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인터넷으로 장기요양등급 변경 신청했고 오늘은 아버지 인지검사 날이다. 1년에 한 번 하는 인지검사를 두 달 전에 받았어야 했는데, 스텝에 꼬여서 1년 2개월 만인 오늘 받았다. 강릉에서 8시 30분 기차를 탔고 이대목동병원에 도착했을 때, 검사실 앞에 엄마가 혼자 앉아 있었다. 엄마를 꽤 오랜만에 보는데 포옹도 안 하고 서로 손만 잡았다. 나도 엄마도 아버지 때문에 마음이 지친 영향이다. 사실 아버지 때문에 지치기론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이다. 현재 심장 문제로 이대목동병원에 입원해있는 둘째 이모는 수시로 아버지 오산으로 데려가서 같이 살라는 얘기를 한다. 이모같은 외부 스트레스 요인이 아니더라도 엄마 스스로 갖고 있는 이혼한 전남편에 대한 책임감이 크다. 알지 모르겠지만 아버지 걱정 많이 한다고 나한테 따로 얘기한 적 있었고, 오늘도 아버지 생각하면 잠이 안 온다고 비슷한 맥락의 얘기를 했다. - 엄마, 알아요.

 아버지는 지난 일요일에 길을 잃었다. 한밤중에 어떤 이유로 신정동까지 걸어 갔는지 모르겠다. 오늘 엄마 얘기를 들어보니 엄마랑 아버지가 통화할 때 아버지 주변에 있던 친절한 이웃이 신월1동 파출소를 - 동네에서는 길을 잃어 버리지 않으니까. 혹은 엄마랑 통화 안했으면 어떻게든 걸어서 집으로 돌아왔을지도 모른다. - 목적지로 택시 태워줬다고 한다. 지금은 시도조차 못할 일이지만 예전에 경기도 오산에 혼자 가다가 지하철인지 버스인지 잘못타서 길을 잃은 적이 한 번 있다. 아버지가 치매 걸리고 길을 잃은 게 엊그제 케이스까지 공식적으로 두 번이다. 기록해둔다. 걱정된다.

 인지검사 선생님이랑 상담하고 - 인지검사 선생님이 갑자기 보호자가 바뀐일로 당황하길래, 저 아주머니는 이혼한 전처라고 말해줬다. - 셋이 병원 근처 식당에서 밥을 먹었다. 셋이 밥 먹을 때마다 아버지랑 엄마 이혼하던 날 생각이 난다. 셋이 밥 먹는 거 오랜만인데 별 감흥이 없었다. 나랑 엄마랑 둘 다 아버지에게 지친 탓이다. 엄마가 맛없다 해서 그런지 맛있게 먹은 내 결론도 맛 없는 한 끼였던 게 됐다. - 엄마의 말 한마디, 그 영향력을 생각한다. - 나는 아버지에게 배부르면 그만 드시라고 했고 엄마는 그 반대였다. 아버지는 처음엔 배 부르다고 밥을 남겼다가 엄마 얘기에 꾹꾹 눌러담은 밥 한 공기를 다 먹었다. 이게 더 깊은 애착의 힘인가?

 밥 먹고 아버지 담당 선생님 만났다. 의사는 아버지의 인지능력이 급격히 나빠진 것에 대해 우려를 표하면서 머리 mri를 찍고 결과를 본 후 약을 바꿔보자고 했다. 1년에 3점 정도 떨어지면 보통이라고 하는 30점 만점짜리 인지검사에서 오늘 아버지는 9점을 받았다. 2년 전에는 19점. 1년 전에는 17점이었다. 의사 선생님이 아버지의 치매 치료(?)에도 건강보험 산정특례를 적용해줬다. 우리 아버지, 나도 엄마도 모르는 사이에 작년 이맘때보다 훨씬 이름없는 식물같은 사람이 됐네. mri는 오늘 못 찍고 촬영 동의서만 썼다. 19일 아침 7시 30분에 촬영인데, 동생이 시간 된다고 해서 동생에게 맡겼다. 다행이다. 오늘은 피검사 소변검사 심전도 검사를 순서대로 했다.

 검사실 옮겨 다니다가 아버지 가방이랑 목도리를 엠알아이 촬영 동의서 쓴 곳에 두고 왔다. 그 사이에 아버지 약 사러 갔던 엄마는 신용카드를 약국에 두고 왔다. 두 건 다 빨리 알아채고 찾아오긴 했지만 누가 누굴 돌보는건지, 심각하다.

 병원 나와서 오목교역 근처에 신한투자증권에 갔다. 엄마가 갖고 있는 증권계좌 정리가 목적이다. 엄마가 창구 직원에게 증권계좌가 있는 유래에 대해서 구구절절 설명하려고 하길래, 내가 이 사람(엄마) 명의로 증권계좌가 있는지 있다면 정리하고 싶다고 말했고, 그 다음 진행은 일사천리였다. 오늘 한 일 중에 꽤 잘한일이다. 오래전에 집에 돈이 하나도 없을 때, 동생 등록금 마련한다고 80년대부터 갖고 있던 포항제철 주식 팔기 위해서 증권회사에 엄마랑 같이 온 적 있다. 그때 생각이 났다. 그때 포철주식 판 돈이 딱 동생 등록금이 었다고 엄마가 말해줬다. 그때 엄마 나이가 지금 내 나이보다 어리다.

 엄마는 이모가 입원해있는 병원으로 돌아가고 나는 아버지를 데이케어센터에 데려다줬다. 기차 시간이 남아서 친구한테 들렀다. 이 친구 엄마가 우리 엄마랑 동갑인데, 폐에 종양이 두 개 있고 두 달 후에 그 종양이 얼마나 커지는지 봐야 암인지 아닌지 알 수 있다고 한다. 나이 먹고 손상되는 내장을 생각한다. 손상되지 않는 삶이란 무엇인가? 나도 가끔 위축성 위염이 찾아오면 소화가 안되는 기분과 함께 가슴이 답답한 증상이 온다.

 낮에 만난 친구한테만 얘기하고 말까하다가 여기 적는다. 아버지 소변검사 하는데, 오래 걸렸다. 좌변기가 있는 화장실 한 칸에 들어가서 내가 시범을 보여주고 나서도 한참 후에야 아버지가 소변검사를 이해했다. 아버지랑 나랑 음경 모양이 닮았다. 씨발 핏줄. 이런 생각을 했다. 친구 아버지는 돌아가신지가 10년이 넘었는데, 친구도 어느날 아버지랑 본인 음경이 닮은 걸 알았다고 한다. 씨발 핏줄. 한 번 더 생각했다.    

 청량리역에 앉아서 쓰다가 집에 돌아와서 마저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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