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에 1년 만에 왔다. 너무 오랜만에 와서 낯설었지만 아기 젖소 두 마리를 보고 낯선 느낌이 금방 풀려 날아갔다.
작은 어머니랑 할머니에게 갔다. 작은 아버지 탈장 수술을 기점으로 할머니는 시설로 옮겨졌다. 치매에 걸린 노인은 옮겨진다는 사실이 무척 슬프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임을 안다. 자식들이라고 해도 오래 함께 있지 않은 사람들이 그것에 대해서 어쩌구 저쩌구 하는 꼴은 별로다. 아버지와 아버지 형제들이 그렇다는 얘기는 아니다. 아버지, 고모, 삼촌들은 오히려 너무 덤덤한게 문제라면 문제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어제 생에 최초로 노인 보호 시설에 갔다. 강릉 시내의 한 건물의 한 층에 22분의 노인들이 함께 생활하고 있다. 어느 영화에서 본 것과 비슷한 광경이 펼쳐져 있다.('벼랑위의 포뇨'의 초반에 노인 보호 시설이 나오는구나...) TV가 있고 몸을 가누실 수 있는 분들은 소파에 주르륵 앉아 계신다. 우리 할머니처럼 치매가 완전 심하신 분들도 있고 정신은 멀쩡하신데, 몸이 많이 불편하신 분들도 있다. 분위기를 보니 주로 치매가 심하신 분들이 많으셔서 노인들 사이의 원활한 의사소통은 전혀 없는 듯 했다. 할머니가 작은 어머니도 나도 못 알아보시는 사이에 할머니 옆에 앉아 있는 할머니는 계속 혼자서 중얼중얼 하셨다. 일 하시는 언니는 참으로 좋은 사람같았다.(나는 좋은 사람이 아니고서야 웃으면서 노인들을 돌보는 일을 할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갇혀 있어야 하는 그 공간 자체가 너무나 참담했다.
오늘도 작은 어머니와 함께 시설에 가서 할머니를 모셔왔다. 함께 점심을 먹었다. 나랑 삼촌은 식사후에 서울로 출발했고, 할머니는 하룻밤을 본인 집에서 주무시고 내일이면 다시 시설로 돌아가신다. 그런 과정이 너무나 자연스럽다는 사실이 또 머리를 묵직하게 했다.
낮시간 TV 광고를 절반씩 차지하고 있는 상조광고와 보험광고, 노년에 편안한 삶을 위해서(좋은 시설에 들어가기 위해서?) 돈을 모으는 사람들, 이제 돌아가실 때까지 못 볼지도 모르는 우리 할머니....
할머니가 아버지의 계모인 관계로 엄마는 할머니가 나와 동생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나랑 20살 차이가 나는 막내삼촌의 아이들을 대하는 할머니의 모습을 봤던 나의 20대 초중반에는 나도 엄마 말이 맞나 생각했었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아주 어렸을때부터 시골집에서 서울로 출발할 때, 항상 우리 강아지들 잘 가고 또 오라고 하면서 동네 어귀까지 따라나오시며, 나와 동생에게 쌈짓돈을 쥐어주셨던 분이 우리 할머니였다. 할머니의 근검절약적인 생활과 시골에서만 살았던 생활상을 생각해 볼 때, 할머니 주머니에서 나오는 배춧잎들이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음을 이제는 확실히 알겠다.
하지만 지금의 할머니는 강릉의 작은 아버지 말고는 누구도 알아보지 못한다. 자꾸 이 사람은 누구냐고 할머니에게 묻는 것은 그만두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강릉의 작은 아버지는 나와 생각이 같은지 할머니와 함께 하는 내내 그런 질문을 하지 않았다.
이번 강릉행에서 작은 아버지, 작은 어머니가 내 계획에 적극 찬성해 주셔서 많은 힘을 받았다.
지후의 최근 포스팅도 내게 많은 힘이 됐다.(현재를 저당잡힐수야 없지...)
DS도 무척 고맙다.
아마도 곧 서울을 떠날듯하다.
작은 어머니랑 할머니에게 갔다. 작은 아버지 탈장 수술을 기점으로 할머니는 시설로 옮겨졌다. 치매에 걸린 노인은 옮겨진다는 사실이 무척 슬프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임을 안다. 자식들이라고 해도 오래 함께 있지 않은 사람들이 그것에 대해서 어쩌구 저쩌구 하는 꼴은 별로다. 아버지와 아버지 형제들이 그렇다는 얘기는 아니다. 아버지, 고모, 삼촌들은 오히려 너무 덤덤한게 문제라면 문제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어제 생에 최초로 노인 보호 시설에 갔다. 강릉 시내의 한 건물의 한 층에 22분의 노인들이 함께 생활하고 있다. 어느 영화에서 본 것과 비슷한 광경이 펼쳐져 있다.('벼랑위의 포뇨'의 초반에 노인 보호 시설이 나오는구나...) TV가 있고 몸을 가누실 수 있는 분들은 소파에 주르륵 앉아 계신다. 우리 할머니처럼 치매가 완전 심하신 분들도 있고 정신은 멀쩡하신데, 몸이 많이 불편하신 분들도 있다. 분위기를 보니 주로 치매가 심하신 분들이 많으셔서 노인들 사이의 원활한 의사소통은 전혀 없는 듯 했다. 할머니가 작은 어머니도 나도 못 알아보시는 사이에 할머니 옆에 앉아 있는 할머니는 계속 혼자서 중얼중얼 하셨다. 일 하시는 언니는 참으로 좋은 사람같았다.(나는 좋은 사람이 아니고서야 웃으면서 노인들을 돌보는 일을 할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갇혀 있어야 하는 그 공간 자체가 너무나 참담했다.
오늘도 작은 어머니와 함께 시설에 가서 할머니를 모셔왔다. 함께 점심을 먹었다. 나랑 삼촌은 식사후에 서울로 출발했고, 할머니는 하룻밤을 본인 집에서 주무시고 내일이면 다시 시설로 돌아가신다. 그런 과정이 너무나 자연스럽다는 사실이 또 머리를 묵직하게 했다.
낮시간 TV 광고를 절반씩 차지하고 있는 상조광고와 보험광고, 노년에 편안한 삶을 위해서(좋은 시설에 들어가기 위해서?) 돈을 모으는 사람들, 이제 돌아가실 때까지 못 볼지도 모르는 우리 할머니....
할머니가 아버지의 계모인 관계로 엄마는 할머니가 나와 동생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나랑 20살 차이가 나는 막내삼촌의 아이들을 대하는 할머니의 모습을 봤던 나의 20대 초중반에는 나도 엄마 말이 맞나 생각했었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아주 어렸을때부터 시골집에서 서울로 출발할 때, 항상 우리 강아지들 잘 가고 또 오라고 하면서 동네 어귀까지 따라나오시며, 나와 동생에게 쌈짓돈을 쥐어주셨던 분이 우리 할머니였다. 할머니의 근검절약적인 생활과 시골에서만 살았던 생활상을 생각해 볼 때, 할머니 주머니에서 나오는 배춧잎들이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음을 이제는 확실히 알겠다.
하지만 지금의 할머니는 강릉의 작은 아버지 말고는 누구도 알아보지 못한다. 자꾸 이 사람은 누구냐고 할머니에게 묻는 것은 그만두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강릉의 작은 아버지는 나와 생각이 같은지 할머니와 함께 하는 내내 그런 질문을 하지 않았다.
이번 강릉행에서 작은 아버지, 작은 어머니가 내 계획에 적극 찬성해 주셔서 많은 힘을 받았다.
지후의 최근 포스팅도 내게 많은 힘이 됐다.(현재를 저당잡힐수야 없지...)
DS도 무척 고맙다.
아마도 곧 서울을 떠날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