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방


냉장고가 갇혔다
생수병이 갇혔다

테레비가 갇혔다
뉴스 앵커가 갇혔다

컵라면과 소주병이
담배연기와 기타 소리가 갇혔다

시계가 멈췄다

마음속에 너를 가두고
모두 다 갇혔다

창살을 넘지 못하는 우울과
울고 있는 내 마음이 갇혔다
AND

연리목


마을 입구 길나들이 양쪽 끝에
나무 두 그루 나란히 살았네
사람들은 그 나무 아래 모여서 소원을 빌었네
어느해 봄, 거센 바람이 지나간 다음날
한 나무가 죽었네
사람들은 흉조라며 혀를 찼네
죽은 나무는 산 나무에게 몸을 기댔고
산 나무는 죽은 나무를 품고 울었네
깊은 곳으로부터의 진한 울림으로 가지가 흔들리고 잎이 떨었네
사람들은 나무가 나무 때문에 우는 것 또한 흉조라 했네
한 겨울, 진이 다 빠지고 앙상해 지고서야 산 나무는 눈물을 거두었네
이듬해 봄, 죽었던 나무에서 새 잎이 돋았네
기대었던 두 몸이 하나가 되었네
그제서야 사람들은 길조라 했네
사람들은 나무 아래 모여 신에게 바치는 춤을 추었네
이제 두 나무는 세상의 끝을 함께 기다리네
두려울 것도 더 바라는 것도 없네
사람들은 이것을 사랑이라 부르네

AND

얼굴


화물차 운전수처럼 생긴 화물차 운전수를 봤다
휴게소에서 25톤짜리 벤츠 트럭에 올라타는 모습이 세상과 어우러졌다
처음부터 다른 일은 할 수 없었던 사람 같았다

농사 지었을 때는 농부 같지 않은 얼굴
노가다 일 할 때는 일용직 같지 않은 얼굴
사무실에서 글을 쓸 때는 글쟁이 같지 않은 얼굴
공무원이 됐어도 공무원 같지 않은 얼굴
강원도에 살지만 강원도 사람이 아닌 거 같은 얼굴

뭘 해도 항상 어색한 내 얼굴
눈도 코도 입도 반짝이지 않는
바보 같은 내 얼굴

날 닮은 내 얼굴
AND

세상에서 제일 좋은


세상에서 제일 좋은
비누 휴지 연필 종이컵
쓰면 사라지는 것들

세상에서 제일 좋은
오디오 테레비 자동차 집
절대 가질 수 없는 것들

세상에서 제일 좋은
너 너 너
나와 살을 맞대고 사는 사람
 
너 때문에
나는 세상에서 제일 좋은 사람
AND

지는 사람


풀에게
나무에게
바람과 햇살에게
별들과 밤하늘에게 지고

정류장 앞에서 꾸벅꾸벅 조는 아기 고양이에게
횡단보도 위에 떨어진 10원 짜리 동전에게
깜빡깜빡 신호등과 집 앞 가로등에게
우편함에 든 빛바랜 전기요금 고지서에게 진다

너를 이기고 난 후로
도무지 이기는 법을 모르겠다
누구도 방법을 알려주지 않고

나는 매일 지는 사람
너는 곁에 없는 사람
AND

삶은 계속 이어지고


새벽 다섯시에 눈을 뜨고
여섯시에 민방위 훈련에 참석하고
일곱시에 출근길에 오르고
이내 자동차가 퍼지고
긴급출동을 불러서 차를 견인하고
직장에선 연차를 쓰기로 하고
집에 와서 김치 볶음밥을 만들고
2인분은 족히 먹고도
배가 고프다

미용실에서 머리를 자르고
아내 심부름으로 은행에 다녀오고
일이 잘못되서 다시 다녀오고
차 수리에 3일 걸린다는 전화를 받고
낮잠을 잘래도 마음이 편하질 않고
불편한 담배를 피우고
점심을 거른 것이 떠오르고
내일 출근할 것을 생각하고
불편한 담배를 한 대 더 피우고
배가 고프다

밥을 안치고
된장찌개를 준비하고
아내의 퇴근을 기다리고
계속 배가 고프고
불편한 낮잠을 자고 일어나도
저녁으로 가는 시간이 더디고
집에 오는 사람을 마중나가고
함께 밥을 먹고
오늘 있었던 일들을 떠들고
동네 골목길을 한 바퀴 돌고
밤은 한복판으로 향하고
비틀거리는 사람들이 무섭고
편의점에서 김밥을 사 먹고도
배가 고프다

삶은 계속 이어지고
배가 고프다
AND

생각하지 말자


2016년 토마토 케첩 500g 1500원
토마토보다 싼 가공식품의 신세한탄

1966년 짜장면 60그릇 1500원
2016년 짜장면 한 그릇 4500원

180배 오른 짜장면 가격과
18소리가 절로 나오는 삶

2066년에도 토마토 케첩과 짜장면이 있을까
값어치란 말이 값어치를 할까

100년을 살 것도 아니니
50년 후 1500원은 생각하지 말자

하늘과 정반대의 일기예보가 대수롭지 않은 세상이니
퍼져버린 자동차와 식어버린 사랑 같은 건 생각하지 말자

케첩에 버무린 싸구려 파스타를 먹는 가난한 젊음과
한 그릇 2000원 짜리 짜장면을 만드는 중국집 주인의 어긋난 시대정신도

생각하지 말자
생각하지 말자


AND

넘나


나무가 산을
산이 강을
강이 바다를
바다가 구름을
구름이 하늘을
만물이 만물을

내 몸이 네 몸을
네 몸이 내 마음을
내 마음이 네 마음을
네 마음이 슬픔을
슬픔이 우리를
우리가 세상을

넘나든다

너무한 세상에서 우리가 사랑하는 일
넘나드는 일

 

song ver

넘나

넘나든다 1
나무가 산을 1 4
저산이 강물을 4 5 
넘나든다 1
강물이 바다를 1 4
바다가 구름을 4 5 
구름이 하늘을 5 6
하늘이 만물을 6 4
5
넘나든다 1

넘나든다 1
내 몸이 네 몸을 1 4 
네 몸이 내 마음을 4 5
내 마음이 네 마음을 5 6
네 마음이 슬픔을 6 4
5
넘나든다 1 
슬픔이 우리를 1 4 
우리가 나눈 사랑이 4 5
그 사랑이 세상을 5 6
4 5

넘나든다 1

너무한 세상에서 우리가 사랑하는 일 1 6 4 5 

넘나드는 일 1 

AND

동지 팥죽을 먹다


퇴근길
시장에서
팥죽을 산다

온종일
사람들 먼지를
뒤집어 쓴 팥죽

차갑게 식은 하루
붉고 차가운 위선
살아남은 자의 후회
괜찮은 편이라는 거짓말

팥죽을 먹는다
숟가락이 무겁다
기나긴 오늘 밤이 무겁다
생이라는 것이 이토록 무겁다     


AND

이분법


해와 달
낮과 밤
하늘과 땅
삶과 죽음
남자와 여자
생물과 무생물
척추 동물과 무척추 동물

너를 만나기 전과 후
오직 그렇게만 나뉘는 내 삶
AND

망연자실


바닷가에 살아도
바다가 보고 싶을 때가 있다
그믐날 밤바다에서
맨발로 갈매기 발자국을 뭉갠다
후회를 모르는 파도는
내 발끝에 당신 이름을 때리고
나는 귀를 닫고 망연자실

바다는 밤이면 더 사나워지는 생물
나는 그 앞에 망연자실
AND



어린 풀들은 낮은 곳만 봅니다
잎 끝에 맺힌 이슬과 비 개인 오후의 달팽이
걸음마를 연습하는 작은새와 사이가 좋습니다

무관심의 바닥에 바짝 엎드려서 가장 낮은 곳의 삶을 봅니다
두더지에게 잡아 먹히는 지렁이
어린아이의 장난에 목이 잘린 개미
누군가의 슬픔이 떨어져 만든 눈물의 웅덩이를 봅니다

그렇게 낮은곳을 지키다
위쪽 공기가 궁금해서 기지개를 켭니다
허나 어느 농부가 휘두른 예취기 날에 발목만 남습니다

이슬이 서리가 되고
달팽이가 이웃마을로 떠나고
작은새가 어미새가 되어도
어린 풀들은 계속 낮은 곳만 봅니다
AND

씨팔


설거지를 하다가
당신과 내가 저녁 먹은 그릇을 부시다가
부서진 사람과 온전히 남은 컵라면을 떠올리고
불의에 맞서지 못하는 불의를 가진 내가 얄밉고 허투른 말장난이나 생각하는 내가 답답하고
인간이 멸망해야 한다는 소리나 입에 달고 사는 내가 싫고
심장을 꺼내 포수에게 던졌다는 어느 야구 선수가 부럽고
아들이 취직했다고 기분 좋아서 매일 술 드신다는 아버지 얼굴이 생각나는데

수고했어,
당신의 한 마디에
먼저 했던 생각들이
건조대 위의 접시마냥 다 말라버린다

씨팔(18), 심정이 에잇(8)이다
AND

떼~내


발에 걸린 돌부리
걸리적거리는 장화끈
뒷목을 건드리는 새옷의 상표

간섭만 하는 엄마
돈 빌려달라는 친구
월급 안주는 사장님
내 맘에 안드는 대통령

몹쓸 인연에 보고파 흘리는 눈물
모래 위에 쓴 편지와 떨어지지 않는 미련

떼~내

힘든 하루가 그 사람 탓인것 같으면
막연한 기다림이 가슴 끝을 막막하게 하면

떼~내

어차피 떨어져나갈 목숨만 남기고

마카 몽조리 떼~내
AND

환절기

흰색 구두와 흰색 운동화가 나란히 오후를 지나친다
낭창낭창 경쾌한 발걸음이 부러워 고개를 들어 뒤를 쫓는다
젊은 연인은 손을 잡고 계절이 바뀌는 쪽으로 사라진다
다음으로 다음으로 나아가기만 하는 청춘
앞으로만 앞으로만 돌아보지 않았던 그 시절
그리워 그리워 먼 데 석양을 바라보다가
눈이 부셔 눈이 부셔 눈을 감는다
한낱 인간이 대체 무엇을 멈출 수 있냐고
나를 조롱하는 환절기의 밤공기가 코 끝에 닿는다
여름으로 넘어가는 마지막 담배 한 모금이 버겁다


AND

텅빈


텅빈 철봉
텅빈 그네
텅빈 시소
텅빈 미끄럼틀

혼자서 공을 차는 아이
텅빈 골대를 맞고 나오는 공
고개를 숙인 아이
몇 번이고 텅빈 그물을 가르는 공

이내,
텅빈 초등학교 운동장
AND

사랑이 문제


인간을 사랑한 선녀
수녀를 사랑한 스님

우리 엄마는 세컨드
이름도 모르는 장모님 애인

아이들 다 크면 이혼 하기로 한 부부
나이 60 먹은 아들에게 나가서 차 조심하라는 노모

남편이 있는 여자를 사랑하는 남편
침 맞으러 한의원에 갔다가 한의사와 다른길로 가버린 아내

얼굴도 못 본 여인 때문에 평생 안 읽던 책을 읽는 청년
언젠가 만날 그 사람을 위해 매일 피아노를 연습하는 소녀

세상사 모두 사랑이 문제
AND

유령


알콜이라는 유령이
내 마음속을 돌아다닌다
술이 덜 깬 채 일어나
처음 들이키는 것이 소주다
잠들기 전후가 일정해야
일관성 있는 사람
방 안엔 빈 술병만 어지럽고
해질녘 쪽창으로 스미는
붉디 붉은 당신 생각

당신이라는 유령이
내 마음속을 돌아다닌다
AND

연중무휴


휴일 고속도로엔
자동차가 개미떼
사과 장사 트럭엔
매일 새 사과가 가득
등산복 창고 대방출은
장소만 바꾸며 계속
인간이 사라져도
사라지지 않을 아파트 광고
풍년든 해 벼이삭처럼
흔해빠진 물건들

너무 많은 사람
너무 많은 사랑
너무 많은 기대
너무 많은 비참
너무 많은 희망
너무 많은 절망

사람들이 모두 지겹다고 하는 것
그저 안타까워 마음만 뒤척이는 것

너무 많은 너
너무 많은 나
너무 많은 우리
다시, 너무 많은 사람

연중무휴의 생

AND

새똥

새똥을 맞았다
어깨 위에 툭 툭,
회색 동그라미 두 개
기척도 없이 왔다가
모습도 보이지 않고
울지도 않고 떠난 새
황급히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 봐도
보이지 않는 당신
AND

좋은날


어린 옥수수 다 자빠지고
밭에 씌운 비닐 다 날아가
당산 나무에 귀신처럼 걸렸다
비닐하우스는 장풍을 맞았고
내 가슴도 같이 무너져 내렸다

나 몰라라, 바람 지맘대로 떠나고
오늘은 농약치기 좋은날
약 먹고 죽기도 힘든날
나 죽어도 계속 살아갈 풀을 잡아야지
내 기분 아랑곳 않고 쌩쌩한 벌레를 잡아야지
내 마음 다잡아야지

약냄새에 갈곳을 잃은 흰나비 내 주위를 맴돌고
홧김에 마신 술에 속만 아프다
AND

갑각류


붉게 피어오르는 생이 있고
껍질 채 붉어지는 죽음도 있다
너의 붉은 눈물을 뿌리친 그날부터
붉은 얼굴로 네게 등을 보인 그날부터
내 피는 차가운 푸른 빛
게장을 먹으면 몸이 붉어진다
갑각류 알러지가 생겼다
붉게만 붉게만
사멸하는 사랑이 있다


AND

재산


VIP 카드
통장 잔고
골프 회원권
고급 자동차
강변의 아파트

세상이 부러워하는 것 하나 못 가졌지만
세상에 길들여지지 않은 당신이 내 전재산
AND

좋다


나는 나 좋다는 사람이 좋다
근데 나 좋다는 사람이 없다
내가 먼저 네가 좋다고 하면
너도 너 좋다는 나를 좋아할까
다 나 좋자고 하는 일이지만
네가 너무 좋다

AND




봄 산에 나무들이
때맞춰 때맞춰
꽃을 피운다
벌이 날아들고
바람이 불고
꽃 지면 열매를 남긴다
꽃은 때를 놓치는 법이 없다

나무 아래 이끼도 제 꽃을 피우는데
나는 손에 쥔 열쇠를 찾아 헤매고
대문 앞에 둔 택배를 분실하고
두 눈 뜨고도 당신을 잃고
내 마음속에 나는 없고
때맞춰 울줄만 안다

어쩌겠느냐
어쩌겠느냐

때맞춰 울기만 한다



AND

용서


절실하지 않은 삶이 있을까

너는 삶이 절실하냐고 물었다
나는 쉽게 아니라고 대답했다

너는 다른 길로 갔고
나는 절실함을 잃었다

내게 가장 절실했던 네가 떠나고
내 삶은 그저 저물어가기 위해 절실한 것

기억이 무너지도록 술을 마시고
해질녘 술이 깨고서야

용서할 수 없는 나를
용서할 수 있게 된다

절실하지 않은 삶이 있을까
AND

우리들의 실패(모리타 도우지 노래 제목)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다
그러니 성공은 실패의 자식이다
내 신체적 결함과 관계 없이
그저 날 닮으면 좋은 것이 핏줄인데
실패한 부모는 어째서 자식의 성공을 바라나
왕후장상에 씨가 따로 있지 않고
죽음만이 모든 존재를 관통하는 평등한 실패다
바나나맛 우유엔 바나나가 안 들어갔고
성공이란 향기로 실패란 실체를 가릴 수 없다

오늘, 성공이란 말은 우리들의 실패
실패한 우리들이 성공이란 말로 대를 잇는다

과연 실패의 어머니는 누구인가
AND

귀통령


뽀로로는 초통령
소녀시대는 군통령
박근혜는 대통령, 씨팔

초통령도 군통령도 대통령도
세월따라 유행따라 바뀌지만

귀요미야,
너만은 변치않는 나의 귀통령
AND

면접 준비


구두약을 산 게
샴푸로 머리를 감은 게
머리에 뭔가를 바른 게
수염을 남김없이 자른 게
넥타이까지 반듯하게 맨 게
남자 냄새 나는 스킨 로션 뚜껑을 연 게

줄담배를 피운 게

다 참 오랜만이다
AND

도화가 네 개


내 사주에는 도화가 네 개
연월일시에 다 바람끼가 들었다

복숭아 꽃 피는 계절이면
봄바람에 마음이 살랑거린다

매일 보는 아내가 유난히 더 예쁘고
봄치마 입고 거리에 나온 여인네들이 자꾸 맘에 걸린다

여러 사람 홀리는 사주로 태어나 그렇게 살지 못하고
산에 나물 하러 와서 막 피어오르는 작은 꽃들만 눈에 품는다

어느날 돌풍에 뿌리채 뽑히고
기울어진 나무들을 보고서야

내 인생이 삐딱한 이유를 알았다

바람 불어도 멀쩡한 건 잡목 뿐이니
이리 휘청 저리 휘청 살아야겠다

봄바람 지나고 나면 여름이고
눈 한 번 감았다 뜨면 기울어 있는 게 인생이다
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