로나로 일이 밀려서 올해 안에는 의사가 판단하는 아버지 병세가 어떤지 알 수 없다. 최초에 선별검사를 마치고 급한 마음에 동네 병원 신경과에서 뇌 MRI를 찍었는데, 치매 전문이 아닌 뇌신경 전문 의사라 '치매'입니다, 라고 하지 않았다. 애초에 대학병원은 예약이 많이 밀려있긴 했지만 이렇게 오래 기다리게 될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대형 종합병원으로 갈 걸 그랬나, 싶기도 하다. 다만 아버지의 현재 상태는 '치매'로 확정되건 안되건 '좋지 않음'이다. 어찌보면 괜찮고 어찌보면 괜찮지 않다. 나는 그만하길 다행이다, 생각하는 쪽이라 다행이다.
긍정적인 부분 - 지하철 타고 여의도로 출퇴근, 혼자 밥 끓여 드심, 전화를 잘 받음, 갑자기 성격이 변하지 않았음, 계절을 헷갈리지는 않음(어제 처음 물었을 때는 가을이라고 했다.), 카드나 현금으로 상거래 가능, 집 비밀번호를 잊어버리진 않음, 사람 이름은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음
부정적인 부분 - 사람이름을 제외한 많은 명사가 머릿속에서 사라짐(진단 검사 받을 때, 밖에서 들어보니까 첫 음절을 불러주면 단어를 곧잘 기억해 냄), 날짜랑 요일 개념 상실(직장 다니는데 지장 없음), 1분 전에 나눴던 얘기 잊어버림(자꾸 말해주면 됨), 정상적인 은행업무 불가(서울 가서 은행계좌 한 번 더 정리해야 함), 약을 전혀 못 챙겨 먹음(전화해서 구체적으로 뭘 드시라 알려주면 됨), 샤워를 자주 안 하는 것 같음(전화해서 지금 씻으시라 하면 됨), 화장실에 들렀다가 욕실 슬리퍼 신고 나와서 집안을 배회함
적으면서 보니까 부정적인 부분도 그렇게 부정적이지 않다.
방금 저녁 약 드시라고 전화하려고 했는데, 먼저 전화가 왔다. 아버지한테 먼저 전화가 오는 건 긍정 요인이다. - 무슨일 있거나 뭐가 잘 안되면 무조건 나한테 전화하라고 반복해서 말하고 있음 - 요일 약통에서 아무 색깔이나 뽑아서 네 칸이 맞는지 확인하고 세 알짜리랑 한 알짜리 중에 한 알짜리 드시면 된다고 했다. 알았단 소리를 듣고도 마음이 안 놓여서 바로 드셔야 하니까 손에 알약 한 알을 올려 놓으라고 했더니 살짝 화난 말투로 "걱정 마라, 소리 안들려?" 하면서 플라스틱 약통에서 알약 흔들리는 소리를 들려줘서 안심했다.
참으로 안심했다.
아버지는,
동생이 결혼한 2015년부터 완전히 혼자 살기 시작했다. 경비 업무 특성상 매일밤 규칙적으로 잠을 자지 않았다. 아침에 퇴근해서 저녁까지 술을 마시고 다음날 출근한 일이 많았다. 혼자서라도 자꾸 술을 마셨다. 같이 술 먹던 사람들 사이에서 병원에 가봐야 한다는 얘기가 나왔다. 직장에서 짤릴뻔했다. - 근무일지를 항상 다른 사람이 썼다고 하는데, 근본 이유는 술인 거 같다. - 그러다가 식구들이 아버지 증상을 알게 됐다. 평소에도 남의 말 귀 기울여 듣는 사람이 아니었고, 어딘가 덜렁대는 성향이 있었기 때문에 바로 알아채지 못하고 조금은 늦게 알게됐다.
아버지는,
많이 외로웠다.
나는,
무심했다. 지난 10년 동안 아버지랑은 일년에 한 두 번 통화하고 명절이랑 제사 때 얼굴보는 게 다였는데, 요즘은 하루에 몇 번씩 통화를 한다. 병원 때문이긴 하지만 서울에 가서 얼굴도 자주 보는 편이다.
아버지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자기 삶을 살았을 뿐이다. 무관심이 후회되지는 않는다. 다만 아버지, 동생, 나 이렇게 셋이 소지섭이랑 임수정이 나왔던 '미안하다 사랑한다' 드라마 보던 생각이 난다. 아버지랑 동생은 드라마에서 감정을 고조시키는 장면이 나올때마다 '너무 감동적이야' 같은 말을 했었다.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에 우리 아버지는 스포츠 신문을 통해서 읽은 연예계 소식에 밝았고 젊은애들이나 좋아할 드라마를 참 좋아했다. 아버지는 그때도 많이 외로웠지만 그때까지는 아버지의 시대였다.
"아버지, 회사에서 같이 일하는 분이랑 얘기할 때, 이 사람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잘 들으시고, TV 뉴스를 보더라도 무슨 얘기를 하는지 잘 들으면서 보시고, 뭐가 잘 안되면 그게 뭐든 어떻게 하라고요?" " 어일우한테 전화"
노릇
아버지한테 전화했다
- 아버지, 가방안에 약통 꺼내서 약 세 개 들은 거 드세요
어머니와 통화했다
- 엄마, 아버지랑은 일상적인 대화만 하세요
동생과 통화했다
- 야, 아버지한테는 복잡한 얘기하지 말고 그냥 안부만 전해라
아버지랑 통화했다
- 아버지, 행복약국이라 적힌 약 봉지에 든 약 드세요
아버지가 아내 이름을 기억했다
유년의 나를 모르는 아내와
유년 이후의 나를 모르는 아버지가
반갑게 통화했다
아내랑 통화한 걸 기억 못하는 아버지와 통화했다
- 아버지, 약통에서 아무 색이나 꺼내세요
- 어 그래. 내가 좋아하는 보라색으로 꺼냈다
- 예, 아버지. 잘하셨어요. 네 칸 중에 약이 하나만 들어 있는거 드세요.
- 약이 하나만 들은 게 두 개 있다.
예, 아버지 그 중에 하나 꺼내서 드세요
- 어 그래. 고맙다.
아버지는 점점 쉬운 사람이 되고
큰 아이 노릇은 점점 어렵다
토스트를 먹다
오후 네 시,
동네 초등학교 앞 '새참 토스트'
참새처럼 재잘거리는 아이들과 섞여서
토스트를 먹는다
싸구려 식빵에 밴 달콤한 마가린 냄새
양파랑 쪽파를 썰어 넣고 부친 계란
얇은 햄과 치즈
머스타드와 케첩, 설탕까지
모든것이 조화로운
토스트를 먹는다
아침에 퇴근하던 아버지가
출근하는 사람들의 반대편을 걸어와
아침까지 잠들지 않던 내 방 앞에 두곤 했던
20년 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은 맛의
토스트를 먹는다
뒤섞여 조화롭지 않고
머릿속이 뒤죽박죽인 아버지를 생각하며
그때보다 더 커버린 중년의 아이가
아이들 사이에 우뚝 서서
토스트를 먹는다
보통날
하루에 17개의 담배를 피운다
양치질은 두 번
일주일에 한 번 자동차에 기름을 채운다
소주는 한 두 번 마시고
운동을 하는 저녁도 있다
달에 한 번 정도는 참치를 먹는 사치를 부리고
다음날 후회하기도 하지만
너를 사랑하니까 다 괜찮다고 느낀다
생각과 느낌은 어떻게 다른지 생각하는
이런 보통날에
서울 사는 아버지와 매일 두 번의 통화가 더해지고
오늘이 몇년 몇월 몇일 무슨 요일인지 모르는 아버지에게
지금이 가을인 건 아는 아버지에게
그래서 다행인 아버지에게
예, 아버지. 잘 하셨어요. 란 말만 반복하는
보통날을 산다
맥주를 먹다
친구를 만났다
먼 내륙에서 바다까지 나를 보러 온 친구
함께 커피를 마시고
누가 날 찾아올때마다 먹지만
어떻게 생긴지 모르는
삼숙이 매운탕을 먹었다
자리를 옮겨 비틀즈를 들으며 맥주를 먹는다
멀리 오징어 잡이 배 불빛이 선명하다
아직은 비틀거리지 않는 시간이다
맥주을 먹는지 안주로 나온 굴 튀김을 먹는지
그것도 아니면 그냥 친구의 얘기를 먹는지
잔이 빌 때마다 묻지도 않고 잔을 채워주는 사장님까지
먹는 일도 사는 일도 항상 질문 속에 있다
친구는 생활인이니 술은 내가 사야지
그렇다면 내 삶은 생활이 아닌지
그렇다면 어디까지가 생활인지
일탈은 생활에 포함되는지
우리 중에 일탈하지 않은 사람은 누군지
잘 지내란 말로 헤어질 뿐인 친구와
abbey road 위에서 비틀거리며 맥주를 먹었다
이런 꿈을 꾸었다.
신월동에서 목동 오목교쪽으로 차를 몰고 가고 있었다. 뭘 하러 가는지는 모르겠다. 오목교 사거리에 다 도착했을 때, 왼쪽 뒷타이어가 펑크나는 소리가 났고 자동차의 왼쪽 뒤가 푹 꺼졌다. 가까운 주차장을 찾아서 차를 세웠다. 차에서 내려서 보험에 긴급 출동 전화를 하려고 했다. 분명 야외 주차장에 차를 세웠는데, 내린곳은 아버지 방이었다. 아버지는 없고 내 자동차는 작은 방을 가득 채우고 서 있었다. 깊은 한숨을 쉬고 잠에서 깼다.
11월이다. 하루만에 겨울이 찾아와도 이상하지 않은 때다. 가을이 그랬던것처럼 오늘 하루만에 겨울이 왔다. 가을과 겨울사이, 계절은 네 개지만 시간은 항상 두 개의 계절 사이에만 있다.
오늘도 아버지 생각을 많이 했다. 하지만 오늘은 아버지 목소리를 못 들었다. 아버지 쉬는 날마다 한 두번씩 통화하면서 확인해 본 결과 일단 술은 끊으신 거 같다. - 이것도 알 수 없지만 - 그렇다고 아버지의 인지능력이 좋아지진 않는다. 몇년 몇월 몇일 무슨 요일을 잘 모른다. 그나마 엊그제 계절을 물어봤을 때, 한 번에 가을이라 하셔서 약간 안심했다. 약을 제대로 챙겨 먹지 못한다. - 동생에게 요일별 약통을 구입하라 했다. - 엄마는 오늘 오랜만에 서울에 가서 자동으로 꺼지는 가스렌지와 자동 잠금 밸브를 설치했고 고장난 전기장판을 새 것으로 바꿨다. - 아버지가 전기장판을 안 틀어봐서 고장난 걸 몰랐던 거면 좋겠지만 고장난 걸 잊었을 가능성이 높다.
아버지 상황을 처음 알았을때도 그렇고 지금까지도 많이 당황스럽지는 않다. h누나가 돌봄의 영역에 들어가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인듯 말했는데, 나도 그런가보다 받아들였다. 부모가 아이를 돌보고 커버린 아이는 늙은 부모를 돌본다. 부모님과 근처에 산다면 핸드폰 가입부터 병원 다니는 일까지 이것저것 신경 써드릴 것이 많고, 다들 어느시점부터는 부모님을 돌보고 산다. - 엄마가 우리 동네에 살았다면 무심결에 속아서 잘못 가입한 인터넷 티비 결합상품 해지하느라 몇날며칠을 속상해하다가 아들에게 하소연하고 고객센터에 전화해서 큰소리 낼 일은 없었을 거다. -
엄마한테는 당신이 아버지를 보살필 의무는 없다고 말했다. 엄마도 전적으로 그렇게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둘이 같이 살고 싶진 않은 거 같다. - 같이 산 게 20년 떨어져 산 게 24년 이혼한지는 10년이다. -
아내가 아버지가 강릉에서 살고 우리 부부가 자주 들여다보는 게 좋을 거 같다고 먼저 말했다. 앞에선 안 울었는데, 그 마음이 고마워서 다음날 혼자 울었다.
걱정이 되서 얼른 아버지 이사 준비하고 싶은데, 엄마 마음은 그렇진 않다. 일단 지금 하는 경비일을 할 수 있을때까진 하는 걸로 하자고 한다. 환자건 보호자건 현실은 비용이 문제다. 엄마는 정신없는 아버지를 불러다 치매 보험을 들었다. 처음이는 화가 나서 당장 해약하라고 했지만 이달 19일에 확실히 치매로 판정 받은 후에 해약해도 늦지 않다.
아버지가 강릉으로 옮기려면 이것저것 처리할 일이 많을텐데, 지금 내 걱정은 하루만에 바뀌는 계절처럼 아버지가 하루 아침에 나빠질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매일 전화하나 보다.
지금 아버지는 가을과 겨울 두 계절 사이에 있다.
터미널
밤 10시,
동서울 터미널
오가는 사람들 사이로 짠내가 흐른다
터미널에서는 항상 뭔가를 굽고 있다
마른오징어, 문어발, 쥐포, 옥수수, 군밤
방금 도착했거나 어딘가로 가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
터미널에는 그들의 인생이 구워지는 냄새가 난다
파는 사람, 사 먹는 사람, 그냥 지나치는 사람까지
다들 뭔가를 구워 먹고 산다
자신이건 남이건 구워 삶는 삶고 산다
누구나 벗겨지거나 벗겨먹은 허물 하나쯤 안고 살고
터미널에는 인생들이 스치며 만든 짠내가 난다
가을
하루만에 찾아온 가을
나무 그림자에서도 가을이 보인다
붉게 또는 노랗게 사멸하는 이파리들
여러 색깔로 피었다가 여러 색깔로 생을 마치는 꽃들
가을은 저무는 계절
삶도 가끔은 계절을 따라가기도 하고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은 나에게
가을은 무슨 색입니까?
잃어버린 것
강릉시 대신 전해드립니다 페이지엔 잃어버린 것들이 많다. 신분증, 카드, 지갑을 많이 잃어버리고 주인과 집을 잃은 강아지랑 고양이도 많다. 아주 가끔은 사람을 잃어버리고 찾았다는 소식도 있다.
우리 아버지는 기억을 잃어버리고 있는 중인데, 차라리 지갑이나 신분증을 잃어버렸으면 좋겠다.
오늘 아버지는 또 뭘 잊으셨을까. 전화 달라는 문자랑 카톡을 매일 보내는데 이버지에게선 전화가 오지 않는다.
지난 몇 년 동안 혼자 사는 아버지에겐 무슨일이 있었던 걸까? 안 그래도 순한 양같은 사람인데 술을 안 드시니까 더 순한 양이 됐다. 원래 남의 말을 귀기울여 듣지 않는 분인데, 엄마 말로는 내 말은 잘 듣는다고 한다. 장남이 뭐라고. 술 먹으면 안된다는 결심도 매일 잊으시는건 아닌지.
10월 5일 밤, 아버지 집에 갔다. 집을 쭉 둘러봤다. 오래된 물건들과 또 오래된 물건들. 70세 독신남의 집. 씨발, 우리 아버지 사는 게 안됐네. 마음속에 '아버지 사는 게 안됐다'는 문장이 계속 돌고 결국 울어버렸다.
머리가 마음보다 늦고 마음은 몸보다 늦다. 우리 아버지는 머릿속이 몸과 마음의 속도를 못 따라오는 상태다.
10월 6일에 병원에 다녀왔다. mri촬영결과 알츠하이머 환자의 뇌는 아니지만 인지력은 술로 인해서 심각한 손상이 있다고 한다. 치매약을 처방받았고 하루에 두 번씩 약 드셨는지 별일 없는지 확인하고 술 드시면 안되고 가계부 꼭 쓰시라고 통화하고 있다. 매번 전화를 끊을때마다 잘 지내라고 하신다. 그동안 연락을 너무 안했고 나랑 매일 통화하는 걸 기억 못하셔서 하는 말 같다. 마음이 너무 안좋다.
올해가 몇년인지도 모르는 울 아버지가 술을 끊고 지금 상황을 이겨내길 바란다. 못 이겨내도 할 수 없지만.
별 생각없이 골랐는데, 재미있었다. 죽음으로 인한 상실감, 교감, 사람과 시대를 잇는 것에 관한 얘기다. 1부는 물건 - 20세기 초반의 자동차 - 에 관한 생각이 좋았고 2부 초반에 갑자기 재미 없어지면서 이건 뭐지 했는데, 부검이 시작되면서 모든 실타래가 풀렸다. 3부는 초반에 아내가 죽는 장면이 인상적이고 전개가 빨라서 쑥 읽힌다. 이 작가의 다른 것도 읽어봐야겠다.
1부
이건 최신품인 4기통 르노란다, 기술이 만든 걸작이지. 이걸 봐라! 이 차는 이성의 힘으로 빛날 뿐 아니라 시의 매력으로 노래하는 창조물이야. 우리 도시를 그토록 더럽히는 동물은 없애버리자고! 자동차는 잠을 자지 않아도 된다-말이 그걸 이길 수 있겠니? 힘도 비교가 되지 않아. 이 르노는 14마력 엔진을 가진 것으로 평가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엄격하게 산정한 결과란다. 실제로는 아마 20마력은 출력해낼 거야. 그리고 기계의 마력은 동물의 마력보다 훨씬 강력하단다. 말 서른 필이 마차를 끄는 것을 상상해봐라. 말 서른 필이 두 줄로 서서 발을 구르고 안달하는 광경이 그려지니? 흠, 상상할 필요는 없겠구나, 여기 네 눈앞에 떡하니 있으니까. 말 서른 필이 금속 상자에 압축되어 이 앞바퀴들 사이에 들어가 있지. 그 성능! 그 경제성! 불이 이렇게 눈부시게 획기적인 이유로 타는 건 최초일 거야. 또 자동차 속 어디에 말처럼 불쾌한 내장이 들어 있니? 그런 건 없단다, 다만 연기를 내뿜지만 그거야 공기 중에서 사라지지. 자동차는 담배만큼이나 무해하단다. 내 말을 명심하거라, 토마스. 금세기는 뿜어져 나오는 연기의 세기로 기억될 게다!
하지만 물건의 가치가 하락한 것은 근대산업이 부상하면서부터였고, 일일이 수작업하고 유통 속도가 느리던 산업화 이전 시대에 물건의 가치란 대단했다. 심지어 옷가지도 그냥 버리는 일이 없었다. 예수의 얼마 안 되는 옷가지는 그를 미천한 대중 선동가로만 생각했던 로마 병사들이 나눠 가졌다. 평범한 옷가지도 나눠 입었는데 대형 조각품이라면, 더구나 그것이 사실상 종교적인 의미가 있는 성물이라면, 분명히 보존돼 있을 것이다.
오늘 한 노예가 내 구두를 보고 아프리카인의 피부로 만들어졌느냐고 내게 물었다-사실상 그런 의미의 질문을 했다. 구두와 피부는 같은 색이다. 그 사람을 먹었어요? 그의 뼈가 쓸모 있는 가루가 되었나요? 일부 아프리카인들은 우리 유럽인들이 인육을 먹는다고 믿는다. 그런 생각은 자신들이 밭 노동에 쓰인다는 사실에 경악한 데서 비롯된다. 그들의 경험상 생활의 물질적인 부분, 소위 먹고사는 일이라 불리는 것에는 큰 노력이 필요치 않다. 열대 지역에서 텃밭 농사를 짓는데는 시간과 일손이 거의 들지 않는다. 사냥은 더 품이 들지만 단체 활동이고 즐거움의 원천이니 수고가 아깝지 않다. 그러니 백인이 농사 이상의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게 아니라면 왜 그렇게 많은 아프리카인을 잡아가겠는가? 나는 노예에게 내 구두는 그들 동포의 살가죽으로 만든 게 아니라고 안심시켰다. 그가 내 말에 설득되었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그들이 어디서 왔는지-어떤 지역, 어떤 부족 출신이지-상관없이 노예들은 곧 똑같이 침울한 행동에 젖어든다. 그들은 무기력하고 수동적이고 무심해진다. 감독들이 그들의 행동을 바꾸려고 마구 채찍을 휘두르면서 열을 낼수록, 이런 태도는 더욱 고질적이 된다. 노예들이 보이는 무력감의 신호 중 내게 가장 충격을 주는 것은 토식증이다. 그들은 개처럼 땅을 손으로 파고 흙을 동그랗게 뭉쳐서는, 입을 벌려 그것을 씹어 삼킨다. 주님의 부엽토를 먹는 것이 비기독교적 행위인지 아닌지 가늠할 수 없다.
2부
그는 그녀가 시키는 대로 한다. 그는 메스로 침팬지의 옆구리에서 털이 붙은 가죽을 한 조각 잘라낸다. 마리아 카스트루는 손가락으로 털을 잡아 문지르고 코를 킁킁대더니, 털에 입술을 대고 누른다. "라파엘은 항상 나보다 신앙심이 깊었어요." 그녀가 말한다. "툭하면 아브라앙 신부님이 하신 말씀을 되되었죠. 믿음은 어리다고, 믿음은 우리와 달리 늙지 않는다고."
3부
의학 용어가 난무하는 소용돌이 속에서, 치료를 할 때마다 희망이 커졌다가 사그라진 뒤에, 몸을 비틀며 신음하고 흐느낀 뒤에, 실금을 하고 살이 쭉 빠진 뒤에, 그의 아름다운 클래라는 흉한 초록색 환자복 차림으로, 흐릿한 눈은 반쯤 감기고 입은 벌린 채로 병원 침대에 누워 있다. 몸부림치고, 가슴에서 한 차례 덜컥대는 소리가 나고, 그녀는 죽는다.
커피 가루를 꺼내려고 몸을 돌리다가 부엌 입구에 있는 오도를 보고 피터는 화들짝 놀란다. 얼마 동안이나 거기 쭈그리고 앉아서 그를 지켜봤을까? 침팬지는 소리 내지 않고 움직인다. 뼈가 삐걱대지 않고, 덜거덕 소리를 내는 발톱이나 발굽도 없다. 피터는 이런 움직임에, 오도가 집의 어디에나 있을 수 있다는 점에도 익숙해져야 될 것이다. 그게 싫지는 않다는 것을 그는 깨닫는다. 프라이버시를 누리는 것보다 오도와 같이 있는 게 훨씬 더 좋다.
아버지의 집
오래된 벽지
오래된 침대
오래된 옷장
오래된 식탁
오래된 책상
오래된 티비
오래된 냄비
오래된 냉장고와 세탁기
더 오래된 아버지
사라진 어제와 오늘
나보다 더 오래된 기억
흐트러진 아버지의 흔적을 쫓아보는
오래전 아이
아버지와 워크맨
아버지와 추억이 별로 없다.
첫 번째 기억이 대중 목욕탕에서 동생편 들어준다고 대들었다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회초리 맞았던 것이다. 그 다음은 동생이 초딩 2학년때, 시험 잘 봤다고 피아노 사주신 거. 그 피아노는 내가 잘 쳤고, 20세기 후반에 집에 정말 돈이 없을 때 팔았다. 나랑 직접 연결된건 91년, 내가 중1때 워크맨을 사주신 일이다. 나는 물건에 대해서 조르는 법이 없는 편인데, 게임기도 컴퓨터도 없는 집에서 워크맨만은 갖고 싶다고 졸랐다. 나는 당연히 소니나 아이와 제품을 기대했는데, 아버지는 어느날 술에 잔뜩 취해서 빨간색 산요 워크맨을 내게 건냈다. 외부스피커도 있고 티비 주파수도 잡히고(아날로그 방식) 녹음 기능도 있는 만능 워크맨이었는데 나는 처음 보는 브랜드가 싫었고 아버지가 술 취해서 문래동 어느 노점상에서 바가지 써서 사온 것 같은 그 물건이 싫었다. 그 워크맨으로 배캠 초창기 방송을 들었고 서태지를 들었다. 그렇게 애송이 시절을 보냈다. 나중에는 그런 워크만을 가져 본 게 나 뿐이라는 자부심도 있었다. 80번대 후반 주파수에 당시 서울방송 tv 소리가 라디오로 잡히던 시절 얘기다. 엄마가 물장사 하기 전까지.우리집에 유일하게 돈이 돌던 시절 얘기다.
요즘 아버지 때문에 걱정이 많은데, 퇴근길 운전 중에 갑자기 옛날 생각이 났다.
시절의 흐름대로 생을 산 우리 아버지는 이제 어느 시절로 가는걸까?
악몽 6
자동차 조수석에 실려서 어딘가로 향하고 있다
가면을 쓰고 운전하는 사람이 누군지 모른다
차창 밖은 온통 해가 지는 빛깔이다
눈이 부셔서 조수석에 앉은 사람이 누군지 모른다
바로 옆 차 운전수도 가면을 쓰고 있다
운전수도 조수석에 앉은 사람도 눈이 부실 것이다
이제 차창 밖은 온통 밤의 빛깔이다
눈이 멀어서 여기가 어딘지 모른다
운전하는 사람이 누군지
조수석에 앉은 사람이 누군지
이 자동차가 어디로 향하는지 모른다
족발을 먹다
족발을 먹는다
마늘족발 대(大)자
전화한지 삼십분도 안되서
1.8킬로미터를 달려오는 배달민국
족발은 서민음식이라는데
얼마부터 얼마까지가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서민 음식인가
나는 서민인가
족발, 쟁반국수, 국수 소스, 새우젓, 상추, 배추, 마늘, 고추, 된장, 콜라까지 모든것이 플라스틱 안에 들어있다
무언가를 플라스틱과 함게 먹는 일은 의식조차 못할만큼 익숙하다
위쪽에 살점을 다 먹으니 바닥에 뼈가 보인다
발가락 뼈도 있고 종아리 뼈도 있다
애인과 마주앉아 뼈를 잡고 살을 뜯는다
사랑은 육식을 닮았다
앞다리든 뒷다리든 상관없이 맛있다
국산이든 수입이든 상관없이 맛있다
눈 앞에서 먹으니 그게 사랑인가
애정하는 것은 돼지고기인지 당신인지
둘 다 아니면 허겁지겁 족발을 먹는 나인지
먹기 위해 키워지는 것과 먹기 위해 사는 것 사이에서
혼란스럽게 족발을 먹는다
오렌지 쥬스
순대국과 오렌지 쥬스
감자탕과 오렌지 쥬스
갈비탕과 오렌지 쥬스
추어탕과 오렌지 쥬스
내장탕과 오렌지 쥬스
짜장면과 오렌지 쥬스
군만두와 오렌지 쥬스
탕수육과 오렌지 쥬스
코카콜라와 오렌지 쥬스
아이스커피와 오렌지 쥬스
감귤 쥬스와 오렌지 쥬스
오렌지 쥬스와 오렌지 쥬스
19세기와 오렌지 쥬스
20세기와 오렌지 쥬스
21세기와 오렌지 쥬스
프로이트와 오렌지 쥬스
히틀러와 오렌지 쥬스
안네 프랑크와 오렌지 쥬스
빌 에반스와 오렌지 쥬스
게리 멀리건과 오렌지 쥬스
코비드 19와 오렌지 쥬스
BTS와 오렌지 쥬스
역시, 20세기와 오렌지 쥬스
20세기에도
21세기에도
당신과 오렌지 쥬스
오렌지 쥬스 맛있다
21세기
역에 들어서자마자
지하철에서는 마스크를 써야 한다는 안내 방송이 흘러나오는 21세기를
미래영화가 현실이 되버린 현실을 나는 사랑할 수가 없다
이런 시절에도 청량리역 대합실에는 비둘기가 날아들고
날마다 새 건물이 들어서는 서울'특별'시지만 몇 년 만에 찾은 고향 동네의 시장통과
지하철을 나와 집으로 향하는 언덕길은 크게 바뀌지 않았고
변한 건 옛날의 할아버지를 닮아버린 아버지와 그때의 아버지를 닮아버린 내 모습 뿐
기억이 멈춰버린 아버지랑은 큰 건수가 있을때면 늘 그렇듯 순댓국을 먹는다
express란 아름이 붙은 고속 열차 덕분에 170킬로미터 떨어져 사는 아버지랑 밥을 먹고도 한나절 만에 집으로 돌아올 수 있는 21세기를
서로 걱정은 하지만 각자 알아서 살아갈 뿐인 현실을 나는 사랑할 수가 없다
커피
믹스 블랙 가리지 않고
커피로 입 안을 헹구는 일이 좋다
음식 찌꺼기가 씻겨 나가고
이 사이사이로 커피향이 묻는다
사실은 블랙커피 쪽의 텁텁함이 믹스커피의 달달함보다 좋다
물은 너무 밍밍하고
탄산음료는 이가 상한다
양치질은 하기 싫고 입 속은 수수께끼처럼 답답할 때
커피로 입 안을 헹구며
커피를 즐겨 마셨다는 옛 왕조와 제국의 왕들도
나와 같은 행동을 했을거란 생각을하는 일이 좋다
옛날 왕들보다 못할 게 없는 지금의 삶이 좋다
믹스커피 보다는 블랙커피가 좋다
커피로 입 안을 헹구는 일이 좋다
깨끗해지는 기분이 좋다
마스크 쓴 얼굴이 본 얼굴이 되버린 시대다. 신분증 사진도 마스크 쓰고 찍어야 할 판이다. 불편해도 인간은 적응한다. 노예로도 살고 나치의 홀로코스트때도 살아남고 일제 강점기에도 살아낸 게 인간이다. 지구상의 모든 생명중에 가장 적응력이 좋은 게 인간인지도 모른다. 지나치게 인간 중심적인 생각일 수도 있지만 모든 생명 중에 가장 늦게 절멸할 거 같다. 물론 인구수가 급격히 줄어든 상태로 겨우 버티는 게 고작이겠지만 말이다.
생명이 근본적으로 가진 이기심이라는 게 다른 종들과의 균형을 유지하려고 하기 보다는 일단 자기가 먼저 먹고 살고 많이 번식하는 것이 우선이기 마련이다. 그 개체수를 조정해 주는 것이 지구다. 칡이 전세계를 뒤덥지 못하는 것이나 아프리카 초원에 포식 동물만 뛰어다니지 않는 일이 그렇다. 공룡도 지들끼리 너무 막나가다가 멸종했을 것이다. 이 와중에 유독 인간만 쭉쭉 개체수를 늘리고 있다. 인간의 개체수도 지구가 조정해 주기를 바란다.
작년 호주 산불 때 시작된 우울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코로나는 극지방 빙하 소멸이나 캘리포니아 산불처럼 먼데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서 코로나 블루는 평생 안고 가게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매일 매일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살고 있다. 매 끼니를 마지막 끼니라고 생각하고 먹는다. 그러자면 맛없는 걸 먹어도 맛있게 먹어야 한다.
살면서 아무것도 한 게 없다는 공포에 휩싸여있다. 퇴근하고 저녁에 아내와 함께 있으면서 느끼는 안도감이 그나마 위안이다. 널 사랑하는 것 그것 밖에 없다.
기울기
아무리 뒤돌아봐도
모든 것을 원점으로 돌려봐도
내 삶은
사랑에 치우치거나 나에게 치우친다
그러니까,
너에게 치우치거나 나에게 치우친다
이 세계의 자전축 23.4도
돌고 돌고 또 돌면
언젠간 너에게 닿는 기울기
나는 그 기울기와 너를,
또는 나를 사랑하였다
원점으로 돌려본 모든 것이 원점
조금은 기울어져 있어도
사랑은 결국 제자리
당신도 항상 나의 자리
어쩌면 기울었기에 고마운 세상
비밀의 문
비밀의 문으로 가는 길을 알고 있다
가파른 언덕을 넘고
덤불숲을 헤치고
사랑하는 사람조차 뒤돌아보지 않고
신발이 다 닳아 맨발이 되도록
걷고 또 걸으면 다다르는 곳
비밀의 문 앞에 서 있다
주문을 외워 문을 열고 한 발짝만 내딛으면
그곳은 미지의 세계
누구도 밟지 않았던 땅
일 만 개의 달이 동시에 지고
구름은 사선으로만 떠 있는 곳
그러나 당신이 존재하지 않는 곳
비밀의 문 앞에서 뒤를 돌아보았다
당신을 뿌리친 자리에 수 많은 내가 있다
한결같이 울고만 있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당신이 있길 바랐던 자리에 수 많은 나만 있다
모든 내가 뒤를 돌아보고 있다
비밀의 문 안에는 비밀이 없다
남매의 여름밤
아빠는 이혼을 했고, 나와 동생을 버린 엄마 얼굴은 보고 싶지 않다. 아빠는 여름방학 동안 할아버지 집에 동생과 함께 있자고 한다. 내키지 않지만 그 이유가 돈 때문이라는 걸 어렴풋이 알고 있다. 할아버지가 싫지는 않지만 서로 할 말이 있는 사이는 아니다. 초등학생인 동생은 어딘지 아직 철이 없는듯하고 아빠는 돈이 없다. 고모부와 크게 다툰 고모도 할아버지 집에서 같이 살게 됐다. 좋아하는 남학생은 먼저 연락하는 법이 없다. 중학생(고등학생?) 옥주의 상황이다.
아이와 청소년의 경계에 있는 주인공의 심리를 몇 가지 상황들을 통해 잘 표현했다. 동생과 같이 자고 싶진 않지만 같이 잘 수도 있다. 짝퉁 신발 거래에서 상대방에게 추궁을 당하자 그 자리에서 달아난다. 좋아하는 남자아이에게 줬던 신발을 빼앗아 도망친다.
옥주는 할아버지 집에 잠깐 살기 위해서나 할아버지 집을 팔기 위해서는 할아버지 허락을 받아야 하는 것을 아는 나이다. 그런데 아빠와 고모는 일단 저질러놓고 허락받거나 허락을 받지 않으려고 한다. 어른들을 이해하기 어렵다.
영화에서는 인물들이 가족이란 이름으로 둘러앉아서 콩국수, 잡채, 생일케잌, 포도같은 걸 먹는다. 할아버지 장례식장에서는 엄마까지 함께 국밥을 먹는다. 단, 그것만 현실이 아니고 엄마는 엄마인데도 가족은 아니다. 가족의 증명은 뭘 같이 먹는 것이다. 할아버지 장례식장에서 인물 한 명, 한 명이 국밥을 먹는 초상화 씬이 좋았다.
감독의 첫 작품인 것 같은데 여러 감독들이 겹친다. 아빠의 작은 봉고차를 정면에서 찍은 장면들과 사람들이 프레임 안에 갖혀서 뭔가를 먹는 컷이 좋다.(장률 영화에서 많이 보이는)
아빠랑 고모는 할아버지의 죽음을 예상했지만 옥주는 예상하지 못했고, 장례식장에 엄마가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했을 것이다. 결국 엄마는 또 다시 동생 얼굴만 보고 가버렸다. 엄마가 보고 싶었을까? 영화 마지막에 옥주는 엉엉 울고만다. 예상이 빗나가기를 바라는 시간들, 바람대로 되지 않는 시간들이 쌓여서 어른이 된다.
옥주의 겨울은 여름과 얼마나 달라져 있을까?
-> 영화 보고 뭘 써보는 게 정말정말 오랜만이다. 학교 때 이후로 처음인가?
창문이 있던 집
그 집엔 창문만 있었다
바깥과 이어진 단 하나의 통로
창문 안에는 사람이 있었다
창밖을 내다보는 사람이 있었다
창문 옆에 몸을 숨기고
나를 내려다보던 사람이 있었다
나는 담장 너머로 그 사람을 들여다보려고 했지만
한 번도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그 집엔 그림자같은 사람이 있었다
아니, 그림자만 있었다
먹지도 않고 잠들지도 않는 존재
나를 내려다보던 존재
나만 알고 있는 존재
갇힌 사람
이제,
그 집엔 대문이 있고
사방으로 창문이 있지만
여전히 창 밖에서 나를 들여다보려고 애쓰는
문밖에 있는 내 어린 그림자를 내려다보는
내가 산다
투게더를 먹다
여름밤
1974년생
나보다 네 살 많은 아이스크림을 먹는다
동생과 둘이 먹던 삼십 년 전엔 서로 더 먹으려고 선을 긋고 다투기도 했지만
원한다면 혼자서 한 통 다 먹을 수 있는
모자라면 한 통 더 사 먹을 수 있는
'함께'란 이름을 가진 아이스크림을 애타게 먹고 싶지는 않은
21세기를
나는 사랑한다
열대야에 아이스크림이 빠르게 녹고
숟가락으로 녹은 부분만 살살 긇어 먹는다
달콤하다
숟가락이 닿은 부분은 더 빠르게 녹고
입 안이 달콤할수록
단단함이 사라지는 속도는 북극의 빙하가 녹는 속도만큼 빠르다
다 먹지 못하고 냉장고에 넣는다
하루만큼 유예된 멸망도 입 속에선 달콤하다
어쩌면 마지막인 여름밤
어쩌면 마지막인 귀뚜라미 울음소리를 들으며
아내와 나
온 가족이 함께 '투게더'를 먹었다
봤다
죽어가는 나무를 봤다
죽어가는 새를 봤다
죽어가는 벌레를 봤다
죽은 나무를 봤다
죽은 새를 봤다
죽은 벌레를 봤다
죽어가는 사람과 죽은 사람을 봤다
아직은 웃는 너와 병든 나를 봤고
세상의 끝을 봤다
song ver
봤다 d key
죽어가는 나무를 봤다 1 4
죽어가는 새를 봤다 1 5
죽어가는 벌레를 봤다 1 4
죽어가는 지구를 봤다 1 5 1
썩어가는 바다를 봤다
신음하는 하늘을 봤다
상처뿐인 세계를 봤다
죽어가는 지구를 봤다
죽은 나무를 봤다 6 5 1
죽은 새를 봤다 6 5 1
죽은 벌레를 봤다 6 5 1
죽은 미래를 봤다 6 5 6
죽어가는 사람과 죽은 사람을 봤다 1 5 4 5 1
아직은 웃는 너와 병든 나를 봤다 4 5 4 5 1
세상의 끝을 봤다 4 5 4
죽어가는 나무를 보고 죽어가는 지구를 봤다 1 4 1 5 1
지난주 목요일부터 오늘까지 5일 쉬었다. 이렇게 오래 쉰 것이 오랜만이라 좋았다. 서울식물원에 다녀왔다. 두 번째 방문인데 서울식물원 온실이 너무 좋다. 아내 부모님을 만났다. 오랜만에 딸을 만나서 기분이 좋으신 거 같았다. 이 만남이 나와 장인어른의 통화로부터 시작됐다. 아내는 부모님 만나는 것에 대해서 약간의 불평을 했지만 네 사람 다 기분이 좋았으니 잘한 일이다.
서울에 이틀있는 동안 코로나 긴급문자가 많이 왔다. 확진자가 많은 지역에 살면 긴급문자 스트레스도 상당하겠단 생각을 했다. 코로나랑 기후이탈로 전세계의 우울이 짙다.
어제는 어렸을때부터 모아둔 카세트 테잎을 엘피바-바이닐 펍-에 기증했다. 사장님이 받아주셔서 다행이다. 인간은 컬렉팅의 동물이고 카세트 테잎은 내가 최초로 모으기 시작한 물건이다. 돈이 없어서 씨디가 아니라 테잎을 모았고 내 주변에는 씨디로 음악듣는 애들이 없었다. 친구들 부모님 직업도 사字 들어가는 건 하나도 없고 다 그냥 노동자다. 지금은 모바일 게임 아이템이나 모으지만 어렸을 때는 영화를 좋아해서 신문에 나온 개봉영화 포스터를 곱게 잘라서 화집 사이사이에 넣어두기도 했다. 영화 한 편을 백 만명이 보려면 몇 달씩 걸리던 시절의 얘기다. 옛날이 좋았단 얘기를 하려던 건 아닌데 지금의 풍요로움으로 세상이 곧 끝날거라고 생각하면 진짜로 옛날이 좋았다. 나는 역대 최고의 풍요를 다 누려 보았으니 세상이 끝나도 미련은 없다. - 엊그제 장인어른이랑 베이징 덕 먹었다. -
운동을 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집 앞에 옥천동 체육공원을 걷기 시작한지 두 달이다. 비가 안오거나 술을 먹는날이 아니면 매일 걷는다. 체육공원은 긴 티원형 모양으로 흙트랙과 보도블록 트랙이 있고 트랙 안쪽에는 잔디밭이 트랙 바깥쪽에는 몇 가지 운동 기구가 있는 형태다. 걷는 사람들이 많고 어쩌다 그렇게 됐는지 모르지만 99퍼센트가 시계 반대방향으로 걷는다. 가끔 시계 방향으로 걷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은 걸으면서 반대편 사람들을 마주치고 그들의 얼굴이 보고 싶어서, 너무 외로워서 그런거라고 생각한다.
운동 생각이 든 것처럼 술도 일차만 먹어야지 생각했다. 해야겠다 생각했으니 앞으론 그렇게 될 거다. 담배도 끊어야겠단 생각이 들면 좋을텐데, 아직이다.
일기 안 쓴지가 오래되서 뭐 하나 써야지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까 블로그에 글을 모으고 있구나. 인간은 컬렉팅의 동물이고 나는 돈 안드는 컬렉팅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