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오길래
오랜만에 집에 다녀왔다.
아침 10시 안돼서 집에 도착했다.
아내랑 아내 회사까지 같이 걸었다.
봉봉 오픈 시간 전에 1등 손님으로 가서 커피를 두 잔 먹었다. 르완다도 맛있었지만 구지케차가 더 맛있었다. 봉봉은 기본으로 커피를 두 잔은 준다. 아 좋은 것. 동백씨 땡큐.
커피 먹고 집에 갔다가 아내 점심 시간에 맞춰서 다시 아내 회사에 갔다. 같이 밥을 먹고 집에 가서 한 숨 잤다.
오후 5시, 약간 피로했지만 다시 아내 회사로 갔다. 집을 나서자 마자 참새 한 마리가 입에 뭔가를 물고 나는 것을 봤다. 열 발자국을 채 못걸었는데, 멧새 한 마리가 입에 나뭇가지를 물고 날아갔다.
흐린날 오후에 길쭉한 걸 물고 날아가는 새 두 마리를 본 것이 마음에 남았다.
따끈한 국밥 종류가 먹고 싶어서 저녁으로 설렁탕을 먹었다. 보통으로 두 개 먹을랬는데, 사장님이 특 하나 보통 하나요? 물었을 때 그냥 그렇다고 했다. 아내랑 같이 웃었다. 거절을 못하는 유형의 두 사람이 부부로 산다. 
저녁을 먹고는 아내랑 또 걸었다. 아내의 약속 장소까지 같이 갔다가 혼자 집으로 돌아왔다. 창문 너머 나눈 마지막 인사에서 사랑을 느끼고 정선으로 차를 달렸다. 잘 도착했다고 나눈 카톡 글에서 또 한 번 사랑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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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화가 있는 사람이다. 짜증도 잘 내고 쉽게 토라지고 욕도 잘한다. 화가 난다는 건 좁게는 주변일이, 넓게는 세상일이 내 맘 같지 않다는 것이다. 내 맘 같지 않은 걸 해결하려면 마음을 바꿔 먹으면 된다. 근데 마음이 마음대로 되면 마음이겠나. 마음을 바꾼다는 건 자존심도 상하고 세상에 지는 기분도 느끼게 한다.

아저씨 한 명한테 해고통지서를 보냈다. 산불 감시 근무를 서다가 초소 옆에 자작나무 물 빼먹는다고 구멍을 뚫었다. 경고장만 주고 해고는 하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윗선에서 해고를 원했고 법을 엄격하게 적용하면 임산물 불법 채취로 사법처리 할 수 있다. 사법처리도 그렇고 과태료 딱지를 떼는 것도 과한 거 같다고 윗선을 설득해서 근무지이탈 및 쓰레기 투기로 단순 해고로 결제 받았다.

근데 어제 이 아저씨가 화가 나서 전화했다. 자기는 쓰레기 투기한 적도 근무지 아탈한 적도 없으니 곧이곧대로 하고 싶다는 것이다. 가만히 얘기 들어주다가 화가 나서 알았으니까 사법 조사 받을 준비하라고 했다. 나를 쉽게 생각하나, 생각하니 화가 났다.

오늘 생각하니 이 아저씨도 일이 자기 뜻대로 안됐다. 나무 구멍 뚫은 일을 들켰고 본인 생각엔 별거 아닌일로 해고 당했다. 마음은 이해하지만 나한테 화를 내고 못되게 굴면 안된다.

내 돈 떼어 먹은 먼저 집 주인 할머니도 그렇고 세상을 오래 산 사람들이 왜 그러나 싶다. 세상을 오래 살아서 그럴수도 있다.

내가 좋아하고 나를 좋아하는 사람들 생각만 하면서 화 적게 내고 살아야지.

월요일에 오래된 - 또는 오래전 - 친구를 만났다. 취해서 작은 아이 이름을 자꾸 물었다. 아침에 해장국 먹다가 작은 아이 이름을 한 번 더 물었더니 친구가 네 번째 묻는거라고 하면서 다시 한 번 알려줬다. 정효. 그래서 그 이름을 잊지 않게 됐다.

오랜만에 강릉에 왔다. 봉봉에 오면 뭐라도 쓰고 싶다. 

씨팔, 그래 다 내 불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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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6월 15일부터 정선에서 일하고 있다. 벌써 2월 말이니 올해가 다 갔다는 내 식대로 계산하면 3년이다. 서당개도 풍월을 읊는다는 3이라는 숫자가 무겁다. 가끔 동료들에게 출근길에 산을 보면서 욕 한다는 농담을 하는데, 진짜 욕하면서 출근하는 날도 있다. 정선읍은 '나무위키'의 설명처럼 험준한 산들이 사람을 옥죄는 형국이다. 

답답하다

얼마전에 통기타 동아리에 가입했다. 모임에 두 번 갔다. 한 명 빼면 딱히 잘 치는 사람이 없는데, 모임에 가입한 것 만으로도 내 연습에는 속도가 붙는다. 2년만에 기타줄을 갈았고 어제도 혼자 연습실에 가서 한참 놀았다. 공연을 자주 한다고 하는데 - 벌써 3월 말에 공연 하나 잡힘 - 그 동안은 내가 기타를 쳐도 들어줄 사람이 없어서 연습에 흥이 없없던가, 싶다. 내일도 연습날인데 기대가 된다. 오늘 점심밥 먹으면서도 시큰한 말투로 인간이 멸망해야 된다는 소리를 했던 내가 기타 동아리에 가입한 것 만으로도 어떤 흥분을 느낀다는 게 웃긴다.

회사는 인사폭풍이 지나고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내가 무난히 결재 올리면 무난히 결재가 난다. 원래 둘이 할 일을 혼자하게 되서 심적 타격이 있었는데 - 어차피 작년에 혼자함. - 무사히 적응했다. 사람 한둘 바뀐 게 영향이 크다.

후지이 다케시의 칼럼집을 읽었는데, 페친들 공유로 읽었던 것도 있지만 다시 보니 새로웠다. 공무원 세계에 있다보니 공무원의 무사안일과 주어진 작은 책임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마음. 가치 판단을 하지 않는 것을 미덕으로 삼고 법대로 한다는 것을 중시하기 때문에 법대로 진행된 식민지배와 군부독재가 가능했다는 내용이 마음에 와 닿았다.

법대로 진행했는데 민원인이 만족하는 것이 현재 직장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베스트라고 생각하는데, 법이란 게 기본으로는 금지하는 것이기 때문에 양쪽이 같이 가는 일이 쉽지는 않다. 

3월 2일에 이사한다. 이것저것 준비할 게 많다. 2015년에 강릉 올 때보다 재산이 불어났기 때문일까? 빚 없으면 부자인 세상이다. 국가도 기업도 다 빚으로 돌아가는데,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을 때가 있다. 

결국은 인류 멸망론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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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불전문예방진화대 시험에서 탈락하신 선생님한테 아침8시에 전화가 왔다. 떨어져서 속이 상했는데 나랑 통화하면서 진정이 됐고 고맙다고 하셨다. 속상한 일로 나한테 전화주셨고 고맙단 말까지 들으니 내가 더 고맙다.

 연휴 중에 우리회사에 잠깐 있다가 지방직 공무원으로 간 친구한테 전화가 왔다. 만취한 그 친구가 정선에 있을 때 신경 써 주고 잘해줘서 고맙다고 했다. 특별히 그 친구에게 더 신경 써 준 건 아닌데 그렇게 생각해 주니 고맙다.

 작년 어느날 메모장에 '술 취해서 내게 전화하는 친구가 있어서 좋다.'고 적었다. 정말 그렇다고 생각한다.

 이사갈 집을 보려고 연가 쓰고 강릉에 왔다. 오던 중에 영일군과 통화를 했다. 몇 가지 이야기가 오가고 전화 끊을 때 즈음 목소리 들으니 좋다고 했더니 영일군이 웃었다. 

이런 사소한 일들이 나를 기분 좋게 한다 

 어제 점심을 먹는데, 심석희 뉴스가 나왔다. 내 맞은편에 앉아서 뉴스를 보던 나이 많은 회사 사람이 시집은 다 갔다. 시집 가겠나? 라는 쓰레기 멘트를 날렸다. 찰나의 시간 동안 마음을 진정시키고 시대가 바뀌어서 결혼도 할거고 지금 현재 애인이 있을 수도 있다고 했다. 아무 리액션도 돌아오지 않았다. 화내지 않고 잘 처신했다고 생각한다. 

 강릉에는 심속희 응원 현수막이 많이 붙었는데, 석희 아빠 친구들이 만들어 붙인 것도 있다. 그 아저씨들 중에서는 선거 때마다 자유한국당을 찍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정선 알파인 경기장 곤돌라를 살리라고 데모하는 사람들 중에 자동차에 세월호 스티커를 붙인 아저씨가 있는 것과 비슷하다.

 학연, 지연, 혈연. 혈연은 약간 다를 수도 있는데 연이란 게 다 이해관계다. 삶이란 게 다 이해관계다.

 회사에 인사폭풍이 지나고 많은 연들이 바뀌고 있다. 삶이란 그런것이니까 또 맞춰 살아지겠지. 어떤 인연들은 내 의지와는 상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이사갈 집 알아보러 가기전에 봉봉에 첫 번째 손님으로 와서 적는다. 1등이 다 좋은 건 아닌데, 봉봉에 1등으로 온 건 기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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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담배를 한 갑 사는 바람에 후회로 시작된 하루
말미에 아내랑 같이 영화  '가버나움'을 봤다.
영화가 끝나고도 머릿속에 씨팔이 멈추질 않는다.
이사는 개코나 아무데나 대충 구해서 가야겠다. 씨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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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21 - 마흔

그때그때 2019. 1. 21. 00:00
 오늘로 아내 나이가 마흔이다. 나는 네 달 전에 마흔이 됐다. 열 살 때 스무 살 때는 생각도 못했던 나이다. 40이라니 게임 레벨도 아니고 어중띠고 불안한 숫자다. 불혹이란 건 아는척 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써내는 신문 칼럼같은 데서나 나오는 얘긴줄 알았다. 불행의 반댓말은 아니지만 다행히 신문의 시대는 끝났고 칼럼을 읽을 일도 많지 않다. 

 낮에 미역국 끓여서 같이 먹고 정선 와서 일요일 출근했다. 아내에게 해줄 수 있는 최소한. 당신 생일에 의무적으로 끓이지 않는 미역국이야 말로 사랑의 정수가 아닐까? 생일의 미역국은 세상이 정한 것이지만 나도 너도 세상의 사람이니까. 미역국에 둥둥 뜬 누런 고깃 기름이 보기에 좋았다. 아니, 그에 앞서 양수 냄비에 고기를 볶을 때 고기가 익으며 핏기가 사라지는 걸 보는 게 좋았다.

 어제는 아내가 홈플러스 옷 파는데서 폴라를 하나 샀다. 오늘은 국거리 산다고 간 하나로마트에서 이것저것 샀고(딸기도 한 팩 삼) 찬거리를 산 후에는 순대도 사 먹었다. 

 세상에 너무도 많은 물건들을 견디기 어렵다. 물건들 물건들 물건들. 조개잡이 참으로 샤니빵을 가지고 갔을지언정 섬에 살 때는 물건들과 소비하는 나 때문에 지금같은 죄책감은 없었다. 차라리 그때가 나았을까? 누가 우릴 쫓아내지만 않는다면 나랑 아내만 아는 곳에서 그저 우리 먹을 것만 농사지으며 살고 싶다.

 이사갈 때가 돼서 이런 생각이 강해졌겠지. 

 지금 마흔 살이면 평생의 반을 20세기에 살고 그 나머지는 21세기에 살았다. 어중띠게. 차라리 지금보다는 물건이 적었던 20세기가 좋은 시절이었단 생각이다. - 요즘은 석유 때문에 다 망했다는 생각을 한다. 근데 그게 아니었으면 난 이 세상에 없는 사람. 그게 죽음 다음 가는 인간의 딜레마가 아닐까. - 이승만 때가 인생의 전성기였다고 하는 해방전에 출생한 아저씨들의 좋은 시절과는 다르다. 나는 20세기 마지막 대통령이 김대중이었는지 노무현이었는지도 헷갈린다. 

 아내의 마흔번 째 생일에 나는 사랑과 별개로 무력감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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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17 - 일기

그때그때 2018. 12. 17. 09:16
 부정 분노 협상 절망 수용

 불치병 환자들의 감정 5단계다. 며칠전에 정선에 다녀간 소방관 친구가 알려줬다.
 요즘 씨팔을 입에 달고 산다. 마치 태어났을 때부터 내 모든 말에 씨팔이 붙어있었던 것 같다. ​메모장에 뭐 메모할 때도 씨팔을 붙인다. - 씨팔, 외국인 고용보험 해지 어떻게 하나, 4대보험 다 전화해 볼 것, 씨팔 - 이런 식이다. 
 친구는 내가 현재 분노 단계라고 했다. 협상의 단계로 넘어가면 씨팔소리는 더 안할 것 같아서 친구에게 협상 단계로 넘어가겠다고 했다. 절망을 지나 수용 단계로 간 사람들은 아마 자기(넋)을 잃고 있는 것이겠지. 차라리 분노가 낫다는 생각이 든다.
 원인이 복합적이다. 그 중에 하나가 정선이란 곳이 싫어졌다. 아니 정선읍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산이 꼴도 뵈기 싫다. 
 매일 집에 가서 아내 손 붙잡고 자고 싶다. 같이 누워도 항상 내가 휙 하고 먼저 잠들기 때문에 불편한 걸 참고 있던 아내는 내기 잠들고 나서야 손을 풀고 잔다. 그 마음이 너무 고맙다.
 샤이닝의 잭 니콜슨이 그 저택에서 광기에 휩싸인 것과 정선읍의 첩첩산산에 둘러쌓인 내가 분노 단계에 오래 머물고 있는 것이 비슷하다는 생각이다.
 팀장이 바뀌거나 동료가 떠나는 일이 있을때마다 심적으로 크게 흔들린다. 나도 내가 이렇게 사람을 많이 타는 줄 몰랐다. 시작을 같이했던 동료들은 다 정선을 떠났다. 이제 내 차례다.​
 요새 툭하면 운다. 어제는 남의 결혼식에서 축사 듣다가 울았다. 그 와중에 아내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마지막에는 아내 앞에서 울겠지. 씨팔 

 연말에 진짜 좀 쉬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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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22 - 꿈

그때그때 2018. 11. 22. 14:55
이런 꿈을 꾸었다.

어딘가를 걷고 있었다.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 둘이서 환한 대낮 숨을 곳도 없는 대로에서 숨어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둘다 여자였다. 그들을 지나쳐 조금 걸었는데, 흰털 군데군데 떼가 묻은 강아지가 10미터 앞에서 나를 보고 다가왔다. 꼬리를 흔들진 않았다. 앉아서 강아지를 쓰다듬어 주니 꼬리를 흔들며 좋아했다. 나랑 같이 우리집에 갈래? 강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할아버지 한 명이 나타나서 이 강아지는 자기네 강아지인데 집에서 할멈이 애타게 기다리고 있으니 나보고 집에 좀 데려다주라고 했다. 알았다고 하고 강아지랑 같이 버스를 탔다. 뒷자리에 나란히 앉아서 가다가 곧 헤어질 거란 생각에 마음이 섭섭해서 내가 덥고 자는 얇은 이불을 강아지에게 줬다. 강아지가 슬픈 눈빛으로 좋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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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19 - 흙빛

그때그때 2018. 11. 19. 12:46
도시농업관리사 과정을 마쳤다.

도시농업 관리사가 됐다. 어제 마지막 날 개인과제 발표할 때 농담처럼 얘기했는데, '산림청일 재미 없어서 어느 중학교에 가서 텃밭 교사 하고 싶다.'는 말 진짜다. 장모님이 소작농 운운하면서 아내 앞에서 울었다는 얘기 때문에 장모님 얼굴이 떠올라서 사표 못 쓴다는 얘기는 20% 정도 진짜다. 나머지는 나 때문이다. 아내에게 사표 안 쓸테니 너는 마음대로 살아라.라고 한 것은 진짜다. 농업에 종사하면 좋겠지만 기반도 없고 그에 앞서 자신이 없다. 

청년창업농 막차를 탄 부부가 토요일에 집에 다녀갔다. 아이가 둘. 부딪치는 농업 현실. 지역 살이의 외로움. 갈라지는 생각들. 아이가 없고 맞벌이에 아이도 빚도 없는 나도 자신이 없는데, 많이 힘들거라 생각한다. 나는 응원하는 수 밖에 없다. 근데 힘껏 응원하질 못하겠다. 

이런 내 마음 상태에서 나오는 표정과 말투를 집주인 누나는 흙빛이라 했다. 한 동안 농업을 잊고 살다가 도시농업 교육 받으면서 농업에 대해서 오랜만에 생각한 게 귀농실패자의 - 애초에도 섬에 정착할 마음은 없었지만 - 흙빛을 가속화했다.

아내가 교육 끝난 기념으로 매운탕 먹고 싶다고 해서 먹었다. 맛은 둘째치고 좋았다. 먹고 싶은 걸 사 먹는다. 필요한 게 있으면 산다. 돈 주고 뭘 하는 걸 좀 더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 좋겠는데, 항상 마음 한켠에 불편함이 있다.

끝맺지 못힌 일기가 됐다. 이렇게 억지로 끝맺는 일이 흙빛의 나처럼 웃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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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해서 꾸는 꿈 중에 하나다. 

꿈 속에서 나는 항상 거기에 있다. 일자로 뻗은 흙길. 길을 따라가면 왼쪽에 식당이 있다는 것을 안다. 식당의 메인 메뉴는 모르지만 맛있다고 알려져 있거나 내 단골집이다. 나는 식당에 들어가지 않는다. 식당의 오래된 외벽을 훑어본다. 지금은 영업중으로 보이지 않는다. 식당을 지나 20미터쯤 가면 교차로가 나온다. 나는 항상 좌회전을 해서 계속 걷는다. 되돌아 가거나 멈추어 서는 것까지 5개의 선택지 중에 하나. 흙길이 계속되고 바닥은 나아갈수록 말캉말캉하다. 조금 더 걷다보면 눈 앞에 강이 흐르고 강을 건너는 다리가 있다. 나무와 밧줄을 엮어 만든 다리는 폭은 넓지만 튼튼해 보이지는 않는다. 강 건너에는 숲이 보이는데, 나무와 흙이 세상에 없을 것 같은 빛깔로 살아 숨 쉬고 있다. 꿈속에서만 볼 수 있는 색과 패턴. 막상 다리를 건너기면 그곳은 아무것도 없는 죽은 세계다. 다리 앞에서 본 기묘한 광경은 나를 유혹하기 위한 것이었다. 흙길 위에서 시작하는 같은 꿈을 몇 번씩 꾸는 나는 그 사실을 안다. 알고도 나는 다리를 건넌다. 고민도 하지 않는다. 꿈 속에서의 여정 길에 아는 사람들을 만나기도 하고 낯선이들의 무리가 내게 식당으로 가는 길을 묻기도 한다. 다리를 건너는 과정엔 차이가 있지만 결국 나는 아무것도 남지 않은 세상에, 말랑말랑한 땅 위에 빠지지도 않고 그저 우뚝 서 있다.

엊그제 오랜만에 이런꿈을 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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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적는 일기

일단 시작해본다. 뭐라도 적어야 할 것 같은 날이 있다. 술을 안마셨을 때도. 어지간히 술을 마시면 꼭 뭐라도 적어야 잠들 수 있을 것 같은 충동에 이것저것 적는다. 오늘은 그런날은 아니다. 

요새는 페북을 잘 안본다. 소식이 뒤쳐지지만 그 소식이 내 삶의 바로 정면에 발끝앞에 있는 것은 아니다. 강릉시립미술관이 문 닫을거란 소식을 오랜만에 들어간 페북에서 봤다. 열 받는다. 페북을 잘 안 보니까 이런 종류의 뉴스에 열 받은 게 오랜만이다.

주말에 아내랑 잘 놀았다. 아내랑은 사랑뿐이다. 그냥 같은 공간에 있는 일이 좋다. 그 순간들이 순간들이 모인 시간들이, 일요일에 혼자 세 평짜리 내 방에서 그 시간들을 생각하는 시간까지도 좋다. 영화 '필름스타 인 리버풀'을 함께 보고 장난반 진담반으로 우리의 다름을 얘기한 것도 좋았다. 사랑이란 게 무조건 같은 것에 공감해야 하는 건 아니다.

지난주에 직장 동료 중에 누군가가 다 과정인거라는 얘기를 했는데. 그게 내 머리를 쳤다. 팀장은 팀장이 되가는 과정, - 내 머리는 아직도 한 달 전 사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 나는 사건을 극복하는 과정에 있다.

날이 차가워지니까 라디오에 '내 입술 따뜻한 커피처럼' 리퀘스트가 많다. 그 가사랑 같다고 생각하니까 안심이 됐다. - 삶의 반칙선 위에 점일 뿐이야. 살아가면서 누구나 겪는 일이야. 어른이 되는 단지 과정일 뿐야. - 다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많은 것을 두루뭉실 넘어가야 하는 시기란 생각이 든다.

내일부터 많이 바쁜데, 조비심 내지말고 적당히 해야겠다.

뭐라도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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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가볍게 한 잔 마셨다. 은철이 삼촌 생각이 났다.

엄마 바로 아래 쌍둥이 남동생이 있다. 은석이 은철이다. 두 삼촌들이 각자 더 좋아하는 누나가 있었을 것이다.(누나만 넷) 석이 삼촌은 둘째 이모를 철이 삼촌은 우리 엄마를 좋아했던 것 같다.

쌍둥이는 아버지의 폭정을 피해 고등학교 때 함께 가출을 했다. 석이 삼촌은 우리 이버지를 따라 철공소 쪽으로 갔고 철이 삼촌은 가출해서 배운 기술을 따라 목공 쪽으로 갔다.

석이 삼촌은 결혼을 해서 두 딸을 가졌고 철이 삼촌은 큰 이모의 반대로 결정적인 결혼 기회가 부서지면서 술 테크를 탔다.

석이 삼촌은 고독사(자살)를 했고 철이 삼촌은 몇 번의 재활을 거쳐서 지금도 살아 계신다.

철이 삼촌은 80년 후반 90초반에 우리집에서 몇 년을 같이 살았고 마지막으로 경영했던 목공소도 우리 동네에 있었다.

 목공소에 뻰찌라는 검은 개를 키웠다. 삼촌은 항상 오토바이를 타고 다녔는데. 뻰찌는 삼촌 오토바에 소리를 귀신같이 잘 알아들었고 초코파이를 좋아했다. 그걸 한 입에 먹는 큰 개였다.(삽살개 종류였던 듯) 목공소에 놀러기면 철이 삼촌이 하드를 사주곤 했다. 누가바에 소주 먹으면 좋은 걸 이때 배웠다. 내가 중2땐가 중3때였던 것 같은데 책장이 하나 갖고 싶어서 삼촌한테 책장 하나 컴팩트 한 걸로 짜달라고 했는데, 당돌한 조카가 예뻤는지 튼튼하게 만들어 주셨다. 그 책장에 석이 삼촌이 책 좋아하는 큰 조카 고등학교 갔다고 사준 난쏘공이 꼽혔다. 그 책장은 이사를 거듭하면서 사라졌다. 버려지고 불태워졌을 것이다.

쌍둥이 심촌들이 나를 창경원에 데려 간 적 있다. 그때 사진이 있는데, 내 표정도 좋고 삼촌들 표정도 참 좋다. 그때 기억도 있는데. 호랑이란 게 정말 집채 만하다고 생각했다. - 세 살 짜리가 호랑이를 봤으니 당연히 그렇게 느꼈을 것이다. -

석이 삼촌은 이제 보고 싶어도 볼 수 없지만 갑자기 철이 삼촌이 많이 보고 싶다. 명절이 가까워서 그렇던가 나이를 먹어서 그런가 보다.

엄마한테 연락처 받아서 철이 삼촌 연락 한 번 해 봐야겠다.

삼촌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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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인생

가을밤 가로등 옆 은행나무 아래서
소주 안주로 사탕을 빨았다

이런 걸 지난주 목요일에 술 한 잔 먹고 적었다. 무슨 맛인지도 모르고 먹는 달기만 한 사탕. 인생은 썼다 달았다 한 것. 쓰다고 나쁜 것도 달다고 좋은 것도 아닌 것. 그래도 내 편이 한 명 있다면 살아볼만 한 것.

지난주에 사고 쳤다. 꾹꾹 눌렀던 스트레스가 한 번에 터졌다. 터진 일은 어쩔 수 없다. 나는 왜 집에서도 일 생각만 했나, 반성했다. 훨씬 가볍게 진행할 수도 있었는데. 회사에서 나는 그저 회사원인데. 나는 아무것도 아닌데.

힘든 와중에 아내가 유일한 위안이었다. 이제는 같이 40대다. 사고만 없다면 함께 늙어가는 모습을 볼 사람. 내 사람. 잠깐 포옹했던 시간이 그대로 멈추길 바랐다.

이대로 시간이 멈춘다는 것에 대해서 자주 생각한다. 내 인생이 가장 만족스러운 바로 그 순간에, 잠든 내 손이 잠든 너의 손에 닿아있는 그 순간에 시간이 멈춘다면.....

나이와 경험을 뒤로하고 모든 것을 다 산 것이 아닐까?

내가 애쓰는 만큼 남들도 애쓴다. 경중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내 옆은 아니지만 멀지 않은 곳에 당신이 있다.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시간을 멈춰도 좋을 당신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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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났다는 생각

덥다. 다 끝났다는 생각이 머릿속 가장 꼭대기에서 빙글빙글 돈다. 80억 인구가 석유시대 이전으로 돌아갈 리도 돌아갈 수도 없다.
최저임금과 자영업자 뉴스가 계속 쏟아진다. 영세 자영업자들에게 일자리를 만들어 줄 방법은 없다. 젊은이들 일자리는 말할 것도 없다. 한반도 남쪽의 5000만 인구가 다들 적당한 일을 하면서 즐겁게 살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난민 기사에 진짜 악의를 가지고 댓글을 다는 사람들을 어떤 일들에 대해서 근거나 확인도 없이 맹신하는 사람들을 설득할 방법이 없다.
체제의 문제가 아니다. 개개인의 문제도 아니다. 그저 이렇게 되버린 것이다.
내일 출근을 위해 강릉에서 정선 오다가 작은 산불을 발견했다. 반바지 입고 산에 올라가서 현장 확인하고 내려오니 많이 더웠다. 차를 몰고 가장 가까운 편의점에 가서 컵얼음과 콜라를 샀다. 이렇게 또 플라스틱 쓰레기가 생겼다. 정선에 오기 위해서 자동차를 탔다.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에서 5000만 명이 대략 이렇게 살고 있다.
'작은것이 아름답다' 에서 모두가 플라스틱을 먹고 있다.는 글을 읽었다. 맞는 말이다.
석유 문명이 끝날 때까지 누릴 수 있는 최선을 누리고 사는 게 맞을까?
지금의 플라스틱 문명이 더위나 추위로 끝날 것 같다. 몇 십년 후에는 전 인류의 몇 십 퍼센트가 사라질 거린 얘기가 코 앞에 다가온 것 같은 더위다.
덥다. 다 끝났다는 생각이 든다.
끝났다는 생각 끝에 당신이 있다.
함께 있는 우리가 있다.
그게 유일한 낙관이다.
AND

우리는 인류 역사상 가장 돈이 많이 필요한 최고 풍요의 시대를 갱신하며 살고 있다.
물자가 풍족하지 않던 시절에는 많은 돈(수입)이 필요 없었다. 물자는 편리와 같은 말이다.
먼 과거까지 가지 않고 지금과 1980년대만 비교해 보더라도 명확하다. 에어컨, 자동차처럼 덩치가 큰 것 뿐 아니라 먹을 것도 지금만큼 쉽고 다양하지 않았다. 만든 김치를 사서 김치냉장고에 넣는 것과 배추를 사고 양념을 준비해서 김치를 담그고 독에 묻는 것의 차이랄까. 
물질적으로 풍족하지 않으면 단조롭지만 끈기있는 생활을 하게 된다. 아내랑 같이 섬에 살 때는 어느정도 그런 생활이 가능했다. 밥을 사 먹을 곳도 없고 돈도 없으니 해 먹는 수 밖에 없었다. 농업으로 돈이 생기지 않으니 조개를 잡을 수 밖에 없었다.
겨울밤 아내랑 마주보고 앉아서 콩이랑 팥이랑 골라내던 때가 좋았다. 집 앞 텃밭에서 꿈지럭거리면서 뭔가를 하는 아내 옆에 고양이 망고가 찰짝 붙어있던 시절이 지나간 날들 중에 가장 아름다웠다.  
한 번 길들여진 편리에서 의식적으로 불편으로 가는 것이 쉬운일은 아니다. 당장 날이 덥고 집에 에어컨이 있는데 어떻게 안 틀고 버티겠나.
너무 자기 잘났다는 마음이 많이 투영됐다 생각해서 '자발적 가난'이란 말을 별로 안 좋아하는데, 천만금이 있어도 그걸로 뭘 할 수 없는 환경에서 사는 것이 진짜 자발적 가난이라 생각한다.
지금은 도시 직장생활자로 살고 있지만 나중에는 스스로 해결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이 많은 생활로 돌아가고 싶다. 몸을 바지락거리면서 살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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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판

요즘 제일 많이 하는 말이다
엊그제 팀장님이랑 출장 가다가 우리 사무실도 개판이지만 다른데는 더 개판인 곳도 많다고 했더니 경상도 말로 "그럼 우리가 개고?" 하시길래. "예" 했다.
뭐가 개판이냐면 체계가 없다. 체계가 왜 없냐면 원칙이 있는데 안 지킨다. 원칙을 안 지키는 이유는 여러가진데. 남을 우습게 알고 원칙을 깨거나 자기가 무슨 잘못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걸 보면 짜증이 확 밀려든다. 예를 들지는 못하겠고 아무튼 개판이다. 공직사회도 이리 개판이니 원칙이란 것 자체가 없는 다른 분야는 얼마나 더 개판일까. 원칙은 공통의 협의에서 나와야 하는데 한국 사회의 원칙은 보통 위에서 내려주는 것이다. 협의란 말도 웃기긴 하다.

개한테 미안하지만 개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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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 위에 서 있는 꿈

나이는 육십 가까워도 좋다.
그맘 때 즈음 오직 내게만 주어진 밭을 갖고 싶다.
경운기도 트랙터도 들어오지 않는 곳
내 발걸음만 남아 있는 밭에
당신과 함께 먹을 것을 심고 가꿔서
때가 되면 수확을 하고
또 때가 되면 씨를 뿌리는 일상의 반복인 삶
누가 관심 갖지 않아도 그대로인 삶
관심 갖는 누군가가 나를 봤을 때, 그저 땅 위에 있는 나
그런 삶을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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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빵집에 가서 감자 고로케라고 적힌 걸 하나 사 먹었다. 한 입 물었는데, 감자가 안 씹히고 게맛살이 씹혔다. 아무 의미 없는 걸 먹었다는 문장이 머릿속을 관통했다.
 의미 없는 걸 먹는다는 건 뭘까?
 배가 고파서 찬밥에 물 말아서 한 끼를 떼우는 것? 돈 주고 뭘 사 먹었는데 내가 원한 맛이 아닐때? 아무거나 먹자고 해서 아무데나 들어가서 대충 시켜 먹었는데, 맛이 없을 때?
 끼니를 떼우기 위해서 간장에 비벼먹는 밥도 누군가와 함께라면 의미가 있다. 살면서 가장 맛있게 먹은 음식이 연애할 때, 애인이 끓여준 짜장라면인 사람도 있다.
 그렇다면 먹는 것의 의미에 돈이 개입한다. 개인이 생각하는 값어치를 못했을 때, 의미 없는 걸 먹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돈이 의미 있는 것인가? 의미 있는 것이다.  
 나는 감자전을 좋아한다. 감자전 맛은 반죽에 밀가루만 섞지 않으면 거기서 거기다. 다 맛있다. 감자전을 먹고는 의미 없는 걸 먹었다는 생각을 한 번도 안해봤다. 
 어느 가게에 들어가서 근처 다른 가게는 세 장에 만 원인 감자전을 한 장에 만 원 주고 사 먹었다면 화가 날거다. 화가 난다는 것도 의미이므로 돈은 의미가 있다.
 한 청년이 길을 걸으며 싸구려 크림빵이랑 200미리 우유를 급하게 먹고 있다. 그걸 바라보는 나에게 그가 먹는 행위는 어떤 의미로 다가오지만 그 청년은 그저 세상에 화가 난 상태일지도 모른다.
 정말 의미 없는 걸 먹는다는 건 무엇일까? ​
 아무런 희망도 없이 꾸역꾸역 살아가는 삶 속에서 배고픔을 참지 못해서 오직 홀로 뭔가를 먹는 것이 아닐까?
 내가 원했던 맛은 아니었지만 게맛살 고로케도 그렇게 의미없진 않았다.
 나에겐 당신이 있으므로.
 의미 없는 걸 먹었다로 쓰려고 했는데 의미 없이 먹는 것에 대해서 써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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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릉도 다녀왔다.

공항을 만들 계획이 있다고 하고 요즘 텔레비에 자주 나온다고 한다. 앞으로 사람들이 더 많이 찾을 가능성이 높다. 여객선을 타는 항구는 저동항 도동항 사동항 이렇게 세 개인데 도동은 읍내 메인스트리트와 이어지는 오래된 항구이고 저동은 낚시배들이 많이 보이는 항구다. 사동은 새로 조성했고 계속 키워갈 여객 항구다. 대형 개발 광풍은 없었던지 읍내 메인 거리는 차도가 좁았다. 관광객들이 많기 때문인지 주차할 곳이 부족했다. 쉽게 말하면 비좁고 빽빽한 이미지다. 순수한 관광객 입장에서는 자연산 딱지가 붙은 회 먹고 독도 한 번 다녀오고 호박엿 기념품 사고나면 긴 뱃시간과 비싼 물가 등 불편했던 이미지 때문에 별로 다시 오고 싶지 않은 곳이라고 생각한다. 그 때문인지 지금 개발 중인 사동항 근처는 쾌적하고 넒게 조성중이란 느낌을 받았다. 그렇게 되면 여느 바닷가 관광지(제주도나 강릉)처럼 예쁜 펜션과 특정한 식당들이 들어설 것이고 바다가 워낙 깨끗하기 때문에 다시 오고 싶은 곳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관광 개발이란 게 지방선거 공약집처럼 너무 뻔한 스트럭쳐지만 사람들은 그걸 좋아하고 누군가는 체념한다.

성인봉에 다녀왔다. 월요일, 화요일에 산 정상을 찍고 목요일에 또 산 정상을 찍으려니 조금 힘들었다. 그렇지만 예뻤다. 너도밤나무 군락이 삼나무 군락이 우산고로쇠 나무가 예뻤다. 강원도 산에 없는 나무들을 봐서 신선하고 좋았다. 나리분지 근처에 천연기념물 원시림이 있지만(여기도 엄청 예쁨) 상부 쪽 숲속은 참으로 원시림이라고 부를만 했다.

독도는 가지 않았다. 줄 서서 배를 타고 운이 좋으면 줄 서서 잠깐 내렸다가 사진 찍고 줄 서서 돌아온다는 게 마음에 안 들었다. 애국심에 호소하는 마케팅 관광이다. - 독도 가는 배 타는 항구에는 태극기가 많이 나풀거렸다. - 사람들은 그걸 좋아하고 나같은 누군가는 의미 없다고 생각한다.

이름없는 바닷가에 발을 담갔다. 너무 깨끗한 물, 육지랑 멀리 떨어진 물, 태평양에 가까운 물, 기분이 좋았다. 이 기분 좋음이 우리땅을 밟아 보겠다고 독도 가서 기분 좋은 사람들의 마음과 다르지 않다. 좀 우습다.

아무튼 울릉도 다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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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의 기억

맛은 주관적이다.
맛은 기억에서 기억으로 대를 이어 기억된다. 기억은 조금씩 변형된다.

나는 호박 볶음을 좋아한다. 어른들이 세상에서 뭐가 제일 맛있냐고 물으면 우리 엄마가 해준 호박볶음에 밥 비벼 먹는게 제일 맛있다고 했다며 내 기억에 없는 어린날에 대해 얘기할 때 엄마가 보여 주었던 들뜬 표정 때문이다. - 지금도 마찬가지 일 듯 -  
나는 순댓국을 좋아한다. 엄마 뱃속에서부터 많이 먹었고 어린날에 동네 시장 순대국집에서 아버지, 엄마, 동생, 나 이렇게 네 식구가 외식했던 기억이 갈비집에서 외식했던 기억보다 많다.
배추전을 좋아한다. 어느 여름날 물놀이 하던 중 외할머니가 해줬던 배추전에 대한 기억과 내 엄마도 같은 것을 먹었을 거라는 대를 이어 올라가는 어떤 마음 때문이다.
나이 먹고도 가지를 잘 먹지 않는다. 몸에 좋지 않다는 잘못된 정보 때문에 엄마가 가지 반찬을 만든 적이 거의 없다. 외할머니도 가지반찬을 많이 안 만들었을까?

외할머니 생선조림 양념장이 이모들에게 전수됐다. 기억은 변형되기 때문에 아무리 노력해도 이모들이 어렸을 때 먹었던 맛은 나지 않는다.
김치를 사 먹지 않던 시절에 우리 엄마도 김치를 많이 담갔다. 어떤 때는 맛이 있고 어떤 때는 맛이 없었는데, 맛있었던 김치 맛이 몸 안 깊숙히 남아 있다.
우리집은 냉면을 많이 해 먹었다. 작년에 엄마에게 물어보니 북어대가리를 끓여서 육수를 냈다고 한다. 그 냉면 육수의 맛도 내 안 어딘가에는 남아서 냉면을 사 먹을 때마다 들고 일어난다.
이런맛들은 기억으로만 이어진다.

나만 해도 요리를 많이 하지 않는다.
엄마의 북어육수도 외할머니의 양념장도 대가 끊겼다.​
어려서부터 투플소고기를 많이 먹인 친구 아이는 투플소고기가 아니면 질기고 맛 없다고 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이런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부정적인 쪽으로 복잡한 감정이 올라온다.
텔레비 안이 온갖 먹는 것들로 가득찼고 집밥 타령도 유행을 지났다.​
티비속 맛집으로 맛있다를 처음 접한 다음 세대는 어떤 기억으로 맛의 대를 이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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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를 읽었다.

핸드폰 속에 교보 이북 어플로 20권을 다 읽었다. 4대에 걸친 수 많은 등장인물, 읽으며 잠시도 그 흐름을 놓치지 않았다. 어떤 자부심이 있다. 그렇지만 내가 30일 간 읽은 것을 30년 간 쓴 사람이 있다.

30일과 30년... 토지는 대략 40년 간의 이야기다. 수 많은 인간군상들이 몰아치는 삶을 살고 죽는다. 삶이란 살고나면 죽는다. 월선이가 죽었을 때 많이 울었다. 용이도 울고 홍이도 울었다. 얼마 있다가 용이도 죽고 임이네도 죽는다. 그 와중에 홍이는 살아서 대를 이었다. 죽음이란 한 문장 속에 있다. 어느해에는 호열자(콜레라) 때문에 좀 더 살았을 것 같은 사람들이 한 줄 만에 죽는다.

덧 없는 한 줄, 덧 없는 삶.

많은 페이지를 캡쳐 했는데, 나이 50 넘은 서희가 광복 직전에 명희에게 했던 말이 남았다.

"살기로는 모두가 각각이지만 성공한 삶이란 누구에게나 그것은 덧없는 소망일 뿐입니다." 

철의 여인이 있고 그 강철 같은 마음이 약해지고 약해져서 40년 짜리 대서사시가 저물 때 한 얘기다.

박경리 선생 존경한다.

교양으로 읽다가 울었다. 책 읽다가 운 게 오랜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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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은 식목일이고 나는 산림청 직원이라 식목 행사에 다녀왔다. 60여 명이 모여서 높이 2m이상 되는 나무 50그루를 심었다. 마치고 도시락을 먹었다. 모든 행사마다 그러하다.  그럴때마다 느끼는데, 1회용 쓰레기가 너무 많다. 오늘도 수북히 쌓인 플라스틱 쓰레기를 봤다. 마음에 커다란 짐이 포개지는 느낌이다. 지난 가을에 체육대회를 했었는데, 버려지는 음식물과 쓰레기를 보고 절망감을 맛봤다.
 뉴스에선 태평양의 플라스틱 섬, 재활용 쓰레기 대란, 폐지값이 없어서 폐지도 잘 안주워 간다는 얘기가 나온다.
 점심을 먹고는 나무 심기 행사를 한 마을의 길을 돌며 쓰레기를 주웠다. 보기엔 길이 깨끗했는데 40kg짜리 마대가 비닐과 플라스틱으로 금방 가득찼다.​
 혼자 쓰는 내 방 베란다에 둔 자루도 페트병을 비롯한 플라스틱 쓰레기가 금방 부피를 채운다.
 몇해 전까지는 장난으로라도 인류 최고의 발명품이 비닐봉지(어떤 때는 화장지)라고 했었는데, 지금 생각에 인류는 플라스틱과 비닐로 멸망할 것 같다.
 모든 것이 과하다. 이런 생각이란 게 결국은 또 반복이다. 이 세계에서 나는 무엇을 실천하며 살까? 어떻게 살까?
 그냥 다같이 망가져버리자는 기분이 빈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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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다녀왔다.
한 동네 살면서 12년간 같은 학교에 다닌 친구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고등학교 동창들 중에 결혼도 가장 빨리했고 아기도 가장 빨리 낳았고 아버지도 가장 빨리 돌아가셨다. 그 친구 포함해서 오늘 모인 다섯 명이 다 각자 집에서 큰 아이고 내 나이가 마흔 하나니 어찌 생각하면 이른 죽음이다.
상갓집에 가면 어디서 전해 듣기 전까지 죽음의 이유를 묻지 않는다. 그저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도저히 헤어날 수 없을 것 같은 슬픔에 잠겨있다가도 때가 되면 배가 고픈 것처럼 죽음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할 뿐이다.
정선에서 진부역까지 차를 끌고가서 진부역에서 ktx를 탔다. 커다란 건물, 올림픽 마스코트, 아직 끝나지 않은 공사, 텅빈 버스 승강장, 드문드문 보이는 사람들, 열차 도착 시간에 맞춰 도착한 택시 몇 대. 진부역은 과하다. 인간은 과하다. 욕심은 끝이 없다.
토지를 읽고 있다. 진부역을 보고 한 생각을 소설을 읽으면서도 한다. 전형적으로 느껴지는 수 많은 캐릭터의 향연, 인간의 끝 없는 욕망, 인간은 변하지 않는다.
욕심은 현실에 만족하지 못해서 생긴다. 누군가 보기엔 나도 과한사람이다. 살아가는 한 어쩔 수 없다.
죽은 사람은 안식에 잠들지만 남은 사람은 한 동안 안도하지 못한다.
친구가 마음을 잘 추스렀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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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한 잔 먹었다.

오랜만에 생각한다
나는 꽤나 정치적이다.
사람들과 대체로 잘 지내고
그 사람들이 나의 어떤 지점을 인정해준다.
내가 그들에게 그러하듯이.
지난주부터 머릿속에 박혀 있는 생각은
"인간은 인간을 이해할 수 없다."다.
내가 누굴 이해하지?
나는 나를 받아주는 사람이 좋다.
내 아내가 너무 좋다.
세상에 너랑 나랑 둘 뿐이어도 좋다.
오늘도 많은 불찰속에 살았다.
그 생각 끝엔 항상 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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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맘 같지 않은 일에 화내지 않고 사는 게 참 어렵다."

어느날의 메모에 이렇게 적었다.

이 문장은 '꼰대'란 말과 연결된다.

어느 주말에 마트에서 장을 봤다. 한 손에 믹서기 상자를 안고서 부식 몇 가지를 더 구입해서 계산대로 갔다. 상자를 내려 놓고 먼저 계산대를 빠져 나오면서 아내에게 봉투 달라고 얘기하라고 몇 번 얘기했다. 그런데 아내가 봉투를 달라고 하지 않았다. 나는 화를 냈다.

계산하는 분이 봉투 드릴까요? 했으면 봉투 받으려고 했는데, 아무말 없길래 그냥 봉투 없이 계산을 진행했다고 저녁에 아내가 말했다. 그러면서 덧붙이길, 니 마음대로 안된다고 화내고 그러면 그게 바로 꼰대라고 했다.

깊게 반성했다.

내 맘 같지 않은 일은 크게 두 가지인데, 내가 내 맘 같지 않은 것과 남이 내 맘 같지 않은 것이다. 20대에는 내가 내 맘 같지 않아서 스스로 마음 고생을 많이했다. 어떤 계기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 아마도 아내를 만난 게 계기일거라 생각함 - 그건 극복을 했다. 서른 중 후반 지나면서 부터는 남이 내 맘 같지 않은 일에 화가 난다. 가끔 그 화가 터져나올 때가 있다. 

어제 영화 '공동정범'을 봤다. 인생살이는 내 맘 같지 않은 남들과의 연속된 충돌이다. 같은 시간, 같은 공간, 같은 사건에 대한 기억도 사람이 다르면 달라진다. 영화는 그 지점을 잘 파고들었다. 세상의 모든 이야기가 이 충돌에서 시작한다. 영화 '공동정범'이 매우 뛰어난 점은 연출자가 주인공들 스스로가 내가 틀렸을 수도 있다고 인정할 때까지 - 인정할 수 있도록 - 인내했다는 점이라 생각한다.

이 글의 첫 문장과 '꼰대'란 단어를 가슴에 항상 새겨놓고 살아야겠다. 나이 먹고 꼰대 소리 듣는 것 만큼 처량한 게 없다.

그리고 끝까지 용산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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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 제사 다녀왔다.
내가 우리집 장손이다.
상 차리는 제사도 장손이란 개념도 다 한국적이다.
아버지가 장남이라 차례, 제사는 우리집에서 지내는데 그 우리집이 작년부터 엄마집이 됐다. 법적으로 이혼한 전남편의 아버지 제삿상을 내 엄마가 준비한다. 좀 웃긴다.
할아버지 돌아가신 지 25~6년 됐고 내가 기억하는 할아버지의 모습은 장기알 가지고 나한테 야바위 가르쳐 줬던 것 뿐이니 내 동생과 그보다 한참 어린 친척동생들은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아예 없거나 얼굴을 못 보기도 했다.
제사는 대를 이어서 내려가니까 어느 시점에는 고인에 대한 아무런 기억도 없는 사람들이 제사를 지낸다. 후손들 잘 되게 해달라고 또는 습관적으로 그렇게 한다. 대를 잇는 과정에서 자주 못보는 친척들과는 멀어지고 형제간에 그러기도 한다. 나부터도 작년에 할머니 돌아가신 후로는 삼촌들과 점점 멀어지는 걸 느낀다. - 작은 고모 딸내미가 아기 낳은 소식을 어제 작은 엄마로부터 전해들었다. -
대를 잇는 제사는 원시적인 무언가를 갖고 있다. 원시적인 건 본능과도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아버지는 일 때문에 못 왔지만 삼촌들이 참석했고 제사는 무사히 끝났다.

엄마 얼굴 봐서 참 좋았다.
내게 제삿날은 엄마 얼굴 보는 날이다.
일년에 명절 제사 합쳐서 4번씩 엄마를 보게 되니까 엄마가 80까지 산다고 해도 엄마 얼굴 볼 횟수가 80번 밖에 안 남았다. 1년도 365일이나 되는데.....
이 생각을 하니까 깊숙한 곳이 아리다.
어제 본 엄마 얼굴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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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많이 춥다.
출근길에 정선 제2교를 걸어서 건넌다.
조양강이 꽝꽝 얼어서 갈라지고 있다.
얼어붙은 마음은 쉽게 갈라지고 부서진다.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사람이 급성 심근경색으로 죽었다. 2년전에 나랑 같이 면접장 들어깄다 나와서 몇 마디 나누었던 게 생각난다. 나랑은 달리 적극적인 밝음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결국은 꿈을 이루었으나 행복이 길지 않았다. 그 와중에 직장에서 친한 동료 한 명은 2세 소식을 전했다. 생의 덧없음을 어느정도 아는 나이지만 마음이 부대끼는 건 어쩔 수 없다.
어제부터 내일까지 총 다섯 번의 면접 시험을 진행한다. 일자리를 얻으려는 연세 지긋한 분들을 많이 뵙고있다.
눈도 잘 안 보이시고 글씨도 잘 못 쓰시는 분들이 끙끙대면서 필기시험을 보고 새파랗게 어린 면접관들 앞에서 팔굽혀펴기를 한다.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지만 참 못할짓이란 생각이다.
남을 이기고 내가 뽑혀야 한다는 빤히 보이는 말과 행동은 절박함인가 순수함인가 과욕인가? 나도 빤히 보이는 사람이겠지.
대부분의 구직활동에는 계란후라이를 먹다가 덜 녹은 왕소금을 씹는 짠함이 있다.
2주간 집에 못간 사이에 옆집 아기 강아지들은 많이 컸을까? 살아 있는 건 다 제 속도대로 산다.
이런 생각들로 겨울을 건넌다.
곧 봄이다.
아직 시작도 못했는데 올해가 다 끝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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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른쪽 귀 뒤에 뭐가 자꾸 난다. 곪았다가 아물고 곪았다가 아문다. 어떨때는 터지고 터진 자리에서는 피고름이 쏟아지기도 한다. 지난주 목요일에 종양인지 종기인지 아니면 다른 이름인지 모를 그놈이 또 생겼다. 그냥 두면 없어질 줄 알았는데, 자꾸 몸에 열이 나고 얼굴 오른쪽 전체로 통증이 번져와서 병원에 가서 째고 고름을 짜냈다.

 국소마취는 국소적인 쾌감을 동반하나? 주삿바늘인지 뭔지 모르겠는 날카로운 것이 내 뒷목에서 어떤 그림을 그렸고 그 선을 따라 짜릿한 통증을 느꼈다. 

 수술을 마친 의사가 물러가고 간호조무사 누나가 고름을 짜는데, 깜짝 놀란다. 애벌레가 나왔다면서 보여줄까요? 묻길래 산에 가면 애벌레 많이 본다고 했다.

 작년엔 엉덩이에 종기가 나서 같은 병원에서 꽤 오래 치료를 받았다. 몸 안에 곪아 터질 것들을 가득 넣고서 살아가는 날들이다. 몸에 생긴 고름은 째고 또 째면서 살면 그만이지만 생의 고름도 그러할까?

 정말 어딘가 곪아서 죽은 사람들에게 미안한 말이지만 아마도 나는 곪아 죽을 것 같다.

 오랜만에 일기가 곪아 죽는 얘기다. 주말에 아내랑 정말 잘 놀았다. - 소설 읽음, 만화책 봄, 노래 만듬. - 그런데 개운하지가 않다. 이렇게 나이 먹어 곪아 가는걸까? 어른들에게 했다가는 버르장머리 없다는 소리 들으며 귓방망이 후려 쳐맞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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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아무 생각 없이 시작해본다

볼음도에 다녀왔다. 출도 후 거의 삼 년 만이다. 자연은 크게 달라진 게 없는 모습이었다. 안심이 됐다. 갯벌도 논도 아직 그대로었다.

직장 동료 둘과 함께 다녀왔다. 나는 동네에 인사 드리러 간다는 생각이었는데 일행이 있다보니 내 멋대로 진행이 쉽지 않았다. 결국 방문 인사는 한 집도 못했고 잠시 섬 밖에 나가 계신 형들도 많았다. 그래도 몇몇 사람들을 봤고 짧은 인사가 내겐 힘이 됐다.

불행이면서 다행이도 동료 둘 다 조개 잡는 걸 좋아했다.  둘 중 한 명은 나랑은 같이 다니기 어려운 스타일이었다. 어째서 낯선 동네에서 무던하게 있지 않는가? 그러면서 은근히 누군가 자기를 챙겨주기를 바라는가?

자본주의의 최대 폐해가 왜 내가 이만큼 돈을 들였는데 이것뿐이야, 하는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 마음이 정말 싫다. 차라리 돈을 물쓰듯 쓰던지. 가성비란 말만큼 웃기는 말도 없다.

나 왔다고 완이형이 많이 챙겨줬다. 긴 얘기 안하고 짧게 고맙다고 인사드렸다. 좀 더 자주 연락하겠다고 했다. 마음이 전해졌으면 좋겠다. 하지만 이 짧은 문장에 내 마음이 전해질까? 형, 정말 고마워요. 몸 아프지 말고 잘 계세요.

시(詩)는 여러 마음을 자연스럽게 짧은 문장 안에 구겨 넣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아무리를 백 번 반복해봐야
인간은 인간으로 점철된다.

그냥 고향섬이 너무 좋았고 밤에 잠깐 혼자 됐을 때 눈물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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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 창문을 열고 평균 시속 80 킬로미터로 정선에서 강릉으로 달렸다. 교통사고로 사람이 죽기도 하는 일이 자동차란 게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속도를 훨씬 넘어선 물건이라 그런 게 아닌가 생각했다.
자동차 뿐 아니고 다른 것도 마찬가지다. 현대 사회의 빠른 속도에 현기증을 느끼는 사람도 있지만 대체로는 적응하며 산다. 산업혁명 정도를 기점으로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세상이 요구하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는 조건에 놓여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속도를 생각하다가 색깔로 넘어갔다. 랩 가사 쓰듯 생각해보면 둘은 같은 것이다.
사람은 다 본인과 비슷한 색깔을 가진 사람 그러니까 비슷한 속도의 사람에게 호감이 있지 않나? 극단적인 예문을 만들어 봤다. "저 친구랑 나는 술 마시는 속도(스타일, 주량)가 비슷해서 참 좋아." 물론 자기랑 비슷한 무엇을 싫어하는 경우도 있다. 다만 나는 대체적인 경향을 말하고 싶다.
속도는 색깔. 색깔은 스타일이다.
끼리끼리 노는 것은 참 좋은 일이지만 남의 처지는 생각조차 않하는 일들이 많아 속상하다. 사드배치도 여중생 폭행 사건도 다 같은 맥락이다.
여러가지 면에서 나랑 스타일 비슷한 아내가 힘냈으면 좋겠다.
오늘은 금요일 밤이고 나는 술 마시는 스타일 비슷한 친구랑 술 먹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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