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쌈을 먹다
삶은 고기를 먹는다
삶는 것과 찌는 것의 차이는 뭔지
어차피 삶은 찜통이 아닌지
뼈와 기름이 적당히 붙어 있는 삶은 고기를 먹는다
적당하다는 말보다 적당하지 않은 말이 없고
오늘도 적당히 보낸 하루가 끝나는 중이다
상추에 고기를 얹고 마늘, 고추, 김치 같은 것을 그 위에 얹어서 먹는다
싸 먹으니까 보쌈인가
가능하다면 삶도 한 입에 쌈 싸먹듯 살고 싶다
내 뱃속의 고기가 된 돼지의 삶
고기는 삶아 먹어야 맛이고 삶은 고기다
삶은 고기 삶은 고기 삶은 고기
삶은 고기를 먹는다
BLOG ARTICLE 하나씩/먹다 | 99 ARTICLE FOUND
- 2020.02.13 20200213 - 어쩌다 하나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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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2.27 20180227 - 어쩌다 하나씩
- 2018.02.26 20180226 - 어쩌다 하나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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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1.22 20170122 - 어쩌다 하나씩 1
잡채밥
잡채밥을 먹는다
칼국수도 7000원
백반도 7000원인 시대
8000원으론 남는게 없고
10000원은 과하고
그렇다고 9000원을 받기는 애매한
8500원 짜리 잡채밥을 먹는다
밥 위에 적당량의 당면, 고기, 야채
달지도 짜지도 않은 계란국
적당함은 어정쩡함
어정쩡함은 망설임
망설임의 값 500원
오늘도 칭찬할 일도 비난할 일도 없는 하루
지갑엔 내게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만 원짜리 한 장
12000원 짜리 잡탕밥은 너무 과하고
혼자 5000원짜리 짜장면을 먹는 일은 마음 속 어딘가를 긁어 놓기에
뭘 먹을까 망설이다가 어정쩡하게 주문을 하고 적당한 가격의 잡채밥을 먹는다
카레를 먹다
양파 껍질은 잘 벗겼는데
감자 껍질 대신 손가락 껍질을 벗겼다
피 묻은 감자를 씻어서 잘게 잘랐다
감자 대신 손가락을 자르진 않았다
다행이다
언제든 다칠 수 있는 인간의 약한 몸을 생각하면서 카레를 만든다
그 몸을 지탱하기 위해 잘게 다져진 재료들
결코 단단하지 않은 것들끼리 어울려 산다
아무 재료나 넣어도 맛있는 마법의 가루
인도에서 시작해서 영국과 일본을 거쳐 전세계로 퍼지면서
내 밥상에 올라온 세월을 생각하면서 카레를 먹는다
입 안의 카레향은 누군가의 희생
결코 옳지 않은 일들로 하루를 산다
강황과 울금 사이
커리와 카레 사이
감자껍질과 손가락 껍질 사이
마주 않은 나와 너 사이에서
카레를 먹는다
뼈해장국을 먹다
어제도 술을 마셨다
장터 국밥집에서 뼈해장국을 먹는다
우거지, 올갱이, 콩나물 해장국도 있고 짬뽕을 먹어도 되지만
뼈해장국을 먹어야 할 것 같은 날이 있다
숙취로 정강이나 무릎뼈가 쑤신날이 있다
40년을 먹어봐도 해장이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름이 해장이니 뼈해장국을 먹는다
남의 뼈로 내 뼈가 단단해지는 기분으로 뼈해장국을 먹는다
스페인, 독일에서 온 돼지등뼈에서 살을 발라내면서
죽어서 바다를 건넌 돼지와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먹는 세상을
훗날, 유럽의 어느 시골 마을에서 해장국집을 차릴 생각을 한다
뼛국물을 바닥까지 비우고 나온 국밥집 앞
인파 사이로 뼈를 삶는 솥뚜껑이 들썩거리며 웃는다
소맥을 먹다
소맥을 만다
섞는 걸 만다고 하는 이상한 세상
많은 쪽이 작은 쪽을 잡아 먹는 당연한 세상
오늘도 그만둘까 생각했다
그만두는 대신 소맥을 만다
그만뒀어도 소맥을 말았을 것이다
매일 습관적으로 소맥을 말고 있으니 삶이 돌돌 말리는 것을 말릴 수가 없다
술에 혀는 꼬이지만 삶이 뒤틀려 꼬이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1:9로 2:8로 3:7로도 말고 어떤날은 반반으로 만다
소주의 비율이 높아질수록 술은 달고 삶은 쓰다
황금비율이니 꿀 맛이니 하며 마신다
삶이 아니면 죽음인 일
나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
부끄러움을 모르고 소맥을 만다
부끄러움을 잊으려고 소맥을 마신다
소맥은 쏘맥이라 불러야 맛이지만
여전히 살아서 쏘맥을 말고 있는 나는 쑥맥은 아니다
병이 사람과 사랑을 병들게 하고
가지런히 놓인 술병이 나와 내 사랑을 병들게 한다
빈 앞자리와 마주 앉아 텅빈 소백을 만다
믹스커피를 먹다
막대기형 비닐 포장의 끝부분을 뜯는다
가스렌지 위에선 물이 끓는 소리
주전자 주둥이를 나오면서도 살아서 끓고 있는 물을 종이컵에 붓는다
믹스커피는 종이컵에 팔팔 끓인 물이라야 맛있다는 돌아가신 외할머니의 말
할머니 제삿날에는 여전히 믹스커피가 상 위에 놓인다
한 모금 한 모금 입 안 가득 달콤한 향이 돌고
식도를 타고 미끄러져 내려가는 물큰한 단내
끈적해진 피가 몸 안에 흐르고 심장 박동을 따라 머릿속까지 닿으면
내 어린날 믹스커피를 타주던 엄마 얼굴이 떠오르고
비로소 하루가 시작된다
죽음과 삶 사이에서
엄마의 엄마와 엄마 사이에서
퇴사와 출근 사이에서
먹다와 마시다 사이에서
끊을 수 없는 당신과 모닝 커피를 한 잔 했다
장날,
읍내 한구석의 식당
나보다 20년 이상 더 산 형들과 밥을 먹는다
전국 어디에나 있는 서울식당
전국 각지에서 모인 우리들
골고루 먹고 한 끼 때우라는 백반
생선구이와 된장찌개가 나오는 백반
초로의 식당 주인이 주문도 받지않고 차려주는 백반을 먹는다
아직은 술이 세월을 쓰러뜨리지 않았기에 소주도 한 병 먹는다
먹는 입은 지금이지만 말하는 입은 옛 일을 씹는 자리
형들이 좋았다는 옛날은 언제였나
나의 옛날보다 오래된 옛날 얘기를
나는 알기도 하고 모르기도 하는 시절을 안주로 삼킨다
사람이 넷이니 두당 반 공기씩
밥 두 공기 추가하고
소주도 한 병 더 시키는
오후 한 시,
어른의 식사
반죽을 만든다
전라도 밀가루와 강원도 수돗물
이런 이십일 세기
달걀은 집에 없고
소금은 깜빡했다
이런 살림살이
이런 정신머리
반죽이 손에 묻지 않을 때까지
뭐든 자꾸 치대면 정이 떨어진다
멸치 국물을 내는 동안
마늘을 다지고
감자 양파 호박 고추 대파를 손질한다
국물에 들어갈 순서대로 손질하고 싶은 내 마음의 순리
멸치를 건져낸 국물에 재료를 넣는다
어떤 모양이든 될 수 있는 반죽을 대충 뜯어 넣는다
벼는 익으면 고개를 숙이고
밀가루 반죽은 수면위로 떠오른다
이러거나 저러거나 내 삶은 한 번도 익어보지 못했다
사랑의 모양이 아니라 이리저리 뜯긴 상처뿐이지만
호박을 더 작게 썰어넣을 걸 그랬다는 내 말에
그렇다고 하는
당신과 마주앉아 후후 불어가며 먹는
수제비는 사랑이니까
뜨거워 입천정이 다 까져도
당신이 맛있다고 하면
그게 사랑이니까
비가오든 안오든
뭔가는 먹어야 하니까
치댈수록 끈끈해지는 당신과
비 내린 다음날 수제비를 먹는다
마주 앉은 사람은 설렁탕을
나는 만두국을 먹는다
뽀얀 뼛국물 안에
고기를 갈아 속을 채운 만두가 잠겨 있고
남의 살을 먹는 주제에
먹으면 피가 잘 돈다는 파도 잔뜩 넣었다
마주 앉은 사람이 고기를 건져 먹다가 웃는다
나는 만두를 건져 먹다가 웃는다
살다보면 누군가와든 마주앉아 뼛국물을 먹는 일이 있다
친한 친구나 덜 친한 친구
처음 보는 사람 또는 자주 보는 사람
연인이거나 연인이었던 사람
방금 이혼 수속을 마친 전 아내
누군가와는 마주 앉게 된다
지금 내 앞에선
곧 나를 떠날 사람이 웃는다
뼛국물을 삼키며 웃는다
입안에서 만두가 터지고
만두에선 시큼한 김치맛이 난다
아프리카 돼지열병이 유행하고
돼지들은 영문도 모르고 죽어가는데
나는 나랑 사장님 뿐인 가게에서 돈까스를 먹는다
세상에 흔한 비오는 오후 네 시에
비 오는 오후 네 시보다 흔한 돈까스를 먹는다
언제부터 돈까스가 흔해졌나
언제부터 돼지고기가 흔해졌나
사람보다 흔한 돼지고기
흔해지고 나면 전멸의 바이러스가 퍼지기 좋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하군
만날 딴 생각만 하고 있는 나를 닮았다
묵직한 소스가 뱃속에 달콤하게 퍼진다
안도감을 주는 맛이군
어떤 돼지들은 죽고 나는 살았다
어떤 사람들은 죽고 나는 살았다
살아서는 세상에 믿을 놈 하나도 없다고 생각한 날
혼자서 돈까스를 먹는다
모질게 살겠다고 모듬으로 먹는다
생강차를 먹다
점심으로 뼈해장국을 먹고
후식으로 생강차를 마시는 오후
대추차를 마시려고 했는데 대추가 다 떨어졌대서
대추차를 못 마시고 생강차를 마시는 오후
조카뻘 나이의 동료와 마주앉아 해장을 말하고
각자의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며 생강차를 마시는 오후
생이 가볍길 바라며
찻잔 위에 둥둥 떠 있는 잣을 씹는 오후
찻잔 바닥엔 무거운 생각같은 생강조각
일부러 끝까지 비우지 않은 찻잔 속을 들여다 보게 되는 오후
복날
응당 그래야 한다는 듯
삼계탕을 먹는다
속이 채워진 닭으로 내 뱃속을 채운다
우리나라 인구 5000만명
하루 닭 소비량 200만 마리
닭 사육 두수 1억 7천만
1억 빚은 빚도 아닌 세상이니
한 마리 닭을 먹는 일도 무심하다
닭은 인간이 만든 사료를 먹고
사료를 만든 인간은 닭을 먹는다
돌려 막고 돌려 먹는
지극하고 지독한 순환이란 말
레일 위의 기차는 여전히 빠르게 달리고 있고
풍요의 꼭지점은 아직 눈에 보이지 않으므로
알고도 모르는 척
세상에 섞여서
복날 삼계탕을 먹는다
속초 중앙시장
몇 번을 물어야 찾아갈 수 있는 골목에
지역 택시기사도 잘 모르는 작은 가게
50년 된 단골들은 다 죽어 없어졌다는 또복이네
언젠가부터 다리를 저는 김말복 할머니가
손님들 또 오라고 지은 이름 또복이네
한 축에 만원하던 오징어가 두 마리에 만원이 되가는 세월을 견딘 곳
막내 아들뻘인 나에게 삼촌이라고 부르는,
사장님 나이따라 물회가 점점 달달해지는 또복이네
물회를 먹다가 설탕을 덩어리 째 씹어도 또 가게 되는 곳
강원도 정선까지 날 보러 온 친구와
정선까지 죽으러 온 우럭을 먹는다
간장에 와사비를 풀고
얼마전 태어난 둘째 아이 이름을 묻는다
술병이 자빠지기 시작하고
친구에게 아이 이름을 묻는다
매운탕 국물을 뜨다가
다시 한 번 아이 이름을 묻는다
횟집을 나와서 담배를 피우다가
아이 이름을 또 묻는다
둘 다 술과 담배가 가까운 곳으로만 가던 시절이 있었다
10년 전 마지막으로 봤을 때도 우럭회를 먹었던,
친구에게 아이 이름만 자꾸 묻는다
하루의 마지막 시간
셔터를 내리려는 분식집 앞에 멈췄다
순대 1인분 주세요
간 위 허파 염통 귀
간을 먹으면 눈이 좋아지고
염통을 먹으면 피가 맑아진다
먹으면 뭐든 좋아지는,
순대는 돼지가 주는 축복
마지막으로 둘이 먹었던 순대가 기억나지 않는다
당신이 태어난 날에 나 혼자 먹는 순대 1인분
순대는 둘이서 1인분을 먹으면 좋은 음식
순대는 혼자서 1인분을 먹기엔 버거운 음식
아내랑 만두를 먹는다
마트에서 두 봉지씩 묶어서 파는 만두를
만두의 자존심이라고 포장지에 자신있게 새겨 넣은 만두를
고기 잡채 야채가 섞인 만두를
간장 식초 고춧가루 섞은 간장에 찍어 먹는다
만두를 빚던 손들은 다 과거로 사라지고
기계손으로 빚은 만두를
기계처럼 정확한 맛의 만두를
몇 개의 질문은 가슴속에 물려두고
맛있게 먹는다
두 봉지 다 먹는다
입구에 돼지가 웃고 있는 갈비집
숯불에 굽지 않으면 갈비도 아니지
수천만명이 일 년에 한 번은 먹을 수 있을만큼
많은 갈비와 그보다 훨씬 많은 숯이 함께하는 세상
갈비를 못 시키고 갈비탕을 먹는다
너랑 나랑 둘이
우리는 가족
건너 테이블엔 엄마와 아빠와 딸 그들도 가족
옆 테이블엔 엄마와 세 자녀 아빠는 없지만 그들도 가족
아빠가 없던 테이블에 초밥을 사들고 나타난 아빠
초밥과 갈비
아빠와 딸은 닮았다
엄마와 아이들이 닮았다
물고기와 육고기처럼
너랑 나도 닮았다
돈 몇 천원 때문에 갈비 대신 갈비탕을 시켰지만
같은 걸 씹어 먹으니
숯불과 갈비처럼
우리는 한 식구
밥을 시킨다
보통맛 2인분요
보통맛 매운맛 아주 매운맛 중에 골라야 한다
보통맛은 보통맛이라 아주 보통맛은 없다
보통맛을 먹는다고 다 보통사람은 아니다
어떤 대통령은 자기가 보통사람이랬는데
알고보니 씨팔놈이었다
나도 내가 보통사람이라 생각하는데
사실 나는 씨팔을 입에 달고 사는 보통사람이다
순한 사람 중에는 아주 순한 사람도 있는데
보통사람은 보통사람이라
아니, 사람은 다 사람이라
아주 보통사람은 없다
나는 보통맛 불향 쭈꾸미도 매운데
아내는 밍밍하다고 한다
눈이 마주치니 웃는다
보통날 보통맛으로 보통의 사랑을 산다
닭도리탕을 먹다
치킨을 먹는다
둘이 먹으니 반반으로
내 전화번호만 보고도 집 주소를 아는 치킨집 사장님
많은 것을 들켜버리고 사는 세상
먹어야만 삶은 이어지고
닭고기 밀가루 기름 물엿
고기도 좋아하고
튀김도 좋아하고
단 것도 좋아하는 나
남은 양념까지 박박 긁어 먹는
영혼을 잃고 먹고야 마는 영혼의 맛
당신과 함께 먹는 치킨
치킨의 다른 이름은 행복
양념치킨은 행복의 네 제곱
입안에서 닭뼈가 구른다
한번에 살을 발라내지 못하자
닭뼈를 굴리며 생각이 생겼다
엄마말 잘 들으면 그런것처럼
입안의 닭뼈도 피가 되고 살이 될까
닭뼈가 내뼈가 되고
닭살이 내살이 되고
똥이 되고 흙이 되고
유식한 말로 순환이라고 부르고
손가락으로 원을 그려본다
누군가는 삼계탕을 먹다가 닭 목뼈가 목에 걸려 죽기도 할 것이다
입안에서 또 다른 닭뼈가 구른다
컵라면을 먹는다
그리움에 생이 허하여 술을 마시고
마신 술에 속이 허하여 컵라면을 먹는다
싸구려 용기에 새우가 그려진 컵라면을 먹는다
컵라면을 불려서 먹어야 해장이 된다던 엄마의 말
엄마는 자식들 건사한다고 허리가 휘도록 술을 마셨다
내가 술로 중년이 된 사이 술로 노파가 된 엄마
갈비뼈에 금이 가도록 술을 마신 엄마
언젠가의 엄마처럼 면발도 새우건더기도 나도 퉁퉁 부었다
한 나라에 살아도 자주 보지 못하는 엄마
목소리를 들으면 눈물이 날 것 같아
전화도 못하고 불어터진 컵라면을 먹는다
비 개인 아침 옥상
물 고인 바닥마다 파란 하늘이 있다
사발면이란 이름이 붙은 컵라면을 먹는다
옥상은 기억의 장소
컵라면은 사색의 음식
뭘 먹든 떠오르는 당신 얘기를
더는 적지 않으려 했지만
사발이란 이름만큼 예쁜 스티로폼 용기 안에
당신 얼굴이 라면 기름과 섞여있다
국물까지 싹 비우고나면
남는 것은 텅빔
텅빈 하늘을 밟고서
컵라면을 먹었다
회식
삼겹살을 먹는다
왜 회식날은 삼겹살을 먹을까
너무도 가볍게 결정되는 삼겹살의 운명
일 인분 만 이 천 원이 너무 무겁진 않은 리퍼블릭 오브 코리아
삼겹살이 없던 시절에
우리는 뭘 먹고 실았을까
그 보다 오래 전 돼지가 먹히기 위해서만 키워지기 전에
우리는 뭘 먹고 살았을까
세상은 이미 다 지나간 일이라고 하는데
내 하루는 늘 퍽퍽하고
내가 지금 소주와 함께 삼키는 것이 살덩인지 뼈인지 아니면 기억인지
질문도 다 던지지 못하고 가는 생에
답을 정해둔 질문으로 가득한 삼겹살 얘기가
무슨 질문인지
모든 팀장들은 술을 잘 먹는데
대체 얼마나 술을 마셔야 팀장이 되는지
이 또한 무슨 답이 정해진 질문인지
왜 삼겹살을 먹으며
나는 질문만 남기는지
대체 왜
순댓국을 먹다
피곤했던 하루
하소연 할 사람 없어 더는 갈 데 없는 하루
혼자서 순댓국을 먹는다
기분상 소주도 한 병 먹는다
돼지 내장들이 뚝배기 안에서 부글부글 생을 끓이고
건너 테이블엔 마주 앉은 연인
순댓국은 사랑의 메뉴
순대를 빼고 순댓국을 시키던 당신이 떠오르고
오직 먹히기 위한 삶을 살았을 돼지 머리로 이어진다
머릿속에 취한 피가 도는 걸 보니
나란 인간은 먹기 위해 태어난 존재
터덜터덜 집으로 가는 길
돼지 내장들이 내 내장 안에서 부들부들 생을 죽인다
피곤했던 하루
혼자서 순댓국을 먹었다
입 안에 기름기 가득 소고기를 먹는다
입술이 번들거리도록 소고기를 먹는다
미끈한 키스같은 등심을 곱씹는다
붉어진 당신 얼굴을 보며 붉은 고기를 굽는다
소는 짧은 생에 울다 죽었다
소고기보다 눈물이 붉다
눈물보다 당신이 붉다
붉은 마음으로 이별 소고기를 먹는다
아직은 교복이 어색한 아이들이 아이스크림 콘을 먹으며 신났다
아직은 2월
계절이 바뀌는 일을 이렇게도 안다
부러운 것은 시기하는 것
충동에 들게 하는 것은 다가오는 봄인가 지나간 젊음인가
주머니엔 꾸깃한 천원짜리 한 장
학교 앞 구멍가게 냉장고에서 아이스크림 콘을 집는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세상에 있던 이름, 브라보
껍질을 벗기고 천천히 아이스크림을 먹는다
얼었던 마음이 녹아내린다
그리운 것은 코 앞에 봄인가 발 뒤편의 젊음인가
피자를 먹는다
냉장고 안에서 이틀
차갑게 식은 정통 아메리칸 스타일
치즈까지 단단해진 시카고 피자
피자를 식히려면 냉장고가
피자를 사려면 마트 회원카드가
회원카드를 만드려면 돈도 자동차도 필요하다
필요를 따라 올라가면 물건의 목록은 하늘에 닿는다
포장 박스도 따뜻할 때 먹으라 권유하지만
냉장고는 있어도 전자렌지는 없어서
살며 모든 걸 가질 순 없다는 걸 알기에
차가운 치즈를 곱씹는다
시카고에 아는 사람 한 명 없고
오래된 팝송과 마이클 조던만 떠오르지만
시카고에서 오지도 않은 시카고 피자를 먹는다
점심 손님이 다 빠져 나간 식당
아구찜을 시킨다
늘어진 콩나물과 아구
나른한 나와 친구
선풍기 바람을 맞으며 꾸벅꾸벅 조는 주인장
파리와 선풍기의 궁합
고춧가루 붉게 타오르는 미더덕이
입안에서 뜨겁게 터지고
지 혼자만 냉정한 소주병
잠든 주인 머리맡에 꾸깃한 사 만 칠 천원을 곱게 펴두고 거리로 나선다
아구와 나 친구와 소주
폭염속에 생이 무르익는
8월의 오후 네 시
해장으로 돈가스를 먹는다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에 살면서
이리 기름진 걸 먹어도 되나
바다 건너 먼 나라에서 온 소곱창에
이 나라 저 나라 술을 짬뽕했으니
국적은 문제가 아닐까
매일 매일 돈가스 해장으로
미끌미끌 미꾸라지가 되려나
기름기 뺀 얼굴아래 기름진 내장을 감추고
언제 어디서든 달아날 수 있게
마무리로 끈적한 데미그라스 소스를 핥는다
식당 사장님이 나를 보고 웃는다
해장 돈가스에 속만 느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