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 줄기를 자른 낫 날이 멈추지 못하고 내 손가락에 닿을 때, 툭, 하고 뭉툭한 소리가 났다. 낫을 잘 안 갈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낫질이 서툴기 때문이기도 하고, 기타 코드를 잡던 버릇 때문에 베인 손가락만 쭉 펴고 낫질을 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내 뒷편에서는 작은 어머니가 콩을 줍고 있었다. 수확이 늦어서 말려 털기도 전에 땅에 떨어진 콩들이 많다. 내년에 콩 씨앗값이 비쌀 것 같다는 작은 아버지의 얘기도 떠올랐고, 아침에 농민 신문에서 본 최근 5년 간의 콩 도매가격 그래프도 떠올랐다. 목장갑을 두겹으로 낀 데다가 날도 제대로 서지 않은 낫이니 괜찮으려니, 라고 생각하고 계속 콩을 꺾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손가락에서 뜨거운 것이 느껴졌다. 목장갑의 붉은 코팅 아래로 피가 떨어져서 콩 잎에 붙었다. 숫가락으로 고무 대야에 콩을 담고 있는, 작은 어머니를 뒤로하고 하우스를 나와 일단 집으로 갔다. 집 바깥에 있는 수돗가에서 장갑을 벗고 손을 씼었다. 장갑에서 피냄새가 났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뜨거운 피냄새가 왠지 정겹게 느껴졌다. 집에 밴드가 어디 있는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자 작은 어머니에게 아무말도 하지 않고 하우스를 나온 내가 스스로 민망했다. 피가 멈추질 않아서 손가락을 쭉쭉 빨면서, 피와 침이 섞인 붉은 액체 덩어리를 땅에 뱉어가며 하우스에 도착했다. 입안에서 피 맛이 돌았다. 냄새에 이어서 맛까지 보고 나니 몸이 들끓는 듯한 기분이었다.
작은 어머니 집에 밴드가 어디 있어요?
왜? 낫에 베였나?
네.
많이 베였나?
아니오.
작은 어머니가 붕대를 감아줬다. 연고는 집에 없어서 그냥 붕대만 감았다.
다시 하우스로 돌아가서 콩을 꺾었다.
사람의 걸음걸이 보다 조금만 이동속도가 빨라져도 사람은 풍경을 잃는다.
음악의 리듬에 맞춰서 자전거 페달을 밟고 있노라면 강가에서 낚시하는 사람들도 벤치에 앉아있는 아빠와 딸의 뒷모습도 빠르게 스쳐지나갈 뿐이다.
얼마전에 아파서 몸에 기운이 없을 때가 있었는데, 그때 노인들이 자전거 페달을 천천히 밟는 이유를 알았다. 빨리 밟을 수 있는 힘이 없기 때문이다.
젊은이들의 걷는 속도보다도 느리게 이동하는 대신 노인들의 자전거는 느린 속도로 세상을 본다. 물건값을 계산하는 슈퍼마켓 주인도 거리를 가득 메운 사람들의 표정들도 모두 자전거 주인들의 안쪽까지 깊숙히 들어온다. 아마도 그렇기 때문에 노인들이 세상을 보는 눈이 깊지 않나 싶다. 살면서 쌓아온 지혜에 관찰하고 싶지 않아도 저절로 관찰하게 되는 것을 더하면 관록이나 혜안 같은 것이 되는 것이 아닐까?
나는 무조건적으로 풍경과 함께 살고 싶다. '가급적' '되도록' 같은 흐리멍덩함은 버렸다.
어떻게 살아야겠다(최저소비, 느리게 느리게, 생활은 편하게, 일은 빡시게)는 마음가짐이 확실하기 때문에 내려가서도 만족하면서 살 수 있을 것 같다.
간만에 근거없는 자신감을 드러내버렸다.
그것이 필요한 시점이다.
p.s 지난주에 신문에서 '아날로그는 풍경이 될 수 있지만 디지털은 풍경이 될 수 없다'는 김선우 시인의 글을 읽었다.
난 낡은 티셔츠에 허름한 베낭 차림으로 여행길에 올랐어.
가벼운 마음으로 올라탄 미국행 비행기 안에서 난 깊은 잠에 빠졌지.
미국에 간다는 사실보다는 가벼운 마음이라는 것이 내겐 중요했어.
한참 단꿈에 잠겨 있을 때,
갑자기 비행기가 수직으로 추락하는 느낌을 받았어.
사람들이 일제히 환성을 질렀고
내 몸은 급격하게 앞쪽으로 쏠렸지만
난 눈을 뜨지 않았어.
단순한 난기류일 뿐이라고 생각했고
내 눈을 덮고 있는 안대를 벗기도 귀찮았기 때문이었어.
하지만 추락은 내가 탔던 어떤 롤러코스터보다 가파르고 길었어.
끝이 없는 추락에 사람들은 계속해서 소리를 질렀고
나는 죽음이 다가왔다는 공포를 느꼈어.
추락이 끝나는 순간 모든것이 끝이라는 생각에 여전히 난 눈을 뜨지 않았어.
하지만 이미 땅에 부딪혔어야 할 비행기는 끝없이 떨어지기만 했고
나는 이가 갈리는 공포속에서 온 힘을 다해 안대를 벗어 던졌어.
월요일 아침부터 설사를 했다. 먹기만 하면 계속 쏟아내길래 화요일부터 먹는 것을 멈추고 물만 마셨다. 물만 마셔도 담배만 한 대 피워도 계속 배가 아프고 파래 같은 걸 쏟아냈다. 몸에서 수분이 빠져나가니 머리가 아프고 몸에 열이 올랐다. 몸이 크게 잘못됐나 싶은 생각에 병원에 갔다. 입원하라는 것을 뿌리치고 처방전만 받았다. 몸을 움직였더니 또 배가 아프기 시작했다. 집에 돌아와서 약을 먹었다. 살아야겠다는 본능에 퀭한 상태로 흰죽을 끓여먹었다. 흰죽과 약으로 꼬박 하루를 버티니 속이 편해졌다.
밍숭맹숭한 흰죽을 먹으며 배앓이를 하는 동안 두 가지가 먹고 싶었다. 한 입 베어 물면 단물이 입가로 줄줄 흐르는 커다란 백도 복숭아랑 옛날 치킨이다.
나는 바닷가에 가면 복숭아가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 이유는 짐작만 하고 있다. 어렸을 때, 바닷가에서 물놀이를 마치고 나오면 내 어미가 내 입에 복숭아를 물려주었던 기억이 내 몸 어딘가에 남아 있기 때문인 것 같다. 복숭아의 단내는 사람을 안락함 속에 빠뜨리기도 한다. 무릉도원의 복숭아 나무에는 빨간 천도 복숭아는 달려있지 않았을 것 같다. 서유기의 손오공이 훔쳐 먹었던 하늘나라 복숭아는 천도 복숭아다. 결국 손오공은 파란만장하게 살게 된다.
엄마랑 같이 장을 보고 오는 길에 엄마가 통닭 먹을래 하고 묻는다. 먹겠다고 하면 닭집에 가서 닭 좀 튀겨주세요.한다. 닭집 주인은 얼마짜리로 튀겨 드릴까.한다. 그러면 엄마는 엄마는 큰게 좋더라.라고 웃으며 내게 말하고는 냉장고 가장 오른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닭집 주인은 냉장고에서 꺼낸 닭을 토막내기 시작한다.
이런식의 통닭은 처가집, 페리카나, 멕시칸 같은 체인이 나오기 전부터 존재하다가 치킨집의 체인화가 급속화 되는 시점에 사라졌다. 지금 생각해 보면 고기보다 밀가루가 더 두꺼웠고 그 기름도 오랫동안 숙성된 것이었다.(튀김용 기름은 데미그라스 소스가 아니다.) 하지만 생닭의 가격에 따라서 치킨 가격이 달랐다는 것과 밀가루 조금만 묻혀 달라고 부탁할 수 있었다는 점, 튀긴 닭똥집을 맛볼 수 있었다는 점은 훈훈하다고 하겠다.
그리 옛날도 아닌데 정말 오래된 옛일처럼 느껴진다.
나이 드신 분들이 휴대전화를 이용하고 인터넷에 접속한다고 해서 세상이 변하는 속도를 따라잡는 것이 아닌 것처럼 나도 서서히 세상이 변하는 속도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걸까? 자연스럽게 변화의 속도에서 떨어져나가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청춘이 끝나는 걸까? 쓸쓸한 느낌의 질문은 아니다. 개인적으로는 자연스럽게 진행된다는 점이 무척 마음에 든다. 억지로 끼워 맞춰보자면 나는 포미닛 EP 앨범의 완성도가 높다고 생각하는 한편으로는 최신 인기 트롯도 귀에 착착 감긴다고 생각한다.
아토피 어린이도 쭈쭈바를 빨아대는 계절이다.
이 더럽게 덥고 좋은 계절에 부모님이 협의이혼을 신청했다.
이유는 아버지의 채무로 인한 마음의 불안감을 덜기 위해서?일까나....
이혼을 해도 현실적으로 달라지는 것은 없다고 내가 수 차례 얘기했지만 두 사람의 의지는 확신에 차 있었고 강인했다.
두 사람이 같이 안 산지 10년도 넘었으니까 이혼한다고 해도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다.
어머니의 세계는 경기도 오산의 단란주점에
아버지의 세계는 서울 어딘가에서 수위 아저씨로 사는 것에 묻혀있기 때문이다.
보통은 합의이혼이라고 부르지만 협의이혼과 같은 말이고 법원 서류에는 협의이혼이라고 적혀있다.
33.3%의 부부가 이혼을 하는 것이 대한민국의 현실이기 때문에 절차는 매우 간단하다.
1. 법원에 가서 협의 이혼 신청 서류를 가져온다.
2. 1번 서류에 적혀 있는 서류를 동사무소에 가서 뗀다. (배후자의 주민번호만 알고 있다면 부부중에 한명이 다 뗄 수 있는 것들이다.)
3. 1번 서류의 내용을 작성한다. (주소, 본적, 이름 정도의 간단한 내용이다. 협의 이혼이기 때문에 이유 같은 건 적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4. 1번의 법원에 부부가 함께 가서 접수를 한다.(법원 직원이 군말없이 서류를 접수하고 4주 후-날짜는 이틀 중에 선택 가능-에 오라고 한다.)
5. 4주 후에 부부가 함께 가서 이혼 의사를 밝히면 그대로 이혼이 되는 듯하다.
6. 서류만 준비해 뒀다가 법원에 가서 신청 서류를 작성하는 부부도 있었다.
수 많은 드라마에 수도 없이 등장하는 장면 -부부중의 한 쪽이 모든 서류를 다 준비해서 봉투에 담은 후에 상대방에게 툭 하고 던져놓고 나가버리는 것- 이 바로 협의이혼인 것이다.
'사랑과 전쟁'에 나왔던 복잡한 절차들은 이혼 소송의 경우다.
여튼 우리 부모님은 엊그제 협의 이혼을 신청했고 나까지 세 사람은 오산 시장에서 순대국을 먹었다.
순대국은 엄마가 나를 뱃 속에 가졌을 때, 엄청나게 많이 먹었다는 바로 그 음식이다.
뜨거운 국물처럼 훈훈한 분위기에서 노년을 향해가는 부부와 중년을 향해가는 큰 아들이 순대국을 먹었다.
장미와 햇마늘의 시기인 6월이 저물어 간다.
월드컵은 조별예선 마지막 경기들부터 서서히 영글어 가고 있다.
국가 대항 축구 경기가 주는 가장 큰 즐거움은 앙숙 관계에 있는 나라들간의 피말리는 싸움에서 국제 사회에서 사회적 지위가 약하고 과거에 상대나라에게 시달렸던 나라가 축구에서는 승리하는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한국 사람들을 미치게 만드는 한일전이고(한일전은 종목을 가리지 않는다.) 축구로 가장 인상적이었던 사례는 마라도나가 86년 월드컵에서 포클랜드 전쟁의 패배에 대한 복수로 '신의 손'과 '수비수 종잇장 만들기 골'로 잉글랜드를 울게 만들었던 경기가 있다.(그러니까 마 선생께서는 한 게임에서 잉글랜드를 두 번 죽였다.) 일반적으로는 2차 대전의 피해국들인 동유럽 국가들이 독일과 이탈리아에게 이기는 경우와 소위 서방이라고 불리는 서남유럽의 나라들이 동유럽 국가들에게 패하는 경우, 북아프리카 팀이 프랑스를 이기는 경우인 것이다.(알제리 출신인 지단은 프랑스 대표팀에서 뛰었다. 그리고 프랑스 대표선수들은 대부분 아프리카계로 보인다. ㅡ.ㅡ;) 쉽게 말하면 가난한 나라가 부자 나라한테 축구로 이기는 것이다.
동유럽 나라들은 월드컵과 유로가 2년에 한 번씩 있기 때문에
2년에 한 번씩 서유럽 나라들을 엿 먹일 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
오늘이 그날이었다. 한국 경기만 제대로 보고 다른 경기들은 골 장면도 제대로 본 적이 없는데, 오늘은 왠지 축구가 땡겨서 전반 시작부터 쭉 봤다. 슬로바키아는 네드베드 은퇴 후 힘을 못 쓰고 있는 체코를 대신해서 월드컵에 올라온 느낌이 드는 팀이었는데, 오늘 경기의 전반전은 네드베드가 뛰던 당신의 체코보다 강해 보였다. 하지만 조별 예선에서 떨어질 수 없는 이탈리아도 필사적이었다. 후반 교체 투입된 피를로가 들어와서 살살 흔들어 주자 슬로바키아의 수비도 슬슬 무너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결과는 슬로바키아의 승리! 그들의 두 번째 골은 골이란 것은 항상 예기치 않은 상황에서 터진다는 것을 제대로 보여주었다. 함식은 두 번째 골의 어시스트로 이름값을 했다.
현실은 동유럽에서 잘 나가는 선수들은 독일에서 많이 뛰고 북아프리카에서 잘 나가는 선수들은 프랑스에서 많이 뛴다.(거리가 가까워서 그런 것 같다.-> 휴가때 집에 가기 좋아서) 물론 정말 잘 나가는 선수들은 잉글랜드, 이탈리아, 스페인 리그에서 뛴다. 자국리그에서 뛰던 슬로바키아 선수들 중에는 월드컵 후에 서쪽 나라에서 뛰고 싶다는 염원을 갖고 오늘 경기에 임한 선수들도 있을 것이다.
스페인은 왕정 때 지은 죄가 많아서 월드컵 우승을 못하는 걸까나? 이런식으로 생각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으니 그만둔다. 하지만 서독은 축구를 잘 했지만 동독은 잘 못했던 게 자꾸만 마음에 걸린다. 이탈리아는 패스하자. 정말 밑도끝도없다.
사람들은 이변을 좋아하지만 이변의 팀이 최강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면 결국은 강자가 이기는 것을 좋아한다. 이번 월드컵을 예로 들자면 이변의 희생양은 손을 써서 월드컵에 온 프랑스와 슬로바키아에게 당한 이탈리아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잉글랜드와 독일은 결국 16강에 올랐다.
나랑 동갑인 큰 고모 아들내미가 지난달에 결혼을 했다. 강릉사는 친척들이 제법 왔었다. 강릉에서 이발소를 하시는 작은 고모부한테 잠깐 붙잡혀서 여러 얘기를 들었다. 결론은 얼른 장가 가라.였다.
할머니 생일에 맞춰 강릉에 다녀왔다. 서군과 마시고 작은 고모네 갔다가 혼자 술 드시고 계시던 고모부한테 붙잡혀서 여러 얘기를 들었다. 결론은 빨리 장가 가라와 농사 지을 생각하지 말고 다른 일을 찾아라.였다. 늦은 시간이어서 다들 자고 있었지만 고모부와 내 대화를 들은 사람도 있었을지 모른다.
다음날 아침, 고모집 마당에서 막내 삼촌에게 잠깐 얘기를 들었다.
결론은 추진력 있게 움직이라는 것이었다.
올해 마흔살인 막내 삼촌은 상고의 마지막 세대에 상고를 나와서 안정의 전형과 같은 삶을 살고 있는데 앞으로 10년 후면 직장생활이 끝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며 우리 아버지를 포함해서 아버지 형제들이 모두 전형에 가까운 삶을 추구하고 있으니 나는 꼭 그러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얘기를 덧붙였다. 아마 전날 밤에 잠들었다가 깨서 눈을 감고 고모부와 내 대화를 들었는지도 모른다.
어른들이 하는 얘기에 강단있게 나설 필요는 없다. 나는 어른들 얘기를 굉장히 잘 듣는 편이다. 그리고 실제로 존경을 담아서 들을 때도 있다.
<술자리에서 욕망들을 쏟아낸다.
욕망들은 부서지기 위해서 쏟아져나온다.
그리고 부서진 욕망들은 민폐가 된다.
부끄럽다는 얘기를 하기도 부끄러운 시간들이 지나고
누군가가 차려준 밥상을 앞에 두고
밥알의 단내를 씹으며 해장을 한다.>
작은 고모가 아침밥을 차려주시면서 그렇게 마시고도 괜찮냐고, 역시 젊음이 좋다는 얘기를 했는데
그 얘기 때문이 아니라 아침상 때문에 마음이 흐물거렸다.
그러니까 내 흐물거리는 마음은 서울에서 내려온 큰 조카를 진심으로 걱정하며 밥을 차려준 고모의 마음이 고마웠다는 것이다. 작년의 언젠가 고모는 서울에서 살기가 그렇게 싫으면 고모가 강릉에서 직장 좀 알아봐 줄까?라고 한 적도 있었다. 딱딱한 멘트 같지만 강원도 사투리도 들으니 참 느낌이 좋았었다.
서군네 애가 많이 이뻤다.
사라마구는 죽었고
오늘 오전에는 배가 고파서 밥을 했고, 밥솥에서는 뻐꾸기가 울었지만
밥을 먹지 않고 시리얼을 먹었다.
자꾸만 위화감(실제로 위장에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기분 나쁜 것이 관통하고 있는 느낌?)이 몰려들어서 엘리엇 스미스 노래를 부르다가 혼자서 술을 마셨다.
모던 패밀리는 '하이킥'시리즈의 느낌이 난다. 수 많은 캐릭터들이 다들 자기 역할을 하면서 매회 즐거움을 만들어 낸다. 세 가족이 모두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없는 이 드라마에 돈 걱정은 없으며, 섹스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럭키 루이는 친구 추천으로 봤는데 fuck, suck, cunt, pussy, blow, lick, penis, cock, dick, bitch 같은 단어들이 매 회마다 줄줄이 쏟아진다. 이 드라마에는 돈 걱정이 많으며, 섹스는 주인공들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거대한 존재다.
루이라는 남자는 고등학교 때는 high한 상태에만 있었지만 결혼도 했고 딸내미도 있기 때문에 Lucky하다. 주인공의 친구이자 정비소 사장인 사내가 돈 문제 때문에 아이를 더 가질 수 없다는 루이에게 'have a fuck, have a baby, eat' 이렇게 세 가자기 인생의 전부라는 얘기를 하는 장면에서 빵 터졌다. 아무튼 첫회의 시작을 위의 동영상으로 해버렸기 때문에 쭉 볼 수 밖에 없었다.
아버지가 자기 통장에(월급은 동생 통장으로 받는다.) 돈을 이체했더니 은행에서 압류중이라고 연락이 왔다고 한다. 채권 추심회사에서 계속 연락이 오니 신경이 정말 많이 쓰이는 모양이다. 내가 아버지 빚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것을 알았더라면 그가 미국에서 귀국했을 때, 바로 개인파산 신청하라고 얘기했을텐데, 나는 아버지에게 아버지도 나에게 무심했다. 개인파산을 위해서 엄마랑 이혼하는 것도 생각하고 있는 아버지의 쫓기는 마음이 안타깝다.
결국은 내가 어떻게든 해결책을 찾아야한다.
가난과 무지(無知)는 함께 다니고 무지는 여전히 죄가 되는 세상이다.
럭키 루이의 주인공들에게는 섹스라도 있었는데......
얼마전 길가에서 크게 다투고 있는 젊은 커플을 봤다. 왜 다퉜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바로 집에 들어가서 몸을 섞고 화해했을거라고 생각한다. 언젠가 술에 취한 아버지는 냉장고를 옮기려고 했었다.
모던 패밀리는 시즌 2가 나오지만 럭키 루이는 시즌 1이 13화로 끝나고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사라졌다.
TV나 영화에서 돈 걱정이나 하는 지지리 궁상을 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잠깐만 밖에 있다가 들어와도 계속해서 눈이 따가울 정도로 날씨가 지랄맞다. 자외선이나 오존 때문일 거라고 생각한다.
여러가지로 피곤한 여름이다.
오랜만에 투표를 했고, 민주당 후보가 양천구청장이 됐다. 목동쪽에 돈과 권력(합쳐서 세력이라고 하자)이 있는 사람들은 기득권을 상징하는 1번을 찍었을 것이고 우리 아버지처럼 뭣도 없으면서도 '개발'이라는 단어가 주는 장밋빛(사실은 핏빛인데 벌건것이 비슷하다) 꿈에 취한 신월, 신정동 주민들도 1번을 찍었을텐데 양천구청장 선거에서 1번 후보가 낙선한 것을 보면.... 민심이란 것이 무섭다. 결국 민심은 소수의 사람들의 의도, 한두가지 대형 사건들과는 크게 관계가 없는 것이다.
강남 3구(확실히 양천구에 비해서는 세력이 있는 사람들의 비중이 없는 사람들의 그것보다 높을 것이다)와 중랑구(뉴타운 및 개발의 여지가 굉장히 많은 것으로 보인다)에서만 한나라당 후보가 구청장이 됐다.
북성포구는 인천역 근처에 있는데, 80년대까지는 인천역 근처가 인천 제 1의 도심이었겠지만 지금 인천역 쪽은 차이나타운으로 대표되는 후지고 정감있는 동네다. 실제로 인천역은 사이즈도 작고 작은 시골 기차역 같은 느낌마저도 풍긴다. 각설하고, 북성포구에 다녀온 날 밤에 뉴스에서 인천시장 후보들의 구도심 개발 공약에 대한 것을 봤다. 인천시장 자리도 민주당이 가져갔지만 결국 인천역 근처의 다닥다닥 붙어있는 오래된 주택가는 조만간 그 끝을 볼 것이다.
-> 어쨋든 지금 삶이 어려우니 지금 힘을 가진 사람들은 잘못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보통의 생각일 것이고 이번 선거 결과가 그것을 반영하는 게 아닐까? 군인 대통령 시대가 끝나고 부터는 사람들이 실제로 체감하는 경제적인 삶의 무게가 선거의 결과를 가장 크게 좌우하는 것 같다.
류현진이 세 경기 연속으로 폭발적인 투구를 했고, 세 경기를 모두 지켜봤다. 덩치가 선동렬을 닮아가더니 좌완 선동렬이 되버렸다. 선수입장에서의 야구는 잘 모르니까 타자들이 그의 공을 볼 때 어떤 기분인지는 잘 모르지만 경기를 지켜보는 입장에서는 '괴물'이란 단어가 주는 어감이 좋다. 얼마전에 스타크래프트 업계에서 재미있는 예고편이 있었는데 '테란신을 분노케한 배틀마스터.......' 어쩌구저쩌구였다. 결국 경기에서는 신의 노여움을 산 선수가 떡실신을 당하면서 신이 위엄을 지켰다. 이런 사소한 이야기(드라마)들이 생길꺼리들이 축구보다 야구에 많다. 분명한 인기 요인이다. 야구 선수에 대한 대표적인 스토리 하나를 링크한다. 이글 읽고 마음이 많이 찡했더랬다. -> 이대진 인터뷰 -> 사람들에게는 이야기가 필요하다. 미드 세대인 젊은 여인들이 야구장을 많이 찾는다는 것과 야구가 미국을 대표하는 스포츠라는 점을 억지로 엮어볼 수도 있겠다.
야구는 재미있다. 하지만 아이 또는 연인과 캐치볼을 하는 낭만은 미국 중산층의 것이지 한국에 사는 대다수 사람들의 것은 결코 아니다. 글러브 가격도 문제지만 일단 캐치볼을 할 장소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야구는 재미있다.
나이 30이 넘어간다는 건 20대 초반에 경험했던 것들이 10년이 넘어간다는 얘긴데, 철 없던 그때가 덧없다. 40대가 되면 결국은 다 부질없단 생각이 들려나?
안정적인 노예 생활에 만족감을 느끼던 소년이 누이의 죽음을 계기로 세상에 눈을 떠가고 자신의 존재를 찾아간다는 줄거리다.
소년은 주인의 집에서 전쟁과 누이의 죽음을 통해 자신이 노예라는 사실에 눈을 뜨고, 산 사나이의 동굴, 탈출 노예들이 만든 두 곳의 공동체, 자신이 태어난 부족 마을을 거쳐,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책과 이야기들이 가득한 대학이 있는 메순이라는 도시에서 오렉 카스프로를 만나며 정착한다.
소년이 거친 모든 장소들에서 느꼈던 불합리함을 자유 도시 메순의 책과 시와 노래들이 잊게 해줄까?
소설은 소년이 눈물을 흘리며 끝난다.
생의 말년을 맞은 작가가 자신을 존재하게 했던 책과 이야기들에 대한 고마움을 성장 소설의 힘을 빌려 풀어낸 것이 아닌가 싶다.
1편은 '자유'를 노래한 위대한 시인 오렉 카스프로의 혼란스러운 청소년기가 주제다.
결말을 찾아가는 소년들의 이야기는 항상 흥미진진하다.
결말을 찾아가는 중년들의 이야기도 재미있을 것 같다.
둘 다 여기저기에 많이 널려있는 주제들이다.
저~번 금요일에는 같이 술 먹던 사람 둘에게 한대씩 맞았다.
살다보면 그런일도 있을 수 있고 시작을 내가 했다고 볼 수도 있지만
맞은 자리가 아파서라기 보다는 나이 먹고 나이 먹은 사람들에게 맞았다는 사실에 기분이 나쁘다.
그러니까 모욕을 당한 느낌이다.
갚아줄까?도 싶지만.................
여튼 덕분에 슬픔이 벚꽃처럼 떨어지는 계절에 벚나무 구경도 못하고 집에서 일주일을 보냈다.
좀처럼 잠이 오질 않는 밤들이 이어져서 블로그에 예전에 쓴 글들을 읽어봤다.
그때그때 기록해두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조용한 곳에서 살고 싶다는 소망을 적은 글들이 몇개 있었다. 그리고 대부분은.....
그리하지 못한 것은 내 탓이다.
새로 바뀐 라디오 디제이가 청명이라 그런지 어제 서울 날씨가 맑았다는 바보같은 멘트를 날렸고,
시간은 여전히 멈춘듯 계속된다.
제목이 비장한데, 지금 다니는 회사를 9일까지만 다니기로 했기 때문에 새로운 결의를 다지는 의미에서 지나간 직장들을 돌아본다. 알바 경력도 여러가지가 있지만 모두 제외한다.
EBS 다큐멘터리 파견 조연출 - 방송 제작 시스템의 전반적인 것을 알게 됐다는 점, 미크로네시아를 구경했다는 점은 좋았지만 당시에는 아직 수면위로 떠오르지 않았던 파견직에 대한 문제점을 정확하게 알게 됐고 기본적으로는 같은 일을 하고 알고 보면 일을 더 하기도 하는데, 정규직들과 많은 차이가 나는 월급을 받는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복지TV 주조정실 - 방송 송출의 전반적인 것을 알게 됐다는 점, 많은 자유시간을 바탕으로 책을 많이 읽었다는 점은 좋았지만 월급 100만원 받는 정규직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장애인 단체간에도 이권다툼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계속 해도 좋았겠지만 박봉에 책만 많이 읽으면 장땡이 아닌 것이 인생이기 때문에 그만두고 남미로 떠났다.
대학 교수 비서 - 월급을 많이 받았다는 점, 대학원 사회를 알게 됐다는 점, 생전에 못 먹어볼 것들을 많이 먹어봤다는 점은 좋았지만 10시에 출근해서 11시에 퇴근하는게 싫었고 상류사회의 볼품없는 이면이 나를 진저리치게 만들었다. 그냥 간단히 말하자면 그 세계와 그 세계의 사람들이 나랑 너무 안 맞았다.
현 직장 - 프로토라는 새로운 세계를 알았다는 점, 칼퇴근을 했다는 점은 좋았지만 이렇게 사람들간의 의사소통이 안되는 직장도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알았고 사업은 아무나하면 안된다는 것도 확실하게 알았다. 괜히 망할때까지 남아서 내 청춘을 소비하는 것이 싫어 그만두기로 했다.
어딜가든 좋은 점이 있지만 그냥 어떤 세계를 알게된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하지?
시간들이 그냥저냥 흘러간다.고 시작하려고 했는데, 정말로 시간들이 그렇게 흘러가는 바람에 쓰는 시기가 늦어졌다. 결국은 시간들이 그냥저냥 흘러간다.로 시작했다.
요즘 하이킥이 다시 재미있다. 식모는 준혁학생이 자기를 좋아하는 걸 알았다고 해서 학생을 놀래키고 학생은 식모가 삼촌을 좋아하는 걸 알았다고 해서 식모를 놀래킨다. 화요일 방송에서 감정을 주체할 수 없는 백허그까지가 모두에게 좋은 때인 것 같다. 고백하고 나서 어색하게 앉아서 서로를 놀래키면서부터 두 사람은 사랑도 아니고 뭣도 아닌게 된다. 준혁학생은 받아 들여지지 않는 외사랑은 고백할 때 절정을 찍고 끝난다는 것을 이제 알았을 거다.
식모 신세경은 외사랑의 길었던 겨울을 끝내고 빨간 목도리보다 따뜻한 봄을 아버지와 함께 보내게 될까? 이민 가려고 하는 곳이 타이티라서 놀랐다. 신애가 그림에 재주가 있으니까 나중에 고갱처럼 되서 나타날지도 모르겠다.
지금 거의 한달이 넘어가도록 파란 하늘을 못 본것 같다. 남국에 가면 파란하늘을 볼 수 있을텐데.....
여자 야구 국가대표 상비군인 사무실 동료는 점심 먹으면서 나 보고 원양어선을 타도 일 잘할 것 같다고 한다.
타이티는 섬이라서 갑자기 오늘 점심때 들은 얘기가 생각났다.
회사일은 짜증이 나기 시작했지만 아직까지는 괜찮다. 칩거를 하더라도 먹고 살면서 칩거를 해야하니까 때를 기다린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게 어떤 때인지는 나도 잘 모른다.
여러가지를 쓰려고 했는데, 결국은 하이킥 얘기가 되버렸다.
그리고 말장난 하나
evolution(진화)에 R(ed)를 붙이면 혁명이 된다. 그러니까 혁명은 왼쪽으로 가는 것이다.
직장 동료 한 명이 돈에 목숨을 거는데, 본인도 자신이 그렇다는 것을 알면서 푸념을 한다. 나는 그에게 그러면 안된다고 충고를 해주지만 사실은 나도 그 세계에 있으니 이를 어찌할꼬?
나는 춤꾼이거나 가수거나 아니면 유능한 세션맨이 되어야 옳았다. 가끔 휘파람을 불며 여기저기 배회할 때 나는 그런 생각을 한참 동안 하곤 한다. 춤이나 음악은 말에서부터 도덕에서부터 얼마나 자유롭고 즐거운가.
한번은 전기기타를 배워보겠다고 사설 강습소를 다녀본 적도 있다. 알지 못할 조갈증 때문에 그만두고 말았지만.
타오르는 것. 어떤 충만함으로 타오르며 그 속에서 파르라한 자기 존재의 떨림을 감지한다는 것, 그게 시보다는 춤이나 음악 속에서 훨씬 용이하리라는 생각에는 아직도 변함이 없다.
나는 나의 삶이 음악같아지기를 매일 꿈꾼다. 음악이 가지 못할 곳은 없다. 문맹자의 가슴속에서까지 음악은 쉽게 웅덩이를 파놓는다.
시는 내가 음악까지, 춤까지, 타오름까지 타고 가야할 아름다운 뗏목이다.
뗏목이 아름답다?그래 그게 인생일테니까.
-> 장석남의 첫 시집 뒷 표지에 적힌 글입니다. 알지 못할 조갈증이 우리들 모두에게 어떤 답이 될 수 있다면 좋겠네요.
고구미에게
2차를 가기 위해 장소를 물색했던 것은 기억나지만 그 장소가 어디였는지는 기억나질 않아.
2차에서 소주를 마신 것은 기억나지만 어떤 얘기들을 했었는지는 기억나질 않아.
택시에서 내릴 때, 돈을 찾다가 뒷 주머니에 2만원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요금을 냈지만
그 돈의 출처는 너희들이었다고 추측만 하고 있을 뿐 기억나질 않아.
뒷 주머니에서 돈을 찾던 당시에는 출처가 너희들이었다는 걸 확실하게 기억했는데,
이제 와서는 그때 그 기억을 했다는 것만 기억하고 있어.
하지만 막걸리를 마셨던 1차는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어.
앞으로는 2차는 안 가는게 좋을 것 같아.
날짜를 쓰고 보니 2010년이다.
미래를 살고 있다는 느낌이다.
나는 미래를 현실로 살고 있는 것 같다.
20세기 초반에 중년을 살았던 사람들도 1910년에 미래를 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을까?
오늘 아침 출근길에 조군 가게 앞을 지나서 늘 그렇듯이 무단횡단을 했다. 늘 그렇듯이 차는 단 한 마리도 없었다.
젊은 경찰 하나가 쓱 웃으면서 다가오더니 무단횡단 했다고 원래는 20,000원 짜린데, 오늘은 특별히 xxx만 한다고 하면서
내 신분증을 확인하고 전화번호도 적어갔다. 마침 담배사러 슈퍼 가던 조군이 길 건너편에서 나를 보고 씩 웃길래 나 늦었어 좀 태워줘.라고 해서 조군이 까치산역까지 차로 태워줬다. -> 나중에 우리집으로 과태료 딱지만 날아오지 않는다면, 월요일 아침에 있을법한 훈훈한 얘기다.
아버지가 작년에 법원에서 날아온 지급명령을 지난 토요일에 보여주셨다. xx신용정보회사.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채권추심회사에서 아버지한테 자꾸 연락이 오는 이유가 있었구나. 지난주에 문자로 우리집에 와서 강제집행하겠다는 내용이 와서 아버지께서 걱정돼서 보여주셨나보다. 하지만 우리집 전세 계약자는 우리 엄마인걸.... 민사니까 형사랑은 별개겠지만 구치소까지 갔다온 양반한테 너무 심한것 같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법원에서 명령서가 날아왔으니 신경써서 자세히 알아볼 일이다.
미래를 현실로 살고 있어서 그런가 어쩐지 2010년이 시작하고는 현실 감각이 없는 것 같은 느낌을 많이 받는다.
꿈과 라디오 소리가 섞이고 눈만 뜬 채 사무실에 앉아 있고 밤에는 다시 꿈과 라디오 소리가 섞이고 주말에는 눈만 뜬 채 TV앞에 앉아 있고의 반복이다.
다행히 지난 토요일에는 지후랑 세비체를 먹었다. 세비체의 시큼한 맛도 먹을 때 뿐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에서는 다시 현실감각이 사라진 듯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눈만 뜬 채 시간들이 사라졌다.
내가 아주 좋아하는 백신스키의 작품이다. 형이 동생이 흡수한 엄마의 양분을 눈빛으로 흡수하는 것이로구나.란 상상이 가능하다. 엄마랑 동생이 모두 위험하다. 눈만 뜨고 있는 삶으로 생각의 방향을 돌려보면 흡수되고 있는 쪽이 나다. 그렇다면 흡수하는 쪽은?
우리나라는 새해 결심을 두 번 할 수 있는 좋은 나라다. 나 같은 경우 새해을 맞아 세운 다짐이나 계획들이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을때, 음력설이 올 때까지 멋대로 흘러가도록 내버려 둬도 괜찮다는 마음속의 유예를 갖는다.
애초에는 내가 흐르는 물이라고 생각하고 흘러가는 대로 두려고 했다. 그런데 지금 내 물줄기는 무엇엔가 막혀서 단단하게 멈춰있다. 물은 고이면 썩고 물길을 바꾸면 화를 입는다는 것이 조상들이 남긴 지혜다. 두 얘기를 합쳐보면 흘러갈 것이라고 생각했던 물줄기가 고여 있다고 물길을 바꾸면 안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잘 산다는 건 물이 고였을 때, 물길을 바꾸지 않으면서 자연스럽게 흐름을 타게 하는 것과 같은게 아닐까?
재미있게 산다는 건 물이 고였을 때, 썩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희열을 느끼는 것.이면 안되고 고인 곳의 주변을 정리해서 물이 흐를 수 있도록 해주는 순간들을 즐기는 마음과 같다.
오늘 왼쪽 새끼손가락을 감싸고 있던 깁스를 풀었다.
정말 답답했는데, 다행이다. 다음주부터는 다시 기타를 손에 잡을 수 있을 것 같다.
사건의 개요는 이러하다.
지난 연말 흥청망청 취하고 싶은 마음에 크리스마스 전에 술을 많이 마셨다. 마음이 조금 괴롭기도 했다.
크리스마스 이브를 앞두고 동대문에서 새벽까지 고구미랑 양꼬치를 먹었다. 많이 마셨지만 정신줄을 놓지는 않았다.
택시 타고 대학로로 가서 자고 있는 지후 등에다 대고 이러이러해 섭섭하다고 하면서 징징거렸다. - 푸념을 내 뱉었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보니 왼쪽 새끼손가락 마지막 마디가 굽어 있었다. 통증은 없었다. 병원에선 인대가 끊어졌다고 했다.
원인을 분석해봤다.
1. 술에 취해서 어딘가에 쓸렸다. -> 인대가 끊길 정도로 쓸렸으면 술에 취했어도 그 순간을 기억했어야 한다. 그리고 난 그날 많이 취하지 않았다.
2. 기타 연습을 너무 열심히 하며 안쓰던 근육을 많이 썼다. -> 신빙성은 있지만 기타 연습하다 인대 끊어진 케이스를 찾기 어렵다. 식구들은 그럴듯 하다고 생각했지만 직장 동료들은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한다며 놀렸다.
3. 지후한테 징징대서 벌 받았다. -> 전혀 과학적인 근거는 없지만 대단히 그럴듯하다. 가장 납득할만한 이유다.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못되게(못나게) 굴면 안된다.
지난주에는 내내 기분이 별로였다. 몸도 기분을 따라갔다.
주말까지 저조한 상태가 이어졌다.
조군과 DS가 동반 생일이었는데, 축하전화를 하지 않았다.
지후가 보고 싶었는데, 그냥 집에 있었다.
주말 내내 TV만 보고 누워있다가 어제 자기 직전에 판타스티크에 실린 레이먼드 챈들러의 단편(빗속의 살인마)을 읽었다.
소설 '빅 슬립'은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하는데, 하워드 혹스의 영화 '빅 슬립'은 잘 기억하고 있다.
내용적으로 볼 때, 아마도 '빗속의 살인마'를 확장해서 쓴 소설이 '빅 슬립'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활자를 읽으니 생기가 돌았다.
미래에 대한 불안만큼 불안한 것도 없고, 불확실한 미래만큼 불확실한 것도 없다는 생각을 했다.
불확실하고 불안한 미래가 있다는 것 때문에 삶은 즐겁다.
이번주에는 힘 좀 내야겠다.
고구미가 올해부터는 울주에서 살게 됐는데, 집을 구해야 한다는 얘기를 듣자마자 내가 반사적으로 한 얘기가 이렇다.
"그럼 네가 너네 학교 여선생님이 혼자 살고 있는 아파트에 방을 하나 얻는거야. 그리고 너는 그분과 사이좋게 지내다가 내가 너희 집에 놀러가면 셋이서 질펀나게 마시는 거야." 고구미가 머릿속에 떠오르는 게 그거냐고 하면서 꾸지람을 내렸고 나는 이상하게 머릿속에 바로 스쳐간 생각이 그렇네.라고 했다.
이 정도는 되야 속물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예쁜 여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나는 소녀시대 멤버들 중에 서현을 제일 좋아하는데, 그 이유가 별것도 아닌 그가 팀에서 가장 나어리기 때문이다.
출근길에 자주 마주치는 교복 치마를 입고 자전거를 타고 등교하는 중학생 소녀를 보고 흐뭇해 한다던지
오늘 아침에 지나친 민다리에 교복 치마 걸친 여고생(오늘 날씨 추웠다.)을 머릿속에 새겨 둔다던지
하는 정도는 되야 속물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상민씨는 속물이 아니다.
지후한테 고구미랑 했던 얘기 들려줬다가 괜히 쿠사리만 먹었다.
적어놓고 보니 나는 교복치마를 좋아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동생이 차를 샀다. 회사 업무 때문이다. 영일군이 여러가지로 힘 써줘서 동생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영일군이 후방 감지기 달아준다고 해서 놀러갔다.
동생이 술 먹고 뻗어 있어서 내가 갔다.
내 차도 아닌데, 왜 내가 가야되는 건지. 화도 났지만(차를 집으로 끌고 온 것도 나였다. ㅡ.ㅡ)
그 놈도 그 놈 나름대로는 사정이 있는거라고 생각한다.
주중에 D군을 만났다. 아기도 있는데, 직장을 그만두고 직업학원을 막 수료했다.
나이가 있어서 취업이 쉽지는 않은 것 같다. 애아빠의 사정을 자세히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어제는 남현이가 직장 그만뒀다고 해서 급 놀라서 만나러 갔는데,
쉬는 기간 없이 새직장으로 옮기는 거라고 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직장을 옮긴 사정에 대해서 들으며 한 잔 했다.
네 번째 직장인가? 나도 알바 빼면 이번이 네 번째 직장인데... 그래서 친구인가?
오늘은 식당 이모를 만났는데 아들내미, 딸내미가 이모가 계속 내주던 자기들 보험료를 내지 않고 자기들은 자기들이 알아서 할테니 이모가 돈이 필요하면 해약해라고 한다며 무슨 심보인지 모르겠다고 하셨다. -> 이모 차라리 보험 다 해지하시고 이모 통장에 넣어두세요.라고 하고 싶었지만 그러지는 못했다. 사촌들도 그들 나름대로는 사정이 있는 거라고 생각한다.
지후는 수화기 너머로 왜 (밥을 먹고) (살아야 되는건지) 모르겠다고 한다. -> 나한테만 하는 푸념은 괜찮지만 진짜로 그렇게 생각하면 안된다.
집안에 수맥이 흐르면 그 집에 사는 예민한 사람들은 가위에 눌리고 자면서도 항상 깨어 있는 것 같은 기분이며,
쾡한 얼굴로 거리를 활보하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대학로 마로니에 빌라 20x호에는 사람을 깊은 잠에 빠뜨리는 수맥이 흐르는 것 같다.
어제도 10시간이 넘게 잤다. 내게 흔치 않은 일이 그곳에서는 일어난다.
신월동 현대빌라 50x호에도 수맥이 흐르는 것 같다.
꿈을 꾸고 있는 동안에는 꿈 속에서 헤메다가 잠깐 꿈이 느슨해지면,
자기 전에 틀어놓은 라디오에서 지껄이는 소리들이 꿈과 섞인다.
멋진 체험이라면 멋진 체험인데,
자는 동안 미키마우스의 로얄티 금액, 최초로 미키마우스 만화연재가 시작된 연도, 중요한 결정은 오전에 하는 것이 좋다.
따위의 정보가 머릿속에 들어오는게 썩 기분 좋은일은 아니다.
더구나 꿈과 현실의 느슨한 경계속에서 5시에 생방송으로 라디오를 진행하는 나랑 동갑인 남자 아나운서가
(이 사실도 꿈과 현실의 경계 속에서 알게됐다.) 나랑은 참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이구나. 하는 정리까지 하고 있다.
2층과 5층에 수맥이 흐를리 없으니,
집에서 못 자는 잠을 -당신이 주는 따스함과 안정에 취해서- 대학로에서 보충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맞겠다.
어제는 북극곰이 나오는 TV 프로그램을 보다가 그대로 잠들었다.
북극곰이 바다코끼리를 잡아 먹고 얼음위를 뒹굴면서 흰 털에 묻은 피를 씼어내는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흰색 덩어리가 뒤뚱거리면서 뛰는 모습과 앞발로 얼음 속에 묻힌 바다코끼리 고기를 파내는 모습은 예뻤고,
100미터 밖에 헤엄칠 수 없기 때문에 물에 빠져 죽기도 한다는 얘기는 안타까웠다.
그렇지만 북극곰은 코카콜라 광고에 나오는 것처럼 귀여운 동물이 아니다.
나는 침대 위에서 주말을 보냈고,
지후는 일이 많고,
동생은 차를 사는 일 때문에 걱정이 많고,
어머니는 여러가지 생각 때문에 잠 못들고,
아버지는 쉬는 날이면 만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