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수육을 먹다

탕수육을 먹는다
오늘은 월급날이다
부자가 된 것 같은 기분에 돼지고기 튀김이 먹고 싶었다
혼자서 대(大)자는 무리고 중(中)자를 시킨다
- 소스는 따로 주세요 -
돼지고기와 밀가루와 기름
튀김은 순수함의 결정체
그 순수를 양조간장에 찍어 먹는다
익숙한 향이 주는 안도감에 긴장이 풀린다
- 맥주도 한 병 주세요 -
전염병이 도는 세상이라
식당엔 나와 주방장 뿐
TV에선 무관중의 프로야구 중계
아웃카운트가 하나 늘어날 때마다 고기 한 점과 맥주 한 모금
의미 없는 규칙, 그래야 할 것 같은 기분
- 잘 먹었습니다 -
튀김은 절반 이상 남았고 야구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오늘의 기분도 아직은 제자리에 있는데
집으로 향하는 텅빈 거리
입안에 간장 냄새만 남았다

AND

도시락을 먹다


올해 나온 쌀로 지은 밥
이런걸로 사기를 치진 않겠지
형형색색의 반찬
세상은 무지개 빛이 아니다

허겁지겁 먹는데
밥알이 입안에서 뒹군다
내가 농사지은 쌀로
지어 먹었던 밥은
간장이랑만
김치랑만
대충 아무렇게나 먹어도
속이 든든했는데
포장지의 엄마 미소로
나를 유혹했던 밥이
맛이 없다

최저임금 6030원
최고급 편의점 도시락 3500원
집에 쌀도 있고
벌어둔 돈도 있지만
지난달에 실직하고
불안한 미래 때문에
나이 40에
태어나서 처음
편의점 도시락을 먹었다

-> 2016년 1월

AND

반대말 - 육식 -

치킨의 반대말은 닭
돈가스의 반대말은 돼지
스테이크의 반대말은 소
영양탕의 반대말은 개
동물의 반대말은 인간
음식의 반대말도 인간
인간의 반대말은 육식
육식의 반대말은 멸종
멸종의 반대말은 삶
삶의 반대말은 다시 육식

AND

청국장을 먹다

1월 1일,
아내가 자는 동안 두 끼를 먹었다
아침은 남아있던 된장국
점심은 새로 끓인 청국장
허기가 진 것도 아니었는데
허겁지겁 먹었다
새 날엔 새로 끓인 것을 먹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 해피뉴이어
늦게 일어난 아내도 청국장을 먹는다
- 잘 먹었어
새 날, 오래된 관계
새 마음, 해묵은 실패
새로 끓인 찌개, 되돌릴 수 없는 나이
갈팡질팡하며 영원한 첫날을 산다

AND

선잠을 자다

청량리에서 강릉오는 한 시간 반 동안 잠깐 졸았다
선잠이란 말이 어울리지 않는 나이에도 기차안에선 졸게 된다
어린날 청량리에서 무궁화 기차를 타고 외할머니 살던 경북 영주에 갈 때도 열차 안에서 졸았다
그때는 너무 어려서 선잠이란 말이 어울리지 않았다
한때는 내게도 이 예쁜 말이 어울리는 시절이 있었다
선잠은 서서자는 잠인지 잠깐자는 잠인지 아니면 잠깐 서서 자는 잠인지
선잠이란 말을 아는 내가 옛날 사람은 아닌지
열차가 잠깐 멈췄을때 아버지랑 외삼촌들이 먹던 가락국수가 제천역이는지 안동역이었는지
어린 내게 호의로만 가득했던 시절
잠깐의 꿈 속에는 은밀한 비밀조차 없었는데
아버지랑 병원 들렀다 돌아오는 길의 선잠 안에는
깨고 나니 흔적도 없이 사라진
옛 이름과 그때의 사랑, 세상에 나만 아는 비밀이
열차 한 칸을 가득 채운다
잊기만 하는 아버지를 뒤로하고
우락부착한 중년 남자의 생활로 돌아가는 길에 잠깐 졸았다
아버지는 당신의 꿈 속에 살고
나는 지금 그 꿈 속에서 온 삶을 다하고 있다

AND

불고기를 먹다

아버지랑 둘이 앉아서 아침부터 불고기를 먹는다
국도 없고 다른 찬은 김치 하나다
어제는 아버지 생일이고 엊저녁에는 나 혼자서 같은 걸 먹었다
아버지 사는 모습은 볼때마다 안됐지만
밥은 먹어야 그렇게라도 산다
불과 고기
맛이 없을 수가 없는 조합
인류의 번영 과정을 떠올리게 되는 조합
아버지랑 뭘 먹을때는 가급적 그 음식의 기원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는데 잘 되지 않는다
아버지는 이미 쇠락했고 나도 쇠락하는 나이다
각자의 전성기를 모두 흘려보낸 두 사내가
오래된 식탁에 마주앉아 먼저 태어난 사람 70살 생일밥을 먹는다
아버지는 잠들고
나는 왔던 길을 돌아 멸망으로 향한다

AND

돼지국밥을 먹다


아버지랑 병원 근처 국밥집에서 돼지국밥을 먹는다
이 고기가 어떻게 내 앞에까지 왔는지
왜 바닷가에 있는 부산같은 대도시에서 돼지국밥이 유명한지
서울 변두리에 부산돼지국밥집이 있는 것이 합당한 일인지
떠오르는 생각들은 일단 잊고
먹는일에 집중한다
마주앉은 아버지는 방금전 일도 잊는 사람이 됐고
다행이라면 옛날에 태어난 나를 잊지는 않았다

- 아버지.....
- 어, 왜?

말을 이을 수 없어서 국밥에 고개를 묻는다
뜨거운 김이 안경에 서리고 뺨을 달군다

- 아버지, 맛이 어때요?
- 응, 맛있어.

- 역시 한국 사람은 따뜻한 국밥이죠?
- 응, 맛있다.

- 아버지.....
- 어, 왜? 나 괜찮아.

말을 이을 수 없어서 식어버린 뚝배기에 고개를 묻는다
자꾸만 고개를 묻는다

AND

노릇

아버지한테 전화했다
- 아버지, 가방안에 약통 꺼내서 약 세 개 들은 거 드세요
어머니와 통화했다
- 엄마, 아버지랑은 일상적인 대화만 하세요
동생과 통화했다
- 야, 아버지한테는 복잡한 얘기하지 말고 그냥 안부만 전해라
아버지랑 통화했다
- 아버지, 행복약국이라 적힌 약 봉지에 든 약 드세요
아버지가 아내 이름을 기억했다
유년의 나를 모르는 아내와
유년 이후의 나를 모르는 아버지가
반갑게 통화했다
아내랑 통화한 걸 기억 못하는 아버지와 통화했다
- 아버지, 약통에서 아무 색이나 꺼내세요
- 어 그래. 내가 좋아하는 보라색으로 꺼냈다
- 예, 아버지. 잘하셨어요. 네 칸 중에 약이 하나만 들어 있는거 드세요.
- 약이 하나만 들은 게 두 개 있다.
예, 아버지 그 중에 하나 꺼내서 드세요
- 어 그래. 고맙다.
아버지는 점점 쉬운 사람이 되고
큰 아이 노릇은 점점 어렵다

AND

토스트를 먹다

오후 네 시,
동네 초등학교 앞 '새참 토스트'
참새처럼 재잘거리는 아이들과 섞여서​​
토스트를 먹는다
싸구려 식빵에 밴 달콤한 마가린 냄새
양파랑 쪽파를 썰어 넣고 부친 계란
얇은 햄과 치즈
머스타드와 케첩, 설탕까지
모든것이 조화로운
토스트를 먹는다
아침에 퇴근하던 아버지가
출근하는 사람들의 반대편을 걸어와
아침까지 잠들지 않던 내 방 앞에 두곤 했던
20년 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은 맛의
토스트를 먹는다
뒤섞여 조화롭지 않고
머릿속이 뒤죽박죽인 아버지를 생각하며
그때보다 더 커버린 중년의 아이가
아이들 사이에 우뚝 서서
토스트를 먹는다

AND

보통날

하루에 17개의 담배를 피운다
양치질은 두 번
일주일에 한 번 자동차에 기름을 채운다
소주는 한 두 번 마시고
운동을 하는 저녁도 있다
달에 한 번 정도는 참치를 먹는 사치를 부리고
다음날 후회하기도 하지만
너를 사랑하니까 다 괜찮다고 느낀다
생각과 느낌은 어떻게 다른지 생각하는
이런 보통날에
서울 사는 아버지와 매일 두 번의 통화가 더해지고
오늘이 몇년 몇월 몇일 무슨 요일인지 모르는 아버지에게
지금이 가을인 건 아는 아버지에게
그래서 다행인 아버지에게
예, 아버지. 잘 하셨어요. 란 말만 반복하는
보통날을 산다

AND

맥주를 먹다

친구를 만났다
먼 내륙에서 바다까지 나를 보러 온 친구
함께 커피를 마시고
누가 날 찾아올때마다 먹지만
어떻게 생긴지 모르는
삼숙이 매운탕을 먹었다
자리를 옮겨 비틀즈를 들으며 맥주를 먹는다
멀리 오징어 잡이 배 불빛이 선명하다
아직은 비틀거리지 않는 시간이다
맥주을 먹는지 안주로 나온 굴 튀김을 먹는지
그것도 아니면 그냥 친구의 얘기를 먹는지
잔이 빌 때마다 묻지도 않고 잔을 채워주는 사장님까지
먹는 일도 사는 일도 항상 질문 속에 있다
친구는 생활인이니 술은 내가 사야지
그렇다면 내 삶은 생활이 아닌지
그렇다면 어디까지가 생활인지
일탈은 생활에 포함되는지
우리 중에 일탈하지 않은 사람은 누군지
잘 지내란 말로 헤어질 뿐인 친구와
abbey road 위에서 비틀거리며 맥주를 먹었다

AND

터미널

밤 10시,
동서울 터미널
오가는 사람들 사이로 짠내가 흐른다
터미널에서는 항상 뭔가를 굽고 있다
마른오징어, 문어발, 쥐포, 옥수수, 군밤
방금 도착했거나 어딘가로 가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
터미널에는 그들의 인생이 구워지는 냄새가 난다
파는 사람, 사 먹는 사람, 그냥 지나치는 사람까지
다들 뭔가를 구워 먹고 산다
자신이건 남이건 구워 삶는 삶고 산다
누구나 벗겨지거나 벗겨먹은 허물 하나쯤 안고 살고
터미널에는 인생들이 스치며 만든 짠내가 난다

AND

가을

하루만에 찾아온 가을
나무 그림자에서도 가을이 보인다
붉게 또는 노랗게 사멸하는 이파리들
여러 색깔로 피었다가 여러 색깔로 생을 마치는 꽃들
가을은 저무는 계절
삶도 가끔은 계절을 따라가기도 하고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은 나에게
가을은 무슨 색입니까?

AND

아버지의 집

오래된 벽지
오래된 침대
오래된 옷장
오래된 식탁
오래된 책상
오래된 티비
오래된 냄비
오래된 냉장고와 세탁기
더 오래된 아버지
사라진 어제와 오늘
나보다 더 오래된 기억
흐트러진 아버지의 흔적을 쫓아보는
오래전 아이

AND

악몽 6

자동차 조수석에 실려서 어딘가로 향하고 있다
가면을 쓰고 운전하는 사람이 누군지 모른다
차창 밖은 온통 해가 지는 빛깔이다
눈이 부셔서 조수석에 앉은 사람이 누군지 모른다
바로 옆 차 운전수도 가면을 쓰고 있다
운전수도 조수석에 앉은 사람도 눈이 부실 것이다
이제 차창 밖은 온통 밤의 빛깔이다
눈이 멀어서 여기가 어딘지 모른다
운전하는 사람이 누군지
조수석에 앉은 사람이 누군지
이 자동차가 어디로 향하는지 모른다

AND

족발을 먹다

족발을 먹는다
마늘족발 대(大)자
전화한지 삼십분도 안되서
1.8킬로미터를 달려오는 배달민국
족발은 서민음식이라는데
얼마부터 얼마까지가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서민 음식인가
나는 서민인가
족발, 쟁반국수, 국수 소스, 새우젓, 상추, 배추, 마늘, 고추, 된장, 콜라까지 모든것이 플라스틱 안에 들어있다
무언가를 플라스틱과 함게 먹는 일은 의식조차 못할만큼 익숙하다
위쪽에 살점을 다 먹으니 바닥에 뼈가 보인다
발가락 뼈도 있고 종아리 뼈도 있다
애인과 마주앉아 뼈를 잡고 살을 뜯는다
사랑은 육식을 닮았다
앞다리든 뒷다리든 상관없이 맛있다
국산이든 수입이든 상관없이 맛있다
눈 앞에서 먹으니 그게 사랑인가
애정하는 것은 돼지고기인지 당신인지
둘 다 아니면 허겁지겁 족발을 먹는 나인지
먹기 위해 키워지는 것과 먹기 위해 사는 것 사이에서
혼란스럽게 족발을 먹는다

AND

오렌지 쥬스

순대국과 오렌지 쥬스
감자탕과 오렌지 쥬스
갈비탕과 오렌지 쥬스
추어탕과 오렌지 쥬스
내장탕과 오렌지 쥬스
짜장면과 오렌지 쥬스
군만두와 오렌지 쥬스
탕수육과 오렌지 쥬스
코카콜라와 오렌지 쥬스
아이스커피와 오렌지 쥬스
감귤 쥬스와 오렌지 쥬스
오렌지 쥬스와 오렌지 쥬스

19세기와 오렌지 쥬스
20세기와 오렌지 쥬스
21세기와 오렌지 쥬스
프로이트와 오렌지 쥬스
히틀러와 오렌지 쥬스
안네 프랑크와 오렌지 쥬스
빌 에반스와 오렌지 쥬스
게리 멀리건과 오렌지 쥬스
코비드 19와 오렌지 쥬스
BTS와 오렌지 쥬스
역시, 20세기와 오렌지 쥬스

20세기에도
21세기에도
당신과 오렌지 쥬스
오렌지 쥬스 맛있다

AND

21세기

역에 들어서자마자
지하철에서는 마스크를 써야 한다는 안내 방송이 흘러나오는 21세기를
미래영화가 현실이 되버린 현실을 나는 사랑할 수가 없다
이런 시절에도 청량리역 대합실에는 비둘기가 날아들고
날마다 새 건물이 들어서는 서울'특별'시지만 몇 년 만에 찾은 고향 동네의 시장통과
지하철을 나와 집으로 향하는 언덕길은 크게 바뀌지 않았고
변한 건 옛날의 할아버지를 닮아버린 아버지와 그때의 아버지를 닮아버린 내 모습 뿐
기억이 멈춰버린 아버지랑은 큰 건수가 있을때면 늘 그렇듯 순대국을 먹는다
express란 아름이 붙은 고속 열차 덕분에 170킬로미터 떨어져 사는 아버지랑 밥을 먹고도 한나절 만에 집으로 돌아올 수 있는 21세기를
서로 걱정은 하지만 각자 알아서 살아갈 뿐인 현실을 나는 사랑할 수가 없다

AND

커피

믹스 블랙 가리지 않고
커피로 입 안을 헹구는 일이 좋다
음식 찌꺼기가 씻겨 나가고
이 사이사이로 커피향이 묻는다
사실은 블랙커피 쪽의 텁텁함이 믹스커피의 달달함보다 좋다
물은 너무 밍밍하고
탄산음료는 이가 상한다
양치질은 하기 싫고 입 속은 수수께끼처럼 답답할 때
커피로 입 안을 헹구며
커피를 즐겨 마셨다는 옛 왕조와 제국의 왕들도
나와 같은 행동을 했을거란 생각을하는 일이 좋다
옛날 왕들보다 못할 게 없는 지금의 삶이 좋다
믹스커피 보다는 블랙커피가 좋다
커피로 입 안을 헹구는 일이 좋다
깨끗해지는 기분이 좋다

AND

기울기

아무리 뒤돌아봐도
모든 것을 원점으로 돌려봐도
내 삶은
사랑에 치우치거나 나에게 치우친다
그러니까,
너에게 치우치거나 나에게 치우친다
이 세계의 자전축 23.4도
돌고 돌고 또 돌면 
언젠간 너에게 닿는 기울기
나는 그 기울기와 너를, 
또는 나를 사랑하였다
원점으로 돌려본 모든 것이 원점
조금은 기울어져 있어도
사랑은 결국 제자리
당신도 항상 나의 자리
어쩌면 기울었기에 고마운 세상

AND

비밀의 문


비밀의 문으로 가는 길을 알고 있다
가파른 언덕을 넘고
덤불숲을 헤치고
사랑하는 사람조차 뒤돌아보지 않고
신발이 다 닳아 맨발이 되도록
걷고 또 걸으면 다다르는 곳

비밀의 문 앞에 서 있다
주문을 외워 문을 열고 한 발짝만 내딛으면
그곳은 미지의 세계
누구도 밟지 않았던 땅
일 만 개의 달이 동시에 지고
구름은 사선으로만 떠 있는 곳
그러나 당신이 존재하지 않는 곳

비밀의 문 앞에서 뒤를 돌아보았다
당신을 뿌리친 자리에 수 많은 내가 있다
한결같이 울고만 있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당신이 있길 바랐던 자리에 수 많은 나만 있다
모든 내가 뒤를 돌아보고 있다

비밀의 문 안에는 비밀이 없다

AND

창문이 있던 집

그 집엔 창문만 있었다
바깥과 이어진 단 하나의 통로
창문 안에는 사람이 있었다
창밖을 내다보는 사람이 있었다
창문 옆에 몸을 숨기고
나를 내려다보던 사람이 있었다
나는 담장 너머로 그 사람을 들여다보려고 했지만
한 번도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그 집엔 그림자같은 사람이 있었다
아니, 그림자만 있었다
먹지도 않고 잠들지도 않는 존재
나를 내려다보던 존재
나만 알고 있는 존재
갇힌 사람
이제,
그 집엔 대문이 있고
사방으로 창문이 있지만
여전히 창 밖에서 나를 들여다보려고 애쓰는
문밖에 있는 내 어린 그림자를 내려다보는
내가 산다

AND

투게더를 먹다

여름밤
1974년생
나보다 네 살 많은 아이스크림을 먹는다
동생과 둘이 먹던 삼십 년 전엔 서로 더 먹으려고 선을 긋고 다투기도 했지만
원한다면 혼자서 한 통 다 먹을 수 있는
모자라면 한 통 더 사 먹을 수 있는
'함께'란 이름을 가진 아이스크림을 애타게 먹고 싶지는 않은
21세기를
나는 사랑한다
열대야에 아이스크림이 빠르게 녹고
숟가락으로 녹은 부분만 살살 긇어 먹는다
달콤하다
숟가락이 닿은 부분은 더 빠르게 녹고
입 안이 달콤할수록
단단함이 사라지는 속도는 북극의 빙하가 녹는 속도만큼 빠르다
다 먹지 못하고 냉장고에 넣는다
하루만큼 유예된 멸망도 입 속에선 달콤하다
어쩌면 마지막인 여름밤
어쩌면 마지막인 귀뚜라미 울음소리를 들으며
아내와 나
온 가족이 함께 '투게더'를 먹었다

AND

봤다

죽어가는 나무를 봤다
죽어가는 새를 봤다
죽어가는 벌레를 봤다
죽은 나무를 봤다
죽은 새를 봤다
죽은 벌레를 봤다
죽어가는 사람과 죽은 사람을 봤다
아직은 웃는 너와 병든 나를 봤고
세상의 끝을 봤다

song ver

봤다 d key

죽어가는 나무를 봤다 1 4
죽어가는 새를 봤다 1 5
죽어가는 벌레를 봤다 1 4
죽어가는 지구를 봤다 1 5 1

썩어가는 바다를 봤다
신음하는 하늘을 봤다
상처뿐인 세계를 봤다
죽어가는 지구를 봤다

죽은 나무를 봤다 6 5 1
죽은 새를 봤다 6 5 1
죽은 벌레를 봤다 6 5 1
죽은 미래를 봤다 6 5 6

죽어가는 사람과 죽은 사람을 봤다 1 5 4 5 1
아직은 웃는 너와 병든 나를 봤다 4 5 4 5 1

세상의 끝을 봤다 4 5 4 

죽어가는 나무를 보고 죽어가는 지구를 봤다 1 4 1 5 1

AND

기록

최대, 최고, 최장
깨지지 않을 것 같은 기록은 있지만
깨지지 않은 기록은 없다
모든 기록은 갱신된다
사상 최대의 인구수
사상 최대의 전염병
사상 최고의 연평균기온
사상 최장의 장마
사상 최고의 우울
사상 최대, 최고, 최장의 풍요 속에
확진자수도
장마 일수도
우울한 날도
실타래를 풀 듯 늘어만 간다
매일 매일 가보지 않은 길 위에서
우리는 가장 긴 겨울로 가고 있다
기록이 사라진 기록을 향해
겨울을 버텨도 봄이 오지 않는 최초의 기록을 향해 가고 있다

AND

나이트 게임

8월, 깨끗한 밤
약간의 바람이 불고
비에 씻긴 가로등과 그 가로등이 비추는 벚나무 이파리가 유난히 반짝이는 밤
바다를 향해 길게 뻗은 구름이 새하얗고 빠르게 흘러가는 밤
반경 일 킬로 미터 안에 나 혼자 뿐인 것 같은 밤
물길을 따라 바다쪽으로 걷는 밤
허나 물보다 빠르지 못한 밤
물속에 구름도 새하얗고 빠른 밤
조명탑 아래 강변의 경기장엔 배구를 하는 사내들의 함성과 탄식
이 밤만큼 깨끗한 사람들
거짓없이 바람 부는대로 흔들리는 밤의 나무들
다시 비가 내리고
구름에도 바다에도 닿지 못하고 끝나 버리는 나이트 게임
나만 깨끗해지면 되는 깨끗한 밤

AND

참치회를 먹다

참치회를 먹는다
얼었다가 녹은 걸 먹는다
얼렸다가 녹인 걸 먹는다
모든 인간은 어쨋든 다른 생명을 먹는다
넷이 앉아서 자리에 없는 사람을 욕하면서 먹는다
참치는 욕을 먹고 살진 않았다
세상에 사람보다 참치가 흔한건지
무한리필 해주는 참치를 먹는다
참치를 먹는지 다른 걸 먹는지도 모르고
주방장이 주는대로 먹는다
세상에 참치보다 술이 흔한건지
참치를 먹는지 술을 먹는지 모르고 먹는다
참치회를 먹는다
셋이 남아서 먼저 간 사람을 욕하면서 먹는다
참치를 간스메로만 먹어봤다던 사람을 욕하면서 먹는다
참치는 욕을 먹고 살진 않았다
참치는 죽고 나서야 욕을 듣는다
모든 인간은 욕을 먹는다

AND

곰국을 먹다

곰국을 먹는다
꽝꽝 얼린 것을 녹이고
밥을 말아서 먹는다
시절은 잿빛이라도
쌀밥과 곰국은 뽀얗게 같은 빛이다
혼자서 곰국을 먹는다
뼈를 부딪치던 사랑은 어디 갔을까
뼛국물보다 든든하던 사람은 어디 갔을까
뼛속까지 사랑해도 이별을 하고
혼자먹는 곰국은 이별과 같은 말이고
곰국의 반댓말은 사랑인가 이별인가
얼었던 곰국을
혼자서 먹어도
뱃속은 따뜻하다
눈물은 빛깔이 없고
나는 소금도 안 친 곰국을 먹는다

AND

비 그치고

비 냄새도 좋지만
비 그친 냄새가 참 좋군
불어난 강물은 빠르고
그 위를 바삐 건너가는 사람들이 보기 좋군
물기를 먹은 나무 이파리는 뻔한 말로 싱그럽고
비를 피해 숨어 있던 새들은 먹이를 찾는지 사랑을 찾는지 분주하군
잠깐 개었다가 다시 내릴 비를 품은 하늘아래
이 모든 풍경이 스며있다
나는 가만히 본다
비도 맞지 않았으면서
비를 맞은 사람처럼 우두커니 서 있는 일이 좋군
다시 비가 내리고
새들이 모여드는 다리 아래서
비를 피하는 일이 좋군
강을 건너는 사람들은 비가 와도 바쁘군
비 그친 냄새도 좋지만
비 냄새도 좋군
비 그치고 갈 곳이 없어도
비를 맞지 않고
가만히 보기만 하는 일이 참 좋군

AND

누운 모기

모기들이 나란히 누워있다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수가 점점 늘어간다
겉보기엔 멀쩡한 녀석도 있고
몸이 터진 놈도 날개가 부스러진 놈도 있다
다 내 손에 죽었다
가장 재빠른 놈도 내 피를 먹으면 몸이 무거워진다
벽에 붙어서 편안한 상태로 내손에 죽는다
피를 먹고 피를 토하며 죽는다
살고자 하는 일에 욕심이 있는지
무언가를 죽이는 일에 자격이 있는지
과한 것은 욕심이고 모자라는 것은 자격인지
흰 벽지에 묻은 내 피는 삶인지 죽음인지
누운 모기 옆에 머리를 대고 누워서
누운 모기를 본다

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