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앙마이에서 쓴다.

오늘밤 비행기로 여길 떠난다.

치앙마이는
기념품 가게 악어들도 합장을 하고 있고 들개가 많은데 개들이 대체로 말랐다.
야시장이랑 - 낮에는 더워서? - 마사지 가게가 많다
풀밭에 땅콩이 많고 - 밥 볶을 때 땅콩기름을 쓴다고 함. 짜장면에 돼지기름 쓰는 거랑 비슷한 느낌. - 나무들이 크고 시원시원하다.


치앙마이에서는
멀티플렉스 극장에서 영화 '기생충'을 봤다. 초중반이 지루했지만 마지막에 몰아칠 때는 임팩트가 있었다. 남의 집을 제집처럼 생각했다가 사단이 나는 스토리.
온통 태국어에 사진도 몇 장 없는 메뉴판이 있는 식당에서 저녁 사 먹었다. 두 가지는 제대로 나왔는데 족발덮밥 대신 모닝글로리 볶음이 나왔다. 맛있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발마사지를 받았다. 시원했다.
인피니티 풀이 뭔지 알았고 거기서 수영했다. 좋았다.
먹고 걷고 먹고 걷고 먹고 걷지 않고 먹기도 했다. 주로 먹었는데 다 맛있었고, 아내 입맛에 맞아서 좋았다. - 난 대체로 뭐든 다 잘 먹음 - 볶음밥 먹느라 국물 쌀국수는 몇 번 못 먹었다.

우리나라보다 물가가 싼 나라에 와서 그 나라 사람들은 시세로 사 먹는 밥을 싸다고 생각하면서 사 먹는 일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잘은 모르지만 우리나라보다 물가 비싼 나라도 별로 없지. 깊게 생각하지 말아야지. 계획이 없는 게 최고의 계획일 수 있듯이 생각이 없는 게 최고의 생각일 때도 있으니까.

아내의 결정에 따라서 앞으론 비행기 타고는 제주도도 안 가기로 했다. - 기후 위기에 악영향을 주는 일을 줄이겠다고 함 -

며칠 잘 놀았다.

AND

 우울 또는 생의 허망은 빈틈이 없어 보이는 삶에서도 작은 구멍을 찾아서 기어이 밀고 들어온다.

​ 체험만 하다가 끝나는 인생, 이라고 얼마전에 적어뒀다. 특별히 잘 하는 게 하나도 없고 돈도 없고 당장 내년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고 하고 싶은 건 많은데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는 아내의 우울과 관련이 있고, 내 우울과도 관련이 있다.

 누구나 한 가지씩은 특출나게 잘하는 것이 있다고 말은 쉽게 하지만 모두가 '생활의 달인'에 나오거나 이름을 떨치는 예술가나 유명인사가 될 수는 없다. 대부분의 삶은 자기가 잘 하는 게 뭔지도 모르고 그냥 흘러가는 삶일 것이다. 

 나도 마찬가진다. 살면서 직업으로 삼거나 돈을 벌었던 여러가지 일들처럼 농사를 지었던 2년도 체험들 중에 하나 뿐이었을까, 생각하면 뜨끔하고 우울하다. 농사 지을 때 농사에 100프로 집중하지 못했다. 그러지 못할 여러 조건들이 있었지만 내가 좀 더 기술이 있고 생각이 있고 농사에 적성이 있었다면 '체험'이란 단어를 떠올리진 않았을 거다. 그렇다고 지금 일은 천직이라 생각하고 초집중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냥 어영부영 산다.

​ 기술자나 전문가가 되지 못하는 삶. 근데 그게 어때서!

​ 인류는 망해가고 있지만 인류의 시작부터 세상은 다 서로에게 기대서 - 착취라는 말도 좋다. - 돌아가고 있고 모두가 어느 부분에선가 지금의 세상을 떠받치고 있다. - 기여하고 있다, 는 말도 좋다.

​ 어제 '정원가의 열두달'을 읽었다. 카렐 차페크는 정원을 가꾸고 글을 쓰고 그의 형은 삽화를 그리고 출판사에서는 책을 만들고 사람들이 책을 읽는다. 시간이 흘러서 한국의 출판사에서 번역을 해서 출판하고 절판된 것을 다시 복간해서 출판하고 서점과 도서관으로 책이 옮겨지고 나는 빌려읽은 책을 반납하고 누군가는 또 그 책을 읽고 그 책 속에서 내 머리카락이나 눈썹을 발견하기도 할 것이다. - 어쩌면 말라붙은 고추가루를 발견할지도 모른다. - 이 모든일에 연루된 수 많은 사람들과 만남이 세상을 지탱하고 있다. 세상의 모든 일이 이런식이다. 고리는 끊어지지 않는다.       

​ 왜 이런 얘기를 썼냐면 어제 저녁에 회사 사람 하나가 나한테 욕하길래 나도 같이 욕했다. - 나는 술을 안 마셨고 상대방이 혼자 술에 취한 상태라서 때리지는 않음 - 나는 마음의 어느 구석에 나한테 못되게 굴면 가만히 안 있는다, 란 문장을 품고 있다. 나한테 먼저 욕한 사람도 마음속에 뭔가를 품고 있는데, 그게 터져나왔을 것이다. 이해는 하는데, 이해만 한다. 그래도 때리지는 말아야지.

​ 우리 회사에 일용직 아저씨들까지 50명 정도가 다니는데, 각자 자신들의 체험으로 살아온 50명이 있다보니 당연히 여러가지 갈등이 있다. 생이 끝날때까지 아니, 인류가 끝날때까지...

​ 생이 어지러운 친구 하나가 좋은 삶은 헷갈리지 않는 삶인 것 같다고 했는데, 좋건 나쁘건 어중간하건 헷갈리면서 가는게 삶이고 살아 있으면 누구나 다 어떤 삶을 산다, 는게 내 생각이다.

AND

35번 국도 새벽 한 시

길을 건너다 죽은 죽은 고양이
길을 건너는 고양이
또 죽은 고양이
또 길을 건너는 고양이
눈치를 보다 길을 건너는 고양이
두리번 거리는 고라니
차에 치일 뻔한 고라니
또 두리번 거리는 고라니
길 옆으로 느리게 숨는 고라니
천지사방 고요속에 내 자동차와
자동차 전조등 빛과
고라니와 고양이
죽지 않았으면 살아있는
고양이와 고라니
AND

문제

​양파밭엔 양파가 문제
마늘밭엔 마늘이 문제​
​사과밭엔 사과가 문제
포도밭엔 포도가 문제
감자도 문제, 배추도 문제
비가와도 문제
가물어도 문제​
풍년이라 문제
흉년이라 문제
값이 없어 문제
못 팔아서 문제
사람도 없는데 인건비가 문제
비닐도 문젠데 비닐값도 문제
화학비료도 문젠데 비료값도 문제
기계가 있어도 기계값이 문제
해마다 늘어가는 빚도 문제
땅 주인이 문제
그놈이 가져가는 직불금도 문제
농사를 지어도 문제​
​농사을 안 지을수가 없으니 더 문제
AND

기름과 계란

차에 기름을 넣었다
가계부에 계란 5만원이라 적었다가​
아차, 하고 기름으로 바꿔 적었다
기름과 계란, 계란과 기름
계란후라이에 기름
후라이드 치킨에 기름
구리스가 없으면 삶이 빡빡하게 돌아가고
기름기 없는 삼시세끼를 상상하기 어렵다
계란 한 판 자동차에 넣고 서울에서 부산까지 왕복 할 수 있다면
계란 100개로 보일러가 겨울내내 돌아간다면
기름값 걱정 없는 행복한 세상이 올까
집집마다 애지중지 닭을 키우는 풍경이 흐를까​
지구가 닭의 행성이 되는 생각 아래로
기름을 먹은 자동차 바퀴가 구른다
AND

 우리집은 신발 벗고 들어오는 현관이 넓다. 네모난 현관자리가 네모난 마루의 한 가운데로 침입한 모양새다.

 마루에 누워 있으면 내 신발과 내 눈높이가 같은데, 나는 그 사실이 참 좋다. 누운 신발과 누운 나. 오즈의 다다미샷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하나?

 나는 운동화 한 켤레만 신다가 떨어지거나 바닥에 구멍이 나서 비오는 날 못 신게 되면 새로 산다. 장례식장에서만 신는 오래된 구두는 자동차 트렁크 안에 들었고, 회사에서 신는 등산화는 회사 신발장에 있다. 아내도 물건 욕심이 적어서 신발 숫자가 적다.

 지난 주말에 넓은 현관에 달랑 네 켤레의 신발이 놓여 있었다. 사막 한 가운데 띄엄띄엄 나무가 서있는 느낌이랄까.

 신발은 신으면 닳는다. 안 신어도 닳는다. 신으면 더 빨리 닳는다. 시간의 이치다.

 지난해 겨울부터 신기 시작한 지금 운동화는 발뒤꿈치랑 닿는 안쪽이 좌우 모두 터졌다. 터진 것까지는 좋은데, 터진 자리에 뭔가 딱딱한게 튀어나와서 내 뒤꿈치를 자꾸 찌른다. 맨발로 신을 신고 걸으면 금방 상처가 생기는 지경이다. - 양말 신고 신으면 괜찮음. -

 지난 주말에 마루에 주저 앉아서 아내랑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나 운동화 사야돼, 란 말을 시작하는 바람에 아내가 내 운동화의 실체를 알아버렸다. 아내는 막 웃으면서 어떻게 그 자리가 터지냐, 왜 운동화에 딱딱한 게 들었냐, 는 말을 했다. 운동화 안쪽 바닥에 Reebok 글씨가 좌우 대칭으로 조금씩 흐릿해진 것을 - 왼발은 Ree자가 남고 오른발은 bok자만 남음 - 발견하고는 또 막 웃었다.

 아내가 웃으면 기분이 좋다. 그까짓 터진 운동화가 뭐 그렇게 즐겁게 웃을일인가.

 사랑이다.

 터진 운동화에 대해서 말하고, 그 신발을 보면서 웃고, 그 웃음에 마음이 무방비 상태로 해제되는일은,

 사랑이다.

AND

나무​

​오후 네 시
산에서 길을 잃었다
이대로는 죽는다는 생각에
몇 번을 넘어지며 산을 내려왔다
등산로 표지판을 발견하고 나서야
땀을 닦고 숨을 돌렸다
고개를 들자 나무가 있었다
내게 말을 거는 얼굴을 하고 서 있는 나무
눈 코 잎도 없으면서 사람 얼굴을 하고 있는 나무
나무도 나도 서로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가만히 나무를 안았다
그날의 냄새가 났고
그리운 이름이 떠올랐다
잘 있으란 말을 입 밖으로 내지 못하고 세상으로 돌아왔다
산에서 길을 잃은 날
입을 다물고 말을 거는 나무를 만났다
AND

적고 나서 씻을까 했다가 씻고 나서 적는다. 크게 달라질 건 없다.

지난 목요일부터 안 좋던 몸 상태가 주말까지 이어졌다. 수요일에 비 맞으면서 일한 데다가 밤 기온에 아랑곳 않고 항시 문을 열어놓고 자기 때문이다. 

20대에 운동으로 만들어 둔 몸을 30대에 다 소진하고 40대에 와서는 전반적으로 힘이 딸리는 것을 느낀다. 내 몸상태는 대한민국 평균이라고 할 수 있는 흐름안에 있다. 평균이란 건 어떤 값들의 중간치이기 때문에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다. 보통으로 산다는 말을 많이 하지만 보통으로 사는 사람이 어디있나? 결혼 출산 대출 아파트 같은 큰 구찌안에 들어가는 삶, 혹은 필수라 부르는 일들이 보통인 걸까? 

주말 내내 밥 먹을 때 빼 놓고는 누워 있었다. 흔히 하는 말처럼 방바닥에서 등을 떼기가 힘든 것이 아니다. 그저 무력한 상태로 있었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K선배 꿈에 내가 나왔다고 해서 복권을 사지는 않고 번호만 맞춰봤다. 1등 번호에 내가 항시 사는 숫자가 세 개 포함되어 있었다. 5천원 짜리 꿈에 나왔다고 생각하니 웃겼다. 지난밤엔 열 시간을 넘게 잤는데, 꿈에서 우리 부부한테 사기 칠라는 놈들한테 잘 대처했다. 안심안심.

정선으로 출발하기 전에 아내랑 몇 가지 얘기를 했다. 오늘 생긴 아내의 멍, 우리 회사 얘기, 사람들 얘기, 우리만 아는 발뒤꿈치 닿는 부분이 터진 내 운동화 얘기.... 그 10여 분이 허무하게 지나간 주말을 잊게 한다. 나도 하지 못하는 내 걱정을 해 주는 건 당신 뿐이다. 당신 팔에 생긴 멍을 걱정해 주는 것도 나 뿐이다. 걱정은 언제나 자신의 몫이 아니다. 걱정은 사랑의 몫이다.

정선 올라오는 차에서 넥스트의 <홈> 앨범을 들었다. 중고등학교 때 참 많이 들었던 앨범이다. '인형의 기사'는 노래방에서 누가 부르던 꼭 불렀었다. '아버지와 나 '에서 아버지와 함께 세월속으로 걸어간다는 신해철 목소리가 어리다. ' 턴 오프 더 티비'는 지금 들어도 참 좋다. 신해철은 이 다음 앨범과 그 다음 앨범에서 이전의 (작은)성공을 집대성한 곡들로 본인 음악의 정점을 찍으며 흥행에도 성공했다. 그리고 지금은 세상에 없다. 

사람이란 게 게 쉽게 바뀌지 않는 법이니 내가 만든 노래는 다 비슷하고 내 일기도 비슷한 내용을 반복하고 언젠가 나도 세상에 없다. 

뭐랄까. 30대의 나는 20대의 나를 파 먹고 지금의 나는 그 전의 나를 파 먹고 산다. 그러니까 일정 나이 이후의 삶이란 건 자꾸 자기 자신을(과거를) 파 먹고 사는 느낌이랄까. 예전에 좋아했던 앨범을 듣는 일도 같은 맥락에 있는 것 같다.

갑자기 이상하게 흘렀는데, 사랑의 힘으로 이번주를 잘 지내보고 싶어서 적었다.
AND

심계탕을 먹다 2

복날
응당 그래야 한다는 듯
삼계탕을 먹는다
속이 채워진 닭으로 내 뱃속을 채운다
우리나라 인구 5000만명
하루 닭 소비량 200만 마리
닭 사육 두수 1억 7천만
1억 빚은 빚도 아닌 세상이니
한 마리 닭을 먹는 일도 무심하다
닭은 인간이 만든 사료를 먹고
사료를 만든 인간은 닭을 먹는다
돌려 막고 돌려 먹는
지극하고 지독한 순환이란 말
레일 위의 기차는 여전히 빠르게 달리고 있고
풍요의 꼭지점은 아직 눈에 보이지 않으므로
​알고도 모르는 척
세상에 섞여서
복날 삼계탕을 먹는다
AND

플라스틱을 살다

나는 참치회를 먹는다
참치는 고등어를 먹고
고등어는 새우를
새우는 플랑크톤을 먹는다
나는 고등어 회도 먹고
생새우도 튀긴새우도 먹는다
새우는 미세 플라스틱과 플랑크톤이 헷갈리고
고등어는 새우와 플라스틱 미끼를 헷갈리고
참치가 큰 입을 열면 헷갈릴 것도 없이
온갖 것들이 뱃속에 들어간다
나는 그 모든 것을 먹는다
할머니 생일을 축하하는 뷔페 식당의 모든 음식이
플라스틱의 사슬에 매여 있다
인간은 그렇게 플라스틱을 먹는다
모든 생명이 플라스틱을 산다
모두가 플라스틱의 은총아래 있다
AND

20190702 - 일기

그때그때 2019. 7. 2. 17:25
  공무원 세계에는 해마다 두 번의 정기인사가 있다. 1월과 7월, 인사철이 되면 회사 안이 술렁거린다. 이번에 누가 어디로 간다는데 잘됐다. 누가 올건데, 어떤 사람이다. 나는 이번에 꼭 이곳을 떠날거다. 이런 얘기들이 최종 공문이 내려올 때까지 사무실 안팎을 떠돌아 다닌다.

  내가 죽지않고 살아서 계속 여기서 근무한다면 앞으로 약 40번 정도 이런 시기를 더 거쳐야 한다는 뜻이다. 이미 20년 이상 근무한 사람들은 인사와 관련된 술렁이는 분위기에 익숙해서 누군가 오고 가는 일에 그저 그런가 보다 하는 것 같다. 우리 회사에는 일 시작한지 3년도 안된 사람들이 많은데 - 나는 딱 3년 됨 - 이 사람들은 이런 분위기에 아직 익숙하지 않고 들떠있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달까? 부정적으로 생각하면 행정력 낭비다. 근데 어떤 사람이 한 곳에서만 계속 일하는 것도 부정적으로 생각하면 행정력 낭비다. 그러니까 정기인사라는 건 필요한 일이다.

​ 오늘 정기인사가 났다. 2016년에 입사한 6명 중에 나랑 옆 방에 한 친구만 남았다. 동료애가 있던 친구들은 그만두거나 먼저먼저 인사 때 다 떠났다. 그때마다 마음에 데미지를 받았더랬다. 이번에 작년 9월에 와서 나랑 술친구 해주던 20대 청년이 정선을 떠난다. 삼촌같은 입장이었기 때문인지 약간 섭섭하고 말았다. 요즘 팀장님하고 잘 지내는데 - 내 방에서 미션임파서블4 보면서 같이 술 먹다가 이명박이 박근혜보다 더 싫다고 하면 同鄕인데도 그러십니까? 라고 장난으로 물어보기도 함 - 이번 인사에 본인 희망지로 못가게 되서 나는 잘됐다. 팀장님 쏘리.

  회사 전통인지는 모르겠는데, 인사가 나면 친한 사람들끼리 회식, 팀별로 회식, 방별로 회식, 전체회식까지 회식이 많다. 가는 사람과 오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이 숫자는 두 배로 늘어난다. 팀회식은 사람들이 다 그런가보다 하거나 흔쾌히 좋다고 하는데, 방별로 하는 회식과 전체회식은 많은 직원들이 부담스러워 한다. 억지로 술을 먹거나 더럽게 노는 것도 아닌데도 그렇다. 전체회식날 당직인 사람을 부러워하는 지경이다. 다른회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회식이란 그런 것이겠지.

  다음번 인사때는 꼭 정선을 떠나고 싶어서 적었다.
AND

오리배

​하짓날
오리배를 탔다
생은 정점으로 치닫지 않았지만
뭔가를 해야 할 것 같은 휴일이다
오리배는 몸을 기울이는 쪽으로 뒤뚱 방향을 돌린다
내가 몸을 기울일 때마다 아내는 웃고 나는 기분이 좋다
호수 위에 둥둥떠서 페달을 밟는다
부표 안쪽으로만 안쪽으로만
세상은 위험투성이
선을 넘으면 안되지
멀리 오리 가족이 보인다
어미 오리의 뒤를 새끼 오리들이 따른다
호수 위에 둥둥 떠서 발을 놀린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절실함
우리가 따라 잡기도 전에
오리 가족은 부표 너머 점으로 사라진다
우리 바로 곁에 선을 넘는 삶이 있다
정오의 태양이 호수 전체에 축복처럼 내리고
우리의 오리배는 길어진 낮의 한복판에서  ​
어디로 갈지 모르는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다
AND

어른의 여름

6월​,
이름 모를 나무 아래
이름 모를 애벌레가
아스팔트 위에 떨어진 잎을 먹는다
그늘 한 점 없는 맨바닥에서
부러진 가지 끝의 마지막 한 장을 지걱지걱 씹는다
나무 위에 있었다면 나비나 나방이 될 수 있을 생명
지금은 발에 밟히거나 굶어 죽을 운명
길바닥에 널린 죽음, 또는 꿈틀거리는 삶
욕망은 흉폭하고
멀리 뚱뚱해진 여름산처럼
나는 비대한 몸을 가진 어른이 됐다
여름산을 보고 봄이 그립다면 인생을 돌아봐도 좋은 나이라고
언젠가의 당신이 말했다
마지막 한 입을 남겨 놓고
애벌레는 먹던 일을 멈춘다
돌아볼 일도 없이 마지막에 다가가는 삶
나는 도무지
당신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
AND

 신혼여행 간 동료가 사무실로 한라봉을 보냈다. 맛있지만 어제 제주도에서 보낸 귤을 오늘 강원도 정선에서 먹는 세상이 달갑지 않다.

 농사지을 때는 나도 자주했던 얘기지만 농산물 생산비용에 농부의 인건비를 포함해야 한다,는 주장에는 논과 밭을 공장으로 농산물을 대량생산되는 공산품처럼 생각하는 지독한 자본주의가 숨어있다. 자본주의의 테두리 안에서 쉽게만 생각해도 치킨집 사장이 자기 인건비를 빼고 본인 수입을 계산하지는 않는다.

 마트에 가면 습관적으로 수산물의 원산지를 확인한다. 바다를 끼고 있는 모든 나라에서 우리나라로 온갖 수산물을 보낸다. 바다는 하나니까 당연한 건가. 다른 식재료도 마찬가지다. 식재료만이 아니라 매장에서 판매하는 모든 것이 그렇다. 지구가 하나 뿐이기 때문일까. 5대양에서 골고루 잡아 올린 수산물의 원산지를 읽으면 내 머릿속에서 지구가 돌고 있는 느낌이다.

 혼자서 간단하게 조리해 먹을 수 있는 것들의 가짓수가 점점 늘어난다. 동물이 교미할 때 이성을 유혹하듯이 화려한 포장지로 혼자 가볍게 끼니를 떼우거나 술 먹고 싶은 사람을 꼬신다. 나도 정선에서는 혼자이므로 가끔 편의점 도시락을 먹는 처지다. 궁금해서 한 번 먹어봤던 게 몇 년 전인데, 벌써 그것을 사서 먹는 행동에 익숙해졌다. 삶의 모양이 예전과 다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라면이 없던 시절을 살던 사람들은 언제든지 쉽게 끓여 먹을 수 있는 라면의 등장에 세상이 바뀌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지금의 변화도 그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엄마가 알이 든 강원도 꽁치가 먹고 싶다고 했다. 엄마 기억으로는 단오 무렵 강릉에 오면 시장에서 꽁치를 팔았는데, 그게 그렇게 맛있었다고 한다. 분명 어린날의 나도 그 꽁치를 먹었겠지. 구워 먹고 조려 먹고 찌개로도 먹었겠지. 나도 예전에 먹었던 추억이 새로 먹는 즐거움보다 더 강한 나이가 됐으니 60넘은 엄마는 오죽할까. 아내가 알아본 결과 요즘은 엄마가 말한 그 꽁치가 많이 잡히지도 않고 어느 때 잡힌다고 특정해서 말해줄 수 없는 지경이라고 한다. 그것을 못 먹게 된 대신 냄비에 넣고 데우기만 하면 되는 꽁치 김치찌개가 여러 회사에서 나오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받아들이고 살고 있지만 뭔가 지독하다는 느낌이 가시질 않는다. 받아들이기만 하고 노력하지 않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내 주위에는 채식을 하거나 일회용품을 안 쓰거나 하는 사람들이 있다. 아내만 하더라도 페트병 하나를 재활용 하더라도 속을 씻어내고 겉에 붙은 포장을 제거한다. 대나무 칫솔을 쓰고, 마트에는 항상 장바구니를 들고 가고, 반찬가게에는 반찬통을 들고 가고 플라스틱 제품을 가급적 사지 않으려고 한다. 고기도 잘 안 먹는다. 나도 어느 정도는 그 영향력 주위에 있지만 나는 노력보다는 포기의 느낌이 강하다.

 어차피 끝난 것 막 살자는 것은 아니다. - 실제로 몇 해 전까지는 이런 생각이 강했다. - 단순한 체념이다. - 체념은 짝사랑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삶이 사랑이므로 이 세상에 내가 살아가므로.

 이 지독한 부정을 어찌할까.

 어찌할까로 끝나는 일기를 또 쓰고 말았다.

AND

말하지 않는 밤

작은방, 말하지 않는 밤
빈 구석에 웅크린 채
침으로 마른 침묵을 적시고
침묵에 꽃을 피웠네
여름밤, 말하지 않는 작은 방
적막에 꽃이 바스러지고
꽃 부서진 자리 아토피처럼 가렵네
긁은 자리마다 싱싱한 생채기가 피고
마른혀로 상처를 핥았네
상처는 아물고 매미소리 시끄러운데
내가 내게 말하지 않는 밤은 끝나지 않고
뱃속에 마른꽃만 자꾸 피고 지네
AND

20190531 - 일기

그때그때 2019. 5. 31. 16:53

 아침 8시 반에 사무실에 앉아서 메모장에 우울이 막 뛰쳐나온다고 적었다.

 엊그제 회사 인사담당자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정선 떠나서 삼척에서 일 할 생각있냐고 해서 좋다고 했더니 고맙다면서 전화를 끊었다. 두 시간 있다가 다시 전화가 왔는데, 이번에는 어려울 것 같다고 미안하다고 했다. 고맙다와 미안하다의 간극만큼 마음이 동요했다. 바닷가 가까운 삼척에 가면 매일 욕하면서 출근하는 정선의 높은 산도 안보는구나, 구불구불한 35번 국도와 42번 국도와 안녕하고 쭉 뻗은 7번 국도 타고 다니겠구나 기대했는데 미안하단 한 마디에 바로 무너져버렸다.

 나도 누군가에게 고맙다 했다가 바로 미안하다 한 일이 있을 것이다. - 떠오르는 사건은 없다. - 인생이란 그런 것이다. 그렇지만 잘 아는 사람에게도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도 자주 그러면 안된다.

 '고인물'이란 표현이 있다. 익숙하고 오래됐고 잘 알고 잘 한다는 뜻이다. 회사에서 지금의 나는 '고인물' 단계를 지나서 '정선의 썪은물'이다. 더 익숙하고 더 잘 알고 더 잘 한다는게 안 좋은 건 아닌데 표현은 썪은 물이다. 그만큼 정선에서의 회사 생활에 물렸다. 정선 와서 3년만에 썪은물 신세가 됐다. 아무때고 우울이 막 뛰쳐나온다. 

 아내에게 괜찮다고 했더니, 자기한테 짜증이나 내지 말라고 했다. 알았다고 했으니 노력해야겠다. 회사 짜증이 주말에만 만나는 아내랑 아무 죄 없는 내 간으로 다 간다. 자주 못 만나서 그렇다는 변명을 할 수도 있지만 고맙다는 말도 없이 짜증내고 미안하다는 말만 하는 일이 없도록 노력해야 한다. 

 일요일에 결혼식이 있어서 서울에 간다. 기타를 고치거나 새로 사야해서 토요일에 간다. 지난주에 영일군한테 얘기해뒀다. 잊었나 싶어서 아까 전화해서 토요일에 뭐 하냐고 했더니 아내에게 나 만난다고 말해뒀다고 한다. 다른 애들도 내가 오랜만에 서울 온다니까 만나러 오겠다고 했다고 한다. 그 말 듣고 기분 좋아졌다. 그저 내 얼굴 보려고 나를 만나려는 사람이 있다는 건 좋은 일이다. 인생이란 그런 것이다.

 다음주에는 좀 쉬고 싶을 따름이다.

AND

퇴근길 - 정선에서 -

태양과 내가 가장 멀리 떨어진 계절
새끼들을 먹이느라 제비 부부가 부산하다
세상을 향해 고개를 내민 어린것들의 절실한 주둥이
읍내를 빠져나오는 다리 위
왜가리 한 마리가 강을 가로질러 눈부신 쪽으로 사라진다
사랑을 나누려던 참새 두 마리가 내 기척에 자리를 뜬다
공원 앞 은행나무 가지에도 참새가 한 마리 앉았다
내 마음 때문인지 그저 우연인지
오늘 본 참새들은 다 통통하다
건물 철거 공사장엔 멈춰선 포크레인 한대
너도 오늘 일을 마쳤구나
모퉁이를 돌면 내 작은 방
나를 기다리는 식은 밥
언젠가의 사랑처럼
식어버린 퇴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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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새

늙은새를 봤다
옥수수밭 옆 작은 숲속에서
내 낌새를 느끼고 푸드득 날았다
아주 잠깐,
그리고 불안한 착지
여전히 그 새가 늙었다는 걸 알 수 있는 거리다
가까이 다가가자
또 한 번 푸드득 날았다
먼저보다 더 잠깐
털빛이 세월에 삭았다
눈이 마주쳤다
피로로 가득한 늙은새의 눈
새도 내 피로를 읽었을까
먼저 고개를 돌려
내게서 먼 쪽으로 뒤뚱 걷는다
늙은새는 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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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복이네 - 물회를 먹다 -

​속초 중앙시장
몇 번을 물어야 찾아갈 수 있는 골목에
지역 택시기사도 잘 모르는 작은 가게
50년 된 단골들은 다 죽어 없어졌다는 또복이네
언젠가부터 다리를 저는 김말복 할머니가
손님들 또 오라고 지은 이름 또복이네
한 축에 만원하던 오징어가 두 마리에 만원이 되가는 세월을 견딘 곳
막내 아들뻘인 나에게 삼촌이라고 부르는,
사장님 나이따라 물회가 점점 달달해지는 또복이네
물회를 먹다가 설탕을 덩어리 째 씹어도 또 가게 되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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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들빼기 사랑

​고들빼기
흔하게 있지만 ​
​꽃이 피어도 눈에는 잘 안 띄는 식물
사랑은 무엇과도 같을 수 있으니
씀바귀면 어떻고 엉겅퀴면 어떤가
꽃말은 순박함​
줄기가 잎을 뚫고 나와 꽃을 피운다
스스로 상처 입히는 식물
사랑은 무엇도 될 수 있으니
고들빼기 같은 사랑은 순박한 고통
순박한 이들끼리
상처받고 상처받고
가슴이 뚫리는 고통 끝에 피어난 사랑
고들빼기 같은 사랑 

 

 

고들빼기  사랑(song ver)

씀바귀도 아니고 엉겅퀴도 아니네 고들빼기 1 5 6
흔하게 있지만 ​눈에는 안 보이는 고들빼기 1 5 6
​꽃이 피어도 눈에는 안 보이는 고들빼기 4 5 6
꽃말은 순박함​ 고들빼기 4 5 6

줄기가 잎을 뚫고 꽃을 피운다 3(7) 6
스스로 상처입히는 사랑 2 5 

사랑은 무엇도 될 수 있으니 4 5
씀바귀면 어떻고 엉겅퀴면 어떤가 6 3(7)

고들빼기 x4  6 5 2 5

나의 사랑은 순박한 고통 고들빼기
혼자서 상처주고 혼자서 상처받는 고들빼기
살을 뚫는 고통 끝에 피어난 고들빼기
씁쓸한 향이 나는 고들빼기

고들빼기 x4  6 5 2 5
고들빼기 x4  1 4 7b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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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 죽다

거미 한 마리 죽었다
양칫물을 뱉다가 알았다
수챗구멍에 들어간 연유는 알 수 없으나
여덟 개 다리로도 올라오지 못하였다
출장으로 집을 비운 며칠간
겨우 하수구 거름망을 차지했다가
절망속에서 죽어갔을 것이다
아니, 거미는 절망을 모른다
둥글게 몸을 마는 것으로
생의 마지막 힘을 다하고
배고픔에 죽었을 것이다
나는 죽은 거미를 그대로 두고
찬 방바닥에 눕는다
몸을 둥글게 말고,
배가 고프기 시작했다
발버둥은 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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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토요일이랑 일요일에 정선에 산불이 났다. 국유지 사유지 사이좋게 같은 동네에서 한 건씩 났다.

힘들다. 힘들어서 월요일 오후 조퇴를 썼다. 어디 드라이브라도 할까 싶다.

산불이 나서 힘든 게 아니다. 일이 힘든 게 아니다. 그냥 지금의 내 생활에 화가 나 있는 상태다. 나이 먹고 이런 권태기가 오니까 극복이 쉽지 않다. 일단 매일 아내 얼굴을 보면 나아질 것 같다. 그러지면 정선을 떠나야 한다. 정선이란 동네가 싫은 게 아닌데, 자꾸 동네 욕을 한다. 이거야 말로 좋지 않다.

일단 욕과 술을 줄이고 담배를 끊고 생활에 변화를 줘야겠다. 어떻게든 내가 극복하는 수 밖에 없다. 
AND

테트리스

​테트리스 꿈을 꾼다
길고 짧고 뭉툭하고 구부러진
블록으로 가득찬 세상
삶은 매일 다른 모양인 날들의 합
광대의 춤을 보고 악몽을 끝내려면
블록을 빈틈없이 채워 넣어야 하는데
그게 마음처럼 되지 않는다
추락은 점점 빨라지는데
기다리는 블록은 내려오지 않고
바닥에 닿지 못하고 쌓이기만 하는 블록
게임오버 게임오버 게임오버
컨티뉴 코인이 없어도
삶은 계속된다
AND

4월, 발 아래

민들레꽃 피는 계절에
이름에 대해서 생각한다
발 아래 작은 것들을 보는 일이 좋있다
그것들의 모양과 색과 이름,
거짓없는 생을 보는 일이 좋았다
제비꽃 바람꽃 얼레지
몇 개의 이름을 아는 일만으로도 배가 불렀다
당신이 내 이름을 불러주는 일로 어둡고 길었던 소년시절이 끝났다
당신에게 작은 것들의 이름을 알려 주는 일이 나의 사랑이었다
동풍이 부는 계절에 땅만 보고 걸으면서
당신 이름을 자꾸 부른다
이름이 실체가 되어 솟아 오르기도 한다
그러나 붙잡을 수 없는 이름을
거짓없이 지나간 이름을
이름을 모르는 봄꽃에게
영문도 모르는 봄꽃에게만
부르고 또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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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30 - 일기

그때그때 2019. 4. 30. 00:00
정선 fatigue

​재미없다. 회사에 있는 하루하루가 재미없다. 순간순간 재미있을 때는 있지만 전체적으로 그냥 좀 물렸다. 기안문 쓰는 것도 이런저런 보고 해주는 것도 아저씨들 뒤치닥거리 하는 것도 질렸다.
물리고 질리고 재미없다. 출근길에 병풍같은 산을 보면 화가 치민다. 
이걸 통합해서 정선 fatigue라고 이름 붙였다. 우리팀에 술자리 피하지 않는 사람들 성씨를 따서 염백유어 모임을 만들었다. 이런 사소한 것은 재미있다.
집에 잠깐 다녀오는 일로 환기가 되지만 잠깐 다녀오니 좋은 기분이 오래가지 않는다. 작년에는 아리아리시네마에서 영화를 봤지만 오래 가지 않았다. 기타 연습도 강릉에 있을 때보다 적게 한다. 책도 많이 읽지만 읽을 때 뿐이다.
이걸 적고 있는 지금 비가 온다. 축축하겐지 칙칙하겐지.
나는 나 하는 일이 싫다는 강박에 사로잡혀있다. 극복이 안된다. 다른 걸 해도 지금보다 낫다는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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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오길래
오랜만에 집에 다녀왔다.
아침 10시 안돼서 집에 도착했다.
아내랑 아내 회사까지 같이 걸었다.
봉봉 오픈 시간 전에 1등 손님으로 가서 커피를 두 잔 먹었다. 르완다도 맛있었지만 구지케차가 더 맛있었다. 봉봉은 기본으로 커피를 두 잔은 준다. 아 좋은 것. 동백씨 땡큐.
커피 먹고 집에 갔다가 아내 점심 시간에 맞춰서 다시 아내 회사에 갔다. 같이 밥을 먹고 집에 가서 한 숨 잤다.
오후 5시, 약간 피로했지만 다시 아내 회사로 갔다. 집을 나서자 마자 참새 한 마리가 입에 뭔가를 물고 나는 것을 봤다. 열 발자국을 채 못걸었는데, 멧새 한 마리가 입에 나뭇가지를 물고 날아갔다.
흐린날 오후에 길쭉한 걸 물고 날아가는 새 두 마리를 본 것이 마음에 남았다.
따끈한 국밥 종류가 먹고 싶어서 저녁으로 설렁탕을 먹었다. 보통으로 두 개 먹을랬는데, 사장님이 특 하나 보통 하나요? 물었을 때 그냥 그렇다고 했다. 아내랑 같이 웃었다. 거절을 못하는 유형의 두 사람이 부부로 산다. 
저녁을 먹고는 아내랑 또 걸었다. 아내의 약속 장소까지 같이 갔다가 혼자 집으로 돌아왔다. 창문 너머 나눈 마지막 인사에서 사랑을 느끼고 정선으로 차를 달렸다. 잘 도착했다고 나눈 카톡 글에서 또 한 번 사랑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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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럭회를 먹다

강원도 정선까지 날 보러 온 친구와
정선까지 죽으러 온 우럭을 먹는다
간장에 와사비를 풀고
얼마전 태어난 둘째 아이 이름을 묻는다
술병이 자빠지기 시작하고
친구에게 아이 이름을 묻는다
매운탕 국물을 뜨다가
다시 한 번 아이 이름을 묻는다
횟집을 나와서 담배를 피우다가
아이 이름을 또 묻는다
둘 다 술과 담배가 가까운 곳으로만 가던 시절이 있었다
10년 전 마지막으로 봤을 때도 우럭회를 먹었던,
친구에게 아이 이름만 자꾸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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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화가 있는 사람이다. 짜증도 잘 내고 쉽게 토라지고 욕도 잘한다. 화가 난다는 건 좁게는 주변일이, 넓게는 세상일이 내 맘 같지 않다는 것이다. 내 맘 같지 않은 걸 해결하려면 마음을 바꿔 먹으면 된다. 근데 마음이 마음대로 되면 마음이겠나. 마음을 바꾼다는 건 자존심도 상하고 세상에 지는 기분도 느끼게 한다.

아저씨 한 명한테 해고통지서를 보냈다. 산불 감시 근무를 서다가 초소 옆에 자작나무 물 빼먹는다고 구멍을 뚫었다. 경고장만 주고 해고는 하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윗선에서 해고를 원했고 법을 엄격하게 적용하면 임산물 불법 채취로 사법처리 할 수 있다. 사법처리도 그렇고 과태료 딱지를 떼는 것도 과한 거 같다고 윗선을 설득해서 근무지이탈 및 쓰레기 투기로 단순 해고로 결제 받았다.

근데 어제 이 아저씨가 화가 나서 전화했다. 자기는 쓰레기 투기한 적도 근무지 아탈한 적도 없으니 곧이곧대로 하고 싶다는 것이다. 가만히 얘기 들어주다가 화가 나서 알았으니까 사법 조사 받을 준비하라고 했다. 나를 쉽게 생각하나, 생각하니 화가 났다.

오늘 생각하니 이 아저씨도 일이 자기 뜻대로 안됐다. 나무 구멍 뚫은 일을 들켰고 본인 생각엔 별거 아닌일로 해고 당했다. 마음은 이해하지만 나한테 화를 내고 못되게 굴면 안된다.

내 돈 떼어 먹은 먼저 집 주인 할머니도 그렇고 세상을 오래 산 사람들이 왜 그러나 싶다. 세상을 오래 살아서 그럴수도 있다.

내가 좋아하고 나를 좋아하는 사람들 생각만 하면서 화 적게 내고 살아야지.

월요일에 오래된 - 또는 오래전 - 친구를 만났다. 취해서 작은 아이 이름을 자꾸 물었다. 아침에 해장국 먹다가 작은 아이 이름을 한 번 더 물었더니 친구가 네 번째 묻는거라고 하면서 다시 한 번 알려줬다. 정효. 그래서 그 이름을 잊지 않게 됐다.

오랜만에 강릉에 왔다. 봉봉에 오면 뭐라도 쓰고 싶다. 

씨팔, 그래 다 내 불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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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

빨래를 널고 방을 닦는다
탈수가 끝난 오래된 빤스에 흰 먼지 묻는다
내 몸에는 소용없게 된 것으로
작은 방에 겹겹이 쌓인 흔적을 문댄다
찢어진 빤스는 쓰레기봉투에 던져 넣고
아무리 훔쳐도 지워지지 않는 생활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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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오후 6시

​바람에 실려 오는 물큰한 공기
오늘은 종일 물냄새가 났다
제비는 낮게만 낮게만 난다
짝을 찾는 것이지 도망칠 곳을 찾는 곳은 아니다
낮과 밤의 경계에서 먼저 어두워진 하늘
곧 비가 오겠다
누군가의 부음을 들은 날
점점 짙어지는 퇴근길
다리 위의 사람들은 성급해 보인다
얼굴에 비 한 방울 떨어진다
나도 사람들도 도망칠 곳을 찾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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