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설고 아름다운 나라에 도착하면 늘 생각해.
이곳의 장례 전통은 어떠한가.
무덤 속 머리는 동서남북 중 어디를 향하나.
얼마나 좋을까?
누군가 나를 기꺼이 맞이해준다면.
실례가 안 된다면 여기서 죽어도 될까요?
물어봐도 화들짝 놀라지 않고
열쇠와 필기구를 말없이 건네준다면.
객사의 원래 뜻은 손님으로 죽는 것.
가장 멀리 뻗은 길 따라 몸을 누이고
그때 밤하늘에 뜬 삐뚤빼뚤한 별자리 하나를
삐뚤빼뚤한 내 영혼에 딱 맞는 관으로 삼는 거지.
낯설고 아름다운 나라에 도착하면 늘 생각해.
사람이 죽으면 다시 태어날 수 있는가.
얼마나 좋을까?
죽는 곳은 여럿이어도
태어나는 곳은 하나라면.
같은 세계에서 같은 사람들이랑
부디 단 한 번이라도
삶이 고단하지 않을 때까지
죽음이 서럽지 않을 때까지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 책은 안 읽고 뒤표지만 들여다보고 있다.
AND

숙취

눈을 뜨자마자
곁에 없는 것들 생각에 울어버렸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흐르는데
이마에선 식은땀이 나고
속이 불편하고
변기에 앉아서도 눈물이 나는데
주르륵 설사를 하고
여전히 속은 불편하고
뱃속의 것을 게우고
속도 없이 눈물이 나고
술이 다 깨도록 속절없이 울기만 했다
AND

카톡

카톡 프로필을 보면
사는 게 다 거기서 거기다
애를 키우던지
개나 고양이를 키우던지
본인이 이쁜걸 봤던지
본인이 이쁘게 나왔던지
뭘 키우면 그게 이쁘고
뭘 안키우면 지가 이쁘다
AND

만두송   song ver

 

찐빵을 보니까  1
만두가 땡기네  3
당신은 만두국을 싫어하지만  4  5
만두국 먹고 피우는 담배는 참 맛있지  1  3  4  5  1

만두는 물만두
만두는 군만두
나는 만두국
딩신은 순대국  1 3 2 5

담배를 피우니까
커피가 땡기네
아메리카노 보단 찐한 밀크커피로
달달한 커피에 피가 끈적거리네

담배는 독하게
커피는 진하게

물보다 진한 피
피보다 진한 너

찐빵을 보니까
만두가 땡기네

만두국을 안 먹는
피보다 진한 너

만두는 물만두
만두는 군만두

만두국을 안 먹는
피보다 진한 너 2 5 1

AND

주말에 잘 쉬었다.

더위, 휴식, 복숭아, 더위, 에어컨, 복숭아, 정동진영화제, 더위, 게임, 복숭아, 냉면, 해수욕, 더위, 복숭아, 영화, 더위, 월요일 새벽 기상.

주말에 더웠다.

주말에 잘 쉬었고 더웠고 복숭아 많이 먹었다.

아내랑 즐거웠다. 아내가 슬프질 않으니 내 글이 별로라고 했다. 슬퍼지려면 어떻게 해야하나? 최근에 노래를 만들기 시작했다. 네 개를 만들었다. 아내가 뭔 포크송만 만드냐고 그런건 나도 만든다고 했다. 나는 이게 지금 내 한계라고 했다. 이 한계를 어떻게 넘을까?

슬퍼져서 아내 마음에 드는 글을 쓰고 한계를 돌파해서 아내 맘에 드는 노래를 만들면 나는 내가 되고 좋아지고 괜찮아지나?

아내가 나는 공감능력은 있는 편이라고 했다. 공감이 능력인가? 공감능력이 있어서 가까운 곳은 물론이고 지구 반대편의 어려움까지 내 어려움처럼 느끼고 안쓰러워하면 나는 진정 내가 되고 괜찮아지나?

사랑을 다 긁어모아다가 내 마음에 드는 노래를 만들면 나는 흡족하게 잠들 수 있나?

요즘 내가 뭐하는 건지 모르겠다.

부정적인 월요일이다.

노래 만들고 자야겠다.
AND

절반

누군가 말했지
밤꽃이 피면 반이 지난거라고
하지 무렵,
우리는 반짝이는 생의 반을 지나 어둠으로 기울기 시작하지
몸도 기울고 마음도 기울어 어둠에라도 기대야만 살지
기대어 사랑을 속삭일 어둠이 당신이라면 좋겠어
그렇게 점점 당신에게 기울다가
낮과 밤의 길이가 그 경계까지도 같은 날
생을 공평하게 들여다보는 단 하루가 오고
그날 당신과 서로의 이마를 쓰다듬으면 좋겠어
똑같은 만큼 서로 주고 받는 사랑이 아니라도 좋아
남은 날들의 절반과 그 절반의 절반도 그렇게 함께하면 좋겠어
AND

옛날사람

옛날 사람이 되고 나니
나보다 옛날 사람이 별로 없다
진짜 옛날 사람이 되고 나니
못했던 일만 생각난다
미안했던 일만 생각난다
고맙단 말은 하지 않았다
감사 인사도 받지 못했다

나는 옛날 사람
너에게 집중하지 못했던 그때가 떠오른다
나는 옛날 사람
너는 미래에 있겠다고 했다
나는 옛날 사람
내일과 희망은 당신들의 몫

나는 옛날 사람
어제만 사는 옛날 사람
AND

여름

마음과 마음이 부둥켜 안으니 마음에서도 땀이 난다
뒤섞인 땀에서 마음의 단내가 난다
여름이 지나고 있다
AND

 덥다. 옛날에도 이렇게 더웠나? 10살 때는 얼마나 더웠는지 기억나지 않으니까 옛날이라 하면 한 이십년 전 스무살 무렵으로 할까? 그때는 서울의 빌딩 숲을 싸돌아 다녔어도 지금처럼 더웠던 것 같지는 않다. 여름 평균 온도는 올랐겠지만 여름이 덥지 않았을리는 없고 큰 사건이 일어나지 않은 해의 더위는 반복속에 잊혀질 뿐이다.

 너무 더워서 에어컨을 틀고 실외기 바람이 뜨거우니 옆집도 에어컨을 틀고 이렇게 번져나가는 일이 반복된다. 에어컨만 그런게 아니라 자동차도 아파트도 그렇다. 결국 사는 게 다 그렇다는 반복으로 돌아온다.  이 되풀이 끝에 모두가 멸망으로 치닫는가.

 모든 과거는 치욕이다, 라고 메모장에 오래 적어두고 다녔다. 머리가 차면서부터 여러가지 잘못한 일들은 여전히 기억속에 남아있다. 삶에는 좋은일도 나쁜일도 있다. 과거의 모든일이 내 기억속에 남아 있지는 않지만 혈관 속 작은 털 한 오라기에라도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나의 흔적이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는 지금의 나란 없는 것이니까 그렇다. 그러니 인간이란 같은 실수를 자꾸 반복하지 않고 내적으로 점점 나아지며 살아야한다. 나아진다고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

 집에 에어컨 샀다. 또 짐을 하나 늘렸다. 이건 나아진 건 아니다.

 이렇게 흘러가는 삶이 두렵지만 내 옆에 복날에도 사랑하는 당신이 있다. 이대로 끝나도 괜찮다.
AND

피자를 먹다 - 시카고 피자 -


피자를 먹는다
냉장고 안에서 이틀
차갑게 식은 정통 아메리칸 스타일
치즈까지 단단해진 시카고 피자

피자를 식히려면 냉장고가
피자를 사려면 마트 회원카드가
회원카드를 만드려면 돈도 자동차도 필요하다
필요를 따라 올라가면 물건의 목록은 하늘에 닿는다

포장 박스도 따뜻할 때 먹으라 권유하지만
냉장고는 있어도 전자렌지는 없어서
살며 모든 걸 가질 순 없다는 걸 알기에
차가운 치즈를 곱씹는다

시카고에 아는 사람 한 명 없고
오래된 팝송과 마이클 조던만 떠오르지만
시카고에서 오지도 않은 시카고 피자를 먹는다


AND

리퍼블릭 오브 코리아

오천만명의 사람
적어도 팔천만 마리의 닭
사람과 닭을 합친 숫자보다 많은 나무
해운대 해수욕장 백사장의 모래만큼 많은 모래
모래는 시멘트와 섞여 건물이 되고
나무는 산불에 타고 예수처럼 못이 박힌다
전염병에 걸리지 않은 닭들이 생매장 되고
사람이 사람을 돈으로 사고 판다

오, 자유 대한민국
아, 위대한 공화국

나는 자유가 뭔지 모르고
공화국은 더욱 모르는 사람
바다 건너 나라에 사는 여가수의 성격까지 알 수 있는 세상에서
내가 보고 들은 일에만 기뻐하는 사람
내 몸에 와 닿는 불의에만 분개하는 사람
나의 반대편에 당신이 있다는 걸 모른척 하는 사람
그러면서 당신에게 사랑을 말하는 사람
꼬리를 물어 다시 앞으로 돌아오는 말의 반복을 알면서도 반복하는 사람
절대 그 말을 번복하지 않는 사람
오천만명 중에 한 사람
AND

하구에서

바다와 강이 서로를 밀어낸다
한쪽으로 넘치거나
반대쪽이 마르지 않도록
때로는 강하게 때로는 조금 약하게
낮과 밤이 서로를 밀어내는 만큼만
달이 지구 주위를 돌고 지구가 태양을 도는 만큼만
닿으면 부서져 버리는 거리만큼만
딱 그만큼의 힘으로
딱 그만큼의 사랑으로
흐릿하게 무너지는 경계에서도
바다는 바다고 강은 강이어서
나도 나일 수밖에 없어서
두 눈 감아버리는 하구에서
사랑이라고 사랑이라고
바다와 강이 서로를 밀어낸다
AND



입술에 닿지도 못한 술 한 잔에
세상의 모든 활자가 나에게로 오는 밤
세상의 모든 시가 나에게로 오는 밤
세상의 모든 글이 나에게로 오는 밤

생의 비밀을 안다고 생각했던
나는 아무것도 기억할 수 없다
누굴 만나도 자신 있었던
나는 단 한 음절만 적어 낼 뿐이다

너,
너 쉼표

잠깐 쉬었다가 다시
너.

이번엔 쉬어갈 틈 없는
너?

나인지 너인지
너!

단호하게 마치는


네가 나에게로 오던 밤의
너...
AND

배탈


크릴새우가 플랑크톤을 먹고
정어리가 크릴새우를 먹고
백상아리랑 범고래가 정어리를 먹고
인간은 정어리 통조림과 상어 지느러미와 고래 내장을 먹는다

지렁이가 흙을 먹고
잠자리가 모기를 먹고
닭이 지렁이랑 잠자리를 먹고
개가 닭을 잡아 먹고
인간은 닭개장도 개장국도 먹는다

결국 인간이 인간을 먹는다
더 배고픈 인간이 덜 배고픈 인간을 먹는다
사실은 배부른 인간이 배고픈 인간을 먹는다
합법적으로도 불법적으로도 먹는다

그래야 인간이라고
그게 인간이라고
새우 뱃속의 플랑크톤이
지렁이처럼 길게 까무러친다

이 지극한 순환에
배고픈 나는 배탈이 났다
AND

가물다. 생수 판매를 금지시키면 좋겠다. 수세식 변기를 다른걸로 대체해야 한다. 바닷물을 손쉽게 식수로 바꾸는 방법이 필요하다. 물을 아껴써야 한다는 걸 알고 있지만 하루에 한 번씩 꼬박꼬박 머리를 감고 샤워를 한다. 딱 일 년만 비가 오지 않으면 어떨까, 상상해 본다.

인류가 자연에 의해서 그 생을 마쳐가고 있다. 전 인류가 석유 문명을 거부하는 삶을 산다면 인류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70억이든 80억이든 지표 위에 사람이 너무 많다. 그렇다면 멸망의 레일 위에서 맛있는 거나 사 먹고 놀러나 다니면서 이 시대의 마지막을 즐겨야 할까?

스탠스란 단어를 좋아한다. stance 좌우의 균형을 잡는듯한 단어의 모양새가 좋다. 스탠스 하고 읽으면 다리를 벌리고 안정적으로 서 있는 느낌이 든다.

2017년, 마흔살, 나는 언젠가부터 멈추어 있다. 어떤 스탠스를 취해야할까?

담배는 끊어야겠다고 생각한다. 가급적 채식을 하려고 한다. 뱃속이 편안한 상태에서 건강하게 멸망하고 싶다.

어떤 핑계를 대더라도 결국 인간은 저 하고 싶은대로 할 뿐이다.

어제 술을 마셨는데, 남자들끼리 하는 얘기에 잘 끼는 것만으로도 나쁜놈이 되는 기분을 느꼈다.

나 하고 싶은대로 하는 내가 싫다.
AND

주말

축제의 밤
꽝된 복권
손 잡고 데이트
꼬리가 사라진 별자리
첫 만남에 낮술
멀리서 오는 바다
비틀거리는 계단
기억나지 않는 지명과 이름
파편이어도 좋다는 생각
사실은 헛웃음
흠 잡을데 없이
흘러가는 사람이 되버린
AND

낮술

점심 손님이 다 빠져 나간 식당
아구찜을 시킨다
늘어진 콩나물과 아구
나른한 나와 친구
선풍기 바람을 맞으며 꾸벅꾸벅 조는 주인장
파리와 선풍기의 궁합
고춧가루 붉게 타오르는 미더덕이
입안에서 뜨겁게 터지고
지 혼자만 냉정한 소주병
잠든 주인 머리맡에 꾸깃한 사 만 칠 천원을 곱게 펴두고 거리로 나선다
아구와 나 친구와 소주
폭염속에 생이 무르익는
8월의 오후 네 시
AND

지국총 - 황인찬

2017. 6. 16. 13:45

지국총

 

호수 공원의 주변을 걷고 있었다 아이를 잃은 엄마가 엄마를 잃은 아이처럼 걸어간다 나는 연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물 위에서 노를 젓고 어떤 사람들은 물 위를 걷는 주말이다 물 위의 사람들은 신나 보이는군 호수 공원의 주변을 걸으며 나는 생각했다 공원의 모두가 은총 아래 있다 나란한 산책로를 따라 걸어가는 노부부도 물 위를 홀로 걷는 고독한 남자도 모두 완전하다 나는 은총 아래 연인을 기다렸다 주말 오후의 빛이 공원을 비춘다 돌이킬 수 없는 평화가 공원에 서려있다 호수 공원의 주변을 걷고 있었다 연인은 물속에서 나올 줄을 모른다

AND

바닷가에서

바닷가에는
사라진 것들의 영혼이 떠돈다
삼겹살의 영혼
가리비의 영혼
폭죽의 영혼
입맞춤의 영혼
웃음과 눈물의 영혼
온갖 사라진 것들이 한데 엉켜서
끝없이 이어지는 파도의 영혼을 타고 모래 위로 올라와
서로를 부르는

바닷가에서
나는 돌아오지 않는 당신을 울부짖는다
AND

어부

바다가 안방
바다가 부엌
바다가 화장실
바다가 재떨이
바다가 술친구
바다가 동반자 

바다가 삶
AND

인류 멸망

인간이 멸망해야 한단 말을 입에 달고 다니고
세상이 끝났다고 떠들고 다니며 막 살아도
같이는 죽어도 남들보다 먼저 죽긴 싫다
AND

제주도에서

1131번 지방도,
길에 번호를 붙이는 건 인간 뿐
어디 길 뿐이겠는가
518도로,
길에 이름을 붙이는 것도 인간 뿐
어디 길 뿐 이겠는가
어디 인간 뿐이겠는가
사랑하지도 않았던 사람의 전화 목소리를 듣고
혼자 눈시울이 붉어지는 일이
오직 나 뿐이겠는가
오직 너 뿐이겠는가
그렇다면 누가 이 곳 바깥에 있겠는가
어디 번호와 이름 뿐이겠는가
의미란 의미는 누구에게 있는가
그게 당신이라 하면
그 당신이 당신이겠는가

인간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인간 뿐 

 
AND



풍요 위를 걷는다
풋풋풋 가벼운 풋워크
수박 껍질은 둥글다
미끌미끌 미끄르르
여전한 가벼움으로
속이 붉게 멍들고
씨가 까맣게 타도 상관 없다
참외 껍질은 노랗다
바다는 푸르기에
노란색도 슬프지 않다
인류가 마음껏 퍼먹고
플라스틱만 떠다녀도
바다는 여전히 푸른 멍 덩어리
상처투성이로
풍요 위를 걷는다
비계 껍질의 푹신함이 좋아서
애써 속을 들여다보진 않는다
AND

섹스

그저 섹스라고 하면 될 걸
잠자리니 부부관계니
합방이니 사랑이니 한다
심지어는 그거라고도 한다

-> 키스랑 섹스는 만국공통어
AND

장례식장

누군가 죽었다고 하면
이상하게도 장례식장에 가고 싶다
절을 하고 사진 앞에 두 손을 모으며
얼굴도 모르던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고
생을 살아내고 죽음을 마주한 경이를 느끼고
고깃국 한 그릇과 소주 한 잔으로 살아 있다는 비릿함을 비워 내고 싶다
도떼기 시장 같은 웅성거림 속에서
오늘도 이만큼이나 살아남았다고
그 중에 나도 있다고
기다릴 것 없다고
먼저 떠난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다
AND

평생
 

하루가 지나가는 게 별 거 아니라는 걸 아는데 40년
담배까지 피우며 심각하게 살 필요 없다는 걸 아는데 20년
내 모든 말과 행동이 외롭기 때문이라는 걸
외로움이 병이란 걸 아는데 20년
당신이 내 운명이라는 걸 아는데 40년 걸렸다

그런 당신과 헤어지는데 하루 걸렸다

이렇게,

하루가 지나가는 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아는데 평생 걸렸다
AND

바닥

지금 여기가
이 사회의 가장 밑바닥이 아니고
이 사회의 가장 밑바닥이
이 세상의 가장 밑바닥이 아닌 걸 알기에
바닥이란 말을 입 밖에 내지 못하고
몇 번이고 손바닥 위에 적어만본다
바닥이 없이는 바다가 없다
그곳엔 하늘도 땅도 없다
아무 의미를 날지 못하는 새들은 끝없이 추락하고
누구도 누군가에게 닿을 수 없다
아, 바닥을 치지 못하는 삶이여
지금 여기서
한 발 더 아래로 내딛는 일로만
나는 너에게 닿을 수 있고
그때라야 우리는
우리가 연결되어 있음을 안다
AND

전성기

어차피 해피엔딩인데 주인공이 곤란을 겪는 영화
힘든 사람은 더 힘들어지거나 죽는 것이 현실
이르던 늦던 꽃은 피는 때가 제 때
한 번도 피어보지 못하고 일촉즉발의 상황같은 것도 없이
말 없이 지기만하는 생들의 틈바구니에서 싹을 틔우는 작은 씨앗
제 때가 오지 않아도 지금을 그때로 남기고 싶은
지금이 우리의 전성기
AND

마른

빈 콜라캔에 마른침을 뱉는다
몇 번째 외로움인가
치이익, 마지막 연기와 함께 담배가 죽었다
몇 번째 절망인가
몇 번째 죽음인가
다만 사랑인가
아니면 삶인가
기계가 찍어낸 것 같은 의문의 나열 속에서
나는 심장이 뛰는 존재
다시 담배를 꺼내 문다
마른 입술 사이로
몇 번째 추억인가
몇 번째 그리움인가
AND

종아리

우연히 본 그녀의 뒷모습
이름모를 고깃집 뒤편에서
분주하게 음식을 준비하던 그녀의 종아리
견고하고 단호한 삶이 느껴지는 근육질의 종아리
어떤 시절을 견뎠기 때문에 지금 땅에 발을 딛고 있는 종아리
버티는지 즐기는지 모를 세월에
체념과 우연에만 기대는 날들에
동그래진 내 배를 쓰다듬게 만드는
종아리
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