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로 쓰는 거 참 오랜만이다. - 찾아보니 일 년 만이다. -
하루에 두 번 이상 아버지랑 통화하고 있다. 아침 저녁 약은 꼭 먹어야 하기 때문에 두 번이 기본이다. 중간중간 별일 없는지 전화하기도 한다. 일단 전화를 받아야 안심이 되는데, 전화를 안 받는 일은 거의 없다. 다행이다.
건강은 누구도 자신 못한다고 그렇게나 건강하던 아버지가 4번이랑 5번 디스크 사이가 터진 것도 모르고 그저 다리가 많이 저린 줄 아는 사람이 됐다. 허리수술은 잘 됐다. 다행이다.
술을 안드신지는 세 달 이상 됐다. 스스로 어떤 결심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잘 하고 있다.
양천구치매안심센터에서 선별검사랑 진단검사를 했다. 선별 검사 결과지를 보고 아버지 머릿속에 어떤 부분들이 사라진 걸 알았다. 진단검사 결과는 의사랑 얘기해야 한다고 하는데, 코로나로 일이 밀려서 올해 안에는 의사가 판단하는 아버지 병세가 어떤지 알 수 없다. 최초에 선별검사를 마치고 급한 마음에 동네 병원 신경과에서 뇌 MRI를 찍었는데, 치매 전문이 아닌 뇌신경 전문 의사라 '치매'입니다, 라고 하지 않았다. 애초에 대학병원은 예약이 많이 밀려있긴 했지만 이렇게 오래 기다리게 될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대형 종합병원으로 갈 걸 그랬나, 싶기도 하다. 다만 아버지의 현재 상태는 '치매'로 확정되건 안되건 '좋지 않음'이다. 어찌보면 괜찮고 어찌보면 괜찮지 않다. 나는 그만하길 다행이다, 생각하는 쪽이라 다행이다.
긍정적인 부분 - 지하철 타고 여의도로 출퇴근, 혼자 밥 끓여 드심, 전화를 잘 받음, 갑자기 성격이 변하지 않았음, 계절을 헷갈리지는 않음(어제 처음 물었을 때는 가을이라고 했다.), 카드나 현금으로 상거래 가능, 집 비밀번호를 잊어버리진 않음, 사람 이름은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음
부정적인 부분 - 사람이름을 제외한 많은 명사가 머릿속에서 사라짐(진단 검사 받을 때, 밖에서 들어보니까 첫 음절을 불러주면 단어를 곧잘 기억해 냄), 날짜랑 요일 개념 상실(직장 다니는데 지장 없음), 1분 전에 나눴던 얘기 잊어버림(자꾸 말해주면 됨), 정상적인 은행업무 불가(서울 가서 은행계좌 한 번 더 정리해야 함), 약을 전혀 못 챙겨 먹음(전화해서 구체적으로 뭘 드시라 알려주면 됨), 샤워를 자주 안 하는 것 같음(전화해서 지금 씻으시라 하면 됨), 화장실에 들렀다가 욕실 슬리퍼 신고 나와서 집안을 배회함
적으면서 보니까 부정적인 부분도 그렇게 부정적이지 않다.
방금 저녁 약 드시라고 전화하려고 했는데, 먼저 전화가 왔다. 아버지한테 먼저 전화가 오는 건 긍정 요인이다. - 무슨일 있거나 뭐가 잘 안되면 무조건 나한테 전화하라고 반복해서 말하고 있음 - 요일 약통에서 아무 색깔이나 뽑아서 네 칸이 맞는지 확인하고 세 알짜리랑 한 알짜리 중에 한 알짜리 드시면 된다고 했다. 알았단 소리를 듣고도 마음이 안 놓여서 바로 드셔야 하니까 손에 알약 한 알을 올려 놓으라고 했더니 살짝 화난 말투로 "걱정 마라, 소리 안들려?" 하면서 플라스틱 약통에서 알약 흔들리는 소리를 들려줘서 안심했다.
참으로 안심했다.
아버지는,
동생이 결혼한 2015년부터 완전히 혼자 살기 시작했다. 경비 업무 특성상 매일밤 규칙적으로 잠을 자지 않았다. 아침에 퇴근해서 저녁까지 술을 마시고 다음날 출근한 일이 많았다. 혼자서라도 자꾸 술을 마셨다. 같이 술 먹던 사람들 사이에서 병원에 가봐야 한다는 얘기가 나왔다. 직장에서 짤릴뻔했다. - 근무일지를 항상 다른 사람이 썼다고 하는데, 근본 이유는 술인 거 같다. - 그러다가 식구들이 아버지 증상을 알게 됐다. 평소에도 남의 말 귀 기울여 듣는 사람이 아니었고, 어딘가 덜렁대는 성향이 있었기 때문에 바로 알아채지 못하고 조금은 늦게 알게됐다.
아버지는,
많이 외로웠다.
나는,
무심했다. 지난 10년 동안 아버지랑은 일년에 한 두 번 통화하고 명절이랑 제사 때 얼굴보는 게 다였는데, 요즘은 하루에 몇 번씩 통화를 한다. 병원 때문이긴 하지만 서울에 가서 얼굴도 자주 보는 편이다.
아버지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자기 삶을 살았을 뿐이다. 무관심이 후회되지는 않는다. 다만 아버지, 동생, 나 이렇게 셋이 소지섭이랑 임수정이 나왔던 '미안하다 사랑한다' 드라마 보던 생각이 난다. 아버지랑 동생은 드라마에서 감정을 고조시키는 장면이 나올때마다 '너무 감동적이야' 같은 말을 했었다.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에 우리 아버지는 스포츠 신문을 통해서 읽은 연예계 소식에 밝았고 젊은애들이나 좋아할 드라마를 참 좋아했다. 아버지는 그때도 많이 외로웠지만 그때까지는 아버지의 시대였다.
"아버지, 회사에서 같이 일하는 분이랑 얘기할 때, 이 사람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잘 들으시고, TV 뉴스를 보더라도 무슨 얘기를 하는지 잘 들으면서 보시고, 뭐가 잘 안되면 그게 뭐든 어떻게 하라고요?" " 어일우한테 전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