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을 만나는 것 뿐만 아니라 그 사람들과 함께 밥을 먹고 생활을 하는데도 특별한 위화감이 없다.(잠은 따로 자기 때문일까? ^^; ) 지난주에는 조금은 우울한 날들도 있었는데, 지후는 항상 보고 싶고 동생이 문자로 '잘 안돼 얼른 집에와서 같이 준비하자'고 하기도 한데다가 내려온지 한달만에 식사 당번을 단독으로 맡아서(평균적으로 한 달 정도면 식사당번을 맡는다고 한다.) 수요일 점심과 금요일 저녁을 책임지면서 받은 막중한 스트레스가 더해졌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20여 명이 먹어야 하는 밥과 반찬을 하는 일이 쉽지는 않다. 더군다나 아이들도 있어서 더 부담된다.) 이번주도 식사당번이 제일 걱정이구나 일단 수요일 점심은 고사리와 김치국... 그리고 한 가지가 더 필요하다. 금요일은 저녁이니까 생선 넣은 탕을 끓이면 되고 추가로 나물 두 가지가 필요하다. 아침먹기 전에 일찍 일어나서 부지런히 몸을 놀리면 쑥갓과 상추, 시금치를 지금 딸 수 있다. 재수가 좋은면 내 밥때에 맞춰서 취나물을 뜯는 일정이 잡힐 수도 있다. 그렇지만 아침을 일곱시에 먹는다는 거....ㅡ.ㅡ; (내려와서 한 달 조금 넘는 동안 저녁시간은 30분 늦춰졌고, 아침 시간은 30분 당겨졌다.) 수요일은 내일 모레니까 수요일 오전에 생각해야겠다.
어제 지후랑 한참 통화했다. 나는 기분좋은 술자리를 마치고 취했는데, 수화기 너머로 눈물자국이 남아 있는 당신의 목소리를 듣는 일을 마음이 아팠다. 보고 싶다고 사랑한다고 내려오라는 말 밖에는 할 수 없는 내 마음이 만든 벽 때문에 조금 힘들어졌다.
오늘은 비도 오지 않는데, 특별한 일이 없어서 오랜만에 자유시간(초코바 이름 정말 잘 지은 듯...)이 주어졌다. DS와 통화했는데, 오늘 내일 논다고 내려오겠다고 했다. 별 생각없이 그러라고 했다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DS가 자고 갈 곳도 없고 오늘은 자유로운 날이고 친구가 찾아왔으니 잠깐 밖에 나가서 저녁 좀 먹고 오겠습니다라고 나 보다 이곳에 내려온 것이 오래된 식구들에게 말하기가 조금 거시기 해서 풀어놓은 산양과 소를 우리에 넣고, 닭 모이도 줘야하는 등의 일로 DS의 방문을 거절해버렸다. 그런데 모처럼의 휴식을 맞아서 몇몇 사람들은 점심을 먹고 전주영화제에 가 보겠다고 나갔다. 그러니까 나는 스스로 내가 아직은 모든일에 미숙하고 배우는 입장이기 때문에 남들이 봤을 때, 튀는 말과 행동을 자제하자는 마음의 벽을 만들어 버려서 지후에게는 섭섭한 남자가 DS에게는 섭섭한 친구가 돼버렸다. 막상 실제 생활에서는 그렇게 주눅들어 있는 것은 아닌데(실제로는 무척이나 즐겁다.) 마음 한 구석에 그런 찝찝함이 있다고 생각하니 나 스스로에게 조금 거시기 하다. 그래서 정말 보고 싶을 때는(물론 아주 주요한 농사일과는 겹치지 않는 선에서) 지후를 보러 가야겠다고 결심했다. 마음이 홀가분하다.
이런 대화들이 있었다.
S누나와의 대화 - 일은 재미 있어요? 재미 있습니다 재미 없으면 계속 있지 않을 것 같은데요. 재미 없어도 있을 수는 있지.
I형과의 대화 - 설령 도피하는 기분으로 내려왔다고 하더라도 하루하루가 즐거우면 되는거 아닐까요? 그렇지는 않은 것 같어.
구체적으로 계획을 세운것은 아니지만 농사를 짓고 살아야겠다고 결심을 했다. 작은 아버지는 아이템을 정해서 내년에 내려오라고 한다. 그래서 나는 몸과 마음을 농민으로 단련하기 위해서 이곳에 왔는데, 이곳에서는 밥도 주고, 담배도 주고, 술도 주고, 정통(?) 유기농을 배울 수 있는데다 아이들이 있어서 즐겁고 소년, 소녀 친구들과 함께 하는 시간들도 너무나 즐겁다. 그리고 나는 어떤일이든 순간순간 충실한 기분이 되어서 열심히 하고 있다. 이런 즐거움들과 함께 이곳에 있다가 올해 농사가 끝나고 내년이 되면 나는 강릉으로 갈 수도 있고(나는 강릉땅이 좋다.) 이곳에 남을수도 있고 아니면 다시 도시생활을 할 수도 있다. 또 내년까지 가지 않더라도 당장 누군가와의 극심한 트러블로(가능성 극히 낮음) 오늘 저녁에 이곳을 떠날 수도 있다. 그러니까 나는 계속해서 삶의 방향을 잡고 있는 중이다. 지후야 그러니까 천천히 생각하자.
지난주에 가장 즐거웠던 일 - 이곳에서 소를 한마리 키우는데, 암소이고 이름은 문근영이다. 내가 담당자는 아닌데, 하늘에서 비가 막 내리기 시작하고 근영이 담당자가 보이지 않길래 영주(9살아니면 10살이다.)랑 근영이를 풀 뜯어 먹으라고 매어 둔 곳까지 달려가서 말뚝에 묶어놓은 줄을 풀고 떨어지는 비를 맞으며 근영이를 끌고 돌아오는데, 비를 처음 맞아보는 근영이가 당황했는지 겁나게 달리기 시작해서 천천히 걸어서 5분 정도의 거리를 근영이 목에 맨 줄을 잡고 영주와 함께 신나게 뛰었다. 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기분 상으로는 세상에서 가장 파란 하늘이었을 것 같은 느낌이랄까.... 많이 즐거웠다.
어제 살짝 당황했던 일 - 어제 머리를 감았다. 머리는 정말 감아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하게 들때만 감기로 했기 때문에 며칠만인지도 모르겠다.(내려와서 머리감은게 어제부로 세번째다. 물론 속옷은 그 보다는 자주 갈아입는다.) 그런데 대야에 머리를 담궜던 첫물에 기름이 뜨는 것이 아니라 물반 모래반으로 변해있는 것이었다. 모래가 잔뜩 묻은 양말을 빠는 기분으로 머리를 빨았다. 흙의 소중함을 아직까지는 잘 모르지만 천천히 알아가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날그날 충실하게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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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가 백곡을 윤택하게 한다는 곡우다. 변산 내려와서 처음으로 온종일 비가 내리고 있다. 그러니까 변산 내려와서 처음으로 온종일 쉬고 있다. 사실 마냥 쉬려니까 마음이 썩 편한것만은 아닌데, 비 오는 날이라도 쉬자라는 기분으로 하루를 흘려보내고 있다.
내려온지 20일 조금 넘었는데, 아직 농한기고 본격적인 벼농사가 시작되지 않아서 많이 바쁘지는 않다.(물론 일반적인 기준으로 생각하는 바쁘다의 차원에서 바쁘다는 말을 쓴 것은 아니다. ㅡ.ㅡ)
이곳 생활의 패턴은 아침 먹고 일하다가 참 먹고 일하고 점심먹고 일하다가 참 먹고 일하고 저녁을 먹으면 하루가 간다.
이곳은 먹을 거리가 좋고, 막걸리가 맛있고, 사람들(특히 아이들)이 좋다.
지후가 잠깐 다녀갔는데 정말 반가웠다.
오랜만에 만난 연인을 대하는 서먹한 태도는 10년 전과 2년 전과 달라진게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 마음은 많이 달랐다.
일기예보를 보다보면 거의 매일 같이 오늘은 평년기온보다 몇 도 높고, 몇 도 낮아서 추울것이다. 더울것이다라고 얘기하는데, 평년기온이라는 건 날씨 관측 이래 평균을 잰 그날의 날씨가 아니던가(나는 그렇게 이해하고 있다.) 그러니까 어느날은 다른해보다 조금 더 춥고 어느날은 조금 더 더운 것이 70년 동안 쌓여셔 평년기온이 만들어 진 것이다. 그러니까 봄날씨가 유난히 덥거나 봄인데, 눈이 오기도 하는 것은 당연하기도 하다. 다만 '관측 이래'가 붙는 결과에는 사람들이 조금은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본다.
나는, 옷을 여러겹 껴 입었는데 날이 더워도 귀찮아서 옷을 잘 벗지 않고, 얇게 입었는데 추워도 그냥 버티는 편인데, 조금만 춥거나 더워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나 같은 사람도 있고 나랑 정반대인 사람도 있고 한 중간의 어느지점인 사람들도 많을 거라고 생각한다.
평균적인(평년적인) 삶이란 것은 보편적인 삶과는 약간 다른 느낌인데, 보편적인 삶은 태어나서 일을하며 살다가 죽는 것, 평균적인 삶은 태어나서 하는 일들의 어느 중간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그것은 어느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은가가 되어야 하는 것이지 사람들이 어느 직종을 많이 선호하는가가 되어서는 안되는게 아닐까? 직업을 떠나서도 착하게도 악하게도 곱게도 비참하게도 사는 사람들의 어느 중간 지점이 평균적인 삶이라고 해야할 것인데, 쓰다보니 평균적인 삶이란 건 말이 안되는것 같다. 사람은 다 태어나서 살다가 죽는다.
나는 다만 어떻게든 끝까지 살아남는 사람이 되고 싶다.
평균기온에 대한 정의는 네이벙 백과사전에 나와 있는데, 평년기온에 대한 정의는 어디에도 없는 것 같다. 다만 어느 블로그를 통해서 30년간의 평균기온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평균기온들로 평년기온을 산출한다. 평균기온의 정의를 덧붙인다.
1일부터 1개월, 1년 등 어느 기간동안 기온의 산술평균값을 말한다. 한국에서는 1일 8회의 관측값의 평균을 그날의 일평균기온으로 사용한다. 5일, 10일 이상의 평균기온은 이렇게 구한 일평균기온을 다시 그 기간만큼 산술평균한다.
출처: 네이버 백과사전
지금 집으로 이사온지 7년 조금 넘었다. 반지하라고 할 수 없는 반지하와 2층이라고 할 수 없는 2층을 지나 3층이라고 할 수 없는 3층이 우리집이다. 그러니까 우리집 주인 아저씨는 3.5층짜리 다세대 주택을 소유하고 계시다.(음식 배달 시킬때 어디는 2층이라고 해야 우리집으로 오고 어디는 3층이라고 해야 우리집으로 온다. 많이 곤란하다!)
암튼 주인 아저씨 어머니가 우리 할머니랑 동갑이니까 지금 80이 훌쩍 넘으셨는데, 노인들의 폐지 수거 열풍이 전국을 휩쓸고 갔던(정확한 시기가 기억이 안 난다.) 때부터 어디선가 나타난 곤색 유모차를 끌고 다니시면서 동네 폐지 수거를 하신다. 폐지만 수거하는게 아니라 고장난 전자렌지, 텔레비젼 같이 돈이 될만한게 있으면 일단 다 가져오셔서 파신다. 한 몇 개월은 몸이 안 좋아서 쉬기도 하셨지만 몸이 좋아지셨는지, 또 계속 온 동네 폐지 수거를 하신다. 동네를 다니다 보면 할머니가 유모차랑 한 몸이 되서 다니는 모습을 자주 목격한다. 가끔 집으로 가져오신게 너무 무거울 때는 우리 형제들에게 유모차에서 내려달라고 부탁을 하시기도 한다.
몇년 전에 식당 이모가 할머니 욕하면서 뭔가 너무한다고 했었는데, 자세한 정황은 기억나지 않지만 폐지에 대한 욕심이 지나치다는 맥락이었던 것 같다. 최근에 아버지에게 들은 이야기는 직접 들은 바, 폐지 수거로 모은 2000만원을 며느리(주인집 아줌마)가 노리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 얘기를 전해 듣고 할머니의 조마조마한 마음이 느껴졌다.
며칠전에 오랜만에 집 앞에서 할머니를 마주쳤는데, 유모차를 미는 힘에 기대서 겨우겨우 걷고 계셨다. 물론 유모차에는 종이가 한 가득 실려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워낭 소리에서 다리가 불편한 할아버지가 소가 끄는 쟁기에 매달려서 논밭을 기어다니시며 일하던 모습이 떠올랐다.(그런데 워낭소리에 이런 장면이 나오던가?)
개인적으로 주인집 할머니를 특별히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할머니가 며느리에게 모아둔 돈을 빼앗기지 않았으면 좋겠고(가계부채 탕감, 손주의 결혼자금 등), 근본적으로는 그 돈이 할머니가 4.5층에 위치한 옥탑에서 계속 살아갈 수 있는 무기가 아니길 바란다. 그리고 할머니에게 친구도 생기고 일도 적당히 하셨으면 한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우리동네는 집 앞의 노인회관에도 사람이 있는 걸 거의 본 적이 없고 이상하게 노인 보기가 힘들다.)
남의 집안일을 조금 과격하게 쓴 감이 있는데, 어쨋든 포인트는 주인집 할머니와 유모차의 우정이다.
고이고이 묵혀 두었던 잭 런던의 '강철군화'를 지난주에 읽었다. 마르크스의 젊은 시절을 생각하면서 만들어 낸 인물이 아닌가 싶은 주인공 남자와 그의 아내가 과두지배체제에 대항해서 사회주의 혁명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을 아내의 일기를 통해 돌아보는 내용이다. 파시즘에 대한 두려움이 다시 한 번 몰아쳤고 프롤레타리아의 정의를 알게됐다.
잭런던은 20세기 초를 과두지배체제로 생각하고 소설을 썼던 거라고 생각하는데, 지금은 그게 미련할 정도로 심화되었다. 신형철 대법관 사건도 신씨 아저씨가 자신(의 권력)을 과두지배체제을 구성하는 한 축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인 것 같다. 며칠전에 기업의 임금삭감을 통한 신규 일자리 창출에 대한 뉴스를 보다가 아버지에게 짜증을 냈었는데, 나라가 있고 기업이 있는거지 기업이 있고 나라가 있는게 아니라는 아버지의 발언 때문이었다. 나는 기업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거라고 아버지에게 반박했지만 나라의 정치 권력과 다국적 기업이 한통속이 되고 사법부가 더해지면 그것이 과두지배체제가 되는게 아닐까? 얼마전에 TV에서 멕시코 혁명을 약간은 해악적으로 다룬 '석양의 갱들'을 봤는데, 내 두려움은 지금의 인간 세상이 혁명과 변화의 시도 보다는 현체제의 악마적인 고착화를 방치하는 쪽으로 나갈 것 같다는 점이다.
고구미 군이 1000명씩 모여사는 단위를 이야기했는데, 내가 그렇게는 힘들것 같다고 대꾸를 했다. 술이 깨고 생각해 보니 불과 몇 년전에 내가 고구미군에게 그런식의 얘기를 들떠서 한 적이 있었던 것이다........ 나는 나약해 진걸까?
프롤레타리아. Proletariat. 원래는 어원이 라틴어의 Proletarii에서 나온 것. 이 이름은 세르비우스 툴리우스의 인구조사 때 국가에 대한 가치가 오직 자손들(proles)을 기르는 자로서 밖에는 없는 사람들에게 붙여졌다. 즉 다시 말하면, 부나 지위, 특별한 능력 면에서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람들을 의미했다.
-> 21세기의 과학은 인공적으로 정치가 아버지와 의사 어머니의 유전자를 이어받은 자손들을 탄생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21세기의 프롤레타리아는 로마제국 때의 그것 보다도 못한 숨만 쉬는 빚쟁이들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또 한 번 두렵다.
누군가도 말했듯이 나는 술을 굉장히 자주 마시는 것 같지만 사실은 블로그에 '술을 마셨다' 라고 쓰기 전날에만 마시는 편이기 때문에 자주 마시는 편은 아니다. 다만 한 번 마시면 많이 마시고, 다음날 찾아오는 후회로 블로그에 씨부리는 것이 버릇처럼 굳어졌다.
그제 마신 상민씨와의 술자리에서는 특별한 것은 없었다. 다만 이제 친분을 쌓아가는 사람들로써 공통적인 관심사인 詩 얘기를 많이 했고, 어떻게든 상민씨와 연결되는 이성준 군이 마지막에 기꺼이 합석해 준 덕분에 꽤나 즐거운 자리였다. 다만 지후에게 지하철에서 몹쓸짓을 한 것은 정말 많이 미안하다. 그날 술자리에서 상민씨의 강조점은 오후 2시부터 마셨다는 것과 나와 지후 커플이 부럽다는 것이고, 내가 생각하는 강조점은 2차 직전에 한강에 가서 그와 얘기를 나눈 것과 2차에서는 이미 많이 취해서 처음 만난 어떤 분께 무례하게 굴었을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이렇게 서로 좋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이나 핵심이었다고 생각하는 지점이 다른데도 다음날 생각했을때, 기분 좋았던 술자리는 무척이나 훌륭한 것이다.
오늘 영일군과 마신자리는 내가 생각하는 도시를 떠나는 것에 대한 것을 주제로 서로의 우정을 확인하는 많은 대화가 오고 갔다. 영일군의 요약은 내가 지금 바로 도시를 떠나면 싫다. 그리고 내가 떠나면 영일군이 가장 친한 친구인 나를 자주 못 보는 것이기 때문에 기약이 없다는 측면에서 내가 돌아올 날을 정해 놓고 남미 여행을 가는 것이나 지리산 생태 캠프에 가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섭섭해 하는 그 마음이 고마웠다.
내 답변은 나도 영일군이 정말 좋지만 스스로 생각하는 온전한 삶이 도시에는 없는 것 같고, 내가 정말 내 마음에 들게 살았을 때, 무엇이든 내것이라고 생각하는 일을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술자리에서 일어나기 전에는 나도 많이 취해서 나도 네가 정말 좋은데, 선택은 이미 굳어졌음을 재차했고, 영일군은 그럼 세 달만 더 도시에서 뭔가를 알아보고 떠나라는 얘기를 했다. 영일군은 얘기는 그렇게 했지만 이미 내 굳은 결심을 알고 있었다는 점이 나는 무척 좋았다. 친구란 것은 그런 것이 아닐까?
내가 영일군에게 이런 얘기를 했다. 나는 그냥 네가 좋다. 중학교 3 학년때, 옆에 학교에 전학온 너를 오락실에서(뚱보오락실)에서 만난 순간부터 그냥 별 이유 없이 좋았다. 너도 알다시피 우리가 별로 서로 좋아할 뭐 그런 공통적인 관심사가 없지 않느냐.... 그런데도 우리는 지금 서른을 조금 넘었지만 가장 친한 친구가 되었다. 나는 그냥 네가 좋고, 네가 나를 생각하는 마음과 너만이 내 부족한 얘기를 들어줄 수 있다는 사실과 너도 너의 모든 얘기를 내게 한다는 사실이 좋다.라고.....
실제로 나는 열일군이 그냥 처음 만났을때부터 좋았다. 사진 찍히기 싫어하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진은 열일군이 내 머리를 누르고 있는데, 나와 영일군이 모두 웃고 있는 고1때 사진이다. 그때만 해도 영일군의 눈매가 지금처럼 무섭지는 않았다.
사실 오늘은 술을 먹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담배 살 돈이 없어서 영일군에게 '바쁘냐, 좀 있다 갈테니까 담배 한 갑 사줘' 라고 문자를 보냈는데, '엉 언제 올껀데'라는 답장을 보내면서 시작된 것이다. 결국 영일군은 담배도 사주고 술도 사주면서 내 얘기도 들어줬다. 더군다나 헤어지기 전에 새 담배도 한갑 사줬고, 찰떡아이쓰도 같이 놔눠(노놔) 먹었다. 이러니 어찌 내가 그를 좋아하지 않을수 있으랴.
아마도 그가 나를 사랑하고 나도 그를 사랑하기 때문이리라.........
살인을 마친뒤 장면이 바뀌면서 이성준에게 고백을 했고, 이성준은 미친놈 취급 받더라도 자수해서 어떻게든 살아남으라는 충고를 내게 던졌다. 공포에 휩싸인 내가 이건 꿈이 아닐까.라고 묻자 이성준이 꿈이 아니라고 해서 나는 공포감에 휩싸이면서 꿈에 폭 빠져들었다.
다음날 여선생님 수업시간에 체육선생님으로 생각되는 남자 선생님 한명이 들어와서 나를 힐끗 보더니 무슨 서류를 들고서 여선생과 수근수근 거렸다.
나는 경찰이 나를 잡으로 온 거라는 생각에 악에 받혀서 내가 다 죽였다고 나 잡아가라고 소리를 질렀는데, 그때 꿈에서 깨어났고, 모든게 꿈이라는 사실에 무척 안심했다.
잡혀가는 전날 다른방에서 동생과 함께 자고 있는 엄마를 억지로 붙들고 내 옆에 자라고 했다. 엄마 옆에 누웠는데, 눈물이 났다.
여러가지를 암시하는 꿈이다.
이성준을 곧 만날듯하고, 엄마는 10일에 집에 온다. 그런데 나는 왜 사람들을 죽였을까?
꿈 속의 나는 일본 미스터리 소설들의 연쇄 살인마 같았다.
죽이는 꿈은 보통 어떤 일의 해소를 나타낸다고 하는데, 과연 그런걸까?
작은 어머니랑 할머니에게 갔다. 작은 아버지 탈장 수술을 기점으로 할머니는 시설로 옮겨졌다. 치매에 걸린 노인은 옮겨진다는 사실이 무척 슬프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임을 안다. 자식들이라고 해도 오래 함께 있지 않은 사람들이 그것에 대해서 어쩌구 저쩌구 하는 꼴은 별로다. 아버지와 아버지 형제들이 그렇다는 얘기는 아니다. 아버지, 고모, 삼촌들은 오히려 너무 덤덤한게 문제라면 문제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어제 생에 최초로 노인 보호 시설에 갔다. 강릉 시내의 한 건물의 한 층에 22분의 노인들이 함께 생활하고 있다. 어느 영화에서 본 것과 비슷한 광경이 펼쳐져 있다.('벼랑위의 포뇨'의 초반에 노인 보호 시설이 나오는구나...) TV가 있고 몸을 가누실 수 있는 분들은 소파에 주르륵 앉아 계신다. 우리 할머니처럼 치매가 완전 심하신 분들도 있고 정신은 멀쩡하신데, 몸이 많이 불편하신 분들도 있다. 분위기를 보니 주로 치매가 심하신 분들이 많으셔서 노인들 사이의 원활한 의사소통은 전혀 없는 듯 했다. 할머니가 작은 어머니도 나도 못 알아보시는 사이에 할머니 옆에 앉아 있는 할머니는 계속 혼자서 중얼중얼 하셨다. 일 하시는 언니는 참으로 좋은 사람같았다.(나는 좋은 사람이 아니고서야 웃으면서 노인들을 돌보는 일을 할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갇혀 있어야 하는 그 공간 자체가 너무나 참담했다.
오늘도 작은 어머니와 함께 시설에 가서 할머니를 모셔왔다. 함께 점심을 먹었다. 나랑 삼촌은 식사후에 서울로 출발했고, 할머니는 하룻밤을 본인 집에서 주무시고 내일이면 다시 시설로 돌아가신다. 그런 과정이 너무나 자연스럽다는 사실이 또 머리를 묵직하게 했다.
낮시간 TV 광고를 절반씩 차지하고 있는 상조광고와 보험광고, 노년에 편안한 삶을 위해서(좋은 시설에 들어가기 위해서?) 돈을 모으는 사람들, 이제 돌아가실 때까지 못 볼지도 모르는 우리 할머니....
할머니가 아버지의 계모인 관계로 엄마는 할머니가 나와 동생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나랑 20살 차이가 나는 막내삼촌의 아이들을 대하는 할머니의 모습을 봤던 나의 20대 초중반에는 나도 엄마 말이 맞나 생각했었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아주 어렸을때부터 시골집에서 서울로 출발할 때, 항상 우리 강아지들 잘 가고 또 오라고 하면서 동네 어귀까지 따라나오시며, 나와 동생에게 쌈짓돈을 쥐어주셨던 분이 우리 할머니였다. 할머니의 근검절약적인 생활과 시골에서만 살았던 생활상을 생각해 볼 때, 할머니 주머니에서 나오는 배춧잎들이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음을 이제는 확실히 알겠다.
하지만 지금의 할머니는 강릉의 작은 아버지 말고는 누구도 알아보지 못한다. 자꾸 이 사람은 누구냐고 할머니에게 묻는 것은 그만두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강릉의 작은 아버지는 나와 생각이 같은지 할머니와 함께 하는 내내 그런 질문을 하지 않았다.
이번 강릉행에서 작은 아버지, 작은 어머니가 내 계획에 적극 찬성해 주셔서 많은 힘을 받았다.
지후의 최근 포스팅도 내게 많은 힘이 됐다.(현재를 저당잡힐수야 없지...)
DS도 무척 고맙다.
아마도 곧 서울을 떠날듯하다.
대학 1, 2 학년을 안성에서 지냈다. 예술대 A, B동을 가로지르는 구름다리와 한 학기 30만원 짜리 자취방, 그곳에서의 추억들이 있었기에 무척 행복했다.
대학 3, 4 학년은 대학로로 다녔다. 안성에 계속 있고 싶었던 아쉬움을 학교 바로 뒤에 있던 낙산공원이 달래주었다. 사실, 나를 즐겁게 해준 것은 낙산공원이 아니라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골목길들을 헤치며 낙산공원 입구까지 오르던 순간들과 성벽에 올랐을 때, 보이는 사진속의 풍경들이었다. 술 사러 가서 종이컵은 없냐고 물으면 유리잔을 내주시면서 다 먹고 돌려달라고 하던 할머니가 운영하던 시골에나 있을법한 작은 구멍가게가 있고, 화려한 대학로를 반대편에 두고 마을버스 한 노선만 오고가는 언덕 위의 동네가 있었기 때문에 나는 낙산공원에 즐겨 올랐다.
오늘은 처음으로 대학로 쪽이 아니라 한성대 쪽에서 낙산공원에 올랐다. 정확한 사업명칭은 모르지만 아무튼 낙산공원을 좀 더 가꾸기 위한 사업 때문에 할머니의 구멍가게는 사라졌고 그 자리는 깔끔한 모습으로 정리되고 있었다. 사진속의 저 집은 아슬아슬하게 지역 개발의 구획에서 벗어났다. 나는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저 집의 주인 아저씨는 어떤 생각을 했을지 궁금하다. 또 구멍가게 할머니는 어디로 가셨을지도 궁금하다.
나는 재개발 및 뉴타운과 관련해서 지금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집의 외관과 내부를 좀더 예쁘고 실용적으로 고쳐주었으면 하고 생각하는 쪽이다. 저 멀리 보이는 아파트들이 공원 바로 옆에 들어서지 않게 되서 정말 다행이다.
나는 내가 알던 풍경들이 사라지는 게 싫다. 그 싫음이 단순히 점점 나이가 들어가기 때문에 생기는 고집은 아니라고 확신한다.
김훈이 '바다의 기별'에 실린 산문에 자기가 지금 사는 곳을 고향으로 만들지 못하면 어디에도 고향은 없다고 썼는데....
오늘 그 구절이 많이 생각났다.
지금 문명이 다음의 무엇으로 넘어갈때, 자본주의적인 것을 아예 없애고 진행되지는 않겠지만 인간들의 자유노동과 작은 단위의 지역들을 중심으로 지기거래라고 불리는 생산물과 돈, 생산물과 생산물의 거래 방식을 통해서 서서히 무소유의 이상적인 세상이 만들어 질 것이라고 믿는다.
이런 생각을 했다.
많은 사람들이 골고루 많이 가질수 있다는 것이 자본주의가 내세우는 기치이다
정말 꿈 같은 이야기고 역사의 진행상 그랬던 적이 없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자본주의에 많은 기대를 걸었다.
그 와중에 냉전이 있었고 공산주의는 무너졌다. 공산주의를 무너뜨린 것은 자본주의가 아니라 그 안의 사람들이었다.
물론 나는 공산주의를 무너뜨린 사람들 중에 많은 수가 자본주의의 기치를 생각했을 수도 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나는 그 사람들 중에 대다수가 자본주의 시스템이 갖는 우수성에 대해 정확하게 이해하고 그 흐름을 따랐기 보다는
단지 시대의 흐름을 따랐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 대다수의 사람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부자가 되었고 정말 많은 사람들은 가난 때문에 웃음과 희망을 잃었고, 부자가 된 사람들은 많은 돈 때문에 인간성을 잃었고 희망은 생각조차 하지 않게 되었다.
또 이런 생각을 했다.
나는 내 생각들에 갖혀서 실제로 알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 생각만으로 괴로워하고 그동안 살아온 삶의 무게로 미래의 방향을 저울질 하는 것도 옳다고 할 수 없는 방법임에도 불구하고 생각의 무게로만 생각들을 저울질 하고 있구나. 결국 나는 무엇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무엇도 되지 않았다. '무엇'을 타이핑 하면서 무엇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고자 하는 생각을 생각속에만 가두어 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나는 내가 가엾지만 나에게 방법은 있다.
내 삶의 모양이 결국은 세상을 바꾼다.
미래는 여전히 불안하다. 다만 많이 불안하지는 않다.
예술가는 가난을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예술가가 아니더라도 가난을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떳떳하고 당당하게 꿈을 좇아야겠다.
옳은 양심을 가지고 그 양심에 부끄러움이 없게 살아야겠다.
이지(理智)에 치우치면 모가 난다.(아는 것이 많으면 모가난다.)
감정에 말려들면 낙오하게 된다.(정에 빠지면 헤어나기 어렵다.)
고집을 부리면 외로워진다.
아무튼 사람사는 세상은 살기 어렵다.
나쓰메 소세키 '풀베개' 중에서, 책세상
(괄호는 시마다 마사히코가 '피안선생의 사랑'에서 인용한 내용, 민음사)
용산 철거민 사태의 모든 정황을 떠나서 두 가지의 정확한 사실이 있다. 사람이 죽었다. 경찰 특공대가 투입됐다.(경찰 특공대 투입을 먼저 쓰면 너무 감정적으로 읽힐 수도 있기 때문에 이런 순서로 적어본다.)
다시, 정황을 떠나서 재개발이라는 것에 대해서 간단하게 생각해 보자. 우리집이 5000만원짜리 집이다. 한 20년을 살았다. 정부에서 우리 동네를 재개발 한다고 공사 후에 새 건물에 들어올 수 있는 입주권이랑 공사기간 동안의 금전적 보상을 약속했다. 하지만 공사후에 들어서는 아파트에 살기 위해서는 1억이 필요하다. 화가 나겠는가 안나겠는가... 더구나 그 동네를 터전으로 장사하던 사람이라면 어떤 기분이겠나? 더구나 세입자라면?
정말이지 물리도록 지겨운 재개발의 악순환이 계속 되고 있다.
"건축이란 공간의 질서를 세우는 것이며, 공간은 인가의 질서를 세운다. 질서는 인간을 여러 레벨에서 지탱하고 있다. 유용성, 효율이라는 것도 그 하나이다. 그러나 그 뿐만 아니다.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가지는 기억, 그리고 그것을 소중히 여기는 것, 또는 공통의 바람을 가지고 그것을 확인하는 것, 이것도 질서이다. 그리고 그 질서는, 때로는 말로는 확인할 수 없는 깊은 침묵 속에서 성립하고 있는 것도 있다. 훌륭한 건축이란 그러한 질서에 형태를 부여하여 인간 개개인과 그 공동체 전체에 그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 건축의 장: 12강 -
재개발의 유용성과 효율은 그곳에 살던 사람들과 그 사람들이 이룬 공동체를 위한 유용성과 효율이어야지 건설사와 정부가 생각하는 유용성과 효율이어서는 안된다.
화가 많이 난다.
문제는 Spread the Message 보다 Get your Message가 먼저라는 점이다. 아무튼 '스프레드더메시지'는 단어의 뜻 때문에 사진에서처럼 가로로 쓰면 무척 잘 어울리고 실제로 메세지가 퍼져나갈 것 같다. 메시아는 메세지를 전해주는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이스라엘은 메시아를 논할 자격조차 없다.
딱히 고민이 많은 것은 아닌데, 이렇게 살수는 없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어딘가로 흘러 들어가서 허위허위 지내다가 다시 어딘가로 흘러들어가는 것 보다는 지금까지의 방식을 버리고 구체적이고 정확한 대비와 대응으로 삶의 큰 그림을 그려 나가야겠다고 생각한다. 30년을 바람처럼 살고 싶다는 마음으로 살았기 때문에 계획한 대로 잘 될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메세지는 갖고 사는 바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한다.
어제 오세훈이 한강개발 계획을 발표했고, 오늘 아침에는 용산 철거민들 쪽에서 사망 사고가 났다. 개새끼들
나는 상관 없잖아라는 마음이 나부터 망칠수도 있다. 잊지말자!
사장님께서 당신 요새 왜 그러나. 라고 해서 일 하기가 싫어서 그렇습니다. 라는 대답이 입술 끝에까지 나왔었는데, 결국 정신 좀 차리게 라는 말을 듣는 것으로 상황을 마쳤다.
진행중인 차가 어딘가에 닿은 것 같으면 무조건 후진 놓고 핸들 그대로 잡은채로 뒤로 빼면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왜 나는 그냥 그대로 전진해서 사태를 크게 만들었을까?
1. 내 차가 아니고 사장님은 돈이 많다.
2. 차를 긁은 것으로 미운털이 박혀서 빨리 잘릴 수도 있다.
3. 오랜만에 운전인데다 정말 오랜만의 사고라서 많이 당황했다.
4. 걸어 다닐때, 세게 부딪쳐도 가던길을 그냥 가는 평소의 성향이 작용했다.
간단히는 이 네 가지 정도가 함께 작용한 듯하다.
내가 오늘 사고를 얘기해주면 지후는 잘했어. 할 것 같고, 영일군은 인간아. 할 것 같고, 고구미는 내가 그럴수도 있지. 라고 하면, 뭐 그럴수도 있지. 라고 할 것 같다.
그러니까 나는 그럴수도 있지. 라고 생각한다.
이건 뭐 약간 막나가는 건가?
그래서 그 후 며칠간 지금 신는 운동화를 신었는데, 동생이 국제 쇼핑을 통해 주문한 오니츠카 타이커라는 이상한 브랜드의 신발을 조금 신다가 '형 가져, 생일선물로 미리 줄께'(내 생일까지 앞으로 6개월 남은 시점에서 ㅡ.ㅡ) 라고 해서 오니츠카 타이거 운동화를 그 전에 신던 나이스처럼 될 때까지 신어버렸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지금 운동화를 쭉 신게 됐는데.... 예전에도 조금 오래 신으면 발냄새가 살짝살짝 나던 이 문제의 신발이 계속 신게 되면서 치유할 수 없는 방향으로 나아가서 이제는 조금 신고 있다가 신발을 벗으면 양말에서 상한지 3일된 우유 냄새가 난다. 사무실 책상에 앉아 있다가 신발을 벗고 책상다리로 바꾸면 아래서 부터 냄새가 흐물흐물 올라오는데, 솔직히 나는 이런 냄새를 좋아하니까 기분 나쁘지 않다. 다만 어디 갔을 때, 신발 벗기가 좀 그렇다.
우유가 계속 상하면 치즈가 되니까 조금 있으면 치즈 냄새가 날 것만 같다.
2. 이성준에게 조금 전에 전화왔다. 자기는 어디 나오는 길이라고 괜찮냐고 묻길래 괜찮다고 했다. 어제 전맹 봤다고 했더니 어디서 라고 하길래 '민중의 집'에서 라고 대답했는데, 자꾸만 민주가 누구야. 라고 묻는다. 내일은 신애 생일인데, 왜 나한테서 민주를 찾는걸까. 그래도 늘 고맙다.
대학 선배 중에 친구들이 '편의방'(96, 97년 잠깐 번성했던 '편의점 + 실내파라솔' 형태의 술집)에 있다고 너도 와. 라고 했더니 편의가 누구야. 라고 했다는 선배가 있었는데, 그 얘기랑 비슷한 맥락이다. 그 선배는 다들 누구누구 자취방에 모여서 노는 분위기 때문에 편의를 사람 이름으로 생각한 것 같다.
3. 어제 민중의 집 강의를 들었는데, 무척 좋았다. 결론은 신자유주의 금융 시장 환경에 국민들이 힘을 모아 저항하자는 것이었는데, 나는 그 바탕에 깔려 있는 얘기 - 사람들이 은행에 돈을 예금하는 이유는 내가 예금한 100만원이 1년후에도 예금한 당시의 100만원과 같은 가치를 가지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 가 무척 가슴에 와 닿았다.
헌법도 무시하는데, 이 정도 기본원칙이야 가볍게 무시해 주는건가?
은행들이 스스로 정신차리기는 힘든 것 같고, 어제 강사 선생님의 우려대로 정부가 디노미네이션을 강행하기 전에 조금이라도 예금이 있는 국민들이 은행에서 돈을 다 인출하는 노력이 현실적으로 적합한 방법인 것 같다.
나는 뭔가 대책을 가지고 살아왔다기 보다는 암담한 현실과 막연한 기대에 기대서 살아왔다고 할 수 있다. 암담한 현실에 기댔다는 점이 막연한 기대에 기댔다는 점 보다 더 사람을 수렁으로 몰고간다.
얼마전에 '벼랑위의 포뇨'를 봤다. 예전에는 '월 이'를 봤다.
'월 이'에서 우주를 떠돌던 지구인들은 냉장고에서 찾아낸 식물을 보고 지구로 돌아가서 다시 땅을 일구자는 생각을 한다. 그러니까 그 사람들은 지구가 여전히 황폐하다는 것을 알고 다시 우주를 유랑해야만 한다. 엄청난 재난 영화라고 할 수 있다.
'포뇨'는 결계가 깨지면서 물벼락을 맞은 지구인들이 다들 죽지도 않고 살아있는데다가 포뇨가 인간이 된 후에도 물이 빠지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살아가야만 한다는 점에서 엄청난 재난 영화라고 할 수 있다.(약간 설명을 더하면 만화중에 네스호의 아래로 시간 터널이 있어서 잠수함을 타고 중생대로 가서 모험을 하는 만화가 있다. 캠브리아기의 생명 대폭발에 대한 이야기가 곁들여 지는 SF 소설이나 코믹스가 종종 있다. 남의 영화를 안 본다는 소문과 달리 임권택 감독은 미조구치 겐지 영화를 쌓아두고 보기도 한다고 한다.)
'미래 소년 코난'에도 지상이 물바다에 휩싸이고 언덕위에 남은 작은 섬 '하이하바'만 사람이 정착할 만한 터전이 된다. '포뇨'와 다른점은 하이하바는 인구가 얼마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미야자키 하야오에 대한 비판은 재앙을 아름다운 것으로 그냥 끝내버리는 영화의 주제 의식에서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일을 계속하는 것과 관련해서 한군과는 문자를 주고 받고 윤군과는 통화를 했다. 윤군에게 대책없이 그만 둘 순 없잖아.라고 했는데, '포뇨'와 '월 이'는 대책없이 끝나버린다.
암담한 현실에 기대기 위해서는 당장은 대책이 없더라도 곧 대책이 생기는 상황이어야 하는데, 내 생각에 지금은 막연한 기대감에 기댈 수 있는 시기는 아닌 것 같다.
'먹고는 살아야지'라는 말이 내 입에서 튀어나오진 않지만 남들이 하는 그 말이 더 이상 변명처럼 쉽게 들리지는 않는다.
포뇨에 나오는 벼랑위의 그 집이 바로 내가 머릿속에 그리던 훗날 살고 싶은 집이었다.
술이 덜깬 상태로 출근해서 해장으로 학생식당에서 돈까스 비슷한 무엇과 라면을 먹었다. 어제는 그렇게 기분이 나빴는데, 이상하게 기분이 좋아졌다. 그냥 단지 마셨을 뿐인데, 술이란건 그런걸까? 영일군 부인께서 영일군 알콜 중독 초기라고 했다는데(몸 쓰는 일을 하면 술이 땡기긴 하지.. 부인께서는 그 부분을 잘 이해 못하시는 것 같다.), 사실 영일군은 술을 자주도 많이도 안 마시는 편이다. 잔뜩 마시고 기분 좋아진 나야말로 알콜 중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기분이 좋아서 언덕더미 정도로는 쌓여있는 일들은 내년에 처리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기분이 더 좋아졌다.
고구미군에게 다 와간다고 전화가 왔다. 반가웠다. 크게 실수한 게 없다는 얘기도 반가웠다. 같이 학생식당에 갔다. 밥을 먹는 그를 찍었다. 모처럼 25미리가 위력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신변과 관련된 자잘한 대화들을 나누고 미래에 대한 불안에 대한 얘기들은 서로의 기운을 통해 오고갔다. ECC에 가서 흡연 금지 구역인 ECC 밸리에서 담배를 피웠다. 마침 따끈하게 햇살이 내렸다. 함께 담배를 피우는 건 두 사람이 내뿜는 연기가 섞이는 것처럼 서로 심정적으로 섞이는 일이다.
어쩌다 보니 담배 예찬 글이 되버렸는데, 야외 흡연이 불법이 되더라도 좋은 경치를 볼 수 있는 곳에서 담배를 피울 수 있는 어떤 조치는 취하고 진행됐으면 좋겠다. 고즈넉한 바닷가에서 함께 담배를 물고 바다를 바라보는 두 남자를 상상해 본다.
고구미와 이성준 두 사람 모두 고맙다. 놀기로 한 김에 기타 연습이나 실컷 해야겠다.
그래도 지후가 제일 고맙다.
올해가 간다.
부정적인 것들 - 보이지 않는 저 너머
미래에 대한 불안은 영원한 것이니까 결국 긍정적인 두 가지 측면으로 올해를 정리한다면 그렇게 나쁘지 않았던 한 해다.
그렇지만 부정적인 것들을 '점점 더 보이지 않는 저 너머'로 바꿔보면, 최악의 한 해다. 유이카와 케이의 '점점 멀어지는 당신'을 읽었을 때, 그 내용보다는 제목에 끌렸었다. 사라져 가는 것들은 아름다운 법이니까 그랬다. 점점 멀어져가는 당신을 바라보는 모습을 상상하는 순간 사랑의 미열이 온 몸을 가득 채우는 것 같다. 하지만 사라져 가는 꿈과 희망은 온 몸과 마음을 삐져나올 곳도 없는 불덩이로 가득 채워 폭발하지도 않은채 사람을 절망으로 내몬다.
모두가 희망을 잃어 버린 상황이 차라리 잘됐다.는 마음이나 차라리 다 같이 망해버리면 괜찮다.는 식의 마음은(직장 동료에게 들었다.) 인생 뭐 있어.와 비슷한 마음가짐인데, 이런 생각 옳지 않다. 언제는 안 힘든 시기가 있었냐.는 식의 마음 역시 옳지 않다.
나는 많이 공부하고 강해질테다. 지금처럼으로는 안된다.
아싸 내일 월급날이다.
내가 잠들때 하는 오래된 공상들이 있다. 한다기 보다는 반쯤 무의식의 상태에서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이미지들인데, 한 마디로는 강철가시라고 할 수 있다. 보통은 강철 가시들로 둘러쌓인 계곡을 내가 맨손으로 오르고 있다. 어떤 형벌이나 탈출의 상황(시지푸스를 떠올리면 되겠다.)에서 미끄럽고 날카로운 차가운 강철 가시들을 부여잡고 정상을 향해 올라가는 것인데, 아래는 날카로은 가시들이 나를 향해 있고, 나는 아래를 내려다 보고 두려움에 떨며 위를 향해 올라가려 애쓰지만 손은 차갑고 발은 미끄러워서 금방 미끄러지고 만다. 그렇면 나는 가시에 몸을 관통당해야 하는 것인데, 어디까지나 상상의 영역이다 보니 내 허벅지의 안쪽이(항상 다리부터 떨어진다.) 가시를 스치면서 그 찬 기운을 느끼고 이제 곧 몸이 관통당하려는 찰나에 공상이 깬다. 그리고는 잠들때까지 무한반복이다. 비슷하게는 만지면 손가락에 구멍이 나는 날카로운 철조망을 어쩔 수 없이 오르는 상황도 종종 떠오른다.
어제는 조금 달랐는데, 내가 새총의 총알이 되어서 무시무시한 속도로 발사됐다. 속도가 너무 빨라서 내 몸은 저항 때문에 활처럼 휘었고 내가 날아가는 곳은 강철 가시가 촘촘히 박힌 어느 벽이었다. 내 온 몸이 가시에 박혀 문드러지는 상상을 하다가 잠들었다.
그래 나는 그냥 날카로운게 싫은거다.
'행복에 대한 욕망은 고통의 도구들을 방어하기 위해서 가지런해진다'(http://silentsea.pe.kr/269)는 표현을 읽고 마음속으로 형상화 하기 위해서 꽤나 노력했는데, 쉽지 않다. 내가 생각하는 맥락 상으로는 내가 행복해 지고 싶다는 욕망 때문에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는 모든 것들을 그냥 유순하게 받아들인다.(고통을 견디면 언젠가는 행복이 찾아올 거라는 기대로) 정도가 되겠다. 그림으로 그려보면 고통의 도구들이 나를 고통으로 몰고가려고 하지만 나는 행복에 대한 욕망이라는 지팡이를 땅에 꽂고 결계를 쳐서 튕겨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방법은 고통을 더욱 크게 만들 뿐이다. 단지 결계를 치는 것이 아니라 지팡이로 고통의 도구들을 쳐내야 한다. 궁극의 마법으로 모든 고통을 잠재워주는 누군가가 나타나는 것은 게임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다. 개개인이 뭉치고 안 뭉치고를 떠나서 일단 자신을 괴롭게 하는 것들에 맞서 싸워야 한다. 자동으로 싸워주는 동료는 현실에 없다.
나는 대안 없는 양비론자이며 절대 다수이지만 정작 힘은 쥐뿔도 없는 무당파의 일원이지만 지팡이를 뽑아내고 싶다.
이적 노래 중에 '나아지겠지'란 곡이 있는데, 막연한 기대는 더 이상 안된다.
외할머니는 요리 솜씨가 좋았다. 딸들이 다 그 솜씨를 닮았다. 결과적으로는 외손자, 외손녀들이 복 받았다고 할 수 있겠다.
예전에 어딘가 썼던 것 같은데, '외할머니' 검색에 아무 내용이 없는 것을 보니 이 곳이 아니었던 것 같아서 다시 기억을 살려서 할머니에 대한 기억을 하나 써보려고 한다.
경상북도 영주시에 서천교라는 다리가 있는데, 내가 마지막으로 영주에 갔을 때는 1급 상수원 보호 구역 같은 걸로 선정되어서 물놀이가 금지되어 있었다. 암튼 그 다리 아래 흐르는 개울(개울이라지만 엔간히 넓다.)에서 이모들과 외삼촌들이 어린시절 물놀이를 즐겼다고 한다. 내가 어렸을 때도 그 다리 밑 개울에 많은 사람들이 물놀이를 왔었는데, 나와 내 동생, 둘째 이모 아들 이렇게 셋이서 어느 여름 다리 밑에 놀러갔다. 어디가 아팠는지는 기억이 안 나는데, 아무튼 내가 급 아파져서 내 동생과 이모 아들만 물놀이를 시작하고 나는 다리 아래 그늘에서 수영하는 사람들을 구경하면서 나만 거기 끼지 못한다는 사실을 기분 나빠하고 있었는데, 외할머니가 그림처럼 나타나셔서(당시면 60대 초반이셨다.) 나를 토닥이시면서 금방 만드신 호박 부침개를 내 놓으시며 먹여주셨던 것이었다. 나는 금방 기분이 좋아졌고 내 인생에서 가장 맛 있었던 기억이다. 당연히 그때 이후로 호박 부침개를 좋아한다. 또 이모들의 증언으로는 내가 갓난쟁이였을때, 할머니가 올라오셔서 나랑 엄청 많이 놀아주셨다고 한다. 나를 포대기로 업고 신월동의 코스모스 밭을 걸었을 할머니를 생각해 본다. 그때도 하늘에는 비행기가 쌩쌩 날아다녔겠지...엄마가 늙으면서 외할머니의 모습을 많이 닮아간다.
제사로 돌아와서 여러가지 사정상 막내이모의 원룸에서 단촐하게 진행됐다.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제사에는 항상 마지막에 커피가 올라온다. 외할아버지 제사에는 불을 붙인 담배도 올라온다. 나는 이모들의 그런 마음 씀씀이가 좋다. 제사가 끝나고 이모들이 어차피 우리 이름도 없다면서 족보를 내다 버리자는 의견을 냈다.(내놓으면 종이 줍는 사람이 금방 들고 간다면서...) 외삼촌들에 대한 불만의 표시였다고 생각한다.
둘째 이모 아들(나랑 동갑임)이 오래(5년쯤?) 놀다가 올해 초에 코스트코에 취직해서 잘 다니고 있는데, 어느 방 없는 가족에 대한 텔레비젼 다큐를 보다가 여자는 어디가서 설거지 해서 150 벌고 남자는 짱개 배달해서 170 벌면 되겠다고 해서 약간 짜증이 났다. 셋째 이모가 돈 그렇게 주는 곳이 없다고 하셔서 잘 마무리 됐다. 가족이 거리를 떠돌도록 뭘 한거냐고 다시 한 번 말해서 또 짜증이 났는데, 그냥 참았다. 떠돌고 싶어서 떠도는 가족이 어디있을까? 애들을 고아원에 맡기면 되는 걸 알아도 그럴수 있겠는가? 노모에게 애를 맡기러 갔다가 아니다 싶어서 도로 데리고 오는 심정은 어떨까? 오죽했으면 취재를 허락했을까? 제법 오랫동안 놀았으면서도 그렇게 현실감각 없는 말을 하는 이종사촌 아이가 멀게 느껴졌다.(중학생때 이후로는 계속 멀게 느끼고 있다만) 왜 정규직을 안 구하고 비정규직을 구하냐고 해서 한 대 치고 싶었는데.. 참았다. 결국 티비의 5인 가족은 32만원에 어느 모텔에서 한달간 살기로 했다. 이모가 열심히 꾸려나간 기사식당 덕분에 신월동에 집이 있을 뿐이고 딸내미는 대학원에도 보냈는데... 그런식으로 얘기할 수 있다니... 많이 잘못됐다. 이러니 진짜 돈 있는 사람들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겠는가.......
집에 돌아와서 백분토론의 마지막 두 발언을 봤다. 김제동이 저는 양비론은 아니구요...라고 했다.
요즘의 대세는 대안없는 양비론인 것 같다.
대안이 필요한 게 아니라 아예 새로 시작해야 하기 때문에 어디에도 대안이 없는게 아닐까?
그래.. 나는 대안없는 양비론자다.
마지막 문단을 지울까도 싶지만 일단 내버려 둔다.
다른상황의 비슷한 실수담, 정겨운 대화들
이어지는 대화들, 솜사탕 같은 당신의 질투
하지만 당신은 진심
그 진심의 무게도 내게는 녹아버리는 솜사탕
서로에게 진심만을 말하는 통속적인 관계
진심의 무게도 솜사탕처럼.....
언제까지라도
지후가 '빌어먹을 주인의식'이라고 말한 '주인 의식'이 나한테는 없다. 뭐든 열심히 하긴 하는데, 주인의식이라기 보다는 내 자신의 심리적인 안정을 위한 측면이 크다.
노동자 = 노동의 주인, 사용자 = 사업장의 주인... 말을 맞춰서 써보려고 했는데, 밤 새운티가 조금 난다. 노동의 주인들에게 그 노동이 왜 소중한지 개념적으로는 알려줄 수 있겠지만 그 어떤 제도도 실상은 노동자들에게 조금도 신경쓰지 않았다.
정치 = 정치인 vs 노동 = 노동자
경제 = 경제인 vs 노동 = 노동자 (경제인이라는 말에는 논란이 있겠지만 느낌상...이해할 수 있으니까....)
90퍼센트의 절대 다수가 2중으로 싸워야 하고(수가 많으니 2중으로 싸워도 좋다.) 결국은 정치인들이 법적으로 경제인들을 돕고 경제인들은 돈으로 정치인들을 도와줘서... 민주주의 정치제도와 자본주의 경제제도의 연합공격에 계속 지고 있다.
빌어먹을 틀 자체가 틀렸다고 본다.
한은이 금리 인하한 것이 우리 경제에 숨통을 터 주었으면 좋겠다고 MBC 뉴스 앵커가 얘기하던데........... 앵커도 노동자라면 그런 방송 하면 안되는거 아닌가? 방송법 새로 고친다던데, RTV 같은 채널을 지금의 공영방송들처럼 만들 생각은 안 하고, 어차피 한통속들이면서 노무현이 만든거..없어져 줘야겠어..라고 한다. 매체 환경이 많이 바뀌어서 그렇다고 한다. 법 만드는 사람들은 아직 법이 제대로 정리 되지 않은 이 시점에 눈엣 가시 같은 바뀐 매체 환경들에게 옛날에 신문/방송 장악하는 것 보다 더 강력한 본때를 보여주고 싶은거 같다.
정말 하루에도 몇번이고 모든 면에서(내 꼬라지를 포함해서) 이건 아니지 싶다.
오늘도 정부쪽에 올라가는 대통령이 지시한 사업에 대한 계획안과 관련된 일을 했다.
이게 맞나 싶다.
저탄소 녹색성장 한다고 가상세계 기술 개발한다. 쉽게 얘기하면 최종적으로는 정부가 가상세계를 통제하겠다는 얘기다. 더 쉽게 얘기하면 매트릭스다. 진짜 쉽게 생각하면 저탄소 녹색(성장)하려면 IT랑 서비스, 최소 제조업 빼고는 다 땅 나눠 갖고 농사지으면 된다. 사람들이 그러기 싫어한다고? 촛불집회 불법으로 몰고 가듯이 법으로 정하지 왜?
잠을 못자서 기분이 사납다.
저작권 주장하는 아티스트들 짜증난다.
새로운 형태의 대안웹이 필요하다.(웹이라는 이름을 갖지 않은)
그리하여 매트릭스가 완성되는구나.
그러니까 나는 매트릭스의 초안과 관계된 일을 하고 있구나.
미쳤다.
이소선 할머니는 다같이 마음을 모아서 3일만 출근하지 말아보라고도 했고, 정규직 노조들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끌어 안아야 한다고 했고, 전태일은 열사가 아니라 그냥 사람을 너무나 좋아했던 자기 아들이라고 했다. 안 뭉쳐도 그냥 다들 행복해야 그게 자유인데... 어렵기만 하다. 징징대고 투정만 부리다가는 뒤돌아선 연인이 다시는 뒤도 돌아보지 않을 수도 있다. 내가 먼저 뒤를 돌아보거나 그녀 목에 칼이라도 들이대서 내 쪽을 보도록 하는 방법도 있다. 한 가지 방법안에 여러가지 방법들이 빙글빙글 지나간다.
진짜 피곤해서 자기가 싫다. 누우면 바로 쓰러지겠지.
우리집은 내가 1살 때부터 신월동이었다. 태어났을때는 영등포구 도림동이었다. 한강 이남이지만 한국에서는 송파, 서초, 강남구만 강남이라고 한다. 지금 사는 집은 사진의 아파트(공사 시작한지 일년이 넘었는데, 아직 짓고 있다. 중간에 업체가 부도가 나서 다른 업체가 들어왔다고 한다.)입장에서 오른쪽에 있는 다세대 주택이다. 얼마전 읽다만 책에 따르면, 다양한 슬럼의 형태중의 하나인 다세대 주택이다.(물론 책에 나왔던 것은 청나라 시대의 대저택에 몇 백명이 우글우글 사는 형태였다만...) 이사 온지 7년쯤 된 것 같은데, 이사오기 전에는 아래쪽 사진의 버스 푯말이 있는 동네에 살았다. 그러니까 우리집은 7년전에 신월 1동에서 신월 3동으로 이사왔다. 김포공항이 근처여서 사진에 보이는 저 하늘로 수시로 비행기가 다닌다. 몇년전 동들을 합치려고 했을 때, 신월 1동 사람들은 신월 3동과 합치기 싫다고 했었다. 3동은 비행기 소리가 더 시끄러워서 집값이 더 싸다는 이유였던가.... 지금 다시 동들을 합치려고 하는데, 이번에는 3동과 5동 양쪽에서 다 서로 합치기 싫다고 한다. 그 이유는 잘 모르겠다. '비행기 소음 피해 보상' 이런것 때문에 '성환네 식품'을 운영하다가 'xx 치킨'으로 업종을 바꾼 우리 대머리 통장 아저씨(민방위 훈련 가면 통장아저씨가 도장 찍어주고 한다.)가 늘 바쁘신데, 우리 같은 세입자는 보상이 되더라도 해당사항이 없다. 당연하다고? 이 동네에서 30년 살았는데도 당연한건가?
이름부터 달동네인 신월동은 1동부터 7동까지 있는데, 다 고만고만하다. 그런데도 집값 같이 사소한 걸로 서로 섞이기 싫어한다. 섞이는 건 나도 반대인데, 동사무소가 멀어지면 귀찮은 일이 많기 때문이다. 저 아파트 뒤로 15분만 걸어가면 '안녕히 가십시오 서울특별시'가 나오는 곳이 아닌가...(내가 다닌 중학교에서는 1분 거리, 그곳에서는 비행기가 정말 머리위로 지나가서 자세히 보면 비행기 하부에 용접을 몇 번 했는지도 알 수 있을 정도다.)
내가 우리 동네를 무척 좋게 생각하는 점은 안그래도 싼 집 값이(우리집 꽤 넓은 방 세개 다세대주택인데 전세 보증금이 5500 이다. 이사왔을 때부터 그대로다.) 더 떨어지고 있다는 점일까? 최근에 전봇대들에 1000에 방 세개 월 30 짜리 찌라시가 많이 붙어 있다.(이런 찌라시는 도시가스를 항상 강조한다! 왜?) 지난 일요일에 동생이랑 자판기 커피 빼 먹으러 나왔다가 저 아파트 누가 와서 살까? 내가 물었더니 동생이 우리가 살고 싶다고 했는데, 2억은 하지 않을까 얘기하길래. 내가 지금처럼 피곤하게 일해서 10년 벌어야 되는데... 말도 안되고 8천 정도가 적당하다고 했다. 솔직한 내 생각이 그렇다. 역시 현실적으로 지방으로 가는게 맞겠다. 지난주에 잠깐 본 다큐에서는 인천 남동공단 공구상 아저씨가 손님으로 온 공장 사장님이랑 담배 뻑뻑 피우면서 저 옆에 xx(이름이 정확히 기억 안 나서... 암튼 대기업의 복합 건물을 말하면서) 평당 5000이었다고 신문지 한장 깔고 5천인데, 여기가 서울 한복판도 아니고 누가 장사하냐고 성질을 내셨었다. 현실적으로는 그 아저씨 얘기가 맞다고 생각한다.
문제의 저 아파트 바로 아래 보이는 건물이 2층 짜린데, 2층이 내가 청춘을 꽤 오랫동안 불살랐던 봉제공장이고(추억이 많다.) 1층이 둘째 이모가 21년째 운영하고 계시는 '호남기사님식당'이다. 나는 우리 동네가 좋다. 그리고 뭔가 새로 짓는 것들에는 짜증밖에 안난다.
아무튼 이제 자야겠다. 내일도 갈길이 멀다. 퇴근이 만날 늦더라도 확실한 주 5일제, 아니면 주 6일제더라도 일주일에 절반 정도는 정시퇴근하고 싶다.
어느 순간 서점으로 자리를 옮긴 우리는 그 고참의 누이를 우연히 만나게 되고 고참은 홀연히 사라져버린다. 나는 돌연 그 누이에게 두근거리는 감정을 느끼는데... 그녀는 이혼해서 혼자 살고 있다는 얘기를 내게 하고, 찻집을 거쳐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여관에 가려고 하는데, 자기 집에 잠깐 들렀다가 같이 나가자고 해서 비탈진 골목길을 올라 바깥의 철계단을 이용해서 2층으로 올라가야 하는 어느 다세대 주택의 안으로 들어갔더니 TV가 켜져 있는 마루에 노인 셋이 죽은듯이 TV를 향해 모로 누워있고 그 노인 셋은 그녀의 큰어버지, 큰어머니, 어머니였다. 그녀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발로 한 노인의 등쪽을 툭 치면서 자기 방에 들어가고 나는 얼이 빠져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 꿈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그 누이가 송혜교였다는 점이다.
평소에 송혜교를 무척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물론 예쁘다고 생각하긴 한다), 요즘 '그사세'를 보고 있는 것도 아닌데...
아무튼 이상한 꿈이다.
구체적인 꿈은 꽤 오랜만이어서 기억해 둔다.
예전에 '망종'을 무척 재미있게 봤다. 김치가 담긴 삼륜 자전거를 느릿느릿 끌고 가던 주인공과 같던 영화전체의 분위기가 마지막에 어느 경계를 뚫을 듯 달려가는 주인공의 분위기로 확 옮겨가던 그 느낌을 잊기가 힘들다. 그래서 쉬고 싶었지만 무리해서 영화들을 봤다.
중간에 만들었던 '경계'와 첫 작품 '당시'를 보지 못했는데, '중경'과 '이리'는 '망종'의 큰 틀을 벗어나지는 않는다. 앞공간과 뒷공간에 사람들을 집어넣고 오즈의 샷들을 연상시키는 앵글들을 많이 보여주고 주인공의 시선을 따라 먼 경치를 향해 고개를 돌리는 카메라들이 자주 쓰인다. 주인공이 사는 공간을 서서히 완성시켜 나가는 데 특출한 재능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나는 이런걸 좋아한다. 그리고 영화에서 공간은 중요하다.) 주인공들은 절망의 끝으로 치닫고 성관계는 중요한 모티브로 작용한다.
'중경' 볼 때, 어머니 묘지가서 하는 대사가 참 인상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영화 팸플릿 앞장에 그 내용이 있어서 여러가지 감정(안도감과 시기심)들이 지나갔다. '아버지는 부끄러운 짓을 하고 나는 점점 더러워져 간다.'는 멘트다.
두 영화 모두 계속되는 삶을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망종'과의 차별성이 있는 것 같다.
'이리'에서 엄태웅이 윤진서를 물에 빠뜨렸다가 돌아오는 택시에서 차 소리가 아니라 물 소리가 들리는 장면이 무척 훌륭했다. (택시가 터널을 달리는 샷도 무척 좋았다.) '중경'은 권총을 훔치는 시점인 듯한 호텔방의 공간분리 샷이 되게 독특했다. 앞쪽에 살덩이들이 가득차 있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특별히 주인공이 고개를 돌리던 마지막장면이 무난한 '이리'의 마지막에 비해서 무척 인상적이었다.
좋은 영화들이고 훌륭한 감독이다. 개인적으로 영화에서 남자성기가 덜렁거리는 건 좀 보기 안 좋다.
추가로, KBS에서 방영됐던 '망종'에서 장률의 장기라고 할 수 있는 이중 공간과 2인 식탁 샷을 캡쳐해 봤다.
아껴써야 하는 시기에 저작권 법에 걸려서 벌금 낼까봐 어제 가요 포스팅들을 비공개로 돌렸다가 다시 공개로 돌렸다.
어떤 형태로든 내가 올린 음악에 대한 저작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고소를 하면(가장 손쉬운 예로는 이런 불경기에 법률 사무소에서 내 블로그의 위반 사례를 찾아서 음반사 대표에게 전화를 한다. "고소 하시고 합의금은 5대5로 나누시죠?" "네!") 꼼짝없이 내가 돈을 내야 한다는 사실을 여러 검색을 통해서 알게 됐다.
네이벙에서 검색해서 2008년 2월 29일 개정된 저작권법을 슬슬 읽어봤는데, 너무 어렵다. 법조문은 원래 어렵게 쓰는 법이다. 그래야 사람들이 무슨 내용인지 잘 모르니까 그렇다.
현행 저작권 법의 논리를 엄정하게 들이대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상상해 봤다. 수 많은 작가들이 자신의 시를 통으로 올리거나 소설을 인용한 블로거에 대해서 고소장을 신청한다. 음악의 경우 작곡가, 작사가, 가수들이 같은 곡에 대해서 고소장을 신청한다. 국내에 돌고 있는 동영상의 98퍼센트 정도가 저작권 위반으로 삭제된다. 순수창작물과 언론사의 동영상만 살아남는다. 블로그에는 일기를 쓰는 것과 자신이 작곡한 곡을 올리고 자기가 찍은 사진, 자기가 그린 그림을 올리는 것만 허용된다. 자기가 본 영화의 장면을 캡쳐해서 올리는 것도 불법이 된다.
이를테면 내가 '장기하와 얼굴들' 시디를 샀다. 어떤 곡이 좋아서 립을 해서 티스토리 블로그에 올렸다. 그럴것 같지 않지만 '장기하'씨가 나를 고소하면서 '네가 올린 음악 때문에 사람들이 시디도 사고 멜론에서 개별곡도 사야 되는데, 네 블로그에서 들어버려서 내가 입은 손해가 엄청나거든, 그러니까 물어내!' 라고 한다는 것이다.
인터넷이란 것이 결국은 극악한 통제를 합법화 하는데 아주 유용한 도구로 전락해 버리는 것이구나.......
지극히 현실적인 결과로는 어딘가에서 고소가 들어와서 내가 합의금을 내고 지금까지 블로그에 올린 파일들을 다 삭제하고 블로그를 폐쇄하고 마음에 상처를 입는 것이 되겠다.
'저작권법 위반'으로 검색하면 이런 화면이 뜬다. 공부해서 판사도 하셨던 분이, 어렵다는 법 공부를 하셨다는 사람들이 대한민국 5퍼센트라는 사람들이 이러고 있다. 그 틈새를 노리는 법원 제출용 증거를 확보하는 회사도 생겼다. 좋게 얘기하면 '열심히 공부해서 고시를 패스하셨으니 돈을 많이 벌어야겠고, 틈새를 노린 새로운 시장이 창출 되었다.' 정도가 되겠다.
일! 해야 되는데, 이러고 있다. 낮에 논 것도 아닌데, 밤에도 줄창 바쁘다. 집에가면 씻지도 못하고 몸을 누일때가 많다. 이런 나이지만............. 하루에도 몇 번이고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한다.
원래 아고라에 잘 안 갔었는데(원래는 '다음'에 잘 안 갔었는데) 촛불 이후로 아고라에 자주 가고 있다. 촛불이 끝나는 지점과 동시에 아고라의 메인이슈가 경제로 돌아섰다. 그러니까 경제 얘기가 주된 이슈가 된지 몇 달이 지났다. 전체적인 진행을 보면 서브프라임으로 시작한 위기가 한국에도 타격을 줄 것이다.가 선두에 섰다가 실제로 서브 프라임이 제대로 터지고 금융제국 미국의 금융권이 아작나기 시작하면서 봐라.. 내가 터진다고 했지않냐는 글들로 이어지면서 얼른 개미들은 손 빼는게 상책이다. 한국은 이제 시작이다라는 얘기들이 덧붙여 지고(물론 현 정부에 대한 욕이란 욕은 다 나오면서..."건설 정권" 무척이나 맞는 말이다.) 주가가 오르고 환율이 조금 안정을 찾는 것 같던 며칠간 잠잠하더니(이 때도 실물 경제 위기 얘기는 나오고 있었다.) 한국의 실물경제 위기에 대한 신문 기사를 읽은 시점과 비슷한 시점에 다시 현재 상황에 대한 애처러운 절규와(사업을 접으시는 자영업자 이야기) 푸념(현실적으로 푸념말고 대책이 없는 것도 사실임) 들이 쏟아지고 있다.
아고라의 글들과 지금의 위기를 다룬 신문기사들을 읽으면서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엄마에게 전화를 한다. 그리운 엄마, 보고 싶은 엄마, 나를 너무 사랑하는 엄마....
11월 들어 가게에 손님이 뚝 끊겼다고 한다. 지방에는 문 닫는 가게들이 많다던데, 오산도 그렇냐고 물으니 왠만한 식당들 다 문 닫고 있다고 하신다. 어제도 그제도 오늘도 손님 없으면 일찍 문 닫고 푹 쉬고, 가게를 정리하는 것도 생각해 보라고 했다. 어제까지는 그냥 알았다고만 하더니 삼일 연속으로 내가 정리 얘기를 하자 아들이 많이 벌어다 주겠다면, 그것도 생각해 보고 있다고 하신다. 오늘은 두 번 통화했는데, 아침에는 정신 없을 때 통화하는 바람에 뭔가 정리도 제대로 못하고 전화를 끊어서 점심때 다시 걸었다. 예전에는 가끔 그랬는데, 요즘들어 전화를 끊을 때, 엄마가 "아들 사랑해" 라는 말을 하려다가 못 하고 끊는 것을 느낀다. 21살에 나를 낳은 엄마, 초등학교 2학년 때까지 나를 안고 머리를 감겨주신 엄마, 군병원에 있는 못난 아들 보러 빚내서 비행기 타고 대구에 내려왔던 엄마, 다른 애들처럼 못해줘서 미안하다고 말하는 엄마, 혼자 오산에 내려가서 남들 다 욕하는 술장사로 500에 20짜리에서 1000에 7짜리로 2000전세로 동업에서 사장으로 애쓴 엄마, 그 전세금 못 돌려받을까봐 혼자 전입신고도 한 엄마, 새벽에 취한 목소리로 가끔 전화해서 밝은 목소리로 "아들"이라고 불러주는 엄마, 취한 손님 내보내고 가게문 닫기 위해서 5분 있다가 전화하라고 새벽 1시에 전화하는 엄마.... 투정이 많았던 나, 스물 다섯도 넘은 아들이 불안에 못 이겨 엄마 품에 울면 "씩씩하게 살라"고 해주던 엄마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한다.
SKT랑 일을 하는 바람에 차장급의 매니저를 알게 됐는데, 업무상 네이트 온에서 괜찮으시냐고 물었더니 SKT 안에 있으면 바깥이야 어떻든 큰 걱정은 없지요라고 했다.
대학원 졸업을 앞둔 직장(?) 동료들은 1600 받고 모 회사에 들어갈 바에는 커피숍 알바를 10시간 하는게 낫겠다고 했다.(형우의 전언으로는 그 모 회사에는 안 들어가는게 낫다고 한다.)
광호는 자기 회사는 특별히 큰 잘못만 안하면 짤릴 걱정은 없다고 했다.(준 공무원이기 때문에...)
영일이는 안정적인 자리가 있으면 카센타 사장도 포기하겠다고 했고(영일아 그게 제일 안정적이다. 물론 약간의 불확실성은 있어.) 기타 선생님 동현군은 전화 통화에서 다들 힘든 시기니 힘내라고 했더니(동현이는 구직중이다. 알바도 구하기가 힘들다고 한다.) 정말 순수함이 가득한 목소리로 형도 힘들어요? 라고 물어서 무의식 적으로 아니라고 했다.
문제는 SKT 안에 있어도 언제 잘릴지는 모른다는 점이고 잘리면 밖으로 나와야 된다는 것, 공무원도 큰 잘못 없이 짤릴 수도 있는 세상이라는 점, 비정규직과 알바자리는 항상 넘칠 것 같던 고용시장이었지만 지금은 알바 구하기도 어렵게 됐다는 점이다.
그래서 나는 또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한다.
정말 바닥까지 가면 어떻게 될까? 아까 지후랑 잠깐 얘기했는데, 나는 특유의 잘 살아보세로 다시 불쑥 일어날 수 있다고 본다. 다만 새로 일어날 때는 아까 지후랑 잠깐 얘기한데로, 괜히 금모으기 같은거 해서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이 많은 사람들 못살게 만들고 바깥에 보이는 경제만 살리겠다는 것을 돕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어느 나라보다도 정정당당하고 모두가 행복한 나라로 다시 일어났으면 좋겠다. 이건 정말 바닥까지 갔을때의 얘기인데, 정부가 쏟아내는 (건설)경기 부양책들을 보면 바닥까지 가는 건 거의 기정사실화 되어 있는 것 같다. 국민의 90 퍼센트 이상이 그날 먹을 것을 걱정해야 할 정도는 되야 진짜 바닥이 좀 보이겠다. 쓰면서도 너무 극단적이다.(통제 불능의 사회와 대규모 봉기 같은 것이 막 떠오른다. 광호는 인구가 줄어야 한다고 얘기했었지..... 전쟁이라도 확 났으면 좋겠다고, 진경씨는 전쟁이 나더라도 다 같이 죽을 때, 자기도 같이 죽으면 억울하지 않을 것 같다고 했었고 나는 같은 주제로 폐허가 된 세상이더라도 살아남아서 끝을 보고 싶다고 얘기했었다.)
각설하고 나는 하루에도 몇 번이고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하는데, 나만 열심히 해서 나만 잘 먹고 잘 살고 싶지는 않다. 물론 내가 열심히 한다고 내가 잘 먹고 잘 산다는 보장은 전혀 없는 상황이긴 하지만.....
사실 실물경제라고 부르는 것 조차도 내게는 뚜렷한 실물로 보이지 않는다.
정진규 시인의 시와는 다른 의미로 실물들이 나를 비웃는다.
지금 같은 시점에 '돌뗏목'의 영화화는 무척 절실하다.
불가능 하겠지만 가급적 내가 꼭 만들어 보고 싶다.
일 해야겠다. 갈 길이 멀다.
보통 집에서 아무 것도 안 하면 술도 먹고 싶지 않지만 뭐든 일을 하면 술이 먹고 싶게 마련이다.
이번주는 좀 한가할 듯 해서 좀 쉬고 싶었는데, 이상하리만치 숨도 못 쉴 만큼 바빴다.
이번주도 이러니 다음주는 어떠하랴 ㅡ.ㅡ
고구미 군이 고향에 내려간 것이 섭섭하다.
동키군은 심리적으로 다운됐는지 연락이 안된다.
오랜만에 연락된 대성군은 부담스럽다.
할 수 없이 부부싸움을 크게 했다는 조군에게 연락했다.
조군, 참치 사줘!
배 고프다.
수요일에 12시에 집에 도착해서 배가 고팠다. 라면이 먹고 싶었는데, 라면도 없고 밥도 없었다.
냉동실에 물만두가 있길래 잔뜩 끓이고 반 남은 스팸을 후라이팬 대용의 냄비에다 구웠다.
물만두 포장지에 찬물에 식혀 먹으라고 되어 있길래 찬물에 식히려다가
이것저것 많이 들어 있는 설거지 통에 만두를 다량 쏟았다.
5초쯤 망설이다가 배고픈 김에 그냥 먹었다. 망설이지 말고 바로 집을껄....(짧은 시간동안 이걸 꺼내서 다시 끓일까? 생각했다.)
스팸을 간장 삼아 맛있게 먹었다.
뭔가 일이 덜 끝났지만 7시에는 퇴근해야겠다.
4년만에 개봉했다고 했건만 2008 청어람 작품으로 찍혀있는 영화다.
예고편에 이선균이 "내가 사라지는 것 같아."라고 말한게 좋아서 그 내막이 알고 싶었는데, 끝까지 보니까 그 내막이 나온다.
'내가 너보다 나를 더 사랑하기 때문에 너한테 맞춰주면서 나를 죽이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다'는 요지다.
영화의 요지는 '사람 사는 건 역시나 만만치 않다.' 라고 할 수 있겠다.
'사람이 아무리 사랑한다고 해도 즐거운 시간들만 보고 살 수는 없다.' 라고도 할 수 있겠다.
필름포럼 제일 앞자리에서 봤는데, 자리는 좋았다. 영화는 그렇게 좋지는 않았다.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가까이서 들고서 찍은 샷 보다는 먼데서 차분하게 찍은 샷이 좋다.
오즈 영화를 극장에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 극장에서 영화본게 정말 오랜만이다. 혼자라도 좋으니 송도유원지에서 관람차 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