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선구이를 먹다 - 임연수 -

임연수를 굽는다
해산물의 원산지를 읽으러 간 마트에서 값이 싸서 샀다
누군가에 의해 먹기좋게 손질되고
플라스틱 포장에 랩을 씌우고 원산지와 가격까지 붙인
러시아산 해동 임연수 소금은 국내산
중반부로 향해가는 21세기의 증명일 뿐이니
가격표를 보고 오늘 아침 9시에 해동했다는 사실까지 알 수 있다는 사실에
절망하진 말자
임연수는 이면수 어느 동네에서는 새치라고도 부르고
먹을때마다 생각하는 건 아니지만
가끔은 생각나기도 하는 연수는 옛 애인의 이름
러시아에서는 형편이 어려워 못 사 먹는 사람도 있을
임연수 네 덩어리를 아내랑 맛있게 먹는다
삼 천원 어치 죄책감이 사라진 접시엔
약간 탄 지느러미와 뼈,
통칭 비린내라고 하는 생선 냄새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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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까스를 먹다

밤으로 가는 시간
늦은 해장으로 돈까스를 먹는다
혼자 온 손님은 나뿐이고
맞은편의 젊은 부부는 아이에게 고기를 잘라 준다
수프 깍두기 된장 단무지가 먼저 나온다
- 이것 참 한국적이군
이어서 돈까스 두 쪽이 나온다
- 돈까스도 나만큼 외롭진 않군
한 개를 급하게 먹는다
이제 좀 공평하다
어제는 술을 마시기 위해서 술을 마셨다
삶이 순탄치 않을 때마다 그렇게 된다
기억을 잃도록 마셔도 바뀌는 건 없으므로
다음날은 뭘 먹어도 해장이 된다
해장 돈까스 해장 햄버거 해장 라면
해장에 고기의 때가 묻지 않은 음식이 없다
- 깊게 생각하지 말아야지
칼을 움직일 때마다
어디 부딪쳤는지 모르는 손등의 멍이 얼얼하다
어제 술상대를 해준 청년에게 질투를 느꼈던가
나는 그이에게 오만하게 굴었던가
튀김옷과 돼지고기가 따로 노는 돈가스를 내 생활에 비유하고 싶진 않다
- 이러니 저러니 해도 맛있군
잘 먹었다는 인사는 거짓이 아니었으니
그거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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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정상

내 숨소리와 바람소리
거친 숨 잔잔해지면
어디선가 이름모를 새 울음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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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스키를 먹다

위스키를 안 마셔봐서
위스키같은 게 뭔지 몰랐는데
당신과 어긋나게 앉아서
멀리 물 너머의 불빛을 바라보며
위스키를 마시는 지금이
위스키 같은 봄밤이구나
소주를 마시면 소주같고
맥주를 마시면 맥주같은
막걸리를 마셔도 상관없을
그렇지만 위스키를 마시는
일렁거리는 봄밤이구나
너는 잡히지 않는 사람
봄은 다가오다 사라지는 계절
목도 가슴도 타오르는 밤
그저,
위스키만 마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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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고기를 먹다

강원도 강릉
마포라는 간판이 붙은 고깃집
육식은 세계 공통
뉴욕이면 어떻고 모스카우면 어떤가
맛있다고 소문난 집에 와서
주먹 모듬을 시킨다
주먹고기란 말도 뒷고기란 말도 모듬이란 말도
이상하게 정이가는 말이다
숯불이 들어오고
돼지 껍데기도 구워주는 정성
고기를 구워주는 사장님은 무슨죈가 생각하지만
빛인지 어둠인지 모를 인생
지금 이 순간만이라도 대접받고 싶다
사장님은 테이블 사이를 오가느라 바쁘고
테이블마다 솓구치는 소줏잔이 바쁘다
술 사주면 형이라는데
항상 술을 사주는 형이랑
그래서 나이로도 형이지만 항상 형인 사람과
두 시간 후면 잊을 말을 떠들며 술을 먹는다
- 고기는 죄가 없어요
- 언젠간 내가 형의 형이 될게요
명칭도 모르는 고기 앞에서 되지도 않는 말만 떠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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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술을 먹다

크림 새우에 연태 고량주를 먹는다
세상과 상관없이 당장 눈 앞이 호화롭다
옛날에 좋아하던 사람이랑 이렇게 먹었댔다
그이는 결혼을 했고
지금은 지금 좋아하는 사람이랑 먹는다
하얀 병에 담겨 있어서 하얀술이라 불렀던 술
이름에 연태가 들어가는 이유를 모르는 술
크림 새우도 왜 크림 새운지 모른다
갑자기 그 유래를 아는 명태가 떠오르는 건 왜일까
한 잔 마시니
식도까지 열대의 과일향이 타고 내려간다
- 아 좋네요
- 예 좋네요
아 좋고 예 좋으니
뭐가 좋은지 묻지도 않는 게 사랑일까?
안주로 나온 새우가 몇 마린지 세지 않고 먹는 지금이 그때보다 여유롭지만
사실은 그때가 더 좋았을까
의심하지 않는 것이 사랑이지만
사실은 의심하는 것이 사랑이고
마스크를 턱에 걸치고 술을 먹는 세상이라도
살아야 사랑도 하니
하얀술을 먹는 지금이 사랑이다
그 사람 생각을 해도 지금은 눈앞의 당신이 사랑이고
거리낌 없이 하얀술을 한 병 더 시킬 수 있는 지금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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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자를 먹다 - 적절한 식사

아버지 머릿속을 찍은날
아버지랑 피자를 먹는다
단 둘이 피자 먹은 일을 새겨두고 싶은
내가 먹자고 했고 아버지도 좋다고 했다
2인 세트라는데 파스타까지
좀 많은가 싶었는데 다 먹었다
남은 한 쪽은 아들 먹으라해서
내가 좀 더 먹었다
혈연의 증명을 배부름으로 할 필요는 없지만 과식했다
아버지랑 나 사이는 과했던 적 없이 모자라기만 했다
뭐가 모자랐을까
뭔가는 모자랐고
그 모자람은 과했을까
하여, 과한 것도 모자란 것도 문제다
과함이 모자란 삶을 살던 아버지는
모자람이 과한 사람이 됐다
모자람과 과함은 같은 말
그 반댓말은 적절함
적절할 수 있다면 적절하고 싶다
허나, 적절하다는 건 잘난놈들의 후일담
그러니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은 지금이
내 생애 적절한 순간인지도 모른다
눈 앞의 먹을것에 집중하지 못한채
기억을 잃은 사내와 기억하고 싶은 사내의 식사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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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어조림을 먹다 - 헤어진 사랑

엄마, 아버지, 나
셋이 앉아서
고등어조림을 먹는다
혼자사는 아버지 집에서,
아버지는 방금 했던 말도 기억 못 하는 사람이 됐고
어머니는 여전히 사랑스럽다
30년 전에 한 그릇 천 오백원 하던 순대국 먹던 얘기랑
그 집 다대기가 좋았단 얘기를 들으면서
희미하게 기억나는 그때 그 식당 아주머니는 이미 세상에 없겠구나 생각하면서
십년 전에 이혼했으니 당신과 나는 남이란 얘기를 하는 엄마가
경기도 오산에서 서울 신월동까지 냄비째 끓여온 고등어 조림은
사랑인가, 헤어진 사랑인가 생각하면서
두 사람 이혼 하던 날 셋이 함께 먹은 육천원짜리 순대국을 생각하면서
아버지의 치매와 엄마의 우울증
힘든날이면 정신을 잃도록 술을 마시는 나
가족력 같은 걸 생각하면서
양념이 잘 스며든 뜨거운 무를 씹고
양념이 묻지않은 생선의 흰 속살을 크게 한 입 베어 문다
고등어는 비리고
먹고 사는 일은 그보다 더 비리고
그래서 온갖 양념이 필요하고
그 양념이 헤어진 사랑인가
온통 질문 뿐이지만
밥 한 그릇 금방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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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사시미를 먹다

먹는 게 사랑이라면
인류는 사랑으로 가득차서 걷잡을 수 없었을텐데
당신과 육사시미를 먹고 생각했다
당신은 처음이라고 했지만
날카로운 소고기를 두 점 먹었다
나는 먹고 싶었던 것이기에 나머지를 맛있게 먹었다
사랑입니까
당신은 아니라고 했다
그럼 무엇입니까
당신은 또 아니라고 했다
아무것도 아닙니까
당신은 모른다고 했다
이 소고기의 죽음은 무엇입니까
당신은 고개만 저었다
사랑도 아니고
그래서 아무 것도 아닌날에
사랑입니까 사랑입니까 되묻는 날에
얇게 저민 육사시미를 사랑처럼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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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두과자를 먹다

1호선 청량리역 승차장 가판대
세 개에 천 원 짜리 약과랑 한 망에 천이백 원 짜리 구운계란 사이에
계란과 우유로만 반죽해서 차가운 상태에서도 굳지않고 부드러운
무방부제 무색소
8개 이천원짜리 호두과자를 먹는다
고급진 호두과자 전문점도 많고
온갖 빵과 과자가 넘쳐나는 세상에
고속도로 휴게소도 아닌 곳에서
누가 사 먹을까 싶던 호두과자를
내가 사 먹는다
좋아하지도 않고 맛있다 생각해 본 적도 없는 호두과자를
세상에서 가장 소외된 호두과자를 먹는다
하나 먹으면 물리는
두 개 먹고 남은 여섯개를 차마 못 먹는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호두과자를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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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자

팔자가 늘어졌다
떵떵거리며 사는 놈들을 생각하면 이런 생각이 들리없는데
하루 벌어 하루 살아가는 사람들만 생각하니
4월 바람부는 일요일 오후
막연히 바다를 향해 걷는 내 팔자가 늘어졌다
며칠전 앞도 뒤도 없는 삶에 대해 누군가 말했고
그렇더라도 살아있다면 무언가는 있을텐데
내 앞은 어디고 내 뒤는 어딘가
앞은 바다 뒤는 집 집은 생활 생활은 팔자
강따라 곳곳에 자리잡은 강태공들마냥
개 데리고 산책 나온 앞에 걷는 아주머니마냥
멀리서 함성을 지르는 축구하는 사람들마냥
주책없이 피어오르는 푸른 잎들마냥
앞도 없고 뒤도 없는 파도마냥
내일도 내년에도 변할 것 없는
내 팔자가 늘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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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치를 먹다

감자탕에 소주, 밥까지 볶아 먹고도
2차로 꼬치집에 와서 또 먹는다
너무도 당연한 풍족
당연한 건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꼬치는 닭꼬치 닭꼬치는 염통
염통 꼬치를 먹는다
6개의 꼬치에 각각 7개의 작은 심장이 가지런히 꼽혀있고
42개의 목숨값이 단돈 1만원도 하지 않는다
이 나라에만 2억 마리의 닭이 죽은듯 살아있고
1년에 1억 마리의 닭이 먹기 위해 죽어나가니
너무도 당연한 값싼 안주
소주 한 잔에 목숨 하나씩
소주 때문인지 심장 때문인지 목이 타들어간다
둘이 앉아 소주를 스무잔 쯤 마시고
너무도 당연히 남은 심장은 버려진다
2만원을 계산하고
싸구려 술 한잔보다 값싼 하루가 끝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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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대를 먹다 2

가위로 순대 자르듯 회사를 자른날
혼자서 순대를 먹는다
겉으론 호기로웠지만
속마음은 잘게 썰려 내 뱃속으로 들어오는 염통같다
말랑말랑한 허파를 씹는다
나는 그만큼도 질기지 못했다
간땡이가 부었단 소리를 들었으니
간도 목이 메도록 먹어본다
순대를 남기고 오뎅 국물 한 컵을 벌컥 들이킨다
순대 1인분이 오늘 하루만큼 무겁다

AND

짬뽕밥을 먹다


누구의 애인도 아닌 사람과 짬뽕을 먹는다
애인이 있는 나는 밥을
애인이 없는 그이는 면을 먹는다

상관관계도 없이,

짬뽕과 짬뽕밥은 국물맛이 다르다는 얘기가
색을 칠한듯 새빨간 중국산 김치 얘기로 이어진다

- 김치 왜 안 먹어요
- 김치가 흥미진진하지 않네요

단무지는 맛을 알아도 먹지만
뻔한 맛의 김치에는 젓가락이 안간다

이유도 없이,

약간은 흥미진진한 사람과 짬뽕밥을 먹는다
나는 중국산 김치같은 사람이고
마주 앉은 사람은 남도의 김치같은 사람이다

짬뽕은 맛이 있거나 없지만
맛없지 않다고 다 맛있진 않고
지금 먹는 짬뽕맛이 딱 그러하다

짜증나지도 우울하지도 복잡하지도 않은 날들이어서
짜장면도 울면도 볶음밥도 아닌
니맛도 내맛도 아닌
전혀 흥미롭지 않은 짬뽕밥을 먹는다

짬뽕과 짬뽕밥 중에 어느쪽 국물이 더 흥미진진한가
나와 당신 중에 누가 더 흥미진진한가

내 마음 모르겠는데,

앞사람은 짬뽕을 반 이상 남겼고
나는 짬뽕밥을 바닥까지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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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치회를 먹다 2

지진, 홍수, 산불, 가뭄
먼 나라에서 일어난 자연재해 뉴스를 볼 때마다
비싸고 맛있는게 먹고 싶다
별 다섯개 호텔 음식은 못 먹지만
먹어야겠다 생각할 때 참치회를 사 먹을 수 있는 형편은 되니
나는 행복하다
인류에 식량난이 닥쳤음에도
굶어죽지 않았다고 살아 남았다면
풍요의 시대를 그리워하면서
가장 많이 생각날 거 같은 음식
그 음식이 김치찌개나 제육볶음인 건 싫어서
참치회를 먹는다
불순한 마음이 죄스럽고
어떤게 맛있는 건지 참치맛도 모르지만
주방장 앞에 앉아서
가마도로니 뭐니 하는 얘기를
듣는둥 마는둥 하면서 참치회를 먹는
나는 행복하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한 잔 살 수 있어서
그 사람이 나랑 같이 먹는 걸 싫어하지 않아서
나는 행복하다
참치를 먹을 때는 먼 나라와 내 이웃의 불운이 떠오르지 않아서
나는 행복하다

AND

양갈비를 먹다

친구랑 양갈비를 먹는다
양꼬치는 먹어 봤어도
양갈비는 친구 덕에 생전 처음 먹는다
세상에서 공짜 밥이 제일 맛있고
고기는 내가 갖다 먹는 무한리필집 보다 누가 구워주는 집이 더 맛있다
친구의 푸념을 들으며 고기를 씹는다
나도 누군가를 씹고 싶지만
오늘은 말 들어주는 날이라 생각하고
장단 맞춰 고기만 씹는다
얘기를 들어주고 술과 고기를 얻어먹는 사이가 친구인가 하는 생각은
집에 가면서 하기로 한다
아이가 커갈수록 생은 무겁고
생이 무거울수록 술은 가볍다
이혼 같은 말이 오고가지만
어떤 말도 생보다 무겁지 않고 술보다 가볍지 않다
마치 양갈비와 같다
돌아오는 길
빗속에서
먹을 땐 몰랐던 생 비린내를 맡았다

AND

고등어조림을 먹다

외할머니에게서 엄마에게로
엄마에게서 나에게로 전해지고
나에게서는 대를 이어 전해질 일 없는 고등어조림을 먹는다
대통령이 아이 둘만 낳으랬다고 둘만 낳은 부모님
아버지, 엄마, 나, 동생
네 식구가 한 자리에 앉아 밥을 먹는다
마지막으로 넷이 밥을 먹은 건 20년 전일까
엄마 나이가 지금 내 나이 때의 일이다
넷 중 아무도 정확히 기억 못하는 옛 일이다
방금 들은 말도 기억하지 못하게 된 아버지 덕분에
오늘이 넷이 함께 먹는 마지막 밥은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엄마 말 잘 듣는 아이가 돼서 열심히 먹었다
동생도 같은 생각인지 그릇을 금방 비웠다
같은 재료 같은 레시피에도 엄마 거에선 엄마 맛이 난다
할머니의 고등어조림을 먹던 엄마도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괜찮다고 괜찮을거라고
부모님 이혼했던 그날처럼 뿔뿔이 헤어져 혼자 걷는 옛 동네
친구들과 어울리던 '꼬치&소주'는 '치킨&호프'로 바뀌고
외롭던 내 봄밤을 밝혀주던 가게 앞 아기 벚나무는
20년 전 내 나이만큼 자랐다

AND

찰밥을 먹다


오늘이 그날이라 그걸 먹는다는 아버지랑
대보름이라 찰밥을 먹는다
보름전 명절에 만든 전이며 나물이며 같이 먹는다
어떤 건 냉장고 안에서 쉬기도 했지만
나만 먹고 아부지는 안 잡수면 되니까
그냥 먹는다

- 아버지 이 고사리 약간 쉬었네요
-...
- 아버지는 드셨어도 쉬었는지 몰랐을거야
- 어, 난 모르지

핀잔인지 아닌지 모를 내 말에
그저 그렇다고만 하는,
아버지 밥그릇에 하나 남은 육전을 얹는다
가족의 증명은 같이 먹는 것
혈연의 증명은 닮은 먹성

무병장수를 기원할 수 없는 아버지와 함께 무병을 기원하는 찰밥을 먹는다
복받으라는 밥에 든 콩, 팥, 밤 따위를 씹는다
어제 다녀간 엄마가 해두고 간 찰밥을 먹는다

AND

담배를 피우는 오후

2021년 2월 26일 오후 한 시 청량리 역 광장
여기는 흡연구역 저기는 금연구역
비둘기들에게 둘러 쌓인 채 콜라도 없이 햄버거를 먹는 남자
나랑 눈이 마주치자 입을 닦는 시늉을 하는 그 남자
영상 15도 날씨에 한겨울 점퍼를 입은 그 남자
나를 뜷어져라 쳐다보다가 담배를 꺼내 무는 그 남자
그 옆에 자판기 커피를 마시는 남자
아무도 없는 곳을 향해 반갑게 손을 흔들고 내 옆을 지나간 남자
주위엔 헐거벗은 채 치솟고 있는 빌딩 빌딩 빌딩
햄버거를 먹은 남자가 역사로 들어가고
커피를 마시던 남자는 초코파이를 먹는다
그 옆에서 땅콩을 까 먹는 여자
오늘이 대보름이지
커피를 마시던 남자와 땅콩을 먹던 여자도 사라지고
비둘기들은 분주하고
여름이 오고 있다는 아버지의 말을 생각하며
여기는 금연구역 저기는 흡연구역 팻말 근처에서
여기는 어디고 저기는 어딘가
타워크레인엔 누가 타고 있고
공사중인 빌딩 벽에 매달린 건 누구인가
고개를 돌리니 커피를 마시고 있는 또 다른 남자
그 옆에 주섬주섬 담배를 꺼내 무는 남자
비둘기들은 계속 분주하고
누군가 바닥에 빵 덩어리를 던지고
비둘기들은 더 분주하고
빌딩은 소리높이 치솟고
담배 연기가 모인 곳을 찾아가
아무것도 모른채
가만히 담배를 피우는 오후

AND

딸기를 먹다

만날 할인하는 것만 사 먹기 싫어서
9000원짜리가 아닌 9800원짜리 딸기 바구니를 집었다
어제 물건은 800원이 싼 건가,
내가 집은 딸기가 800원치는 더 신선해 보이는군,
바구니는 반납이 안된다고 해서
죄스러운 마음이 들었지만
먹고 사는 게 잘못이란 위안으로 그냥 사왔다
씻어 먹어야 한다는 아내 말을 웃어 넘기고
딸기를 먹는다
윗줄엔 큰 딸기가 아랫줄엔 작은 딸기가 있다
마트에 물건이 있으면 그때가 제철인 세상도
눈속임으로 딸기를 포장하는 일도 웃기지만
지금 먹는 딸기는 상쾌하고 맛있다
맛있지만 더 맛있으라고 설탕에 찍어 먹는다
딸기에선 왜 딸기우유 맛이 안나지? 말해놓고
답을 아는 질문을 한
늙어버린 내가 웃겨서
멈추지 않고 딸기를 먹는다
마트에 더 이상 딸기가 안 나올때까지 자꾸 사 먹고
집안 한구석에 딸기 바구니를 쌓을 일을 생각하면서
계속 딸기를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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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밥을 먹다

초밥을 먹는다
한 개 삼 백 육 십원
서른 개 15,490원이 20프로 할인으론 안 팔려서
30프로 할인해서 10,840원이 된 초밥을 먹는다
뭘 하고 하루를 살았는지 열 시가 넘도록 아직 저녁을 못 먹었다
포장을 벗기자 길고 피곤했던 하루만큼 오래된 냄새가 난다
달걀, 게맛살이 많고
생선은 광어뿐인 초밥을 먹는다
당신과 함께라서 일까?
맛있다
겉도는 삶이라도 먹어야 삶이니
삼 백원씩 세어가면서
사이좋게 반씩 먹었다
쩌리가 떨이를 먹었다고 하니
아직은 쩌리가 아니라며 당신이 웃고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하며 웃는다
둘이 마주보고 그냥 웃는다

AND

모난 놈

네잎 클로버를 찾다가
잎이 다섯 개인 친구를 찾았다
네잎짜리도 모난 놈 소리를 들었을텐데
다섯잎짜리는 오죽했을까
클로버의 꽃말을 떠올린다
세잎은 행복 네잎은 행운
그리고 다섯잎은 지독한 외로움
흔한 행복을 뒤로하고 행운을 찾다가 외톨이가 됐다
손에 쥔 클로버가 꼭 나와 같다
모난 놈에 외톨이지만
너무 멀리는 가지 말고
흔한 행복속에 살자
멀리서보면 알아채지 못하도록
행복과 행운의 반댓말은
우리끼리만 우리끼리만
은밀하게 은밀하게

AND

떡국을 먹다

떡국을 먹는다
해가 바뀌었고
농사짓는 친구가 멀리까지 떡을 보냈다
벼농사를 지어도 정미소가 없으면 쌀을 못 만들고
쌀이 있어도 떡집이 없으면 떡을 못 먹는다
멸치, 달걀, 마늘, 대파까지 내 손에서 나온 건 하나도 없다
그러니 오늘 내가 떡국을 먹을 수 있는 건
설날 아침에도 배달하는 가스집 사장님까지
다들 돕고 사는 때문이다
지금 사는 모양이 어려서 상상했던 미래는 아니지만
살아 있으니 나도 누군가를 돕는거라 생각하며
그러니 됐다는 위안으로
떡국을 끊이고
한 살 더 먹는다

AND

오리로스를 먹다

주물럭과 훈제는 뭔지 알아도
로스는 뭔 뜻인지 모르는데
오리 로스를 먹는다
세상의 많은 뜻을 잃어버린 아버지가 먼저 먹자고 했다
​넷이서 먹는 양을 둘이서 가볍게 먹는 먹성이 혈연의 증명이다
오랜만에 오셨다는 식당주인의 말에 나를 아들이라 소개하는 아버지
아버지에게 내가 모르는 사람이 될까봐
자꾸 말을 건다

- 아버지
- 응 왜
- 로스는 왜 로스에요?
- 몰라
- 로스트(roast)의 로슨가?
- ....
- 아버지 이제 드셔도 돼요
- 응 그래

기억에는 로스(loss)가 있지만
아직은 카드 결재하는 법을 잊지 않은
아버지가 계산했다
이유도 모르고 죽은 오리는 죄가 없고
이유를 잃어버린 아버지도
이유를 아직 못 찾은 나도 죄는 없다

AND

장칼국수를 먹다

겨울
점심
사람들 모이지 말라는 시기에
별로 친하지도 않은 동료와 장칼국수를 먹는다
전염병과 불편함을 장칼국수 한 그릇 먹고 싶은 마음이 이겼다
어느해 이맘 때,
이별에 취해
대관령 자락 어딘가에서 길을 헤메다
막장과 배추만 넣고 끊인 칼국수를 얻어먹은 일이 있다
멸치국물에 냉이, 버섯, 감자까지 들어간 국수 맛이 그때만 못하다
사람들이 줄을 서서 먹기도 하는 곳이니
이 국숫집이 영업집이라 그런건 아닐 것이다
김치맛도 그때만 못한 것이 국숫집 주인 탓은 아닐 것이다
최씨 삼형제 중에 막내에게 시집와서
전쟁통에 남편 먼저 보내고
다음 대의 최씨 삼형제를 혼자서 키웠다는
국수를 내어주던 할머니의 주름진 몸짓이
장칼국수란 말 안에 남았다
잊어버릴 일 하나 없을것 같은 쨍쨍한 겨울날은
혼자서라도 장칼국수를 먹고 싶은 날이 있다
아주머니라 불렀더니 할머니가 아니라 좋다고 했던 할머니 얼굴이
입안에 남은 칼칼함처럼 아련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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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품권

문상이 문화상품권인건 십년전에 알았는데
마상이 마음의 상처인건 방금 알았다
라디오에서 마상을 경품으로 줄 순 없으니
만날 마상이란 말을 듣고도 뭔말인가 했다
백화점 vip들 지갑엔 백화점 상품권이 가득
두 달에 한 번 피를 뽑는 내 휴대전화엔 각종 모바일 상품권이 가득
뭐든 가득찬 세상에는 상품권도 가득
마음에도 상품권이 있다면
그 상품권을 다 네 마음과 바꿀텐데
내게 마상을 알려준 너에게
마상을 알게된 날
그 뜻을 알게된 죄로 마상을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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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알오징어를 먹다

총알오징어 8마리 만원
쌀 때 사 먹으라고 마트에서 문자도 보내주는 편리한 세상
주머니에 여윳돈이 있는 동료 덕분에
총알오징어를 먹는다
제대로 살아보지도 못한 아기 오징어들은 찜통 속에서 무슨 생각을 할까
죽은 것이 무슨 생각이 있으며
이런 생각은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물이 총알보다 빠르고
총알은 어린것을 먹는 부끄러움을 숨겨주는 말
내장 째 먹어야 맛있다는 얘기가 한 두 번 오가고
바닷속 오징어 떼를 생각하는 사이에
금새 솥이 비었다
남의 삶을 먹어야 자기 삶이 온전해지는 세상
나도 오늘밤 누군가에게 잡아 먹힐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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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어회을 먹다

홍어회를 먹는다
좋아하지 않지만
앞에 앉은 사람이 좋아서
몇 점 먹어본다
여전히 입에 맞지 않지만
앞에 앉은 사람이 홍어를 좋아해서
오랜만에 만난 그 사람이 여전히 좋아서
입에 물고 우물거린다
서로가 참지 않았던 그날로부터
매 순간 내 안의 불을 삭이고 살았다
뱃속의 말은 꺼내지도 못하고
맛있다는 말만 한 번, 두 번
앞에 앉은 사람은 울지도 웃지도 않고
나도 울지도 웃지도 못하고
콧등이 시큰거리거나 말거나
삭힌 홍어회만 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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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

썩어 없어지지 않는 쓰레기를 만들어내기 시작한 순간부터 인류는 멸망하기 시작했다
그게 고기든 석유든
인간은 기름을 먹고 사는 동물
밤이 밝아졌을 때부터
세상의 모든 이유는 인간의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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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전을 먹다

한 장에 오천원
셋이 앉아 한 장에 소주 다섯 병을 먹는 김치전을 먹는다
김치전은 집에서 해 먹어도 맛있지만
술은 밖에서 사 먹는 게 맛있다
소주 한 병 사 천 원
비쌀수록 맛있는 소주를 입 안에서 굴리며
나와 내 앞사람과 그 옆사람이 굴러가는 얘기를 한다
마주앉은 세 사람이 세상이라면
글러먹은 세상이 굴러가는 얘기를 한다
빈병이 굴러다니기 전에
한 장 더 시킨다
가게 주인은 말이 없고
솔직히 이집 김치전은 맛이 없다
맛 없다면서 한 장 더 시키는 이유는 뭔지
김치전을 먹기 위해 소주를 먹는지 소주를 먹기 위해 김치전을 먹는지
답을 아는 뻔한 질문이지만
확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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