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립커피를 먹다

커피를 시킨다
- 늘 먹던대로 드릴까요
- 예
커피맛까지 세분화된 세상에
먼지처럼 살고 있다
카페 주인이 느리게 흐르는 물처럼
고요하고 자연스럽게 커피를 내린다
쿠키를 굽는 한쪽 구석에서 바다 냄새가 난다
유조선이 바다에 흘린 것 마냥
커피 위에 기름이 둥둥 떠 있다
다 비운 커피잔에서 고등어 굽는 냄새가 난다
- 늘 먹던 맛이 아닌데요. 커피 한 잔 더 주세요
- 예
다음 커피를 기다리다가 트림을 한다
트림에선 순대 냄새가 난다
생의 언젠가 바닷가에서 순대를 먹은적 있다
새 커피에선 늘 마시던 냄새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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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버거를 먹다

동네 슈퍼 빵 코너 구석
2,500원 짜리 햄버거
터미널 제과점에도
다른 동네 마트 빵 코너에도
같은 가격인 납작한 햄버거
시간당 6030원 최저 시급을 받고
식품공장에서 햄버거를 만드는 사람들
그 햄버거를 여기저기로 운반하는 사람들
나랑 같은 걸 먹으며 맛있어 할 사람들
하지만 어쩌면 삶이 지겹기만 할 사람들
빵 사이에 고기랑 야채
싸구려 소스와 허름한 포장지
쉴틈 없는 제조 공정과 굳건한 대량생산 시스템
자신의 생산품을 제 돈을 주고 소비하는 대중
반복 반복 반복
삶 삶 삶
그것은 햄버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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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탕을 먹다 - 감자탕의 반대말 -

감자탕을 먹는다
이베리아 반도에서 온 돼지 등뼈
이국적인 감자탕
이국의 반대말은 뭐지
그게 뭐든
반대말을 잇고 또 이으면
스페인과 나를 이어주는
눈 앞의 등뼈처럼
어렵지 않게 너에게 닿을 것 같다
이름만 겨우 아는 앞사람에게
너에게 못한 말을 쏟아내고
그리움만 남은 밤
그리움의 반대말은
나인가 너인가 아니면 감자탕인가
밥까지 볶아 먹고
상 위엔 김가루가 붙은 숟가락
김가루의 반대말도
숟가락의 반대말도
감자탕의 반대말도
결국엔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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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밥을 먹다

새벽 다섯 시
일어나서 돈가스를 튀긴다
허기허기허기
냉장고에는
케첩과 마요네즈가 있고
복숭아랑 냉동만두도 있다
안심안심안심
돈가스를 먹고
복숭아도 하나 먹는다
허기허기허기
만두까지는 과하다고, 생각하다가
하나 남은 바나나를 발견한다
안심안심안심
487번 스티커가 붙은 바나나를 먹고는
좀 있다가 뭘 먹을까, 고민한다
젠장젠장젠장
세상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내가
자활센터에서 만든 돈가스와
가난한 농부의 복숭아와
바다까지 건너온 바나나의 노력을
삽시간에 먹어치운다
그러고도 모자라서
자꾸 남의 노력을 탐한다
허기허기허기허
허기여차디여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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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 팥죽을 먹다


퇴근길
시장에서
팥죽을 산다

온종일
사람들 먼지를
뒤집어 쓴 팥죽

차갑게 식은 하루
붉고 차가운 위선
살아남은 자의 후회
괜찮은 편이라는 거짓말

팥죽을 먹는다
숟가락이 무겁다
기나긴 오늘 밤이 무겁다
생이라는 것이 이토록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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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달걀을 먹다

속내를 알기 어려운 내가
속을 알기 쉬운 너를 먹는다
샛노랗게 질린 너에게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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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고기 미역국을 먹다

아내의 퇴근을 기다리며
미역국을 끓인다
자식 키워 봐야 소용 없다고
명절에 엄마가 아들 먹으라고 싸 준 양짓살을
겉만 익혀서 한 입 크기로 자른다
내 각시 먹이려고 자른다
도마와 칼에 저미는 핏물
이 고기도 누군가의 자식이었다
생명으로 국을 끓여서
생명을 유지하려고 한다
이유없는 우리사이처럼
미역국엔 이유불문 참기름이다
고기와 통마늘을 볶는다
마늘 다지는 게 귀찮았다
당신이 귀찮은 것은 아니다
당신이 좋아하는 마늘을 많이 넣는다
불려둔 미역을 넣고 계속 볶는다
물만 닿으면 다시 살아나는 미역이
당신만 보면 활기찬 내 마음 같다
간장으로 간을 하고 
물을 붙고 팔팔 끓인다
한 번 끓으면 불을 줄이고
살살 끓이며 간을 봐야 하는데
간 보기가 귀찮다
당신이 귀찮은 것은 아니다
매일 태어나는 우리 사랑을 축하하려고
오늘 저녁엔 미역국을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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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꼬치를 먹다 - 가리봉 양꼬치 -


중국 사람이건 한국 사람이건
후줄근한 사람이 후줄근하긴 세계 공통이다
북쪽 대륙 사람의 얼굴에
추위와 피로를 잔뜩 묻힌 사내가
퇴근 시간도 전에 혼자 앉아서
양꼬치를 씹는다
밤을 맞이하는 의식을 치르듯이
한 점 한 점 양념을 발라서
한 점 한 점 정성스럽게
쇠막대기에서 뽑아 먹는다
술도 한 잔 없이
양꼬치 1인분을 먹고
후줄근한 만 원 짜리 한 장을
테이블 위에 딱 소리 나게 올려 놓고는
가게를 나간다

어디 잘 곳은 있습니까?
조선말로 묻지 못하였다

사내가 나간 자리를 또 다른 사내가 채운다
출입문 앞자리는 혼자 앉아서
저녁 식사를 해결하는 자리
이번에도 북쪽 대륙의 얼굴이다
스물 다섯이나 되었을까
말끔하게 차려 입은 젊은이다
미리 시켜 놨을까
자리에 앉자 마자 물만두가 나온다
만두 한 개 한 개를 간장 그릇에 담그고
만두피 전체에 간장을 듬뿍 발라서
빠른 속도로 먹어 나간다
혼자 먹는 저녁은 종교와 같은 것
젠틀하게 사장에게 오천원을 건네곤
이제 막 불을 밝히는 거리 속으로 사라진다

저기요, 물만두도 한 접시 주세요
혼자 양꼬치를 먹던 나는
중국인 사장에게 수줍게 조선말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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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숭아를 먹다

엄마 생각이 나면
바닷가에 가서 복숭아를 먹는다
복숭아 태몽을 꾼 엄마
물놀이를 마친 내게 복숭아를 건넸던 엄마
크게 한 입 깨물면 물큰 흐르는 과즙이 엄마 젖인 것 같다
사슴벌레가 복숭아 먹듯
나는 엄마를 먹고 자랐다
벌레 먹은 복숭아가 못쓰게 되듯이
엄마는 병들었다
복숭아는 흐르는 과일
흐르는 것은 눈물
엄마가 흘러간 삶을 따라 눈물이 흐른다
먼 데 있는 엄마
보고 싶은 엄마
자꾸 생각나는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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