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시도 때도 없이 운다. 그래도 일 할때는 안 운다.
어제 강릉 오는 버스에서 신문을 읽다가 울었다. 기사 내용은 5.18때, 서울의 시위대가 뿔뿔이 흩어졌던 얘기였다.
어젯밤에는 춘천에서 배운 것 복습 및 앞으로의 결의를 다지느라 울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 옥수수를 심었다. 이제 당분간 옥수수 모종은 없다. 비는 약하게와 강하게를 반복하며 내렸다. 약할 때는 심고 강할 때는 차에서 앉아 있다보니 딸랑 네 판 심는데, 시간이 좀 걸렸다.
어젯밤 꿈에 애요가 비대해진 몸을 이끌고 나와서 나를 안고 울었더랬다. 차에 앉아 있다가 애요네 집에 전화를 했다. 수다를 떨었다. 나처럼 덩어리 좋고 말을 사분사분하게 하는 청년이 손님으로 왔다가 공동체에 들어 앉았다는 얘기를 들었다. ^^; 그리고 애요한테 핸드폰이 생겼다는 걸 알았다. 전화를 끊자마자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울면서 테스트 문자를 보냈다.
- 문자 갔어? 종종 통화하자. 사실 형은 요즘 좀 자주 울어.
- 응 문자 잘 갔네. 근데 왜 울어?
- 몰라 시도 때도 없이 우네. 네 문자 보니까 또 운다. ㅎㅎ
- 무슨일 있구나 형
(왈칵)
- 아냐아냐 외로워서 그런 것 같어
- 으그
점심을 먹었다. 혼자 먹었다. 먹어도 먹어도 허기가 가시질 않아서 정말 많이 먹었다. 밥을 다 먹고 담배를 태우고 노래를 듣다가 울었다. 안되겠어서 다시 밭으로 갔다. 비가 펄펄 쏟아져서 잠깐 차에 들어와 앉았는데, 다시 눈가가 촉촉해져 왔다. 그때 똥이 마렵기 시작했다. 비를 맞으며 밭가에 똥을 누고 근처에 보이는 개망초를 꺽어서 뒤를 닦았다. 개망초 줄기를 두 개 겹치고 잎들로 잘 감싸서 닦으니 예전에 호박잎으로 닦았을 때 보다 여러가지 면에서 괜찮았다.
이제 눈물은 멈췄다.
외롭다고 많이 먹으면 병에 걸린다. 고등학생 친구의 문자를 받고 울면서 위로받는 일은 나쁘지 않은 것 같다. 그렇다고 자꾸 우는 건 좀 거시기하다. 오늘 비를 제법 맞았으니 몸살이라도 나서 땀을 쭉 빼고나면 남은 5월은 울지 않고 보낼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내 몸이 라고 내 맘대로 되진 않는다. 우는 것만 봐도 명백히 알 수 있다.
-> 눈물은 똥으로 멈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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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마신날은 내 이름이 새겨진 컵이 깨졌던 날이고, 적당히 마셨던 날은 외로움에 허기가 심했던 날이다. 자꾸 뱃속이 허전하고 뭔가 먹고 싶은데, 그게 뭔질 모르겠어서 그냥 술로 땜질(빵)했다.
이번주에는 안보 교육 같은 게 없어서 교육 내용은 충실했다. 실전 경험도 있고 이론적으로도 공부 많이 한 양반(Ph.D)들이 땅을 소중하게 여기면서 농사 지으라는 얘기들 들려줄 때는 심적으로 다져진다. 반면에 농사 안 지어본 양반들이 규모의 농사, 새로운 마케팅 기법을 이야기 할 때는 그냥 조용히 자거나 다른일을 한다.
낮에 강릉에 도착해서 안목엘 갔다. 제비 두 마리가 어느 가정집 지붕 위에 사이좋게 앉아 있었다. 제비를 본 게 참 오랜만이다. 기분이 좋았다. 우리 동네 논에는 오리 두 마리가 사는데, 항상 함께 날아다닌다. 그것도 기분 좋은 일이다. 또 우리 동네 논에는 비둘기 떼가 사는데, 전부 39마리고 항상 같이 다닌다. 그리고 우리 동네에는 매가 한 마리 사는데, 항상 혼자다.
사람은 매가 사는 동네에서 사는 게 좋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매가 아니다. 안목항에서 혼자 서 있는 등대도 봤다. 뭔가 다 맞아 떨어지는 게 심상치 않다.
켁
다음주는 약간 더 즐겁게~~ 그나저나 모내기가 너무 늦는다. 집에 와서 보니 모가 자랄만큼 자랐다.
강릉항에 홀로 선 등대
흐린날 해질녘 남대천변 - 오랜만에 천변을 걸으니 기분은 좋았다.
어제는 서울가서 고구미랑 마셨다. 중간에 기억이 끊어졌다. 확실히 술이 약해졌다. 기억과 망각을 동시에 일으키는 '술'의 특성을 생각해 볼 때, 술이 약해져도 약해진대로 좋다. 뭐랄까... 결정적이지 않은 상태로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지점과 같은 맥락이다.
다섯시 반에 일어나서 춘천행 버스를 탔다. 차창 밖으로 황사와 봄안개가 가득하고 청바지에는 자욱한 김칫국물 자국, 이어폰에서는 엘리엇 스미스가 부른 because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당신(들) 생각. 당신이 당신인지 당신이 아닌지, 아니면 다른 당신인지, 그렇다면 당신은 누군지........ 고추를 심으며 묻었던 당신(들)이 계속 머리를 때렸다.
교육원으로 걸어 올라오는 길에 거울이 있어서 내 모습을 봤다. 얼굴이 좋다. 활짝 핀 얼굴은 아니지만 몸 전체에서 은은하게 자신감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기분이 좋았다. 머릿속에 여전히 남아 있는 술기운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곤 옛날 생각이 났다. 고구미랑 '정영음'얘기를 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어제 안성의 '광신극장'이 없어졌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역시나 많은 것은(또는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
술에 떡이 되도록 취해서 했던 고백과 응답, 그리고 여관, 손에 묻은 치킨 기름이 아주 예쁘게 느껴졌던 일, 좌석표가 없는 극장 제일 앞자리에 앉아서 '식스 센스'를 봤던 일, 수원에서의 데이트, 이마를 스치고 지나간 바람 같았던 이별, 아침 7시에 강의실 앞에서 우연히 만나 함께 담배 피우며 묻던 '잘 지내?'란 말.
음................................
고구미, Thank You(언제나 그렇듯이 ^^; 항상 고맙게 ~^^;) 내가 예전에 줬던 티셔츠가 돌아왔네~(이런 사소한 것들이 감동적이야. ^^;)
몸은 깼는데, 머릿속에는 아직 술기운이 남아있다.
오늘 아침 먹으면서 작은아버지가 '원래 성격이 그렇게 느긋하냐'고 물으셨다. 어제 시험삼아 한 다래기만 갈아 엎은 게 맘에 안드셨던 모양이다. 마지막에는 '일을 틀리게 하더라도 빨리빨리 해야지'라는 말까지 들었다. 살면서 일 느리단 얘기 처음 들어봐서 살짝 충격 받았다. 고무신 신고 설렁설렁 다닌다고 일하는 속도도 느린건 아닌데.... ㅡ.ㅡ;
아침 먹고 논을 갈기 시작했다. 트랙터 바가지로 논둑도 까고, 높은데 있는 흙을 낮은 자리로 옮기면서 열심히 했다. 세 시간 동안 두 다래기 밖에 못 했다. 그렇지만 여섯 다래기 밖에 안 남았고 남은 논들 중에는 논둑을 깔 곳이 없으니 오후에는 다 끝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점심 챙겨 먹고 논에 가려는데, 논 옆에 물길을 정비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결국 오후에는 계속 삽질했다. 중간에 힘들어서 소 여물주면서 잠깐 쉬었다. 7시쯤 다 끝냈다. 삽질하는 중간에 지나가던 동네 분들과 몇 마디씩 나눴다.
"오전에는 논 삶더니, 저 논 자네가 삶았나? 처음 삶아보는데 잘 삶네. 앞으로 많이 배워서 남의 집 일도 해주고 해야지." 등의 얘기를 들었다. 칭찬 받았다. 기분 좋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고무신 신고 설렁설렁 다닌다고 일하는 속도가 느린 건 아니다. 어제는 비도 오고 내가 트랙터를 좀 싫어하는 측면도 있고 해서 일부러 한 다래기만 갈았던 거였다.
각설하고, 논일은 재미있다.
변산에서 논에 김 매던 생각이 난다. H는 김 매다 말고 뒤 돌아서서 논에 오줌을 갈겼고, - 이게 다 거름이 된다는 말을 남겼다. - 어느날에는 다들 지쳐서 오후 참 먹고 벌렁 드러 누워서 뭉개다가 다들 취하도록 막걸리를 먹었더랬다.
그때 일은 그냥 생각만 하고 나는 지금의 나에게 충실한 게 중요하다. 그때는 일만 생각하면 됐다면 지금은 생활을 생각해야 된다. 아직까지는 잘 하고 있는 것 같고 앞으로는 점점 더 좋아질 거라고 생각한다. ^^;
영재한테는 계속 존대말을 하는데, 내가 '영재 씨'하고 부를 때, <백의 그림자>의 '무재 씨'를 부르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좋다. 그가 '형'하고 나를 부를 때, 나는 '은교 씨'가 된 것 같은 기분이다. 대화할 때는 존대하고 글로 쓸 때는 그냥 이름 적어버리는 관계는 참 좋은 것 같다. ^^ - 서울가면 꼭 연락할께요. -
내일도 파이팅하자!!!
오후, 작은아버지는 비닐위에 로타리를 쳤고, 나는 관리기로 두둑 잡았다. 관리기 로타리에 검정 비닐이 걸려서 막 돌아갔다. 내 마음은 검고 어지럽다.
작은아버지의 생각 - 고추는 자랄만큼 자랐는데, 토요일에 비는 온다고 하고, 내일까지 무조건 비닐을 씌워야겠다.
내 생각 - 토요일에 비가 많이 오지 않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일요일에 비만 오지 않으면, 일요일에도 밭에서 일 할 수 있다. 비닐은 그때까지 씌우고 월요일, 화요일에 비가 온다고 하니 그때 심으면 고추 심고 물 안줘도 되니까 일하기는 더 좋다. 천천히 일하면 좋겠다.
결국 내일 쎄가 빠지도록 비닐 씌우게 생겼다. 사람도 한 명 불렀다고 하신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는데....... 비닐밭에 로타리 치는 것도 막지 못하는 내가 무슨 힘이 있겠나. 그냥 푸념이다. 이래놓고 나중에 비닐밭에 고추가 열리면 그 고추 따 먹겠지.... 에효~~
기왕 이렇게 된거 토요일에 비나 실컷 왔으면 좋겠다. 바다 가야지~~~
4월 마지막 주말에 고추밭에 소똥 거름을 냈다. 헉! 밭에 비닐이 덮여있었다. 작년에 다른 사람이 옥수수 심었던 밭이어서 작은아버지도 비닐이 안 걷힌 걸 그때 아셨다. 그런데, 비닐을 걷지 않고 계속 거름을 냈다. 나는 속으로 '이건 농사가 아닌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춘천에 가서도 고추밭 때문에 기분이 쭉 별로였다. 일주일만에 컴백했는데, 고추밭은 그대로였다. 월요일에는 석회비료랑 맞춤비료를 뿌렸다. 기계는 자꾸 멈추고 - 결국 마지막에는 손으로 뿌렸다. 성에 차더라. ^^; - 비닐 때문에 계속 마음은 어두웠다. 그날 저녁을 먹으면서 넌지시 물었다. "비닐은...?" "걷어야겠지?"란 대답이 돌아왔다. 비닐 위에다 로타리 그냥 치겠다고 하셨으면 의절을 심각하게 고려할 뻔 했다.
어제랑 오늘에 걸쳐서 비닐을 걷었다. 풀들이 쑥쑥 자라는 시기인데다가 사람들이 하도 밟고 다녀서 비닐 제거가 쉽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오늘 오후 6시 30분 경에 비닐 제거를 마쳤다.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아졌다. 그렇지만 허리는 끊어질 듯 아프다.
작년에는 모든 작물이 다 망한 가운데, 고추도 흉작이었지만 올해는 고추 대풍을 기대해 본다.
저녁 때 기타를 깔짝거리고 있는데, 둘째 이모한테 전화가 왔다. 개두릅이랑 곰취를 채취해서 보내라고 하셨다. 일단 알았다고 했다. 그런데, 우리동네에는 곰취가 많이 없고, 개두릅은 우리걸 다 먹은 관계로 남의 것을 몰래 훔쳐야 하는 상황이다. 결정적으로 내가 너무 힘들어서 사진 찍을 짬도 못 내고 있다. 시골에 있다고 뭐든지 그냥 펑펑 나는 건 아니다. 오늘도 아침 6시부터 저녁 6시 30분까지 한 시간 정도만 쉬고 계속 일했다.(밥 먹는 시간 포함 ㅡ.ㅡ) 작은아버지랑 작은어머니는 사람들이 좋아서 그런지 뭔가 부탁을 받으면, 남한테 사서라도 꼭 보내주려고 하시는데, 나는 그렇게 좋은 사람은 아니다.
이모 죄송해요~~~ 춘천 가면 시간 많으니까 아침으로 산에 다니면서 좀 뜯어 볼께요.
엄마, 쑥 뿌리도 제가 춘천 갈 때까지 기다려 주세요.
올 봄에 봤던 풍경들 중에 가장 아름다웠던 장면은 동네에서 노인 한 분이 경운기로 논을 가는 모습이었다. 해는 뉘엿뉘엿 넘어가는데, 아저씨는 풍경화 속의 노인이 되서 일을 하고 계셨다.
나는 언제쯤 풍경이 될 수 있을지에 대해서 가끔 생각해본다. 경운기 아저씨, 나물을 캐는 아낙네들을 나는 먼 발치에서 감상하고 있을 뿐이지 않은가? 결국 나는 내 삶을 쫓지 못하고 내가 바라보는 풍경들만을 추상화하고 있는 게 아닐까? 물론, 나도 뭔가 할 때는 무척 몰두하는 편이긴 하다. 그런 나를 외부에서 바라보면 나도 하나의 풍경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걸로는 뭔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괜한 걱정이다.
오늘은 동료 교육생들이랑 축구를 했다. 나는 축구를 싫어하지만 가끔은 숨이 턱을 넘어오도록 달리고 나면 속이 후련해 질 때가 있다는 걸 알고 있다. 그리고 고무신 발로 한 골 넣었다.
정진규의 시와 르 귄의 문장이 모두 같은 맥락에 있으니 풍경에 대한 내 고민은 꽤나 오래됐고 깊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요즘 변산에 있을 때, 생각이 많이 난다. 그때가 아마도 내가 스스로 풍경이 되었던 시절이었기 때문인 것 같다.
진정성을 갖고 농사를 지어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가진 것이 없으니 더욱 그래야 한다.
정말 오랜만에 목청껏 노래를 불렀다. 기타를 배우길 정말 잘했다. 그렇지만 외롭다. 에효
나는 지금 교차로에 서있다. 크로스로드란 영화에는 악마와 계약한 로버트 존슨에 대한 일화가 나온다.
가난해도 내 성에 차게 사는 일은 악마의 유혹을 뿌리치는 것과 비슷할지도 모른다.
외롭다고 울지마라. 토닥토닥~~
iPhone 에서 작성된 글입니다.
친구는 내가 갖지 못한 것을 많이 가졌다. 강한 힘과 명석한 두뇌는 타고나는 측면도 있으니까 젖혀두기로 하더라도 그는 아내와 아이, 집과 차를 가졌다. 그에겐 없지만 내게 있는 것은 '여유'일까? 친구는 내게서 여유를 빌리기 위해 먼 길을 왔다.고 하고 싶지만 사실은 그냥 내 얼굴도 보고 머리도 식히러 왔다.
우리는 담배 연기로 방을 자욱하게 만들고 술을 마시며 얘기를 나눴다. 사실 내가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은 "여유를 좀 가져." 뿐이었지만 외로운 나는 친구를 붙잡고 쉴 새 없이 떠들었다.
그리고 우리는 바다에 갔다. 경포는 사람이 많을 것 같아서 안목으로 갔다. 우리는 바닷바람을 맞으며 커피를 마셨다. 안목항에는 무척이나 여유로워 보이는 낚시꾼들이 있었고, 해변을 걷는 연인이 있었다.
친구가 온 덕분에 나는 아침밥도 거르고 실컷 잤다. 산불조심과 함께 시작된 보름간의 피로가 싹 풀렸다. 몸이 오랜만에 제 기능을 찾은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여유를 찾아서 나를 찾아온 친구는 그것을 찾았을까?
들러줘서 고맙고, 항상 고맙게 생각해.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면사무소에서 철수하라는 문자를 받고 잽싸게 집에 돌아왔다. 내가 운전하던 차는 식구들이 꼬마차라고 부르는 '라보'. 왼쪽으로는 도랑이 흐르고 오른편에 창고로 쓰는 하우스를 지나 두엄자리 왼쪽에 있는 낮은 비탈에 차를 세웠다. 비탈이라고는 하지만 30cm정도 높이고 비탈을 오르면 평지인 곳이다. 꼬마차가 들어가기에 딱 좋은 장소인 것이다. 모든 것은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2단 기어에 차를 세우고 기어를 중립에 놓은 뒤 차가 살짝 뒤로 밀리는 느낌을 받고 내일 아침에 바로 후진으로 나가야 되니까 기어를 후진으로 옮겼다. '얼른 자야지' 생각하고 빠른 속도로 차에서 튀어 나왔다. 도랑을 건너 집에 들어가다가 잠깐 뒤를 봤는데, 차가 도랑으로 후진하고 있었다. '쿵'하더니 뒷바퀴 두 개가 다 도랑에 처박혔다. 도랑 바닥에서 지상까지의 높이는 1m 30cm 정도다. 꼬마차는 앞바퀴 두 개만 지상에 달랑 내밀고서는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30분 만에 출동한 레카차는 10분 만에 차를 꺼내더니 3만원을 받고 유유히 사라졌다.
사라지는 레카차를 보면서 작은아버지, 작은어머니께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하고 "물의를 일으켜서 죄송합니다." 라고 했다. - 이 대사를 정말 오랜만에 했다. - 두 분은 웃으셨다.
사진을 찍어두고 싶었는데, 물의를 일으킨 입장에서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아쉽다.
며칠 전에는 낮에 바쁘게 일하다가 산불 출근 시간에 늦었었다. 급한 마음에 꼬마차를 후진으로 빼다가 오른쪽 뒷바퀴를 도랑에 걸친 적 있었다. 이 정도는 '물의'라고 부르기 어렵다.
급한 마음
작은아버지는 일할 때, 마음이 급하시다. 농사를 오래 지으셨으니 일이 익숙할만큼 익숙한데다가 농사일을 빨리 마쳐야 저녁 때, 본업인 수정일을 빨리 마치고 집에 오실 수 있기 때문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반면에 나는 일이 익숙하지 않은데다가 누가 재촉하면 일하는 속도가 느려지는 스타일이다. 나는 가만히 혼자서 내버려두면 차분하고 빠르게 일을 처리하곤 한다. 엄마를 닮아서 정말 다행이다. 하지만 농사일이 많이 익숙해지면 내게도 급한 마음이 생길거라고 생각한다. 일을 빨리하면 많이 놀 수 있으니까 그렇다. ^^
쓰레기, 농부
오늘은 옥수수 심을 밭에 소똥 거름 내고, 밑거름 뿌리고, 로타리 치고 두둑 잡고 비닐도 조금 씌웠다. 그래 우리집은 화학비료, 농약, 비닐을 모두 사용해서 농사를 짓는다. 감자밭에는 살충제를 뿌렸는데, 이번에는 뿌리지 않았다. 무농약 인증 때문인 것 같다. 우리 동네 논 두렁, 밭 두렁에는 비닐, 빈 농약 병, 음료수 캔 등 각종 쓰레기가 즐비하다. 나는 쓰레기를 잘 치우는 농부가 되고 싶다. 아까 점심 먹으러 집에 오다가 빈 맥주 캔이 보이길래 낫에 찍어서 집에 가져왔더랬다. 작은아버지가 "그런 건 뭐하러 주워오나!"라고 하셔서 "쓰레기를 잘 치워야죠."라고 했다.
농부는 직업을 부르는 말이다. 나는 내가 선택한 직업이 무척 마음에 든다. 요즘 이런 생각을 했다. 자기 먹을거리는 무농약, 무비닐로 깨끗하게 키우고, 남에게 파는 것은 약 팍팍쳐서 키우는 사람은 농부가 아니다. 그이의 직업은 비즈니스맨이다. 반면에 농약 많이 묻혀서 키운 농산물을 암시렁않게 먹을 수 있는 사람은 농부다. 나는 농부후보생이다. ㅎㅎㅎ
농기계
우리집에 기름을 먹는 농기계로는 경운기, 트랙터, 두발관리기(외발관리기와 구분), 비료살포기가 있다. 나는 이것들의 작동원리는 대충 다 알고 있고, 필요에 따라서 기계를 사용해서 하는 일도 곧잘 한다. 그런데, 성격 때문인지 내가 다루는 것들을 자세히 알고 싶다는 열망에 사로잡히곤 한다. 하지만 자동차 운전은 너무 일상적인 것이어서 자동차의 작동원리에 대해서 잘 알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뭔가 이상한 마음가짐이네. 자세히 알고 싶다는 것이 작동원리를 알고 싶다는 것이 아니구나. 피곤해서 쓰다보니 이상하게 되버렸다. 그냥 각종 농기계들을 자동차 운전하는 정도로는 일상적으로 다루고 싶다. 열망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든다. 하지만 이런 마음을 열망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4월들어 무척 피곤하다. <농사일 + 산불감시 = 기타랑 놀 시간 없음> 때문인데, 그래도 오늘로 감자는 다 심었다. 다음은 옥수수겠지...
강릉에서는 비탈밭을 배알밭(베알밭)이라고 부르는데, 배알밭을 갈고 - 로타리 친다고 하는데, 왜 그렇게 부르는 지는 영원히 알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 두둑 만들고, 비닐 씌우고, 심느라고 힘들었다. 밤에는 추위에 떨면서 박정희랑 박근혜 얘기 듣느라고 힘들었다. 어제는 독재를 옹호하는 얘기와 노조를 다 없애치워야 한다는 얘기까지 들었다. 그래도 이제 요령이 생겨서 하루에 삼십 분 정도만 그런 얘기를 듣는데 할애하고 있다.
여튼, 요즘 무척 피곤하다.
박카스랑 봉지커피로 나를 유지하는 것은 한계가 왔다. 그렇지만 오늘도 비타500 두 병이랑 봉지커피 다섯 잔을 마셨다.
어제 이 시간에 자려고 누웠다. 너무 힘들어서 양말을 신고 자기로 결정했다. 그랬다가는 이내, 그래도 양말은 벗고 자야겠다고 생각했다. 오른 쪽 양말을 벗었다. 아침에 일어났다. 왼쪽 발에 양말이 신겨져 있었다. 어이가 없어서 혼자서 웃었다. 아무리 피곤해도 즐겁게 느껴진다면 나쁘진 않다.
아무리 바쁘고 피곤해도 경포호에 벚꽃은 보러 가야겠다.
4월이다. 봄철 산불조심 알바를 다시 시작했다. 함께 일하는 파트너가 바뀌었다. 이번에도 공직생활을 오래하신 연세가 지긋하신 분과 함께다. 나는 주로 얘기를 듣고 맞장구를 쳐주는 쪽이기 때문에 크게 바뀐건 없다. 아저씨가 DMB로 KBS뉴스를 보시더니 박정희 예찬을 늘어 놓으신다. 박정희가 기와집을 지었는데, 다음 대통령들은 집에 세간을 들일 생각은 하지않고 기왓장을 팔아먹었다는 맥락이다.
어제 아침을 먹다가 작은어머니께 새 파트너가 박정희를 좋게 얘기해서 들어주느라 혼났다고 말했다. (괜히 말했다. ㅡ.ㅡ) 작은어머니께서는 "나도 좋아하는데."라고 하셨다. 최근 작은어머니는 독도 관련 뉴스가 나오면 격분하시면서 저런 놈들을 도와줘야 하냐고 자주 묻는다. 그러면 나는 우리나라에도 밥을 굶는 사람들이 많은데, 교회에서 해외선교를 나가는 것과 비슷한 게 아니냐고 묻고 싶기도 하지만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다.
내 새 파트너분께서는 박정희 얘기를 하시면서 북한에다가 이것저것 다 갖다 퍼줬다면서 DJ와 노무현을 욕했다.
그러니까 두 사람은 비슷한 과정의 사유를 하고 계신듯하다.
중요한 사실은 박정희는 일본사람이고 한일수교를 맺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 따님께서 쿠테타를 일으킨 전두환에게 돈을 받았다는 사실은 곁가지로 알아두자.
작은어머니는 이스라엘을 좋아하신다. 성지순례도 다녀오셨다. 나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관계는 일본과 우리나라의 관계와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분명한 사실은 박정희는 일본사람이라는 것과 배고픈 시절을 겪었던 대한민국 국민들 중에 다수가 박정희를 좋아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건 내 생각인데, 박정희를 좋아하는 사람들 중에 다수는 일본이라는 나라를 싫어하는 것 같다. 그리고 우리나라가 경제성장 과정에서 일본을 따라하지 않은 것은 AV 산업 밖에 없는 것 같다.
그냥 좀 이상해서 적어둔다.
요새 '빅뱅이론'을 보고 있기 때문에 조금 삐딱하게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아침 여섯 시 반에 마구간에 올라가서 소들한테 사료를 줬다. 오늘은 젖소들 10마리가 한꺼번에 경기도 가평으로 팔려나가는 날이다. 얼룩이의 움찔거리는 표정과 구유 바깥으로 사료를 다 흘리면서 쩝쩝거리는 먹쇠를 보는 것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엄청 섭섭했다. 그래서 젖소들한테는 평소보다 사료를 많이 줬다. 그네들은 자기들의 운명도 모르고 잘 먹는다.
아침을 먹고 여덟시에 마구간에 다시 올라갔다. 이번에는 송아지들 귀에 번호표를 찍었다. 오른쪽 귀에는 번호표를 왼쪽 귀에는 그냥 동그란 플라스틱을 찍는다. 나는 송아지들을 붙잡고 작은 아버지는 번호를 찍는다. 마치 예전에 봉제공장에 다닐 때, 새 옷에 가격택을 찍듯이 송아지들 귀에 번호표를 찍는다. 순돌이, 순규, 순영이, 순달이, 순식이까지 다섯 마리는 이제부터 다른 사람들에게는 번호로 불릴 것이다. 순돌이는 귀에 피가 났다. 얼마나 아팠을까? 작은아버지는 괜찮다고 하셨다.
젖소들을 차에 실었다. 역시나 예전에 봉제공장에 다닐 때, 옷 박스를 화물차에 싣듯이 마구 실었다. 끝까지 타지 않으려고 힘을 썼던 한 마리는 결국 밧줄과 트랙터를 연결해서 압도적인 힘으로 짐칸에 구겨 넣었다. 3.5톤차가 오는 바람에 여덟 마리만 차에 태웠다. 임신하지 않은 것으로 판명된 두 마리는 좀 더 키워서 새끼 낳기 서너달 전에 팔기로 했다. 짐짝이 되어 구겨진 소들을 태우고 가평까지 달렸다. 마음이 편하질 않았다.
젖소들의 새 주인이 된 아저씨는 구제역 파동으로 소 198마리를 묻었다고 한다. 돈은 많이 벌겠지만 한 마리, 한 마리에게 애정을 가질 수 있을까? 그래도 젖소들의 새 집은 우리 외양간 보다는 널찍하고 좋은 환경이었다.
저녁에 사료를 주러 올라갔더니 소들이 왜 이제 오느냐면서 일제히 울어 제낀다. 사료를 부어주고 짚단을 올려주는데, 짚단에서 물컹한 것이 만져진다. 자세히 보니 아직 몸을 가누지 못하는 어린 쥐다. 분홍색이다. 예쁘다. 두 마리다. 대수롭지 않게 소들한테 던져버리고 그 짚을 소들에게 줬다.
저녁 먹으면서 작은아버지에게 그런 걸 먹여도 괜찮냐고 물었더니, 아무 문제 없다고 하셨다.
소들은 나한테 위로를 주는데, 나는 소들한테 먹을 것만 준다. 가끔은 위생적으로 매우 불결한 것도 준다. 소들도 그렇게 생각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나는 뭔가 뒤틀린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소들도 나같은 마음일 거라고 생각하면서 소들을 대해야겠다.
내가 사랑해마지 않는 내 동생께서는 빚더미 위에서 살고 있다. 당연히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누군가(엄마)에게 미안해하지도 (스스로에게)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 그러면서도 - 또는 그렇기 때문에 - 내 명의로 되어있는 서울집의 인터넷 요금을 자꾸 밀려서 나한테 독촉 문자가 오게 한다. 한 번만 더 문자 오면 얘기 안하고 해지해 버려야겠다고 생각했다.
페이스타임으로 조군이랑 통화를 했다. 화질이 선명하다. 또 레티나 디스플레이는 확실히 아이팟 터치 2세대의 디스플레이와는 다르다. 확실히 이것은 미래다. 미래라는 것은 상상했던 상상하지 않았던 찾아온다. 나는 SF소설을 무척 좋아하지만 친구랑 화상통화를 하는 미래를 상상해 본 적은 없다. 나는 아이폰도 샀고 여전히 최신형의 각종 device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더 이상의 미래는 원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다가오는 미래를 피할 수는 없다.
술이 취해서 썼던 지난번 글을 보니까 적나라한 게 있어서 좀 부끄러웠다. '이 세계는 파국으로 가고 있다'느니 하는 문장이 마음에 걸린다. 변산에서 H형이랑 자주 했던 얘기다. 그렇지만 우리 둘 다 미래 앞에 잘 살고 있다.
내가 농부가 되기로 한 건 이 세상이 끝나는 순간이 왔을 때, 내 직업이 농부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겠다. 어디가서 이 얘기를 할만한 곳이 없어서 자꾸 잊게 된다.
오늘 작은아버지와 했던 문답 두 가지
(농협 이사 선거 때문에 사람들이 돈을 많이 쓴다는 얘기와 서로 다투고 있다는 얘기들을 한 후에)
나중에 조합장 나갈 생각있나?
저는 정치 무용론자라서
(오전에는 상토도 옮겼고 하우스에서 고추 작업하느라고 꽤나 몸이 힘들었다.)
농촌이 만만치 않지?
아직은 현실이 아니라서 잘 모르겠어요. 현실이 되면 힘들어 질까요?
늦었네, 자야겠다. ㅋㅋ
작은아버지 내외가 울릉도로 여행을 가셨다. 2박 3일이지만 아침에 가셨다가 밤 늦게 오시는 일정이기 때문에 내게는 혼자서 있을 수 있는 온전한 3일이 생겼다.
시골에서 혼자 산다는 건 어떤걸까?
목요일 새벽에 송아지가 태어났다. 오전 내내 송아지를 관찰했다. 젖을 물지 않길래 젖병에 젖을 짜서 먹이려고 했는데, 젖이 나오질 않는다. 흠.... 어미에게 문제가 있는걸까? 잠시후에 송아지는 세차게 어미 젖을 빨기 시작했다. 이번 송아지 이름은 순달이가 좋겠다. 현재 외양간에 살고 있는 네 마리 송아지들 중에 가장 예쁘게 생겼다. 송아지가 어미 젖도 빨았으니 크게 할 일이 없다. 마트에 가서 담배와 맥주를 샀다. 첫 번째 페트를 비우고 나서 오른손 손톱을 잘랐다. 반만 잘랐다. 예쁘게 길러서 기타에서 멋진 소리가 났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두 번째 페트를 비우고 나서 손톱을 마저 잘랐다. 굳은살도 잘라냈다. 지금 이렇게 잘 지내고 있는데, 뭐가 그렇게 새로 시작하고 싶었던 걸까?
금요일 아침, 어제 자른 손톱 때문에 후회가 밀려왔다. 굳은살을 너무 많이 잘라내서 손끝이 아리다. 그래도 기타소리는 정직하니 다행이다. 오후에 친구가 왔다. 어머니가 담근 복분자주를 들고 왔다. 혼자서 신나게 마셨다. 신나게 마신만큼 신나게 떠들었다. 취해서 떠든일에 대해서 후회할 나이는 이미 지났다. 그런 기분이 나를 더욱 떠들게 만들었다. 친구는 나랑은 달라서 농사는 부업으로 글쓰는 일을 주업으로 하고 싶다고 했다. 그래, 어차피 이 세계는 파국으로 가고 있으니 뭐든 나쁘지 않겠다.
토요일, 2시 가까워 잠들었는데, 7시에 깼다. 술이 덜 깼지만 차를 끌고 외양간에 올라갔다. 소들은 내가 없으면 굶어 죽고 나는 소들이 없으면 외로워 죽는다. 이거야말로 완벽한 관계다. 한우 한 마리가 새끼를 낳을 것 같은 기미를 보여서서 순달이랑 순달이 엄마(9240)이 있는 칸으로 옮겨줬다. 송아지들한테는 이름을 지어주지만 어미소는 번호로 부른다. 마치 SF영화(블레이드 러너)에서 안드로이드들을 부르는 것 같다. 밤사이 일본에는 지진이 났다. -'도쿄 매그니튜드' 같은 작품이 괜히 나오는 건 아니다.- 7번 국도를 타고 신나게 달려서 친구를 주문진에 내려줬다.
내가 강릉에 내려온 다음에 많은 친구들이 '한 번 놀러갈께'라고 했지만 실제로 놀러오는 사람은 거의 없다. 변산에서도 그랬다. 친구들이란 것은 '우리 언제 밥 한 번 먹자' 또는 '언제 술 한 잔 해야지'랑 같은 맥락으로 '놀러 한 번 갈께'라는 말을 쏟아낼 뿐이다. 놀러 온다는 말을 실천에 옮겨준 친구가 무척이나 고맙다.
35486은 꼬리를 동그랗게 말고서 앉았다 일어났다를 반복하면서 힘을 줬다 뺐다를 반복했다. 그렇지만 새끼를 낳지는 않았다. 한참을 관찰했다. 새끼를 낳더라도 밤 늦게나 내일 새벽에 낳을 것 같다. 소들 저녁밥을 주고, 집으로 내려와서 김치 부침개를 만들었다. 건강을 위해서 올리브유를 사용했다. 어제 다 해치우지 못한 복분자주를 먹었다. 일본에서는 대지진이 발생했는데, 대한민국 강릉에 사는 나는 김치 부침개를 안주로 복분자주를 먹는다. 이건 필리핀 산 바나나 한 송이를 1,500원에 파는 것 만큼이나 weird한 상황이다. 우리의 삶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다른 나라의 소식을 굳이 뉴스에 내보낼 필요가 있는걸까?
허망함이 허무하게 밀려든다.
외롭다.
나는
외롭다.
강릉오는 버스에서 한 시간, 어젯밤에 열 시간, 오늘 오전에 세 시간을 잤다. 서울독(毒)을 씻어내기에 충분한 시간이었을까?
오후에 눈을 뜨니 아침에 내리던 비가 눈으로 변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자 바닥에 닿은 눈이 녹는 속도가 눈이 내리는 속도를 이기지 못해서 눈이 쌓이기 시작했다. 눈이 치울만큼 쌓였을 때, 마당으로 나갔다. 며칠만에 잡아보는 눈삽과 손수레가 낯설지 않다. 열심히 치웠지만 눈은 내가 치우는 속도보다도 빠르게 쌓여 갔다.
치운 눈은 손수레에 담아서 집 앞을 흐르는 도랑에 버렸다.
아뿔싸,
물이 검다. 평소에는 몰랐는데, 물이 검다.
검은 물 위에 흰 눈덩이들을 쏟아 부었다. 눈이 검게 물들었다.
이번 생(生)은 틀린걸까, 하는 터무니 없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독(毒)과 검은물 때문이다. 대설 때문이다.
눈은 쌓이지만 2월은 저물었다.
살랑살랑 소 아침 여물 주고, 살랑살랑 고추 모종에 물 주고, 살랑살랑 트럭을 몰고 구정면에 가서 등겨 실어오고, 살랑거리면서 소 저녁 여물 줬다.
지난 한파에 자동수도가 고장나서 말통에 물 받아 나르느라 신체단련이 많이 됐는데, 오늘 드디어 동파된 곳을 찾아내서 수도를 고쳤다. 무척 기쁘다. 소들은 덩치만큼 물도 많이 먹기 때문에 아침저녁으로 20마리가 넘는 소한테 물을 날라주는 일은 끝없이 흘러 내리는 모래로 산을 쌓는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로 힘들었더랬다. 휴우~~
밤에는 모처럼 시내 나들이 갔다. 옥상이 무방비로 뚫려있는 건물을 발견해서 기분이 좋아졌다.
그리곤 시내 커피숍에 혼자 앉아서 마음에 드는 글을 썼다. - 이게 제일 마음에 든다.
오후에 소가 새끼를 낳았다. 송아지가 나오는 장면을 처음 봤다. 작은아버지랑 함께 송아지 다리를 붙잡고 어미소 뱃속에 있는 녀석을 힘껏 잡아당겨 꺼냈다. 소도 송아지도 사람도 힘든 시간이 지나고 송아지가 쑥 하고 빠져나왔다. 작은아버지는 갓 태어난 따끈한 송아지를 울타리에 걸쳐 놓고 깨끗하게 닦아주셨다. 나는 새 생명의 뜨거운 열기를 두 손으로 느끼면서 녀석을 붙잡고 있었다.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을 것 같은 감촉이었다. 작은아버지는 양수 때문에 막혔을지도 모르는 송아지의 콧구멍에 입을 대고 빨아들이고 뱉어내기를 몇 번이고 반복하셨다. 저녁에는 송아지한테 젖을 물리기 위해서 젖병을 빨게 했다. 젖을 빨고 이틀만 지나면 펄쩍펄쩍 뛰어다닌다고 한다. 뛰어다니기 시작하면 사진도 찍어주고 친하게 지내야겠다.
짤방은 멀리서 송아지를 지켜보고 계시는 작은아버지, 고개를 앞으로 숙이고 계셨더라면 이 사진이 올해의 베스트 샷이 될 뻔했는데, 아쉽다. 손에 들고 계신 것은 눈삽인데 눈 치우는 용도 보다는 다른 용도로 활용할 때가 많다.
사진에 보이는 것처럼 소는 발굽이 두 개다. 구제역은 발굽이 두 개인 동물한테만 생긴다.
예전에 강릉에서는 구제역과 비슷한 증상을 보이는 소가 있으면 소 혀에 왕소금을 박박 문대거나 발굽사이에 생긴 수포(물집)를 인두로 지졌다고 한다. 그래놓고 소가 살아남으면 좋고 죽으면 죽는대로 잡아 먹어서 좋았던 것이다. 그리고 구제역은 치사율이 높지 않다.
어른들께 들은 이야기라 기억해 둔다.
사진에 찍힌 젖소는 이름이 '얼룩이'다. 물론 젖소들은 다 얼룩얼룩하다. 얘는 낯을 많이 가려서 사료를 먹다가도 사람이 다가가면 사료통에서 고개를 뺀다. 그리고 다른 소들한테 힘에서 많이 밀리는지 자기 몫을 잘 못 챙겨 먹었었다. 같은 칸에 있는 소 다섯 마리 중에서 가장 먼저 새끼를 낳을 소인데 다른 애들에 비해서 너무 말랐다. 그래서 요즘에 특별관리하에 두고 엄청나게 많이 먹이고 있다. 그랬더니 약간 살이 붙는 것 같다.
사진은 약간 사나워보이게 나왔는데, 실제로는 엄청 순하게 생겼다.
가운데 있는 소가 '먹쇠'다. 먹쇠는 얼룩이랑 같은 칸에서 살고 있는데, 사료 먹을 때, 고개를 빳빳하게 쳐들고 우악스럽게 처먹는다. - 나머지 소들은 대체로 고개를 쳐박고 먹는다. - 작은아버지가 가끔 "이 새끼 또 고개를 쳐들고 처먹네."라고 하시면서 사료 먹고 있는 놈 이마를 툭툭 때리신다. 그래서 가끔은 나도 따라한다.
구제역 때문에 난리다.
지금으로부터 약 20년 전, 동네 누나랑 같이 그 누나 친척집이 있는 해남에 놀러 갔었더랬다. 동네를 산책하고 있었는데, 풀 뜯어 먹으라고 산비탈에 매어 놓은 소 한 마리가 절뚝거리고 있었다. 앞다리가 부러졌다고 했다. 동네 사람들끼리 쑥덕거리더니 아저씨 하나가 대형망치(일명 오함마)를 갖고 와서는 소 정수리를 정통으로 때려버렸다. 소는 그 한 방에 무너져내렸다. 그날 저녁에 소고기 미역국을 먹었다. 소 주인이 동네 사람들에게 고기를 조금씩 나눠줬다는 얘기를 들었던 것 같다. 그때 먹은 미역국이 지금도 머릿속에 생생하게 남아있다. 물론 소를 죽이는 모습이 더 생생하게 남아있다.
지금은 소가 태어나면 등록을 해서 끝까지 이력을 추적하는 시스템이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20년 전처럼 동네에서 잡은 소고기를 먹지 못한다. 강릉만 해도 도축장이 없어서 강릉에서 키운 소가 대관령을 넘어 가서 고기가 되고 다시 고개를 넘어서 마트에 안착하는 시스템이다. 약간은 비효율적인 것 같기도 하다.
아무리 소고기의 등급을 나누고 확실하게 이력추적을 한다고 해도 유통과정에서 벌어지는 속임수에는 당할 수가 없다. 장사치들을 욕하자는 게 아니라 안전하고 비밀스럽게 소고기를 먹는 법에 대해서 쓰려고 한다.
소가 태어난다. 1. 관계 당국에 신고를 하지 않는다. 2. 유전자 변형 옥수수가 포함된 사료를 사서 먹이지 않고 방목하며 풀만 먹여서 잘 키운다. 3. 소가 먹을만큼 크면 소를 잡아서 가죽과 고기와 내장을 분리한다. 4. 맛있게 먹고 소가죽으로는 수제화를 만들든지 외투를 만들든지 한다.
간단하게 4가지 단계인데, 쉽지만은 않다. 먼저 관계 당국에 신고 안했다가 걸리면 낭패다. 그리고 지금은 공장식으로 소를 키우기 때문에 신고 하지 않고 들키지 않는게 정말 어렵다. 다음으로 방목해서 먹이려면 무농약의 초원지대를 찾아야 하는데, 한 마리만 키워 먹으려는 입장에서 그런데를 찾기가 어렵다. 소는 물도 많이 먹으니까 개울가에 매야 하는데, 좋은 자리를 찾는 일이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소는 누가 잡아주나? 물론 뒷돈을 주고 마장동의 기술자를 불러서 잡을 수 있을 것 같긴하다.
비밀리에 개인 목장을 운영할 수 있을 정도로 돈이 넘쳐나는 사람들은 안전하고 비밀스럽게 소고기를 먹을 수 있다. 이건희는 그런 소고기만 먹지 않을까?
결론은 구제역이 빨리 없어져야 그나마 여태까지 먹던 가격으로 돼지고기랑 소고기를 먹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보다 중요한 건 축산에 생계가 걸린 사람들이 한숨을 돌릴 수 있다는 것이다.
며칠전 '여섯시 내고향'에 소 2마리를 70마리로 불렸다가 한 번에 묻어버린 아저씨가 나왔는데, 그 아저씨는 하루에 한 번씩 운다고 했다. 작은아버지에게 물었더니 소를 한 마리도 안 팔고 계속 불렸으면 10년 쯤 걸렸을거라고 하신다. 그 아저씨는 덜 먹고 안 쓰며 버틴 10년을 땅 속에 묻어버렸다.
농약 먹고 자살하는 사건들이 괜히 있는 건 아니다.
작은 아버지가 팔꿈치 통증을 호소하신다. 하지만 병원에 가질 않으신다. 어제는 많이 아프셨는지 전기톱 시동을 잘 못 거시길래 내가 대신 걸어드리길 수 차례였다. 본인의 의견은 6개월 전 쯤에 일하다가 파이프에 맞았는데, 그때부터 아팠던 것이고 뼛 조각이 떨어져 나갔거나 금이 간 것 같다는 것이다.
오늘은 날도 춥고, 작은 아버지 팔도 쉴 겸 오전에는 일을 안했다. 이 참에 병원에 다녀오시는 게 어떻겠냐고 해도 작은 아버지는 한사코 가기 싫다고 하신다. 그 이유는 한 번 가면 계속 오라고 할 것이 분명하고 그것이 귀찮기 때문이란다. 사진이라도 찍어보시면 좋을텐데.... 견딜만하기 때문에 병원에 안 가시는 걸까? 작은 아버지는 20년 이상을 안고 살아 오던 탈장도 겨우 몇 해 전에야 수술로 해결하셨다.
조군이야 일을 안하면 당장에 많은 문제가 생기는 상황이니까 마음 놓고 쉴 수 없는 처지라지만 작은 아버지는 구제역으로 수정일도 못 다니시고, 집에 나무도 많이 해 놨고, 겨울에 특별히 일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마음껏 몸을 관리할 수 있는 상황이신데, 병원에 안 가신다.
작은 어머니는 무릎과 허리 수술을 하셨는데, 그 때문에 무거운 걸 잘 못드신다. 그리고 작은 어머니는 몸이 안 좋으면 바로 한의원이나 병원에 가신다. 두 번이나 몸이 크게 아프셨기 때문에 아프면 안 좋다는 걸 몸으로 알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엄마는 술장사를 시작한 다음부터 몸이 자주 아픈데, 버티면 낫겠지, 하고 버티고 버티다가 대상포진이라는 극단적인 결과를 받아들여야만 했던 때 이후에는 조금만 몸이 아파도 병원에 간다.
우리 아버지 같은 경우도 있다. 아버지는 술을 많이 드시는데, 그것에 대한 반발로 운동도 열심히 하신다. 그러던 것이 어느날은 술 때문인지 운동때문인지 무릎을 다치셔서 절뚝거리면서 걷게 되셨다. 식구들은 술도 그만 드시고 운동도 하지 말라고 했지만, 아버지는 여전히 술을 먹고 그것에 대한 반발로 운동도 열심히 하고 - 주로 운동 가서 술 드신다. - 물리치료도 받지만, 그래서야 무릎이 좋아질리가 없다. 얼마전 할아버지 제사때 보니까 걸음걸이가 불편해 보였다.
나는 어떤가 하면 감기에 걸렸다고 병원에 가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스스로 심각하다는 생각이 들면 빠른 시간안에 병원에 가는 편인 것 같다. 일례로 작년에 새끼 손가락이 구부러졌을 때, 바로 병원으로 직행했었다.
어딘가 아픈 사람이 병원에 가고 가지 않고는 스스로의 판단이다. 스스로 생각했을 때, 심각하다고 생각하면, 병원비가 없지 않은 다음에야 누구나 병원을 찾을 것이다. 문제는 판단의 기준인데, 작은 아버지같은 판단기준은 조금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조군의 경우도 위험한데, 가게를 지켜야 하는 사정이란 것도 중요하지만 무리해서 일하다가 정말로 심각하게 아픈 상황이 올 수도 있는 것이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몸이 건강해야 불법으로 장기매매도 할 수 있다.
건강이 제일 중요하다.
가난하면 아플 수도 없는 것이 현실이지만 조군이야 여유있는 편이니까 조금 쉬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렇다. 세계가 다르면 이해까지는 할 수 있어도 함께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부모님이 작년에 이혼을 하셨는데, 두 분 모두 덤덤했다.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두 사람의 세계가 달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아버지의 미국행과 어머니의 오산행을 합치면 두 사람은 이미 10년이 넘는 시간동안 각자의 세계에서 살아왔던 것이다. 여기서 세계란 취미나 취향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살아가는 공간만을 말한다.
나는 이미 강릉이라는 세상에 있다. 서울에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치자. 내가 서울로 가던가 그 사람이 강릉에 오지 않고는 우리 둘의 세계는 다르기만 할 뿐이다. 두 사람이 정말로 사랑하고 결혼도 하고 싶은데, 피치못할 사정 때문에 서로의 공간을 양보할 수 없다면, 그들이 취할 수 있는 최선의 해결책은 주말부부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떨어져 사는 부부들이 함께 살 때처럼 두터운 애정으로 둘러쌓여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일주일에 5일을 다른 세계에 있다가 고작 이틀을 함께 하는 것으로 두 사람이 같은 세계에 있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취미는 달라도 취향이 같으면 평생을 함께 할 수 있다고 하는데, 그에 앞서서 공간이 같아야 한다. 자신의 세계를 포기하고 한국 농촌으로 시집오는 외국인 처녀들의 결의는 참말로 대단하다. 그 결의의 바탕이 된 것이 사랑이 아니라도 상관 없는 것 같다. 그녀들은 자신의 세계를 바꾸기로 했기 때문이다. 20세기 초반에 혈혈단신으로 미국으로 이민왔던 유럽의 젊은 여성과 한국 농촌으로 시집오는 외국인 처녀는 같은 선상에 있는 것이다.
'당신과 나는 세계가 다르다.'
어쩔 수 없지만 슬픈일이다.
그르니에가 담배에 대해서 썼던 글에 보면 담배의 가장 훌륭한 효과가 어떤 특정한 순간들을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과 관계 있다는 대목이 나온다. 그 다음 대목에서는 그렇기 때문에 담배를 끊기 위해서는 담배 대신 다른 것으로 그 순간들을 기억할 수 있으면 된다고 했던 것 같다. 예를들어, 염주를 굴리는 것 - 바닷가에 가서 담배를 입에 무는 대신 염주를 굴리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면 쉽게 이해가 간다.- 이 훌륭하게 담배를 대체할 수 있다.
그렇지만 나는 담배를 끊고 싶지가 않다. 나한테 담배를 대체할 수 있는 것이라면 기타인데, 기타는 일단 부피가 커서 항상 가지고 다니기는 어려운데다가 담배를 입에 물고 기타를 치는 것이 담배를 피우는 대신 기타를 치고 있는 모습보다는 훨씬 그럴듯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흡연율이 점점 낮아지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는 것은 종국에 가서는 담배를 피우는 사람은 아주 희소한 사람이 될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 된다. 모두들 담배를 끊기 위해서 노력하는 시대에 흡연이야 말로 큰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도 the last one이 될 가능성이 높은 분야라는 것이다. 예전에는 나랑 정서적으로 너무도 다른 누군가가 담배를 피우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와 내가 같은 즐거움을 누리고 있다는 사실이 기분 나빠서 담배를 끊어버리고 싶은 기분도 들었었는데, 낮아지는 흡연율은 그런 기분이 들 상황들을 줄여줄 것이 분명하다.
담배 끊기 싫다는 얘기를 너무 길게 해버렸다.
보통, 나이를 먹을수록 시간이 빨리 흘러간다고 하는데, 이것에 대한 가장 그럴듯하면서도 보편적인 대답은 이러하다.
- 어렸을 때는 모든 것이 새로움의 연속이기 때문에 하루하루가 신기한 일들로 가득차 있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나이가 들고 새로운 일들이 사라지기 시작하면 대부분의 일들이 반복의 영역에 속하게 되면서 훅~ 하는 순간 시간이 지나가 버리게 되는 것이다. -
가장 그럴듯하다고는 했지만, 정곡을 찌르는 질문도 가능하다. 새로운 일들이 많을 수록 시간이 빨리 지나가는 거 아닌가요?
세계의 확장에 대해서 쓰고 싶었는데, 시간 얘기로 시작해 버렸다. 이래선 안된다.
어제가 할아버지 제사라 친척들이 주르륵 모였다. 막내 삼촌 큰 딸이 올해 중학교에 들어간다. 공부를 아주 잘 한다고 한다. 나랑 대화가 잘 통하는 편이다.
- 오빠, 오빠는 직업이 뭐야?
농부.
왜?
오빠가 살아보니까 몸을 쓰는 일이 정직한 것 같고 그 중에서 농부가 오빠랑 잘 맞는 것 같아.
.................
이를테면 네가 공부를 잘 해서 변호사가 됐어. 변호사는 법정에서 사람들은 변호해주는 일을 하잖아. 그런데 그 일은 몸을 쓰는 일이 아니고 말과 글을 가지고 하는 것이잖아. 변호사라고 다 그렇지는 않겠지만 변호인들을 지키기 위해서는 거짓말도 조금 해야하고 양심에 걸리는 일을 해야 할 때도 있지 않을까? 오빠가 이런저런 일을 해 보니까 그런게 너무 싫더라고.
........ 오빠는 되게 자유롭게 사는 것 같아, 나도 오빠처럼 자유롭게 살고 싶어.
요즘에는 자유롭게 사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ㅎㅈ이도 자유롭게 살 수 있을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
대화의 마지막은 영문법이 계속 어려우면 내가 심혈을 기울여서 도와주겠다는 것으로 끝나고 말았지만 대화를 할 수 있는 사촌동생이 있다는 건 즐거운 일이다.
각설하고, 유아기에 집채만하게 느껴지던 동물원의 호랑이가 어른이 되서 다시 보면 작아 보이는 것처럼, 초등학교에서 중학교로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고등학교에서 대학교로 진학을 하면서 세계가 확장된다. 진학 과정에 따라 점점 더 먼 곳에서 살던 사람들이 친구 또는 동료가 되는 것이다. 나중에는 외국인 친구들과 외계인 친구들도 생기는 것으로 세계의 확장이라는 것이 끝나는 것 같다.
이런식으로 세계가 확장되는 과정에서 겪는 사건과 갈등들을 사람들은 좋아한다.
그러니까 해외여행을 열심히 다니면 세계는 계속 확장되고, 여행을 통해서 얻는 새로운 경험들이 세월의 속도를 줄여준다는 결론이 나온다.
외계인을 만날때까지는 계속해서 확장하는 삶을 살아야겠다.
이 글은 고구미의 일년기에 대한 대답이고, 내가 먼저 썼던 글에 대한 변명이다.
친척동생이 확장된 세계에서 즐겁게 지냈으면 좋겠다.
고구미를 만났다. 늘 하던 얘기, 늘 하던 질문, 늘 비슷한 대답, 항상 마시는 술, 이유도 없이 마시는 술, - 술 마시고 담배 피우는데, 이유가 있어야 할까? 밥을 먹는 이유가 살기 위해서, 배가 고파서라고들 하지만 사실 사람들은 별 이유없이 밥을 먹는다. - 늘 그랬던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끊어지는 기억, 애써 재구성 할 필요도 없는 어제, 습관적으로 눌렀던 것으로 보이는 단축번호 99번, 당신의 자리를 차지한 내 아버지
새해들어 눈이 두 번 왔다. 첫 번째 눈은 거칠고 두꺼웠는데, 어제 내린 눈은 엄마가 잠든 아기에게 덮어주는 이불처럼 포근하고 고왔다.
오늘, 시작한지 나흘만에 소똥을 다 치웠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나는 어렸을 때부터 단 한 번도 소똥이 더럽다고 생각했던 적이 없다.
생활이 익숙해질 무렵- 삶이 지겨워질 무렵 -이면 지겹지도 않게 떠오르는 당신 생각, 지겹지도 않은 지겨움의 반복
그래도 올해는 작년보다는 재미있게 살아야겠다.
어제는 모처럼 필름이 끊기도록 술을 마셨는데, 낮에 눈을 떴을 때 '사는 게 뭐 이래!' 하는 거지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랬다가 금방 괜찮아졌다.
내년에는 올해보다 재미있게 살아야겠다.
혼자 살았으면 더 좋았을 수도 있겠지만 밥을 혼자서 차려 먹지 않아도 되는 것만해도 굉장한 이익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다. 더구나 작은 어머니는 요리 솜씨가 좋으시다. (특히, 김치)
시골 생활은 즐겁다.
강릉 생활이 변산 생활과 다른 두 가지는 씻고 나서 저녁을 먹는다는 거랑, 술을 안 먹는다는 거다. 술을 안 먹어도 생활은 즐겁다. 변산에서도 정말 즐거웠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의탁(依託)이다.
변산에서는 비용이 들어가는 모든 것을 공통체가 책임져 주기 때문에 그저 일만 열심히 하면 됐다. 스스로 열심히 일했다고 생각한다면 모든 시간들이 즐거웠던 것이다. 거기다 그곳에는 어린이들이랑 청소년들이 있었다.
강릉에서는 비용이 들어가는 것을 내가 책임져야 하지만 돈벌이로 산불감시 일을 하고 있고, 의식주는 공동체에 그랬던 것처럼 작은아버지께 의탁함으로써(집과 먹을 것이 있으면 사람이 생활하는데 많은 돈이 들지 않는다.) 그저 열심히 일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식으로 편하게 지내는 것은 너무 무책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이것에 대한 대답으로 올해의 문제작 '백의 그림자'에서 한 구절을 찾아서 옮겨 본다.
빚을 지는 것이 어째서 필연이 되나요?
빚을 지지 않고 살 수 있나요.
그런 것 없이 사는 사람도 있잖아요.
글쎄요, ~ 그런 것 없이 사는 사람이라고 자칭하고 다니는 사람을 나는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조금 난폭하게 말하자면, 누구의 배(腹)도 빌리지 않고 어느 날 숲에서 솟아나 공산품이라고는 일절 사용하지 않고 알몸으로 사는 경우가 아니고서야, 자신은 아무래도 빚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뻔뻔한 거라고 나는 생각해요.
공산품이 나쁜가요?
그런 이야기가 아니고요, 공산품이란 각종의 물질과 화학약품을 사용해서 대량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라 여러 가지 사정이 생길 수 있잖아요? 강이 더러워진다든지, 대금이 너무 저렴하게 지불되는 노동력이라든지. 하다못해 양말 한 켤레를 싸게 사도, 그 값싼 물건에 대한 빚이 어딘가에서 발생한다는 이야기예요.
그렇군요.
축사를 확장하는 공사 도중에 땅과 관련된 문제가 생기는 바람에 작은아버지가 심란해하시는데, 구제역이 강원도까지 넘어왔고 이제 대관령만 넘어오면 바로 우리 동네기 때문에 심란함이 더욱 깊어지셨다. 얼마전에 저녁 식사 하시면서 '매일 매일 이렇게 행복하게 지내는 것이 소원이다'라고 하셨던 분이신데.....(그 자리에서 내 소원은 장가가는 거였다. ㅡ.ㅡ;)
어제 달 표면을 눈 앞에서 구경하는 꿈을 꿨다. 작은아버지 만큼은 아니겠지만 나 역시 약간은 심란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냥, 올해도 가고 뭔가 좀 심란해서 적어 봤다. 의탁도 좋지만 현실적인 문제를 직접 몸으로 부딪치는 쪽이 더 사는 것 같으려나?
p.s 엊그저께 티비에서 말이 새끼 낳는 장면을 봤는데, 어미가 새끼가 일어나서 걷기 시작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함께 길을 떠나는 장면을 보다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내가 요즘 이렇다.
산불감시 한답시고 길가를 어슬렁거리고 있었는데,
아주머니 한 분이 나를 불렀다.
형님인 줄 알고 나를 불렀다고 했다.
커피 한 잔 하고 가라고 하시길래 그러겠다고 한 것이 점심까지 얻어먹었다.
장국을 새로 끓여서 밥을 차려주셨다.
같이 먹는구나, 생각했는데 아주머니는 이미 식사를 하셨다고 했다.
부러 차려주신 것이 죄송스러워 퍼주시대로 계속 먹었다.
찬이 없어 미안하다는 말씀을 하시길래
쩝쩝거리면서 더 맛있게 먹었다.
밥을 다 먹고 커피도 얻어 먹었다.
집에서 가래떡을 뽑았다.
아주머니 드리려고 챙겨갔다.
오전에 갈까 오후에 갈까 고민하다가 오후 늦게 아주머니 집에 들렀다.
반갑게 맞아주시고는 또 밥을 먹고 가라고 하시길래 이번에는 거절했다.
그랬더니 밖이 추우니 커피라도 한 잔 먹고 가라고 하셨다.
커피를 홀짝거리고 있는데, 아주머니는 양말이라도 하나 줘야겠다면서 농을 뒤지셨다.
내가 양말을 받으면 다음에 또 다른걸 가져다 드릴 수 밖에 없지 않겠느냐고 했더니,
그러면 주면 안되겠다고 하시면서 웃으셨다.
- 한 골짜기에 사는 삼 형제가 있었는데, 막내 동생이 가장 먼저 죽었다. 밥을 차려주신 아주머니는 그 막내 동생의 부인이다.
- 아주머니랑 많은 얘기를 했는데, 둘째 아들이 장가를 안 가려고 해서 큰일이라고 하시면서 덧붙여 했던 말씀이 기억에 남는다. "외국사람이랑 결혼하는 것도 괜찮다. 내 살아보니, 한국사람도 나쁜놈은 맹 나쁘고 외국사람도 좋은 사람은 좋다." "사람 인연이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니다. 오지 않겠다는 사람을 억지로 불러들여서는 안된다."
당연한 얘기도 누구한테 듣느냐에 따라서 깊게 생각할 여지를 남긴다.
산불조심 끝날 때까지라도 자주 찾아뵈야겠다.
라면을 끓이시던 작은 어머니가 묻는다.
"뿔은 거 좋아 하나?"
좋아한다고 대답했다.
먹으면서 엄마 생각이 났다.
언젠가 엄마가 말하길 새우탕 큰사발을 퉁퉁 불려서 먹으면 숙취해소에 좋은 것 같아서 종종 먹곤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다음부터 라면을 먹을 때, 퉁퉁 불려서 먹는다.
내 대신 많이 운 면발이 퉁퉁 불었다고 생각하면서 맛있게 먹는다.
엄마가 술을 많이 마신 덕분에 나는 설렁설렁한 직장인이 될 수 있었고, 결과적으로 근면한 시골 사람이 되겠다는 꿈도 키울 수 있었다.
항상 고맙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몇 있는데, 엄마는 영원히 첫 번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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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이랑 북한 중에 어느쪽이 먼저 망할까?
해 처먹는 것도 정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