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오랜만에 자전거로 한강엘 다녀왔다.
오늘 이런 생각이 들었다.
사람의 걸음걸이 보다 조금만 이동속도가 빨라져도 사람은 풍경을 잃는다.
음악의 리듬에 맞춰서 자전거 페달을 밟고 있노라면 강가에서 낚시하는 사람들도 벤치에 앉아있는 아빠와 딸의 뒷모습도 빠르게 스쳐지나갈 뿐이다.
얼마전에 아파서 몸에 기운이 없을 때가 있었는데, 그때 노인들이 자전거 페달을 천천히 밟는 이유를 알았다. 빨리 밟을 수 있는 힘이 없기 때문이다.
젊은이들의 걷는 속도보다도 느리게 이동하는 대신 노인들의 자전거는 느린 속도로 세상을 본다. 물건값을 계산하는 슈퍼마켓 주인도 거리를 가득 메운 사람들의 표정들도 모두 자전거 주인들의 안쪽까지 깊숙히 들어온다. 아마도 그렇기 때문에 노인들이 세상을 보는 눈이 깊지 않나 싶다. 살면서 쌓아온 지혜에 관찰하고 싶지 않아도 저절로 관찰하게 되는 것을 더하면 관록이나 혜안 같은 것이 되는 것이 아닐까?
나는 무조건적으로 풍경과 함께 살고 싶다. '가급적' '되도록' 같은 흐리멍덩함은 버렸다.
어떻게 살아야겠다(최저소비, 느리게 느리게, 생활은 편하게, 일은 빡시게)는 마음가짐이 확실하기 때문에 내려가서도 만족하면서 살 수 있을 것 같다.
간만에 근거없는 자신감을 드러내버렸다.
그것이 필요한 시점이다.
p.s 지난주에 신문에서 '아날로그는 풍경이 될 수 있지만 디지털은 풍경이 될 수 없다'는 김선우 시인의 글을 읽었다.
오늘 이런 생각이 들었다.
사람의 걸음걸이 보다 조금만 이동속도가 빨라져도 사람은 풍경을 잃는다.
음악의 리듬에 맞춰서 자전거 페달을 밟고 있노라면 강가에서 낚시하는 사람들도 벤치에 앉아있는 아빠와 딸의 뒷모습도 빠르게 스쳐지나갈 뿐이다.
얼마전에 아파서 몸에 기운이 없을 때가 있었는데, 그때 노인들이 자전거 페달을 천천히 밟는 이유를 알았다. 빨리 밟을 수 있는 힘이 없기 때문이다.
젊은이들의 걷는 속도보다도 느리게 이동하는 대신 노인들의 자전거는 느린 속도로 세상을 본다. 물건값을 계산하는 슈퍼마켓 주인도 거리를 가득 메운 사람들의 표정들도 모두 자전거 주인들의 안쪽까지 깊숙히 들어온다. 아마도 그렇기 때문에 노인들이 세상을 보는 눈이 깊지 않나 싶다. 살면서 쌓아온 지혜에 관찰하고 싶지 않아도 저절로 관찰하게 되는 것을 더하면 관록이나 혜안 같은 것이 되는 것이 아닐까?
나는 무조건적으로 풍경과 함께 살고 싶다. '가급적' '되도록' 같은 흐리멍덩함은 버렸다.
어떻게 살아야겠다(최저소비, 느리게 느리게, 생활은 편하게, 일은 빡시게)는 마음가짐이 확실하기 때문에 내려가서도 만족하면서 살 수 있을 것 같다.
간만에 근거없는 자신감을 드러내버렸다.
그것이 필요한 시점이다.
p.s 지난주에 신문에서 '아날로그는 풍경이 될 수 있지만 디지털은 풍경이 될 수 없다'는 김선우 시인의 글을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