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없음


길은 나아가려고 한다
집은 멈춰있다

아내는 나아가려고 한다
나는 멈춰서있다
한 집에 사는데도

길은 계속 나아가려고 한다
벽을 뚫고 산을 뚫고
앞을 다 무너뜨리고 나아가려고 한다

나는 길이 끊어진 곳에 살고 싶었다
길 없음, 표지가 붙은 도로끝 집
되돌아 가는 길만 있는 곳

길이 나에게 비키라고 한다
나도 자빠뜨릴 기세다

집은 멈춰서있다
이제 나는 돌아가려고 한다

AND

북쪽으로 걷는 사람


동쪽 끝에 바다가 있는 나라에
북쪽으로만 걷는 사람이 살았습니다

앞은 북쪽 뒤는 남쪽 오른편은 동쪽 왼편은 서쪽
그런 사람이 살았습니다
어딜가도 뒤로 걷는법이 없고
자동차를 타도 앞으로만 가는 사람이 살았습니다

- 아, 바다가 보고 싶다
대체 어떻게 해야 동쪽으로 갈 수 있는거지

북쪽으로 걷는 사람이 말했습니다

- 친구, 이곳을 나가서 계속 걸어보게

함께 커피를 마시던 친구가 말했습니다

- 하지만 북쪽은 다른 나라의 국경인걸

북쪽으로만 걷는 사람이 말했습니다

- 친구, 나를 믿게 난 바다를 보고 왔다네

바다를 보고 온 친구가 말했습니다

북쪽으로 걷는 사람은 걸었습니다
앞으로 앞으로
북으로 북으로
이정표도 없는 길을 걸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흐린날
솟아오른 수평선을 보았습니다
그 위로 솟아 오르는 고래를 보았습니다

북쪽으로만 걷는 사람은
동쪽에 바다를 끼고
다시 북쪽으로 걷기 시작했습니다

AND

부득이


당연한 일에 부득이를 붙여본다
피할 수 있다면 소나기도 피해야 하는데

부득이
장손이라서
병든 아버지를 돌보는 일

혼자 사는 숙모에게 별일 없나 연락하는 일
얼굴 처음보는 조카들을 안아보는 일

아버지 70 생일에 이모들에게 용돈을 드리고
이모들이 그대로 아버지에게 돌려주는 일

변명이 되버리고 마는 일

부득이에 나를 더해본다
부득이 내가 아버지를 돌보고
이모들 용돈을 주고
밥을 지어 먹고

부득이 하는 일이 없어야
인간은 자유로울 수 있고

나는 부득이 오늘을 살았네

변명하기 좋은말 부득이
그런 일들이 뒤섞인 사랑이

부득이

AND

신생(新生) - 목욕에 대한 생각

목욕을 하거나 세차를 할 때마다
새로 태어난 것 같다
아니, 새로 태어나고 싶다
묵은 껍질, 세상의 떼를 한 겹 벗겨내는 일로
생의 과오들과 어젯밤의 치명적인 실수가 씻겨 내려가고
새 사람이 된 것 같다
아니, 새 사람이 되고 싶다
새로 태어나 같은 실수를 반복하더라도
다시 한 번 씻는 일로
다 잊고 싶다
아니, 다 잊혀졌으면 좋겠다
세상의 굳은 때를 박박 벗겨내진 않더라도
그저 물이 흘러가는 일로
몸을 씻어내는 것으로
껍질을 닦아내는 것으로
다 지워졌으면 좋겠다
그래서
모든걸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그랬으면 좋겠다

AND

중년의 사랑

나는 늙었습니다
낡은 건 아닙니다
차라리 늙었으니 낡았으면 좋겠습니다
순리대로,
늙어,
좋은 일이 있습니다
내가 먼저 배신하지 않으면
늘 그대로인 일
여전히 당신을 사랑합니다
사랑사랑사랑
지겹지가 않은 일은 세상에 없는데
사랑이 지겨우면
그건 삶이 아니므로
지겹도록 당신을 사랑합니다
나는 늙었고
지겹고도 지겨워서
사랑?
그까짓것
당신을 사랑합니다

AND

데운밥을 먹다

냉동실
갓 지어 얼렸어도 얼린 밥
얼린밥은 지나간 일
데운밥을 먹다가
당신과 얼린밥을 녹여 먹던 일을 생각하고
플라스틱 용기에 담겨 전제란지에 들어간 밥알들의 운명같은 것도 생각하다가
당신도 데운밥을 먹을 일을 생각한다
두 사람 두 개의 숟가락 두 개의 데운밥
한솥에서 나왔지만 서로의 온기가 되지 못한 일
한통속이라 생각했지만 사실은 둘이었던 일
둘이었다가 혼자가 된 일
육인용 밥솥에 가득지어 얼려둔 밥을
하나씩 꺼내 먹는 일
데운밥을 먹다가
지나간 사랑이 되는 일

AND

사랑


사랑을 시작할 때 시를 써야지
영하 20도 겨울,
정오의 볕보다 반짝이는 말들로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시련이 닥치면 시를 써야지
가장 깊은 바닥에서,
손톱 뒤집히며 긁어올린 말들로
살고 싶다고 살고 싶다고

그리울 땐 시를 써야지
마음의 빈 자리,
구멍이 뚫리는 말들로
보고 싶다고 보고 싶다고

다시 만난 날에는 시를 써야지
끔속에서도 그립고
죽어서도 잊을 수 없는
눈과 귀를 멀게 하는 말들로

사랑하고
살고 싶고
보고 싶었다고
그리고 나는 사라진다고

AND

흐트러진


너는 울었다
그리고 흐트러졌다
세상은 그대로이니
그것은 세상 탓이다
너의 탓이 아니다

너는 울었다
그리고 다시 흐트러졌다
나는 나에게 내가 그대로인지 묻는다
내가 물었으니
그것은 내 탓이다
너의 탓이 아니다

네가 떠나고
나는 울지 않았다
그러나 흐트러졌다
세상은 그대로이니
그것은 내 탓이다
너의 탓은 아니다

나와 너와 세계는
누구의 탓도 아니다

AND

우동을 먹다

우동을 먹는다
이름처럼 둥근 면발
동으로 끝나는 다른 음식은 뭐가 있지?
당장은 오뎅만 떠오르고
우동 국물엔 오뎅이 들어있다
얘네들 이름처럼 동글동글하게 살고싶다
뜨겁지도 않은데
후후 불어가며 우동을 먹는다
꼭 그래야 하는 건 아닌데
그렇게 되고마는 일은 어디에나 있다
그것이 순리라면
우동 면발 삼키듯 순리대로 살고 싶다
먼길 다녀오는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당신과 함께 우동을 먹는다
순리가 의식이 되고 의식이 종교가 되고
내 마지막 종교가 당신이라면
그것이 사랑인가
물어보는 순간 사랑이다(우동이다)

AND

소나무와 육회

오래된 절에 가서
그 절보다 오래 살았다는 소나무를 보고
육회에 술을 먹었다
희석식 소주에선 솔향이 났고
날고기에선 대웅전의 오래된 나무 냄새가 났다
나보다 오래된 사랑에는
그럴리 없는 일들이 넘쳐흐르고
어려서 실던 집은 길로 바뀌었다
나보다 오래되지 않은 생활에는
뻔한 일들이 가득하고
그 아득한 뺄셈에,
아침에 본 나무를 생각하며
술만 먹는다
눈물은 잊고
날고기에 낮술만 먹는다

AND

지겨운 사랑

조금 지겹다는 생각이 들고
지겹다는 것이 사치라는 생각도 지겹다는 생각이 들고
한 번 지겨워지면 도로 물릴 수 없다고
단정짓는 사람이 됐지만
우리 사이 말고는 모든 게 다 끝났다, 고 할 수 있어서
지겹지만 좋은

AND

겨울


봄보다 더한 겨울이다
여름보다 더한 봄도 가능한 일이다
여름보다 더한 여름도 여름이라 불리고
겨울보다 더한 겨울도 겨울이라 불리므로
지금은 겨울이다
봄보다 더한

쉬고 싶어 휴가를 내고
단골집 커피의 첫 모금에서 안도감을 느낀다
아직까진 괜찮다는 뜻이다

휴가도 커피도 없고
봄보다 더하기만한 겨울만 있어도
살아 있다면 그때까진 괜찮다는 뜻이다

봄보다 더한 겨울이다
두 잔 째 커피의 첫 모금은
항상 조금 더 살고 싶어지는 맛이다

AND

너와 나의 국도

홀수 번호는 남북방향
짝수 번호는 동서방향
35번 국도는 강릉에서 부산
42번 국도는 인천에서 동해
두 국도가 교차하는 사통발달
정선군 임계면 교차로
만나자마자 헤어져야하는 길 위에서
우리는 가로지르다 만났고
느린 걸음으로 헤어졌다
길은 정해져 있음을
둘 다 알고 있었지만
시간을 멈출 순 없으니 늦추고라도 싶었다
각자의 끝에서 돌아오는 길에 다시 만날수도 있으니
끝이 끝이 아니길 바라며
오늘,
너와 나의 교차로에서 잠깐 너를 기다렸다

AND

생활

월요일 아침, 출근하기 싫어서 전화를 안 받고 아침밥을 해 먹고 방을 치우고 빨래를 널면 생활이 있나 반찬을 사오고 또 밥을 먹고 맥주도 한 캔 곁들이면 거기엔 생활이 있나 전화를 계속 받지않고 문자도 씹고 모두가 행복한 라디오를 들으며 맥주를 한 캔 더 마시면 그 자리엔 생활이 있나 보고 싶던 사람에게 전화를 해 다른 사람의 안부를 묻고 전화를 끊자마자 울어버리는 이 하루를 무어라 부를까

AND

장마

눅눅한 기타 소리
습기를 먹고 조용히 타들어 가는 담배
방 안에 갇혀 가라 앉는 연기
참새 한 마리 지붕 아래로 비를 피하고
빗물에 마음이 잠긴다

AND

겨울

날 추워지니 자신이 없다
가을이 좋았던 것도 아니고
봄을 기다리는 것도 아니다
찬바람 따라 머릿속이 달그락거린다
초록이 끝난 시절
저무는 계절은 하루 아침에 오고
조금 지겹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

AND

두부조림을 먹다

일요일 아침
두부 한 모 800그램 1870원
열 네 등분 하고 살짝 구워서
두 줄로 깔고 양념장을 넣고 졸인다
지난주에 당신이 맛있다고 했기에
정확한 수치의 양념장을 만든다
깼다가 다시 잠든 당신 종아리를
열린 문틈으로 바라본다
이 세상 것이 아닌듯 가늘다
혼자 먹는 아점
한모 다 먹으면 돼지라 핀잔 들을까 싶어
윗줄에 있던 일곱 조각, 반모만 먹는다
맛있다
잠에서 깬 당신도 밥을 먹는다
한 조각, 십사분의 일모를 먹고
배 부르다고 한다
맛있다고 한다
체중은 나의 절반
허벅지는 나의 4분의 1
두부는 나의 7분의 1
숫자로 계량되는 당신
.....
넘치는 것은 사랑이다

AND

길에서 자다

내가 아는 어떤 누나는
집 앞까지와서 자는 버릇 때문에 술을 끊었다는데
나는 길에서 잔다
내가 무슨 얘기를 할지 모를 정도로 빨리 취하는 게 좋다
그게 진짜 나니까
그리고 길에서 잔다
자다 깨면 집에 온다
그게 나니까
여름엔 모기 때문에 깨고
겨울엔 추워서 깬다
여름엔 못 깨도 안 죽겠지만
겨울엔 죽는다
아직까진 운이 좋았다
길에서 자주 주무시던 우리 아버지도
지금에 와선 치매가 왔지만 아직까진 운이 좋았다
핏줄끼리 운을 겨룬다
태어난 죄인지
아버지 가는 모습은 보고 싶다
아버지에게 지고 싶진 않다
자꾸 길 위에서 자다 깨지만
길에서 죽고 싶지 않다

AND

곪아죽다


등에 혹이 생겼다
거짓말을 많이하고 살진 않았다
그 혹이 부풀고 곪았다
살을 째고
고름을 짜고
살을 꿰맸다
의사가 비지 좀 보라며 장난을 친다

- 선생님 전 곪아 죽는건가요
- 네, 가만히 놔두면 살에 구멍이 나요

의사가 계속 장난을 친다
찌꺼기만 남은 삶이라도
아프지 않으려고 곪아죽지 않으려고 
진통소염제를 먹는다
언젠간 너에게 곪아죽겠다

AND

돈다

일요일 아침 빨래방에 왔다
혼자 있고 싶어서,
나같은 생각을 한 사람이 또 있었다
이미 건조기를 돌리던 아저씨와 가벼운 눈인사를 한다
기계적으로 카드를 찍고 빨래가 돌아간다
코인빨래방에 동전을 가져오는 사람은 없다
이십년이 넘도록 21세기 타령을 하는
나는 옛날사람
대형 세탁기 안에서 일주일간 몸에 걸쳤던 것들이 돌아가는 일이
일요일보다 더한 안도감을 준다
삘래도 돌고 지구도 돈다
과거를 살아도 살아있으면 다 돈다
그러니 나도 돌고 있다
빨래방 바로 옆에 마트 이름도 하필 하나로마트다
연어를 손질하던 마트 회센터 청년과 눈이 마주쳤다
손님보다 마트 노동자가 더 많은 시간, 오전 여덟시
나도 그들과 하나되어 돌고 있으니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다
외롭지 않으니 혼자 있고 싶다
빨래는 이제 건조기에서 돈다
곧 돌아갈 시간이다
돌고 있다면 혼자도 외롭진 않다

AND

푸딩을 먹다

밤 11시 38분에 푸딩을 먹는다
아내가 자기는 먼저 먹었다고 한다
푸딩은 말랑하고 달다
돈까스나 카레는 유래나 조리법을 알지만
푸딩은 이름만 아는 먹거리다
푸딩은 이름이 예쁘다
푸딩푸징푸딩푸딩
퐁당퐁당퐁당퐁당
아내가 술취한 나에게 준 푸딩은
작은 병에 담겨 있다
아내는 내가 취했는지 알까?
어디서 얻어온 푸딩을 자정이 다 된 시간에
내게 주는 것이 사랑인지 묻는다
사랑이야?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지만
뭘 자꾸 확인하냐며 역정을 내는 아내에게
머릿속으로만 얘기한다
사랑인지 묻는 순간 사랑이다
푸딩은 달고 말캉하다
사랑은 항상 푸딩같진 않지만
사랑인가 생각하는 순간 사랑이다

AND

신뢰

사랑과 신뢰는 같은 말입니까
사랑하는데 신뢰하지 않거나
신뢰하는데 사랑하지 않습니다
인생은 또는 세상은
나는 세상에 속해 있습니까?
내 인생은 나의 세상입니까?
붙들 수 없는 말들이
시절을 따라 태어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합니다
내가 사랑이라고 하면 사랑이고
당신이 아니라고 하면 바로 사랑이 아닌 일들
기억의 끝 그 너머 저편에서
나는 자꾸만 사랑인지 묻고
당신은 계속계속 아니라고만 합니다

AND

2021년 7월 - 어슬렁 어슬렁

토요일 오후
친구와 술 한잔 마시러 나와서
어슬렁 어슬렁
바닷가 도시에 아직 폭염은 오지 않았고
저녁 바람은 시원하다
지동화기기에서 돈 만원을 찾아서
어슬렁 어슬렁
복권과 담배를 사고
후미진 골목 구석에서
담배를 입에 물고
친구를 기다리며
한량이란 단어를 떠올리고
방금 횡단보도를 건너며 봤던 공모주란 말도 떠올리고
공모주가 뭔지 아는 내가 영 어색하진 않은 시절이고
빌딩 사이라 바람이 더 센가
암튼 시원해서 좋고
친구는 아직이고
사상 최대의 폭염과 홍수에
전염병까지 도는 세상에서
오늘 저녁은 사상 최대로 먹어볼까
그런데 뭘 먹지 생각하고
늦는다는 친구의 연락을 받고
다시
어슬렁 어슬렁
바람은 계속 시원하고
비가 그친 하늘은 푸르고
서서히 줄어드는 낮의 운명은 9월까지 유예됐고
그때까진 다 괜찮을 거 같고
사람들이 다 뭐하고 사나 싶지만
어슬렁 어슬렁
나는 괜찮다

AND

하지무렵

해는 길고
술은 짧고
사람은 그보다 짧고
사랑은 그보다 더 짧고
가장 짧은 것은 절정을 지나 저물어가는 생

AND

커피를 마시다 - 좋습니다 -

테이블 위 커피잔 안에
내게 커피를 내려준 당신이 들어있는 일이,
좋습니다
좋다는 말은 너무 쉬운 말이지만
가장 정직한 말이기도 해서
굳이 다른말로 바꾸고 싶지 않습니다
당신이 커피콩을 갈고
물을 끓여 잔을 데우고
당신은 먹지도 않는 커피를
오직 저를 위해 내려주는 모습이
이 커피잔 안에 흐리고 선명하게
모두 들어 있습니다
커피 맛있습니다,
거짓이 아닌 말에
많은 것이 포함된 말에
두번째로 정직한 말이라
바꾸고 싶진 않은 말에
웃어주는 당신이
참 좋습니다

AND

나비의 춤

하얀 나비 한 마리 눈 앞을 지나갔다
숲속을 산책중이었다
여름으로 가는 시작의 숲에서
꽃 이름을 딴 껌 냄새가 올라왔다
무심결에 손을 뻗었고
나비는 내 손아귀에서 부서졌다
다른 손을 뻗을수도 있었는데,
슬퍼서 잠깐 울었다
그때 바람이 불었고
나무들이 떨었다
나비를 쥔 손이 펴지질 않았고
나비들이 내게 몰려들었다
온 몸에 달큰한 향기가 번졌다
무섭고 기분좋았다
꽃으로만 꽃으로만
나비들과 함께 자고 일어나며 세월을 보냈다
밤새 찬바람이 불었던 날
어느 나무 아래서 눈을 떴다
손 안의 나비도
날 덮어주던 나비들도 떠났다
서러워서 조금 울었다

-> 동화로 쓸까 생각.

AND

차갑거나 뜨거운

한 개 뿐인 건 조심해야한다
뇌 심장
함부로 놀리거나 굴리면 안된다
혀 배꼽 배꼽 아래
두 개 있는 건 둘 다 잃으면 안된다
팔 다리 눈 귀 배꼽 아래
하나일 때도 둘일 때도 있는 내 마음
차가운 마음과 따뜻한 마음
하나일 때도 둘일 때도 있는 당신
차가운 몸과 뜨거운 몸
그리하여 사랑은
차가워도 뜨거워도 하나
허나,
하나뿐인 건 조심해야 한다

AND

독촉

멋진 얘기를 하지 않는 사람의 얘기를
글로 남길 수 있을까?
일테면 배려하는 것만이 사랑은 아니란 말
내가 처음 들은 그 말은 배려야 말로 사랑이란 말이었는데
사랑 = 배려, 인지를 알고 싶은 시절은 아니다
오늘 나는 두 사람에게 전화를 했고
둘 다 자기가 한 얘기를 모른다 했다
기억하고 있는 자의 책임에서
나는 두 사람을 책임지고
그들의 말은 달랐다
사랑이 궁금한 내가
이별의 황혼인 이들과 말을 섞지 말았어야지
우측엔 빈택시
좌측 강변엔 운동하는 사람들
나는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AND

시간의 왼편

왼쪽은 시간의 반대방향
왼쪽으로 노를 저어라
갈림길의 왼쪽을 선택하라
오른쪽으로 부는 바람에 맞서라
왼뺨을 먼저 맞고 오른뺨을 내밀어라
대면하고자 하는 자의 반대편에 서라
그 쪽은 필히 왼편일터이니
과거의 실패는 과거의 일
현재를 사는 당신은 성공의 반대편에 서라
그게 왼편이고
거슬러 가는 길에는 거짓이 없다

AND

생선구이를 먹다 - 임연수 -

임연수를 굽는다
해산물의 원산지를 읽으러 간 마트에서 값이 싸서 샀다
누군가에 의해 먹기좋게 손질되고
플라스틱 포장에 랩을 씌우고 원산지와 가격까지 붙인
러시아산 해동 임연수 소금은 국내산
중반부로 향해가는 21세기의 증명일 뿐이니
가격표를 보고 오늘 아침 9시에 해동했다는 사실까지 알 수 있다는 사실에
절망하진 말자
임연수는 이면수 어느 동네에서는 새치라고도 부르고
먹을때마다 생각하는 건 아니지만
가끔은 생각나기도 하는 연수는 옛 애인의 이름
러시아에서는 형편이 어려워 못 사 먹는 사람도 있을
임연수 네 덩어리를 아내랑 맛있게 먹는다
삼 천원 어치 죄책감이 사라진 접시엔
약간 탄 지느러미와 뼈,
통칭 비린내라고 하는 생선 냄새만 남았다

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