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가을이다.

 카이로스프트(에서 만든) 게임에서 날짜가 9월 1일로 바뀌면 계절이 여름에서 가을로 바뀌는 것처럼 하루만에 쉽게 가을이 왔다. 에어컨, 선풍기와 인사도 제대로 못 나누고 당장 긴팔 옷을 입게 됐다.
 오랜 기다림 끝에 겨우 울어보게 됐는데 며칠 울어보지도 못하고 울음을 그쳐야 할 매미를 생각한다. 눈물 뚝.

 나보다 힘들게 일하는 사람들이 많다. 농사 짓고 노가다 할 때는 이런 생각 자주 하진 않았는데, 나름대로 안정된 직장에 다니기 시작하고서는 이 생각이 불쑥불쑥 머릿속을 때린다. 편의점 알바, 밥 먹으러 들어간 식당에서 일하는 사람들, 내가 마트에서 생선의 원산지 읽고 있을 때 매대를 지키는 점원,  음식물 쓰레기 봉지 내놓을 때는 그걸 치우는 사람이 나보다 더 힘들게 일하겠구나 생각하게 된다. 일의 강도 뿐 아니라 삶도 마찬가지인 사람들이 많겠지.
 이 생각은 내가 더 힘들게 일해야하는데, 로 이어진다. '이왕이면 힘든 것은 내가' 의 마음인데 다들 힘든 무게를 조금씩 나누어서 비슷하게 덜 힘들게 일하면 좋겠다, 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않는다. 이게 내 한계인가. 싫다.

 한계라는 단어를 써서 말인데, 종기 수술한 자리가 많이 아프다. 잘 아물지 않는다. 사무실에선 오른쪽 엉덩이만 의자에 대고 앉아 있고 운전할 때는 왼쪽 허벅지 아래에 높은 물건을 대고 앉는다. 그래서 그런지 허리가 아프다. 다 내 탓이지만 우울하고 화가난다. 주중에 사무실 앞 병원에서 드레싱만 받다가 오늘은 제천에 수술한 병원에 다녀왔다. 드레싱을 해주던 간호사가 - 이 사람도 나보다 힘들게 일하는 거 같다. - 종기 수술하는 사람도 많고 나보다 심한 사람도 있다고 했다. 나보다 힘들게 일하는 사람이 나보다 상태가 안 좋은 사람도 있다고 한 말에 위로 받았다. 이게 명백한 내 한계다.

 나무는 100년을 살아도 천연기념물이 되기 힘든데 인간은 100년만 살아도 천수를 누렸다고 한다. 이게 천연기념물이란 걸 만든 인간의 한계다.

 계절이 바뀌었으니 나도 조금 변하고 싶다.  종기 때문에 술을 안 마신건 긍정적이다. 치료 끝나면 다시 마시겠지. 기타랑 핸드폰만 붙잡고 있지말고 책도 읽고 산책도 해야겠다.

 이 글을 핸드폰 붙잡고 쓰고 있다. 양희은의 '한계령' 듣고 자야겠다.
AND

장 마 루 집


강원도 강릉시 서부시장
오줌 냄새나는 골목 구석
미닫이 문 창에 붙은 다 떨어져가는 붉은 글씨
장 마 루 집
들어가는 사람만 있고 나오는 사람은 없다는
오후 두 시에 문을 열고 열 시 전에 불을 끈다는
이승만 때가 좋았다는 할아버지들이 젓가락 두드리며 노래한다는
어떤 손님이라도 주인 할머니에게 양말 속 푼돈까지 다 털려야 집에 갈 수 있다는
무성한 소문에 부풀려진 호기심이 터지기 직전인
장 마 루 집
주머니에 오래된 만원 짜리 두 장 구겨넣고
옛 친구와 함께 가서 해묵은 이야기 한 잔씩 나누고 싶은
장 마 루 집
AND

언제나 옳다


부안 채석강은
영주 부석사는
왕이 아니라 경복궁은

수명을 다한 볼펜심은
밤을 건너가는 구두 소리는
할매들을 상대하는 만물장수 트럭은

손녀와 바닷가를 걷는 할아버지는
학교 운동장에서 공을 차는 아이들은
연습장에 짝사랑의 얼굴을 그리는 소년은

그녀가 커피를 내리는 모습은
그녀가 개새끼, 라고 할 때는
그런 그녀를 향한 내 발걸음은

언제나 옳다
AND

뼈해장국

야시장에 가서
야바위를 하다가
야한 여자를 만났다
야한 얘기를 하면서
야한 술을 마시고
야한 밤을 함께 보냈다
뼛속까지 야해진 나는
새벽에 혼자 뼈다귀 해장국을 먹었다
AND

 휴가가 끝나간다. 살짝 자랑이지만 40년 가까운 생을 주로 놀면서 살았기 때문에 공식적인 휴가, 휴가라고 할 수 있는 휴가는 생에 처음이었는데, 항문주위농양 절개술을 받고 생긴 구멍 세 개에서 흐르는 진물과 함께 휴가가 끝나간다. 땀이 찔찔 나는데 샤워를 못하니까 많이 불편하다. 앞으로 종기는 초반에 대처하기로 한다.

 종기 짜내고 바로 영화제 구경하는 계획이었다가 생각보다 일이 커져서 퇴원하고도 제천에서 두 밤을 더 잤다. 어제 하루 쉬고 오늘도 병원 때문에 제천에 다녀왔다. 영동고속도로 정비 공사 때문에 제천 왔다갔다 하면서 국도변의 풍경을 실컸봐서 좋았다. 오늘은 대관령 옛길로 차를 몰고 내려오는 여유도 부렸다. 자동차에서 아내랑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별 얘기가 아닌데도 그 상황 자체로 사랑받고 있다고 느꼈다. 이런 작은 행복이 나를 살게 한다.

 어제, 오늘은 '잘 되고 싶다' 는 마음에 대해서 생각했다. '잘' 은 거의 돈이고 '남들보다' 가 포함된 욕망이다. 인간 존재의 이유가 남들보다 돈 많이 버는 거라면 이번 세대의 인류는 실패다. 다음 생이 없듯이 다음 세대도 없으니 남은 것은 포기다. '잘'의 형태를 조금만 바꾸면 '즐겁고 싶다', '즐기고 싶다' 가 된다. 비교 대상이 없는 욕망은 없겠지만 경쟁심이 약한 사람들도 행복한 세상에 살고 싶다.

 모든 편법이 싹을 틔우는 부정한 세상에서 욕망들이 부딪친 자리가 어지럽다. 나는 자꾸 사랑안으로만 숨고 그게 부끄러운 일을 계절이 바뀔때마다 반복한다.
AND

환절기

바람이 오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마지막을 우는 매미는 절박하고
시작을 우는 귀뚜라미는 조급하다
누가 울면 영문도 모르고 따라 울 듯
전염되어 뒤따라 울며 너에게로 가는 길
가을은 아직 이른가
그러나 적막은 죽음
AND

 우리집은 강릉인데, 제천 시내의 작은 외과병원 입원실에서 적는다.

 15일 째 지속되던 종기를 째냈다. 아픈 건 견딜만한데 무통주사 땜에 불편하다. 주사 때문에 덜 아픈거니까 둘이 비긴걸로 하자. 2주 전에 ys누나가 째 준다고 할 때 부끄러워 말고 말 들었으면 지금쯤 청풍호반에서 공연 보고 있겠다. 하긴 그때는 이렇게 될 줄 몰랐다. 수술대에 엎드려서 하반신(?) 마취를 하고 팔을 찌른 주사 한 방에 잠들었다. 인간의 육체는 이렇게나 유약하다.

 나를 보살피느라 지후가 고생이다. 사랑받고 있다고 느낀다. 기쁘다. 나도 지후에게 그래야할텐데. 물론 내 사랑을 의심하는 건 아니다.
 
 강릉이 고향도 아니고 그저 지금 사는 집이 있을 뿐인데 입원을 하더라도 홈그라운드에서 했으면 좋았을텐데, 생각한다. 그래서 약간 불편한 마음이 있다.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종기가 사라졌다. 아내가 옆에 있다. 걱정은 없다.
AND

얼마예요


뚜어샤오치엔
이꾸라데스까
타오라이 캅
꽌또에스
하우머치
얼마예요

뭐든 값만 알면 만사형통인 세상
안녕하세요 다음에 배우는 외국말
이거 얼마예요?

나는 얼마예요
당신은 얼마예요
이 가난한 사랑은 얼마예요
이 부질없는 삶은 얼마예요

울렁울렁 멀미같은 말
얼마예요
AND

세상에


세상에 전화가 없으면
전활 받지 않는 너 때문에
마음 졸일 일 없을텐데

세상에 글이 없으면
답장이 없는 너 때문에
전전긍긍할 일 없을텐데
널 생각하는 문장도 없을텐데

세상에 아무것도 없이 너랑 나만 있으면
오직 내 손끝으로만 너의 실물에 닿을텐데
우리는 매일 세상에 없는 것들을 그리워하며
사랑하고 사랑할텐데
AND

울컥

울컥하며
그대로 갚아주고 싶을때가 있다

나이 사십 먹은 나에게
화를 내는 사람에게

혼자 정오의 태양을 머금은
그늘진 숲속의 이름모를 꽃에게

그 잠깐의 아름다움을
시기하는 나에게

태풍이 지나간
있는 그대로의 바다에게

그 바다 건너 멀리 있어
세상에서 가장 귀한 당신에게

하루에도 몇 번씩
울컥하여

내가 당한 그대로
깊아주고 싶을 때가 있다
AND

나는 씨팔


가장 많이 하는 말은 씨팔
그 다음은 이 새끼들이
그 다음은 둘을 합친 말
이 새끼들이 사라져도
또 다른 이 새끼들이 자리를 잡는다
모든 역사는 반복되고
이 새끼들의 역사와
나의 역사도 그러하다
후회할까, 생각이 스치기도 전에
잠이 드는 하루하루
어쩔 수 없다고 채 깨닫기도 전에
불이 꺼지는 운명
이 씨팔 새끼들,
모든 것을 내 안에 가두는 감옥
나는 씨팔

 

song ver

내가 가장 많이 하는 말은 씨팔
그 다음으로 많이 하는 말은 이 새끼들이
(1 5)
그 다음은 둘을 합친 말 (씨팔 새끼들)
(7b 1)
이 새끼들이 사라져도
또 다른 이 새끼들이
그 자리를 채운다
모든 역사는 반복되고
이 새끼들의 역사와
나의 역사도 그러하다
(1 5 반복
6b 7b 1 -> 간주)
후회할까, 생각이 스치기도 전에
어쩔 수 없다고 채 깨닫기도 전에
잠이 드는 하루하루
불이 꺼지는 운명
(4 3b)

이 씨팔 새끼들
(7b 1)

모든 것을 내 안에 가두는 감옥
(4 3b)
나는 씨팔
(7b 1)

 

AND

웃지


내가 기타를 들면
너는 웃지
내가 노래를 하면
너는 웃지
내가 춤을 추면
너는 또 웃지
세상의 우울과
세계의 비참에도
너는 웃지
내가 기타를 들고
노래를 하기만 하면
너는 웃지

song ver

내가 기타를 들면
너는 웃지
내가 노래를 하면
너는 웃지
(1 2 5 1 반복)
내가 너에게 가면
너는 웃지
내가 춤을 추면
너는 또 웃지

세상의 우울과
세계의 비참에도
나의 잘못과
막연한 자신감에도(3 6 2 5)
너는 웃지(1 5 1)

내가 기타를 들고 노래를 하면
내가 너에게 가는 춤을 추면

너는 웃지(1 5 1)
너는 자꾸만 웃지(2 5 1)

1 2 5 1
3 6 2 5 


AND

8차


우리가 먹은 술안주
우리가 했던 말
우리가 불렀던 노래
그런것들은 이미
새벽과 함께 이슬이 되었다
우리가 마신 술만이
뱃속에서 춤을 춘다
해장국 앞에서 꾸벅꾸벅 조는 친구여
둘이서 소주 한병 마시기가 버거워도
마저 비우고 일어나자
이 마지막 한 잔이
마음 깊은 곳 은밀하게 남은 균을
소독약처럼 씻어줄테니
술이 깨고 나면
티 없는 마음으로 살자
살자 살자 다시 살자
AND

붉은


기본 안주로 나온
멸치는 고추장에
소세지는 케첩에
찍어 먹는다
꽃게탕이 등장하고
게 껍질이 국물 속에서 붉게 빛난다
하아,
소맥 한 잔을 원샷하고
그녀의 붉은 입술로 흐르는 탄성
붉은 것들이 나를 홀리는 밤
뼛속까지 붉게 타오르는 욕망
시들지 않는 붉은 여름밤
AND

이해


이해한단 말로
이해할 수 없던 당신을

눈을 마주치는 일로
손끝을 맞대는 일로
손을 잡고 함께 걷는 일로
그대로 뒤엉켜 하나되는 일로
우리만으로 한 공간을 가득 채우는 일로
그때, 서로의 엇갈리는 숨소리를 깨닫는 일로

이해한단 말이 없어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AND

새벽밥을 먹다

새벽 다섯 시
일어나서 돈가스를 튀긴다
허기허기허기
냉장고에는
케첩과 마요네즈가 있고
복숭아랑 냉동만두도 있다
안심안심안심
돈가스를 먹고
복숭아도 하나 먹는다
허기허기허기
만두까지는 과하다고, 생각하다가
하나 남은 바나나를 발견한다
안심안심안심
487번 스티커가 붙은 바나나를 먹고는
좀 있다가 뭘 먹을까, 고민한다
젠장젠장젠장
세상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내가
자활센터에서 만든 돈가스와
가난한 농부의 복숭아와
바다까지 건너온 바나나의 노력을
삽시간에 먹어치운다
그러고도 모자라서
자꾸 남의 노력을 탐한다
허기허기허기허
허기여차디여차


AND

이놈의 세상

 



이놈의 세상엔 돈이 썩어난다는데
썩어나는 것을 가지지 못한 나는
평생 썩지 않는 사람

 
또 언제나 옳은 것들이 널려있다는데
널려있는 것 중에 내 것은 없고
나는 언제나 옳지 않은 사람

 
이놈의 세상은 멈출 줄을 모르고
작은 돌멩이 하나도 그대로 두질 않는다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는 사람들 틈에서
나도 멈출 줄 모르고 산다

이 놈의 세상에는 어울리지 않는 얼굴과
거들떠 보는 사람 없는 차림새로
귀 기울여 주는 이 없는 말을 내뱉고
어색한 몸짓으로 또 하루를 보낸다

오늘도 이놈의 세상
내일도 이놈의 세상
에라, 이놈의 세상아
아서라, 세상아

AND

거울

추레한 중년의 남자가 알몸으로 서있다
어제 과음을 해서 그런지 나이들어 보인다
생각해 보니 나이 먹어서 나이들어 보인다
내 머리속에는 10년 전의 내가 있고
거울 앞에는 지금의 내가
거울 속에는 내가 아닌 것 같은 내가 있다
10년 후엔 더 나이들어 보이겠지
거울을 볼 때마다 오늘과 같은 생각을 하겠지
거울 속에는 보고 싶지 않은 내가
애써 외면하는 내가 있겠지
AND

손톱깎이


죽을때까지 자라는 손톱
고장날 일이 거의 없어서
잃어버리지 않으면
죽을때까지 쓰게 되는 손톱깎이
죽을때까지 나이 먹다가
죽을때까지 사는 인간
인간이 사라져도 손톱깎이는 남는다
인간이 발명했지만
인간보다 위대한 손톱깎이
AND

수박

수박은 큰 과일
수박은 초록색 호랑이
호랑이는 수박을 먹지 않지만
호랑이 같은 사람이라야
혼자 한 번에 먹을 수 있는
수박은 큰 과일
외로운 사람들끼리 모여
씨 툭툭 뱉어가며
웃으며 먹어야 더 맛있는 과일
수박은 외롭지 않은 과일
AND

생선을 굽다가

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그 위에 생선을 올린다
고등어 조기 갈치 임연수 꽁치
후라이팬 뚜껑을 덮고
가스렌지를 약불로 맞추고
마당에 나와 애도의 담배를 피우며
생선들의 원산지를 생각한다
세네갈, 아랍에미리트, 미국, 노르웨이, 러시아, 일본 앞바다를 떠올린다
잡히자마자 눈도 감지 못하고 냉동되거나
소금에 절여진 채 고통스럽고 느린 죽음을 맞았을 생선들의 운명
반만 익은 채 곧 내 손에 뒤집힐 생선들의 처지
생선 잘 구웠다고 아내에게 칭찬 받는 내 모습
이런것들을 떠올리는데 탄내가 난다
반쪽만 새까만 채 그대로 버려질 그네들의 삶과
나 또한 잡히고 잡아 먹히고 버려지는
어쩌면 억울할지도 모를 죽음과 가까이 있음을
생선을 굽다가 생각한다
AND

부의금을 내다


상주는 울고만 있다
저질 농담이나 한다고
실 없는 사람 소리를 듣던
사고 이후로 힘이 안 들어간다며
오른손 중지를 덜렁덜렁 흔들며 웃던
상주는 울고만 있다
서로 얼굴과 이름을 알고
형님 동생 부르고 지내며
크게 다툰일 없으니
맞절을 하고
어깨를 두드려 주고
돌아나와 술잔을 받는다
그의 인생도 잘 모르는데
그 어머니의 인생은 어떻게 알까
내게는 닿지 않는 슬픔으로
상주는 울고만 있다
89년 간의 생에 대한 경배라기엔
너무도 어색한 부의금을 내고
낯선 사람들 사이에 앉아
육개장을 먹는 동안
상주는 계속 울고만 있다
AND

가난의 비애


부자들은 그 수가 적어도
테레비에서 인터넷 뉴스에서
쉽게 눈에 띄기 때문에 흔하게 느껴진다
가난은 도처에 흔해서
더 희귀한 것이 된 운명에 처했다
외면하고 외면하고 외면하는 것이 됐다
원빈 아버지가 사는 대저택 바로 옆에 붙은
슬레이트 지붕 아래의 삶을 우리는 모른다
우리가 그 가난임을 모른다
스스로가 스스로를 외면하고 있음을 모른다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
세상은 세상을 모른다
AND

장마

빗물이 흐르네
지붕을 타고
빌딩 외벽을 타고
손에 쥔 우산을 타고
내 어깨를 타고
주르륵 주르륵
빗물이 흐르네

빗물이 적시네
빨랫줄에 옷가지를
나란히 선 소녀들의 운동화를
그 앞의 횡단 보도를
신호등 아래 홀로 선 내 몸을
자박자박 자박자박
빗물이 적시네

빗물이 고이네
나뭇잎 위에
밭고랑에
버려진 깡통에
모든 빈 자리에
빗물이 고이네
텅빈 내 마음에도
자꾸만 자꾸만
빗물이 고이네

 

song ver

1 3b 7b 6b 4 5 1
빗물이 흐르네
지붕을 타고
빌딩 외벽을 타고
손에 쥔 우산을 타고
내 어깨를 타고
주르륵 주르륵
빗물이 흐르네

빗물이 적시네
빨랫줄에 옷가지를
소년의  운동화를
그 앞의 횡단 보도를
홀로 선 내 몸을
자박자박 자박자박
빗물이 적시네

빗물이 고이네
나뭇잎 위에
깨진 벽돌 위에
버려진 깡통에
모든 빈 자리에
자꾸만 자꾸만
빗물이 고이네

빗물이 고이네 3b 7b
텅빈 내 마음에도
빗물이 고이네
흐르는 눈물속에도
빗물이 고이네 4 3b
너의 발자국 위로
빗물이 고이네
지나간 사랑 위로

자꾸만 자꾸만 5 1
빗물이 고이네
 


AND

흔적

태평양 한가운데
새 한 마리 날지 않고
배 한 척, 작은섬 하나 보이지 않는 곳
하늘과 바다만 남은 곳에
비가 내린다
바다에 닿자마자
자기 자신을 지우는 비
목격자가 없는 바다는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고
나 또한 당신이 없는 이 생에
아무 흔적도 남길 수 없다
AND

행복


해가 막 눈을 뜨기 시작하는
새벽 다섯 시 반
출근하려고 조심스럽게 현관문을 여는데
내 이름을 부르며
잘 다녀오라고
운전 조심하라고
눈도 뜨지 못하고 말해주는
아내 얼굴을 보고 집을 나서는 일

AND

머리카락은 다 어디로 갔을까

자취방에 혼자 앉아서
손으로 바닥에 머리카락을 쓸어 모은다
잘 모아서 재털이에 곱게 올려 놓고
담배에 불을 붙인다
담배를 두 모금 빨고
그 끝을 모아둔 머리카락에 갖다댄다
지지직 지지직
단백질이 타는 구수하고 익숙한 냄새가 난다
담배를 돌려가며 끝까지 태운다
대머리 아저씨들의 머리카락은 다 어디로 갔을까
전세계 70억 명의 머리에서 빠지는 머리카락은 다 어디로 갔을까
머리만 한 번 빗어도 빠지고
내가 원하지 않아도 자꾸 빠지는
머리카락은 다 어디로 갔을까
작은 방에 나만 남겨두고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당신은 어디로 갔을까
AND



누가 더 외로운 섬인지 경쟁하지 마라
우리 함께여도 우리란 외로운 섬이다
인간이란 그저 외로운 섬일 뿐이다
AND

하마 이야기


나는 이름 없는 하마
입이 무거운 하마
졸리지도 않는데
입이 자꾸 땅에 닿는다
꾸벅꾸벅 쿵! 쿵!
친구들은 앞으로 쿵쿵 걸어가고
나는 뒤에서 꾸벅꾸벅 쿵! 쿵!
누구도 나와 놀아주지 않으니
말할 상대가 없고
그래서 더 무거워지는 입
꾸벅꾸벅 쿵! 쿵!
땅에 입을 박은 채
지나가던 개미와 눈이 마주쳤다
그런 눈으로 나를 바라보지 말아 줄래
루돌프 사슴은 현실에 없고
나는 그저 입이 무거운 하마
살아가는 일이 조금 불편한 하마
AND

모래성을 짓다

바닷가에서
소년이 모래성을 짓는다
위태로이 서있다가
파도에 무너진다
소년이 다시 모래성을 짓는다
단단한 모양새지만
이내 파도에 무너진다
소년이 운다
빛나는 눈물도 파도를 멈추지 못한다
소년은 다시 모래성을 짓는다

그 바닷가에서
노인이 모래성을 짓는다
구경꾼들의 탄성 뒤로
모래성이 파도에 무너진다
노인이 다시 모래성을 짓는다
구경꾼들의 탄식이 파도에 닿고
모래성이 파도에 무너진다
무엇도 원망하지 않는 얼굴로
노인이 된 소년은 다시 모래성을 짓는다
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