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흐르다

영하 십 도에서 영상 삼십 오도로
개미들의 공기와 우주의 진공 속에
청춘의 불안과 중년의 어깨위에
부자들의 뱃속과 가난뿐인 마음에
당신의 눈동자와 그 안에 비친 내 모습에
시간이 흐른다

표류하는 배 위에
모두가 발을 동동 구르는 순간에
누군가 머리를 볶거나
주사를 맞거나
아니면 TV 연속극을 보거나
또는 밀회를 즐길 때에도
시간은 흐른다

그러나
세월이란 이름으로도
끝내 흐르지 못하는 시간이 있다
AND

이사

이삿짐을 싼다
가지고 갈 물건과 버릴 물건을 나눈다
사는 동안은 떠돌이 신세를 면할 길이 없다
언젠간 떠날 것을 알면서도
생활이란 핑계로
옷이며 그릇이며
살아온 만큼 모아두었다
책이며 이불이며
버리는 만큼의 죄를 쌓았다
눈이 펑펑 내리는 날 이사하면
부자가 된다는 거짓말에 웃는 당신
짜장면 먹어야 한다며 웃는 당신
그런 당신과 살아온 만큼 쌓인 사랑과
당신을 사랑한 만큼 쌓은 죄를
이 세속에선 어찌할 수가 없다
이 눈발 속에서 그저 웃을 수밖에 없다
AND

컨베이어 벨트

컨베이어 벨트 위에
핸드폰
운동화
햄버거


컨베이어 벨트 앞에
사람들 사람들 사람들

컨베이어 벨트 위에
분노
사랑


어느새
컨베이어 벨트 위에
인간

 

song ver

컨베이어 벨트 위에
햄버거
도시락
삼각김밤
그걸먹고 살아가는 사람들 (1 5 1 5 1 4 1 5 1)

컨베이어 벨트 위에
에어컨
핸드폰
자동차
월급모아 사야하는 사람들 (1 5 1 5 1 4 3b 5 1)

컨베이어 벨트 위에. (3b 7b. 6b 5)
물건들 물건들 물건들

컨베이어 벨트 앞에. (3b 7b. 6b 5)
사람들 사람들 사람들

컨베이어 벨트 위에
한숨
땀방울
처진 어깨
쉴틈없이 이어지는 우리네 삶

컨베이어 벨트 위에
분노
사랑
삶과 죽음
컨베이어 벨트 위에 인간

어느새 컨베이어 벨트 위에 인간
(3b 5 1) 

AND

동그라미

동그라미 안에 네가 있다
손을 뻗지도 않고
발길질도 하지 않고
동그마니 앉아만 있다
네 동그라미를 둘러싼 동그라미
그 안에 내가 있다
숨 막히는 공기속에
무거운 다리를 움직여
너에게 닿아야 하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결국 너처럼 동그마니 앉았다
동그라미 동그라미
그리고 동그리미
내 동그라미를 둘러싼 동그라미
그 안에 동그란 네가 있다
AND

햄버거를 먹다

동네 슈퍼 빵 코너 구석
2,500원 짜리 햄버거
터미널 제과점에도
다른 동네 마트 빵 코너에도
같은 가격인 납작한 햄버거
시간당 6030원 최저 시급을 받고
식품공장에서 햄버거를 만드는 사람들
그 햄버거를 여기저기로 운반하는 사람들
나랑 같은 걸 먹으며 맛있어 할 사람들
하지만 어쩌면 삶이 지겹기만 할 사람들
빵 사이에 고기랑 야채
싸구려 소스와 허름한 포장지
쉴틈 없는 제조 공정과 굳건한 대량생산 시스템
자신의 생산품을 제 돈을 주고 소비하는 대중
반복 반복 반복
삶 삶 삶
그것은 햄버거

AND

교감

잠든 너를 직각으로 내려다 본다
그대로 있어 내가 네 발을 물고 잘게
꿈틀대는 발끝으로부터 네 하루가 전해져 오고
오직 그렇게만 너의 사정을 전해 들을 수 있는 밤
돌아누워 네 정수리에 가만히 손을 대고 내 하루를 전해주는 밤
너와 나 그리고 세상이 수평으로 교감하는 밤
AND

大體로

시간이 지나면
대체로 상처는 아문다
대체로 고통은 잊혀진다
대체로 삶은 사라지고
그 사라짐마저 사라진다
자기 꼬리를 뜯어 먹고 앞으로 나아가는 시간 앞에
도대체 내 사랑은 어쩌란 것인지
AND

기념하는 밤

10년 째 다닌 단골 식당의 마지막 김치 볶음밥을
우리만의 골목길을 떠도는 공기의 운율을
격정이란 말로는 모자랐던 뜨거운 밤을
우리를 낯선곳의 환희로 이끌던 너의 자동차를
그 안에서 흘러 나오던 네 목소리를
너에게만은 아름다웠을 나의 노래를
차분히 내리는 눈발마저
기념하는 밤
우리의 사랑을
이 사랑의 끝을
AND

거리

너와 나 사이의 거리
100미터, 또는 42.195킬로미터
느리게 달려도 25초에 닿는 거리
걷고 또 걸으면 하루도 걸리지 않는 거리
거리를 수치화 하는 건 인간 뿐이라
너와 나 사이의 거리를 잰다
사랑은 언제나 생보다 먼저 사멸하는 것
하여 항상 먼저 떠오르는 건 사랑의 거리
인간이 물질이라 사랑도 물질적이다
온 몸을 넘치도록 가득차 오르는 끝이 없는 거리
이내 사라져버릴 거리
너와 나 사이의 거리
AND

악몽 5

언제부터였을까
끝이 보이지 않는 사다리를
맨몸으로 오르고 있다
뜨거운 햇살에 살 가죽이 녹고
찬 바람에 손발이 얼어 붙는다
같은 계절이 다시 반복되도록
그저 사다리를 오르고 있다
끝에 지옥이 기다리고 있을까
매달린 두 손을 놓으면 그곳이 지옥이다
더 나은 세상으로 가는 것일까
힘이 빠져 발을 헛디디면 그곳이 천국일지도 모르지
영원히 끝날것 같지 않은 사다리를
맨몸으로 오르고 있다
AND

20161201 - 엄마 생각

하나씩 2016. 12. 1. 23:46

우리 엄마는 나보다 21살이 많고 고교를 졸업했는지 안 했는지 모르지만 경북 영주에서 언니들이 공장에 다니던 서울 문래동으로 와서 언니들이랑 같이 일하다가 옆집에 고모랑 같이 세들어 살던 우리 아버지랑 결혼했다.

어려서 낳은 큰 아들인 나를 끔찍히 아꼈고 이웅평이 미그기 타고 내려 왔을때는 실제상황이라는 경보를 듣고 어린것들(나와 동생) 걱정에 펑펑 울었다고 한다. 전형적인 경북 남자에 관료 출신인 외할아버지의 영향 탓인지 내가 열 다섯 살 때까지는 엄마한테 많이 맞았다. 그러던 어느 순간에 엄마가 때리는 게 안 아프게 됐고 엄마도 그걸 알았다.

내가 고 2때 술장사를 시작했고 오산으로 옮겨서 장사한 건 99년이나 2000년 부터인가? 대학 1학년 때는 학비를 받았지만 나머지는 어찌어찌 벌어서 다녔다. 엄마는 그걸 미안하게 생각하지만 나는 그게 고맙다고 생각한다. 우리집은 정말 가난했고 나는 아무런 대책이 없었다. 엄마랑 나는 몇 번인가 불을 끄고 누워서 손을 잡고 울었다. 어쩌면 나만 울었다. 어느날은 내가 우니까, 엄마가 울지말고 씩씩하게 살라고 했다.

업종이 업종이다보니 손님들한테 맞은 날도 있고 나한테 얘기하지 못한 기분 나쁜 일들은 숫자로 셀 수도 없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가게 안에서 술병이 깨지고 취한 사내들이 아우성을 쳤겠지. 엄마는 그걸 어떻게 참았을까? 이혼한 아버지를 생각하면서 참았을 것 같진 않다.

내가 산림보호직 시험 합격했다니까 가장 좋아했던 엄마인데 막상 일 시작하니까 정말 바빠서 전화할 짬도 안난다. 내가 타이밍 놓쳐서 전화 자주못해서 미안하다고 하니까. 그래도 좋단다.

그런 엄마가 집을 샀다.


엄마집

엄마가 집을 샀다. 볕 잘 들고 바람 잘 통하는 아파트 1층이다. 집이 좋다. 근데 눈물이 난다. 오전에 엄마집에 들렀다. 데운밥이랑 뻗뻗한 대파가 들어간 계란말이랑 볶지 않고 삶아서 무친 오뎅, 생강이 많이 들어가서 맛 없는 소고기 무국을 엄마랑 같이 먹었다. 맛 없었다. 근데 눈물이 난다. 엄마랑 헤어지고 천안으로 출장 왔다. 엄마집이랑 오랜만에 둘이서만 먹은 밥이 자꾸 생각난다. 그래서 자꾸 눈물이 난다. 엄마엄마 눈물이 난다.

AND

과연

친구를 만났네
아파트 앞 상가에서도
양갈비 뜯을 수 있는 21세기를
나는 무척 사랑하네
나도 어떤 자랑을 하고 싶었는데
친구는 지 얘기만 하네
씨펄, 나는 그래도 좋네
술을 다 마시고
요즘은 타워라고 부르는
아파트 상가 화장실에서 오줌을 누네
여긴 누가 치우지,
생각하다가 친구에게 묻네
여긴 누가 치워 관리비에 포함돼
친구가 뭐라뭐라 했지만
내 머릿속에는 물음만이 남네
타워 화장실을 치우는 분들의 처우와
여의도의 어느 빌딩을 치우는 내 아버지의 처우
그리고 친구에게 술이나 얻어 먹는 지금의 내 처지가
과연 올바른가
과연 정의로운가
과연 이 세계는 사멸할 것인가
과연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그렇더라도 사멸하는 세계에서
사랑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과연 너는 나를.....
AND

우리는 겨우겨우

우리는 겨우겨우
겨울을 버텼네
우리는 겨우겨우
새봄을 맞이하네
우리는 겨우겨우
살아남았네
우리는 겨우겨우
사랑을 하네

우리는 겨우겨우
오늘을 넘겼네
우리는 겨우겨우
내일에 와있네
우리는 겨우겨우
살아남았네
우리는 겨우겨우
사랑도 하네

우리는 겨우겨우
우리는 겨우겨우

 

song ver


우리는 겨우겨우
겨울을 버텼네
우리는 겨우겨우
새봄을 맞이하네
우리는 겨우겨우
살아남았네
우리는 겨우겨우
사랑을 하네
(1 6 4 1) (1 6 2 5) (1 6 4 1) (2 5 1) 반복

우리는 겨우겨우
오늘을 넘겼네
우리는 겨우겨우
내일에 와있네
우리는 겨우겨우
살아남았네
우리는 겨우겨우
사랑도 하네

우리는 겨우겨우
우리는 겨우겨우 (4 5 1 6)

우리는 겨우겨우
사랑도 하네 (2 5 1) 

AND

콩알

지구는 콩알보다도 작은데
인간은 콩알보다는 커서
인간 세계에서는 이런저런 일들이
불덩이가 되기도 하나봐
콩알이 불에 타면 껍질이 터지는데
지구껍데기가 터지면
지구보다 큰 인간들은
좀 더 큰 세계로 날아갈까
그 세계도 콩알보다 작을텐데
인간도 여전히 콩알보다 크겠지
하여 불꽃은 다시 시작되겠지
AND

지난 토요일에 김치했다. 아는 형이 절임배추를 10킬로 줬다. 감사합니다. 김장 커맨더, 아내의 지휘 아래 일사천리로 일을 마쳤고 수육을 먹었는데, 내가 먹은 덩어리가 덜 삶아졌는지 지금도 설사중이다. 계속 설사하니까 나중에 와서는 인간에게서 날 수 있는 가장 안좋은 냄새라고 느껴지는 냄새가 난다. 아픈 덕분에 주말에 푹 쉬었다. 집안 내정 커맨더 아내가 자는 나를 깨워서 약도 먹여주고 흰죽도 같이 먹고 참 고마웠다. 나는 무엇으로 갚을까

새로 일 시작하고 여섯 번의 급여를 받았다. 무늬만 계약직이고 실제로는 일용직인 먼저 일 보다는 좀 더 받지만 그렇다고 퍽 많은 것도 아니다. 야근과 스트레스를 포함하면 직업 만족도가 먼저 일보다 못하다. 딱 하나 좋은 건 고용불안이 없다는 점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핵심축인 고용불안에 시달리지 않는다. 그래서 다들 공무원이 되려고 하는거지만 그렇게 세상에 편입하기 보다는 고용 불안 없는 세상을 만들어야겠지. 다 때려 부숴서라도 그러고 싶다.

공문으로만 일하다 보니까 하지 않은 일을 한 것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것이 사회 정의에 어긋나거나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는 일은 아직 없었다, 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러다 최순실 된다. 사람들의 삶과 직접적으로 관계 있는 부분에는 지금도 수 많은 최순실이 뿌리내리고 있다. 현실은 점점 더 매트릭스고 좀 더 나가보면 수 많은 매트릭스들이 모여서 세상을 구성하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멘탈이 더 무너지기 전에 앞으로는 뭔가 시키면 무조건 다 알겠다고만 하지 말고 아닌건 못하겠다고 해야겠다. 그게 내가 사는 길이고 내 밥그릇 챙기는 일이다.
AND

지후 여인숙

 

남극과 지척인
아르헨티나 남쪽 끝
빠따고니아 깔라빠떼
쎈 발음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사는 곳에
당신 이름을 딴 여인숙을 하고 싶다
세상 끝을 찾아온 손님들과
밤새 노래 부르고 술 마시고
흥청망청 서로의 치욕을 털어놓고
다음날 아무이 없었다는 듯
눈인사를 하고 싶다
어차피 세상은 끝으로 가고 있으니
세상이 진짜로 끝나더라도
우리는 세상 끝에서 끝날 것이고
그저 그걸로 좋으면 좋겠다
사랑이란 말로는 당신을 더 사랑할 수 없어서
당신 이름을 딴 영업집에서
싸랑하고 싸랑하면서 살고 싶다
우리가 있는 곳이 세상의 끝이면 좋겠다
AND

주인

주인 없는 집이 없고
주인 없는 산이 없고
주인 없는 땅이 없다
주인 없는 물건 없고
주인 없는 노예 없고
주인 없는 나라 없다
집도 땅도 산도
내 것은 없어도
이 나라 주인은 나
AND

우리는 언제

다리를 놔서 강 건너 사람들을 만나면 우리는 행복해질까
고속도로를 타고 쉽게 멀리까지 갈 수 있으면 우리는 행복해질까
어디로든 갈 수 있는 석탄 열차 때문에 우리는 행복해질까
한우 등심을 양껏 먹을 수 있으면 우리는 행복해질까
술에 취해 세상을 욕하고 시절을 한탄하는 일로 우리는 행복해질까
우리는 어쨌든 나아갈 거고 미래는 좋은날 투성이라고 생각하면 우리는 행복해질까
모든것은 이어져 있단 믿음으로 상관도 없는 사람과 동질성을 찾으려하면 우리는 행복해질까
어디서 사 먹든 비슷한 맛의 아메리카노처럼 우리도 평범하게 행복해질까
눈 앞에 보이는 네잎 클로버를 애써 외면하고 지나치면 우리는 세잎 클로버처럼 행복해질까
우리는 대체 언제 행복해질까

 

song ver


튼튼한 다리를 놔서 강 건너 사람들을 만나면
우리는 행복해질까
고속도로를 타고 쉽게 멀리까지 갈 수 있으면
우리는 행복해질까
어디로든 갈 수 있는 석탄 열차(국제공항) 때문에
우리는 행복해질까
한우 등심을 양껏 먹을 수 있으면
우리는 행복해질까
1 6 2 5
술에 취해 세상을 욕하고 시절을 한탄하는 일로(3 6 2 5)
우리는 행복해질까(1 6 2 5)
어디서 사 먹든 비슷한 맛의 아메리카노처럼(3 6 2 5)
우리도 평범하게 행복해질까(1 6 2 5)

간 주 (4 5 1 3 6)
우리는 대체 언제 행복해질까(2 5 1).

AND

분노의 가격

김밥 한 줄 1,500원
물 한 병 500원의 힘으로
대통령 퇴진을 외친다
사과 한 알 2,000원
초코바 한 개 700원의 힘으로
대통령 하야를 외친다
7,000원 짜리 국밥과
소주 한 병에
끝내 눈물이 터진다
지금의 울분은
철갑상어 알 때문이 아니다
구십만원 짜리 쓰레기통 때문이 아니다
내 분노에 매겨진 가격 때문이다
분노마저 소비되고 마는 세상 때문이다
AND

누가


누가 다시 태어나지?
예수님
누가 다시 태어나지?
새누리당
누가 다시 태어나지?
차라리 나
그럼 뭐가 다시 태어나지?
대상도 없는 내 사랑
누가 다시 태어나지?
차라리 너
그럼 뭐가 다시 태어나지?
너 뿐인 내 마음
AND

냄새

바람에 실려온 작은 냄새
태어나 처음 맡는 냄새
그러나 눈앞엔 없는 냄새
눈을 감으면 손에 잡힐 것 같은 냄새
사랑은 짙어져도
삶은 희미해지는데
짙어지지도 옅어지지도 않는 냄새
보이지 않는 벽을 더듬어 도착한 곳에
눈을 감고 웃고 있는 너
AND

좋은밤

죽고 싶습니다
- 왜요
외롭습니다
- 집에 아무도 없어요
예, 그리고 제 마음도 없습니다
- 출동해야 하나요
아니오, 죄송합니다 저 괜찮습니다
- ...
미안합니다
- 아니오, 이렇게 전화 주시는 분들 많아요
미안합니다
- 예, 좋은밤 보내세요.
AND

am 1 : 11

쭉 뻗은 시간에
쭉 뻗은 전봇대 옆에서
쭉 뻗은 담배가 타들어 간다
흘러가는 시간
줄어드는 담배
졸아드는 마음
곧추서서 세상을 보고 싶은 시간
지평선 위로 타버린 담배를 던지는 시간
AND

잡놈

이름 모르는 풀은 잡초
이름 모르는 나무는 잡목
근본을 모르는 사람은 잡놈
풀에게 미안하고
나무에게 미안하다
잡놈이라 미안하다
AND

초겨울

시퍼런 풀냄새가 아직 남은 은행잎까지
한 번에 떨어지는 날이었습니다
서두른 겨울의 색은 아닐텐데
가을은 무슨색입니까
은행잎을 쓸어내느라 분주한 상인들의 마음속에 가을이 있을까요
그 모습을 지켜보는 내 마음속에 가을이 있을까요
이렇게 생이 갈라지는 곳에 가을이 있을까요
가을은 정녕 무슨색입니까
AND

이런밤

머리가 깨질 것 같은 밤
대통령 때문은 아니다
쉽게 잠 못드는 밤
최순실 때문은 아니다
술 한 잔 먹고 싶은 밤
이 나라 때문은 아니다
아무것도 아닌 이런 밤
나 때문이다
아무것도 아닌 나 때문이다
집 수리비를 안 준 집주인과
내일 할 일을 생각하는
나 때문이다
하루만에 온 겨울 앞에서
가을은 무슨색이었을까 생각하는
나 때문이다
전부 나 때문이다
AND

'오겡끼데쓰까' 하다가 마지막에 눈밭에 주저앉아 울어버린다. 담담하게 잘 지내냐고, 건강하냐고 묻던 말이 반복되고 반복되면서 걷잡을 수 없어진다. 영화 러브레터의 이 장면이 세월호랑 겹친다. 검찰청에 장비 끌고온 아저씨도 이런 마음이었겠지. 어제 이상호 기자의 마지막 질문에 맺힌 눈물도 마찬가지다. 거리로 나서야한다. 뭘 어떻게 할지 몰라도 그래야 한다. 목놓아 울기라도 해야 한다.

AND

농단 - 박근혜 대통령께

농단이란 말을 아십니까
대학교도 졸업하신 분께 실례인 질문인가요
당신께는 실례란 말이 실례가 아닌 것 같아서
그 뜻을 몰라도 사전을 찾아볼 분이 아닌 거 같아서 알려드립니다

<농단 [壟斷 / 隴斷]

이익이나 권리를 독차지함을 이르는 말.
예문 - 검찰은 이번 기회에 권력에 기생하는 악덕 상인의 농단을 뿌리 뽑겠다고 다짐하였다.>

농단이란 말이 농담처럼 느껴지는 예문입니다
검찰은 대통령의 권력에 기생하고
악덕상인도 대통령의 권력에 기생하는데
지들끼리 무슨 뿌리를 뽑을까요

당신 친구가 국정을 농단했다는 뉴스가 세상을 도배합니다
당신은 친구에게 기생하는 사람인가요
나라의 정치를 국정이라고 합니다
대통령이 월급을 받는 이유입니다
사람들이 당신에게 표를 준 이유입니다

권력이 권력에게
당신이 당신 친구에게
기생하고 기생하여 퍼트린 병의 악취가 온 나라에 가득합니다

유치원생이 과자를 한 봉지 살 때도 신중을 기하는 것이 보통의 세상입니다
당신은 그런 삶을 살지 않았다구요
보통의 삶을 모르는 사람이 어찌 한 나라의 국정을 돌보시려 합니까

당신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길 바라지만
그게 어렵다면 그저 하야하십시오

이 모든 게 농담이면 좋겠습니다
AND

불현듯


눈 뜨자마자 담배를 피우다가
늘 마시던 술을 한 잔 더 먹다가
오랜만에 축구를 한 게임 뛰고 나서
불현듯
나이 먹었음을 느낀다
이 사랑이 다 끝나간다는 생각에
불현듯
슬퍼진다
AND

지금 내가


지금 내가 사랑을 생각하는 것은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입니까
내가 비겁한 사람이기 때문입니까

사랑이란 두 글짜를 떠올리고
시랑에 얼마나란 없다고 되뇌는 일은
당신을 그만큼 사랑하기 때문입니까
스스로에게 자신이 없기 때문입니까

가을이란 두 글자가 사랑으로 바뀌고
사랑이란 두 글자는 이내 겨울로 향합니다
끝으로 향하는 사랑은 결국 부서집니다

지금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견딜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