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탕

투, 사탕을 뱉는다
툭, 깨져서 흩어진다
이것도 생이라면
아직 달콤할 때 부서졌으니
아름다웠다고 할 수 있을까
자음 하나 차이로
사랑은 달콤하게만 끝나지 않고
끝나지 않는 밧줄을 올라도
운명은 한 길로만 향한다
입안에 씁쓸한 단내만 남았다

AND

봄, 사랑

아이들 재잘거리는 소리에
봄이 온 것을 알았습니다
봄, 이라 적고
봄, 이라 불러봅니다
네 번째의 봄을 적으려는데
봄이 내 머리 위에 앉았고
봄이 내리는 사이에
당신이 내 앞에 서 있고
당신을 안으려는데
우리 발치에 꽃잎 흩날립니다
이렇게 봄이 지나는 동안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AND

낮잠

깜빡 잠이 들었다가 눈을 떴다
춥다
잠들면 식고 식으면 죽는다
불멸은 영원한 불면
식은밥, 식은 정신, 식은 사랑
식으면 죽는다
사랑은 한쪽만 식어도 끝난다
그러니 아가,
어서 그 차가운 물에서 나오렴

AND

 소설을 오랜만에 읽었다.

 "살아있는 한 불멸, 영원한 아이" 삶에 대한 통찰은 죽음에 대한 통찰이다. 조르바랑 크눌프가 생각났다. 

 

 p.100~

 "왜 술을 끊었소?" 나는 갑자기 그런 질문을 던졌다. 그가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렇소, 나는 술을 입에 대지 않았고, 그러자 생각을 할 수 있게 되었고, 그것은 마치 내가 내게 할당되지 않은 놀이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과 같소. 다른 사람에게 할당된 역할을 하면서 인생의 일부를 산다는 것은 아주 좋지 않소. 게다가 과거를 고칠 수 없고 잃어버린 것을 되찾을 힘도 없을 때 그런 사실을 깨닫는 것은 더욱 좋지 않소. 내 말을 알아듣겠소?"

 "그렇소, 이해한다고 생각하오. 내게도 여러 번 그런 일이 있었지만 그리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소. 나는 회복하는 데 성공했고, 내 다리로 딛고 일어설 수 있었소." 나는 대화의 방향을 바꾸는 동시에 내가 메시지를 받았다는 사실을 그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가비에로, 당신은 불멸의 인간이오. 다른 사람들처럼 언젠가 죽는다 해도 그건 중요하지 않소. 그래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테니 말이오. 당신은 살아 있는 한 불멸이오. 나는 내가 오래전에 죽었다고 생각하오. 내 인생은 마치 옷을 자른 다음에 남은 조각들을 아무렇게나 이어붙인 것처럼 만들어져 있소. 그 사실을 깨달은 이후로 나는 아과르디엔테를 입에 대지 않았고. 나는 더이상 계속해서 나 자신을 기만할 수 없소. 학교 교실에서 당신이 다시 살아나고 병을 이기는 것을 보며, 나는 나 자신을 분명하게 보았소. 내 실수가 어디에 있었는지, 그게 언제 시작되었는지를 알았소."

 "함부르크를 떠났을 때였소?" 나는 이렇게 물으면서 그 동기를 알아보았다.

 "그건 중요하지 않소. 혹시 당신은 아시오? 중국 소녀와 도망칠 때일 수 있소. 서인도제도를 떠나던 때도 될 수 있소. 나는 모르겠소. 그것 역시 아주 중요한 문제는 아니오. 어쨋든 중요하지 않소." 그의 목소리에 불쾌한 느낌이 배어 있었다. 나에 대한 분노보다는 자기 자신에 대한 분노였다. 대화를 시작할 때는 그렇게 멀리 가리라고 기대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렇소." 그가 덧붙였다. "당신 말이 맞을 수도 있소.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소. 우리가 그런 결론에 도달할 때면, 시작은 중요하지 않소. 시작을 안다고 모든 게 설명되는 것은 아니니까."

 

 p.443

그는 지난 세월을 떠올렸다. 아직도 그 통증은 마치 처음인 것처럼 그를 불시에 덮치고 있었다. 그는 늙는다는 것의 진정한 비극은 저곳, 그러니까 우리 내부에 시간의 흐름을 알지 못하는 영원한 아이가 계속 살고 있는 사실이라고 생각했다. 그 아이의 비밀은 가비에로가 아라쿠리아레 협곡에 칩거했을 때 아주 선명하게 감지되었다. 그 아이는 늙지 않는다는 특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깨어진 꿈과 완고한 희망, 그러나 시간에 구애받지 않으며 시간이라는 것을 상상할 수도 없는 혼잡하고 난잡하며 환영적인 정신이라는 짐을 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 육체는 우리의 노화, 즉 누군가가 우리의 삶을 살면서 우리의 기력을 소비하고 있다는 증거를 알려주며, 잠시 그런 증거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즉시 우리는 더럽혀지지 않은 젊은 시절의 착각으로 돌아가며, 그렇게 불가피하게 다가오는 마지막 자각의 순간까지 계속 착각 속에서 살아간다.

 

 인용구 1

 돌이킬 수 없는 것을 되풀이하라!

 우리의 운명보다 더 나아가라!

 모든 것은 죽음으로 나아갈 뿐이며,

 거기에는 항구가 없다.

 - 쥘 라포르그, "달빛의 사람"

 

 인용구 2

 해야할 일을 하면서

 낚시꾼들은 모두 자기 자신을 위해 낚는다.

 하찮은 피라미를 올린 그물의 첫번째 낚시꾼은

 경솔하게도 질병이라는 바닥의 진흙을 끌어올리고,

 어떤 이는 자신을 위협하는 절망을 향해

 그물을 펼친다.

 그이는 강가에서 쓰라린 회한의 잔해를 모으고 있다.

 - 에밀 베르하렌, "낚시꾼들"

 

AND

만두

돼지고기를 잘게 다지고
부추, 숙주, 쪽파, 김치도 다진다
다져진 것들에 달걀을 섞어서 굳게 다진다
다져진 만두속을 만두피로 감싸면
만두 빚기 완료
쪄서 먹고 구워서 먹고
뱃속으로 들어가면 녹아내리고
다시 단단하게 다져져서 똥으로 나온다
산다는 건 먹고 싸는 것
만두가 똥이 되도록
다지고 다지고 또 다지는 일
똥이 거름이 되어
다시 만두가 되는 일
AND

사랑

누구나 작은 관심에 일렁이고
그렇게 사랑이 시작된다
누구나 토씨 하나에도 흔들리고
그렇게 사랑이 끝난다
AND

 알지만 자신이 없다.

 "세상에 물건이 너무 흔하다." 고 자주 말한다. 부정적인 의미로 말하는 것이데, 실제로는 언제든 그 흔한 물건을 소비할 수 있다는 마음으로 살고 있다.

 변산에 있을 때, 볼음도에 있을 때, 강릉에서만 생활할 때가 지금 강릉과 정선을 왔다갔다 하면서 살 때보다 심적으로 많이 편했다. 생활 반경(세계)이 넓어지면 어려움도 많은 법이다. 처음으로 다른 동네에 갔을 때, 처음으로 시외버스를 탔을 때, 처음으로 외국으로 나갔을 때의 기억이 강렬할 수밖에 없다.

 나는 절제할 수 있을까? 지난주에 영화 'arrival'을 봤고 이번주엔 이 책을 읽었다. 영화의 결말은 해석에 따라 희망일 수 있지만 나는 '정해진 결론을 향해 가는 인간' 이라는 부정적인 느낌으로 봤다. 나는 절제할 수 있을까?

 자신이 없다.

AND

봄비

동풍에 실려온 온기 거리에 가득하고
모퉁이를 돈 매화향이 골목 끝집 대문을 넘는다
지붕 아래 아기고양이는 애미를 따라 살퐁살퐁 걷고
움트는 가지마다 새들 지저귀는데
이 빗 속에 네가 울면
우산도 없는 나는 어떡해
이 봄을 나는 어떡해
AND

밀폐

물이 차오르는 방에서
양치질을 하고 있었다
물이 방을 가득 채우도록
양치질을 하고 있었다
칫솔질을 멈추고 양칫물을 뱉었다
방안에 불순물이 떠니니고
그 물로 입을 헹궜다
입안이 시원해지고
방안의 물이 빠져나갔다
나는 온 몸이 시원해졌다
AND

흐린

흐린날
안경을 벗고
흐린 전깃줄
멀리 흐린 하늘
흐릿하게 눈발 흩날리고
눈이 녹는지 내 눈이 녹는지
세상 모든 건 다 녹아 흐릿해지는지
선명한 기억속에 흐릿하게 흘러내리는 건
그리움인지 그리움인지 또 그리움인지
AND

20리터

트럭 뒷바퀴 뒤에
몸을 쭉 뻗고 누운 고양이
굳은 몸을 접어서 비닐 봉지에 담는다
한 겹으론 찜찜해서 비닐 봉지 한 장을 더 쓰고
20리터 쓰레기 봉투에 담는다
평생 쓰레기통을 뒤적거리며 살았으나
그 삶이 쓰레기는 아니었을 것이다
평온한 모습이니 생이 다하여 죽었겠으나
겨울 다 보내고 입춘도 지나
생명을 피우는 봄비 내리는 우숫날에
560원 짜리 쓰레기 봉투에 담긴 한 시절
나의 봄이 너의 죽음이다
AND

어느 일요일 오후의 생각


TV뉴스가 김정남의 죽음을 두 시간 째 떠들고 있다
조선땅에 사는 수 천의 김정남 중에 한 명이 살해당한 것이 그렇게 중요한 일일까
아, 뉴스에 나오는 김정남은 북한 사람 김정남이지
남한 사람들은 북쪽의 일에 관심이 많지
또 그는 김일성의 손주이고 김정일의 아들이지
남한에는 이병철의 손주가 구속된 건 아쉬워 하면서도
김정은이 권력을 잡은 것에는 못마땅해 하는 사람도 많지
핏줄이란 게 무섭지
화면속 고인의 모습이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닮았다
남북은 하나고 우리는 단일민족이라니까 고인은 나랑도 닮았겠지
생각해 볼 것도 없이 얼굴에 눈 코 입이 달린 것이 닮았고
콧구멍이 두 개인 것도 닮았네
곧 비가 쏟아질 것 같은 일요일 오후에
강원도 정선군 오일장 한 귀퉁이에서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누가 보는 줄도 모르고 오줌을 누는 중년 남자가 집에 잘 들어가는 일보다
먼 이국땅에서 김정남이 독살당한 일과 그 범인을 잡은 일이 중요한 일일까
둘 다 나랑 닮은 사람이고 우리는 한민족인데
한 사람은 죽었고 한 사람은 아직 살았는데
어떤 경우에는 죽은자가 산자보다 더 중요한 것일까
북한사람 김정남은 죽어서도 관심을 받는 일이 행복할까
본인 토사물 위에 쓰러질 뻔 한 남자는 집에 잘 들어갔을까
나는 오늘 죽지도 않고 비틀거리지도 않고 집에 잘 들어갈 수 있을까

AND

쫓겨난 사람들

2017. 2. 18. 20:03

 생활보조금으로 받은 한 달 수입을 거의 다 집세로 내면서도 쫓겨나고 쫓겨나고 또 쫓겨나는 사람들 이야기다. 아래 인용한 부분 말고도 공감가는 부분이 많았다. Y형은 작년에만 세 번의 이사를 했고(쫓겨난 건 아니지만 엄밀히는 쫓겨난 거다.) 우리집은 먼저 살던 집 주인아줌마한테 전세보증금을 아직 다 못 돌려받았다. 책은 미국 밀워키의 사례를 다루지만 한국에도 비슷한 일이 많겠지.

 자기 집이 없으면 어쨋든 이사를 가야하고 이사 몇 번 다니다보면 그게 싫어서 무리해서 집을 사는 사람이 있고, 그런 무리조차 할 수 없는 사람도 있고, 점점 형편이 어려운 쪽으로 나가다보면 밥을 굷는 사람들이, 거리에서 사는 사람들이 있다. 물건이 넘쳐나는 세상에 살면서 왜 집값을 낮추지 못하나? 왜 밥을 굶는 사람들이 있나? 이재용 구속에 나라걱정을 왜 하나? 왜 나는 이런일들에 저항하지 않나? 

AND

돌다

내가 네 주위를 365바퀴 도는 동안
너는 그사람 주위를 한 바퀴 돈다
그렇게 한 해가 가도
나는 네 주위를 돌고
너는 그사람 주위를 돈다
내가 네 주위를 한 바퀴 도는 동안
그녀는 내 주위를 365바퀴 돈다
그렇게도 한 해가 가고
나는 네 주위를 돌고
그녀는 내 주위를 돈다
각자의 시간을 돌고 돌아
몇 번이나 해가 바뀌어도
우리는 닿지 못하고
누군가의 주위를 돌기만 한다
AND

 컴퓨터 자판으로 블로그에 뭘 적는 게 참 오랜만이다. 키보드에서 나는 또각또각 소리가 벌써 옛 정취가 되어버렸다. 나이가 사십이고 처음 내 컴퓨터를 가졌던 게 20년 전이니 그럴만 하다. 아직은 옛것을 찾는 나이가 아닌지 스마트폰으로 적는 게 더 편하단 생각이다.

 어제는 칼퇴근 하고 할머니 보러 강릉에 다녀왔다. 얼마전부터 호스로 투입되던 음식물마저 계속 게우셔서 더 이상 영양확보가 불가능한 상태라 들었다. 고모랑 통화할 때,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하냐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했다. 할머니 숨이 붙어 있을 때, 한 번 더 보고 싶었다. 할머니는 아버지의 새 엄마니까 그 마음이 혈연의 정은 아니다. 그렇다고 학습된 예의나 감정도 아니다. 무엇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치매 이후에 가만히 누워 계신지가 십년이 넘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할머니의 의식은 어디에서 어떻게 지내고 있는걸까? 내면의 고요함 조차도 사라진 지금 모습이 내 할머니인가? 

 두 아이가 있는 남자에게 시집와서 네 명의 아이를 낳아 키웠고 이제 당신의 자식들과 그 자식들의 자식들이 각자의 방식과 마음으로 당신의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

 이 세상에서 숨을 멈추고 나면 치매 초창기에 바리바리 짐을 싸서 가야한다고 했던 자기집에 가시는 걸까? 그렇게 믿고 싶은 마음이 누구나 죽는다는 공포를 덜어주나? 할머니를 기억하는 사람들도 다 세상에서 사라지고 나면 그제서야 진짜 죽음이 오나? 죽음을 포함해서 어떤 방법으로도 보여줄 수 없는 내 모습이 있고 신이라 해도 타인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컴퓨터 화면으로 보는 블로그 글쓰기 화면 만큼이나 오랜만에 죽음에 대해서 생각한다.    

AND

벌레

모든 땀구멍에서
유충들이 기어나왔다
들어왔다 나왔다를 반복하며
점점 더 커지는 그것들을 느꼈다
내가 키운 벌레들이 나를 집어 삼키는 동안
나는 너와 함께 별의 죽음을 기다리던 그날밤처럼
아무 반성도 후회도 없이 그냥 가만히 누워만 있었다
AND

새와 나

 

하늘빛이 기묘했는데
나는 어느 나무 아래서
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작은새 한 마리가
거미줄처럼 뻗어나간 나뭇가지 위에 앉아 있었다
새를 향해 손을 뻗었으나 새는 날지도 않고 눈만 꿈뻑거렸다
달아나지 않는 새 때문에 당황한 손을 거두고 새와 눈이 마주쳤다
가지 위의 눈이 새의 다리를 붙잡고 있었다
이렇게 얼어붙은 순간에
내가 어쩔 수 없는 시간에
어느새 분홍색 눈이 내리고 있었다
나도 새도 아무런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하늘빛은 계속 기묘하고
나도 새도 그 아래 가만히만 있었다
AND

균열

모든 것은 작은 금 하나에서 시작됐다
씨앗에서 싹이 나고 잎이 나고 가지가 뻗고 꽃이 피고 다시 씨앗이 되었다
모든 것은 작은 상처 하나에서 시작됐다
갈라진 손 끝이 뺨을 스치고 혀가 메마른 입술을 파고들고 사랑이 되고 말이 가슴을 찌르고 이별하고 마음이 찢어졌다
모든 것은, 균열조차도 작은 균열에서 시작됐다
AND



냉혈한 소리를 들어도
사람 피는 36.5도
예수님도 부처님도
피 온도는 36.5도
미친 사랑의 온도도
고작 37.2도
돼지피를 굳혀서 끓이면 선지해장국
사람피를 굳혀서 끓여도 선지해장국
동물 피를 먹는 인간과
인간 피를 먹는 뱀파이어
한 번 몸 밖에 나와 굳은 피는
끓여도 다시 녹아 흐르지 않는다
피가 끓는 사람도 피 온도는 36.5도
라면물처럼 끓어보지도 못하는 인생
AND



싸늘한 내 마음처럼
싸박싸박 눈 내린다
비어버린 가슴처럼
눈 앞에 모든 것이 하얗다
누군가 지나간 자리마다
발자국 발자국 발자국
흰 발자국 가득한 세상에
네 발자국만 없다
AND

불온

너무나 사랑스러운 그녀는 애인이 없고
그녀 앞에 웃고 있는 나는 아내가 있네
성당에 다니는 그녀 앞에서
소주 한 잔 마다 성호를 그으며
주여 제 마음을 용서하소서
잠시후 술자리에 아내가 합류하고
소주 한 잔 마다 성호를 그으며
주여 제 마음을 용서하소서
너무 예뻐서 미운 아내의 친구를 용서하소서
AND

불륜

남들 다 출근하는 새벽 댓바람부터
모텔 앞 길가 아우디 A6 안에서
뭐가 그리 애틋한지
남녀가 서로의 얼굴을 안쓰럽게 쓰다듬는다
AND

터널

그저 걷고 있다
아니면 뛰고 있나
그러니 걷거나 뛰고있다
불 켜진 어둠속을
그저 걷고 있다
아니면 차로 달리고 있나
어쨌거나 걷거나 달리고 있다
환한 어둠속을
안온한 어둠속을
걷거나 뛰거나 달리고 있다
바깥이 어떤지도 모르고
터널 안에서
걷거나 뛰거나
내 힘도 아닌 힘으로
달리고 있다
AND

유빙

인류보다 오래 살았다
지구 끝에서 떨어져 나왔다
남쪽으로 남쪽으로 녹아 흘러간다
오래 살았어도 죽음은 늘 순간이다
아빠곰은 홀쭉해지고
엄마곰은 말라빠지고
아기곰은 아직은 귀엽다
남쪽으로 남쪽으로 사라져간다
아빠곰 엄마곰은 배가 고파 죽고
아기곰은 아직 귀여운데
흐르는 것은 바다인가 유빙인가 눈물인가
눈물이 짠 이유를 알려주고
남쪽으로 남쪽으로 희미해진다
바다가 된다
AND

오리

영하 십 도 추위에도 강물 위를 헤엄치다가 기다란 목을 물 속에 처박고 먹을 것을 찾는 삶
온 강이 다 얼고나면 쉴 곳도 없고 배가 고픈 삶
AND

돈가스를 먹다

해장으로 돈가스를 먹는다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에 살면서
이리 기름진 걸 먹어도 되나
바다 건너 먼 나라에서 온 소곱창에
이 나라 저 나라 술을 짬뽕했으니
국적은 문제가 아닐까
매일 매일 돈가스 해장으로
미끌미끌 미꾸라지가 되려나
기름기 뺀 얼굴아래 기름진 내장을 감추고
언제 어디서든 달아날 수 있게
마무리로 끈적한 데미그라스 소스를 핥는다
식당 사장님이 나를 보고 웃는다
해장 돈가스에 속만 느끼하다


AND

가루

몸을 긁는다
겨울은 건조하다
차가워서 습기가 얼어버리나
계속 몸을 긁는다
옆구리, 등짝, 허벅지, 종아리
손이 닿는 곳은 다 건드린다
살가루가 날린다
쌀가루처럼 뽀얗다
그래, 우주도 가루 한 점에서 시작됐지
가루로 끝나지 않는 것은 없지
몇해 전 겨울의 화장터와
가루가 된 내 아버지가 머릿속을 스치자
내 몸이 타들어가는 것 같다
가루가 되는 일로 대를 잇겠구나
삶이란 게 가렵고 우습다
자꾸 몸을 긁는다
밀가루 같이 허연 몸에서
살가루가 떨어진다
겨울이 지나간다
AND

이사에는 크게 네 가지 종류가 있다.
자가이사, 용달아저씨 부르기, 이삿짐센터 일반 이사, 이삿짐센터 포장이사다.
내일이 이삿날이다. 우리는 자가와 용달이 섞인 형태의 이사 방식을 선택했다. 나는 포장이사를 하고 싶었지만 A형이 돈 아깝다고 해서 그렇게 하기로 했다.
원체 짐이 별로 없는데다 세탁기 , 장농을 두고 갈 거고 오늘 짐 싸면서 이것저것 버리고 나니 1톤 트럭 한 차면 짐 다 옮길 것 같다. 물론 내 자동차 안에도 약간의 짐을 실어뒀다. A도 트럭 갖고 와주기로 하고 크게 걱정이 없네.
이사할 집은 지금 집에서 차로 5분 거리다.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서도 자꾸 포장이사에 미련에 남는 건 냉장고 때문이다. 우리집에서 가장 덩치있는 짐, 결혼할 때 장모님이 사준 냉장고, 두 식구에겐 너무 큰 냉장고, 집을 나와 큰길로 나가는 쪽문과 새 집의 좁은 대문을 통과하기 어려울 것 같은 냉장고, 이사 전문가들이 옮긴다면 깔끔하게 옮길 수 있을 것 같은 냉장고, 물건이 흔한 세상이라 어디 중고로 팔기도 어려울 것 같은 냉장고, 그러니 당분간은 나랑 같이 살아야할 냉장고.
요즘 하루에도 몇 번씩 기분에 안 좋아졌던 게 냉장고 운반 때문이라니. 주인아줌마가 돈 없어서 전세 보증금 바로 못 주는 거 보다 내일 깔끔하게 냉장고 옮길 일이 더 걱정이니 이런 내가 걱정이다.
AND

드립커피를 먹다

커피를 시킨다
- 늘 먹던대로 드릴까요
- 예
커피맛까지 세분화된 세상에
먼지처럼 살고 있다
카페 주인이 느리게 흐르는 물처럼
고요하고 자연스럽게 커피를 내린다
쿠키를 굽는 한쪽 구석에서 바다 냄새가 난다
유조선이 바다에 흘린 것 마냥
커피 위에 기름이 둥둥 떠 있다
다 비운 커피잔에서 고등어 굽는 냄새가 난다
- 늘 먹던 맛이 아닌데요. 커피 한 잔 더 주세요
- 예
다음 커피를 기다리다가 트림을 한다
트림에선 순대 냄새가 난다
생의 언젠가 바닷가에서 순대를 먹은적 있다
새 커피에선 늘 마시던 냄새가 난다
AND

예, 술

술 못 마시는 사람도
예술을 할 수 있다
예술이 술 보다 쉽다
술도 마시고 예술이란 걸 해도
예술적으로 살긴 어렵다
예술이 삶보다 쉽다
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