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고기

고기는 인간의 말
인간이 먹는 것
인간은 육고기
인간도 인간의 말
인간이 인간을 먹기도 하고
물에 사는 고기
그래서 물고기
발 없이 물 속을 다니는 물고기
말 없이 물 속을 다니는 물고기
물 없이 물 속을 다니는 물고기

 

물고기  song ver

고기는 인간의 말
인간이 먹는 것
인간도 결국은 고기
인간도 인간의 말

인간이 인간을 먹기도 하고
인간이 인간을 사기도 하고
인간이 생선을 사기도 하고
물고기가 인간을 먹기도 하고

물에 사는 고기
그래서 물고기
뱃속을 헤엄쳐
그래서 물고기

발 없이 물 속을 다니는 물고기
말 없이 물 속을 다니는 물고기
물 없이 물 속을 다니는 물고기
너 없이 물 속을 다니는 물고기

 

 


AND

콧구멍

콧구멍을 닮았다
눈도 귀도 발가락도 아니고
코도 다르게 생겼는데
하필이면 콧구멍을 닮았다
잠든 엄마를 가만히 보다가
실실 웃는다
엄마랑 나
콧구멍이 닮았다
AND

술꾼

특별히 기쁜일도 슬픈일도 없는 그저 그런날
말도 안되게 술을 많이 마시고
다음날 약간의 후회를 하지만
그날도 그저 그런날
AND

 언제부털까?

 내가 생각하는 생각이란 걸 하지 않는다. 나에 대해서 미래에 대해서 그다지 깊게 고민하지 않는다. 출퇴근, 식당밥, 술, 사소한 취미가 전부인 내 삶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다.

 남들도 다 마찬가지인 것이 위안이 되지 않는다. 당연하다. 남들의 남들이 이 세상 모든 남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좋은 걸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좋은 걸 쓰려면 좋게 살면서 좋은 생각을 해야 한다. 명료하다. 나는 현재 그다지 좋게 살고 있지 않다.

 그래서 너를 생각하고 사랑에 파고드는 일만 메모장에 가득한걸까?

 여기까지 생각하고 슬퍼졌다.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내가 키운 작물로 밥을 해 먹고, 넓은 마당에 강아지가 뛰어놀면 다 좋아질까? 그 다음에는? 

 앞으로 어떡하지? 그냥 생각하지 말까? 계속 사랑에만 파고들까?

AND

p.32~33

 그림속의 여인은 관객을 보는 것이 아니다. 그녀는 자신이 욕망하는 남자를, 연인이라 생각하고,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다. 그 남자는 드로스트일 수밖에 없다. 우리가 드로스트에 대해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그림 속 바로 그 여인에게 욕망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뿐이다.

 박물관에서는 보통 떠오르지 않는 생각이 떠올랐다. 욕망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 욕망이 또한 상호적이라면 - 그 대상이 되는 이의 두려움을 없애 준다. 아래층 전시실에 있는 그 어떤 갑옷을 입는다고 해도, 그 정도로 완벽하게 보호 받는 느낌은 가질 수 없다. 욕망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아마도, 살아서 경험할 수 있는 느낌 중 불멸의 느낌에 가장 가까운 것인지도 모른다.

 

p.70

 로잘리와 루카는 그가 출장을 다니며 발견한 몇몇 도시로 여행을 떠날 생각이었다. 손주들과 시간을 보내고, 옛 친구들도 만나고, 자신이 구상했던 몇몇 발명품의 시제품을 한두 개 만들어 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은퇴 후 몇 년이 지나고, 로잘리가 여기저기 아프기 시작했다. 가끔 집을 나서서 자신이 꾸며낸 이야기를 따라 헤매다가, 돌아오는 길을 찾지 못했다. 결국 알츠하이머병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루카는 직접 아내를 보살폈지만, 로잘리는 서서히 기능들을 하나씩 잃어 갔고 마침내 병원에 입원했다. 루카는 매일 찾아가, 숟가락으로 저녁식사를 먹여 주었다. 가끔 아내가 그를 알아보지 못할 때도 있었다. 시간은 흐르고, 그녀는 그를 완전히 알아보지 못했다. 그래도, 내가 안 가면, 안 왔다는 건 알지 않을까요? 루카는 그렇게 생각했다.

 

p.85

 깊이있는 정치적 저항은 부재하는 정의에 호소하는 것이고, 미래에는 그 정의가 세워질 거라는 희망과 함께한다. 하지만 이 희망이 저항이 이루어지는 첫번째 이유는 아니다. 누군가 저항을 하는 것은 저항을 하지 않으면 너무나 모욕적이고, 너무 왜소해지고, 죽은것처럼 되기 때문이다. 누군가 저항을 하는 것(바리케이드를 세우고, 팔을 들고, 단식투쟁에 들어가고, 인간 사슬을 만들고, 소리치고, 글을 쓰는 것)은 미래가 무엇을 품고 있든 상관없이, 지금 이 순간을 지키기 위해서다.

 

p. 109~

 할인 슈퍼마켓에 와 있다. 유럽에서 가장 큰 식품연쇄소매점의 지점이다. 지점 수가 팔천 개가 넘는다. 다른 슈퍼마켓의 절반 가격에 물건들-예를 들면 사과 주스 한 상자-을 살 수 있다. 슈퍼마켓은 도시 외곽 자동차 전용도로가 시작되는 곳에 있다.

 슈퍼마켓 여기저기에 육십여 명 정도의 직원이 있고, 비슷한 숫자의 감시 카메라가 있다. 어떤 물건도 제대로 진열되어 있지 않다. 한쪽 면이 뜯어진 상자에 담겨 있다. 손님들 대부분은 정기적으로 찾는 사람들이라,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안다.

 손님들 중에는 자신들에게 필요한 물건을 사는 가난한 노인들도 있고, 아이들이나, 파트너(파트너가 있는 경우), 본인 혹은 부양가족을 위해 물건을 사는 젊은 여자들이 많다. 모두들, 각자 형편에 맞춰 물건을 최대한 많이 사는데, 일 주일에 한 번-혹은 기껏해야 두번-이상 이곳에 오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계산대 앞에 길게 늘어선 수레에는 물건들이 가득 담겨 있고, 언제나 똑같은 음식들-예를들면, 마카로니, 멕시칸 토르티야, 소고기 아시 파르망티에 등-이 몇 개씩 들어 있다. 일부의 노인들만 현금으로 계산하고, 나머지는 대부분 신용카드를 사용한다. 월말이 가까워졌기 때문에 다들 신중하다.

 가끔씩, 따라온 아이들을 제외하면 아무도 말이 없다. 우리 모두-손님과 직원들- 용의자이고, 우리의 움직임을 하나한나 관찰당한다. 모두 물건을 집어 들고, 수레를 밀고, 물건을 살피고, 코드를 입력하고, 조절하고, 야채 무게를 달고, 일정을 생각하고, 계산한다. 그 모든 과정이 이루어지는 거대한 창고는, 절도(竊盜)라는 개념에 사로잡혀 있다.

 길거리 시장의 정반대다. 그곳에서 핵심은 흥정이다. 길거리 시장에서는, 모두가 최선의 거래를 하과 있다는 믿음을 주기 위해 노력한다. 창고형 슈퍼마켓에서는, 우리 모두가 잠재적인 도둑놈으로 여겨진다.

 자유공간은 거의 없고-물건 더미가 대부분의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계산대 앞에 늘어선 수레의 줄도 빽뺵하다. 내 앞에 수레를 쥐고 있는 사람은 임신부이다. 키가 크고 밝은 색 머리를 길게 늘어뜨렸다. 폴란드 출신으로 보이고, 곧 태어날 배 속의 아이는 첫째가 아닐 것 같다. 수레에 담은 물건들을 계산대에 내려놓을 때 그녀는 인상을 찌푸린다.

 우리가 있는 이 창고형 할인 슈퍼마켓을 사로잡고 있는-다른 생각은 거의 모두 배제해 버리는-, 이 절도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쇼핑하는 손님들의 도둑질. 종종 회사에서는 '수상한 손님'을 상점에 들여보낸다. 이들의 임무는 몇몇 물건을 몰래 가지고 나오는 일, 즉 계산원들이 얼마나 잘 감시하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일이다. 직원들의 도둑질. 직원들이 필요한 물건들을 사야 할 때면 계산서에 관리자의 서명을 받아야 하고, 아무 때나 몸수색을 당할 수 있다. 회사에 의한 체계적인 도둑질은 직원들의 초과근무 시간에 대해 임금을 지급하지 않는 것이다. 계산원들은 적어도 일 주일에 두 시간 이상 임금을 받지 않고 일을 해야 한다. 가끔 더 해야 할 때도 있다. 많은 직원들이-관리자급부터 그 아래로- 근무시간이 아닌 때도, 필요한 경우에는 밤낮으로 긴급 상황에 불려 나와야 한다. 병가는 허용되지 않는다. 법적으로 보장된 교대 시간 사이의 휴식도 없고, 역시 보장된 주중 휴무도 없다. 직원들의 권리에 대한 도둑질. 마지막으로 농산물 업계, 전 지구적인 식품 유통업계와 연결된 그 회사의 도둑질. 한때는 땅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쥐고 있던 주도권, 어떤 작물을 재배할지, 변종과 종자, 비료, 기를 가축들 등에 대한 결정권을 뺏어 간 것. 한때 이런 것은 지역 내에서 현실에 맞춰 이루어진 결정이었다. 오늘날은 거대 기업이 생산자를 공급하고, 생산될 게 무엇인지 지시한다. 전 지구적인 농업이 미리 계획되고 있는데, 목적은 자연 전체를 상품으로 바꾸는 것이다.

 폴란드 출신일 거라고 짐작한 임신부가 줄 맨 앞에 있다. 계산원들에게 주어진 분당 목표 계산량은 서른다섯 개다! 아무도 그 목표를 달성할 수 없다. 결과적으로 모두들 근무 평가에서 감점을 당한다. 계산할 준비를 마친 임신부가 신용카드를 긁는다.

 고개를 든 임신부가 내 뒤에 줄을 선 누군가를 알아본 모양이다. 어쩌면 둘이 같이 온 것일 수도 있고, 같은 시각에 이곳에서 장을 보기로 약속을 했던 것일 수도 있다.

 이상하게 조심스러워진 나는 고개를 돌려 그 누군가를 확인하지 않는다. 짐작에 남자는 아닐 것 같다. 아마 여자일 것 같은 생각이 든다. 폴란드 여성이 고개를 들고 머리를 흔들며 미소를 짓는 모습을 보고, 그렇게 결론을 내린다.

 여자는 계속 미소짓는다.

 그녀의 미소는 순수한 행복의 표현으로, 빛을 내면서 동시에 빨아들인다. 갑작스런 행복이 모두 그렇듯, 그 미소도 예측할 수 없다.

 그녀의 미소는, 한순간 다시 현실이 되어 버린, 잊어버린 약속들을 담고 있다.

 내가 그녀의 미소가 담고 있는 약속에 대해, 혹은 도둑질로 가득한 창고에 대해 과장하고 있는 걸까? 아니다. 둘 다 존재한다. 같은 장소, 같은 시간에 존재하고 있다.

 

-> 와, 존 버거

AND

점유율 100%


다정한 손짓
발끝으로부터의 떨림
차오르고 또 차오르는 충만함
세상이 사랑이라고 부르는 일

이제 나는 누구도 사랑할 수 없다
모든 만남은 헤어져야 하니까
그건 너로 족하니까
너는 나에게만 독점적이니까

AND

여름산

여름산은 겁이 난다
초록에 질식할 것 같다
볕을 피해 무심코 들어갔다간
나무가 내뿜는 수증기에 둘러쌓여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대로 서 있다가
해 저무는 바람 소리에
나무가 잠을 청하려고 깊은 숨을 들이쉬면
그 찰나에만 부리나케 벗어날 수 있을 것 같다
마치,
누군가 삶에서 달아나듯이
AND

물의 꿈

모든 강물을 막고
몰려온 비구름을 몰아내고
온통 태양 태양 태양
가장 깊은 곳에서 가장 얕은 곳으로
대륙붕이 먼저 드러나고
한 번도 빛이 닿지 않았던 곳까지
바다가 마른다
새우떼가 먼지가 되고
물고기들이 마른 아가미를 놀린다
신화 속의 괴물마저 포효 끝에 마지막 숨을 멈추면
생명이 사라진 땅 위에
건드리면 부서지는 새 삶이 태어난다
매일 무너져 내리는 삶이
메마른 바다의 끝에서
물의 꿈을 꾼다
AND

저기 어디

저어기 어어디
서울 사람들 생소한
지역민들도 잘 모르는
강원도 백복령 자락 어딘가
강릉 옥계면, 정선 임계면, 동해 신흥동 중간에
이 만 평쯤 내 밭이 있어서
아내랑 같이 감자 심고
밭째 사러온 양반한테 밭떼기로 팔아 버리고
겨울엔 배 두르리며 동네 사람들이랑 어울려
술추렴이나 하며 살았으면
저어기 어디서
삶이 삶인 삶을 살었으면
AND

카레

오늘은 카레를 먹을까
감자랑 당근을 씻는다
제주도에서 실려온 흙이
하수구로 빠져 나간다
하수도 바닥에 쌓였다가
홍수가 나면 바다로 간다
폭풍우에 실려 태평양을 건너간다
전남 무안 생산이라고 적혀 있지만
어쩌면 중국에서 서해를 건너왔을 양파껍질도 마찬가지다
돼지고기라고 다를까
카레가루라고 다를까

캘리포니아산 오렌지를 먹는 우리는
다 어디로 흘러갈까

뱅글뱅글 생각하는 동안 완성된 카레를
맛있게 먹는 수밖에 없다
AND

봄봄

봄이 봄봄하는 날
물가를 거닐었다
개구리들은 부둥켜 안고 짝짓기를 하고
돌틈에 홀로핀 제비꽃이 예뻤는데
당신이 없어 나만 서글펐다
AND

봄 - 시마자키 도손

2017. 4. 22. 20:46

-> 아오키 군은 자살을 했다. 
 
"아오키 군, 자네는 왜 이런 곳에 와 있는가?"
 묻는 사람이 있었다.
 "왜라니, 여기는 우리 집이 아닌가?"
 이렇게 아오키는 대답했다. 이상하게도 방의 창문에는 쇠로 만든 격자문이 끼워져 있었다. 책장이 있어야 할 곳에 책장이 없고, 그 대신 천연 암석이 있었다. 그 바위 끝에는 지금이라도 넘어질 것 같은 바위가 위험하게 걸려 있었다. 방 입구의 열린 곳으로 호랑이 우리가 보이고, 게다가 그 우리는 이쪽을 향해 문이 열려 있었다. 옆 창에서 무엇인가 들여다보는 것이 있는데, 자세히 보니 무서운 살모사였다.
 "여기가 어디지?"
 아오키는 모르는 사람에게 물어 보았다.
 "알 텐데-감옥이야."
 그 모르는 사람이 말했다.
 듣고 보니, 방은 단단한 철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아오키 자신은 강철 쇠사슬로 묶여 있었다. 솨사슬의 길이 이상으로는 걸을 수도 어쩔 수도 없었다.
 "왜 자네는 이런 곳에 와 있나."
 "나는 법에 어긋나는 일을 별로 한 적이 없어. 보게나, 나는 겁쟁이야. 강도질하고, 살인을 하는 그런 용기 있는 사내가 아니야. 나는 벌레를 죽여도 양심에 가책을 느끼는-그 정도로 용기가 없는 인간이니까."
 이렇게 아오키가 말했지만, 현재 감옥 안에 있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무슨 죄가 있어서 여기에 와 있는가, 누가 묶어서 이런 감옥에 넣어 버렸는가, 그것은 아오키도 모른다. 자신의 집이다. 집이다라고 생각하는 동안에 어느새 이처럼 감옥 속에 들어 있었다. 방구석에는 여러 사람이 모여 있었다. 그중에는 기분 좋은 향연 흉내를 내며 즐기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 무리들은 감옥의 간수가 지날 때마다 손을 모아서 합장하기도 하고, 고마운 듯이 인사를 하며 자칫 간수의 발을 받을어 보이는 우스운 흉내를 내곤 했다.
 변덕스러운 박쥐가 창으로 날아 들어왔다. '야 누군가 사바 세계에 있는 사람으로 이 박쥐 얼굴과 닮은 것이 없냐?' 라고 한 사람이 말하니까, '어디 얼굴을 보여라'라고 또 한 사람이 말을 꺼내서 각자 박쥐를 잡으려고 방안을 쫓아 다녔다.
 왠지 이 소란이 두렵게 느껴져서 아오키는 창 쪽으로 도망쳤다. 그는 자신이 쓴 초고를 읽을 참이었다. 철로 만든 격자문을 잡으면서 창 밖을 보았더니 쓸쓸하게 홀로 서 있는 사람이 있었다. 가슴 위에 팔짱을 끼고 눈을 감고 여자다운 입술을 약간 내민 것은, 무엇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그 말을 하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창백한 뺨에는 이제 예전의 향기가 없었다. '저런' 하고 아오키는 무의식중에 손을 내밀어 그 사람을 감옥 속으로 끌어들이려다가 잠이 깼다.
 
-> 기시모토는 살았다.
 
 "아, 나 같은 인간이라도 어떻게든지 살고 싶다."
 이렇게 생각하고 깊고 깊은 한숨을 쉬었다. 유리창 밖에는 회색빛 하늘, 젖어서 빛나는 초목, 물안개, 그리고 쓸쓸하게 농가 처마 아래에 서 있던 닭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했다. 사람들은 빗속 여행에 싫증이 나서 대부분 기차 안에서 잤다.
 다시 쏴 하고 비가 내렸다.

AND



전생에 자살을 했다
벼랑에서 떨어지고도 살아 있으니
그제서야 꿈인 줄 알았다
한 여인을 사랑하였으나
그 끝에 닿지 못하였고
밥을 굶지는 않았으나
배불리 먹지도 못했다
세상에 점 하나 남기지 못하고
두려워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이생이라고 다를까

사랑의 언저리를
생의 귀퉁이를
꿈이 꿈인 줄 모르고

그저 맴맴돈다
AND

먹는 인간 - 헨미 요

2017. 4. 18. 12:07
자그레브에서는 동물원 앞에 있는 식당 '막시밀'이 난민을 위한 무료 급식소가 되어 있었다.
묘한 광경이다.
동물원에서는 곰이 구경꾼에게 빵을 얻는다. 바로 바깥에서는 어마어마한 수의 인간이 목숨을 이어 가기 위해 음식을 얻으려고 줄에 선다. 내가 찾아갔을 때 메뉴는 독일이 원조한 깡통 수프와 폭찹이었다. 이 곳에 이슬람계 난민이 오는 경우는 드물지만, 사라예보에서 탈출했다는 예순여덟 살의 여성 이슬람교도인 니콜라는 얼굴빛도 변하지 않은 채 돼지고기를 씹어 먹고 있다.
식욕이란 정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초에 '순수'한 민족이나 종교 따위가 있을 리 없다.
보스니아의 이슬람계 주민들도 원래 10~15세기 발칸 지방에서 성행한 보고밀파 기독교도였지만, 그 뒤 터키의 지배하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했다. 돼지고기를 먹는 것이 나쁠 리 없다.
먹고사는 것이 민족이나 종교에 대한 자부심보다 중요하다.
유엔 관계자에 따르면, 사라예보 동물원의 굶주린 곰은 자그레브 동물원으로 이송되는 길에 숨이 끊어졌다고 한다. 어처구니없는 날벼락이다. 하지만 지금은 곰보다 인간이 문제다.
"일본으로 데려가 주시오. 먹을 것만 주면 화장실이든 하수구든 다 청소할 테니까."
예순한 살이라는 난민이 나한테 매달리면서 따라왔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부고이노에서 탈출했다는, 오른쪽 눈이 부연 남자다. 울먹이는 목소리였다.
"아내를 두고 왔고. 난 이제 사바 강에 빠질 수밖에 없어요."

자그레브 중심부에서 네오고딕 양식 첨탑으로 하늘을 찌르고 있는 성슈테판 대사원.
이 사원도 유고 출신 가톨릭교 수녀인 마더 테레사의 내방을 기념해, 주로 거지나 저소득층을 대상으로 무료 급식소를 두고 있다.
1991년에 세르비아 측과 전쟁 상태로 들어가기 전에는 하루에 두세명이 올까 말까 했는데, 지금은 급식 인원인 80명을 넘는 굶주린 사람들이 찾아온다.
수녀에게 취재 요청을 거절당했지만 나는 주린 배를 안고 불안한 발걸음으로 언덕을 오르는 남자들 틈에서 급식소에 들어갔다.
문이 열리고 겨우 5분 만에 사람들로 꽉 찼다. 문이 닫혔다.
먼지, 땀 냄새, 게다가 지독한 썩은 내 때문에 나도 모르게 기침을 마구 해 댔다. 벽에 걸린 마더 테레사와 로마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사진이 때에 전 남자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크로아티아인만이 아니라 다양한 얼굴들이다. 터키계 얼굴이 보이고, 콧수염을 기른 옛 신사는 세르비아계였을지도 모른다.
어딘가에서 수프 냄새가 난다 했는데, 수녀가 "여러분, 이걸 들어야 식사할 수 있습니다." 하고 운을 떼더니 성서를 낭독하기 시작했다.
식사가 보류되었다. 누군가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그다음에는 기립해서 찬송가를 부른다. 숟가락을 꽉 쥔 남자들이 노래를 부른다. 악에 받친 듯 숟가락을 휘두르면서 노래하는 남자도 있다.
아니, 입만 뻥긋거리는 사람이 많다. 다리를 떠는 사람도 있다. 오로지 의식이 끝나기만을 기다린다.
훌륭한 자선이지만 좀 잔혹하다. 바로 음식을 나눠 주면 안 될까?
11세기 기독교회의 동서 분리, 반목, 스라브족의 분열, 식전 의식이 이런 분쟁의 깊은 뿌리에 얽혀 쓸데없는 기억을 되살리지 않을까? 신앙이 없는 나로서는 조금은 지나친 걱정을 한다 싶은 사이에 찬송가가 끝났다.
아아, 그 뒤에 이어지는 남자들의 식욕은 대단했다.
다양한 민족의 피를 받은 각양각색의 얼굴들이 똑같이 맹렬하게 달라붙었다. 그러니 종파든 뭐든 아무 소용이 없었다.
정직하구나. 왠지 성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게도 빵이 왔다. 받을 수가 없었다. 들어오지 못한 사람들의 손이 창 밖에서 뻗쳐 왔기 때문이다.

- 크로아티아 편 중에서.
AND

세월호 삼 년의 풍요

어제 낮에 동생 아이 돌잔치에 갔다. 돌아가신 큰 이모만 빠지고 이모들이 다 모였다. 언젠가는 이모들이랑 부페를 먹은 적 있을텐데도 처음처럼 느껴졌다. 이혼한 전 막내 이모부도 빠졌다. 아버지랑 이모부들은 술을 마셨다. 이모들도 거들었다. 소고기며 초밥이 가득 담긴 이모들 접시를 보면서 '역시 이모들이 뭘 드실 줄 아셔.' 같은 멘트를 날렸다. 그렇게 잔치가 끝났다.
저녁에는 처부모님과 대기업 브랜드 한식 부페에 갔다. 꽉찬 사람들과 가득찬 접시들로 웅성웅성 풍요풍요 했다.
터질듯한 과식은 아니었지만 전체적으로 과식했다. 가족의 증명은 과식이고 과식의 결과는 굵은 똥이다. 똥은 양변기 배관을 타고 바다로 간다. 물고기 밥이 되고 다시 무언가의 똥이 될까. 세계의 빈곤과 상관 없는 하루하루와 달갑지 않은 풍요를 견디기가 어렵다. 하루에도 몇 번씩 지금 여기가 내 자리가 아니라는 기분에 휩싸인다. 나이 육십이 된다고 달라질까?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 동료들이, 사람들이 두렵다.

'먹는 인간'에서 식욕이란 정직하단 문장을 읽었다.

돌아가지 못하는 이 생에서 나는 무엇에 정직한가?
AND

35번 국도

2017년 4월 11일 화요일 오전 11시 35번 국도
회사도 때려치고 정선에서 당신이 있는 강릉으로 가는 길
내 뼛 속까지 훤히 들여다 보이는 반칙 같은 날씨
이 생에 어디가 지금보다 아름다울까
만나면 부서질 환상속을 홀로 달린다
2017년 4월 11일 여전히 오전 11시 35번 국도
AND

더디다

술이 더디다
시간이 더디다
나이를 먹어선가
세상이 할배들 자전거 굴러가듯 더디다
술 취한 내가 더디다
AND

젊은 굿맨 브라운은 황혼녘에 쎄일럼 마을의 거리로 나섰다. 그러나 문간을 넘고 나서 젊은 아내와 작별의 키스를 나누려고 고개를 돌렸다. 페이스라는 이름에 잘 어울리는 그의 아내가 예쁜 얼굴을 길가로 내밀며 굿맨 브라운을 부를 때 그녀의 모자에 달린 분홍색 리본이 바람에 나부꼈다.

YOUNG GOODMAN BROWN came forth at sunset, into the street of Salem village, but put his head back, after crossing the threshold, to exchange a parting kiss with his young wife. And Faith, as the wife was aptly named, thrust her own pretty head into the street, letting the wind play with the pink ribbons of her cap, while she called to Goodman Brown.

 

-> 예전에 EBS 라디오에서 들었던 걸 오늘 읽었다. 첫 문단이 딱 맘에 들어서 원문을 찾아봤다.

AND

장마

이제 막 담배를 꺼내 물었는데
자판기 커피를 한 모금 마셨을 뿐인데
종이컵 안으로 빗방울이 떨어진다
네 얼굴이 커피색으로 번진다
어느새 세상은 잿빛이구나

흠뻑 젖은 채
AND

 초반부터 한 방 먹여주고 시작한다. 가슴속에 있는 얼굴에 대해서 내가 알고 있는 얼굴에 대해서 많이 생각했다. 그리고 죽음에 대해서도. 재미있게 읽었다.

 

64p. 베니치아 화가의 기법으로 그린 세큐레의 초상화가 있었더라면 12년이나 계속된 여행 중에도 고향에 두고 온 옛 연인의 얼굴이 전혀 기억나지 않는 일은 없었을 텐데. 그리운 여인의 얼굴이 가슴속에 생생히 살아 있다면, 세상 어느 곳에 있든 그곳이 내 집이나 마찬가지니까.

 

299p. 죽기 직전. 유년기의 마지막 시절에 들었던 시리아 동화가 떠올랐다. 혼자 사는 노인이 한밤중 잠에서 깨어 부엌에 가서 물 한 잔을 마시고 있었다. 물 컵을 탁자에 놓는데 그곳에 놓여 있던 초가 없어진 것을 보았다. 그리고 어디선가 실낱 같은 빛이 비쳐들고 있었다. 노인은 그 빛을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노인은 자기 침대에 낯선 사람이 손에 촛불을 들고 누워 있는 것을 보았다. 노인이 물었다. "댁은 뉘시오?" 그러자 그 이방인은 "죽음이다."라고 대답했다. 노인은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그러고는 "이제 왔군." 하고 말했다. 죽음은 만족스러운 목소리로 "그래." 하고 대답했다. 그런데 다음 순간, 노인은 "아니야. 너는 다 끝나지 않은 내 꿈이야." 라고 단호하게 말하고는 이방인의 손에 있는 촛불을 단숨에 불어 껐다. 그러자 모든 것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노인은 빈 침대에 들어가 다시 잠을 청했다. 노인은 그 후로 20년을 더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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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404까지 사진

사진 2017. 4. 4. 20:15

강릉 포남 1주공
저만치 가을 1
저만치 가을 2
맘에 드는 컷.  핀트 나감.
균열 - 정선 조양강
강바닥
강릉 남대천 버드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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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선화

나는 이제 시작하려는데
너는 꽃잎을 땅으로 기울이고
네가 시드는 일이 내 탓인 것만 같으니
너는 너만 사랑하다 저물고
나도 너만 사랑하다가 지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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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바다

먼 바다에서 들려오는 어둠 소리
바다는 기억으로만 존재하는 생명
너와 함께 했던 바다
갈매기가 소리지르던 바다
언젠가의 바다
그밤의 바다
기억속의 바다
지금은 네가 없는 바다
파도 위로 부서지는 빗소리
나는 물 속에서 비를 맞는 물고기
바다는 기억으로만 존재하는 생명
AND

울다

인간의 한 평생 보다 오래된 버드나무 아래
봄이 올라오는 자리에서
당신은 울고 있다
어쩌면, 의 여지도 없이 울고 있다
버드나무 이파리 향하는 방향따라 울고 있다
벌들이 올해의 첫 번째 꽃으로 달려드는 시간에
억지로 짜내지 않아도 모든 풍경이 글이 되는 때에
봄비 그치고 오만데서 봄이 쏟아지는 순간에
당신은 봄을 맞으며 울고
나는 우는 봄을 바라보고 있다
AND

평범 

내가 말했지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문장도 평범할 뿐이다
나는 오직 당신만을 사랑하는데
당신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
묻어둔 사랑은 점점 단단해지고
사진속의 당신은 내 마음속의 당신과 다른 사람

그래도

당신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흔 살
지난밤 꿈 속의 나는 모든 불의를 그냥 넘기는 사람
십 년 후의 당신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쉬흔 살
나는 언제나 어제와 같은 꿈 속에 있는 비겁자
여전히 당신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 당신의 연인

당신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평범한 사람
AND

도서관


눈을 감고 고개를 들면
다가오지 않은 것을 포함한 모든 과거가
빛바랜 종이를 타넘고 내 안으로 파고든다
죽은 왕의 비탄과 살아남은 왕비의 슬픔
잊혀진 마술의 희생자와 그 마술사의 조수
지옥을 떠도는 방랑자와 그를 뒤쫓는 켈베로스
존재했던 모든 사랑과 아직 여기에 머무는 이별까지
가장 먼 곳에서의 시작과 소멸이 나에게 전해진다
다 지겨워져 눈을 뜨면
과거가 되버린 미래가 허공을 떠돈다

내 마음처럼
AND

사랑

당신이 방금 몸을 씻고 나온 욕실에 들어가서
당신이 씻은 온도와 똑같은 온도로 내 몸을 씻고
그새 잠든 당신 이마에 조용히 입술을 갖다대면
그 순간만 영원한 지금으로 존재하는 일

불온

당신이 방금 몸을 씻고 나온 욕실에 몰래 들어가서
당신이 씻은 온도와 똑같은 온도로 내 몸을 씻고
그새 잠든 당신 입술에 조용히 입술을 갖다대면
그 순간만 영원한 지금으로 존재하는 상상
AND



'상처투성이의 배' 란 제목이 붙은 사진 한 장
가라앉고 올라오는 장면이 생중계 된 배
칠흑같은 물 속에서의 삼 년만 가라앉은 운명
씨팔, 불사의 지옥으로도 모자란 죄를 지은 새끼들아
너희들은 어떻게 지금 숨을 쉬니
내가 그저 사니까 너희들도 사니
사람들이 울부짖어도 너희들은 그냥 사니
살고 살아 지옥이 되려고 사니
내가 차마 살지 못해도 니들은 사니
파렴치인 줄도 모르고 세월이란 이름의 끝을 사니
씨팔, 상처투성이의 배
AND

오늘, 밤

이 글을 마치기 전까지
오늘은 끝나지 않는다
세상은 오늘의 연속
어제의 오늘과 내일의 오늘
나의 오늘과 당신들의 오늘
밤의 정적안에 냉장고 소리
냉장고의 오늘
모두가 잠든 시간에 냉장고가 깨어있다
나랑 냉장고만 잠들지 못하는
오늘, 밤
내가 잠들기 전까지
오늘은 끝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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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회식

좋으면 좋다고 말하고
빈 잔이나 채워주지
더럽게 왜 술잔을 돌리고 지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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