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하는 생각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나라에 가겠다
그 나라에도 여관이 있다면 가장 싼 여관에 달방을 얻겠다
매일 시장을 돌아 다니며 가장 허름한 음식으로 끼니를 잇겠다
돈이 떨어지면 그때부터는 일을 해야겠지
말도 통하지 않는 사람들과 함께 돌덩어리를 옮기고
섞이지 않는 말로 밥 숟가락을 섞겠다
입과 귀를 닫고 살 것이다
방과 나의 침묵만이 흐르는 작은방에서 매일 새로 태어나는 꿈을 꿀 것이다
다시는 무언가에 휩싸이지 않을 것이다
AND

소리

나의 속도와 세계의 속도가 부딪치는 소리
나의 속도와 당신의 속도가 어긋나는 소리
말의 속도들이 부딪쳐 만드는 소리
보이지 않는 속도 때문에 소리조차 없는 소리
소리에 소리를 물고 이어지는 소리 
AND

웃는 남자 - 황정은

2018. 8. 31. 11:38

 예컨대 dd의 갈색 구두, 그것과 같은 구두는 세상에 없었다. dd의 발 모양으로 늘어났고 dd의 걸음걸이 습관 그대로 굽이 닳았으며 반복해 접혔고 주름졌으니까. 그것을 상자에 넣으며 d는 생각했다. 이것을 이 상자에 넣었으므로 저쪽 상자엔 넣을 수 없지. 동시에 있을 수는 없으니까 사물은..... 이 상자에 있는 동시에 저 상자에 있을 수는 없다. 이제 여기 담겼으니 저쪽엔 없다. 여기에 있으면 저기엔 없지. 사물이 그렇지만 구두를 신던 사람은......인간은 사물과는 달라서 여기에도 있고 저기에도 있을 수 있다고...... 내가 언젠가 그와 같은 이야기를 어디선가 읽은 것 같은데 적어도 들은 적이...... 누군가가 없어져도 그를 기억하는 인간이 있다면 그는 여기 없어도 여기 있고......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냐? 사기를 치지 마라...... 인간은 너무도 사물과 같이...... 없으면 없어. 있지 않으면 없고, 없으니 여기 없다......

 

 

 손녀하고 딸년은 내 사는 꼴이 지저분하다고 부끄럽다지만...... 그것이 무엇이 부끄러운가? 내가 아는 부끄러운 것 중에 그런 것은 없어. 산 사람의 살림이 오만 잡종인 것은 어쩔 수가 없는 일이지. 부끄러운 일은 아니지......

 

 

 몇 년 전만 해도 언제든 수리실 밖으로 나가면 상가 어딘가에 갈 곳이 있었고 방문할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여소녀는 생각했다. 인사도 없이 쓱 들어가서 그거 달라고 하면 그거를 알아듣고 틀림없이 그거를 줄 수 있었던 사람들, 사기꾼 같은 놈들, 진짜 사기꾼들, 그래도 내가 보기에 썩 좋았던 사람들과 다음 생에 또 볼까 내내 재수없어하다가 낯익어버린 인간들...... 오디오 팔던 사람들, 부품상들, 도란스 기술자, 스피커 제조없자, 진짜와 똑같이 로고 라벨을 만드는 기술이 있던 노인들, 다른 기술자들. 그와 같은 공간에서 한 시절을 겪은 사람들. 그들이 다 어디 갔느냐고? 여소녀는 그 질문을 돌이킬 때마다 그들의 부재와 자신의 잔여와 이제 닥쳐올 자신의 부재를 한꺼번에 생각했다.

 

 

 곽정은은 dd와 별로 닮지 않았지만 그가 잠을 잘 때, 눈을 감고 잘 때는 닮아 보일 거라고 d는 생각했다. d의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얼굴이 그런 식으로 닮았고 아마도 d 역시 부모와 그런식으로 닮았을 것이다. 같은 공간에서 함께 산 사람들은, 가장 방심한 얼굴이 닮았다.

 

 

 자기가 속한 체제에 깊은 환멸을 느끼게 된 나머지 귀순을 결심했다고 하네요. 그 내용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그가 부러웠습니다. 두 손으로 조종간을 붙들고 목적지를 향해 전투기를 몰아갔을 그 새끼가 너무 부럽다...... 남쪽의 가요를 방송하는 라디오 채널에 주파수를 맞춰 두고 음악이 흐르는 전투기에 실려 북측과 남측의 경계를 향해 날아가던 순간, 그 아득한 허공을 날던 순간의 그가 말입니다. 죽음과는 얇은 금속판 한 겹만을 남겨둔 채 채공하고 있었지만 그는 분명히 환멸의 반대 방향으로 날아가고 있었어요. 그는 그것을 가지게 된 거죠. 탈출의 경험을.

 내게는 그것이 없어

 나는 내 환멸로부터 탈출하여 향해 갈 곳도 없는데요.

 

 

 나의 사랑하는 사람은 왜 함께 오지 않았나.

 

 너의 오디오가 이제 좀 특별해졌느냐고 여소녀는 물었다.

 같은 모델이라도 그 기기를 다룬 사람에 따라 소리가 다르다고 여소녀는 말했다. 세상에 그거 한 대뿐이니까. 빈티지를 고치려는 사람들은 고친다고 말하지 않는다. 살린다고 말하지.

 습기를 머금은 바람이 수리실 안으로 불어 들었다. 비가 들이치자 여소녀는 창을 닫았다. 거무스름하게 그을린 유리 벌브 속에 불빛이 있었다. d는 무심코 손을 내밀어 그 투명한 구(球)를 잡아보았다. 섬뜩한 열을 느끼고 손을 뗐다.

 쓰라렸다.

 d는 놀라 진공관을 바라보았다. 이미 손을 뗐는데도 그 얇고 뜨거운 유리막이 달라붙어 있는 듯했다. 통증은 피부를 뚫고 들어온 가시처럼 집요하게 남아 있었다. 우습게 보지 말라고 여소녀가 말했다. 그것이 무척 뜨거우니 조심을 하라고.

 

 -> 황정은이 서울시 강서구와 종로구 세운상가로 돌아왔다. 

 -> 83년에 이웅평이 북에서 올 때, 우리 엄마는 전쟁나는 줄 알고 나랑 내 동생 불쌍해서 펑펑 울었다고 한다.

AND

어느 개의 일기

좋아 죽겠다고 쭉쭉 빨아댈 때는 언제고
왜 나를 처음 와 본 휴가지에 두고 갔나
유기(遺棄)라는 어려운 말 쓰지 마라
당신들이 어떤 핑계를 대든 나는 버려진 것
이대로 가엾어져 결국 굶어 죽게 되는 것
버려진 오디오처럼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게 되는 것 ​
당신들은 나를 사랑하지 않았으며
무엇도 사랑할 수 없다
AND

나이

​나도
내 앞에 사람도
지금은 온화한 나이
뱃속에선 여전히 그때처럼 뭔가가 끓어 오르는데
태연한 얼굴로 마주보고 앉았다
불꽃이 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차가움도 남지 않있다
건조한 말빛으로 서로의 안부를 묻고
차가운 술을 먹는다
뱃속이 식는다
나도
당신도
지금은 그런 나이
그때는 언제였을까
AND

바다는 하나

고등어 연어 노르웨이
갈치 아랍에미리트
명태 가자미 러시아
대구 임연수 미국
홍어 아르헨티나
민물장어 캐나다
바다장어 오징어 페루
낙지 베트남
쭈꾸미 태국
문어 베네수엘라
흰다리새우 에콰도르
붉은 새우 중국
날치알 인도네시아
소라 터키

먹는 뱃속은 다 달라도
바다는 하나
AND

좋겠다


주유소 사장들은 기름값 걱정 없어 좋겠다
편의점 사장들은 담뱃값 걱정 없어 좋겠다
김밥천국 사장은 백 가지 음식 중에 골라 먹을 수 있고
옷가게 사장은 매일 새옷을 입을 수 있어 좋겠다
​약국 사장은 몸이 아파도 걱정이 없고​
병원 사장은 입원비 걱정이 없어 좋겠다
건물주는 임대료 걱정 없고
회장님들은 최저임금 걱정 없어 좋겠다

​고깃집 사장은 라면있는 집이 부럽고
반찬가게 사장도 저녁 반찬 거리가 걱정인데

​​재벌 총수는 걱정도 부러운 것도 없고
세상을 올려다 볼 일도 없고
문어발로 세상을 꽉 붙잡고 있으니

씨팔, 세상에서 제일 좋겠다
AND

토성의 고리 - 제발트

2018. 8. 7. 08:16
34p~
브라운에게는 우리가 단 하루라도 존속하는 것이 기적처럼 느껴진다. 그는 스러지는 시간의 아편을 가로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쓴다. 겨울의 해는 빛이 얼마나 신속하게 재 속에서 사라지는지, 밤이 얼마나 재빨리 우리를 에워싸는지 보여준다. 한 시간, 한 시간이 계산서에 더해진다. 시간조차도 늙는다. 피라미드, 개선문, 오벨리스크 따위는 녹아내리는 얼음으로 만든 탑에 불과하다. 천공의 형상들 속에서 한자리를 차지한 것들조차도 영원히 영예를 누릴수는 없다. 니므룻(바빌로니아의 왕으로 사후에 신격화되어 오리온 별자리에 자리했다고 여겨졌다)은 오리온 별자리 속에서 사라졌으며, 오씨리스(고대 이집트의 신으로 씨리우스별로 상징되었다)는 씨리우스별 속에서 사라졌다. 위대한 종족보다 더 오래 산 떡갈나무는 세 그루도 못된다. 어떤 작품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놓았다고 해도 기억될 권리를 확보했다고 할 수 없는 일이다. 최상의 인물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는지 누가 알겠는가. 양귀비 씨앗은 어디서나 꽃을 피우지만, 어느 여름날 느닷없이 비참함이 눈처럼 우리 위로 내려오면 우리는 이제 잊혀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 제발트 번역의 느낌을 알 것 같기도 하다. 암튼 좋네.

AND

끝났다는 생각

덥다. 다 끝났다는 생각이 머릿속 가장 꼭대기에서 빙글빙글 돈다. 80억 인구가 석유시대 이전으로 돌아갈 리도 돌아갈 수도 없다.
최저임금과 자영업자 뉴스가 계속 쏟아진다. 영세 자영업자들에게 일자리를 만들어 줄 방법은 없다. 젊은이들 일자리는 말할 것도 없다. 한반도 남쪽의 5000만 인구가 다들 적당한 일을 하면서 즐겁게 살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난민 기사에 진짜 악의를 가지고 댓글을 다는 사람들을 어떤 일들에 대해서 근거나 확인도 없이 맹신하는 사람들을 설득할 방법이 없다.
체제의 문제가 아니다. 개개인의 문제도 아니다. 그저 이렇게 되버린 것이다.
내일 출근을 위해 강릉에서 정선 오다가 작은 산불을 발견했다. 반바지 입고 산에 올라가서 현장 확인하고 내려오니 많이 더웠다. 차를 몰고 가장 가까운 편의점에 가서 컵얼음과 콜라를 샀다. 이렇게 또 플라스틱 쓰레기가 생겼다. 정선에 오기 위해서 자동차를 탔다.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에서 5000만 명이 대략 이렇게 살고 있다.
'작은것이 아름답다' 에서 모두가 플라스틱을 먹고 있다.는 글을 읽었다. 맞는 말이다.
석유 문명이 끝날 때까지 누릴 수 있는 최선을 누리고 사는 게 맞을까?
지금의 플라스틱 문명이 더위나 추위로 끝날 것 같다. 몇 십년 후에는 전 인류의 몇 십 퍼센트가 사라질 거린 얘기가 코 앞에 다가온 것 같은 더위다.
덥다. 다 끝났다는 생각이 든다.
끝났다는 생각 끝에 당신이 있다.
함께 있는 우리가 있다.
그게 유일한 낙관이다.
AND

옥수수

피서지 노점상에서 할머니가 삶아 파는 한 개 천원짜리 옥수수를 먹고
맛있다. 옥수수가 이렇게 맛있는 것이었나 생각했다면
당신은 철이든 것이다
처마에 매달아 잘 말린 옥수수 낱알을 하나하나 뜯어내고
모종을 만들어 밭에 심고
제초제도 뿌리고 거름도 줘가며 한 줄기에서 두 개의 옥수수가 달리도록 키우고
땡볕 아래서 수확해서 솥을 걸고 불을 피워 쪄내는 옥수수의 맛을 알면
솥뚜껑을 열자마자 여름안으로 퍼져 나가는 연기의 열기를 알면
옥수수 한 알에서 시작해서 한 자루에 수백개의 씨앗이 달리는
이 지독한 순환을 깨달으면
당신은 철이든 것이다
당신이 어떤 삶을 살았든
옥수수 맛을 알 때부터 당신은 철이든 것이다
AND

우리는 인류 역사상 가장 돈이 많이 필요한 최고 풍요의 시대를 갱신하며 살고 있다.
물자가 풍족하지 않던 시절에는 많은 돈(수입)이 필요 없었다. 물자는 편리와 같은 말이다.
먼 과거까지 가지 않고 지금과 1980년대만 비교해 보더라도 명확하다. 에어컨, 자동차처럼 덩치가 큰 것 뿐 아니라 먹을 것도 지금만큼 쉽고 다양하지 않았다. 만든 김치를 사서 김치냉장고에 넣는 것과 배추를 사고 양념을 준비해서 김치를 담그고 독에 묻는 것의 차이랄까. 
물질적으로 풍족하지 않으면 단조롭지만 끈기있는 생활을 하게 된다. 아내랑 같이 섬에 살 때는 어느정도 그런 생활이 가능했다. 밥을 사 먹을 곳도 없고 돈도 없으니 해 먹는 수 밖에 없었다. 농업으로 돈이 생기지 않으니 조개를 잡을 수 밖에 없었다.
겨울밤 아내랑 마주보고 앉아서 콩이랑 팥이랑 골라내던 때가 좋았다. 집 앞 텃밭에서 꿈지럭거리면서 뭔가를 하는 아내 옆에 고양이 망고가 찰짝 붙어있던 시절이 지나간 날들 중에 가장 아름다웠다.  
한 번 길들여진 편리에서 의식적으로 불편으로 가는 것이 쉬운일은 아니다. 당장 날이 덥고 집에 에어컨이 있는데 어떻게 안 틀고 버티겠나.
너무 자기 잘났다는 마음이 많이 투영됐다 생각해서 '자발적 가난'이란 말을 별로 안 좋아하는데, 천만금이 있어도 그걸로 뭘 할 수 없는 환경에서 사는 것이 진짜 자발적 가난이라 생각한다.
지금은 도시 직장생활자로 살고 있지만 나중에는 스스로 해결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이 많은 생활로 돌아가고 싶다. 몸을 바지락거리면서 살거다.
AND

여름 생각

아침부터 매미가 우니
제법 여름같다
아, 따뜻하다.
감탄으로 여름을 넘기는 사람들
겨울에도 처지가 바뀌지 않을 사람들
누군가는 날씨 때문에 죽고
누군가는 자존심 때문에 죽고
다 울고난 매미는 죽어 나무에서 떨어질 것이다
그 와중에도 떵떵거리며 살고있는 사람들 사람들
새들도 숨어버린 더위 한 복판에 서서
내 처지가 매미보다 나은지 생각하며
싸구려 아이스커피를 마신다
씨발. 따뜻하다.
AND

당신에게

당신이 같이 밥이라도 먹자고 하면
우리들은 마음속으로 고개를 젓는다
당신이 열변을 토할 때
우리들은 고개만 끄덕여준다
당신이 술에 취해 외롭다고 소리를 질러도
우리들은 개가 짓는다 외면한다
당신이 누군가와 시비가 붙었을 때
우리들은 지랄병이 도졌다 생각한다
당신이 우리곁을 떠날 때
우리는 겉으로도 웃고 비로서 속으로도 웃는다
누구도 당신을 알아주지 않는다
누구도 당신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다
당신이 누군가를 우습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AND

시속 100km

고속도로 위에선 과거가 시속 100km로 뒤로 밀려난다
과거는 뜨겁고 미래는 차갑다
시속 100km
단속에 걸리지 않는 속도
내 육체를 뛰어넘는 속도
17일 동안 지구 한 바퀴를 돌 수 있는 속도로
먼저 도착한 미래에서
조수석에 앉은 당신의 차가운 혀를 내 혀로 감싼다
얼어붙지 않도록
아니, 하나로 얼어붙도록
석양을 따라 뒤쫓아 오는 과거를 바라보며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시속 100킬로미터의 사랑을 한다
AND

삼계탕을 먹다

입안에서 닭뼈가 구른다
한번에 살을 발라내지 못하자
닭뼈를 굴리며 생각이 생겼다
엄마말 잘 들으면 그런것처럼
입안의 닭뼈도 피가 되고 살이 될까
닭뼈가 내뼈가 되고
닭살이 내살이 되고
똥이 되고 흙이 되고
유식한 말로 순환이라고 부르고
손가락으로 원을 그려본다
누군가는 삼계탕을 먹다가 닭 목뼈가 목에 걸려 죽기도 할 것이다
입안에서 또 다른 닭뼈가 구른다​
AND

커피를 내린다 

커피를 내린다
저녁마다
무슨 의식이라도 되는 것처럼
커피콩을 갈고
내린 커피를 밥사발에 따른다
여기까지만 의식이다
내 베란다에서 내 담배를 피우며
내가 내린 커피를 마신다
밥사발에
커피는 아직 내 것이 아니다
술에 취한날도
저녁밥을 굶은날도
커피를 내린다
밥사발에
저녁마다
내 것이 아닌 커피를 미시고
내가 되는 꿈을 꾼다
AND

머리를 긁다
머릿결이 시작되는 정수리에 딱지가 앉은 걸 알았다
딱지를 뜯어내자 몸 가장 높은 곳에서 피가 솓아 올랐다
퐁퐁퐁 퐁퐁퐁
급한 마음에 먹고 있던 수박씨로 구멍을 막았다
잊고 살다가 그 자리에 싹이 돋은 것을 알았다
머리를 감고 밥을 먹으니 당연한 일이라 생각했다
줄기가 굵어지고 잎이 무성하더니 꽃이 피고 수박이 달렸다
그제서야 머리 꼭대기에 식물 하나씩 키우는 사람들이 보였다
이 사람은 소나무를 키우는군
나도 나무를 키웠으면 좋았을텐데
저 고추는 어떻게 겨울을 날까
내 수박도 얼어죽지 않으려면 털모자를 준비해야겠군
세상엔 이름 모를 식물들이 사람 숫자 만큼이나 많군 
다들 생활이란 명분으로 정수리에 구멍 하나씩은 파고 있지
안심한 나는 주먹만큼 커진 수박을 툭툭 쳤다
퉁퉁퉁 퉁퉁퉁
기분좋은 소리가 났다
AND

부패

김치찌개를 먹었다
한 번 먹을 만큼 남았다
여름 가스렌지 위에서
냄비에 담긴 채 김치찌개의 부패가 시작된다
김치는 만들어지는 순간 부패하기 시작한다
배추는 밭에서 잘라지는 순간 부패하기 시작한다
찌개에 들어간 돼지고기도 죽어지고 토막나 부패한 것이다
다른 재료들도 마찬가지다
먹고 남은 찌개는 냉장고에 두어도 부패한다
끓이고 끓여도 결국은 부패한다
부패는 썩는다와 같은 말
만물이 썩어가는 세상에서
점심을 같이 먹은 우리는 사랑이란 이름으로 썩고 있다
AND

우문현답 5

일리는 항상 여러 갈래로 있는데
왜 일리있다의 일자는 한일자를 쓰나
그 일리가 여러 일리 중 하나기 때문이다
AND

개판

요즘 제일 많이 하는 말이다
엊그제 팀장님이랑 출장 가다가 우리 사무실도 개판이지만 다른데는 더 개판인 곳도 많다고 했더니 경상도 말로 "그럼 우리가 개고?" 하시길래. "예" 했다.
뭐가 개판이냐면 체계가 없다. 체계가 왜 없냐면 원칙이 있는데 안 지킨다. 원칙을 안 지키는 이유는 여러가진데. 남을 우습게 알고 원칙을 깨거나 자기가 무슨 잘못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걸 보면 짜증이 확 밀려든다. 예를 들지는 못하겠고 아무튼 개판이다. 공직사회도 이리 개판이니 원칙이란 것 자체가 없는 다른 분야는 얼마나 더 개판일까. 원칙은 공통의 협의에서 나와야 하는데 한국 사회의 원칙은 보통 위에서 내려주는 것이다. 협의란 말도 웃기긴 하다.

개한테 미안하지만 개판이다.
AND

비 냄새

비가 온다
비 냄새가 난다
마른 아스팔트를 때린 비 냄새
흙 안으로 스며드는 비 냄새
자동차 매연과 섞인 비 냄새
초록의 잎들에 닿은 비 냄새
내 머리카락에 닿은 비 냄새
내 땀과 섞인 비 냄새
비 냄새는 모든 냄새를 바꾼다
비 냄새는 비 냄새랑만 닮았다
여전히 비가 온다
사랑했던 얼굴이 내린다
세상을 적시는 당신 냄새
내 마음에 스며든 당신 냄새
비 냄새는 당신 냄새를 닮았다
당신 냄새는 당신 냄새랑만 닮았다
AND

흙 위에 서 있는 꿈

나이는 육십 가까워도 좋다.
그맘 때 즈음 오직 내게만 주어진 밭을 갖고 싶다.
경운기도 트랙터도 들어오지 않는 곳
내 발걸음만 남아 있는 밭에
당신과 함께 먹을 것을 심고 가꿔서
때가 되면 수확을 하고
또 때가 되면 씨를 뿌리는 일상의 반복인 삶
누가 관심 갖지 않아도 그대로인 삶
관심 갖는 누군가가 나를 봤을 때, 그저 땅 위에 있는 나
그런 삶을 원한다
AND

청량리

백화점 식당가에서 점심을 먹는다
언제부터 여기 백화점이 있었을까
백화점은 만물의 상징, 풍요의 표상
쩝쩝대며 밥을 먹는 사람들 표정에 여유가 있어 보인다.
나도 그들에게 그래 보일까
나는 그들을 보지만 그들은 나를 보지 않는다
역을 나와 대로를 걷는다
직접 본적은 없지만 청량리 588의 흔적은 없다
사람들이 사라지자 기억도 사라졌다
나는 무엇이 두려운지 골목으론 가지 못한다
수 많은 간판들, 자동차들, 사람들
다들 바삐 움직이는군
나는 그들을 보지만 그들은 내게 아무 일도 없다는 걸 모른다
다 끝난 것 같은 식당에 들어가 혼자 술을 먹는다
건너편엔 여럿인 무리들도 있다
나는 낮술을 하는 그들을 보고 그들도 나를 본다
서로를 바라보는 침묵 속에서
갑자기 공평해진 동대문구 청량리동 오후 세 시
아직은 끝나지 않은 오늘
AND

 빵집에 가서 감자 고로케라고 적힌 걸 하나 사 먹었다. 한 입 물었는데, 감자가 안 씹히고 게맛살이 씹혔다. 아무 의미 없는 걸 먹었다는 문장이 머릿속을 관통했다.
 의미 없는 걸 먹는다는 건 뭘까?
 배가 고파서 찬밥에 물 말아서 한 끼를 떼우는 것? 돈 주고 뭘 사 먹었는데 내가 원한 맛이 아닐때? 아무거나 먹자고 해서 아무데나 들어가서 대충 시켜 먹었는데, 맛이 없을 때?
 끼니를 떼우기 위해서 간장에 비벼먹는 밥도 누군가와 함께라면 의미가 있다. 살면서 가장 맛있게 먹은 음식이 연애할 때, 애인이 끓여준 짜장라면인 사람도 있다.
 그렇다면 먹는 것의 의미에 돈이 개입한다. 개인이 생각하는 값어치를 못했을 때, 의미 없는 걸 먹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돈이 의미 있는 것인가? 의미 있는 것이다.  
 나는 감자전을 좋아한다. 감자전 맛은 반죽에 밀가루만 섞지 않으면 거기서 거기다. 다 맛있다. 감자전을 먹고는 의미 없는 걸 먹었다는 생각을 한 번도 안해봤다. 
 어느 가게에 들어가서 근처 다른 가게는 세 장에 만 원인 감자전을 한 장에 만 원 주고 사 먹었다면 화가 날거다. 화가 난다는 것도 의미이므로 돈은 의미가 있다.
 한 청년이 길을 걸으며 싸구려 크림빵이랑 200미리 우유를 급하게 먹고 있다. 그걸 바라보는 나에게 그가 먹는 행위는 어떤 의미로 다가오지만 그 청년은 그저 세상에 화가 난 상태일지도 모른다.
 정말 의미 없는 걸 먹는다는 건 무엇일까? ​
 아무런 희망도 없이 꾸역꾸역 살아가는 삶 속에서 배고픔을 참지 못해서 오직 홀로 뭔가를 먹는 것이 아닐까?
 내가 원했던 맛은 아니었지만 게맛살 고로케도 그렇게 의미없진 않았다.
 나에겐 당신이 있으므로.
 의미 없는 걸 먹었다로 쓰려고 했는데 의미 없이 먹는 것에 대해서 써버렸다.
 
AND

붉은

붉은 옷은 자신감이다
절대로 지지 않는다는 마음이다
붉은 입술은 매혹이다
너는 가장 아름다운 존재다
너의 상처에 붉은 피가 고인다
붉은 것은 살아있다는 증명이다
너의 붉은 심장으로 붉은 피가 넘나든다
붉은 것은 살겠다는 의지다
너는 붉은 눈으로 나를 본다
너의 붉은 눈빛에는 이면이 없다
차디차게 붉어진 나는 차갑게 식지 못한다
AND

울릉도 다녀왔다.

공항을 만들 계획이 있다고 하고 요즘 텔레비에 자주 나온다고 한다. 앞으로 사람들이 더 많이 찾을 가능성이 높다. 여객선을 타는 항구는 저동항 도동항 사동항 이렇게 세 개인데 도동은 읍내 메인스트리트와 이어지는 오래된 항구이고 저동은 낚시배들이 많이 보이는 항구다. 사동은 새로 조성했고 계속 키워갈 여객 항구다. 대형 개발 광풍은 없었던지 읍내 메인 거리는 차도가 좁았다. 관광객들이 많기 때문인지 주차할 곳이 부족했다. 쉽게 말하면 비좁고 빽빽한 이미지다. 순수한 관광객 입장에서는 자연산 딱지가 붙은 회 먹고 독도 한 번 다녀오고 호박엿 기념품 사고나면 긴 뱃시간과 비싼 물가 등 불편했던 이미지 때문에 별로 다시 오고 싶지 않은 곳이라고 생각한다. 그 때문인지 지금 개발 중인 사동항 근처는 쾌적하고 넒게 조성중이란 느낌을 받았다. 그렇게 되면 여느 바닷가 관광지(제주도나 강릉)처럼 예쁜 펜션과 특정한 식당들이 들어설 것이고 바다가 워낙 깨끗하기 때문에 다시 오고 싶은 곳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관광 개발이란 게 지방선거 공약집처럼 너무 뻔한 스트럭쳐지만 사람들은 그걸 좋아하고 누군가는 체념한다.

성인봉에 다녀왔다. 월요일, 화요일에 산 정상을 찍고 목요일에 또 산 정상을 찍으려니 조금 힘들었다. 그렇지만 예뻤다. 너도밤나무 군락이 삼나무 군락이 우산고로쇠 나무가 예뻤다. 강원도 산에 없는 나무들을 봐서 신선하고 좋았다. 나리분지 근처에 천연기념물 원시림이 있지만(여기도 엄청 예쁨) 상부 쪽 숲속은 참으로 원시림이라고 부를만 했다.

독도는 가지 않았다. 줄 서서 배를 타고 운이 좋으면 줄 서서 잠깐 내렸다가 사진 찍고 줄 서서 돌아온다는 게 마음에 안 들었다. 애국심에 호소하는 마케팅 관광이다. - 독도 가는 배 타는 항구에는 태극기가 많이 나풀거렸다. - 사람들은 그걸 좋아하고 나같은 누군가는 의미 없다고 생각한다.

이름없는 바닷가에 발을 담갔다. 너무 깨끗한 물, 육지랑 멀리 떨어진 물, 태평양에 가까운 물, 기분이 좋았다. 이 기분 좋음이 우리땅을 밟아 보겠다고 독도 가서 기분 좋은 사람들의 마음과 다르지 않다. 좀 우습다.

아무튼 울릉도 다녀왔다.
AND

맛의 기억

맛은 주관적이다.
맛은 기억에서 기억으로 대를 이어 기억된다. 기억은 조금씩 변형된다.

나는 호박 볶음을 좋아한다. 어른들이 세상에서 뭐가 제일 맛있냐고 물으면 우리 엄마가 해준 호박볶음에 밥 비벼 먹는게 제일 맛있다고 했다며 내 기억에 없는 어린날에 대해 얘기할 때 엄마가 보여 주었던 들뜬 표정 때문이다. - 지금도 마찬가지 일 듯 -  
나는 순댓국을 좋아한다. 엄마 뱃속에서부터 많이 먹었고 어린날에 동네 시장 순댓국집에서 아버지, 엄마, 동생, 나 이렇게 네 식구가 외식했던 기억이 갈비집에서 외식했던 기억보다 많다.
배추전을 좋아한다. 어느 여름날 물놀이 하던 중 외할머니가 해줬던 배추전에 대한 기억과 내 엄마도 같은 것을 먹었을 거라는 대를 이어 올라가는 어떤 마음 때문이다.
나이 먹고도 가지를 잘 먹지 않는다. 몸에 좋지 않다는 잘못된 정보 때문에 엄마가 가지 반찬을 만든 적이 거의 없다. 외할머니도 가지반찬을 많이 안 만들었을까?

외할머니 생선조림 양념장이 이모들에게 전수됐다. 기억은 변형되기 때문에 아무리 노력해도 이모들이 어렸을 때 먹었던 맛은 나지 않는다.
김치를 사 먹지 않던 시절에 우리 엄마도 김치를 많이 담갔다. 어떤 때는 맛이 있고 어떤 때는 맛이 없었는데, 맛있었던 김치 맛이 몸 안 깊숙히 남아 있다.
우리집은 냉면을 많이 해 먹었다. 작년에 엄마에게 물어보니 북어대가리를 끓여서 육수를 냈다고 한다. 그 냉면 육수의 맛도 내 안 어딘가에는 남아서 냉면을 사 먹을 때마다 들고 일어난다.
이런맛들은 기억으로만 이어진다.

나만 해도 요리를 많이 하지 않는다.
엄마의 북어육수도 외할머니의 양념장도 대가 끊겼다.
어려서부터 투플소고기를 많이 먹인 친구 아이는 투플소고기가 아니면 질기고 맛 없다고 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이런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부정적인 쪽으로 복잡한 감정이 올라온다.
텔레비 안이 온갖 먹는 것들로 가득찼고 집밥 타령도 유행을 지났다.
티비속 맛집으로 맛있다를 처음 접한 다음 세대는 어떤 기억으로 맛의 대를 이을까 생각한다.


AND

질문으로 끝나는

베개가 꺼졌다
납작해진 것을 어느밤
만취한 상태로 알아챘다
호떡처럼 납작만두처럼
잔뜩 수그린 삶
누가 알아주지 않는 것이 슬퍼도
내겐 당신이란 이름이 있었다
사랑은 납작해지고 당신 이름은 부풀어 올라
터지고 나면 당신 이름도 만두가 될까
납작한 삶의 끝에 납작해진 이름만 남을까
AND

등산

산 정상
구멍난 바람이 구멍난 가슴을 통과한다
괜히 멋쩍어서 머리를 긁는다
땀 냄새 묻은 머리카락이 나풀나풀 떨어진다
바람에 날리고 나뭇잎과 함께 썪을 내 머리카락
어쩌면 나보다 세상에 오래 남을 흔적을 남기고
산을 내려오는 길은 발걸음이 가볍다
AND

감기

화단에 가래를 뱉었다
크흑, 퉤
물큰한 덩어리가
가녀린 잎에 묻었다가
미끈하게 아래로 떨어진다
아직은 꽃이 피지 않은 계절
내 안의 더러운 것에 닿고도
꽃을 피우고 씨앗을 맺을 생명
나도 살아야지
감기는 가볍게 이기고
더러운 것을 뱉으며 살아야지
더러운 것이 묻어도 살아야지
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