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탕
투, 사탕을 뱉는다
툭, 깨져서 흩어진다
이것도 생이라면
아직 달콤할 때 부서졌으니
아름다웠다고 할 수 있을까
자음 하나 차이로
사랑은 달콤하게만 끝나지 않고
끝나지 않는 밧줄을 올라도
운명은 한 길로만 향한다
입안에 씁쓸한 단내만 남았다
사탕
투, 사탕을 뱉는다
툭, 깨져서 흩어진다
이것도 생이라면
아직 달콤할 때 부서졌으니
아름다웠다고 할 수 있을까
자음 하나 차이로
사랑은 달콤하게만 끝나지 않고
끝나지 않는 밧줄을 올라도
운명은 한 길로만 향한다
입안에 씁쓸한 단내만 남았다
낮잠
깜빡 잠이 들었다가 눈을 떴다
춥다
잠들면 식고 식으면 죽는다
불멸은 영원한 불면
식은밥, 식은 정신, 식은 사랑
식으면 죽는다
사랑은 한쪽만 식어도 끝난다
그러니 아가,
어서 그 차가운 물에서 나오렴
소설을 오랜만에 읽었다.
"살아있는 한 불멸, 영원한 아이" 삶에 대한 통찰은 죽음에 대한 통찰이다. 조르바랑 크눌프가 생각났다.
p.100~
"왜 술을 끊었소?" 나는 갑자기 그런 질문을 던졌다. 그가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렇소, 나는 술을 입에 대지 않았고, 그러자 생각을 할 수 있게 되었고, 그것은 마치 내가 내게 할당되지 않은 놀이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과 같소. 다른 사람에게 할당된 역할을 하면서 인생의 일부를 산다는 것은 아주 좋지 않소. 게다가 과거를 고칠 수 없고 잃어버린 것을 되찾을 힘도 없을 때 그런 사실을 깨닫는 것은 더욱 좋지 않소. 내 말을 알아듣겠소?"
"그렇소, 이해한다고 생각하오. 내게도 여러 번 그런 일이 있었지만 그리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소. 나는 회복하는 데 성공했고, 내 다리로 딛고 일어설 수 있었소." 나는 대화의 방향을 바꾸는 동시에 내가 메시지를 받았다는 사실을 그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가비에로, 당신은 불멸의 인간이오. 다른 사람들처럼 언젠가 죽는다 해도 그건 중요하지 않소. 그래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테니 말이오. 당신은 살아 있는 한 불멸이오. 나는 내가 오래전에 죽었다고 생각하오. 내 인생은 마치 옷을 자른 다음에 남은 조각들을 아무렇게나 이어붙인 것처럼 만들어져 있소. 그 사실을 깨달은 이후로 나는 아과르디엔테를 입에 대지 않았고. 나는 더이상 계속해서 나 자신을 기만할 수 없소. 학교 교실에서 당신이 다시 살아나고 병을 이기는 것을 보며, 나는 나 자신을 분명하게 보았소. 내 실수가 어디에 있었는지, 그게 언제 시작되었는지를 알았소."
"함부르크를 떠났을 때였소?" 나는 이렇게 물으면서 그 동기를 알아보았다.
"그건 중요하지 않소. 혹시 당신은 아시오? 중국 소녀와 도망칠 때일 수 있소. 서인도제도를 떠나던 때도 될 수 있소. 나는 모르겠소. 그것 역시 아주 중요한 문제는 아니오. 어쨋든 중요하지 않소." 그의 목소리에 불쾌한 느낌이 배어 있었다. 나에 대한 분노보다는 자기 자신에 대한 분노였다. 대화를 시작할 때는 그렇게 멀리 가리라고 기대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렇소." 그가 덧붙였다. "당신 말이 맞을 수도 있소.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소. 우리가 그런 결론에 도달할 때면, 시작은 중요하지 않소. 시작을 안다고 모든 게 설명되는 것은 아니니까."
p.443
그는 지난 세월을 떠올렸다. 아직도 그 통증은 마치 처음인 것처럼 그를 불시에 덮치고 있었다. 그는 늙는다는 것의 진정한 비극은 저곳, 그러니까 우리 내부에 시간의 흐름을 알지 못하는 영원한 아이가 계속 살고 있는 사실이라고 생각했다. 그 아이의 비밀은 가비에로가 아라쿠리아레 협곡에 칩거했을 때 아주 선명하게 감지되었다. 그 아이는 늙지 않는다는 특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깨어진 꿈과 완고한 희망, 그러나 시간에 구애받지 않으며 시간이라는 것을 상상할 수도 없는 혼잡하고 난잡하며 환영적인 정신이라는 짐을 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 육체는 우리의 노화, 즉 누군가가 우리의 삶을 살면서 우리의 기력을 소비하고 있다는 증거를 알려주며, 잠시 그런 증거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즉시 우리는 더럽혀지지 않은 젊은 시절의 착각으로 돌아가며, 그렇게 불가피하게 다가오는 마지막 자각의 순간까지 계속 착각 속에서 살아간다.
인용구 1
돌이킬 수 없는 것을 되풀이하라!
우리의 운명보다 더 나아가라!
모든 것은 죽음으로 나아갈 뿐이며,
거기에는 항구가 없다.
- 쥘 라포르그, "달빛의 사람"
인용구 2
해야할 일을 하면서
낚시꾼들은 모두 자기 자신을 위해 낚는다.
하찮은 피라미를 올린 그물의 첫번째 낚시꾼은
경솔하게도 질병이라는 바닥의 진흙을 끌어올리고,
어떤 이는 자신을 위협하는 절망을 향해
그물을 펼친다.
그이는 강가에서 쓰라린 회한의 잔해를 모으고 있다.
- 에밀 베르하렌, "낚시꾼들"
알지만 자신이 없다.
"세상에 물건이 너무 흔하다." 고 자주 말한다. 부정적인 의미로 말하는 것이데, 실제로는 언제든 그 흔한 물건을 소비할 수 있다는 마음으로 살고 있다.
변산에 있을 때, 볼음도에 있을 때, 강릉에서만 생활할 때가 지금 강릉과 정선을 왔다갔다 하면서 살 때보다 심적으로 많이 편했다. 생활 반경(세계)이 넓어지면 어려움도 많은 법이다. 처음으로 다른 동네에 갔을 때, 처음으로 시외버스를 탔을 때, 처음으로 외국으로 나갔을 때의 기억이 강렬할 수밖에 없다.
나는 절제할 수 있을까? 지난주에 영화 'arrival'을 봤고 이번주엔 이 책을 읽었다. 영화의 결말은 해석에 따라 희망일 수 있지만 나는 '정해진 결론을 향해 가는 인간' 이라는 부정적인 느낌으로 봤다. 나는 절제할 수 있을까?
자신이 없다.
어느 일요일 오후의 생각
TV뉴스가 김정남의 죽음을 두 시간 째 떠들고 있다
조선땅에 사는 수 천의 김정남 중에 한 명이 살해당한 것이 그렇게 중요한 일일까
아, 뉴스에 나오는 김정남은 북한 사람 김정남이지
남한 사람들은 북쪽의 일에 관심이 많지
또 그는 김일성의 손주이고 김정일의 아들이지
남한에는 이병철의 손주가 구속된 건 아쉬워 하면서도
김정은이 권력을 잡은 것에는 못마땅해 하는 사람도 많지
핏줄이란 게 무섭지
화면속 고인의 모습이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닮았다
남북은 하나고 우리는 단일민족이라니까 고인은 나랑도 닮았겠지
생각해 볼 것도 없이 얼굴에 눈 코 입이 달린 것이 닮았고
콧구멍이 두 개인 것도 닮았네
곧 비가 쏟아질 것 같은 일요일 오후에
강원도 정선군 오일장 한 귀퉁이에서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누가 보는 줄도 모르고 오줌을 누는 중년 남자가 집에 잘 들어가는 일보다
먼 이국땅에서 김정남이 독살당한 일과 그 범인을 잡은 일이 중요한 일일까
둘 다 나랑 닮은 사람이고 우리는 한민족인데
한 사람은 죽었고 한 사람은 아직 살았는데
어떤 경우에는 죽은자가 산자보다 더 중요한 것일까
북한사람 김정남은 죽어서도 관심을 받는 일이 행복할까
본인 토사물 위에 쓰러질 뻔 한 남자는 집에 잘 들어갔을까
나는 오늘 죽지도 않고 비틀거리지도 않고 집에 잘 들어갈 수 있을까
생활보조금으로 받은 한 달 수입을 거의 다 집세로 내면서도 쫓겨나고 쫓겨나고 또 쫓겨나는 사람들 이야기다. 아래 인용한 부분 말고도 공감가는 부분이 많았다. Y형은 작년에만 세 번의 이사를 했고(쫓겨난 건 아니지만 엄밀히는 쫓겨난 거다.) 우리집은 먼저 살던 집 주인아줌마한테 전세보증금을 아직 다 못 돌려받았다. 책은 미국 밀워키의 사례를 다루지만 한국에도 비슷한 일이 많겠지.
자기 집이 없으면 어쨋든 이사를 가야하고 이사 몇 번 다니다보면 그게 싫어서 무리해서 집을 사는 사람이 있고, 그런 무리조차 할 수 없는 사람도 있고, 점점 형편이 어려운 쪽으로 나가다보면 밥을 굷는 사람들이, 거리에서 사는 사람들이 있다. 물건이 넘쳐나는 세상에 살면서 왜 집값을 낮추지 못하나? 왜 밥을 굶는 사람들이 있나? 이재용 구속에 나라걱정을 왜 하나? 왜 나는 이런일들에 저항하지 않나?
컴퓨터 자판으로 블로그에 뭘 적는 게 참 오랜만이다. 키보드에서 나는 또각또각 소리가 벌써 옛 정취가 되어버렸다. 나이가 사십이고 처음 내 컴퓨터를 가졌던 게 20년 전이니 그럴만 하다. 아직은 옛것을 찾는 나이가 아닌지 스마트폰으로 적는 게 더 편하단 생각이다.
어제는 칼퇴근 하고 할머니 보러 강릉에 다녀왔다. 얼마전부터 호스로 투입되던 음식물마저 계속 게우셔서 더 이상 영양확보가 불가능한 상태라 들었다. 고모랑 통화할 때,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하냐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했다. 할머니 숨이 붙어 있을 때, 한 번 더 보고 싶었다. 할머니는 아버지의 새 엄마니까 그 마음이 혈연의 정은 아니다. 그렇다고 학습된 예의나 감정도 아니다. 무엇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치매 이후에 가만히 누워 계신지가 십년이 넘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할머니의 의식은 어디에서 어떻게 지내고 있는걸까? 내면의 고요함 조차도 사라진 지금 모습이 내 할머니인가?
두 아이가 있는 남자에게 시집와서 네 명의 아이를 낳아 키웠고 이제 당신의 자식들과 그 자식들의 자식들이 각자의 방식과 마음으로 당신의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
이 세상에서 숨을 멈추고 나면 치매 초창기에 바리바리 짐을 싸서 가야한다고 했던 자기집에 가시는 걸까? 그렇게 믿고 싶은 마음이 누구나 죽는다는 공포를 덜어주나? 할머니를 기억하는 사람들도 다 세상에서 사라지고 나면 그제서야 진짜 죽음이 오나? 죽음을 포함해서 어떤 방법으로도 보여줄 수 없는 내 모습이 있고 신이라 해도 타인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컴퓨터 화면으로 보는 블로그 글쓰기 화면 만큼이나 오랜만에 죽음에 대해서 생각한다.
하늘빛이 기묘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