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OG ARTICLE 그때그때 | 584 ARTICLE FOUND

  1. 2024.04.16 20240416 - 그냥 써 보는 일기
  2. 2024.03.25 20240325 - 여전한 위기의 중년, 아버지 생각
  3. 2024.03.12 20240312 - 아버지, 엄마, 흐르는 시간, 어깨 통증
  4. 2024.02.24 20240224 - 어깨 통증과 뉴스의 주인공이 된 엄마 생각
  5. 2024.02.13 20240213 - 연초부터 아픈 생각 2
  6. 2024.02.05 20240205 - 어깨 통증, 위기의 중년, 아버지 생각
  7. 2024.01.28 20240128 - 잘 지내고 있는 아버지 생각
  8. 2024.01.19 20240119 - 잘 지내야 될텐데, 아버지 생각
  9. 2024.01.15 20240115 - 요양원과 아버지 생각
  10. 2024.01.08 20240108 - 신년, 나이 먹음, 아버지 생각
  11. 2024.01.03 20240103 - 신년, 아버지 생각
  12. 2023.12.26 20231226 - 크리스마스와 아버지 생각
  13. 2023.12.18 20231218 - 주말에 만나고 온 아버지 생각
  14. 2023.12.12 20231212 - 사흘만에 만난 아버지 생각
  15. 2023.12.09 20231209 - 삼 주 만에 만난 아버지 생각
  16. 2023.11.20 20231120 - 보고 싶다고 하는 아버지 생각
  17. 2023.11.05 20231105 - 두서 없이 적어보는 아버지 생각
  18. 2023.10.30 20231030 - 내가 옆에 있으면 좋겠는 아버지 생각
  19. 2023.10.15 20231015 - 치매가 무르익어가는 아버지 생각
  20. 2023.10.08 20231008 -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아버지 생각
  21. 2023.09.17 20230917 - 추석 벌초 생각 2
  22. 2023.09.11 20230911 - 아버지랑 같이 사는 모습이 그려지지 않는 생각
  23. 2023.09.03 20230903 - 친구 만나고 와서 생각
  24. 2023.08.30 20230830 - 8월이 다 간 아버지 생각과 짜증
  25. 2023.08.27 20230827 - 서울 다녀온 생각
  26. 2023.08.15 20230815 - 광복절에 무기력한 생각
  27. 2023.07.31 20230731- 여름과 에어컨과 아버지 생각
  28. 2023.07.26 20230726 - 멀리서 생각만 해보는 아버지 생각
  29. 2023.07.20 20230720 - 잡생각
  30. 2023.07.12 20230712 - 기간제근로자 생각

아버지가 요양원에 간지 세 달 됐다. 일주일에 한 번씩 꼬박꼬박 아버지 보러 갔다. 요양원은 1층에 사무실이 있고 3층, 4층을 생활관 및 프로그램실로 쓴다. 아버지는 4층에서 생활한다. 지난 일요일엔 1층에 있는 면회공간이 춥다고 4층에서 아버지 만나라길래 아버지의 공간에 처음 가봤다. 아버지가 위에서 만나는 건 처음이라면서 좋아했다. 아버지는 본인 침대가 여기라며 방 들어가자마자 바로 오른쪽에 있는 침대를 가리켰다. 4인 1실인 아버지 방 티비에는 ebs에서 학생들 가르치는 프로그램이 나오고 있었다.

학교 선배가 요양원 처음 차렸을 때 죽음을 너무 자주 접해서 스트레스가 많다고 했었는데, 아버지 있는 요양원도 40여명 어르신들 중에 우리 아버지처럼 몸을 잘 가누는 입소자는 거의 없는 분위기였다. 아버지 만날때마다 '이 양반 심심하구나' 생각이 드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공간 전체에 삶이 꺼져있는 냄새가 흐르고 있었다.

아버지 요양원에 입소해서 큰 스트레스는 덜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버지 만나고 나면 늘 마음이 가라 앉는 이유가 이 죽음의 냄새에 있었나? 생각한다.

세계 인구는 폭증하고 있고 노인 인구도 폭증하고 있고 과인구는 지구에 해가 될 뿐이니 특정 조건에서 본인이 원하면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세상이 올 수도 있겠구나 생각해본다. 아내가 가끔 어떻게 죽지?를 묻기에 이런 생각을 하나보다.

산림 기사 따려고 공부하고 있다. 2015년부터 산에서 일했고 16년에 산림청에 입사했다. 울적한 마음에 자격증 하나 갖고 싶어서 공부 시작했는데, 어렵다. 1차 cbt는 가볍게 붙었는데 2차 필답 준비가 어렵다. 마음가짐의 문제다. 내 삶에 산림기사가 절박하지 않기에 열심히 한다고 하지만 절박하게 외워지지 않는다. 한 번에 합격하고 싶고 산림기사를 따면 산림경영기술자 초급을 바로 받을 수 있으니까 그 마음으로 열심히는 한다. 27일 2차 필답 시험인데 조금 더 전력을 다해보려 한다.

아내랑은 잘 지낸다. 최근에 나랑 살아줘서 고맙단 생각을 많이하게 됐다. 나이 먹어서 그런 것 같은데, 그렇다고 그 마음이 거짓은 아니다.

아는 선생님이 포남동에 7080라이브를 인수했다기에 갔었다. 사장님이 나를 반가워 해주셔서 기분 좋았다. 나중에 주문진에 사는 선장님 한 명이 손님으로 왔는데, 작년에 무슨 축제 노래자랑에서 1등 하셨던 분이라고 했다. 사장님이 나한테 노래 하라고 해서 한 곡 했더니 잘한다고 또 하라고 해서 다섯 곡을 연달아 불렀다. 이 선장님이 내 노래를 듣고 삘 받아서 노래 하시는 중에 가게를 나왔다. 7080 라이브에서 노래 배틀 할 뻔한 인생이라니. 웃음이 나왔다.

조카들보러 구리에 한 번 다녀올까 싶다. 이런 생각 하는게 처음이고 최근이다. 나이 먹어서 그렇다. 동생 아내에겐 미안하지만 엄마가 하지 말라는 거 다 하게 해주는 나쁜 삼촌 노릇 좀 하고 싶다. 애들한테 그렇게 기억되고 싶다.


전반적으로 울적하지만 그래도 살아간다.

AND

 얼마 전에 춘분 지났고 내 생일은 추분무렵이니까 세상에 태어나 45년 6개월을 살았다. 마흔 다섯 살이면 중년인가? 생각해본다. 내 생각엔 40대부터 50대까지 중년이다. 60대가 중년인지는 그 나이가 되면 생각하자.

 어깨 통증은 거의 사라졌다. 정말 다행이다. 완전히 끝난것은 아니고 내 몸 안에 잠재되어 있다. 그 점이 짜증과 두려움을 유발한다. 요즘은 다시 허리가 아프려고 한다. 2년 전에 처음 찾아왔던 허리 통증도 두 달 정도 지나니까 사라졌지만 내 몸 속에서 웅크리고 있을 뿐이었구나. 다리까지는 저리지 않으니 다행이다. 어깨 아픈 이후로 운동을 안했다. 운동을 안 하는 게 좋을지, 적당히 하는게 좋을지, 그 적당히는 얼만큼 인지, 모르겠다.

 심각하게 우울하진 않은데, 계속 침체된 상태다. 출근하기 싫지만 출근을 해야하고 퇴근 후에는 누워서 유튜브로 베토벤 들으면서 만화 본다. 가끔 기타를 손에 잡지만 금방 내려놓게 된다. 이게 위기의 중년이다. - 진짜 위기의 중년들이 웃겠다. - 나아지겠지. 빨리 벗어나고 싶다.   

 아내가 내 옆에 있어서 다행이란 생각을 많이 한다. 독신 중년이야 말로 진짜 위기의 중년이 아닐까?

 두 번 앞의 일요일에 친구를 만났고 지난주 금요일에 다른 친구를 만났다. 친구 만나도 술 마시는 일 뿐이지만 그것도 약간의 위로가 됐다.

 커피랑 담배 중에 하나를 끊고자 하는 생각이 계속 있다.

 

 2주전에는 동생이 아버지 보러 왔다. 아버지 주려고 가족들 사진첩을 가져왔는데, 아버지는 어느 사진에도 집중을 못했다. 아버지는 한 번도 동생 이름을 부르지 못했다. 동생이 약간 충격 받았다. 그렇지만 그 애가 본인 아들인 건 알아봤고 애들이라고 하면서 손주들 얘기를 했다. 엊그제는 아내랑 아버지 보고 왔다. 아버지는 쉴새 없이 이런저런 얘기를 했는데, 핵심은 아내가 보고 싶다, 추석 성묘 행사 때 사람들 보고 싶다, 본인은 잘 지낸다, 이 세 가지다. 아버지 손을 잡고 아버지 얘기를 듣는다. 아버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추론하면서 듣는다. 본인 얘기가 다 끝났다는 생각이 들면 아버지는 이제 그만 가라는 얘기를 한다. 요양원에서 면회 시간은 30~40분 정도가 좋다, 고 했는데 아버지는 그 시간을 귀신같이 안다.

 아버지 제가 갈 수 있는 한 계속 보러 갈테니까 계속 지금처럼 잘 지내세요. 추석 때는 같이 바깥 구경도 하자구요.

 아버지와 나, 아직까지는 서로의 삶에 어떤 원동력이 되는 상태다. 생각해보니까 그건 좋네. 

AND

 아버지가 요양원에 간지 두 달 가까이 됐다. 일요일마다 아버지 만나러 갔는데, 한 번 빼고는 늘 아내가 함께 갔다. 고맙고도 고맙다. 아버지 머릿속에는 마누라 - 평소에 아버지가 잘 안 쓰던 표현인데 치매 이후에 많이 씀 - 한 번 봤으면 좋겠다는 것과 작년과 재작년 추석 성묘 때 일가친척들 많이 모였던 기억, 할아버지 제사 때 손주들 - 아버지는 그냥 애들이라 함 - 봤던 기억이 깊게 남아있다. 아버지는 날 만날때마다 마누라, 애들(손주들), 강릉에 다 모인것(성묘) 얘기를 한다. 삶에 대한 희망이나 열망까지 나가지 않더라도 어떤 기억이 있다는 것이 아무 기억도 없는 것 보다는 낫다,는 게 내 생각이다.

 엄마한테 아버지가 엄마 보고 싶어한다 했더니 버스 타고 당일치기로 강릉 한 번 오겠다고 했다. 요즘 엄마는 홍콩 h지수 연계 ELS 때문에 마음에 큰 데미지를 입었다. 까먹은 돈은 그냥 돈이지만 문제는 심리적 타격을 잘 극복하는 일인데, 그 극복이 주위에서 말해주기는 쉬워도 당사자에게는 무척 어려운 일이다. 그나마 심적 타격이 크겠구나, 생각해주는 사람이 주위에 있는 것만해도 다행이다. 엄마 주위에는 이모들이 있고 내가 있다. 엄마는 요즘 집안일 알바를 가는 날이 아니면 그냥 누워있다. 엄마 힘내요.

 회사 동료 어머님이 곧 돌아가실 지경이 됐다. 지난주에 만난 의사가 네 달을 얘기했다고 한다. 이 형(회사 동료)은 시골 동네에서 유명한 효자다. 이 형이 어제 사무실에 며칠만에 출근해서 처음으로 한 얘기가 본인이 의지할 곳이 엄마랑 아내랑 두 갠데 이제 하나 밖에 없어서 어떡하냐,는 것이었다. 매우 공감했다. 내가 의지하는 것도 아내랑 엄마 두 사람이다. 죽음은 피할 수 없지만 그들이 심적으로 무너지는 일은 막아야 겠구나 생각했다. 

 아버지가 의지할 곳은 나인가 요양보호사 선생님인가 둘 다인가?

 출근길에 라디오 뉴스에서 20회째를 맞는 횡성한우 축제 소식을 들었다. 작년에 횡성한우 축제 한다는 소식 들은 게 얼마 안된 것 같은데, 또 같은 축제를 한다고 한다. 이것이 나이 들면 시간이 빨리 흘러가는 일이다. 지난해에 내 삶에 아무일도 없었기 때문에 시간이 빨리 흘러간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너무 많은 일들이 있었기 때문에 시간이 빨리 흘러간 것도 아니다. 나이 먹을수록 지나간 시간들을 압축하거나 압축해서 잊는 폭이 커지는 느낌이다. 새해가 시작하고 일주일만 지나도 '올해가 다 갔구나' 생각하는데, 올해의 남은 시간들이 큰 폭으로 압축될 것을 알기 때문인 것 같다.

 모든 생명이 시간을 다르게 인식하는 일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어깨 통증은 많이 나았다. 4주 연속으로 주말에 서울 가서 주사 맞았다. 선생님이 2주 후에 예약 잡아 주면서 안 아프면 그만 오라고 했다. 2월 초에 아프기 시작해서 너무 아파서 아무 것도 못한 게 열흘 정도고 현재는 일상 생활은 가능하다. 다만 팔에 약간의 통증이 남아 있다. 2주 후에는 그 약간의 통증도 사라지길 바란다. 나이 먹으면 다 아프기 시작한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는데, 건성으로만 넘겨 듣던 그 말을 실제로 아픈 몸에 새기는 게 나이 먹는 일인가 보다. 

 회사 다니는 일이 정말 지겨워서 정말정말 그만두고 싶은데, 내 나이에 이 지역에 이 정도 돈을 받는 이만한 직장이 없기 때문에 못 그만두고 있다. 회사 동료들이나 친구들과 웃으면서 이런 얘기를 나누면서 나도 세상에 흔한 사람이라는 걸 느낀다. 내가 남들과 같은 생각을 하고 뻔한 얘기를 하는 사람이라는 게 심적 안정감을 줄 때가 있다. 이런 감정이 나이 먹을 수록 더 강하게 다가온다. 어렸을 때는 튀고 싶었는데 말이지.

 건강 문제로 - 수면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 - 담배랑 커피 중에 하나를 끊어볼까 생각한다.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도 나이 들었다는 증거다.

AND

 서울 대림동에 있는 ‘이상철 통증의학과’에 오늘까지 두 번 다녀왔다. 지난주까지는 팔을 잘라내고 싶을 정도로 아팠는데 - 의술이 지금처럼 발전하기 전에는 대상포진 걸리면 너무 아파서 자살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함. - 지금은 아픔이 많이 가셨기에 이렇게 일기도 쓴다. 아버지가 강릉으로 왔기 때문에 당분간 서울 갈 일 없을줄 알았는데, 다음주까지 3주말 연속으로 서울 가게 됐네. 병원이 지하철역에서 멀리 있어서 다니기가 피곤하다. 그래도 아픈것 보다는 낫다. 어깨 통증이라고 생각했던건 실제로는 팔 통증이었고 명절 전에 우연히 만난 아저씨에게 이 병원 얘기 못 들었으면 강릉에서 병원만 계속 옮겨다닐 뻔 했다. 서울로 가기 전에 강릉에서 한의원 두 곳 포함해서 병원 네 군데를 들렀는데, 어느곳에서도 나의 팔 통증을 경감시키지 못했다. 강릉에 있는 의사 선생님들을 무시하는 건 아니고 유명한 병원이 괜히 유명한 건 아니구나, 지방에 사는 어르신들이 많이 아프면 서울에 있는 대학병원부터 찾는 게 괜히 그런건 아니구나, 를 이번에 몸으로 깨달았다. 8시 예약이고 7시 30분에 병원 도착했는데, 내가 네 번째였다. 내 앞에 오신 아주머니는 허리가 너무 아파서 부산에서 비행기를 타고 왔다고 한다.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이 지난주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부산에 실업자가 너무 많고 경기가 안 좋다는 소식을 치료실 칸막이 너머로 들려주신 그 아주머니 쾌차하시길.

 너무 아플때는 아무 생각도 못하다가 조금씩 괜찮아지기 시작하니까 몇 가지 생각을 했다.

 - 건강은 술값보다 중요하다.

 - 감옥 독방이나 보호자 하나 없는 병실에서 본인이 죽을 것을 알고서 시름시름 앓다가 죽는 일을 생각해봤다. 가장 최근에는 러시아에서 푸틴의 정적이라는 나발니란 사람이 그렇게 죽었다. 일정 때 감옥에서 쓸쓸히 죽었을 독립 투사들도 생각해본다. 독립 투사들이야 말로 못 먹고 얻어 맞고 고문당하다가 기력 떨어져서 죽는 괴로움의 결정체다. 진심으로 존경한다.

 - 내 인생에 행복했던 일이 막 떠오르진 않지만 소소한 순간들에 즐거움이 있었고 불행이 생을 휩쓸고 가진 않았다. 어깨 통증도 지나갈 일일 뿐이다.

 - 샤워실에 꼭 있었으면 하고 소망하는 해바라기 샤워기 같이 단순하지만 포기하고 싶지 않은 것에 대한 사소하고 간절한 열망이 오늘을 살아가게 한다. 나의 해바라기 샤워기는 무엇일까?

 - 봄이 온다고 말해주는 아내가 있으니 나는 외롭지 않구나. 너는 나의 신선한 이마다.

 강릉에는 눈이 많이 왔다. 눈 때문에 이틀동안 출근을 못했다. 정확하게는 수요일에는 출근 못하고 목요일에는 일 때문에 억지로 출근했다가 - 차가 눈에 미끄러져서 1시간 30분 걸림 - 급한일만 처리하고 미끄러지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해발 700미터에 있는 우리 사무실은 눈이 1미터 20센티미터 쌓여있다. 팔은 쉬지 않고 아픈데, 눈도 쉬지 않고 내리고 덕분에 강제로 휴가를 쓰게 되니까 많이 우울했다. 그 와중에 수요일 아침에는 눈길을 운전해서 산림기사 1차 시험을 보러갔다. - 합격했다. - 그렇다는 것은 내 마음속에는 내 인생에서 아직 포기하지 않은 무언가가 있다는 뜻이다. 자동차 보험, 아버지 일, 어깨 치료, 출근같이 귀찮은 일들 다 내팽개치고 매일 술이나 마시면서 망가진 중년으로 살고 싶은 마음과 그래도 무너지지 말고 살아야지 하는 마음이 내 안에서 팔 통증과 함께 싸우고 있다.

 오늘 진료 마치고 오산에 엄마한테 들렀다. 엄마는 지난해 연말부터 뉴스에 자주 등장하는 홍콩 h지수 연계 ELS에 노후자금이라 생각한 전재산을 투자했다가 쫄딱 망했다. 뉴스에 나오는 불행이 바로 내 것이거나 내 옆에 있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다. 엄마가 차려준 김치찌개를 맛있게 먹었다. 엄마 앞에서는 맛 없어도 맛있게 먹는게 내 철칙이다. 김치찌개는 맛이 있었다. 미스 트롯 재방송 보면서 엄마랑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대출 받아서 투자한 사람들이나 전세사기 당한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무너지지 말고 너무 우울하지도 말라고 했다. 그게 실제로는 나한테 하는 얘기다. 엄마가 오산터미널까지 태워줬다. 차에서 내려서 손을 흔들면서 ‘안녕 내 사랑’ 두 번 말했다. 들으라고 말했으니까 엄마가 들었을거다. 엄마도 나도 서로를 봐서 힘이 됐다.

 내가 얼마나 아픈지는 나만 알고 나 아픈거 걱정해주는 사람은 아내랑 엄마 뿐이다. 빨리 낫고 싶네.

 요새 글이 잘 안된다. 독서 부족인가?

사무실 근처. 3년째 한 자리를 찍고 있다. 4년짼가?


  

AND

 어깨가 아프다. 지난주 월요일에 정형외과에 들렀다. 엑스레이상 문제가 없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런데 어깨나 너무 아프다. 화요일엔 작년에 허리 아플 때 들렀던 한의원에 갔다. 목 디스크가 급하게 온 것 같다면서 당장 치료가 불가능하니 통증의학과로 가라고 했다. 한의사 선생님의 친구가 하는 통증의학과에 갔다. 스테로이드 주사를 맞았다. 그런데 어깨가 점점 더 아프다. 수요일 목요일에 물리치료 받았다. 집에서 5분 거리에 있는 병원에 가는데, 어깨를 부여잡고 10번 이상 쉬어야 했다. 간호사 선생님들도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아주머니도 신호대기 중이던 택시 기사 선생님도 괜찮은지 안타깝게 물어봤다. 팔을 감싸쥐고 숙인 고개를 들 수가 없어서 병원 간호사 선생님들 얼굴을 오늘에서야 제대로 봤다. 어깨부터 팔뚝까지 끊어질 듯 아프다. 어떤 자세를 취해도 아프다. 명절 내내 아프다가 어제 약간 괜찮아졌지만 진짜 약간 괜찮아졌을 뿐이다. 어깨를 주무르면 괜찮을까 싶어서 세라잼 안마기 체험장에 가서 안마기에 누웠는데 안마기가 주물럭 거릴때마다 너무 아팠다. 오늘 2차 스테로이드 주사를 맞았다. 사무실까지 30분 운전해서 오는 일이 무척 힘들었다. 사무실 동료가 강력한 진통제를 줘서 한 알 먹었다. 지금은 키보드를 두드릴 수 있을 정도는 되는데, 이 호전됨이 진통제 때문인지, 주사 때문인지, 단순히 시간이 흘렀기 때문인지 알 수가 없다. 토요일 아침 여덟시에 서울에 있는 통증의학과 예약했다. 강릉에서 1년간 병원을 다녀도 계속 아프던 어깨가 그 병원에 한 번 다녀오고 다 나았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는 이렇게 아픈데, 왜 아픈지 원인은 알고 싶기 때문이다. 

 명절 지났으니까 이제 정월이다. 양력으로 2월 13일이니까 아직 연초라고 할 수 있다. 연초부터 아픈게 정초까지 아프네. 정초라고 하면 음력이 되고 연초라고 하면 양력이 되는 세계에 살고 있다.

 어제 살짝 덜 아픈김에 요양원 들러서 아버지 보고 왔다. 아버지의 횡설수설은 점점 심해지고 내가 먼저 이름 얘기 안하면 내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 것 같지만 내가 본인 아들인 건 안다. 그리고 1주일 전에 봤을 때보다 요양원 생활에 더 적응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연휴 끝에 근무 중이던 영양사 선생님이 식사 잘 하시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해서 안심이 됐다. 생의 마감만이 존재하는 공간인 노인 요양원에서 일하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 봤다. 

 아버지, 별일 없으면 주말마다 만나러 갈게요.
 
 연휴 내내 나 때문에 신경 써 주고 아버지 만날 때도 같이 가준 아내에게 고맙다. 연휴 동안 둘이 밥 잘 챙겨 먹었다.

 나 아프다니까 엄마가 매일 전화해서 괜찮은지 물어본다. 고맙고 사랑한다. - 며칠 전에 전화 끝에 '안녕, 내 사랑' 이라고 했는데, 엄마가 그 말을 들었는지 모르겠네.

 장모님 장인어른도 딸의 신랑이 아프다고 하니 신경쓰는 전화를 주셨다. 고맙습니다. 사위를 직접적으로 걱정하실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걱정해주시는 정말 고맙습니다.

 여러 사람들의 걱정과 관심으로 산다. 나도 우리 아버지도 세상에 많은 사람들도. 그렇지만 내가 얼마나 아픈지는 나만 안다.

AND

 두서 없이 적어 본다.

 토요일에 아내 운전 연습을 겸해서 봉화에 있는 국립백두대간 수목원에 갔다. 정말 잘 생긴 암컷 호랑이를 봤다. 기분이 좋아졌다. 겨울 나무도 종류별로 많이 봤다. 춘양면에 방 잡고 읍내에 있는 분식집에서 라면 둘, 김밥 한 줄, 김치전 한 장(5,000원)까지 도합 16,000원 어치를 저녁을 먹었다. 너무나 맛있었다. 호랑이를 본 일까지 좋은 일이 연속으로 있었다. 로또는 이번주에도 꽝이었다. 오는길 가는길에 조수석에 앉아서 오른쪽 사이드미러 들여다보느라 많이 피곤했지만 아내의 운전이 많이 늘었다.

 어제 아버지 만나고 왔다. 1시간 가까이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데, 직원분이 면회는 30분 정도만 하면 좋겠다고 했다. 야속하단 마음과 다행이란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아버지는 요양원에서 계속 지내야 한다는 사실에 적응중이다. 명절에 아버지를 데리고 엄마한테 같이 갈지 말지 계속 고민중이었는데, 아버지는 가고 싶은 눈치라 내가 힘들어도 같이 가는 쪽으로 마음이 굳어진다.

 그리고 나는 한 달 째 어깨가 아프다. 어제는 한 잔 하고 술 취해서 잠들었는데도 어깨가 아파서 자다 깼다. 아내가 나를 안타깝게 지켜봐줬다. 사랑이다. 내가 아버지 얼굴 보러 간 걸 포함해서 아픈 사람 지켜봐 주는 게 사랑이다.

 오늘 아침에 폭설 때문에 출근하다가 차를 돌려서 집으로 왔다. 돌아온 김에 병원에 들렀다. 의사 선생님이 엑스레이 상으로는 어깨에 아무 문제가 없다고 한다. 다행이다. 진통제와 근육이완제(+위장약)를 처방 받았다. 서서히 재활 하면 좋아지겠지. 긍정적으로 생각해본다. 사무실에 처리할 일이 있어서 2시에 출근하긴 했는데, 어떻게 돌아갈지 막막하다. 35번 국도 타고 삽당령 정상을 오르는데, 내려오는 제설차 4대를 마주쳤고 미처 눈을 다 치우지 못하고 있었다.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눈을 뚫고 출근을 했나, 후회막심이다. 

 몸이 아프니까 자연스럽게 <위기의 중년> 이 떠올랐다. 자포자기 하듯 어깨 치료도 게을리하고 매일 적당히 지내면서 저녁엔 술 마시고 운동도 안 하다보면 <위기의 중년>이 아니라 만성적으로 우울을 끼고 있는 <체념한 중년> <망가진 중년>이 되겠구나 생각했다. 그렇게 되는 일이 너무도 쉽겠구나 생각했다. 나를 생각해서도 지금 상태로 무너지면 안되겠지만 아내를 생각하면 더욱더 <건강한 중년>이 되려고 노력해야 한다. 최소한 노력하려는 시늉이라도 해야 무너지지 않을 것 같다. 

 어제 오랜만에 친구 만나서 한 잔 했다. 친구는 아버지 가업을 이어서 농업으로 새출발을 하려고 한다. 세상은 홀로 살아가는 곳이지만 기댈 곳이 있고 그 기댈 곳이 가족이라면 기대는 것이 좋다, 는 게 내 평소 생각이다. 친구한테 그 얘기를 해줬다. 친구는 중년은 다 위기라고 했다. 맞는 말이다. 친구가 아버지한테 농사 잘 배워서 돈도 적당히 많이 벌고 나한테 맛있는 것 많이 사주면 좋겠다.

 이 기록을 남기는 동안 계속 어깨가 아프다. 저녁에 약 한 봉지 더 먹어야겠다. 근데 이 폭설속에 오늘 집에 내려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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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엄마가 아버지 보고 갔다. 혼자 살때보다 말끔해진 아버지가 ‘여기가 서울 학교보다 좋다.’ 고 했다고 한다. 엄마는 아버지에게 그 얘기를 듣고 안심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서울 데이케어센터보다 지금 요양원이 더 좋다는 얘기다. 또 아버지 행색이 - 혈색과 차림새 - 좋아서 당연히 펑펑 울 줄 알았던 엄마가 울지도 않았다니 좋은 일이다.

 수요일에 요양원 간호 선생님한테 전화를 받았다. 요양원에서 6일간 관찰한 아버지에 대해서 이런 저런 얘기를 해주면서 <불결행위> 란 말을 꺼내서 그 단어 때문에 충격 받았다. 아내 얘기로는 불결행위가 공식 용어라고 한다. 암튼 그 내용은 오줌을 아무데나 눈다는 것이었다. 이미 혼자 살때도 비슷한 경우가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한동안은 그러지 않았기에 갑작스러운 환경 변화 때문에 그런가, 생각했다. 자는 곳도 바뀌고 전화기도 없어지고 주위 사람들도 익숙하지 않을테니 당연한가, 생각했다. 그리고 걱정하고 걱정하고 걱정했다.

 어제는 엄마랑 작은 아버지 두 명이 아버지 얼굴을 봤다. 나는 그들을 요양원까지 안내만 해주고 아버지에게 얼굴을 보이진 않았다. 오늘은 나랑 아내가 아버지 만나러 갔다. 엄마에게 들은대로 아버지는 괜찮아 보였다. 혈색이 좋았고 옷도 말끔하게 입고 있었고 면도도 깔끔했다. 앞으로는 팬티에 똥을 묻히고 있을 일도 없으리라. 원체 까다롭지 않은 양반이라 요양원 생활에 금방 적응을 한 것 같다. 아버지는 강원도가 좋고 강원도 사람들이 착하다는 얘기를 반복했다. 횡설수설은 숙명이지만 본인이 고향에 와 있다는 걸 아는 것만으로도 치매가 끝까지 가진 않은 것이다. 평범하게 생각하면 아버지는 끝난 사람이 됐지만 요양원에는 요양원에서의 삶이 있다. 그렇게 삶은 계속되고 그 삶은 아버지가 ’그래도 살아야지‘란 말을 자주 한 것과 이어진다.

 오늘 아버지랑 30분 정도 같이 있었다. 앞으로도 시간 날 때마다 아버지 보러 가야겠다. 앞으로도 같이 가주겠다는 아내의 마음이 참 고맙다. 아버지를 만나는 횟수가 만나는 시간보다 중요하단 생각이다. 그렇게 아버지의 계속되는 삶에 내가 있어야겠다. 집에서 요양원까지 걸어서 5분거리다. 직장도 요양원도 가까운 게 좋다.

 걱정했는데 아버지 잘 지내서 정말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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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버지를 요양원으로 보냈다. 아버지는 2020년 여름에 이미 머릿속이 까마귀 고기를 먹은 상태였고 2021년 초에 정식으로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았다. 오늘이 오기까지 엄마랑 나에게 긴 여정이었다.

수요일에 퇴근하고 강릉발 청량리행 기차를 탔다. 목요일에 청량리발 강릉행 기차를 아버지랑 같이 탔다. 힘들단 말이 무슨 소용인가 싶지만 힘들다. 아버지는 기차에서 조금도 눈을 감제 않았고 양평 조금 지나서 도시 이미지가 사라지자마자 강릉 냄새가 나는 것 같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 냄새 타령을 했다. - 만종역 근처에서도 평창역 근처에서도 같은 말을 했다. 아버지 나이 73세, 23년을 고향인 강릉에서 보내고 나머지 50년을 서울에서 살았어도 고향이 좋은건가? 생각했다. 오늘 오전에 아버지 태어난 동네까지 드라이브를 했다. 아버지는 본인이 거기서 태어나서 어린시절을 보냈다는 것도 모른다. 그래도 <강릉> 이라는 단어 한 마디가 주는 포근함을 느끼는 것 같았다. 어린시절을 보낸 곳은 몰랐지만 본인이 다녔던 초등학교는 알아봤다. 아직 치매가 끝까지 가진 않았다.

먼저 서울 왔을 때 미처 정리하지 못한 일들을 했다. 통장 하나랑 신용카드를 없앴다. 아버지 명의의 휴대전화를 해지했다. 요양원에서 휴대전화 사용을 반대하기에 내 이름으로 번호 하나 새로 만들어서 아버지에게 주는 계획은 보류했다. 요양원에 44명의 노인이 있는데, 그들이 다 휴대전화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보니 요양보호사 선생님들 입장에선 끔(깜)찍하긴 하다. 어제 저녁에 작은 고모를 만났고 오늘 점심은 작은 아버지 내외랑 함께 먹었다. 고모도 삼촌도 숙모도 치매였던 할머니의 경험치가 있기에 - 할머니는 요양원에서 거의 10년을 살았다. - 아버지의 치매 상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진 않았다. 좋은 일이다. 아내도 나를 걱정하는 아버지의 멘트 - 일우가 고생이 많다. - 를 옮겨주면서, 정신줄을 완전히 놓치는 않은 것만해도 어디냐고 했다. 아내는 며칠 전에 그 말을 하면서 눈물을 글썽였다.

아버지는 나 결혼하고 우리집에 처음 와봤다. - 엄마도 2012년에 한 번 와 본게 전부고 장인어른과 장모님은 한 번도 딸 집에 못 와봤다. - 아버지는 출가한 큰 아들 집에 처음 온 날 그 집에서 자고 다음날 아들 집 앞에 있는 요양원에 갔다. 뭔가 운명적으로 느껴진다.  

양말을 신으라고 했더니 장갑을 발에 끼우고 있던 아버지, 며느리를 사모님이라 부르는 아버지, 찬물에 믹스커피를 휘젓고 있던 아버지, 끓이지도 못할 라면을 사 놓던 아버지, 맨 얼굴에 면도 하느라고 일회용 면도기를 잔뜩 사 놓던 아버지, 치매 걸리고도 가끔은 막걸리를 사 마신 아버지, 바지 후크랑 모든 옷의 지퍼를 다 망가뜨린 아버지, 빤쓰를 안 입고 있을때가 많던 아버지, 나에게 ‘니가 고생이 많다’는 말을 많이 한 아버지, 나랑 있으면서 ‘엄마는?’ 이라면서 전처를 많이 찾았던 아버지, 나랑 같이 순대국도 먹고 해장국도 먹고 치킨도 먹고 커피도 먹고 서울에서의 마지막 밥으로 백화점 식당가에서 냉면을 먹은 아버지, 먹는 모양새가 많이 어설프지만 젓가락질은 여전히 잘 하는 아버지

우리 아버지 잘 지내야 될텐데… 이 말이 절로 나온다. 사랑이겠지. 사랑이 무슨 소용인가 싶지만 사랑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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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는 지난주에 또 길을 잃었다. 아버지 집에서 걸어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신정동 파출소에서 전화 왔다. - 까치산역까지 걸어갔다가 방향을 잃고 신정동까지 갔을거라 추측해본다. - 아버지를 발견하고 아침 7시 30분에 전화해 주고 집에까지 데려다 준 친절한 경찰이 아니었다면 우리 아버지 얼어 죽었을지도 모른다.

 요양등급 내용변경한 건 3일에 처리가 됐고, 이버지가 길을 자꾸 잃으니 요양원 진행을 서둘렀다. 아주 다행히 집 바로 근처에 있는 요양원에 빈 자리가 하나 있어서 입소(이용?)를 결정했다. 서류 준비 때문에 목요일 오후부터 바빴다.

 아버지 신분증을 엄마가 갖고 있어서 금요일 7시 차를 타고 경기도 오산에 갔다. 시속 110킬로 미터로 달리는 버스 안에서 눈을 감고 잠들면서 '기사와 나 뿐인 고속버스에서 운전자가 졸면 둘이 같이 죽겠구나' 단순 명료한 죽음을 생각했다.

 엄마는 제사 준비 중이었다. 제주(祭主)가 치매에 걸렸어도 본인 형님과 이혼한 전 형수님 집에서 지내는 제사가 중요한 삼촌들 꼴 보기 싫다. 점쟁이가 제사는 계속 지내는 게 좋겠다고 하니까 그 말 듣고 본인 몸이 엉망인데도 혼자서 제사 준비하는 엄마도 문제다.

 데이케어센터에서 아버지 데리고 나와서 은행 세 곳 들르고 요양원 입소용 건강검진 받고 고지혈증 약 문제로 의사랑 상담했다. 우체국에서 어떤 할머니가 우리 아버지 어디 아프냐고 해서 치매라고 했더니 본인은 치매 안 걸릴라고 뭣두하고 뭣두하고 하면서 계속 말을 걸길래, '할머니도 치매 걸리고 싶어요?' 말할까 하다가 속으로 이 할머니도 치매 걸리길.... 하고 저주를 퍼붓고 말았다. 은행에서는 이름을 본인이 써야 한다고 하고 보험료 자동이체 때문에 전화한 콜센터에서는 치매라도 본인이 직접 전화해야 한다고 하고, 정신없이 다니다가 농협 체크카드 잃어버려서 농협 다시 들르고 자꾸 짜증이 치미는데, 아버지는 계속 멍하고, 중간중간 내가 목소리를 높일때마다 내 눈치를 보는 것 같은 아버지를 보니까 더 화가 나고 기분이 너무 안 좋았다.

 아버지랑 밥 먹다가 순대국에 소면 사리를 두 번 넣어 줬는데, 너무 맛있게 먹길래 잘 드시니까 좋네, 진짜 좋네, 라고 했는데 말이 끝나자마자 '진짜 좋다'는 내 말이 진심이라 눈물이 났다.

 고모(아버지 누나)가 전화해서 요양원에 가면 학대도 많이 하고 죽으러 가는거라던데 어떻하니, 하길래 엄청 짜증이 났지만 좋게 좋게 얘기했다. 전국에 장기요양인정자(아버지처럼 요양 등급 받은 사람)가 100만명 정도 된다. 고모 생각대로라면 나는 백 만명이 요양보호사한테 학대받는 나라에 살고 있네. 무지(無知)가 무섭고 본인 위주로만 생각하는 무지는 더 무섭다. 그리고 요양원에 가면 요양원에서 죽을 가능성이 높으니까 죽으러 가는 거 맞다. 

 아버지는 자꾸 엄마를 찾았다. 엄마는 경기도 오산에 있고 엄마도 많이 아프고 앞으로 자주 못 볼거라고 말해줬다. 강릉으로 간단 얘기를 들은 아버지는 <강릉>이란 단어에 몰두했다. 치매에 걸렸어도 고향은 고향인가?

 회사에 일이 있어서 더 빨리 진행은 못하고 19일에 입소할 계획이다. 여기저기 전화하고 여기저기 왔다갔다하는 일이 너무 힘들다. 아버지 요양원 입소 과정을 빨리 끝내고 싶다. 서울 가는 것도 이번주면 끝이다. 아버지가 요양원에 가고 나면 나는 어떤 기분이 들까?

 아버지 요양원 가고나면, 엄마가 괜찮은 사람 만나서 홀가분한 상태로 재혼해서 편하게 살면 좋겠다는 생각을 몇 번 했다.  


많은 아버지 컷 중에 베스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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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월 10일이다. 지난주 금요일에 '1월 5일이구나, 벌써 새해가 5일이나 지났네, 5일씩 몇 번만 더 지나면 올해가 끝이네, 올해도 다 갔구나' 생각했다. 올해가 다 갔다고 생각하는 날짜가 나이 먹을수록 점점 빨라진다.

 토요일에 서울 갔다가 일요일에 돌아왔다. 아내랑 함께 했다. 아내 부모님, 아내 오빠 가족과 점심을 먹었다. 1월 13일 생일이 지나야 17살이 되는 조카 아이가 고등학교 조기 졸업하고 카이스트에 합격했다. 지나간 아버님 생일과 조카 아이 축하 식자다. 만 17세면 앞으로 10년 동안 놀고나서 앞으로 어떻게 살까 생각해도 좋겠단 생각이다. 종로 한 복판에 있는 중국집에서 이것저것 먹었는데, 크림 새우가 맛있었고, 아버님과 조카 아이가 짜장면을 많이 남겼다. 풍족함이 흘러 넘치는 시대지만 여전히 음식을 남기는 일에 대한 거부감이 크다. 아버님, 앞으론 그러지 말자구요. 생애 처음 가본 블루보틀에서 커피까지 마시고 어머님이 싸주신 월병이랑 찹쌀떡 챙겨서 - 어머님 사랑 - 아내랑 신월동으로 왔다. 
 
아내는 오랜만에 시아버지를 만났다. 1박 2일 동안 아버지를 지켜본 아내는 아버지가 그럭저럭 심각하진 않은 것 같다고 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다만 혼자서 못 지내는 사람이 됐을 뿐이다. 아버지랑 순대국집 두 곳에서 순대국을 먹었다. 두 곳 모두 주인이 나랑 아버지를 알아보는 집이다. 우리 아버지가 온전치 못하다는 것도 알고 있는 집이다. 장사하는 사람들이야 별 생각 없겠지만 나는 왠지 모르게 그들의 시선이 부담 되기도 한다. 아내까지 셋이라서 이번 주말은 그 부담감이 강하지 않았다. 아버지를 만나면 아버지랑 뭔가를 먹어야 하고 아버지가 순대국을 가장 무난하게 잘 드시기에 순대국 집엘 간다. 다음 주말에도 어쩌면 그 다음 주말에도, 내가 아버지를 만나는 모든 날에. 순대국은 실제로 우리 집안의 소울 푸드이기도 하고 - 엄마가 나 임신중에 순대국과 코카콜라를 많이 먹음, 네 다섯 살 때부터 가족 외식으로 시장에 순대국 먹으러 갔던 기억이 있음. - 뚝배기에 담긴 국밥 이미지 자체가 소울 푸드란 말과 어울린다. 일요일 점심 먹고 나서는 아버지랑 둘이 호수공원을 한 바퀴 돌았다. 먼저 아버지랑 호수 공원 돌았던 게 언젠지 모르겠는데, 아버지는 확실히 그때보다 훨씬 멍한 사람이 됐다. 호수공원을 돌고 공원 옆 스타벅스에서 커피 한 잔씩 마셨다. 예전에 스타벅스 돌체 라떼 같이 마셨던 게 기억났다. 아버지는 나에게 순대국과 스타벅스로 기억되겠구나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아버지에게 잊혀질 것이다.

 뇌동맥류 수술을 했고 올해 또 칼을 댈 일이 있을 거라고 점쟁이가 말했다는 엄마, 위암 수술을 했고 치매에 걸린 아버지, 유방암 수술을 한 어머님, 심장이 뛰게 하는 보조기구 시술을 받고 담낭 제거를 기다리는 둘째 이모, 담당을 제거한 친구 어머니, 다리에 심각한 수술을 한 친구 아버지, 왼쪽 어깨를 올리지 못하는 친구, 아킬레스건이 끊어진 친구, 다리에 큰 수술을 한 친구, 수시로 오줌을 누러가야 하는 또래 친구들, 갑작스럽게 허리가 아프고 다리가 저렸던 나, 새해 들어 왼쪽 어깨가 아프더니 팔까지 저리기 시작하는 나, 40세 무렵에 노안이 시작된 아내, 암 수술을 받은 내 또래 사람들, 갑자기 죽은 40대 사람들, 점점 늘어난다는 2, 30대 치매 환자들. 늙고 병드는 일을 생각한다. 어디까지가 삶이고 어디까지가 삶이 아닌가, 언제부터 죽음이고 언제까지가 죽음이 아닌가. 

 45세, 어느날 갑자기 쓰러져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나이다. 혼란한 국제 정세와 내가 살고 있는 곳이라 그런지 더 혼란하게 느껴지는 국내 정세를 생각하면서 짜장면을 많이 남긴 가족들과 끝까지 배가 고팠을 안네 프랑크 누나, 서대문 형무소에 갇혔던 독립투사들을 생각하면서 언제든 이상하지 않을 나의 죽음 같은 걸 생각한다.

 가족 모임도 좋았고 아버지를 만난 것도 좋았다. 아내랑 함께 해서 더 좋았다. 불편을 감수하면서 시아버지랑 함께 있어준 아내에게 고맙다, 고 생각하면서도 급작스런 나의 죽음 같은 걸 생각하는 1월이다.

스타벅스 블론드 바닐라 더블샷 라떼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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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일부터 2일까지 아버지랑 함께 있었다. 오늘 첫 출근 했다. 아버지랑 3박 4일은 진짜 힘드네. 신년 카운트다운 할 때, 나는 연기대상 프로그램 틀어놓고 웹툰 보고 있었고 아버지는 잠들어 있었다.

 아버지랑 순대국, 치킨, 갈비, 삼겹살을 먹었다.

  31일 낮에는 동생이 아버지 집에 다녀갔다. 살아가는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1일에는 목욕탕에 갔다. 
  1일 밤에는 뭔가 견디기 힘들어서 밤 11시에 잠든 아버지를 두고 집을 나와서 모텔에 가서 잤다. 2일 아침에 아버지는 내가 어제 같이 누웠었단 사실도 잊었다.
 엄마는 2일 낮에 막내 이모 - 내 사랑 명옥이 이모 - 랑 같이 다녀갔다. 막내 이모랑 살아가는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아버지 보러 온게 아니라 많이 아픈 언니 보러 온 거였다. 아버지는 데이케어 센터에 있었다. 엄마는 아버지 드시라고 고구마를 삶았다. 

 새해 첫 진료라 그런지 병원에 사람이 많았다. 두 시간 기다려서 아버지 뇌가 점점 위축되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약간 바뀐 처방전을 받았다. 의사가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고 했다. 내가 의사 선생님 만난게 17시였는데, 아버지 뒤로 16명이 대기중이었다.

 아버지는 매운 양념 치킨을 잘 먹었고 얼큰 순대국을 제일 맛있게 먹었다. - 처음에 잘 못 먹길래 매운 건 시키지 말자, 생각했는데 뜨거워서 그랬던 거였다. - 목욕탕을 좋아했고, 목욕탕에 가서 보니 빤스를 안 입고 있었다. 엄마 언제 오는지 자꾸 물었지만 엄마를 만나지는 못했다. 내 동생의 존재를 잊은 줄 알았는데, 잊지 않았다. - 센터 선생님들 빼면 엄마, 나, 내 동생 이렇게만 확실하게 아는 것 같다. - 

 아버지는 증상을 늘어놓는 게 무의미한 완숙한 치매 환자가 됐다, 어느새. 아버지에게 섬망과 환청이 없어서 다행이다, 그나마. 

 12월 18일에 접수됐다고 연락온 요양등급내용변경에 대한 답변이 오지 않는다. 기다린다. 설이 2월 10일 경이니까 1월 중순까지는 공단에 연락하지 않고 기다려보기로 한다. 아버지가 갈 요양(병)원 알아보는 중이다. 엄마 마음이 편한 곳으로 하기로 한다. 아버지에게 요양원 얘기를 하면 무슨 말인지도 모르면서 알아서 하라고 한다. 아버지랑 오래 같이 있었더니 아버지한테 니가 고생이 많다, 고맙단 말을 많이 들었다. 알아서 하란 말에도 고맙단 말에도 맴이 찢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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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에서 2박 3일 보내고 어젯밤에 강릉으로 돌아왔다. 새벽에 다섯 번 깨고 아침에 일어나서 출근했다. 피곤하다.

 23일 저녁에 아버지랑 치킨 먹었다. 올들어 세 번째인데 아버지가 먼저 두 번보다 맛있게 먹었다. 아버지 먹는 모양새가 어설퍼서 순살 치킨을 시켰다는 점은 섭섭하지만 24일 아침에 아버지 집에 도착했을 때, 아버지가 반쯤 먹고 남았던 치킨도 다 먹었고 맛있다고 했기에 만족했다. 앞으로 아버지랑 치킨은 페리카나 순살 반반으로 고정하기로 한다.

 여러가지 정황상 아버지는 23일 오전에 휴대전화를 잃어버렸다. 그리고 못 찾았다. 나는 23일 밤에 친구랑 술을 먹고 친구네서 잤는데, 택시에서 내리고서 휴대전화 잃어버린 걸 알았다. 다음날 아침에 전화기 어떻게 찾을지 약간 막막했는데, 택시에 뒀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하고 카카오T 사용 기록을 ARS로 조회해서 택시 기사분과 통화를 했고 친절한 택시 기사분 집이 마침 신월 1동(아버지 사는 동네)이라서 파출소에서 전화기를 찾았다. 휴대전화 잃어버리기는 치매에 걸리나 안 걸리나 마찬가지네, 생각했다.

 23일에 나를 재워준 친구네 집은 역곡역 부근이다. 고등학교 때 이 친구네 집에 많이 갔다. 그때 친구는 온수동에 살았다. 서울에서 벗어났지만 삶의 터전이 많이 바뀌진 않았다. - 돈 없는 집들은 다들 조금씩 서울 바깥으로 밀려난다. - 술이 꽤 취해서 들어갔는데도 어렸을 때 느꼈던 특유의 친구네 집 냄새가 났다. 같은 사람이 살고 있어서 그렇다. 나이 먹고는 부모님과 함께 사는 친구네 집에 갈 일이 거의 없기에 집안의 냄새가 바뀌지 않은 점이 인상적으로 느껴졌다. 친구한테 얘기했더니 그런가, 하고 말았다. 본인 집 냄새를 본인은 모르는 법이다. 나는 남의 집에 갔을 때, 그 집 특유의 냄새(atmosphere)에 대해서 얘기하는 경우가 있는데, 막상 우리집 냄새에 대해서는 들은 기억이 없다. 지금 엄마집에 가면 나는 냄새가 어릴적 우리집 냄새일까? 궁금하네.

 크리스마스 이브에는 아버지랑 목욕탕에 갔다. 아버지가 정말 오랜만이라고 하면서 좋아했다. 아버지와 나는 59.5kg 노인과 82kg 중년이다. 아버지 체중은 위암 수술 후에 5kg 정도 줄었다. 벗은 아버지 몸은 보기에 많이 야위었다. 아버지는 내 몸이 보기 좋다는 맥락의 말을 했다. 아버지랑 열탕에 몸을 담그고 매주 일요일마다 목욕탕에 가던 어린날을 떠올렸다. '응답하라 1988' 같은 것. 그때는 어지간한 집은 다들 일요일에 목욕탕에 갔기에 목욕탕에서 친구들을 만나기도 했다. 아버지는 비누칠도 어설펐다. 45세의 크리스마스 이브에 71세 아버지 몸에 비누칠 해준 걸 기억해둔다.

 아버지랑 순대국도 먹고 만두도 먹고 한우소머리곰탕도 먹었다. 아버지는 머핀도 먹고 두유도 먹었다. 아버지에게 내년에는 요양원에 가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무슨말인지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거기도 사람들이 많은지, 같은 걸 물어보고는 니 알아서 하라고 했다. 아버지는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 내일 학교(데이케어센터)에 가는지 계속 물었다. 나는 그냥 기계적으로 같은 대답을 하고 아버지는 같은 말을 또 묻고의 반복이다. 아버지는 니가 고생이 많다는 얘기도 반복해서 했다. 아버지랑 이런 얘기를 나눌때 마음이 찢어지는 정도는 아닌데, 충분히 상처받는다.

 아버지 집에서 잉글랜드 프로축구 하이라이트랑 영화 러브 액츄얼리를 봤다. 잉글랜드 축구는 빡세고, 러브 액츄얼리는 늘 사랑스럽다. 삶은 빡세고 사랑스럽다. 아버지랑 같이 있을 때, 대학 후배한테 전화가 왔다. 명절이라 전화했다고 했다. 고마운 일이다. 내 말투의 기계같은 면 때문에 후배가 '형, AI에요?' 물었지만 정말 고맙다. 날 생각해서 먼저 전화를 해준거니까. 내가 좋아하는 형 중에 한 명(ys형)은 가끔 내가 전화하면 항상 '일우야 고맙다'고 한다. 나도 후배에게 '고맙다'고 했다. 이런 게 삶의 사랑스러운 면이다. 꼭 먼저 연락줘서 고맙다고 하지 않아도 누군가의 전화를 귀찮게 느끼지 않는 것도 - 때로는 귀찮게 느끼더라도 - 삶의 사랑스러운 면이다. 20대 중반에 친구들 전화 잘 안 받은 적 있는데, 그때 아버지가 니 생각해서 전화하는데 널 생각한다는 게 고마운 일이니 친구들 전화오면 전화 잘 받으라고 나한테 한 마디 한 적 있다. 아버지가 내게 남긴 유일한 삶의 교훈이다. 아버지는 그런 마음으로 살았고 나도 그런 마음으로 산다. 내 전화 잘 받아주는 친구들이 항상 고맙다.

 12월 30일부터 1월 2일까지 아버지랑 함께 한다. 아버지 다시 만날 때까지 아버지한테 별일 없어야 할텐데. 아버지 만나면 목욕탕도 가고 치킨도 순대국도 먹고 병원도 가고 휴대전화도 내 이름으로 새로 장만하려고 한다.

 엇나가지 말고 체념하지 말고 물의를 일으키지 말고 살아야지. 세 개가 같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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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금요일에 의료보험공단에서 전화가 왔다. 공단직원이 치매는 장기요양 5급이라도 시설급여가 가능하다는 얘기를 해줬다. 몰랐다고 알려줘서 고맙다고 금방 신청하겠다고 답했고 오늘 내용변경 신청했다. 팩스 보내고 나서 얼마후에 신청완료 카톡이 왔다. 공단 직원이 장기요양 내용변경신청 어떻게 하라고 했을 때, 나는 되묻지 않고 한 번에 알아들었다. 모든 보호자가 나와 같지는 않을 것이다. 건강보험공단에서 장기요양 등급 담당하는 일은 극한직업이구나, 생각했다.

 아버지는 12일에 봤을 때보다 더 멍해졌다. 만날 때마다 더 멍해진다. 그저 멍한 상태다. 14일에는 데이케어센터에서 돌아온 후에 길을 잃었다. 이번에도 친절한 이웃 덕분에(이번엔 엄마가 사례를 했다고 함) 집에 돌아왔다. 어떤 경로로 길을 잃었는지 모르겠다. 아버지를 보고 아버지 생각을 할 때마다 왜 이렇게 갑자기....란 소용 없는 질문이 반사적으로 튀어 나온다.

 어제 12시에 엄마가 오산 집으로 돌아가고 내가 아버지 집을 나올때까지 4시간 30분 정도 아버지랑 단 둘이 같이 있었다. 아버지 좀 누우세요, 하니 아버지는 누웠고 바로 잠들었다. 잠에서 깬 아버지는 티셔츠 위에 티셔츠를 겹쳐 입으려는 시도를 했다. 왼쪽 팔을 먼저 넣고 티셔츠를 뒤로 돌려서 반대쪽 팔을 넣으려고 시도했다. 재킷이 아니라 티셔츠를. 그 모습을 아버지 뒤에서 10분 정도 지켜보다가 그렇게 입는 옷 아니라고 알려줬다. 화를 내는 말투는 아니었다. 체념하는 말투긴 했다. 체념은 무정함이다. 아버지 치매 확정되고 나서 나와 아버지의 거리는 처음부터 그랬다. 아버지는 내 말을 정확히 못 알아들었지만 옷 입는 시도는 멈췄다. 내가 말 안했으면 한 시간도 그러고 있었을거라 생각한다.

 텔레비젼 켜는데 십 분, 바지 입는데 십 분, 티셔츠 (거꾸로) 입는데 십 분, 두유에 빨대 꽂는 일에 십 분. 아버지의 시간은 이렇게 흐른다.

 엄마는 배 안고프다고 해서 아버지랑 둘이 순대국을 먹었다. 아버지는 먹는 모습도 만날 때마다 어설퍼진다. 그걸 보는 일이 힘들다. 힘들다.

 아버지가 요양원 가는게 맞는건지 모르겠다. 그러자고 결정을 했는데도 모르겠다.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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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인터넷으로 장기요양등급 변경 신청했고 오늘은 아버지 인지검사 날이다. 1년에 한 번 하는 인지검사를 두 달 전에 받았어야 했는데, 스텝에 꼬여서 1년 2개월 만인 오늘 받았다. 강릉에서 8시 30분 기차를 탔고 이대목동병원에 도착했을 때, 검사실 앞에 엄마가 혼자 앉아 있었다. 엄마를 꽤 오랜만에 보는데 포옹도 안 하고 서로 손만 잡았다. 나도 엄마도 아버지 때문에 마음이 지친 영향이다. 사실 아버지 때문에 지치기론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이다. 현재 심장 문제로 이대목동병원에 입원해있는 둘째 이모는 수시로 아버지 오산으로 데려가서 같이 살라는 얘기를 한다. 이모같은 외부 스트레스 요인이 아니더라도 엄마 스스로 갖고 있는 이혼한 전남편에 대한 책임감이 크다. 알지 모르겠지만 아버지 걱정 많이 한다고 나한테 따로 얘기한 적 있었고, 오늘도 아버지 생각하면 잠이 안 온다고 비슷한 맥락의 얘기를 했다. - 엄마, 알아요.

 아버지는 지난 일요일에 길을 잃었다. 한밤중에 어떤 이유로 신정동까지 걸어 갔는지 모르겠다. 오늘 엄마 얘기를 들어보니 엄마랑 아버지가 통화할 때 아버지 주변에 있던 친절한 이웃이 신월1동 파출소를 - 동네에서는 길을 잃어 버리지 않으니까. 혹은 엄마랑 통화 안했으면 어떻게든 걸어서 집으로 돌아왔을지도 모른다. - 목적지로 택시 태워줬다고 한다. 지금은 시도조차 못할 일이지만 예전에 경기도 오산에 혼자 가다가 지하철인지 버스인지 잘못타서 길을 잃은 적이 한 번 있다. 아버지가 치매 걸리고 길을 잃은 게 엊그제 케이스까지 공식적으로 두 번이다. 기록해둔다. 걱정된다.

 인지검사 선생님이랑 상담하고 - 인지검사 선생님이 갑자기 보호자가 바뀐일로 당황하길래, 저 아주머니는 이혼한 전처라고 말해줬다. - 셋이 병원 근처 식당에서 밥을 먹었다. 셋이 밥 먹을 때마다 아버지랑 엄마 이혼하던 날 생각이 난다. 셋이 밥 먹는 거 오랜만인데 별 감흥이 없었다. 나랑 엄마랑 둘 다 아버지에게 지친 탓이다. 엄마가 맛없다 해서 그런지 맛있게 먹은 내 결론도 맛 없는 한 끼였던 게 됐다. - 엄마의 말 한마디, 그 영향력을 생각한다. - 나는 아버지에게 배부르면 그만 드시라고 했고 엄마는 그 반대였다. 아버지는 처음엔 배 부르다고 밥을 남겼다가 엄마 얘기에 꾹꾹 눌러담은 밥 한 공기를 다 먹었다. 이게 더 깊은 애착의 힘인가?

 밥 먹고 아버지 담당 선생님 만났다. 의사는 아버지의 인지능력이 급격히 나빠진 것에 대해 우려를 표하면서 머리 mri를 찍고 결과를 본 후 약을 바꿔보자고 했다. 1년에 3점 정도 떨어지면 보통이라고 하는 30점 만점짜리 인지검사에서 오늘 아버지는 9점을 받았다. 2년 전에는 19점. 1년 전에는 17점이었다. 의사 선생님이 아버지의 치매 치료(?)에도 건강보험 산정특례를 적용해줬다. 우리 아버지, 나도 엄마도 모르는 사이에 작년 이맘때보다 훨씬 이름없는 식물같은 사람이 됐네. mri는 오늘 못 찍고 촬영 동의서만 썼다. 19일 아침 7시 30분에 촬영인데, 동생이 시간 된다고 해서 동생에게 맡겼다. 다행이다. 오늘은 피검사 소변검사 심전도 검사를 순서대로 했다.

 검사실 옮겨 다니다가 아버지 가방이랑 목도리를 엠알아이 촬영 동의서 쓴 곳에 두고 왔다. 그 사이에 아버지 약 사러 갔던 엄마는 신용카드를 약국에 두고 왔다. 두 건 다 빨리 알아채고 찾아오긴 했지만 누가 누굴 돌보는건지, 심각하다.

 병원 나와서 오목교역 근처에 신한투자증권에 갔다. 엄마가 갖고 있는 증권계좌 정리가 목적이다. 엄마가 창구 직원에게 증권계좌가 있는 유래에 대해서 구구절절 설명하려고 하길래, 내가 이 사람(엄마) 명의로 증권계좌가 있는지 있다면 정리하고 싶다고 말했고, 그 다음 진행은 일사천리였다. 오늘 한 일 중에 꽤 잘한일이다. 오래전에 집에 돈이 하나도 없을 때, 동생 등록금 마련한다고 80년대부터 갖고 있던 포항제철 주식 팔기 위해서 증권회사에 엄마랑 같이 온 적 있다. 그때 생각이 났다. 그때 포철주식 판 돈이 딱 동생 등록금이 었다고 엄마가 말해줬다. 그때 엄마 나이가 지금 내 나이보다 어리다.

 엄마는 이모가 입원해있는 병원으로 돌아가고 나는 아버지를 데이케어센터에 데려다줬다. 기차 시간이 남아서 친구한테 들렀다. 이 친구 엄마가 우리 엄마랑 동갑인데, 폐에 종양이 두 개 있고 두 달 후에 그 종양이 얼마나 커지는지 봐야 암인지 아닌지 알 수 있다고 한다. 나이 먹고 손상되는 내장을 생각한다. 손상되지 않는 삶이란 무엇인가? 나도 가끔 위축성 위염이 찾아오면 소화가 안되는 기분과 함께 가슴이 답답한 증상이 온다.

 낮에 만난 친구한테만 얘기하고 말까하다가 여기 적는다. 아버지 소변검사 하는데, 오래 걸렸다. 좌변기가 있는 화장실 한 칸에 들어가서 내가 시범을 보여주고 나서도 한참 후에야 아버지가 소변검사를 이해했다. 아버지랑 나랑 음경 모양이 닮았다. 씨발 핏줄. 이런 생각을 했다. 친구 아버지는 돌아가신지가 10년이 넘었는데, 친구도 어느날 아버지랑 본인 음경이 닮은 걸 알았다고 한다. 씨발 핏줄. 한 번 더 생각했다.    

 청량리역에 앉아서 쓰다가 집에 돌아와서 마저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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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서울 와서 데이케어센터에 내년도 센터 이용 계약서랑 아버지 투약 의뢰서 등 서류 몇 가지 전달하고 센터 선생님 한 분과 면담 시간을 가졌다. 이 선생님은 아버지에게 굉장히 호감을 갖고 계신 선생님이고 센터에서 간호부장이다. 요즘은 아버지 면도도 직접 해주신다. 아버지도 키 큰 선생님이라고 하면서 자주 언급했더랬다. 센터에서는 당연하게도 최근 몇 달 사이에 아버지의 인지능력이 급격히 나빠진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장기요양등급을 4등급으로 받고 요양원으로 모셔야 할 것 같다고 했다. 아버지의 신체는 여전히 요양원에서 살기에는 너무 건강하지만 내 결정 혹은 결심은 세상에 흔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저녁엔 친구 만나서 한 잔 했다. 처음 들어갔던 술집에 가방을 두고 와서 그 가방을 찾아둔 친구를 오늘 아침에 다시 한 번 만났다. 아침부터 버스랑 지하철을 갈아타고 한참 걸어서 경기도 부천에 있는 친구네 집까지 찾아가는 일이 번거롭게 느껴지지 않았다. 어른이 되서 여유가 생긴건가? 어젯밤이랑 오늘 아침엔 모텔 욕실에 있는 욕조에 몸을 담갔다. 오랜만에 포근함. 하룻밤 4만원 짜리 방에 욕조가 있는 게 맞나? 잠깐 생각했다. 물론 오래된 모텔이고 방도 후지긴 하다.

 오늘 오후엔 센터에서 아버지 모시고 와서 아버지랑 순살 닭 튀김도 먹고 축구도 봤다. 오늘은 달콤한 양념이 묻은 치킨을 시키는 실수를 하진 않았다. 다만 맛이 별로 없었기에 다음번엔 브랜드 치킨을 한 번 시켜 드려야지, 생각했다. 아버지는 닭을 맛있게 먹었다. - 물론 먹는 모습이 점점 어색해지고 있다. - 콜라는 나 한 모금 아버지 한 모금 먹고 싱크대에 버렸다. 잘한 일이다. 아버지는 축구를 집중해서 못 봤고 내가 뭔가를 얘기하면 다른 얘기만 했다. 내일 엄마가 온다는 얘기를 50번 정도 해줬다. 얼마전엔 본인 전화번호를 묻길래 100번 넘게 얘기해줬다. 집에 들어오는 도어락 비번을 순간 잊어서 센터에서 돌아와서 집에 늦게 들어오게 됐고 그것 때문에 번호를 물었으리라 추론해 볼 뿐이다. 우리 아버지는 무얼로 사는거지? 어떤 의미로는 살아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 어제 '계산된 삶' 을 읽었고 지금은 '수확자들'을 읽고 있어서 이런 생각을 한 거겠지. 살아 있으면 살아야 해서 사람이다.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말자.

 다음주엔 서울에 두 번 와야되고 그 다음주에도 그 다음주에도 서울에 온다. 약간 힘든데, 번거롭게 느껴지진 않는다. 나이 먹어서 그런게 아니고 아버지를 제외한 나머지 내 삶이 매우 심플하기 때문에 그리고 수시로 서울에 올라오는 일이 머잖아 끝날 것을 알기에 그렇다는 걸 안다.

 아버지가 나랑 엄마랑 센터 선생님들 빼고는 다 잊어가는 것 같기에 동생에게 아버지가 너를 잊는 것 같으니 수시로 전화 하라한 게 삼 주 전이다. 아버지 전화기 통화 목록을 쭉 들여다 봤는데, 아버지 친구 한 명은 며칠전의 통화기록에 이름이 있는데 동생 이름은 쭉 없었다. 동생은 나보다 번잡한 삶을 사니까, 아이 두 명 키우는 게 힘들겠지, 생각했다. 그래도 섭섭한 마음이 있다. 아버지랑 친했던 건 내가 아니라 동생인데.

 아버지는 삼 주 전보다 더 멍해졌지만 아직? 나를 잊지는 않았다. 본인 아이를 잊는다는 건 본인 아이를 잃는 일만큼이나 심각하구나 생각해본다. 아버지 저를 오래 기억해 주세요. 엄마는 저보다는 더 오래 기억해 주시고.

 청량리에서 강릉 가는 표를 끊았다고 생각했는데, 강릉발 기차표를 끊었기에 환불 후 강릉가는 기차표 예매하고 잠깐 비는 시간에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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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박 2일로 서울 다녀왔다. 2박 3일로 갈랬는데, 데이케어센터 선생님과의 면담을 금요일에 전화로 하는 바람에 서울 나들이 일정이 하루 줄었다. 하루만큼 덜 피곤해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먼저 만났을 때 아버지가 맨 얼굴에 일회용 면도기를 갖다 대길래 아버지 집에 있던 일회용 면도기는 다 내 짐가방에 넣고 싸구려 도루코 면도기랑 면도날 4개를 검정 봉지에 담아서 데이케어센터 들어가는 문에 묶어뒀다.
 아버지가 빨대 꽂아 먹는 두유를 잘 못 먹길래, 쉽게 먹을 수 있는 다른 음료를 찾아보려 했는데 마땅치 않아서 빨대가 딸려있는 베지밀b를 사놓고 아버지한테 빨대 꽂아서 하나 드렸다. 두유를 먹던 아버지는 빨대가 두유팩에서 절반정도 빠져나오니까 먹기를 멈췄고 나는 빨대 끝이 두유팩 바닥에 닿도록 조치한 다음 아버지가 다 먹도록 유도했다. 아버지가 단 걸 좋아하는 거 같아서 베지밀 a가 아니라 b를 골랐다.
 토요일에 아버지 집에 도착했을 때, 아버지가 믹스커피 두 봉지를 찬물에 타고 있길래 물 끓여서 한 잔 타드리고 다음날도 한 잔 타줬다. 단 음식이 당기는 건가, 생각했다.
 자주 가는 순대국 집에서 밥을 먹었다. 남자 사장님이 전부터 지켜봤는데 아드님이 아버지한테 참 잘한다고 하면서, 본인은 저녁에 아들이랑 한 진 해야겠다며 말을 걸었다. 이버지가 치매고 요즘 많이 안 좋다고 간략하게 대꾸해줬다. 내가 아버지한테 하는 차분한 말투가 이 아저씨에게 좋게 느껴졌으리라. 우리한테 말 안 걸었으면 좋았을텐데. 다음번에 또 이 집에 갈 수 있을까? 원래 가려고 했던 청국장 집이 휴무였을 때부터 스텝이 꼬였다.
 아버지가 치킨을 먹고 싶어한다는 걸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기에 배달앱에 이버지집 주소 저장하고 치킨 시켜먹었다. 일반 순살 후라이드를 시켰다고 생각햤는데 했는데, 치킨에서 단맛이 났다. 실수다. 아버지는 오랜만에 먹는다면서 맛있게 먹었다. 어설프게 먹는 아버지 모습을 보면서 순살을 시키길 잘했단 생각을 했다. 아버지, 다음엔 짭짤한 걸로 먹자구요. 아버지는 오랜만이라거 하면서 콜라도 맛있게 먹았다.
 나는 누워서 웹툰을 보고 아버지는 쉴 새 없이 떠들었다. 나는 중간중간 그러냐고 대꾸를 했다. 아버지가 무슨 얘기하려는 건지 잘 모르니 대답이 더 건성이 된다. 아버지는 내 대답이 건성인 걸 모르니 계속 얘기했다. - 돈 들고 튄 계주가 제주도에서 붙잡힌 스토리 같았다 - 다음엔 집중해서 들어봐야겠다.
 아버지가 잠깐 자는 동안 나는 침대 아래 누워서 웹툰을 봤고 내가 잠깐 자는 동안 아버지는 집안을 끝없이 돌아다니면서 뭔가 정리를 했다.
 이틀동안 아버지는 딱 한 번 나한테 큰 소리를 냈다. 집에 들어와서 현관문을 잠그지 않으니 바람에 자꾸 문이 열린다고 도어락에 달린 동그란 버튼 눌러서 문 잠그라고 했더니 그걸 모르는 사람이 어딨냐면서 나한테 화를냈다. 먼저 방에 오줌 눴을 때도 그랬었지. 말 조심해야겠다.
 아버지는 옷 갈아 입는다는 개념을 잊었다. 먹고 싶어서 라면과 커피믹스를 샀지만 물 끓이는 걸 모른다. 물 끓일줄 몰라서 차라리 다행이다. 순대국이 충분히 짰는데, 밥 한 숟갈 먹고 아버지의 젓가락은 자꾸 양파 찍어 먹으라고 준 된장을 향했다. 여전히 집애서 신발을 신고 있으려고 한다. 짧은 미국 생활의 영향이다. 옷을 타이트하게 입고 싶어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그 이유는 모르겠다. 동생이 연락을 자주하지 않아서 그런지 어떤 때는 본인 작은 아이의 존재를 잊은듯 보였다. 아버지가 요양원에 가면 나보다 동생쪽이 상심이 클테니 연락 자주 하라고 해야겠다. 이런 생각도 나만의 착각이려나?

 나랑 있을 때 뭐라도 자꾸 떠드는 아버지는 안심이다. 평소에 얼마나 외롭겠나. 통화할 때 자꾸 언제 오냐고 보고 싶다고 한다. 치매가 오고 나서야 발현된 아버지의 진심이 두렵기도 하지만 나를 보고 싶어힌다는 건 날 잊지 않은거라 안심 쪽이 두려움보다 크다.

 이번 주말이랑 다음 주말엔 엄마가 아버지한테 간다고 하는데, 내가 힘들까봐 아버지한테 가는 엄마가 치매 아버지보다 더 걱정이다.

 운동과 술로 스트레스를 푼다. 8시에 퇴근하고 운동왔다. 했던 얘기 또 하고 또 하고 또 하는 아버지처럼 끝없이 반복되는 계단 위에서 계단 구르는 속도를 올렸다 늦췄다 하면서 쓴다.

돈 4억 5천 8백이 이렇게 너저지분한 세상을 나는 살고 아버지는 잊고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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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박 2일로 서울 다녀왔다.

 아버지는
전복죽을 잘 먹었다. 매운 순대국을 반 정도만 먹었다. 추어탕을 아주 맛있다고 하면서 먹었다. 한 개에 천 원하는 시장 빵집 머핀을 단 거라 하면서 맛있게 먹었다. 두유를 먹는데, 빨대를 꽂을 줄 몰랐다. 혼자 있을 때는 이리저리 해보다가 결국 빨대를 꽂아 먹긴 하는 것 같다. 청바지가 입고 싶다고 하면서 츄리닝 위에 청바지를 입었다. 바지를 벗으라는 말을 못 알아들었다. 자크 올리라 했는데, 자크가 뭔지 몰랐다. 청바지 단추를 못 채워서 내가 도와줬다. 먼저 입던 바지에 있던 허리띠를 갈아입은 바지로 옮기지 못했다. 이건 혼자 있을 때 이리저리 해봐도 못했을 것 같다. 틀니 끼우는데, 1분이상 걸렸다. 반팔 입고 밖에 나가려고 했다. 물론 날이 춥진 않았다. 살아야지,란 말을 또 했다. 요양원에서 사는 것도 사는 건가 생각했다. 머리빗을 구두주걱으로 쓰려고 했다. 친구에게 전화 해본다고 하면서 티비 리모콘을 집어 들었다. 일회용 면도기를 맨 얼굴에 들이댔다. 비눗물을 얼굴에 묻히고 면도하라고 했는데, 비눗물이 뭔지 잘 못 알아 듣는 것 같았다. 며느리를 사모님이라 했다. 이름을 잊어서 그런가보다. 오늘 아침에 본인 피를 빨아 먹고 퉁퉁해진 모기를 10마리 이상 잡았다. 모기가 피 빨아 먹은 것에 대해서 뭐 어떠냐고 했다. 아침엔 8시에 일어났고 낮잠을 자지 않았다. 그리고 엄마는 언제 오는지 자꾸 물었다.

 아버지는
나에게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이 있다. 아직 내 이름을 잊지 않았다.

 나는
많이 피곤하다. 내일 출근하기 싫다.  

아버지 집 티비 다이 아래. 쓰지는 않는데 예뻐서 이렇게 해 놨다고, 보기에 좋더라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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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요일에 아버지 만나러 갔다가 일요일에 돌아왔다.

 2주 전과 비교해보면 아버지는 변한게 없다. 더 나빠질 거리가 얼마든지 있는데, 변한 게 없다는 건 좋은 거다. 강릉에 사는 아버지 사촌 누나가 - 나한테는 오촌 고모 - 치매에 걸렸단 소식을 들었다. 고모는 무서워서 집에서 못자고 옆집에 가서 재워달라 하고 - 옆집에서 몇 번 재워줬다 함 - 손가방에 들어있는 물건들을 꺼냈다 넣었다하길 반복한다고 한다. 아버지는 갑자기 길을 잃어버리는 사람이 될 수도 있고 한겨울에 반바지를 입고 외출을 하는 사람이 될 수도, 먼저처럼 집 안 아무데나 오줌을 누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 치매가 무섭다.

 토요일 저녁에 전복죽을 맛있게 드시길래 기분이 좋았다. 일요일 오전에 혼자서 계속 횡설수설 얘기해서 들어드렸다. 무슨말을 하려는지 알 때도 있고 전혀 모르겠는 때도 있다. 외로운 우리 아버지 계속 떠드시라고 계속 추임새를 넣어드렸다. 점심에 무한리필 고깃집에 갔다. 일반 삼겹살 집에 갔어도 괜찮지만 어쩐지 아버지랑 무한리필 고깃집에 한 번은 가고 싶었다. 내 욕심이다. 아버지 접시 위에 올려 놓은 갈비를 맛있다고 하면서 잘 드셨다. 위암 수술 끝나고 6개월 지난 이후로는 먹는 양이 조금 늘어난 거 같기도 하다. 
 
 점심 먹고 서서울호수공원을 걸었다. 아버지가 기분이 좋은지 뭐라뭐라 계속 얘기하길래 계속 추임새 넣어드렸다. 왼손, 오른손 바꿔가며 아버지 손을 잡고 걸었다. 공원에는 연인들, 가족들, 강아지랑 나온 사람, 텐트 안에서 쉬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랑 아버지도 가족들 범주에 포함된다. 아버지가 치매에 걸리는 바람에 뒤늦게 아버지랑 일상적이라고 할 수 있는 - 또는 일반적인 -  공원 산책 같은 걸 해본다. 밥을 같이 먹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 와중에 엄마는 약간 소외되고 - 엄마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 사는게 쉽지가 않다.
 
 12월 초에 아버지 인지검사가 있다. 인지검사 전에 장기요양등급 4등급 받는 건으로 데이케어센터 선생님들과 상담을 하고 4등급을 받게 된다면 '재가'  등급을 ' 요양' 등급으로 변경 신청해서 아버지를 요양원으로 보내는 게 가장 현실적인 선택이다. 가장 좋은 선택은 아버지가 나랑 같이 살면서 주간보호시설에 나가는 일이고 그 다음 좋은 선택은 내가 매주 토요일마다 아버지를 만나러 가서 일요일에 돌아오는 것이다. 강릉과 서울은 가깝고도 먼 거리다. 아버지는 혼자서는 지내기 어려운 사람이 됐지만 누군가 옆에 있기만 하다면 요양원에 갈 정도는 아닌 상태다.
 
 최후 또는 최종 선택으로 아버지가 요양원에 간다면 나는 아버지를 자주 찾아가진 않을거다. 내 역할은 거기까지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아버지를 요양원으로 보내는 선택이 꺼려지는 건 누군가 옆에 있으면 괜찮을 거 같은 아버지를 바라보는 자식의 정이다. 아직까진 아버지가 나랑 엄마는 알아보니까 젓가락질도 잘 하니까 맛있는 걸 먹으면 맛있다고 하니까. 공원 산책 중에 나무 사진을 찍는 나에게 나도 그거 해달라고 하니까. 거의 모든 명사와 이름을 잊었고 며느리를 사모님이라고 하지만 어떤날은 정신이 맑은 것 같기도 하니까. 답을 알지만 아직 시간이 남아 있으니까.  2번째 정답인 강릉이사를 추진할까? 답에 체크를 하지 않고 이리저리 머리만 굴리고 있다.

나도 그거 해달라해서 찍은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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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박 2일 아버지랑 같이 있다가 헤어지고 인생 첫서브웨이 샌드위치를 먹은 날, - 짰다. 앞으로 안 먹을 듯 - 청량리역에서 강릉가는 ktx 기다리면서 쓴다.

 어제 아버지가 냉장고 좌측 구석 커피 믹스 상자에 오줌 눈 걸 발견했다. 위쪽을 벗겨놓은 커피 믹스 상자를 요강으로 착각한걸까? 엄마도 같은 자리에서 한 번 목격 했다고 했으니 아버지가 화장실이 아닌 곳에 오줌 눈 게 확인된 것만 두 번째다. 오줌 닦아내고 세제로 장판 닦고 커피믹스 80개 정도를 수돗물에 헹구면서 '아버지, 화 내는 게 아니에요, 오줌을 화장실에 눠야지 여기다 누면 어떡해요.' 계속 떠들었다. 아버지는 본인이 그럴일이 없다면서 바락바락 우기다가 아버지 혼자 사는 집에 아버지가 아니면 누가 그러냐는 내 얘기를 듣고 우기기를 멈췄다. - 나랑 아버지랑 같이 멈췄다고 봐야겠지. - 아버지가 오줌 싼 자리에 식탁을 집어 넣었다. 엎으려 들어가지 않으면 그 자리에 갈수 없으니 앞으로 그 자리엔 오줌 누지 않길 바란다. 내 바람대로 됐으면 좋겠다. 락스+ 페브리즈, 엊저녁부터 창문을 열어뒀음에도 오늘 오후에 아버지 집을 나올 때까지 아버지 집에서는 찌린내가 났다.

 어제 저녁엔 육개장을 먹고 오늘 점심엔 장어를 먹었다. 아버지는 지난주보다 먹는 모습이 더 어설퍼 보였다. 순대국만큼 익숙하지 않아서인가? 아버지는 본인이 뭘 먹는줄도 모르는데, 장어를 먹을 때보다 기본으로 나온 된장국에 밥 말아서 먹는 게 더 편해 보이는데, 장어집에 간 건 아버지랑 같이 먹은 가짓수를 늘리기 위한 내 욕심일 뿐인가, 생각했다. 장어 구워주던 아주머니가 아버지랑 내 대화를 듣고 이버지가 치매인 걸 알았고 나랑 눈 마주쳤을 때 서로 얼굴로만 웃었다. 앞으로 아버지랑은 순대국만 먹기로 한다. 아버지는 치매 걸린 이후로 밥 먹을 때 냅킨을 콧구멍에 자꾸 갖다댄다. 콧물이 흐른다고 느끼기 때문인데, 실제로 콧물이 나진 않는다. 예전엔 그런가보다 했는데 요즘은 그 모습을 보면 속으로 화가 나기도 한다. 내가 화 날 이유가 있나? 아버지가 알츠하이머성 치매란 게 짜증나서?

 지난 수요일에 술 먹고 아버지랑 통화하다가 아버지한테 짜증을 냈다. 아버지도 목소리를 높였다. 나는 많이 취했기 때문에 언성 높이며 통화했던 이미지만 남았다. 다음날 통화 시간을 확인해 보니 6분이었다. 내가 만취 했을 때의 애증 시간. 아버지와 나의 거리. 고작 6분. 다음날 아침에 아버지가 어제 본인이 화를 낸 것 같다고 하길래. 그런 일 없고 다 괜찮고 잘 하고 있다고 했다. 아버지에게도 본인이 언성을 높인 이미지는 남아 있었나보다. 아버지는 그 통화를 영영 잊었지만 나는 여기에 기록으로 남겨 놓으니 영영 잊지 못할지도 모른다.

 아버지 상태가 점점 안 좋아지기 때문에 일요일에도 돌봄 서비스를 하는 데이케어센터를 알아봤는데 좀 더 적극적으로 알아봐야겠다. 요양병원은 아직 너무 이르다. 엄마랑은 계속 얘기 중이고 동생에게도 이런 상황을 전달했다. 근데 어쩌면 요양병원이 이르지 않은건지도 모른다. 이것저것 많이 알아봐야겠다.

 장어 먹고 아버지랑 한참 걸었다. 아버지가 이런저런 얘기를 혼자서 떠들다가 '이렇게 살아 뭐하나 생각이 들지만 살아야지.' 라고 했다. 왜 살아야 되는데요? 물으니 대답을 못하길래. 살았으니까 살아야지요. 했다. 아버지가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게 약간 놀라웠다. 내가 살아야 한다는 글을 많이 쓰는 게 아버지 유전인가? c8 유전자.

 아버지랑 한 동네 사는 아버지 친구가 한 명 있는다. - 아버지한테 잘해주는 정말 고마운 아저씨다. - 아버지가 그 아저씨 얘기를 자꾸 하면서 전화도 안 한다면서 짜증을 냈다. 그러면서 지갑이랑 텔레비젼 리모콘을 번갈아 들면서 여기서 찾으면 된다고 했다. 휴대폰이 어떻게 생긴건지도 모르는 사람이 된 아버지 전화기로 그 아저씨한테 전화했다. 잠깐 통화하더니 친구한테 간다고 해서 나도 아버지 집을 나왔다. 그게 오후 세시다. 아버지 친구도 아버지한테 많이 지쳤을텐데. 그래도 가끔 아보지를 들여다 봐주시니 고맙다.

 우리 아버지는 정신이 나갔고 외롭고 살고 싶다.

 어제 집을 나와서 강릉역 가는 길에 비가 시작됐다. 서울가면 비 안오겠지 싶어서 비 맞고 15분을 빠르게 걸었다. 청량리역에 내렸을 때 비가 오지 않았다. 굿. 아버지는 이런 판단을 하지 않는 사람이 됐지. 오래전에.

 오늘 아침에 서서울호수공원을 계통없이 돌았다. 공원 사이즈랑 조경을 보면서 돈이 좋구나 서울이 좋구나 같은 걸 생각했다. 미루나무를 잊고 싶지 않아서 바닥에 떨어진 미루나무 잎을 찍었다. 한 친구에게 가을이 무슨색인지 물으니 낙엽색이라 했다. 나도 이미 낙엽의 나이다. 그럼 우리 아버지는 부서진 낙엽인가? 공원을 나와서 스벅에서 라떼를 마셨다. 스벅 회장이 극렬한 시오니스트라는데, 내가 이래도 되나 싶었지만 살아야지, 정신에 따라서 그냥 먹었다.

 일요일 아침. 한적한 찻집에서 커피를 마시며 전쟁도 인생도 사랑도 세상 모든 것이 끝이 언제일진 모르지만 끝이 있다는 건 안다는 일에 대해서 생각했다.

미루나무 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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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집에 오랜만에 왔다. 내가 담배 사러 나갔다 온 사이에 잠든 아버지 침대 옆에 누워서 쓴다.

어젯밤에 아시안 게임 야구랑 축구에서 한국이 금메달을 땄고 밤 사이에 중동에선 전쟁이 났다. 전 세계에 큰 전쟁이 두 개인 어지러운 세상이다. 나를 제외한 전 인류가 치매에 걸린 세상을 생각해본다. 아버지 때문에 스트레스 받아서 그렇다.

추석 연휴에 집에서 혼자 쉬었다. 아내는 영국에 갔고 엄마도 아버지도 연휴 다음주에 만나기로 마음 먹었기 때문이다. 가족이라는 책임감에서 잠시 떨어져있고 싶었다.

어제 엄마 집에 갔다. 오산 터미널에 내려서 엄마집까지 1.2킬로미터 정도를 걸었다. 오산은 중국 사람들의 도시다. 돈 벌어서 건물을 산 사람도 많다고 한다. 수 많은 양꼬치집과 젊은 외국인 여자가 그려진 다방과 술집, 미용실 간판을 보면서 오산은 한동안 인구가 줄어드는 문제는 없겠구나 생각했다. 중국도 저출산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으니 그것도 길진 않겠다. 그리고 대로변에 데이케어센터가 많이 보였다. 치매 문재는 전국 공통이다. 오랜만에 엄마 만나서 엄마가 차려준 저녁밥을 먹었다. 엄마 앞에서는 더 잘 먹어야 된다는 생각이 있다. 엄마는 65살 치곤 많이 늙었다. 젊어서 고생한 결과다. 그 결과물을 투자 실패로 절반 가까이 날리게 생겼다. 그 마음 고생으로 최근에 더 늙었다. 아이고 우리 엄마.

아침에 아버지한테 왔다. 어제 아침엔 통화를 했는데, 오후엔 전화가 안됐다. 단순히 전화기가 꺼진 거였으면 좋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아버지는 전화기에서 유심을 빼버렸다. 온 집안을 샅샅이 뒤지면서 10리터 쓰레기 봉투 다섯 개를 소비하고 쓰레기통까지 뒤졌지만 못 찾았다. 티월드에 가서 유심 다시 받으려 했는데 신분증이 없어서 안된다. - 티월드 네 군데를 돌았는데 연휴라 문을 안 열었고 마지막엔 전화 해보고서 영업중인 곳에 방문했다. - 다행인 건,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아버지 신분증을 엄마가 갖고 있다는 것이다. 10일이 아버지 병원 가는 날이다. 유심 문제는 그날 엄마가 진행하면 된다. 나는 조만간 평일 휴가 쓰고 서울 와서 아버지 핸드폰 해지하고 내 명의로 알뜰폰 개통해서 아버지한테 주기로 마음 먹었다. 치매에 걸린다는 건 본인 명의가 점점 없어지는 일이다.

아버지는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사람이 됐다. 내가 주말마다 올라오거나 일요일에도 운영하는 데이케어센터로 옮겨야 한다. 당분간 내가 주말마다 올라오면서 새로운 센터를 알아봐야 한다. 강릉에 일요일에도 운영하는 센터가 있다면  아버지 이사를 추진하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다.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사람이 된 아버지는,
뭐가 뭔지 모른다. 머리빗을 구두주걱으로 쓴다. 남의 말을 더 안 듣게 됐다. 한 음절씩 인지시켜도 문장을 이해할까 말까다.일상적인 대화가 불가능한 사람이 됐다. 점심 먹다가 이마가 왜 까졌냐 물으니 자동으로라고 대답했다. 티비로 프로 축구를 보는데 공이 어디 있는지는 모르고 유니폼 색깔만 하얀거 파란거 하면서 말했다. 아버지가 하얀거라 한 유니폼 색깔은 빨강이었다.
긍정적인 건, 많은 이름을 잊었지만 내 이름은 잊지 않았고 사람들 얼굴은 잊지 않았다는 것과 지금 사는 신월동에선 길을 잃어버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축구 보다가 '축구는 전쟁이다' 라고 쓴 플래카드가 화면에 잡히니까 따라 읽었다. 그러니까 한글 읽는 법을 잊지 않았다.

오늘 저녁까지 같이 먹고 강릉으로 돌아오려 했는데, 내일 점심까지 같이 먹기로 했다. 오늘 기차표를 취소하고 내일 기차표를 끊었다. 아내에게 아버지의 9월 전기요금 고지서를 찍어 보냈다. 요금 계좌이체 때문이다. 이런 별것 아닌 일들이 다 스트레스다. 어제 신었던 양말 오늘도 신길 다행이라 했더니 아내가 웃었다. 그걸로 오늘 최고의 위로를 받았다.

아버지 만날 때마다 너무 힘드네.

순댓국집 아버지. 뭔가를 먹는 동작도 많이 어설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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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월 16일, 분주했던 하루였다.

 10시에 머리 잘랐다. 아내는 나랑 다른 미용실에서 10시에 머리 잘랐다. 둘 다 네이버 예약하고 갔고 둘 다 미용실에 열 시에 연다는 걸 알았다. 이발소에선 아침 6시에 머리 자른적도 있지만 미용실은 보통 열 시에 오픈하는구나 생각했다.

 벌초 다녀왔다. 할아버지 한 분 할머니 두 분 무덤이 - 무덤을 산소라 하는 건 왜인가? 한국에서는 직계 조상의 묘를 산소라 한다는데..... - 강릉에 있고 나는 할아버지의 장손인데 강릉에 산다. 명절 가까워지면 벌초하러 가서 작은 아버지 도와야 한단 생각은 하지만 먼저 전화하게 되진 않는다. 손가락이 움직이질 않는달까. 작은아버지 쪽에서도 어떤 부담이 - 본인 부모님 무덤이니까... -  있어서 나에게 흔쾌히 연락하진 않는다.

 벌초 날짜도 아버지가 강릉에 온다는 것도 전날 알았다. 엄마를 통해서 그 사실을 알고 나니 jj작은 아버지, 강릉 작은어머니에게 연이어 전화가 왔다. 다른 건으로 둘째 이모랑도 두 번 통화했다. 어른들과 통화하고 나면 자연스럽게 안도의 한숨을 쉬게 되고 마음은 탈수 직전이 된다.

 구미 사시는 큰 고모가 강릉에 왔다. 아버지 쪽 오 남매가 다 모이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려나? 이번 벌초에 그 정도의 의미는 있었다. 근데 아버지는 누나도 동생들도 못 알아보는 것 같았는데...

 이번 벌초 행사를 통해 얻은 정보 등(무작위)
 - 막내 삼촌 올 초에 회사 그만둠. 회사 스트레스로 11년간 신경정신과 다닌 얘기를 이제 와서니까 얘기할 수 있다고 함.(71년 생인데 옛날 사람인건지, 그런 자존감 때문에 대기업에서 높은 자리까지 간 건지)
 - 벼 이삭이 맺힐 때 즈음 날이 너무 더워서 강릉 일부 지역의 벼농사 결과물에 검은 벼가 많다고 함.(쌀값이 만만치 않겠네요, 삼촌에게 물으니 정부 비축분도 많지 않다고 함. 이렇게 위기는 서서히 현실이 되고 나 또한 물 끓는 양은 냄비 안의 개구리)
 - 아내가 가족 행사에 참석했다. 쏘리 앤 땡큐(쏘리가 먼저 나오네)
 - 엄마가 바닷가에 발 담그고 놀았음 사진도 찍었다.(나도 기분 안 좋지만 피눈물을 흘려서 번 돈이라도 투자 실패는 엄마 본인 책임임)
 - 아버지랑 경포 바닷가에서 셀카 찍음.(엄마랑도 찍을 걸)
 - 추석 때 차례 지내러 안 가기로 함.(그 다음 주말에 오직 엄마만 보러 갈게요)
 - 아버지랑 통화할 때 강릉 오고 싶어하기에 한 번 모셔와서 태어난 동네 보여드릴까 싶었는데,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알게 됐다.(아버지는 본인이 현재 서 있는 곳이 어딘지 모르는 사람이 됐다.)

 무덤 앞에 음식 차려놓고 절 하기 전에 엄마가 내년 벌초 때도 또 오겠다고 무덤에 대고 말했다. - 엄마 안 그래도 되는데...- 엄마는 본인의 투자 실패가 조상에게 못한 탓이라 생각할 수도 있는 사람이니까 그냥 두자.

 아버지는 멍했다. 산소에서도 바닷가에서도 작은집에서 밥 먹을때도 멍했다. 누나 이름도 동생들 이름도 며느리 이름도 모른다. 고모들은 약간 속이 상했던 것 같다. 그래도 누나랑 동생인 건 아는 것 같았다. - 모르는 것도 같았다. - 멀리 있는 내 아내를 가리키며 '와이프' 라고 했다. 우리 아버지 와이프란 단어는 잊지 않았네. 많이 썼던 말이기 때문이겠지. 오랜만에 만난 아버지에 대한 아내의 소감은 '평범한 치매 노인' 이었다.

 가족 모임 끝나고 아내랑 잠깐 시간 보내고 남현이랑 남현이 여친 - 남현이 본인이 애인이란 말대신 여친이란 말을 씀 - 잠깐 만났다. 친구가 차 끌고 당일치기로 강릉에 오고 추석 연휴에는 여수에 놀러 가는 것 나랑 카톡할 때 톡 안에 어떤 애정이 있는 것이 사랑의 힘이라 생각한다. 연애의 힘인가? 사랑이라 생각하는 착각의 힘? 아무튼 힘이다. 연애하는 친구가 살짝 부럽기도 하네.

 2023년 무력한 내 삶의 가장 큰 원동력은 아내인가 턱걸이인가? ㅋㅋㅋ

 사랑인가? 물으니 사랑이지만 사랑인가? 묻는 순간 사랑이 아니기도 하다.

 답이 정해졌지민 정해지지 않은 질문

 말이 없는 건 죽은 자 뿐인가? 아버지를 보면서 이 질문을 떠올린 날이다.

 아내가 제발 복권 좀 사라는 내 소원을 들어준 날이었다는 걸 기억해 둔다. - 결과는 낙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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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말에 아버지 만나고 왔다. 먼저 만났을 때보다 더 수척해졌다. 위암 수술 영향일 뿐 몸에 어떤 문제가 있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밥을 먹는데, 억지로 다 드실 필요 없다는 말을 자꾸하게 되고 아버지도 알았다고 하면서 억지로 다 먹지는 않는다. 이렇게 대화가 통하는 일은 좋다. '아버지, 조기 축구 사람들 중에 아버지 좋아하는 사람이 없으니까 일요일에 심심해도 거기 가지 마세요.' 본인도 그 사실을 알고 알았다고는 하지만 다음주 일요일에 아버지는 거기 또 가겠지. 이것도 대화는 통화는 일인가? 아버지가 밥을 많이 남기기 때문인지 나도 억지로 다 먹지 않는다. 나도 올해들어 먹는 양이 좀 줄었다. 여전히 술 마실 때는 많이 먹게 되지만 어렸을 때 많이 먹던 것 생각하면서 배가 터지도록 먹지 않아도 금방 배가 부르다. 나이 먹어서 그렇다. 곧 마흔 다섯이 된다. 아버지가 마흔 다섯이었던 건 1997년 정도인가.

 우리집은 90년대 초반엔 이미 돌이킬 수 없게 망했고 97년 말에 IMF 사태가 났고 나는 98년 1월에 군대를 갔다. 아버지는 대충 마흔 살 즈음부터 수입이 없었네. 지금 마흔 살은 굉장히 팔팔한 이미지지만 - 40대 초반에 첫 결혼을 하는 사람들도 많으니까. - 아버지 세대의 마흔 살은 뭔가를 새롭게 시도하지 않을 나이였을 것 같다. 아버지 나름대로는 어떤 노력이 있었을 거라 생각한다. 
 
 식당을 나가려고 일어서는데, 아버지랑 같이 사는 모습이 그려지지 않았다. 서울로 직장을 옮긴다는 내 계획이 실현된다면 신월동에서 대중교통으로 왕복 3시간 20분 출퇴근을 하고 퇴근길에 운동하고 집에 돌아와서 아버지랑 잠깐 대화를 나누고 아버지 간식 챙겨주고 같은 방에서 자고 아침에 씻고 출근하면서 아버지에게 데이케어센터 잘 다녀오시라고 하고 토요일 저녁이랑 일요일에는 아버지랑 호수공원을 산책하기도 하고 맛있는 거 사 먹는 반복. 그 모습이 그려지지 않은 게 아니라 내가 그렇게 살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게 맞다. 아버지를 매일 보는 삶을 내가 감당할 수 없을 것 같다,는 공포 또는 확신.

 그래서 슬퍼졌다. 아내에게 카톡을 보내고 나니 또 슬퍼졌다. 9월 시작하고 달력 넘기자 마자 탁상 달력 9월 22일 칸에 '어일우 연가 쉬고 싶다' 라고 적어 뒀는데, 마흔 다섯의 나는  진짜로 좀 쉬고 싶다.

아버지는 치매 걸리기 전에도 아기 같이 해맑은 구석이 있었고 지금도 그렇다. 직접 보고 왔지만 사진으로 봐도 건강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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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는 토요일, 즐거운 토요일, 출근 안하는 날은 항상 좋은 날이다.

 춘천 가서 친구랑 점심 먹고 왔다. 단지 점심을 먹으려고 스마트폰 음악을 블루투스로 들을 수 있는 자동차를 타고 강릉에서 춘천까지 당일치기로 왔다갔다 할 수 있는, 바로 지금이 나의 호시절이다.  

 친구는 나보다 두 달 늦게 입사 했고 정선에서 같이 직장 생활의 초년 시절을 보냈다. 정선에서는 질 떨어지는 팀장 새끼들을 만나서 개고생을 했지만 태백에서는 좋은 팀장들을 만났고 가족이 있는 춘천으로 옮긴지 4년째인데, 춘천 근무도 행복하다고 한다. 행복해서 다행이다. 세상 많은 일이 어떤놈과 함께 하느냐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빛과 어둠으로 갈린다. 팀장 복 없기는 나도 매 한 가지긴 했지만 그 친구 정도는 아니다. 나도 현 직장으로 옮기고서는 행복한 편이다.

 친구는 교육환경이 좋은 동네 아파트 단지에 살고 있다. 친구는 내년에 학교에 가는 7살 - 70개월 밖에 안 살긴 했지만, 윤석열 나이로는 5살이네 - 딸이 있다. 아내와 맞벌이를 하고 직장에선 칼퇴근을 한다. 아내 직장이 12시 출근 21시 퇴근이라 5시 퇴근하고 나서 21시까지 아이와 함께 한다. 아이와 함께 있는 게 즐겁기도 한데, 지겹기도 하고 아이가 학교에 가면 지금보다는 본인만의 자유가 생길 것 같다고 했다. 아이는 아빠 엄마를 적절히 닮았고 귀여운 편이었다. 나한테도 말을 잘 걸어줬다. ‘최애의 아이’ - 애니를 보지 않았다고 한다. - 오프닝 곡을 틀어줬더니 한글도 이제 알기 시작했다는 아이가 일본어 노래를 중간중간 따라 불렀다.

 친구랑 먹은 숯불 닭갈비는 아주 맛있었고 - 친구는 항상 춘천 놀러오면 숯불 닭갈비 사준다고 했더랬다. - 커피를 마시러 간 카페는 야외 공간을 포함해서 엄청난 규모였다. 춘천은 수도권이 가까워서 그런가? 생각했다. 드립 커피를 두 잔 마셨는데 플라스틱컵은 에러였지만 커피는 맛있었다. 나를 포함해서 정말 많은 사람들이 토요일 오후 도심 외곽의 카페에서 커피를 마실 정도로는 호시절을 보내고 있다.

 친구랑은 옛날에 같이 일하던 시절 얘기랑 현재 하고 있는 일들에 대해서 많은 얘기를 했다. 같은 업종에 있다는 건 그런 거다. 일로만 따지면 내 직장은 아주 행복한 편이다. 일 얘기 중간중간에 가족들의 안부를 묻고 앞으로의 계획들을 얘기했다. 친구란 그런 것이다. 친구네 집 앞에서 담배 한 대 피우고 헤어졌다. 친구는 나를 무척 반겨줬다. 아이 돌보느라 또래 친구들을 따로 만나는 일이 오랜만이라 그런가보다 생각했다. 나도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참 반가웠다. 위로가 됐다. 춘천까지 갔다는 것과 술을 안마셨다는 걸 빼면, 평범하게 친구를 만난 하루였다. 강릉에서 친구랑 술 마셨으면 진짜 평범한 하루였나? 보편적인 거, 평균적인 거, 평범한 걸 생각해 본다. 이런 생각한지 오래됐다.


 오늘은 아침에 일어나서 보헤미안 경포점에서 모닝세트에 커피 추가해서 마셨다. 올 여름 이후로만 모닝세트 먹으러 다섯 번은 간 것 같네. - 아내는 자고 있다. - 강문해변에 생겼다는 머슬비치에 가봤다. 주차할 곳이 호텔 주차장 밖에 없어서 내가 일부러 찾아가는 건 오늘이 마지막일 것 같고 지역주민들이 산책하다가 운동하기는 좋을 것 같았다. 턱걸이 몇 개 하고 집 근처까지 와서 오랜만에 농구를 했다. 오랜만에 해서 그런가? 자유투도 삼점슛도 잘들어 가서 기분이 좋았다. 마지막 삼점슛을 클린으로 넣고 집에 와서 씻고 세탁기 돌리고 아내가 집을 나가자마자 라면 끓여 먹고 지금까지 대충 10시간 누워 있었다. 배캠 듣다가 잠들었는데, 아내에게 전화가 와서 나에게 어떤 부탁을 했다. - 나한테 또 부탁을 했네. - 잠이 안 깼으면 저녁 안 먹고 그냥 잘까도 싶었는데, 잠이 깨는 바람에 피자 시켜 먹었다. 나는 피자를 좋아한다. 치즈의 짠 맛이 좋다. 보통은 동네에서 가장 싼 피자집에서 시켜 먹는데, 얼마전에 이제는 그러지 않기로 마음먹었기에 피자헛 피자를 시켰다. 맛이 없다. 다음엔 할인도 거의 없고 세트메뉴 같은 거 없는 파파존스에서 시키자. 배달 시키면서 싸거나 할인 많이 해주는 곳을 찾는 게 보편적이긴 하다. - 이러면서 보편적인 걸 또 생각해 본다. - 최근 네 달 사이에는 아내가 좋아하는 페리카나 양념치킨도 할인 적용으로 포장 2만원 이하일 때만 두 번 사 먹었다. 이렇게 하루가 갔네. 내일 출근하면 또 바로 퇴사하고 싶을까? 궁금하네.

 친구의 삶은 그 나름대로 보편적인 삶이고 내 삶도 내 나름대로 보편적인 삶이다. 그 뿐이다. 그러니 세상에 화내지 말자 사람에게 화내지 말자.

 아버지랑 두 번 통화했는데, 아버지는 오늘 무탈한 하루를 보낸 것 같다. 굿.

 아침에 커피 마실 때, 교회가기 전에 모닝세트 먹으러 온 네 명의 아주머니가 돌아가면서 며느리 욕을 하길래, 엄마 생각이 나서 전화를 해봤다. 엄마한테 아주머니들 얘기를 했더니 엄마가 웃었다. 일단 엄마는 며느리 욕할 친구가 없고 - 이모들이 있나? - 며느리 욕을 할 만큼 며느리에 대해서 아는 게 없다. 암튼 엄마가 웃어서 좋았다. 엄마가 웃었던 그 순간을 기억해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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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 집 벽에 5월까지는 커다란 달력이 걸려 있었다. 날짜, 요일 개념은 없지만 아버지가 그 달력에 동그라미도 치고 '병원' 같은 단어를 적어 두기도 했고 내가 손가락으로 날짜를 가리키면서 오늘은 무슨 요일이라고 하면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6월에 아버지한테 갔을 때, 달력이 없어졌다. 날짜 가는 줄 모르고 한 장씩 찢다가 끝까지 넘어가 버린 것이리라. 새 달력 구해 드려야지 생각은 몇 번 했는데, 그러지 못하고 있다. 없어도 그만인 물건이니 간절하게 생각하지 않는건가? 내 일 아니니까, 란 생각인가?

 일요일 오후에 아버지랑 1시간 통화했다. 이렇게 길게 통화한 경우는 처음이다. 날짜랑 요일, 학교 가는 날, 지금은 밤인지 낮잊지 계속 헷갈려 하길래 계속 알려주면서 얘기 들어줬다. 마지막엔 내 목소리가 살짝 높아지기도 했지만 통화는 온화하게 잘 끝났다. 아버지 얘기를 잘 들어보니까 점심 때 즈음 조기축구 멤버들이 밥 먹는 식당에 혼자 찾아가서 그들과 함께 밥을 먹었고 밥을 먹으면서 그들이 따라주는 술을 마셨고 집에 돌아와서 술기운에 낮잠을 잤는데, 긴 낮잠을 자는 바람에 머릿속에 깊은 혼란이 온 것 같다. 외로워서 그런거다.

 지금 다니는 데이케어센터가 참 좋긴한데, 일요일에도 문을 여는 곳으로 옮겨야 하나, 생각했다.

 내일이 아버지 병원 가는 날이다. 위암 수술 경과를 보게 된다. 벌써 수술하고 6개월이 흘렀다. 올해 초에 정말 힘들었지. 아버지 건강 상태로 봐서 결과는 좋을 것 같다. 오늘 내일 바빠서 동생에게 부탁했는데, 동생이 알겠다고 한 것을 엄마가 본인이 맡겠다고  했고, 동생도 엄마한테는 회사일이 바쁘다고 한 모양이다. 뭔가 기분이 안 좋다. 지난주 토요일에 아버지가 정확한 말로 '준석이 본지 오래됐어.' 했다. 동생은 애도 둘이고 삶이란 건 누구나 다 바쁘지. 그래도 기분이 안 좋다. 서울로 직장 옮기는 걸 계속 추진해야겠다.

 월요일에 출근하자 마자 회사 그만둘까 생각했는데, 순식간에 수요일이다. 다들 그러고 사는거겠지. 근데, 진짜 그만두고 싶다. 다 때려치우고 싶다. 산에 들어가고 싶다는 게 아니라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상태로 가만히 있고 싶다. 그게 직장인들의 주말인건가? 곧 마흔 다섯살이 되는데, 이제야 나도 보통 직장인과 비슷한 생각을 하는건가? 모르겠다.

 어제를 포함해서 최근에 아내한테 두 번 화냈다. 아내가 부탁이란 말로 자꾸 본인 일 심부름을 나한테 시킨다. 어제는 울화가 치밀어서 밤 10시에 와퍼 두 개 시켜 먹었다. 체할뻔했다. 울화가 치미는 사랑이란 말을 가끔 하지만. 나를 폭식으로 몰고가지 마라. 그러지 마라. 그러지 마라. 날 그냥 내버려둬라. 복권 사라는 얘기 말고 내가 너에게 하는 유일한 부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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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에 기차 타고 서울 갔다가 새차 뽑은 거 찾아서 토요일 밤에 내려왔다. 친구들도 만나고 아버지도 만나고 엄마도 잠깐 만나는 일정이었다.

데이케어 센터 선생님들 만나서 아버지 관련 얘기를 주고 받았다. 아버지는 일단 건강하다. 내가 보기에도 센터 선생님들이 보기에도 현재 아버지의 치매는 정체기다. 이 정체기가 쭉 오래 갔으면 좋겠다고 간호부장 선생님이 말했다. 내 마음은 잘 모르겠다. 센터의 간호부장 선생님이 아버지가 처음 센터에 갔을 때부터 아버지에게 많은 신경을 써 준다. 어떤 결이 맞는거겠지. 항상 고맙습니다.

아버지랑 순대국 먹는데, 아버지가 연신 깍두기를 집어 먹으면서 이런거 먹은지가 언젠지 모르겠다고 반복해서 말했다. 데이케어센터 식단표를 보니 배추김치가 80프로 열무김치가 20프로다. 깍두기를 오랜만에 먹은 게 맞다. 아버지가 영 정신줄을 놓은 건 아니라 안심인가? 잘 모르겠다.

사물의 이름을 잊은 것을 시작으로 시작된 아버지의 치매 증상은 최근에 사람 이름도 잊는 것으로 번졌다. 밥 먹으면서 아버지한테 몇 가지 이름을 확인했다. 내 이름, 동생 이름, 엄마 이름은 잊지 않았다. 그리고 나머지 이름은 다 잊었다. 혹시나 싶어서 동생 큰 아이 이름을 물어봤는데, 어호연이란 이름을 잊지 않았다. 아버지 인생에서 마지막으로 외웠을 이름이다. 아버지 인생에서 손주가 태어난 것이 굉장히 큰 사건이었구나, 싶었다. Fucking blood. 혈육…..이란 단어를 떠올렸다.

엄마한테 잠깐 들렀다. 막내 이모 생일이라 함께 밥 먹고 돌아온 둘째 이모랑 이종사촌 동생, 셋째 이모랑 이모부를 만났다. 잠깐 만났으니까 잠깐 대화했고 그 대화가 무탈하게 흘러갔고 약간의 농담과 걱정과 인간에 대한 존중이 섞여 있었다. 운전해서 강릉 돌아오는 차 안에서 어떤 만족감이 있었다. 인간은 서로에 대한 존중 같은 것에서 만족감을 얻는다. 그 존중의 방법이 커뮤니케이션이다.

금요일 밤에 남현이 만났을 때, 예전에 남현이에 대해서 쓴 일기를 보여줬다. - 나도 그런 걸 쓴 줄 몰랐다가 최근에 알게 됐다. - 투박하게 쓴 글인데, 남현이가 좋아했다. 내가 친구에 대한 글을 쓴 게 나에게는 우정의 증명 같은 거고 친구가 그 글을 잃고 좋아한 게 커뮤니케이션을 통한 만족감 같은 거다. 남현이가 지금 만나는 애인 잘 만난거 같다고 얘기했다. 남현이는 내가 빈말 잘 안 하는 걸 아니까, 본인의 연애가 종중 받는걸 느꼈을거라고 생각한다. 선비처럼 살 수는 없지만 욕보다는 좋은 말을 많이 해야지 생각했다.

영일군이 새차 사는 거 전적으로 도와줬다. 영일군은 직업상 자동차랑 관련된 일로 친구들 도와주는 거 좋아하긴 하지만 일정 때문에 술 한잔 못 사주고 내려와서 미안하네. 강릉으로 출발하기 전에 고맙다고 문자 보냈는데, 별 말씀을 답장이 왔고 담에 내가 한 잔 사기로 했다. 영일이가 운동 얘기 자동차 얘기 어린이 얘기하면 나는 맞장구 쳐주면서 들어주는데, 이런 것도 존중의 방법이다. 일단은 워낙 친구니까 뭔 얘기든 다 들어주겠지만.    

31일이 아버지 위암 수술 6개월 경과 건강 검진이다. 월말에 회사에 좀 바쁜일이 있긴한데, 방법을 찾아서 30일 밤에는 올라가 봐야겠지. Fucking blood. 아버지, 금방 또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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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절이다. 인터넷 커뮤니티에 떠도는 짤 중에 10대에 독립운동하다가 붙잡힌 조상님들 흑백 사진이 있다. 일본애들이 촬영한 범죄자 머그샷 모음이다. 다들 눈빛이 총명하고 조선 독립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향하고 있다. 나라 잃은 빡침을 겪는 사람들만 할 수 있는 눈빛이다. 고맙습니다. 덕분에 오늘 제가 삽니다.

집, 회사, 운동 또는 술의 반복으로 무력하게 보내고 있다. 앞으로도 쭉 이럴까봐 두렵다. 원인은 미상인데, 미상이 아니다. 내 뜻대로 돌아가지 않는 주변일들 때문이다. 채워지지 않는 욕망 때문이다.

올들어 k리그 하이라이트를 유튜브에서 보기 시작했다. 박지성이 맨유에서 뛰던 시절 이후로 참 오랜만에 - 참 오래도 살았다. - 축구에 관심이 생겨서 후반기 들어 강릉종합운동장을 홈구장으로 쓰는 FC강원 홈경기를 세 게임 봤다. 아는 형이랑 한 번, 아내랑 한 번, - 수원 삼성 응원단 짱 - 친구랑 한 번 봤다. 이번 주말 경기도 표는 사 놨는데, 누구랑 보게될지 모르겠다.

FC 강원은 재작년에 2부로 떨어질 뻔 했는데, 최용수가 감독으로 와서 극적으로 팀을 1부에 잔류 시켰고, 작년에는 안정적으로 1부리그에 남았다. 올해는 남은 게임 잘 치러도 1부 12팀 중에 10위다. 2부로 갈 가능성도 있는 10위까지는 무조건 확정인 만큼 못했다. 10위나 11위를 해야 1부리그 잔류를 두고 벌이는 데쓰매치라도 할 수 있다. 대표이사가 김병지로 바뀌고 시즌 중에 감독이 윤정환으로 바뀌면서 어떤 팬들에게는 스포츠에 정치가 개입하면 어떻게 팀이 맛탱이가 가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라는 말을 듣기도 하는데, 그 내막은 알기가 어렵다. - 정치란 비밀스러운 부분이 90프로니까 - 감독도 코치도 선수도 직업이 축구인 사람들인데, 얼마나 이기고 싶겠나. 그렇지만 상대방도 이기고 싶다는 것이 인간 세계의 생리와 닮았다. 직업의 영역에 즐기면서 같은 건 없다. 그래서 영화 머니볼이 명작이다. 윤정환 감독은 어느날의 인터뷰에서 선수들의 절박함이 없다는 얘기를 했고 강원은 그 후에도 몇 게임을 비기거나 지기만 하다가 지난 주말에 현재 1위 팀을 상대로 이겼다.

포메이션, 선수 교체 등 감독의 작전이 잘 맞아 떨어졌고 상대팀은 요즘 잘 안풀리는 중이었고 선수들의 승리에 대한 절박함도 있었다. 적절한 비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지난 주말 경기는 운전에 자신있는 사람이 대형면허 따듯 순조로웠다. 강원 골수팬은 아니지만 지금 강원도에 살고 있고 상대팀보다 약팀이니까 강원이 이기기를 바랐다. 첫 골, 두 번째 골이 들어갈 때 소리를 질렀다. 쌓여있던 어떤 것이 약간은 해소되는 느낌을 받았다. 감독도 선수들도 팬들도 다 기뻤다. 이긴다는 건 그런 것이다.

나는 누구와 경쟁하나? 나는 어떤 목표를 향하고 있나? 내게는 원하는 목표를 위해 성실함을 발휘해서 성취한 경험이 있나? 지금 기분엔 없는 것 같다.

사람이 늙는 시기가 있다고 하는데, 요즘 내가 그런것 같다. 거울을 들여다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기후 파괴가 덮치지 않는 곳이 없고 일단 피해는 가난한 사람들부터 받는다. 아내가 경차 타고 싶다고 해서 경차 새차로 계약했다. 집 주인이 터무니 없는 가격에 내 놓은 집은 아무도 보러 오는 사람이 없다. 회사에선 직원들과도 기간제 선생님들과도 별로 말을 섞고 싶지 않다. 나랑 같은 직종에 있던 형님들 둘이 최근에 죽었다. 안면도에서 근무하는 형은 근무기간 20년을 채우자 마자 명퇴를 결정했다. 아내 동료는 우리보다 10살 어린데, 암진단을 받았다. 아버지는 한결같이 엉망이고 나는 그런 아버지에게 마음쓰는 일에 점점 지쳐간다.

아내는 책이라도 읽으라고 하지만 술을 먹는게 낫다. 그런데 최근에 술을 좀 줄였다. 그래서 무력한가? 그건 아니다. 퇴근하고 운동할 때는 기분이 좋은데, 운동 마치면 곧바로 기분이 다시 다운된다. 축구 경기도 경기가 끝난 날에는 흥분이 남아 있는데, 다음날이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술도 마실 때만 기분 좋은 거랑 비슷하다.

무력감이야 평생을 따라다니고 있는 것이고 이러다가 괜찮아지곤 하는데, 이번에는 괜찮아 질 것 같지가 않네. 잼버리 케이팝콘서트가 끝난 상암 월드컵 경기장 잔디 같은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괜찮아지면 괜찮아지는데로 아니면 아닌대로 살아보기로 한다. 욕망을 관철시키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게 되는 것을 생각한다. 그래도 삶은 계속 된다는 것도. - 운동화를 사야하고 머리를 잘라야 하고 차에 기름을 넣어야 하고 밥도 먹고 살아야 해서 너무 오랜만에 라면을 끓여 먹었다. -

주말에 아버지한테 갈까하다가 오늘 축구표를 예매했다. 아버지한테 별로 미안하지가 않네. 다음주에 보면 되니까 그런가?

내 마음 고요하고 어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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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요일에 서울 가서 아버지 집에 들렀다가 에어컨 틀어놓고(7시간 후 꺼짐) 나와서 친구 만났다. 친구 만나던 중에 데이케어센터에서 돌아온 아버지에게 전화와서 '에어컨 건드리지 마시고 내일 아침에 만날거다' 라고 했다. 아버지가 아이처럼 좋아했다. 아버지가 날 만나는 일에 아이처럼 좋아하는 반응을 보일 때, 내 마음에는 커다란 부담과 그와 같은 크기의 안심이 함께 자리한다. 둘 다 무겁다. 일요일 아침에 아버지를 만났다. 에어컨 리모콘에 건전지가 사라졌다. AAA건전지가 들어가는 리모콘인데, AA건전지가 방에 나뒹굴고 있었다. 아버지 옷장을 찾아보니 아버지가 리모콘에서 빼 놓은 AAA건전지가 있었다. 토요일 오후에 아버지는 혼자 에어컨 리모콘을 만지작 거리다가 뭔가 잘 안되서 건전지를 빼고 새 건전지를 사서 끼워보려는 시도까지는 했다, 는 걸 알 수 있다.
 
 아버지가 배고프다 해서 오전 10시에 순대국 먹었다. 아버지가 맛있다고 했다. 아버지는 이번에도 한 그릇 다 먹지는 못했다. 위암 수술의 영향인데, 많이 먹지 않는 편이 좋다고 생각한다. 아버지 뚝배기에서 고기 꺼내서 간장 소스에 찍어드렸더니 맛있다고 하면서 잘 드셨다. 아버지는 소스에서 약간 단맛이 나는 것도 얘기했다. 아버지랑 밥 먹는 건 이 정도면 만족한다. 은행에 가서 돈 찾아서 지갑에 채워드렸다. 지갑에 돈이 없으면 불안한 어떤 사람들의 심리를 정확히는 모르지만 아버지는 카드 쓰는 것보다 현금 쓰는게 익숙하고 카드 쓰다가 카드 잃어버리는 것 보다 현금 쓰는게 나은 것 같다. 슈퍼에 가서 카스타드 케잌이랑 과자 두 가지 골랐다. 과자 중에 '사브레'는 '단거...'라고 하면서 아버지가 골랐다. 
 
 에어컨 9시간 후에 꺼지도록 설정하고 아버지 집을 나왔다. 3시 기차를 탔다. 기차 타기전에 아버지한테 전화해서 에어컨 건드리지 말라고  했다. 아버지는 알았다고 했다. 리모콘을 옷장에 넣어뒀지만 아버지는 금방 찾아낼거다. 아버지가 집에 도착했냐고 하길래, 거의 다 왔다고 했다. 앞으로 두 시간을 더 가야하지만 청량리역까지 왔으니 거의 다 온거다. 어제 저녁이랑 오늘 아침에 아버지랑 통화했다. 아버지는 어제 서울에 갑자기 폭우가 쏟아진 걸 알고 있었다. 에어컨은 건드리지 않았다고 했는데, 진짜 안 건드렸는지는 알 수가 없다. 내가 에어컨에 관해서 물어보니까 자꾸 핸드폰이 주머니에 있다는 얘기를 했다. - 손에 들고 나랑 통화하고 있는데. -
 
 아버지는 에어컨을 정말 좋아하던 사람이다. 그런데, 전기 콘센트에 플러그 꼽는 법도 잊고 리모콘을 다룰 줄도 몰라서 혼자서는 에어컨을 틀지 못한다. 누군가는 딱하다고 할 것이다. 우리 아버지 딱한가? 우리 아버지 딱하네. 사상 최고의 더위에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 더워서 죽는 일을 생각한다. 그게 우리 아버지다. 데이케어센터 선생님들이랑 한 때는 같이 살았던 가족들이 있어서 지독하게 외롭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 아버지 혼자 어떻게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 8월 말에는 병원도 한 번 가야하니 8월에는 아버지를 두 번은 만나야겠다. 그런다고 달라질 건 없지만 그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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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달엔 타이밍이 잘 안 맞아서 아버지를 못 만났다. 이번주 토요일에 올라갔다가 일요일에 내려오는 기차표를 끊어놨다. 아버지 치매 컨디션이 안정적인 것 같아서 하루 세 번 이상 하던 전화통화를 두 번으로 줄였다. 내가 먼저 전화할 때랑 아버지가 먼저 전화할 때가 있는데, 아버지가 먼저 전화할 때가 아버지 컨디션이 더 좋다고 봐야겠지. 최근에는 내가 먼저 전화할 때가 많은데, 그냥 그런가보다 한다.
 
엄마는 2주 전에 아버지한테 다녀왔다. 당신도 아버지 걱정을 많이 하고 있다는 얘기를 나에게 했다. 걱정 좀 덜 했으면 좋겠다고 내가 답했다. 엄마가 아버지에게 신경 쓰는 건 같이 살았던 정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둘째 이모가 자꾸 엄마에게 아버지 돌보란 얘기를 하다고 한다. 내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 한 엄마가 아버지를 돌볼 일은 없을 거니 엄마가 그런 얘기 좀 안 들었으면 좋겠다. 또 언젠가는, 동생이 엄마가.... 어쩌구 저쩌구 하길래 아버지 일에 엄마를 자꾸 연루시키려고 하지 말라고 - 문자로 보냈으니 동생이 내 짜증을 알았을 것 같진 않다. - 했더니 알았다고 했다. 동생은 나에게 섭섭했을까? 아닐거라고 생각한다.
 
어젯밤에 아버지한테 전화가 안 오길래 내가 먼저 전화했더니 통화중이었다. 엄마랑 통화중인가 싶어 5분 후에 다시 전화했다. 둘째 이모가 전화를 받았다. 둘째 이모가 종종 아버지 집을 둘러본다. 아버지 먹을 것을 챙겨준다. 정말 고마운 일이다. 이모가 보일러 전원을 꺼놔서 뜨거운 물이 안나온 관계로 그게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아버지가 몸을 씻지 않았다는 것과 데이케어센터에서 돌아오는 길에 막걸리를 한 병 사왔다고 알려줬다. 엄마한테 그 얘기를 했더니 너무 속상해 했다고 했다. 나는 '이미 끝났는데, 어쩌겠어요.' 라고 했고 이모도 놔둬야지 어쩌겠냐고 했다. 이모랑 전화 끊고 엄마한테 전화할까 하다가 같이 울 것 같아서 전화하지 않았다. 엄마가 엄청 잔소리를 했을테니 아버지가 막거리를 먹진 않았을거다.
 
오늘 아침에 아버지한테 전화해서 막걸리 얘기랑 샤워 얘기를 했다. 아버지는 약간 역정을 내면서 잘 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나는 아버지 말이 끝나자 마자 '저는 아버지 걱정 안해요. 엄마가 걱정하지.' 했다. 아버지가 이모랑 엄마를 싸잡아서 '여자들이.....' 어쩌구 저쩌구 계속 횡설수설하길래 정확하게 알아들을 때까지 '저는 아버지 걱정 안해요'라고 했다. 엄마는 아버지에게 이거해라 저거해라 잔소리를 한다. 나는 아버지에게 잔소리는 안하고 잘하고 있다고만 한다. 엄마는 아버지를 걱정하고 나는 아버지를 걱정하진 않는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것이 사랑이라면 나는 아버지를 사랑하지는 않는 것 같다.

무심결에 나온말에 본심이 있다. 나에게 아버지는 이미 끝난 사람이다. 그런데 나는 왜 아버지에게 전화를 하고 아버지를 만나러 가나? 인류애도 정도 아니다. 연민도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나를 위해선가? 나의 무엇을 위해서? 생각 좀 해봐야겠다.
 
우기 끝나고 이제 여름 시작이지만 아버지의 여름도 나의 여름도 이미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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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20 - 잡생각

그때그때 2023. 7. 20. 11:15

 집 주인이 집을 1억 3천 5백만원에 내놨다. 5백은 에누리고 정말로 1억 3천에 팔아 볼 생각인가 보다. 이사비용 줄테니 집 팔리면 나가줄 수 있겠냐고 해서 숨도 안 쉬고(홧김에) 알았다고 했다. 1억 3천이란 숫자를 들은 순간 이미 지금 집에 정이 떨어졌다. 이사비용을 준다면 이사 가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집이 안 팔리면 좋겠다. 가장 중요한 건 나중에 전세 보증금 못 돌려받는 일 없어야 한다.

 지난 주말에 아버님과 20분 정도 통화했는데 19분 동안 고등학교 2학년 다니는 손주(아내 오빠 아이) 자랑을 하셨다. 그냥 장단 맞춰 들어드렸다. 아버님 인생의 유일한 낙이 손주가 공부 잘하는 거다. 조기졸업 조건을 갖췄다니 본인 계획대로 대학도 조기입학하길 바란다. 다만 아버님이 너무 손주 자랑을 하니까 어떤 때는 내 안의 악마심이 발동해서 이 아이가 잘못된 길로 가면 아버님은 어떤 반응일까 생각해 보기도 한다. 

 엄마가 막내 이모 도움을 받아서 내년 2월에 만기가 돌아오는 ELS 낙인(원금 손실 됐단 얘기임) 발생 문자를 카톡으로 전달해줬다. 문자를 전달하는 법도 모르는 엄마가 은행직원 말 듣고 ELS 가입하는 게 자본주의다. 어차피 원금 손실은 피할 수 없고 중국 경기가 살아날 가망도 보이진 않지만 홍콩 항생지수가 지금보다 더 떨어질 것 같진 않으니 그냥 만기까지 갖고 있으라고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엄마한테 이런 얘기를 하는 게 자본주의다. 잠 안자고 술 팔아서 번 돈에 손실이 생겨서 잠을 잘 못잔다는 우리 엄마도 자본주의인가? 자본주의다.

 신용카드를 아직  안 없앴는데, 8월부터는 서울 갈 때랑 기름 넣을 때만 써야겠다. 신용카드를 써보니까 체크카드만 쓸 때보다 돈을 더 쓰게된다. 이달에 쓴 휴대전화 요금을 다음달 말에 내는 것 처럼 애초에 빚을 깔고 시작하는 개념이라 그렇다. 이게 자본주의다. 자꾸 돈 생각을 하는 게 자본주의다.
 
 우리나라에 폭우가 내리는 사이에 미국 남부랑 남유럽은 또 더위에 시달리고 있다. 남유럽 여름 고온 뉴스를 처음 접한 게 5년 이상 된 것 같다. 여름마다 사상 최고 기온을 갱신하는 상황이다. 남유럽이면 대략 이탈리아, 그리스, 스페인, 포루투갈, 프랑스 남부 정도인데, 그곳에 사는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해본다. 포루투갈 리스본은 외국사람들이 집을 많이 사서 월세 폭등으로 한 달 월급 받아서 월세도 못내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리스본 외곽에 얼기설기 지어진 판자촌을 TV에서 봤다.  '생방송 특파원 보고 세계는 지금'을 매주 본다. 전쟁과 기후 파괴. 매주 세계가 끝장나는 현장을 방에 누워서 라이브로 보고 있다. 이게 맞나?

 더워서 죽는 사람들은 가난해서 죽는 거다. 미술하는 젊은 친구 한 명이 가난해서 죽는 상상을 자주 한다고 했었는데, 나는 내가 가난해서 죽을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암에 걸렸는데, 수술비가 없어서 죽는 건 가난해서 죽는 건 아니란 게 내 생각이다. 가난해서 죽는 것보다 비참한 죽음이 있을까? 은석이 삼촌은 고시원에서 고독사 했는데, 원인이 알콜이었겠지만 결국은 가난해서 죽은 거다. IMF 때 사업 망해본 사람들은 지금도 '다 IMF 때문이다.' 라고 한다. 가난해서 죽는 게 자본주의는 아닌데, 자본주의라고 하고 싶은 마음이다.

 얼굴과 이름만 서로 아는 사이인 어떤 형이 췌장암에 걸렸고 의사가 손을 쓸 수 없다고 했다는 얘기를 들은 게 1주일 전인데, 오늘 그 형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 형은 1971년 생이다. 일론 머스크랑 동갑이다. 한국에서 가장 사람이 많이 태어난 해에 태어났고 또래들 평균보다 훨씬 일찍 죽었다. 전세계 인구가 70억이 넘는다. 사람이 많은 만큼 죽음도 흔하다. 나도 언제 갑자기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올해 들어 본격적으로 하기 시작했다. 나 보다는 나이가 위인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내 또래들이 갑자기 죽었다는 소식을 자주 들어서 그런가보다. 

 견실하고 차분하게 절제하면서 살고 싶은 마음과 막 살고 싶은 마음이 공존하는 시절이다. 내 마음속에는 항상 막 살고 싶은 충동이 있다. 어떤 경우라도 <물의를 일으키진 말자>고 거의 매일 생각한다.

 물의를 일으키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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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직장 다니기 전까지 정규직 일한 게 딱 한 번이고 최저임금 정규직을 6개월 정도 했다. 비정규직 지겹네, 생각할 무렵에 아다리가 잘 맞아서 지금 직장에 취직했다. 아다리, 시험 한 번 면접 한 번에서의.

 지금 직장에 기간제근로자가 있다. 15명 뽑았으나 현재는 10명이다. 짜증나서 그만두고 몸 안파서 그만두고 이러저런 이유로 중간에 그만두시는 분들이 있다. 기간제근로자란 말은 일용직도 통칭하는 말이다. 우리 회사에서 일하는 기간제 선생님들이 그러하다. 월급을 받는 게 아니라 일한 날짜만큼, 일의 종류에 따라 정해진 액수만큼 정산된 돈을 매달 급여로 받는다. 일 년에 10개월 일하고 두 달 정도 실업급여 받고 다음해 3월에 다시 돌아오시는 분들이 많다. 정규직 채용을 안하니 실업급여까지 포함한 게 우리 기간제 선생님들 직업이다. 2015년이랑 16년 5월까지는 나도 이분들과 같은 처지였다. 일의 종류에 따라 일당에 차등이 있지만 거의 최저임금 받는다고 보면 된다. 

 실업급여를 날로 먹는 사람들이 정치권에서 이슈화 됐다. 진짜 날로 먹는 사람들도 있다. 최대 수급 기간 8개월에 해당되는 만큼만 나라에서 돈 주는 일자리 이것저것 하다가 계약 만료 후엔 실업급여를 받는 경우다. 나는 이것도 날로 먹는다기 보다는 삶의 한 방식으로 보인다. 실업급여가 최저임금보다 이익인 것도 맞는 말이다. 기름값, 밥값, 국민연금 이런거 다 제하면 최저임금 직장 다니는 것 보다 집에서 실업급여 받는 게 훨씬 금전 이익이다. 우리 기간제 선생님들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매년 사람 뽑을 때마다 오시겠지. 채종원 노동이 최저임금 받으며 나라에서 월급 받는 기간제 일자리 중에 좀 빡센 편이다. 그러니까 여기서 일하시는 분들은 기본적으로 성실하신 분들이다. 

 산이서 하는 노가다란 게 보통 오후 4시 조금 넘으면 끝나게 마련이고 일의 종류 따라 다르지만 30분 일하면 30분 쉬고, 여름에 더우면 낮에는 많이 쉬고, 비가 오면 비 맞고 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채종원은 나무 심고, 약 치고, 풀 베고, 열매 잘 따서 종자 잘 생산하는 게 핵심이다. 시기사업들이 늦어지지 않고 잘 돌아가기만 하면 된다.

 회사에 나랑 반대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지소장이다. 비가 오면 비옷을 입고 일하고 - 비옷을 사줬으니 - 17시 30분까지 현장에서 일해야 한다는 식이다. 지소장은 노가다를 안 해봐서 기간제 선생님들이 컨베이어 벨트위의 노동자들처럼 쉬지 않고 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장에 관리 직원이 있는데도 기간제 선생님들이 5시 30분까지 현장에 있는지 감시하러 다니니 기간제 선생님들이 지쳤다. 이 양반이 비 오는 날은 외부 작업은 안하고 싶다고 한 선생님들에게 비 올 것 같으면 미리 알려줄테니 출근하지 말라고 했다. - 비 핑계로 한 달에 이틀만 나오시지 말라고 해도 월 수입이 15만원 적어진다. - 그 첫 적용이 오늘이다. 근데 비가 안오네. 지소장은 자기가 날씨의 신이라도 되는 줄 아나보다.  

 기간제 선생님들 중에 한 분이 비가 와서 쉬면 수입이 적어지니 토요일이라도 나오고 싶다는 얘기를 했다. 기간이 정해진 계약인데, 비가 온다고 출근을 안 하는게 말이되냐고 주 40시간이라 근무시간이 명시되어 있는 근로계약서을 들고 와서 따지는 것도 아니고. 조건을 수용할테니 토요일에 나와서 휴일근무 수당을 받고 싶다? 화가났다. 이 선생님은 집안 형편이 어려운 것도 아니고 면사무소 산업 계장까지 했던 분인데, 투쟁이 아니라 물러서서 눈치 봄을 선택했다. 바보 같다. 기간제 선생님들을 자기 아래로 보는 지소장도 짜증나고 그 눈치만 보는 기간제 선생님들도 짜증난다.

 아내 말마따나 화를 내면 나만 손해고 내가 화낸다고 사람이 바뀌는 것도 아니니, 아내 말대로 가만히 있어야지. 나도 이렇게 한 발 물러난 건가. 이런식으로 물러나다가 공식명칭이 '오염수'인 후쿠시마 오염수가 전 세계 바다를 떠돌게 되는 건가. 이런 생각의 과정이 보편적인 체념인가?

 지소장이 여름 정기 인사 때 민원이 많은 곳으로 전출 가기를 희망한다. 그곳에서 공무원이 왕이 아니란 것과 공짜밥은 없다는 걸 깨닫길 바란다. 무엇보다도 인간 존중을 배우길 바란다. 그리고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기를...

 힘들다. 세상 어디에도 공짜밥은 없다.

 

-> 인사 발령이 나진 않았지만 비가 와도 출근하는 걸로 최종 결정됐다. 괜히 기간제 선생님들 이 달에 두 공수 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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