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에 산불이 났다. 원인 조사 결과 등산객 또는 약초꾼들이 불을 피운 흔적을 발견했다. 등산객들이 뭘 끓여 먹는 경우는 별로 없고 약초꾼들이 몇 년 전에 드론을 이용해서 도라지 씨를 많이 뿌렸다는 이야기가 들리는 걸로 봐서는 약초꾼들 때문인 것 같다. 불이 났던 당일날 비가 약간 왔다. 불 피워놓고 뭔가 끓여 먹고 방심했겠지. 불은 한 순간이다. 인간에 대한 믿음이 무너지는 순간이다. 나도 그런 사람일 수 있다는 것이 두렵다.
불이 밤에 나는 바람에 퇴근했다가 다시 정선으로 올라왔다. 워크숍에 간다고 부산가는 길에 안동까지 갔다가 돌아온 친구도 있다. 차에서 대충자고 불 끄러 올라갔다. 잔불이 남아서 또 올라갔다. 여전히 잔불이 남아서 또 올라갔다. 3일 동안 네 번 산 꼭대기에 올랐다. 한 번 빨았는데도 산불잠바에서는 불냄새가 난다. 피곤해서 입술에 헤르페스가 발생했다. 불은 다 껐고 대상포진이 아니라 단순 포진이라 다행이다.
임계로 근무지를 옮긴지 거의 두 달이다. 심신이 안정을 찾았다. 몇 년 만에 찾아온 안정이다. 화가 나지 않은 상태에서 쓰는 일기도 오랜만이다. 하지만 내 신상에 어떤 급격한 변화가 있을지 모르니 지금 이 순간을 아껴줘야지. 집에서 출퇴근 하는 것만으로 술과 담배가 줄었다. 아내 얼굴을 매일 보는 것이 행복하다. 봄에 메인 파트만 외워뒀던 코타로 오시오의 황혼을 다 외웠다. - 나는 끈기가 있는 편이다. - 생활에 어떤 루틴이 생겼다. 의사가 얘기한 일상을 찾았다. 대성공이다.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들이 다 얼굴 좋아보인다고 한다. 사실이다. 아내가 인상적인 말을 했는데, "너는 술을 많이 마시는 때가 있었을 뿐이지 몸이 안 좋았던 적은 없어." 맞는 말이다. 건강하게 태어난 것에 감사한다.
장인어른 70세 생일이라 지난 주말에 서울 다녀왔다. 27일은 할아버지 제사다. 엄마 가게는 1월 한 달간 영업정지를 당했다고 한다. 위로해 주고 와야겠다. 이제 장사 그만하시고 가만히 쉬라고 할 수 없는 노릇이다. 엄마 입장도 그렇고 내 입장도 그렇다. 입장과 노릇과 현실은 같은 말이다. 한 분야 한 직장 한 우물을 판 장인어른의 안정된 노후 생활과 - 장모님이 백화점 VIP란 얘기를 들었다. - 한 우물을 팠지만 일을 그만두면 땟거리가 없는 엄마의 입장을 생각해 본다. 사람들이 얘기하는 노후대비를 생가해본다. 이제껏 생각해보지 않은 분야다. 나랑 지후는 어떻게 될까? 어제 강릉부동산 사이트를 같이 보면서 우리가 가질 수 없는 집과 땅들을 실컷 봤다. 아내는 체념하여 입버릇으로 이번생은 집 없이 가는 거라고 한다. 내가 짜증나도 지금 이 일을 그만두지 못하고(공무원 연금이 뭔지) 다른 곳에서 새로운 시작을 못하는 것도 결국은 이런 생각들과 관계있다.
이렇게 나이를 먹는건가? 그렇다면 남들보다 늦었다. 상관없지만.
안정속에도 피로와 불안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