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바라기

화분에 물을 준다
아직 잎도 나오지 않은 어린 것
흙속에서 생각에 잠긴 해바라기 씨앗
간질간질한 껍질
축축해지는 머리 끝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
나는 어디가 아픈것도 아닌데
생기 없이 집안에 틀어박혀서
오직 생활만을 생각한다
나, 당신, 우리, 생활..... 무능
멍하니 아내를 기다리는 동안
베란다에 오후가 내려 앉았다
화분에 흙이 말랐다

AND

인연


당신이 말했다
네가 두 번째로 만나게 되는 사람은 전생에 너를 죽인 사람이니 무조건 피해라
그 말을 남기고 이 생에 처음 만난 사람이 나를 떠났다
당신은 이 생에 나를 죽인 사람
나는 전생에 당신을 죽인 사람
우리는 죽어서야 이루어질 인연

AND

자신을 뭔가 높게 설정해 놓고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것을 '무례'라고 생각하지 않는지.....

페북에서 이런 글을 읽었고 무례와 겸손에 대해서 생각중이다. 일주일 째.

직장에서 열심히 해야지 하는 마음과 대충 해야지 하는 마음이 하루에도 몇 번씩 갈팡질팡 한다. 일단 내 일은 열심히 하는 것이 맞겠지. 나를 높게 설정할 경우 내 할일만 딱 하고 나머지는 무시하거나 대충해야지 하는 쪽으로 마음이 기운다. 일은 그런데, 사람은 어떤가? 나한테 무례하게 구는 사람들을 어찌할까? 그 사람은 꼭 내게만 그런 것도 아니다. 마음이 격할 때는 확 찢어버리고 싶기도 하다. 속이 상하면 우는 것이 보통인데, 나는 막 울고 싶은 것도 아니다.

내게 채워지지 않는 것은 무엇일까? 

좀처럼 마음이 차분해지지 않는다. 주말에 강릉에서 잘 놀았는데도 그렇다. 어제는 낮술을 마셨다. 술을 먹고 밖에 나왔는데도 화창했다. 봄은 그런 것인데, 나는 계절과 반대로 가는 기분이었다. 춘분도 지나고 낮이 길어지니 괜찮아 질거야. 내가 내게 해주는 최고의 위안이다. 이런것도 위안이라고. 웃긴다.

오늘 새벽에 깨서 입을 굳게 다물고 잠든 아내 얼굴을 본 일이 최근에 가장 큰 위로였다.

이 와중에 내 냄새는 아버지 냄새를 닮았다. 알고는 있었는데, 유전이란 게 냄새도 닮는구나. 무섭다.



냄새

술 먹고 담배 피우고 땀 흘리고
하루만 안 씻어도 몸에서 냄새가 난다
어릴적 인상을 쓰게 만들었던 냄새
지독히 싫어하던 아버지 냄새
냄새까지 닮아버리는 유전
아이는 없지만
훌쩍 커버린
아버지를 미워하지는 않는
아버지 냄새가 싫지 않은 나이
AND

친구

친구는 부자가 됐다
나는 검은 바닥에서 울고 있었다
누구나 심장은 붉지만
마음의 바닥은 검다
내가 우는 동안 부자가 된 친구
친구는 이혼을 했다고 했다
나는 아내와 사이가 좋다고 했다
친구는 아이가 보고 싶다고 했다
나는 아이가 없다고 했다
친구는 돈이 부질없다 했다
나는 삶이 허망하다 했다
친구가 이제 그만 울라고 했다
그 말에 눈물이 터졌다
물결 무늬의 등심을 앞에 두고
친구도 울었다
마음의 바닥엔 무늬가 없다
AND

쓰레기

더러운 걸 집 안에 두지마
안은 깨끗해야 해
밖으로 나가는 것은 다 쓰레기
산이 되든 섬이 되든
나는 거기 살지 않으니까
산과 섬이 모여 세상이 되고
오늘은 외출 하는 날
밖으로 나가는 것은 다 쓰레기

-> 집 밖으로 나가는 건 다 쓰레기란 생각
AND



네가 나를 지켜준다는 기분이 들었던 밤
많은 꿈과 많은 깸
눈을 떴을 때 내 옆엔 너
반쯤 감긴 눈으로 나를 안아주는 너
이를 가는 너
내 몸에 발을 올리는 너
내 눈 앞에서 고개를 돌리는 너
뒤척이는 너
그렇게 나를 지켜주는 너
밤이 지나고
수화기 넘어 목소리로도 나를 지켜주는 너
멀리서 내 이름을 불러주는 너
나도 너에게 그러했으면
너도 사랑이라 느꼈으면
많은 밤들이 네게도 속삭였으면

AND

만두를 먹다

아내랑 만두를 먹는다
마트에서 두 봉지씩 묶어서 파는 만두를
만두의 자존심이라고 포장지에 자신있게 새겨 넣은 만두를 
고기 잡채 야채가 섞인 만두를
간장 식초 고춧가루 섞은 간장에 찍어 먹는다
만두를 빚던 손들은 다 과거로 사라지고
기계손으로 빚은 만두를
기계처럼 정확한 맛의 만두를
몇 개의 질문은 가슴속에 물려두고
맛있게 먹는다
두 봉지 다 먹는다
AND

어쩔

어쩔 수 없습니다
받아들이거나 그만두거나

너에게
어쩔 수 없이 어쩔 수 없다는 말을 했다

너처럼
나도 어쩔 수 없는 상태이므로

아직은 순응자도 아니고 배신자도 아닌
어쩔 줄 모르기에 어쩔 수 없는
AND

파국

선물 받은 컵을 깼다
무심결에, 란 말이 어울리지 않는
좀처럼 의도하지 않는 일
얼굴은 아는데 이름을 모르는 사람 앞에서
아니면 그 반대인 사람 앞에서
예상에 없는 파국을 예상한다
생을 아우르는 무력감 속에서
반짝이는 순간은 잠깐보다도 적었다
조심했지만
당연하다는 듯
파편을 주워낸 맨살에 피가 났다
AND



지금 여기가 아니더라도
살아있다면
어딘가에는 봄이 온다
봄이란 말 안에 이미 봄이 있으므로
봄봄, 봄봄봄, 부르면
봄은 이미 와 있다
봄은 보는 것이라 봄이라서
세상이 싫어 눈을 감은 사람도
살아만 있다면 봄을 본다
꿈틀대며 오는 봄을 온 몸으로 본다
AND

갈비탕을 먹다

입구에 돼지가 웃고 있는 갈비집
숯불에 굽지 않으면 갈비도 아니지
수천만명이 일 년에 한 번은 먹을 수 있을만큼
많은 갈비와 그보다 훨씬 많은 숯이 함께하는 세상
갈비를 못 시키고 갈비탕을 먹는다
너랑 나랑 둘이
우리는 가족
건너 테이블엔 엄마와 아빠와 딸 그들도 가족
옆 테이블엔 엄마와 세 자녀 아빠는 없지만 그들도 가족
아빠가 없던 테이블에 초밥을 사들고 나타난 아빠
초밥과 갈비
아빠와 딸은 닮았다
엄마와 아이들이 닮았다
물고기와 육고기처럼
너랑 나도 닮았다
돈 몇 천원 때문에 갈비 대신 갈비탕을 시켰지만
같은 걸 씹어 먹으니
숯불과 갈비처럼
우리는 한 식구
AND

2016년 6월 15일부터 정선에서 일하고 있다. 벌써 2월 말이니 올해가 다 갔다는 내 식대로 계산하면 3년이다. 서당개도 풍월을 읊는다는 3이라는 숫자가 무겁다. 가끔 동료들에게 출근길에 산을 보면서 욕 한다는 농담을 하는데, 진짜 욕하면서 출근하는 날도 있다. 정선읍은 '나무위키'의 설명처럼 험준한 산들이 사람을 옥죄는 형국이다. 

답답하다

얼마전에 통기타 동아리에 가입했다. 모임에 두 번 갔다. 한 명 빼면 딱히 잘 치는 사람이 없는데, 모임에 가입한 것 만으로도 내 연습에는 속도가 붙는다. 2년만에 기타줄을 갈았고 어제도 혼자 연습실에 가서 한참 놀았다. 공연을 자주 한다고 하는데 - 벌써 3월 말에 공연 하나 잡힘 - 그 동안은 내가 기타를 쳐도 들어줄 사람이 없어서 연습에 흥이 없없던가, 싶다. 내일도 연습날인데 기대가 된다. 오늘 점심밥 먹으면서도 시큰한 말투로 인간이 멸망해야 된다는 소리를 했던 내가 기타 동아리에 가입한 것 만으로도 어떤 흥분을 느낀다는 게 웃긴다.

회사는 인사폭풍이 지나고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내가 무난히 결재 올리면 무난히 결재가 난다. 원래 둘이 할 일을 혼자하게 되서 심적 타격이 있었는데 - 어차피 작년에 혼자함. - 무사히 적응했다. 사람 한둘 바뀐 게 영향이 크다.

후지이 다케시의 칼럼집을 읽었는데, 페친들 공유로 읽었던 것도 있지만 다시 보니 새로웠다. 공무원 세계에 있다보니 공무원의 무사안일과 주어진 작은 책임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마음. 가치 판단을 하지 않는 것을 미덕으로 삼고 법대로 한다는 것을 중시하기 때문에 법대로 진행된 식민지배와 군부독재가 가능했다는 내용이 마음에 와 닿았다.

법대로 진행했는데 민원인이 만족하는 것이 현재 직장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베스트라고 생각하는데, 법이란 게 기본으로는 금지하는 것이기 때문에 양쪽이 같이 가는 일이 쉽지는 않다. 

3월 2일에 이사한다. 이것저것 준비할 게 많다. 2015년에 강릉 올 때보다 재산이 불어났기 때문일까? 빚 없으면 부자인 세상이다. 국가도 기업도 다 빚으로 돌아가는데,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을 때가 있다. 

결국은 인류 멸망론인가
AND

세영 이발소

친구와 이름이 같다
그래서 찾아갔지만
그래서 단골이 된 곳은 아닌 곳
6.25. 전쟁 전후로 태어난 아저씨들의 사랑방
순서를 기다리거나 머리를 자르며 항상 듣는 이야기
누구누구 장사치렀잖아
그 집이 형제가 몇이잖아
죽음이 자연스러워진 사람들의 말
나도 언젠가는 그리로 갈 테니
이발소에 다니는 일이
아저씨들 이야기를 듣는 일이 어색하지 않다
미끈하게 면도까지 마치고
얼굴을 쓰다듬으면
새로 태어난 기분이 드는 곳
돈 천 원 정도는 다음에 올 때 갖다줘도 되는 곳
늙은 손과 날카로운 칼에 얼굴을 통째로 맡기고도
깊게 내뱉는 한 번 숨으로 편안해 지는 곳
고맙습니다 머리 숙여 인사하고 나오게 되는 곳
AND

셋집

셋집을 구하다 보면 안다
세상에 건물과 집이 이렇게나 많은데
그 안에서 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정작 내 것은 없다
집주인과 마주앉아 계약서를 쓰면서
건물이 몇 개나 있다는 이 사람은 못된 사람이 아니길
내 돈 떼먹을 사람이 아니길 빌면서
처음보는 사람에게 주인님이라고는 못하겠고 사장님이라고 하면서
정말 내 것은 없다는 것을 안다
부동산을 나와 피워문 담배 연기가
아내의 푸념을 따라 하늘로 사라지면
조금은 어른이 됐지만
여전히 내 것은 없고
이 세상에는 아내랑 나 뿐인 것을 안다

-> 대출 알아보러 은행 가야됨. 진짜 조금 어른이 된 거 같음.
AND

 산불전문예방진화대 시험에서 탈락하신 선생님한테 아침8시에 전화가 왔다. 떨어져서 속이 상했는데 나랑 통화하면서 진정이 됐고 고맙다고 하셨다. 속상한 일로 나한테 전화주셨고 고맙단 말까지 들으니 내가 더 고맙다.

 연휴 중에 우리회사에 잠깐 있다가 지방직 공무원으로 간 친구한테 전화가 왔다. 만취한 그 친구가 정선에 있을 때 신경 써 주고 잘해줘서 고맙다고 했다. 특별히 그 친구에게 더 신경 써 준 건 아닌데 그렇게 생각해 주니 고맙다.

 작년 어느날 메모장에 '술 취해서 내게 전화하는 친구가 있어서 좋다.'고 적었다. 정말 그렇다고 생각한다.

 이사갈 집을 보려고 연가 쓰고 강릉에 왔다. 오던 중에 영일군과 통화를 했다. 몇 가지 이야기가 오가고 전화 끊을 때 즈음 목소리 들으니 좋다고 했더니 영일군이 웃었다. 

이런 사소한 일들이 나를 기분 좋게 한다 

 어제 점심을 먹는데, 심석희 뉴스가 나왔다. 내 맞은편에 앉아서 뉴스를 보던 나이 많은 회사 사람이 시집은 다 갔다. 시집 가겠나? 라는 쓰레기 멘트를 날렸다. 찰나의 시간 동안 마음을 진정시키고 시대가 바뀌어서 결혼도 할거고 지금 현재 애인이 있을 수도 있다고 했다. 아무 리액션도 돌아오지 않았다. 화내지 않고 잘 처신했다고 생각한다. 

 강릉에는 심속희 응원 현수막이 많이 붙었는데, 석희 아빠 친구들이 만들어 붙인 것도 있다. 그 아저씨들 중에서는 선거 때마다 자유한국당을 찍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정선 알파인 경기장 곤돌라를 살리라고 데모하는 사람들 중에 자동차에 세월호 스티커를 붙인 아저씨가 있는 것과 비슷하다.

 학연, 지연, 혈연. 혈연은 약간 다를 수도 있는데 연이란 게 다 이해관계다. 삶이란 게 다 이해관계다.

 회사에 인사폭풍이 지나고 많은 연들이 바뀌고 있다. 삶이란 그런것이니까 또 맞춰 살아지겠지. 어떤 인연들은 내 의지와는 상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이사갈 집 알아보러 가기전에 봉봉에 첫 번째 손님으로 와서 적는다. 1등이 다 좋은 건 아닌데, 봉봉에 1등으로 온 건 기분 좋다.

 
AND

명절


명절에는 명절에만 있는 일이 있지

​고강알루미늄 노조원들 차가운 복도에 차례상
야간근무 중이던 50대 남성, 컨베이어 벨트에 끼어 사망
설 보너스는 커녕 "밀린 임금이라도 주세요."
설 연휴에도 늘어난 슬픈 노인 고독사
​그리고,
인천공항 이용객 역대 최고

​해외 여행이 나쁜일은 아니지
누가 잘하고 누가 잘못한 건 아니지
꼭 명절에만 있는 일은 아니지
손 쓸 수 없이 돌아가는 세상이
이렇게 만들었을 뿐이지

매일 있는 일인데
유독 명절에는,
명절에만 있는 일이 있지
AND

아침부터 담배를 한 갑 사는 바람에 후회로 시작된 하루
말미에 아내랑 같이 영화  '가버나움'을 봤다.
영화가 끝나고도 머릿속에 씨팔이 멈추질 않는다.
이사는 개코나 아무데나 대충 구해서 가야겠다. 씨팔
AND

쭈꾸미를 먹다

밥을 시킨다
보통맛 2인분요
보통맛 매운맛 아주 매운맛 중에 골라야 한다
보통맛은 보통맛이라 아주 보통맛은 없다
보통맛을 먹는다고 다 보통사람은 아니다
어떤 대통령은 자기가 보통사람이랬는데
알고보니 씨팔놈이었다
나도 내가 보통사람이라 생각하는데
사실 나는 씨팔을 입에 달고 사는 보통사람이다
순한 사람 중에는 아주 순한 사람도 있는데
보통사람은 보통사람이라
아니, 사람은 다 사람이라
아주 보통사람은 없다
나는 보통맛 불향 쭈꾸미도 매운데
아내는 밍밍하다고 한다
눈이 마주치니 웃는다
보통날 보통맛으로 보통의 사랑을 산다


AND

 p.196

 그렇다. 내 행복과 불행은 문제가 아니다. 세쓰코의 행복이나 불행이 문제가 아니다. 사람은 살아 있다는 사실에 만족해야 한다. 사람은 자신의 세대에서 탈출하려는 시도도 할 수 있으니 말이다.

 ~

 머잖아 우리가 정말로 늙었을 때, 젊은 사람들이 물을지도모른다. 당신의 젊은 시절은 어땠냐고. 그때 우리는 대답할 것이다. 우리 때에도 똑같은 어려움이 있었다. 물론 시대가 다르기 때문에 다른 어려움이기는 하겠지만, 어려움이 있었다는 점은 마찬가지다. 그리고 우리는 그 어려움에 익숙해지며 이렇게 늙어왔다. 하지만 우리 중에도 시대의 어려움에서 벗어나 새로운 생활로 용감하게 진출하고자 한 사람이 있었다고. 그리고 그 답을 들은 젊은이 중 누구든 옛날에도 그런 일이 있었다는데, 지금 우리도 그런 용기를 갖자고 생각한다면 거기까지 늙어간 우리의 삶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짐을 부쳐 텅 빈 방안에 노을이 물들었다. 이 방에서 지내는 것도 앞으로 하루이틀이다. 그러나 그걸로 됐다. 우리는 날마다 모든 것과 이별한다. 그럼으로써 우리의 시야는 더욱 자유로워질 것이다.

 조금 눅눅해진 것 같다. 창을 닫아야지. 도호쿠 쪽은 아마 아직 추울 것이다. 비가 오는 날이면 세쓰코의 상처 자리가 아프진 않을지. 아프다면 따뜻하게 안아주고 싶은데.....

 

-> 신형철의 추천으로 읽었다. 마지막 문단에 전율을 느꼈다. 상실의 시대 마지막도 생각났다.

AND

20190121 - 마흔

그때그때 2019. 1. 21. 00:00
 오늘로 아내 나이가 마흔이다. 나는 네 달 전에 마흔이 됐다. 열 살 때 스무 살 때는 생각도 못했던 나이다. 40이라니 게임 레벨도 아니고 어중띠고 불안한 숫자다. 불혹이란 건 아는척 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써내는 신문 칼럼같은 데서나 나오는 얘긴줄 알았다. 불행의 반댓말은 아니지만 다행히 신문의 시대는 끝났고 칼럼을 읽을 일도 많지 않다. 

 낮에 미역국 끓여서 같이 먹고 정선 와서 일요일 출근했다. 아내에게 해줄 수 있는 최소한. 당신 생일에 의무적으로 끓이지 않는 미역국이야 말로 사랑의 정수가 아닐까? 생일의 미역국은 세상이 정한 것이지만 나도 너도 세상의 사람이니까. 미역국에 둥둥 뜬 누런 고깃 기름이 보기에 좋았다. 아니, 그에 앞서 양수 냄비에 고기를 볶을 때 고기가 익으며 핏기가 사라지는 걸 보는 게 좋았다.

 어제는 아내가 홈플러스 옷 파는데서 폴라를 하나 샀다. 오늘은 국거리 산다고 간 하나로마트에서 이것저것 샀고(딸기도 한 팩 삼) 찬거리를 산 후에는 순대도 사 먹었다. 

 세상에 너무도 많은 물건들을 견디기 어렵다. 물건들 물건들 물건들. 조개잡이 참으로 샤니빵을 가지고 갔을지언정 섬에 살 때는 물건들과 소비하는 나 때문에 지금같은 죄책감은 없었다. 차라리 그때가 나았을까? 누가 우릴 쫓아내지만 않는다면 나랑 아내만 아는 곳에서 그저 우리 먹을 것만 농사지으며 살고 싶다.

 이사갈 때가 돼서 이런 생각이 강해졌겠지. 

 지금 마흔 살이면 평생의 반을 20세기에 살고 그 나머지는 21세기에 살았다. 어중띠게. 차라리 지금보다는 물건이 적었던 20세기가 좋은 시절이었단 생각이다. - 요즘은 석유 때문에 다 망했다는 생각을 한다. 근데 그게 아니었으면 난 이 세상에 없는 사람. 그게 죽음 다음 가는 인간의 딜레마가 아닐까. - 이승만 때가 인생의 전성기였다고 하는 해방전에 출생한 아저씨들의 좋은 시절과는 다르다. 나는 20세기 마지막 대통령이 김대중이었는지 노무현이었는지도 헷갈린다. 

 아내의 마흔번 째 생일에 나는 사랑과 별개로 무력감을 느낀다.
AND

어때?

나에게는 의문문이 없다
가끔 의문은 있다
물어야만 시인이 된다고?
적당한 의문을 가진
그저그런 사람이면 어때?
억지로 만든 질문이면 족해
그 정도에 만족하면 어때?
묻지도 않고 시인이 되면 안돼?
그런일들 아무 것도 아니면 참 좋아
당신의 생일에
하필이면 그날에
당신을 사랑한다고 하면 또 어때?
세속적이면 안돼?
나는 너를 사랑하는데
미역국에 빠져 죽어도 좋은데
아무려면,
그게 또 어때?
어때란 말이 어색하면 또 어때?
무엇이 어떻게 그러하든 그게 뭐 어때?
AND

고마해

그만해라
고마워 할 것 없다
푸념하지 마라
당연히,
의심도 하지 마라
어린이가 있는데
너 아닌 다른 존재가
너의 유전자로 사는데
소용없는 푸념인 것을
의심할 바 없는 의심인 것을
너는 묻기도 전에 아는데
아니,
물으려 하기도 전에 아는데
끝나지 않는 이야기에
푸념도 의심도 하지 마라
AND

뭐라도

뭐라도 써볼까 싶은 밤
하필 낮이 아니고 밤인 밤
ㅁ자만 떠올려도 화가 치민다
아무 생각 없는 나
많은이들이 생각이 많다고 하는 나
끓어오른 화를
나를 넘어선 나를
ㅁ자 너머의 나를 견딜 수 없는 나
그게 뭐라고
그게 뭐라고
나의 너
너의 나
세상에 흔한 일
그게 뭐라고.
AND

신년인사
아버지에게 전화가 왔다
- 아버지, 잘 계시죠?
- 저랑 며느리는 잘 있어요
- 계속 잘 계세요. 건강관리도 하시고요
아버님에게 전화가 왔다
부담되서 전화를 안 받았다
아내에게도 전화가 왔다
아내도 전화를 안 받았다
결국 내가 전화를 했다
- 아버님, 어서방입니다
- 잘 계시죠?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 따님과 저는 잘 있습니다
아버지도 있고 아버님도 있으니 어른이 된 것 같은 1월 1일
AND

스토너 - 존 윌리암스

2019. 1. 5. 19:31

 p.264~ 하지만 이미 둘 사이에 어색한 분위기가 자리 잡았기 때문에 조금 전처럼 거리낌 없이 이야기를 나눌 수 없었다. 스토너는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커피를 잘 마셨다고 인사한 뒤 작별인사를 했다. 드라스콜은 문까지 그를 배웅해주었지만, 안녕히 가시라는 인사를 할 때는 거의 무뚝뚝하게 보일 지경이었다.

 밖은 어두웠다. 봄의 싸늘함이 저녁 공기 속에 베어 있었다. 스토너가 심호흡을 하자 그 서늘한 기운에 몸이 찌릿찌릿하는 것이 느껴졌다. 들쭉날쭉한 집들의 윤곽 너머로 시내의 불빛들이 엷은 안개 속에서 반짝였다. 길모퉁이의 가로등이 사방에서 다가오는 어둠을 힘없이 밀어내고 있었다. 그 너머의 어둠 속에서 갑자기 웃음소리가 터져나와 잠시 머무르다가 사라졌다. 뒷마당에서 쓰레기를 태우는 냄새는 안개에 붙들려 있었다. 스토너는 저녁 풍경 속을 천천히 걸으면서 그 향기를 들이마시고 혀에 닿는 싸늘한 밤공기를 맛보았다. 그가 걷고 있는 지금 이 순간만으로 충분해서 더 이상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은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그는 연애를 했다.

 

p.392 손가락에서 힘이 빠지자 책이 고요히 정지한 그의 몸 위를 천천히, 그러다가 점점 빨리 움직여서 방의 침묵 속으로 떨어졌다.

 

 윌리엄 스토너란 사람이 어떤 삶을 살다 죽었다는 이야기다. 책의 첫장을 읽다가 작년에 읽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냥 다시 읽었다. 설명은 못하겠는데, 좋다.

 도리스 레싱의 "풀잎은 노래한다"도 오늘 마저 읽었는데, 그 책의 주인공 메리가 스토너의 아내 이디스와 비슷한 신경증이 있다는 점을 기억해둔다.

AND

이루다

내 이름은 어일우
네 이름은 이루다
어, 이루다
친구들이 내게 했던 얘기
친구들이 네게 할 얘기
살면서 꼭 무엇을 이루어야 하는 것은 아닌데
네 부모가 억지로 붙여준 이름 이루다
이루다는 어루다가 될 수 없지만
어루만지고 어루달래는 생을 살길
그게 네가 이루는 것이길
AND

역삼각형

​지상에선 꼭지점이 흔들린다
바람은 불지 않는다
속은 남들과 같은 180도
덤블링에 실패한 곡예사처럼 180도 뒤집힌
나는 역삼각형
변하지 않는 값 180도
무거운 머리로 균형을 잡는다
쓰러지고 싶지 않다
지고 싶지 않다
숨을 참는 안간힘​
바닥이 있는 어디에서나 꼭지점이 흔들린다​
바람이 불지 않아도​
누군가 밀지 않아도​ 
AND

만성 위축성 위염

위축되지 않고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겉 모습 뿐이었구나
속에서 피가 나도록 몰랐구나
남의 손으로 내 뱃속을 들여다보기 전까지
내 뱃속을 내가 몰랐구나
큰 소리치며 내 말이 맞다고 할 때마다 
내 속은 조금씩 접혀들어 갔구나
구겨졌구나
잘못 산 것은 나
잘못된 것도 나
만성은 되돌릴 수 없다는 말
당신에게 만성이 되지 못하고
내 속만 끓이고 말았다
AND

씨팔

너희들은 사람이 죽어도 그렇게 할 수가 있구나
부속품이 하나 사라졌으니 그 자리에 새 부속을 채울 수 있구나
씨팔
그 부속이 사람인데도 너희들은 그렇구나
너희에겐 사람이 부속이고 생명이 부속이구나
씨팔 개새끼들
너희는 눈물을 모르니 울음 소리도 듣지 못한다
나는 지금 운다 너희가 모르는 슬픔을
씨팔 씨팔 씨팔
내 눈물을 아는 사람들과 나는 살겠다
세상의 끝에서라도 살겠다
그리고 너희들을 부숴버릴거야
AND

20181017 - 일기

그때그때 2018. 12. 17. 09:16
 부정 분노 협상 절망 수용

 불치병 환자들의 감정 5단계다. 며칠전에 정선에 다녀간 소방관 친구가 알려줬다.
 요즘 씨팔을 입에 달고 산다. 마치 태어났을 때부터 내 모든 말에 씨팔이 붙어있었던 것 같다. ​메모장에 뭐 메모할 때도 씨팔을 붙인다. - 씨팔, 외국인 고용보험 해지 어떻게 하나, 4대보험 다 전화해 볼 것, 씨팔 - 이런 식이다. 
 친구는 내가 현재 분노 단계라고 했다. 협상의 단계로 넘어가면 씨팔소리는 더 안할 것 같아서 친구에게 협상 단계로 넘어가겠다고 했다. 절망을 지나 수용 단계로 간 사람들은 아마 자기(넋)을 잃고 있는 것이겠지. 차라리 분노가 낫다는 생각이 든다.
 원인이 복합적이다. 그 중에 하나가 정선이란 곳이 싫어졌다. 아니 정선읍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산이 꼴도 뵈기 싫다. 
 매일 집에 가서 아내 손 붙잡고 자고 싶다. 같이 누워도 항상 내가 휙 하고 먼저 잠들기 때문에 불편한 걸 참고 있던 아내는 내기 잠들고 나서야 손을 풀고 잔다. 그 마음이 너무 고맙다.
 샤이닝의 잭 니콜슨이 그 저택에서 광기에 휩싸인 것과 정선읍의 첩첩산산에 둘러쌓인 내가 분노 단계에 오래 머물고 있는 것이 비슷하다는 생각이다.
 팀장이 바뀌거나 동료가 떠나는 일이 있을때마다 심적으로 크게 흔들린다. 나도 내가 이렇게 사람을 많이 타는 줄 몰랐다. 시작을 같이했던 동료들은 다 정선을 떠났다. 이제 내 차례다.​
 요새 툭하면 운다. 어제는 남의 결혼식에서 축사 듣다가 울았다. 그 와중에 아내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마지막에는 아내 앞에서 울겠지. 씨팔 

 연말에 진짜 좀 쉬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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