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장님

대리운전 기사분들은 처음 보는 나한테 왜 사장님이라고 하나
나 기분 좋으라 그러나
사장 소리 들어도 기분이 좋진 않다
집주인은 세들어 사는 나한테 왜 사장님이라고 하나
본인이 사장님 소리 듣고 싶어서 그러나
주인님이라 불러주면 좋이할까
누구나 다 사장님이 되는 곳
fucking 사장님, 소리 듣고 싶은 우리나라

AND

사랑

다른 누군가를 만났어도
적당히 사랑이라 부르며 살았겠지만
그게 누구든 어떤 사랑이든
당신 만큼은 아니었을거야

-> 오랜만에 사랑

AND

소똥 냄새


여름이 끝나가는 퇴근길
묵지근한 공기에 섞여
차 안으로 들어오는 소똥 냄새
길 양쪽으로 우사라고 부르는 소 사육장
소똥과 메탄가스를 생각하고
명절에는 한 번씩 먹게 되는 소고기를 생각하고
8월이 끝나도록 불같이 뜨거운 날씨와
9월 추석에 먹을 소고기 중에
어느쪽이 내 삶에 더 깊은 관계가 있나
결론이 없는 자주 하는 생각
소똥 냄새가 사라지기 전에

- 유기견 울부짖는 소리 못 살겠다 -
- 개보다 사람이 먼저다. -
- 유기견장 확대 결사반대 -

동물사랑센터 확대 반대 현수막을 지나고
소는 되고 개는 안되나
소는 똥을 싸도 청정지역이고
개가 짖기만 해도 물이 더러워지나
머리 끝까지 차오른 욕을 소똥 냄새 가득찬 차안에 내뱉는다
소는 고기가 되기 전까지 똥을 싸고
주인이 버린 개는 안락사 당하기 전까지 짖고
인간만은 뭘 해도 되는 세상에
나는 내일 출근길에도 이곳을 지난다

AND

태풍후에

불어난 강물
흐린 하늘
포크레인과 백로
운동기구에 매달린 아주머니들
강아지를 데리고 징검다리 앞에 놀러나온 소년과 소녀
개도 깡총 사람도 깡총
반대 방향으로 엇갈리는 노인의 자전거와 아이의 자전거
다시 비가 내리고
돌다리 위로 빠르게 흐르는 강물
물살의 반대쪽으로 부는 바람
몸도 마음도 다리를 건너지 못하는 나

AND

메꽃

메꽃이 피던 자리에 메꽃이 피었네
사랑에 있던 자리엔 사랑이 없네
녹아 흘러가는 여름에 당신 자리도 녹아 내렸네
비 내리고 그 흔적마저 사라졌네
바로 그 자리에 메꽃이 피었네
메꽃이 피던 자리에 메꽃이 피었네
그대가 없어도
나비가 날고 벌이 날고
그 꽃이 사랑이려니 하네

AND

그 여름

남극에 겨울비가 내렸다
능소화가 하늘 앞에 당당히지 못하고
칡넝쿨은 꽃을 피우다 더워 죽었다
껍질을 까고 나온 매미가 말라 죽고
은행나무 잎은 급하게 누레졌다
모든 땀구멍에서 땀이 비오듯 흐르고
손톱 발톱 머리카락에 빨리 자랐다
노인도 아이도 젊은이도
더워 죽고 폭우에 휩쓸려 죽었다
사람들은 적도에 눈이 내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고
우리는 알고 있었다
끝보다 더한 끝도 있다는 것을
그러나 우리는 말 못할 이유로
서로에게 그 사실을 말하진 않았다

AND

냉동 삼겹살을 먹다

오병이어 식당
일요일엔 열지 않을 이름이지만
어째선지 문을 열었기에 냉동 삼겹살을 먹는다
묵은지랑 저민 감자가 좋고
된장이랑 쌈채소도 훌륭하다
두 번째 찾아온 식당
사장님은 내가 다섯 번은 온 줄 안다
둘이 오인분을 먹고
숫자 순서가 바뀌었지만
2와 5는 한통속이니 이것도 기적이라고 한다
예수님은 5와 2로 5천명을 먹었지만
현실에선 7만 6천원이 두 사람을 먹였다
전쟁통이 아니더라도
먹고 사는 게 기적인 줄 알기에
지금 이 순간을 기적이라 한다
7만 6천원의 기적이라 한다

AND

열대야 2

몸에 열이 나네
술 마시고 집에 가는 중이다
바깥은 섭씨 32도
간간히 자동차만 보이는 새벽,
집에 가서
찬물에 씻고 잘 수 있을까

AND

다이어트

보통보다 많이 먹으면 살이 찌고
보통보다 적게 먹으면 살이 빠진다
보통으로 먹고 운동을 하면 살이 빠지고
적게 먹으면서 운동을 하면 살이 많이 빠진다
똥을 많이 싸면 살이 찌고
똥을 적게 싸면 살이 빠진다
많이 먹으면 똥을 많이 싸기 때문이다
가끔 어지러우면 살이 빠지는데
자주 어지러우면 죽을 수도 있다
살이 많이 찌면 뚱뚱한 것이고
살이 많이 빠지면 마른 것이다
어떤 사람은 통통한 게 어울리고
어떤 사람은 마른 게 어울린다
대체로는 마른 사람들이 옷빨이 잘 받는다고 하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티비 탤런트나 모델이 아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뚱뚱하면 뚱뚱한 사람을 좋아한다 하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말랐으면 깡마른 사람을 좋아한다 한다
사람을 좋아하는 건 뚱뚱하거나 말라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 또는 누군가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체중을 감량하기도 하는데
자신을 혐오하게 되거나 사랑에 실패하면 체중 감량이 도루묵이 되기도 한다
그러니,
나를 버리지 말아요 내 사랑

AND

열대야

강가에 사람들이 있다
맨바닥에 또는 돗자리 위에
둘이거나 셋, 많으면 넷이 모여있다
친구이거나 연인이거나 직장동료로 보인다
아이가 함께인 가족도 있다
술에 취했거나 취하지 않았거나 취하는 중이기도 하다
아이스크림을 먹는 연인도 있고
가로등 불빛 환히 비추는 곳에서 오줌을 누는 아저씨도 있다
아이들은 더위를 모르고 뛴다
물이 공기보다 차가우니
공기보다 차가운 바람이
강가의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불어온다
다들 밤의 빛 아래서 어떻게든 생기가 있고
나방도 모기도 활발하다
밤은 전체가 그늘이라 다리 밑은 답답하다
다리 밑에는 사람들을 지켜보는 내가 있다
낮부터 쭉,
내가 있다

AND

2023 홈쇼핑, 리퍼블릭 오브 코리아

모텔 냄새 나는 이불을 덥고
모텔에서 잔다
친구는 방금 집에 갔다
방을 잡아준 친구가 너무 고맙다
사랑인가?
모텔 아줌마는 나랑 내 친구가 연인인 줄 알았다
티비에선 브라자를 판다
남자랑 여자랑 같이,
남녀평등인가?
어디까지가?
여자 속옷을 남녀가 같이 팔면
사랑인가?
나는 미칠 것 같지도 않은데 미칠 것 같다
그래서 미칠수가 없다
누가 정해준 것도 아닌데
그래서
그래서
5 플러스 1 브라자를 반값에 사고
자, 자야겠다

AND

짬뽕을 먹다

해장도 아닌데
혼자서 짬뽕을 먹는다
물과 단무지가 셀프다
조리마저 셀프인 세상에 곧 올 것 같다
짬뽕,
썪였단 뜻이고 썩은 건 아니다
당근양파돼지고기오징어조갯살고춧가루가 국물에 섞여있다
띵동띵동 배달접수 소리 이어지고
홀에는 나와 파리와 짬뽕 그릇 뿐이다
파리를 애써 쫓지 않는다
다들 먹고 살자고 애쓴다
단무지는 너무 짜서 두 개만 먹고 만다
대부분의 삶에는 짠내가 나고
알고보면 짜장면도 단맛보다 짠맛이다
건더기를 다 먹고 국물을 한 모금 들이킨다
재료맛이 안나고 맵고 짜기만 하다
다음엔 오지 말아야겠다
그래도 국물을 한 모금 더 먹는다
짬뽕 곱빼기 만 원, 세월이 그러하지만 비싸단 생각이 들고
삶에도 입안에도 맵고 짠내가 번진다

AND

낙원

사람들이 날 보기만 해도 웃어주는 곳
이름도 나이도 필요없는 곳
슬픈 사람은 있어도 아픈 사람은 없는 곳
혹은, 그 반대인 곳
아무 말 없이 어디든 바라만 봐도
어쩌면 눈을 감고만 있어도 좋은 곳
가물기 전에 비가 내리고 
더워지기 전에 밤이 찾아오는 곳
꽃이 지면 열매가 맺고 
그 열매가 다시 꽃을 피우는 곳
낙원에 가서 살고 싶다
내 옆에 한 사람이 있고
내 손을 잡아줄 그 한 사람이
나와 같은 마음으로 살고 있는 곳

AND

염소탕을 먹다

아내가 몸에 좋은 거 그만 먹고 다니라 했는데
살다살다 염소탕도 먹어본다
염소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보양식으로 개 대신 염소를 먹는다는 것도 아는 어른이다
염소가 새끼를 빨리친다는 얘기며
요즘 염소값이 비싸다는 얘기를 들으며
수육을 먼저 먹는다
따끈따끈 말캉말캉
식당 벽에는 염소 고기의 효능이 붙어있고
나는 세상에 기여한 일 하나 없는데
염소 고기가 이리 맛있어도 되나
간에 좋다는 염소 고기를 소주랑 같이 먹는다
이런걸 상충한다거나 쌤쌤이라 하나
개이득 상황은 아니다
고기가 냉동이 아니라는 주인의 말
그래서 더 맛있다는 동료의 말
몸에 좋다 생각하고 먹으니 진짜 몸에 좋은 것 같고
편의점 김밥을 먹으면서도 그게 몸에 좋다는 생각을 할 수는 있지만
그러지 않는 것이 세상의 룰이고
삼 천 원과 만 오 천 원의 차이가 자본주의다
뽀얀 국물을 보며 우유가 귀했던 시절 얘기를 하다가
친구의 화를 돋운 친구 아내의 구찌 스니커즈 가격이면
염소탕을 몇 번 먹겠나 생각해보고
염소탕 가격이면 굶는 사람들 몇 끼를 먹을 수 있는지까지 갔다가
더 무던해질 것도 없이 나이들어 담담해진 나를
한탄하기 전에
다 잊고자
취해버렸다

AND

설악산에서 차이다

설악산에서 차였다
정상에 가까운 자리에서 
올라가지도 내려가지도 못하고 있다
여름 아래 하늘 아래 나무 그늘 아래 새 소리 아래 뜨겁게 달궈진 바위들 아래
고백한 마음이 민망하다
눈 둘 곳이 발 아래 뿐이다
너에 대한 내 마음은 6월 산보다 무성한데
너는 아기새처럼 내 어깨를 스치고 사뿐히 날아갔다 
포근하소서  포근하소서
자꾸만 자꾸만
정성껏 정성껏
한 발 한 발
네 발자국 위에 내 발을 겹쳐본다

AND

통장과 바다

통장을 보고 좁아졌던 마음이
바다를 보니 넓어진다
생활의 빚은 어쩌지 못해도
마음의 빚은 파도가 부숴준다 포말로
수평선에 시선의 끝이 닿는 것으로
마음 옥죄는 일들 훌훌 털어내고
증발해 날아가버릴 것 같다
친구는 아니라 했지만
나는 안다
망가진 잘못은 내게 있다는 걸
한 무리의 젊은이들이 모래 장난을 한다
나는 뒷걸음질로 바다를 본다
조금씩 멀어지는 건 나 뿐이고
청년들도 바다도 그 자리에 있다

AND

알콜 계열

마시고 반성하고
마시고 반성하고
자꾸 반복해도
술이 좋다

AND



너를 닮은 새를 봤다
작년에도 이맘때 같은 새를 봤다
너는 내 곁에 없다
작년에도 너는 내 곁에 없었다
작은 새는 총총거리며 콘크리트 마당을 노닌다
작은 새는 꼬리를 위 아래로 흔들며 나와 눈이 마주치기도 한다
너는 내 곁에 없다
너는 내 곁에 없을 것이다
작은 새는 벌레를 잡아서 어딘가로 날아간다
집으로 가나보다
나는 집이 없고
너는 내 곁에 없다
작은 새는 돌아오지 않았다
죽은 새는 말이 없다
너는 영원히 내 곁에 없고
나는 그 시간만큼 아무말이 없다

 

AND

그 여름

물에 잠긴 징검다리에서 아이가 실종되고
사람들은 빗속에서 아이 이름을 불렀다
새들은 다리 아래 숨어서 울었고
어떤 물고기들은 다리 위에서 살고자 펄떡 거렸다
아이는 집에 있었고
머리 위 창문을 흐르는 비를 바라보며
밤새 혼자 엄마를 기다렸다
아이는 울지 않았다
엄마는 아이를 모질게 때렸다
사람들은 안도했고 아이는 울지 않았다
엄마는 아이에게 라면을 끓여줬고
집에는 쌀이 없었다
다음 태풍에 동네는 비에 잠겼다
엄마는 울었고 아이는 울지 않았다
올림픽도 시위대도 없었던 잊혀진 그 여름의 끝에
물이 빠져 갈비뼈처럼 앙상하게 드러난 징검다리 주변에서
아이들은 개구리를 죽이며 놀았고
나는 끝내 울지 않았다

AND




봄에 파묻혔다
솟아 오르고 피어 오르는
어린 잎과 꽃 향기에

멀리서 불어온 바람이 머리 위를 지난다
그 소리만 들어도 신나고 좋다
신나게 놀고 싶은데
봄에 파묻혀서 빠져나갈 수가 없다

함께 신난 사람이 옆에 없다
이런 내가 가엽진 않다

봄의 바깥으로 머리를 들이밀며
다음 계절을 기다린다

나도 불쑥 솟아 오르기를
언젠가 피어 오를 당신을 기다린다

AND

오늘은 반짝반짝 날이야
햇살이 반짝
나뭇잎이 반짝
민들레가 반짝
개미들도 반짝
너도 반짝
나도 반짝
반짝반짝
살아있는 날이야
달이 반짝
별이 반짝
발걸음이 반짝
밤공기도 반짝
너도 반짝
나도 반짝
그리고
넌 나의 반쪽

AND

봄 밤

강 건너
시작하는 연둣빛 버드나무 이파리 뒤로
붉은 꼬치구이 술집 간판 보인다
징검 다릴 건너 그곳에 가서
오래된 주인 아주머닐 만날까
바다쪽으로 내리 걸으면 그리운 집인데
정작 내 발걸음은 강물을 역행하고
무심코 들여다본 강물엔 흔한 내가 흔들린다
미풍에 실려 바람의 끝에 닿고
그곳에서 또 다른 바람에 실려 가기를 반복하면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모든게 거짓이었던 것처럼
꿈이었던 것처럼
마치 아무일도 없았던 것처럼
운동화 위에 작은 나뭇잎 하나 떨어지고
빌걸음이 무겁다

AND

그는​

그는 대학 졸업 후에 바로 공기업에 입사했고
게임, 영화, 사진 같은 취미가 유행따라 있었고 
중산층 소리를 듣고 살았다
스스로 이 정도면 잘 사는 거라고 생각했으나 
46살이 되던 해에 심정지로 죽었다
장례식장엔 직장 동료와 친구들이 많았다
갑자기 그럴 수 있는 나이라고 얘기하며 국밥을 먹은 친구들 중에 둘이 같은 해에 죽었다
아내와 두 딸, 약간의 재산 혹은 대출과 사망 보험금이 남았다
그의 이름이 들어간 통장과 주식잔고는 정리됐지만
이메일과 SNS 계정은 여전히 살아 있다
그가 없이도 세상은 실체로 굴러가고 
그의 이름은 실체도 없이 세상에 뒤섞여 있다
잊혀진 후에도
 

 

> 갑자기 죽는 일을 자주 생각한다.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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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

전원이 꺼져있는
아버지의 전화기
아버지의 머릿속
아직은 꺼지지 않은
아버지에 대한 마음

AND

얼룩말과 치킨

얼룩말을 봤다
주택가 골목에서
치킨 배달을 마치고
오토바이에 앉아서
눈이 마주쳤다
얼룩말이 울었다
얼룩말은 유유히 사라졌다
흰색과 검은색
내 삶에 두 줄을 새기고
결국 붙잡혀서 동물원으로 돌아갔다
나는 태연히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와 치킨을 먹었다
후라이드와 양념
닭은 두 줄을 남기고 죽었다
사람들이 얼룩말을 응원한다는 뉴스를 보면서
죽은 닭을 생각했다
나도 얼룩말도 SNS를 안한다
나도 얼룩말도 외롭다
나도 얼룩말도 살아있다

AND

춘분 무렵

정이드니 꽃이 피네 술집이 가게 이름처럼 활발히 영업중이다
초등학교 교문 너머 오래된 히말라야시다 나무 아래 아이들 웃음소리 맴돈다 
저수지 둘레 산책로에선 올해도 개구리 울음 소리 들리고
바다와 이어진 강 끝에선 어부가 익숙한 태로 그물을 던진다
볕 좋은 골목 끝에 나란히 앉은 노인들의 표정이 온화하다
그 노인들에게 안녕하세요, 인사를 건네는 내 마음도 푸근하다
작년 봄 담장 너머에서 나를 반기던 그 개가 살아 있어서 기쁜 날이다
다들 살아있으니 좋은 시절이다

AND



봄이 오고 있지만 썩 잘 되고 있는 건 아니다
다들 그렇겠지만 내가 썩 마음에 드는 건 아니다
누군가를 생각하면 마음이 썩 좋지 않거나 썩 안좋다
그게 사랑이 아닌 건 아니다
사랑엔 썩을 붙이기가 애매하다
그렇다고 내가 극단주의자는 아니다
썩 잘되고 있는 것 같지 않지만
살았으니까
썩지 않고 산다

AND

공포

썩은 빗방울이 떨어지고
기차는 출발한다
사람들은 다들 겁에 질려있거나
무언가에 홀려있다
커피를 끝까지 마신다
컵 바닥에 커피 가루가 남았다
드문드문
마음이 삶에 완전히 녹아들지 않았지만
기차는 달린다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기 시작하고
나 혼자만 조용히 창 밖을 본다
먼 하늘 끝까지 어둡다
빗소리가 한 방울씩 마음을 때리고
마음이 썩어 내린다
아프지 않다
체계도 이유도 없이
사람들은 모두 잠들었다
기차는 멈추지 않고
나는 영원히 깨어있다

AND

종합병원에서

휠체어에 앉은 아이 얼굴이 희고 야위었다
태어나 10년을 살지 못한 얼굴
힙겹게 고개를 젖혀 아빠, 하고 부른다
아이를 내려다 보는 어른의 얼굴도 수척하다
휠체어를 잡은 어른의 손이 떨린다
70년을 넘게 산 아버지 손을 잡고 그들을 지나친다
일을 오래 쉰 아버지 손이 희고 부드럽다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아버지, 하고 부른다
아버지는 아직 내 이름을 잊지 않았다
언젠간 내 얼굴도 잊을 것이다
나보다 어린 아이 아버지와 그 아이보다 어린 내 아버지
두 개의 세월이 무심히 스치고
다들
울고 있지 않은데 울고 있다

AND

아직은 아무일도
어제는
이렇게 먹는게 생에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오징어회랑 소주를 마셨고
오늘은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 날이다
오징어 씨가 말랐다는 소식이 들려도 아직은
세상 어딘가에선 오징어가 잡히고
소주값이 너무 올랐다는 투정을 들어도 아직은
술값 걱정없이 횟집에 가기도 한다
아직은
몸이 크게 아프지 않고
퇴근하면 잘 곳이 있고
먹을 것이 없어서 걱정하지 않고
함께 떠들 사람이 주변에 있고
혼자 있을 땐 책을 읽거나 드라마를 보기도 하고
울적한 날은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인생탓, 세상탓, 사람탓 하며 살아도 
아직은
아무일도
없다
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