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 또는 생의 허망은 빈틈이 없어 보이는 삶에서도 작은 구멍을 찾아서 기어이 밀고 들어온다.

​ 체험만 하다가 끝나는 인생, 이라고 얼마전에 적어뒀다. 특별히 잘 하는 게 하나도 없고 돈도 없고 당장 내년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고 하고 싶은 건 많은데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는 아내의 우울과 관련이 있고, 내 우울과도 관련이 있다.

 누구나 한 가지씩은 특출나게 잘하는 것이 있다고 말은 쉽게 하지만 모두가 '생활의 달인'에 나오거나 이름을 떨치는 예술가나 유명인사가 될 수는 없다. 대부분의 삶은 자기가 잘 하는 게 뭔지도 모르고 그냥 흘러가는 삶일 것이다. 

 나도 마찬가진다. 살면서 직업으로 삼거나 돈을 벌었던 여러가지 일들처럼 농사를 지었던 2년도 체험들 중에 하나 뿐이었을까, 생각하면 뜨끔하고 우울하다. 농사 지을 때 농사에 100프로 집중하지 못했다. 그러지 못할 여러 조건들이 있었지만 내가 좀 더 기술이 있고 생각이 있고 농사에 적성이 있었다면 '체험'이란 단어를 떠올리진 않았을 거다. 그렇다고 지금 일은 천직이라 생각하고 초집중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냥 어영부영 산다.

​ 기술자나 전문가가 되지 못하는 삶. 근데 그게 어때서!

​ 인류는 망해가고 있지만 인류의 시작부터 세상은 다 서로에게 기대서 - 착취라는 말도 좋다. - 돌아가고 있고 모두가 어느 부분에선가 지금의 세상을 떠받치고 있다. - 기여하고 있다, 는 말도 좋다.

​ 어제 '정원가의 열두달'을 읽었다. 카렐 차페크는 정원을 가꾸고 글을 쓰고 그의 형은 삽화를 그리고 출판사에서는 책을 만들고 사람들이 책을 읽는다. 시간이 흘러서 한국의 출판사에서 번역을 해서 출판하고 절판된 것을 다시 복간해서 출판하고 서점과 도서관으로 책이 옮겨지고 나는 빌려읽은 책을 반납하고 누군가는 또 그 책을 읽고 그 책 속에서 내 머리카락이나 눈썹을 발견하기도 할 것이다. - 어쩌면 말라붙은 고추가루를 발견할지도 모른다. - 이 모든일에 연루된 수 많은 사람들과 만남이 세상을 지탱하고 있다. 세상의 모든 일이 이런식이다. 고리는 끊어지지 않는다.       

​ 왜 이런 얘기를 썼냐면 어제 저녁에 회사 사람 하나가 나한테 욕하길래 나도 같이 욕했다. - 나는 술을 안 마셨고 상대방이 혼자 술에 취한 상태라서 때리지는 않음 - 나는 마음의 어느 구석에 나한테 못되게 굴면 가만히 안 있는다, 란 문장을 품고 있다. 나한테 먼저 욕한 사람도 마음속에 뭔가를 품고 있는데, 그게 터져나왔을 것이다. 이해는 하는데, 이해만 한다. 그래도 때리지는 말아야지.

​ 우리 회사에 일용직 아저씨들까지 50명 정도가 다니는데, 각자 자신들의 체험으로 살아온 50명이 있다보니 당연히 여러가지 갈등이 있다. 생이 끝날때까지 아니, 인류가 끝날때까지...

​ 생이 어지러운 친구 하나가 좋은 삶은 헷갈리지 않는 삶인 것 같다고 했는데, 좋건 나쁘건 어중간하건 헷갈리면서 가는게 삶이고 살아 있으면 누구나 다 어떤 삶을 산다, 는게 내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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