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머니

칼바람이 부는 날
내 점퍼 주머니에 들어온 네 손
그 손을 지긋이 잡은 내 손
너의 냉기와 나의 온기가 만나는 자리
불꽃이 되지는 않지만
마지막에 따뜻함은 남는
주머니 속의 사랑
AND

담뱃불

피우던 담배를 버렸다
눈 위에 휙
치지직 소리를 들었는데
아래가 환하다
눈을 녹이며 불타고 있다 담배꽁초
발밑이 물 웅덩이가 되도록
꺼지지도 않고 줄어들지도 않고
겨울밤
기다리고 있다 누군가를
AND

거인

가끔
내가 거인이라면
가만히 앉아서 세상을 내려다 볼 수 있다면
유라시아 대륙만한 담배 한 개피 손에 들고
내뿜는 연기 한 번이나 가벼운 손길 한 번에 인류같은 것 쓸어버릴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내가 거인이라면 
붉은 달을 궤도에서 뽑아내
태양을 향해 던져서 녹여버리거나
태양을 정권으로 내리쳐 화상을 입고 
다친 손을 바로 목성의 바다에 담그고
화가 덜 풀려서 내지른 소리가 태양계 전체에 울리고
모든 생명들이 두려워 덜덜 떨면 좋겠다
그러나
나는 거인이 아니므로
오늘도 알량한 생각이나 하면서 모서리에 앉아 담배를 피우며 진짜 거인을 기다리고 있다
AND

귀요미

내 휴대전화 통화기록에 가장 많이 찍힌 번호
우리가 연애를 하는 것도 아닌데
우리는 부부니까 주말부부니까
매일 같은 시간에 습관은 아니고 본능으로 검색하는 ㄱㅇㅁ
전화번호를 누르는 것보다 ㄱㅇㅁ가 빠르니까
가끔은 휴대전화 마이크에 말한다
귀요미한테 전화
들려오는 대답은
유미에게 전화를 거는 중입니다
이것은 사랑
귀요미를 잘못 들어서 유미가 되도
당신은 나의 귀요미
내가 외로울 때 나를 찾는
아니 내가 찾는
나의 귀욤새
나의 귀여운 작은 새
귀요미

-> 술과 이혜리로 산다
AND

희미한

나는 희미한 사람이다
안개 속의 안개나
그림자의 그림자처럼
비가 시작되기 전의 하늘처럼
같은 날 강물에 비친 구름처럼
안경을 벗고 바라보는 세상처럼
나에게 선을 긋지 마라
내 삶에 수식을 추가하지 마라
자꾸만 자꾸만
뭔가를 하려고 하지 마라
그날 이후
나는 희미한 사람이다
투명과는 다른
점점 옅어지며
표정도 없고 기척도 없는
희미한
AND

20181122 - 꿈

그때그때 2018. 11. 22. 14:55
이런 꿈을 꾸었다.

어딘가를 걷고 있었다.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 둘이서 환한 대낮 숨을 곳도 없는 대로에서 숨어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둘다 여자였다. 그들을 지나쳐 조금 걸었는데, 흰털 군데군데 떼가 묻은 강아지가 10미터 앞에서 나를 보고 다가왔다. 꼬리를 흔들진 않았다. 앉아서 강아지를 쓰다듬어 주니 꼬리를 흔들며 좋아했다. 나랑 같이 우리집에 갈래? 강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할아버지 한 명이 나타나서 이 강아지는 자기네 강아지인데 집에서 할멈이 애타게 기다리고 있으니 나보고 집에 좀 데려다주라고 했다. 알았다고 하고 강아지랑 같이 버스를 탔다. 뒷자리에 나란히 앉아서 가다가 곧 헤어질 거란 생각에 마음이 섭섭해서 내가 덥고 자는 얇은 이불을 강아지에게 줬다. 강아지가 슬픈 눈빛으로 좋아했다.
AND

20181119 - 흙빛

그때그때 2018. 11. 19. 12:46
도시농업관리사 과정을 마쳤다.

도시농업 관리사가 됐다. 어제 마지막 날 개인과제 발표할 때 농담처럼 얘기했는데, '산림청일 재미 없어서 어느 중학교에 가서 텃밭 교사 하고 싶다.'는 말 진짜다. 장모님이 소작농 운운하면서 아내 앞에서 울었다는 얘기 때문에 장모님 얼굴이 떠올라서 사표 못 쓴다는 얘기는 20% 정도 진짜다. 나머지는 나 때문이다. 아내에게 사표 안 쓸테니 너는 마음대로 살아라.라고 한 것은 진짜다. 농업에 종사하면 좋겠지만 기반도 없고 그에 앞서 자신이 없다. 

청년창업농 막차를 탄 부부가 토요일에 집에 다녀갔다. 아이가 둘. 부딪치는 농업 현실. 지역 살이의 외로움. 갈라지는 생각들. 아이가 없고 맞벌이에 아이도 빚도 없는 나도 자신이 없는데, 많이 힘들거라 생각한다. 나는 응원하는 수 밖에 없다. 근데 힘껏 응원하질 못하겠다. 

이런 내 마음 상태에서 나오는 표정과 말투를 집주인 누나는 흙빛이라 했다. 한 동안 농업을 잊고 살다가 도시농업 교육 받으면서 농업에 대해서 오랜만에 생각한 게 귀농실패자의 - 애초에도 섬에 정착할 마음은 없었지만 - 흙빛을 가속화했다.

아내가 교육 끝난 기념으로 매운탕 먹고 싶다고 해서 먹었다. 맛은 둘째치고 좋았다. 먹고 싶은 걸 사 먹는다. 필요한 게 있으면 산다. 돈 주고 뭘 하는 걸 좀 더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 좋겠는데, 항상 마음 한켠에 불편함이 있다.

끝맺지 못힌 일기가 됐다. 이렇게 억지로 끝맺는 일이 흙빛의 나처럼 웃긴다.
AND

붉은강

해질녘 스스로 붉은강
빛나지 못한 삶을 반쯤 담그고
붉게 반사된 얼굴을 본다
내가 모르는 얼굴
해가 졌는데도 여전히 빛나는 얼굴
한걸음 한걸음
온몸을 물에 담그면
모든 얼굴들이 웃으며 나를 본다
스스로 붉은 강물 속에서
바다로 가라고
아침이 오기전에 얼른 바다로 가라고
AND

너에게

감나무에 감만 남은 앙상한 계절
너는 나의 조금 간절한 인사란 노래
리피트리피트리피트
볼륨을 한 칸만 더 올리면 부서져버릴
오래된 자동차를 타고 너에게 간다
우리는 오래된 연인
국도 가득 자욱한 안개를 뚫고 나와
지금 내가 있는 곳을 알지만
벗어버린 것은 나의 미약한 한겹
널 만나면 너를 부서지기 직전까지 꽉 안을거야
그때까지
나는 머리만 남은 몸통
너는 몸통만 남은 머리
볼륨 게이지는 이미 맥시멈
무엇도 부서지지 않을 것을 알지만
간절하게 간절하게
너에게 갈 때마다 너에게 간다
AND

원마트

연중무휴, 친절배달
김장맞이 BIG SALE
세일은 영어로 써야 멋이지
행사기간은 11월 10일부터 21일까지 12일
380평 매장에 물건들이 가득하다
파격 SALE!! 중인 고기가 열 종류
수입 삼겹살은 한 근에 6,500원
요일마다 할인 종목이 바뀌는 야채와 과일
수요일엔 깐마늘이 1kg에 6,800원
마늘은 깐마늘과 안깐마늘 두 종류 뿐
바다의 향기를 그대로~~
소스포함한 바다장어가 500g에 12,000원
달걀은 한 개에 110원 닭에게 미안한 일이다
배추는 3통에 5000원 농부에게 미안한 일이다
생굴은 800g에 16,000원 바닷마을 아주머니들에게 미안한 일이다
커피믹스 한 상자는 23,500 노란 사장 밖에서 웃고 있는 미녀는 바다 건너 땀 흘린 사람들에게 미안할까?
술, 과자, 콜라, 소화기, 부탄까스, 밀가루, 물엿, 설탕, 간장, 세제
김치에 냉동다진마늘까지 없는 거 빼고 다 있는 곳
마늘은 깐 마늘과 안깐마늘과 다진마늘 세 종류였다
조기 품절될 수 있다지만
절대 사라지지 않는 진열대 위의 식자재와 물건들의 홍수
행복가득, 웃음가득, 우리동네일등할인점
AND




반복해서 꾸는 꿈 중에 하나다. 

꿈 속에서 나는 항상 거기에 있다. 일자로 뻗은 흙길. 길을 따라가면 왼쪽에 식당이 있다는 것을 안다. 식당의 메인 메뉴는 모르지만 맛있다고 알려져 있거나 내 단골집이다. 나는 식당에 들어가지 않는다. 식당의 오래된 외벽을 훑어본다. 지금은 영업중으로 보이지 않는다. 식당을 지나 20미터쯤 가면 교차로가 나온다. 나는 항상 좌회전을 해서 계속 걷는다. 되돌아 가거나 멈추어 서는 것까지 5개의 선택지 중에 하나. 흙길이 계속되고 바닥은 나아갈수록 말캉말캉하다. 조금 더 걷다보면 눈 앞에 강이 흐르고 강을 건너는 다리가 있다. 나무와 밧줄을 엮어 만든 다리는 폭은 넓지만 튼튼해 보이지는 않는다. 강 건너에는 숲이 보이는데, 나무와 흙이 세상에 없을 것 같은 빛깔로 살아 숨 쉬고 있다. 꿈속에서만 볼 수 있는 색과 패턴. 막상 다리를 건너기면 그곳은 아무것도 없는 죽은 세계다. 다리 앞에서 본 기묘한 광경은 나를 유혹하기 위한 것이었다. 흙길 위에서 시작하는 같은 꿈을 몇 번씩 꾸는 나는 그 사실을 안다. 알고도 나는 다리를 건넌다. 고민도 하지 않는다. 꿈 속에서의 여정 길에 아는 사람들을 만나기도 하고 낯선이들의 무리가 내게 식당으로 가는 길을 묻기도 한다. 다리를 건너는 과정엔 차이가 있지만 결국 나는 아무것도 남지 않은 세상에, 말랑말랑한 땅 위에 빠지지도 않고 그저 우뚝 서 있다.

엊그제 오랜만에 이런꿈을 꾸었다.
AND

예수복음 - 사라마구

2018. 11. 9. 12:19
예수는 마르다에게는 이렇게 대답했다. 내 죽음은 나사로 같은 사람들, 절대 소생하지 못하고 계속 죽어갈 사람들의 모든 죽음을 끌어안을 겁니다. 마리아에게는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모습을 보이지 않더라도 나를 버리지 말고 손을 뻗어줘요, 안 그러면 나는 삶을 잊을 거예요, 아니면 삶이 나를 잊거나. 며칠 뒤 예수는 제자들에게로 갔다. 막달라 마리아도 함꼐 갔다. 내가 너를 보는 걸 원하지 않으면 네 그림자만 볼게,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예수는 대답했다, 당신 눈이 내 그림자에 있다면 나도 어디든 내 그림자가 있는 곳에 있고 싶어요. 이들은 서로 사랑했고 이런 사랑의 말을 나누었다. 그들이 아름답고 진실했기 때문일 뿐 아니라, 그림자들이 몰려와, 두 사람이 함꼐 있다 해도 최종적인 부재의 어둠에 서서히 익숙해져야 할 때가 되었다고 느꼈기 때문이기도 했다.

- 나사렛 사람 예수가 죽으러 가기전에
AND

연어

알을 낳고 바다로 돌아가지 못한 연어
더 낮은 곳으로 오를 힘이 없는 연어
뒤집어져 흐물흐물 해진 연어
그러다 죽는 연어
다른 물고기 밥이 되는 연어
자기 새끼의 밥이 되는 연어
큰 비가 휩쓸고 나 후에야 비로소 살던 곳으로 돌아가는 연어
죽어서라도 언젠가는 돌아가는 연어
그런 연어
AND

넘치는 가을


왜 아무도 흘러 넘치는 가을에 대해서 쓰지 않지?
뭐라도 적지 않으면 내일이 오지 않을 것 같은 계절과
그래도 내일이 온다면 감격이 더해질 계절에 대해서
첫 번째 바람이 부는 날
꽁꽁 싸매고 등교하는 아이들을 보고도 
아직은 아니라고 할 수 있는 오늘
아직은 아니라고
아직은
아직은 아니라고
내 마음속에 넘치는 무엇
그것은 너지만
아직은 아니라고
아직은
아니라고
AND

닭도리탕을 먹다

닭에게 미안하지만 또 닭요리를 먹는다
다행히 수컷으로 태어나서 바로 죽지 못하고
불행히 30일만 살다가 내 눈앞에 고기로 나타난 닭
단골집 사장님에게 1시간 전에 말해둔 닭도리탕
도리는 새
고개를 도리도리
고개를 절래절래
닭을 단도질해서 만드는 닭도리탕
양파, 감자, 고추, 당근
이것저것 다 섞어 끓이는 닭도리탕
여럿이 섞여서 함께 먹고
소주랑 맥주를 섞어 먹고
침도 섞이고 술잔도 섞이고
나중에는 숟가락도 섞이고
그러고도 모자라 밥까지 볶아먹는 닭 볶음탕
회식날 정성껏 닭도리탕을 먹었다
AND

오랜만에 적는 일기

일단 시작해본다. 뭐라도 적어야 할 것 같은 날이 있다. 술을 안마셨을 때도. 어지간히 술을 마시면 꼭 뭐라도 적어야 잠들 수 있을 것 같은 충동에 이것저것 적는다. 오늘은 그런날은 아니다. 

요새는 페북을 잘 안본다. 소식이 뒤쳐지지만 그 소식이 내 삶의 바로 정면에 발끝앞에 있는 것은 아니다. 강릉시립미술관이 문 닫을거란 소식을 오랜만에 들어간 페북에서 봤다. 열 받는다. 페북을 잘 안 보니까 이런 종류의 뉴스에 열 받은 게 오랜만이다.

주말에 아내랑 잘 놀았다. 아내랑은 사랑뿐이다. 그냥 같은 공간에 있는 일이 좋다. 그 순간들이 순간들이 모인 시간들이, 일요일에 혼자 세 평짜리 내 방에서 그 시간들을 생각하는 시간까지도 좋다. 영화 '필름스타 인 리버풀'을 함께 보고 장난반 진담반으로 우리의 다름을 얘기한 것도 좋았다. 사랑이란 게 무조건 같은 것에 공감해야 하는 건 아니다.

지난주에 직장 동료 중에 누군가가 다 과정인거라는 얘기를 했는데. 그게 내 머리를 쳤다. 팀장은 팀장이 되가는 과정, - 내 머리는 아직도 한 달 전 사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 나는 사건을 극복하는 과정에 있다.

날이 차가워지니까 라디오에 '내 입술 따뜻한 커피처럼' 리퀘스트가 많다. 그 가사랑 같다고 생각하니까 안심이 됐다. - 삶의 반칙선 위에 점일 뿐이야. 살아가면서 누구나 겪는 일이야. 어른이 되는 단지 과정일 뿐야. - 다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많은 것을 두루뭉실 넘어가야 하는 시기란 생각이 든다.

내일부터 많이 바쁜데, 조비심 내지말고 적당히 해야겠다.

뭐라도 적었다.
AND

​계절
봄엔 무엇이든 올라오고 가을엔 모든것이 내린다
여름은 가파르게 증발하고 겨울은 깊숙히 쌓인다 
AND

부광식육점

가게 앞 빨랫줄에 나란히 걸린 목장갑
기름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뽀얀 목장갑
가을볕에 억새마냥 반짝이는 하얀 목장갑
육식은 뼈를 잡고 살을 뜯는 일
생의 모든 기억은 피와 뼈의 투쟁
기억은 남거나 사라지는 것
바람을 맞으며 몸을 말리는 태연한 목장갑 
부자가 되지 못한 어느 칼잡이의 손때가 묻은 오래된 목장갑    
AND

양념치킨을 먹다

치킨을 먹는다
둘이 먹으니 반반으로
내 전화번호만 보고도 집 주소를 아는 치킨집 사장님
많은 것을 들켜버리고 사는 세상
먹어야만 삶은 이어지고
닭고기 밀가루 기름 물엿
고기도 좋아하고
튀김도 좋아하고
단 것도 좋아하는 나
남은 양념까지 박박 긁어 먹는
영혼을 잃고 먹고야 마는 영혼의 맛
당신과 함께 먹는 치킨
치킨의 다른 이름은 행복
양념치킨은 행복의 네 제곱
AND

북서풍이 있던 자리


지난날 날개가 돋았던 자리
지금은 내 손이 닿지 않는 자리
혹한의 찬바람이 시작하는 자리
언젠가 당신이 나를 할퀴고 갔던 자리
내 등판의 북서쪽

여보, 등 좀 긁어 줄래요?
AND

나무의 유래

나무 이름을 아는 일이 좋다
나무를 왜 나무라고 부를까 생각하면 좋다
참나무를 부르는 몇 가지 이름을 안다는 사실이 좋다
집 앞에 오래된 가래나무와 버드나무가 있어서 좋다
오래 살았거나 특별한 사연이 없어도 그저 이름을 아는 일이 좋다
아카시아 나무와 회화나무를 헷갈려도 좋다
산수유 열매가 붉게 익어가는 계절이 좋다
보리수 나무 아래서 눈을 감고 잠시 가만히 있는 일이 좋다
가을밤 당단풍나무 아래서 혼자 깡소주를 마셨던 날도 좋았다
어느 겨울 혼자 찾아간 산에서 당신 이름을 붙여 주었던 자작나무가 좋다
문득 고개를 들어 엄마의 이름을 닮은 명자나무 꽃을 보는 일이 붉고 슬프다
유래를 떠올리는 일이 좋다
AND

낮은집
강물보다 낮은 곳에 집이 있다
둑 하나를 경계로 물 흐르듯 늘어선 오래된 건물들
강물보다 낮은 곳에 사람이 산다
울고 웃고 먹고 싸고
비가 와도 걱정 가물어도 걱정​
사는 것은 다 짜내는 일
넘치거나 넘치지 않는 일
마음처럼 흘러가 사라지지 못하는 일
강물보다 낮은 곳에 흐르지 못하는 사람이 산다
AND

지독한

지독한 커피를 한잔 마시고
커피잔이 테이블에 닿기전에
너에게 '안녕'이라고 했다
너무 지극했거나 지나치게 과했던
지독한 사랑
시작과 끝이 같은 지독한 말, 안녕​
AND

마흔번 째 생일


태어나 14601일 째를 살고 있다
축하를 받으며

반대로 가고 있다는 생각도 했고
마음이 무너져 내리기는 여러번이다

사는 동안 해가 거꾸로 넘어가거나
달이 부서지거나 한 일이 없다

빼도박도 못하는 사십이란 숫자

달이 지구를 일만사천 바퀴 돌 동안
마흔 번도 돌아보지 못한 삶

14000이란 숫자에 더해진 하루
남은 생에 몇 개의 숫자가 더해질까

오늘밤은 달이 참 밝다
AND

어제 가볍게 한 잔 마셨다. 은철이 삼촌 생각이 났다.

엄마 바로 아래 쌍둥이 남동생이 있다. 은석이 은철이다. 두 삼촌들이 각자 더 좋아하는 누나가 있었을 것이다.(누나만 넷) 석이 삼촌은 둘째 이모를 철이 삼촌은 우리 엄마를 좋아했던 것 같다.

쌍둥이는 아버지의 폭정을 피해 고등학교 때 함께 가출을 했다. 석이 삼촌은 우리 이버지를 따라 철공소 쪽으로 갔고 철이 삼촌은 가출해서 배운 기술을 따라 목공 쪽으로 갔다.

석이 삼촌은 결혼을 해서 두 딸을 가졌고 철이 삼촌은 큰 이모의 반대로 결정적인 결혼 기회가 부서지면서 술 테크를 탔다.

석이 삼촌은 고독사(자살)를 했고 철이 삼촌은 몇 번의 재활을 거쳐서 지금도 살아 계신다.

철이 삼촌은 80년 후반 90초반에 우리집에서 몇 년을 같이 살았고 마지막으로 경영했던 목공소도 우리 동네에 있었다.

 목공소에 뻰찌라는 검은 개를 키웠다. 삼촌은 항상 오토바이를 타고 다녔는데. 뻰찌는 삼촌 오토바에 소리를 귀신같이 잘 알아들었고 초코파이를 좋아했다. 그걸 한 입에 먹는 큰 개였다.(삽살개 종류였던 듯) 목공소에 놀러기면 철이 삼촌이 하드를 사주곤 했다. 누가바에 소주 먹으면 좋은 걸 이때 배웠다. 내가 중2땐가 중3때였던 것 같은데 책장이 하나 갖고 싶어서 삼촌한테 책장 하나 컴팩트 한 걸로 짜달라고 했는데, 당돌한 조카가 예뻤는지 튼튼하게 만들어 주셨다. 그 책장에 석이 삼촌이 책 좋아하는 큰 조카 고등학교 갔다고 사준 난쏘공이 꼽혔다. 그 책장은 이사를 거듭하면서 사라졌다. 버려지고 불태워졌을 것이다.

쌍둥이 심촌들이 나를 창경원에 데려 간 적 있다. 그때 사진이 있는데, 내 표정도 좋고 삼촌들 표정도 참 좋다. 그때 기억도 있는데. 호랑이란 게 정말 집채 만하다고 생각했다. - 세 살 짜리가 호랑이를 봤으니 당연히 그렇게 느꼈을 것이다. -

석이 삼촌은 이제 보고 싶어도 볼 수 없지만 갑자기 철이 삼촌이 많이 보고 싶다. 명절이 가까워서 그렇던가 나이를 먹어서 그런가 보다.

엄마한테 연락처 받아서 철이 삼촌 연락 한 번 해 봐야겠다.

삼촌들 고맙습니다.
AND

달콤한 인생

가을밤 가로등 옆 은행나무 아래서
소주 안주로 사탕을 빨았다

이런 걸 지난주 목요일에 술 한 잔 먹고 적었다. 무슨 맛인지도 모르고 먹는 달기만 한 사탕. 인생은 썼다 달았다 한 것. 쓰다고 나쁜 것도 달다고 좋은 것도 아닌 것. 그래도 내 편이 한 명 있다면 살아볼만 한 것.

지난주에 사고 쳤다. 꾹꾹 눌렀던 스트레스가 한 번에 터졌다. 터진 일은 어쩔 수 없다. 나는 왜 집에서도 일 생각만 했나, 반성했다. 훨씬 가볍게 진행할 수도 있었는데. 회사에서 나는 그저 회사원인데. 나는 아무것도 아닌데.

힘든 와중에 아내가 유일한 위안이었다. 이제는 같이 40대다. 사고만 없다면 함께 늙어가는 모습을 볼 사람. 내 사람. 잠깐 포옹했던 시간이 그대로 멈추길 바랐다.

이대로 시간이 멈춘다는 것에 대해서 자주 생각한다. 내 인생이 가장 만족스러운 바로 그 순간에, 잠든 내 손이 잠든 너의 손에 닿아있는 그 순간에 시간이 멈춘다면.....

나이와 경험을 뒤로하고 모든 것을 다 산 것이 아닐까?

내가 애쓰는 만큼 남들도 애쓴다. 경중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내 옆은 아니지만 멀지 않은 곳에 당신이 있다.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시간을 멈춰도 좋을 당신이 있다.
AND

가끔 하는 생각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나라에 가겠다
그 나라에도 여관이 있다면 가장 싼 여관에 달방을 얻겠다
매일 시장을 돌아 다니며 가장 허름한 음식으로 끼니를 잇겠다
돈이 떨어지면 그때부터는 일을 해야겠지
말도 통하지 않는 사람들과 함께 돌덩어리를 옮기고
섞이지 않는 말로 밥 숟가락을 섞겠다
입과 귀를 닫고 살 것이다
방과 나의 침묵만이 흐르는 작은방에서 매일 새로 태어나는 꿈을 꿀 것이다
다시는 무언가에 휩싸이지 않을 것이다
AND

소리

나의 속도와 세계의 속도가 부딪치는 소리
나의 속도와 당신의 속도가 어긋나는 소리
말의 속도들이 부딪쳐 만드는 소리
보이지 않는 속도 때문에 소리조차 없는 소리
소리에 소리를 물고 이어지는 소리 
AND

웃는 남자 - 황정은

2018. 8. 31. 11:38

 예컨대 dd의 갈색 구두, 그것과 같은 구두는 세상에 없었다. dd의 발 모양으로 늘어났고 dd의 걸음걸이 습관 그대로 굽이 닳았으며 반복해 접혔고 주름졌으니까. 그것을 상자에 넣으며 d는 생각했다. 이것을 이 상자에 넣었으므로 저쪽 상자엔 넣을 수 없지. 동시에 있을 수는 없으니까 사물은..... 이 상자에 있는 동시에 저 상자에 있을 수는 없다. 이제 여기 담겼으니 저쪽엔 없다. 여기에 있으면 저기엔 없지. 사물이 그렇지만 구두를 신던 사람은......인간은 사물과는 달라서 여기에도 있고 저기에도 있을 수 있다고...... 내가 언젠가 그와 같은 이야기를 어디선가 읽은 것 같은데 적어도 들은 적이...... 누군가가 없어져도 그를 기억하는 인간이 있다면 그는 여기 없어도 여기 있고......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냐? 사기를 치지 마라...... 인간은 너무도 사물과 같이...... 없으면 없어. 있지 않으면 없고, 없으니 여기 없다......

 

 

 손녀하고 딸년은 내 사는 꼴이 지저분하다고 부끄럽다지만...... 그것이 무엇이 부끄러운가? 내가 아는 부끄러운 것 중에 그런 것은 없어. 산 사람의 살림이 오만 잡종인 것은 어쩔 수가 없는 일이지. 부끄러운 일은 아니지......

 

 

 몇 년 전만 해도 언제든 수리실 밖으로 나가면 상가 어딘가에 갈 곳이 있었고 방문할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여소녀는 생각했다. 인사도 없이 쓱 들어가서 그거 달라고 하면 그거를 알아듣고 틀림없이 그거를 줄 수 있었던 사람들, 사기꾼 같은 놈들, 진짜 사기꾼들, 그래도 내가 보기에 썩 좋았던 사람들과 다음 생에 또 볼까 내내 재수없어하다가 낯익어버린 인간들...... 오디오 팔던 사람들, 부품상들, 도란스 기술자, 스피커 제조없자, 진짜와 똑같이 로고 라벨을 만드는 기술이 있던 노인들, 다른 기술자들. 그와 같은 공간에서 한 시절을 겪은 사람들. 그들이 다 어디 갔느냐고? 여소녀는 그 질문을 돌이킬 때마다 그들의 부재와 자신의 잔여와 이제 닥쳐올 자신의 부재를 한꺼번에 생각했다.

 

 

 곽정은은 dd와 별로 닮지 않았지만 그가 잠을 잘 때, 눈을 감고 잘 때는 닮아 보일 거라고 d는 생각했다. d의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얼굴이 그런 식으로 닮았고 아마도 d 역시 부모와 그런식으로 닮았을 것이다. 같은 공간에서 함께 산 사람들은, 가장 방심한 얼굴이 닮았다.

 

 

 자기가 속한 체제에 깊은 환멸을 느끼게 된 나머지 귀순을 결심했다고 하네요. 그 내용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그가 부러웠습니다. 두 손으로 조종간을 붙들고 목적지를 향해 전투기를 몰아갔을 그 새끼가 너무 부럽다...... 남쪽의 가요를 방송하는 라디오 채널에 주파수를 맞춰 두고 음악이 흐르는 전투기에 실려 북측과 남측의 경계를 향해 날아가던 순간, 그 아득한 허공을 날던 순간의 그가 말입니다. 죽음과는 얇은 금속판 한 겹만을 남겨둔 채 채공하고 있었지만 그는 분명히 환멸의 반대 방향으로 날아가고 있었어요. 그는 그것을 가지게 된 거죠. 탈출의 경험을.

 내게는 그것이 없어

 나는 내 환멸로부터 탈출하여 향해 갈 곳도 없는데요.

 

 

 나의 사랑하는 사람은 왜 함께 오지 않았나.

 

 너의 오디오가 이제 좀 특별해졌느냐고 여소녀는 물었다.

 같은 모델이라도 그 기기를 다룬 사람에 따라 소리가 다르다고 여소녀는 말했다. 세상에 그거 한 대뿐이니까. 빈티지를 고치려는 사람들은 고친다고 말하지 않는다. 살린다고 말하지.

 습기를 머금은 바람이 수리실 안으로 불어 들었다. 비가 들이치자 여소녀는 창을 닫았다. 거무스름하게 그을린 유리 벌브 속에 불빛이 있었다. d는 무심코 손을 내밀어 그 투명한 구(球)를 잡아보았다. 섬뜩한 열을 느끼고 손을 뗐다.

 쓰라렸다.

 d는 놀라 진공관을 바라보았다. 이미 손을 뗐는데도 그 얇고 뜨거운 유리막이 달라붙어 있는 듯했다. 통증은 피부를 뚫고 들어온 가시처럼 집요하게 남아 있었다. 우습게 보지 말라고 여소녀가 말했다. 그것이 무척 뜨거우니 조심을 하라고.

 

 -> 황정은이 서울시 강서구와 종로구 세운상가로 돌아왔다. 

 -> 83년에 이웅평이 북에서 올 때, 우리 엄마는 전쟁나는 줄 알고 나랑 내 동생 불쌍해서 펑펑 울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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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개의 일기

좋아 죽겠다고 쭉쭉 빨아댈 때는 언제고
왜 나를 처음 와 본 휴가지에 두고 갔나
유기(遺棄)라는 어려운 말 쓰지 마라
당신들이 어떤 핑계를 대든 나는 버려진 것
이대로 가엾어져 결국 굶어 죽게 되는 것
버려진 오디오처럼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게 되는 것 ​
당신들은 나를 사랑하지 않았으며
무엇도 사랑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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