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무덤

돌틈 사이를 비집고 벌레들이 쏟아져 나온다
가장 깊은 곳에서 죽음을 파먹고 검게 변한 것들
정오의 볕이 내리쬐자 죽어 바스러진다
죽음이 죽음으로 이어지는 순간이 지나고
벌레들이 다시 쏟아져 나온다
밤이 되자 더 검게 변한 것들
의식처럼 무덤 주위를 두 바퀴 돌고
줄지어 다른 돌무덤으로 향한다
달빛도 없는 밤에
철모르는 아이는
달맞이꽃만 활짝핀 무덤가에서
벌레들을 밟아 죽이며 놀았다

AND

운동화

운동화 끈을 고쳐 맸다
삶은 약간 더 엉망이다
운동화는 색이 바랬고 군데군데 흠집이 있다
언제든 새걸로 시작할 수 있는 일이다
바닥에는 나무에서 떨어져 뭉개진 버찌가 붙어있다
익으면 떨어져서 무심코 밟혀 부서지는 것들
다시 시작할 수 없는 일이다
공원을 걷는다
한 바퀴 한 바퀴 속도가 붙고
운동화는 걷는만큼 생을 다하고
버찌는 자꾸만 밟히고
앞사람 뒷사람 먼저 온 사람 늦게 온 사람
수 많은 운동화들이 궤도를 돌아 내일로 간다
밤의 공원에서,
삶은 그보단 약간 더 엉망이다

AND

오징어 회를 먹다

친구를 만났다
오후 세 시,
바닷가에서,
10년만에,
풍년이라는 오징어 회를 먹는다
10년 전도 지금도
산 것을 잡아 먹는 일에 풍년이란 말을 쓰는 시절이다
친구 앞에선지 오징어 회 앞에선지
그것도 아니면 술 앞에선지
아내도 뒷전, 생활도 뒷전이다
앞서는 것이 있어야 뒷전인 것도 있다
날로 먹는 오징어는 끈적하다
두고온 미련 때문인지 원래 그런지
취기가 오르자 오징어가 붉게 달아오른다
초장 때문인지 발가벗겨진 것이 부끄러워 그런지
답을 알면서도 자꾸 되묻는 일은
세상이 모르는 다른 답을 듣고 싶어선지
바다에는 오징어보다 플라스틱이 많고
그런 바다에서 잡은 오징어를 먹어도 되는지
플라스틱이 오징어고 오징어가 플라스틱이 아닌지
생활은 왜 계속 뒷전으로만 밀리는지
생만 있고 활이 없는 삶
그래서 자꾸 날것을 먹게 되는지
멀리 오징어 잡이 배가 불을 밝히고도
생활은 여전히 무언가의 뒤에 있고
흐트러진 채 흐트러진 오징어 회를 먹는다

AND

하지 무렵

이맘 때, 늦은 오후에 바람이 불면 참 좋지
저녁에게 오지 말라고 재촉하는 것 같아 좋지
건너편 옥상에 걸린 빨래가 흔들리는 걸 보며
담배 한 대 피우는 일과 그 담배 연기가
길어진 낮의 끝으로 사라지는 걸 보는 일이 좋지
그때 누구라도 함께 있어서
낮술을 먹는다면 더욱 좋지
서로의 붉어진 얼굴을 감추지 못하는 일과
불콰한 기분으로 바닷가에 가는 일,
세상엔 돌아갈 수 없는 일이 많다는 것과
곧 어둠이 올 것을 알지만
모래 위에서 즐거운 젊은이들을 보며
오래전 이야기를 하는 일이 좋지
그 순간이 일 년 중 가장 긴 저녁만큼 유예되는 일이 좋지
파도의 일렁임을 따라 입을 맞추는 일로
아직은 가슴속이 뜨겁다는 걸 아는 일이 좋지
어느샌가 시작한 노래는
바다 너머로 추억이 모습을 감추고 나서도 끝나지 않지

AND

자화상 - 볶음밥을 먹다 -

토요일 오후
주섬주섬 일어나
냉장고를 뒤진다
마늘 양파 파프리카 그리고 토마토 케첩
뱃속에 들어가는 것들은 이름만 불러도 기분이 좋다
편으로 썬 마늘을 소금 후추 넣고 기름에 지지다가
마늘이 갈색으로 변하면
나머지 재료와 밥을 넣고 볶는다
지지고 볶고 산다는 표현만큼
먹고 가는 일도 진부해진지 오래다
냄비째 상에 올린다
냄비가 둥글어 밥도 둥글다
숟가락으로 눈과 입을 파낸 볶음밥은
어딘지 나를 닮았다
나를 먹는다는 생각으로
턱에서 시작해서 이마까지 깨끗하게 먹는다
나를 파 먹고 또 하루를 살았다

AND

나무

당신 이마에선 나무 냄새가 난다
천년사찰 대웅전 기둥의 냄새
한 이름에 안기지 않는 나무를 안았을 때의 냄새
당신 뺨에선 나무 냄새가 난다
가을비에 잠긴 낙엽의 냄새
앙상한 겨울 가지의 냄새
봄이 사라진 나무 냄새가 난다
당신이 나무라면
그리고 나도 나무라면 ​
당신이 세상의 반대쪽 끝에 있어도 당신을 느낄텐데​
내가 나무라면
아니, 당신이 정말 나무라면
당신에게 달려가 힘껏 안아줄텐데
나도 당신도 나무가 될 수 없고
집안 곳곳에 당신의 마른 냄새만 남았다

 

AND

된장국을 먹다

새벽 두 시,
된장국을 먹는다
허기를 참지 못하고 
멸치 육수도 내지 않고 된장과 토란만 넣고 끓인
맑고 담백한 토란 된장국을 먹는다
배추, 아욱, 시금치부터
새우, 게, 돼지고기까지
아무거나 넣고 끓여도
한 가지 재료만 넣어도 여러 재료를 섞어 넣어도
맑게 끓여도 탁하게 끓여도
다 맛있는 된장국을 먹는다
어차피 된장국인 된장국을 먹는다
된장은 힘이 세고
나도 된장처럼 살겠다 다짐하며 된장국을 먹는다

AND

소식

21세기에도 소식이 바다를 건너오나
지구 반대편의 이야기가 이곳에 오기까지 1초도 걸리지 않는 세상을 살면서도
나는 어떤 소식을 기다리고 있다
매일 다른 바람이 불고 새로운 파도가 일렁이는 바닷가에서
그것은 세상을 떠난 사람의 안부이거나
이 세상에서 사라진 이야기다
어느날 불어온 바람이
내게만 들리는 목소리로 작게 속삭여 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바다를 건너 올 소식을 기다리고 있다

AND

와병(臥病)

한동안 누워서 지냈다
너는 내 옆에 눕기도 하고
볕이 드는 창 앞에 앉아서 책을 읽거나
장 보러 바깥에 다녀오거나 했다
그러는 사이에 나는 누워만 있었다
가만히 누워서
내 옆에 누운 네 뺨을 만지거나
책을 읽는 네 눈동자를 쫒거나
밖에 나간 너를 기다렸다
잠깐 일어나면 어지러웠고
누우면 죽은것 같았다
너와 함께 저녁밥을 먹으며
사랑과 절망, 열정과 무력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밥을 먹자마자 다시 누웠다
울기라도 하면 나아질텐데 슬픈 일은 없었다
날이 가는 걸 알면서도
누워서 눈을 감고 있거나 너를 보는 일이 전부였다
너는 계속 내 곁에 있었다
내 옆에 누워서 머리를 쓰다듬어 주거나
책을 읽다가 눈을 마주쳐 주거나
외출 후에는 다녀왔어, 라고 했다
나는 여전히 오래 누워 있지만
조금은 살아갈 힘이 생겼다

AND

낮을 갈다

칼갈이 가게 앞을 지났다
각종 칼, 가위, 호미, 낮 갑니다
무뎌지면 갈아 쓰는 게 보통인데
삶은 닳고 닳아 점점 무심해지기만 한다
잘못 갈아 못 쓰게 된 것인지
갈고 갈아서 더 갈 것도 없게 된 것인지
날이 선 것보다는 덤덤한 지금이 나은지
내게도 반짝반짝 기세 등등하던 때가 있었는지
낫을 갈면 사람도 헤치고
낮을 갈면 밤이 온다
봄이 오는 길을 따라 해는 점점 길어지는데
나는 낯빛이 어둡다
나는 지금 날카로운 밤이다

AND

보쌈을 먹다

삶은 고기를 먹는다
삶는 것과 찌는 것의 차이는 뭔지
어차피 삶은 찜통이 아닌지
뼈와 기름이 적당히 붙어 있는 삶은 고기를 먹는다
적당하다는 말보다 적당하지 않은 말이 없고
오늘도 적당히 보낸 하루가 끝나는 중이다
상추에 고기를 얹고 마늘, 고추, 김치 같은 것을 그 위에 얹어서 먹는다
싸 먹으니까 보쌈인가
가능하다면 삶도 한 입에 쌈 싸먹듯 살고 싶다
내 뱃속의 고기가 된 돼지의 삶
고기는 삶아 먹어야 맛이고 삶은 고기다
삶은 고기 삶은 고기 삶은 고기​
삶은 고기를 먹는다

AND

우리는

이란과 미국이 전쟁을 할지도 모른다는 소식에 바로 이어서
코스피니 다우존스니 하면서 주가가 내렸다는 뉴스가 나오는 사이에
따뜻한 겨울 때문에 겨울 눈 축제를 못해서 지역경제에 타격이 있다고 걱정하는 사이에
지구를 덮친 바이러스를 두고도 누군가는 
아니, 많은 사람들이 
자신과는 1도 상관없는 세계 경제를 걱정하는 사이에
1이란 숫자가 이렇게 가벼운 것인가 생각하는 사이에
눈에 보이지도 않는 네트워크를 타고 흘러갈 글을 키보드로 두드리는 사이에​
​겨울이 봄같고 겨울이 가을같고 겨울이 여름같고
얼음은 녹고 나무는 타고 비는 끝없이 내리거나 한 방울도 내리지 않는 사이에
겨울은 녹거나 여름은 타거나
겨울과 여름이 동시에 사라지는 사이에
우리 모두가 계절처럼 사라질지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는 끝을 향해 가고 있다

AND

지나쳤다

할아버지 약사가 약국 문을 열 때, 나는 그곳을 지나쳤다
읍내 사거리에서 무언가를 찾고 있는 친구를
길바닥에에서 봉지에 담긴 귤을 파는 할머니를
손을 잡고 횡단보도를 건너는 아빠와 딸을
시장 한 복판에서 하체가 없는 걸인을
나는 그냥 지나쳤다
한 밤 중에 발톱을 자르는 아버지를
술 취해 비틀거리는 어머니를
나 때문에 울고 있는 당신을
몸살로 출근도 못하고 끙끙대는 나조차도
나는 그냥 지나쳤다
사고로 멈춰선 앞차를
타버린 나무와 긴 겨울비를
어딘가에서 전쟁이 날지도 모른다는 뉴스를 지나쳤다
모든 길을
모든 사람을
모든 순간을
나는 지나쳤다
케냐 커피에선 케냐 맛이
두 잔 째의 커피에선 두 잔 째의 맛이 나고
나는 지나치듯 커피를 마셨다

AND

잡채밥

잡채밥을 먹는다
칼국수도 7000원
백반도 7000원인 시대
8000원으론 남는게 없고
10000원은 과하고
그렇다고 9000원을 받기는 애매한
8500원 짜리 잡채밥을 먹는다
밥 위에 적당량의 당면, 고기, 야채
달지도 짜지도 않은 계란국
적당함은 어정쩡함
어정쩡함은 망설임
망설임의 값 500원
오늘도 칭찬할 일도 비난할 일도 없는 하루
지갑엔 내게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만 원짜리 한 장
​12000원 짜리 잡탕밥은 너무 과하고
혼자 5000원짜리 짜장면을 먹는 일은 마음 속 어딘가를 긁어 놓기에
뭘 먹을까 망설이다가 어정쩡하게 주문을 하고 적당한 가격의 잡채밥을 먹는다

AND

카레를 먹다

양파 껍질은 잘 벗겼는데
감자 껍질 대신 손가락 껍질을 벗겼다
피 묻은 감자를 씻어서 잘게 잘랐다
감자 대신 손가락을 자르진 않았다
다행이다
언제든 다칠 수 있는 인간의 약한 몸을 생각하면서 카레를 만든다
그 몸을 지탱하기 위해 잘게 다져진 재료들
결코 단단하지 않은 것들끼리 어울려 산다
아무 재료나 넣어도 맛있는 마법의 가루
인도에서 시작해서 영국과 일본을 거쳐 전세계로 퍼지면서
내 밥상에 올라온 세월을 생각하면서 카레를 먹는다
입 안의 카레향은 누군가의 희생
결코 옳지 않은 일들로 하루를 산다
강황과 울금 사이
커리와 카레 사이
감자껍질과 손가락 껍질 사이
마주 않은 나와 너 사이에서
카레를 먹는다

AND

뼈해장국을 먹다

어제도 술을 마셨다
장터 국밥집에서 뼈해장국을 먹는다
우거지, 올갱이, 콩나물 해장국도 있고 짬뽕을 먹어도 되지만
뼈해장국을 먹어야 할 것 같은 날이 있다
숙취로 정강이나 무릎뼈가 쑤신날이 있다​
40년을 먹어봐도 해장이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름이 해장이니 뼈해장국을 먹는다
남의 뼈로 내 뼈가 단단해지는 기분으로 뼈해장국을 먹는다
스페인, 독일에서 온 돼지등뼈에서 살을 발라내면서
죽어서 바다를 건넌 돼지와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먹는 세상을
훗날, 유럽의 어느 시골 마을에서 해장국집을 차릴 생각을 한다
뼛국물을 바닥까지 비우고 나온 국밥집 앞
인파 사이로 뼈를 삶는 솥뚜껑이 들썩거리며 웃는다

AND

소맥을 먹다

소맥을 만다
섞는 걸 만다고 하는 이상한 세상
많은 쪽이 작은 쪽을 잡아 먹는 당연한 세상
오늘도 그만둘까 생각했다
그만두는 대신 소맥을 만다
그만뒀어도 소맥을 말았을 것이다
매일 습관적으로 소맥을 말고 있으니 삶이 돌돌 말리는 것을 말릴 수가 없다
술에 혀는 꼬이지만 삶이 뒤틀려 꼬이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1:9로 2:8로 3:7로도 말고 어떤날은 반반으로 만다
소주의 비율이 높아질수록 술은 달고 삶은 쓰다
황금비율이니 꿀 맛이니 하며 마신다
삶이 아니면 죽음인 일
나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
부끄러움을 모르고 소맥을 만다
부끄러움을 잊으려고 소맥을 마신다
소맥은 쏘맥이라 불러야 맛이지만
여전히 살아서 쏘맥을 말고 있는 나는 쑥맥은 아니다
병이 사람과 사랑을 병들게 하고
가지런히 놓인 술병이 나와 내 사랑을 병들게 한다
빈 앞자리와 마주 앉아 텅빈 소백을 만다

AND

메리 크리스마스

세계 최대의 명절​
남의 생일을 이렇게까지 축하해도 되나
​키스와 섹스와 크리스마스는 만국 공통어
아기 예수와 같은날 태어났던 사람들은 모두 흙으로 돌아갔지만
아기 예수만은 해마다 다시 태어나고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는 각설이도 아닌데 죽지도 않고 다시 돌아온다
늙은 산타클로스는 하늘에 닿으려는 빌딩 꼭대기 집무실에서​
푹신한 회장님 의자에 몸을 기댄채 눈을 감고
나이는 먹고 몸에 힘은 빠지는데 남의 생일에 사서 고생하던 일을
전 세계 인구가 점점 늘어나니 점점 늘어만 가는 선물 상하차 일을 혼자서 하던 옛날을
붉은 코를 깜빡거리며 졸음 운전을 하던 루돌프와 함께 하던 시절을
함께 고생했던 동료들과 이 세상에 없는 아이들을 생각한다
주식회사 산타클로스는 일 년에 한 번씩 파견직 산타클로스와 단기 알바 산타클로스를 채용하고
주소록 작업을 하고 비정규직 산타클로스의 임금을 계산하는 또 다른 비정규직 산타클로스들을 기간제로 채용한다
모든 결재서류에는 사슴뿔로 만든 직인이 찍히고​
루돌프의 자리는 자동차가 차지했다
뿔을 잃은 사슴은 슬피 울었다
메리크리스마스 메리크리스마스 메리크리스마스
모든 일에는 대가가 있다
부모는 세금을 내고 아이들은 선물을 받는다
메리크리스마스 메리크리스마스 메리크리스마스
메리는 메롱과 같은 말이고 해피하지 않아도 해피크리스마스
메리크리스마스 메리크리스마스 메리크리스마스
내일이면 실직할 수 천 만의 산타클로스와 그 가족들도
일자리를 잃은 루돌프와 친구들도
메리크리스마스 메일크리스마스 매일크리스마스

AND

믹스커피를 먹다

막대기형 비닐 포장의 끝부분을 뜯는다
가스렌지 위에선 물이 끓는 소리
주전자 주둥이를 나오면서도 살아서 끓고 있는 물을 종이컵에 붓는다
믹스커피는 종이컵에 팔팔 끓인 물이라야 맛있다는 돌아가신 외할머니의 말
할머니 제삿날에는 여전히 믹스커피가 상 위에 놓인다
한 모금 한 모금 입 안 가득 달콤한 향이 돌고
식도를 타고 미끄러져 내려가는 물큰한 단내
끈적해진 피가 몸 안에 흐르고 심장 박동을 따라 머릿속까지 닿으면
내 어린날 믹스커피를 타주던 엄마 얼굴이 떠오르고
비로소 하루가 시작된다​
죽음과 삶 사이에서
엄마의 엄마와 엄마 사이에서
퇴사와 출근 사이에서
먹다와 마시다 사이에서
끊을 수 없는 당신과 모닝 커피를 한 잔 했다

AND

산불

단풍 지는 계절도 아닌데 산이 탄다
끝을 모르고 끝까지 탄다
불이 다 꺼지고도
잎이 울고 가지가 울고 그루터기가 운다
타서 울고 미처 다 못타서 울고
홀로 타지 못해서 운다
붉은 산의 황홀과 참혹할 수록 아름다운 일
그 찰나의 순간에 새가 울고 들짐승이 운다
마지막엔 사람도 운다
울던 사람이 나무가 되고 타버린 나무가 사람이 되고
사람과 나무가 모여 산이 되고
이런일들이 모여 세상이 된다
흔적없이 타버린 흔적을 남긴다
모두가
울었던 흔적을 세상에 남긴다

AND

라이브 월드

세계는 나를 보지 않아도 나는 세계를 본다
뉴욕 양키즈 스타디움을 넘어가는 홈런볼을 따라가다 비친 하늘에서
아프리카 초원에서 벌어지는 기린의 발길질과 암사자들의 굶주림에서
눈이 녹아가는 히말라야의 풍경을 찍어올린 SNS 사진에서
불타는 열대우림을 다룬 뉴스 클립에서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을 모국어로 쓰는 작가가 쓴 소설 속에서
세계의 비참과 절망, 환희와 희망은 너무도 생생하게 나와 함께 있다
세계는 숨 쉬는 것처럼 나와 같은 시간에 존재한다
눈 앞에서 생생하지만 손 쓸 수 없는 거리만큼 떨어진 곳에 세계가 있다
내 속엔 세계가 있지만 세계 속엔 내가 없거나 그 반대인 일
세계는 세계 나는 나
서로가 각자의 길 위에 있고
나는 다른게 사는 법을 배운적이 없다

AND

백반을 먹다

장날,
읍내 한구석의 식당
나보다 20년 이상 더 산 형들과 밥을 먹는다
전국 어디에나 있는 서울식당
전국 각지에서 모인 우리들
골고루 먹고 한 끼 때우라는 백반
생선구이와 된장찌개가 나오는 백반
초로의 식당 주인이 주문도 받지않고 차려주는 백반을 먹는다
아직은 술이 세월을 쓰러뜨리지 않았기에 소주도 한 병 먹는다
먹는 입은 지금이지만 말하는 입은 옛 일을 씹는 자리
형들이 좋았다는 옛날은 언제였나
나의 옛날보다 오래된 옛날 얘기를
나는 알기도 하고 모르기도 하는 시절을 안주로 삼킨다
사람이 넷이니 두당 반 공기씩
밥 두 공기 추가하고
소주도 한 병 더 시키는
오후 한 시,
어른의 식사​
AND

확률

1년에 두 번 구입하는 로또 복권이 1등에 당첨될 확률
10년만에 탄 비행기가 추락해서 죽을 확률
또는 하늘에서 떨어진 냉장고에 깔려 죽을 확률
하필 내가 지나가는 순간에 다리나 터널이 무너질 확률
연쇄살인자가 되거나 반대로 내가 당할 확률
살거나 죽을 확률
까마득한 확률
순식간에 사랑에 빠질 확률
그보다 빠른 속도로 사랑이 식어버릴 확률
그 사랑이 다시 불타오를 확률
아득한 확률을 바라거나
빗겨가는 일로 산다
AND

가을

모기를 잡았다
흰 벽지에 피가 묻었다
침으로 닦아냈지만 핏자국이 남았다
내 피이거나
당신 피이거나
둘이 섞인 피이겠다
당신과 나와 모기가 함께 여름을 났다
당신과 나만 남아서 함께 겨울을 맞는다
이 작은 방에 함께 흔적을 남길 것이다
AND

세계

내가 있고
당신이 있고
내가 있고
당신은 없고
내가 있고
세상이 있고
내가 없고
세상이 있고
내가 없어도 세상이 있고
당신이 없어도 세상이 있고
당신과 나는 같은 말인지 다른 말인지
세상과 세계는 같은 말인지 다른 말인지
나 이외의 세계에도 당신은 있고
당신 이외의 세계에도 나는 있고
나를 제외한 세계에도 내가 있고
당신을 제외한 세계에도 당신이 있고
당신과 나는 같은 말인지 다른 말인지
있음과 없음은 같은 말인지 다른 말인지
나는 어디 있는지 당신은 어디 있는지
사람들은 다 어디 있는지
세계는 어디 있는지
찻잔 안에 있는지 하늘 아래 있는지
찻잔과 하늘은 같은 말인지
AND

수제비를 먹다

반죽을 만든다
전라도 밀가루와 강원도 수돗물
이런 이십일 세기
달걀은 집에 없고
소금은 깜빡했다
이런 살림살이
이런 정신머리
반죽이 손에 묻지 않을 때까지
뭐든 자꾸 치대면 정이 떨어진다
멸치 국물을 내는 동안
마늘을 다지고
감자 양파 호박 고추 대파를 손질한다
국물에 들어갈 순서대로 손질하고 싶은 내 마음의 순리
멸치를 건져낸 국물에 재료를 넣는다
어떤 모양이든 될 수 있는 반죽을 대충 뜯어 넣는다
벼는 익으면 고개를 숙이고
밀가루 반죽은 수면위로 떠오른다
이러거나 저러거나 내 삶은 한 번도 익어보지 못했다
사랑의 모양이 아니라 이리저리 뜯긴 상처뿐이지만
호박을 더 작게 썰어넣을 걸 그랬다는 내 말에
그렇다고 하는
당신과 마주앉아 후후 불어가며 먹는
수제비는 사랑이니까
뜨거워 입천정이 다 까져도
당신이 맛있다고 하면
그게 사랑이니까
비가오든 안오든
뭔가는 먹어야 하니까
치댈수록 끈끈해지는 당신과
비 내린 다음날 수제비를 먹는다
AND

만두국을 먹다

마주 앉은 사람은 설렁탕을
나는 만두국을 먹는다
뽀얀 뼛국물 안에
고기를 갈아 속을 채운 만두가 잠겨 있고
남의 살을 먹는 주제에
먹으면 피가 잘 돈다는 파도 잔뜩 넣었다
마주 앉은 사람이 고기를 건져 먹다가 웃는다
나는 만두를 건져 먹다가 웃는다
살다보면 누군가와든 마주앉아 뼛국물을 먹는 일이 있다
친한 친구나 덜 친한 친구
처음 보는 사람 또는 자주 보는 사람
연인이거나 연인이었던 사람
방금 이혼 수속을 마친 전 아내
누군가와는 마주 앉게 된다
지금 내 앞에선
곧 나를 떠날 사람이 웃는다
뼛국물을 삼키며 웃는다
입안에서 만두가 터지고
만두에선 시큼한 김치맛이 난다
AND

돈까스를 먹다

아프리카 돼지열병이 유행하고
돼지들은 영문도 모르고 죽어가는데
나는 나랑 사장님 뿐인 가게에서 돈까스를 먹는다
세상에 흔한 비오는 오후 네 시에
비 오는 오후 네 시보다 흔한 돈까스를 먹는다
언제부터 돈까스가 흔해졌나
언제부터 돼지고기가 흔해졌나
사람보다 흔한 돼지고기
흔해지고 나면 전멸의 바이러스가 퍼지기 좋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하군
만날 딴 생각만 하고 있는 나를 닮았다
묵직한 소스가 뱃속에 달콤하게 퍼진다
안도감을 주는 맛이군
어떤 돼지들은 죽고 나는 살았다
어떤 사람들은 죽고 나는 살았다
살아서는 세상에 믿을 놈 하나도 없다고 생각한 날
혼자서 돈까스를 먹는다
모질게 살겠다고 모듬으로 먹는다
AND

생강차를 먹다

 

점심으로 뼈해장국을 먹고

후식으로 생강차를 마시는 오후

대추차를 마시려고 했는데 대추가 다 떨어졌대서

대추차를 못 마시고 생강차를 마시는 오후

조카뻘 나이의 동료와 마주앉아 해장을 말하고

각자의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며 생강차를 마시는 오후

생이 가볍길 바라며

찻잔 위에 둥둥 떠 있는 잣을 씹는 오후

찻잔 바닥엔 무거운 생각같은 생강조각

일부러 끝까지 비우지 않은 찻잔 속을 들여다 보게 되는 오후

AND

이대로 산다면

.....
이대로 죽는다
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