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을 만나는 것 뿐만 아니라 그 사람들과 함께 밥을 먹고 생활을 하는데도 특별한 위화감이 없다.(잠은 따로 자기 때문일까? ^^; ) 지난주에는 조금은 우울한 날들도 있었는데, 지후는 항상 보고 싶고 동생이 문자로 '잘 안돼 얼른 집에와서 같이 준비하자'고 하기도 한데다가 내려온지 한달만에 식사 당번을 단독으로 맡아서(평균적으로 한 달 정도면 식사당번을 맡는다고 한다.) 수요일 점심과 금요일 저녁을 책임지면서 받은 막중한 스트레스가 더해졌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20여 명이 먹어야 하는 밥과 반찬을 하는 일이 쉽지는 않다. 더군다나 아이들도 있어서 더 부담된다.) 이번주도 식사당번이 제일 걱정이구나 일단 수요일 점심은 고사리와 김치국... 그리고 한 가지가 더 필요하다. 금요일은 저녁이니까 생선 넣은 탕을 끓이면 되고 추가로 나물 두 가지가 필요하다. 아침먹기 전에 일찍 일어나서 부지런히 몸을 놀리면 쑥갓과 상추, 시금치를 지금 딸 수 있다. 재수가 좋은면 내 밥때에 맞춰서 취나물을 뜯는 일정이 잡힐 수도 있다. 그렇지만 아침을 일곱시에 먹는다는 거....ㅡ.ㅡ; (내려와서 한 달 조금 넘는 동안 저녁시간은 30분 늦춰졌고, 아침 시간은 30분 당겨졌다.) 수요일은 내일 모레니까 수요일 오전에 생각해야겠다.

어제 지후랑 한참 통화했다. 나는 기분좋은 술자리를 마치고 취했는데, 수화기 너머로 눈물자국이 남아 있는 당신의 목소리를 듣는 일을 마음이 아팠다. 보고 싶다고 사랑한다고 내려오라는 말 밖에는 할 수 없는 내 마음이 만든 벽 때문에 조금 힘들어졌다.

오늘은 비도 오지 않는데, 특별한 일이 없어서 오랜만에 자유시간(초코바 이름 정말 잘 지은 듯...)이 주어졌다. DS와 통화했는데, 오늘 내일 논다고 내려오겠다고 했다. 별 생각없이 그러라고 했다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DS가 자고 갈 곳도 없고 오늘은 자유로운 날이고 친구가 찾아왔으니 잠깐 밖에 나가서 저녁 좀 먹고 오겠습니다라고 나 보다 이곳에 내려온 것이 오래된 식구들에게 말하기가 조금 거시기 해서 풀어놓은 산양과 소를 우리에 넣고, 닭 모이도 줘야하는 등의 일로 DS의 방문을 거절해버렸다. 그런데 모처럼의 휴식을 맞아서 몇몇 사람들은 점심을 먹고 전주영화제에 가 보겠다고 나갔다. 그러니까 나는 스스로 내가 아직은 모든일에 미숙하고 배우는 입장이기 때문에 남들이 봤을 때, 튀는 말과 행동을 자제하자는 마음의 벽을 만들어 버려서 지후에게는 섭섭한 남자가 DS에게는 섭섭한 친구가 돼버렸다. 막상 실제 생활에서는 그렇게 주눅들어 있는 것은 아닌데(실제로는 무척이나 즐겁다.) 마음 한 구석에 그런 찝찝함이 있다고 생각하니 나 스스로에게 조금 거시기 하다. 그래서 정말 보고 싶을 때는(물론 아주 주요한 농사일과는 겹치지 않는 선에서) 지후를 보러 가야겠다고 결심했다. 마음이 홀가분하다.

이런 대화들이 있었다.
S누나와의 대화 - 일은 재미 있어요? 재미 있습니다 재미 없으면 계속 있지 않을 것 같은데요. 재미 없어도 있을 수는 있지.
I형과의 대화 - 설령 도피하는 기분으로 내려왔다고 하더라도 하루하루가 즐거우면 되는거 아닐까요? 그렇지는 않은 것 같어.

구체적으로 계획을 세운것은 아니지만 농사를 짓고 살아야겠다고 결심을 했다. 작은 아버지는 아이템을 정해서 내년에 내려오라고 한다. 그래서 나는 몸과 마음을 농민으로 단련하기 위해서 이곳에 왔는데, 이곳에서는 밥도 주고, 담배도 주고, 술도 주고, 정통(?) 유기농을 배울 수 있는데다 아이들이 있어서 즐겁고 소년, 소녀 친구들과 함께 하는 시간들도 너무나 즐겁다. 그리고 나는 어떤일이든 순간순간 충실한 기분이 되어서 열심히 하고 있다. 이런 즐거움들과 함께 이곳에 있다가 올해 농사가 끝나고 내년이 되면 나는 강릉으로 갈 수도 있고(나는 강릉땅이 좋다.) 이곳에 남을수도 있고 아니면 다시 도시생활을 할 수도 있다. 또 내년까지 가지 않더라도 당장 누군가와의 극심한 트러블로(가능성 극히 낮음) 오늘 저녁에 이곳을 떠날 수도 있다. 그러니까 나는 계속해서 삶의 방향을 잡고 있는 중이다. 지후야 그러니까 천천히 생각하자.

지난주에 가장 즐거웠던 일 - 이곳에서 소를 한마리 키우는데, 암소이고 이름은 문근영이다. 내가 담당자는 아닌데, 하늘에서 비가 막 내리기 시작하고 근영이 담당자가 보이지 않길래 영주(9살아니면 10살이다.)랑 근영이를 풀 뜯어 먹으라고 매어 둔 곳까지 달려가서 말뚝에 묶어놓은 줄을 풀고 떨어지는 비를 맞으며 근영이를 끌고 돌아오는데, 비를 처음 맞아보는 근영이가 당황했는지 겁나게 달리기 시작해서 천천히 걸어서 5분 정도의 거리를 근영이 목에 맨 줄을 잡고 영주와 함께 신나게 뛰었다. 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기분 상으로는 세상에서 가장 파란 하늘이었을 것 같은 느낌이랄까.... 많이 즐거웠다.

어제 살짝 당황했던 일 - 어제 머리를 감았다. 머리는 정말 감아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하게 들때만 감기로 했기 때문에 며칠만인지도 모르겠다.(내려와서 머리감은게 어제부로 세번째다. 물론 속옷은 그 보다는 자주 갈아입는다.) 그런데 대야에 머리를 담궜던 첫물에 기름이 뜨는 것이 아니라 물반 모래반으로 변해있는 것이었다. 모래가 잔뜩 묻은 양말을 빠는 기분으로 머리를 빨았다. 흙의 소중함을 아직까지는 잘 모르지만 천천히 알아가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날그날 충실하게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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