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보일러가 터졌다. 정확히는 온수 배관 어딘가가 터졌다. 다행히 실내로 물이 스미기 전에 온수쪽 호스를 잠갔다. 뜨거운 물 매일 쓰는 집인데, 지난 겨울에 보일러를 안 돌려서 터졌다고 얘기하는 주인아줌마는 별로지만 보일러 새로 놓고 마루도 새로 까느라 돈이 많이 들었다니까 그런가보다 한다. 그때 수도 파이프도 다 교체하시지 그러셨어요.

이렇게 적고 나니까 엄청 뒤끝있네.

보일러를 뒤로하고 GMF 갔다왔다. best song 'Ready, Get Set, Go!' 박새별 미쳤다. best performance 'HYUKOH' 혁오 미쳤다. 직업이 음악인 사람들의 세계를 들여다 본 기분이다.

일요일 오전에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페북 타임라인을 보고는 서울대병원에 갔다가 부검영장 강제집행 하지 않는다는 뉴스에 바로 발길을 돌렸다. 거짓말을 밥 먹듯 하는 정부와 경찰을 상대로 바른 판단이었을까? 그저 내가 비겁한 사람인지도 모른다.

어제 출근길에 삽당령에 일 다닐때가 더 좋았다는 얘기를 동료와 나눴다. 단서는 '고용이 계속 보장된다면.' 이다. 그렇다고 고용이 쭉 보장되는 지금이 좋은 것도 아니다. 아내 페북에서 농사 짓던 때에 생의 비밀에 다가간 것 같았단 문장을 읽고 울컥했다. 남들이 다 하고 싶어하는 직업군에 있으니 자부심을 갖고 일하라는 얘기를 건너 들었다. 속으로 실적의 세계에서 자부심은 개뿔. 생각했다.

집 수리 문제도 있고 생활 전체적으로 약간의 환기를 위해서 이사를 가기로 했다. 더운날 슈퍼에서 하드 사 먹듯이 중대사를 결정했다. 표면적으로는 이렇게 단순한 것이 살아가는데는 더 좋다고 생각한다.

글을 잘 쓴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박근혜한테 '연설문 쓰는법' 이 아니라 '솔직한 글쓰기' 강의 정도는 해줄 수 있지 않을까?

어지러운 날들이다.
AND

떨림


작은 새가 춤을 춘다
전깃줄이 흔들린다
내 눈이 흔들린다
내 마음이 흔들린다
손이 떨리고
몸이 떨린다
새가 날아간다
내 눈에서 멀어진다
내 마음에서 멀어진다
떨림이 멈췄다

AND

일 미터

반경 일 미터 안에 너와 나 뿐
우리뿐인 세상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까
이 진공 속에 숨이 멎을까
우리는 누구에게 묻지도 않고
이것을 사랑이라고 한다

AND

망해라 정말


편의점 햄버거를 먹으며
신자유주의 종말을 읽는
주말 재택 당직 근무
한 입 한 입
파견법, 비정규직, 세월호
그리고 어느 농부의 이름을 새긴다
노동자, 민영화, 구조조정, 성과연봉제를
목구멍에 밀어 넣는다
한 숨 자고 일어나
이유도 없이 방을 치운다
쓰레기 위에 쓰레기
쓰레기 안의 쓰레기
씨팔, 또 배가 고프고
이 문명의 마지막 형태인 편의점에 간다
편의점의 최첨단 상품인 도시락을 산다
이렇게 나는 세상 끝에 사는 사람
나열만 있고 행동은 없는 사람
그러니 정말
망해라 정말

AND

적당

적당히 푸른 하늘이다
적당한 가을이다
작정하고 나설 곳 없는
적당한 삶이다
AND

단풍놀이

고깃집 앞에서 갈비 냄새를 안주로 깡소주를 마시는 밤
누구 피를 빨아 먹고 자랐길래 당단풍 나무는 이토록 아름다운가

AND

모아보니 별거없다.


AND

10월, 일요일 아침


바다 건너 먼 나라의 프로 야구팀을 응원한다
바다 건너 또 다른 나라는 내전으로 들끓고
또 다른 나라는 허리케인으로 무너져 내렸다
어떠 나라에는 먹을 물도 부족하고
먹을 것이 넘쳐서 수입한 쌀을 바다에 버리는 나라도 있다
이웃 나라 원전에선 지진으로 방사능이 누출되고
내 나라에선 전쟁, 지진, 원전이란 말이 심심찮게 들린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일들을
너무 많이 알고 있다
이래도 되는걸까

염소의 저주에 걸려있다는 응원팀이 이겼다
그런 일 따위 아랑곳 않고
겨울이 닥쳐 오고 있다
AND

그저 그런


화가 나서
잠이 안온다
소화가 안된다
사는 게 불편하다

풍요를 살기 때문에
외려 어떤 결여를 의심할 수 있다
사랑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거리의 활기는 실제하는데
세상의 거짓은 어디에서 오나
철학자가 되려는 것도 아니다

씨팔
개새끼들
욕이나 하려는 건 아니었다

다 당신들 탓이라고 한다
그 말은 진심이지만 진실은 아니다

그저 내가 인간이라 자신이 없다
잘 때만 빼고는 항상 머리를 굴리는 인간
자신의 희망사항을 걸고 내기를 하는 인간
먹고 싸는 거 빼면 별 것도 없는 인간

애초에는 이러려던 게 아니었다
그렇다고 다른 무엇도 없었다

그저 그런 인간
AND

가을

때를 놓친 마지막 한 마리 제비가 어딘가로 날고
구름의 그림자 아래 누워서 하늘 끝에 너라고 적으면
네 웃음소리가 시퍼런 가을처럼 온 사방으로 떨어진다
AND

누군가 죽었다


누군가 죽었다
그럼 누군가는 살았나
누가 누구를 죽이지 않는 죽음도 있나
자연히 죽는 일은 그럴까
죽은놈은 죽고 죽인놈은 산다
생명의 역사는 산 생명의 책임

네트워크로 모든 게 연결되고
하이테크란 말도 지난 세기의 말인
오늘날,
우리는 죽음을 방기(放棄)하기 쉬워졌다

물려줄 것 하나 없는
모순같은 세상과
모순이란 단어 위에
올라앉은 소주잔

누군가는 죽었고
우리들은 살았다
AND

아이고

씨팔, 욕을 그만 할랬더니
제일 먼저 떠오르는 말이 아이고네
아이고, 씨팔
이러니 달라진 게 없네
아이고는 누가 잘못 됐을 때나 하는 말인데
그럼 누가 죽기라도 했나
북망산천을 본 사람이 있나
지옥을 살아도 북망산천을 모르니
어야디야는 그저 노래가락 속의 말일 뿐
아이고, 씨팔, 어야디야
AND

가끔은 부끄럽다


가끔은
아무일도 없이 지나간 하루가
별일 없이 잠자리까지 온 내가
부끄럽다

가끔은
너에게 전화를 하는 일이
세상과 상관 없는 내 사랑이
부끄럽다

가끔은
영원이란 없다고 생각하는 일이
그 영원을 너에게 고백하는 일이
부끄럽다

가끔은
이 가끔이란 말이
부끄럽단 말의 반복이
부끄럽고 부끄럽다

가끔은
세상에 부끄러운 일이
세상에 부끄럽고
그걸 생각하는 내가 부끄럽다

그래서 가끔은
괜찮다고 하는 사람들이 싫고
그 사람들과 함께 있는 나도 죽도록 싫고
그저 살아 있다는 게 부끄럽다


AND

생일


이유도 모르고 태어나
운좋게 살아남아서
같은 처지의 사람들에게
축하란 말을 듣는 날
AND

내가 온전할 때


똥 눌 때
눈꼽 뗄 때
코딱지 먹을 때
침 흘리고 잤을 때
자꾸 네가 생각날 때
나는 내가 동물 같다

비데가 시원할 때
비눗물로 세수할 때
코 푼 휴지 버릴 때
잠옷을 챙겨 입고 잘 때
자꾸 네가 생각날 때
나는 내가 인간 같다

나는 널 생각하는 일로만 온전하다
AND

감자탕을 먹다 - 감자탕의 반대말 -

감자탕을 먹는다
이베리아 반도에서 온 돼지 등뼈
이국적인 감자탕
이국의 반대말은 뭐지
그게 뭐든
반대말을 잇고 또 이으면
스페인과 나를 이어주는
눈 앞의 등뼈처럼
어렵지 않게 너에게 닿을 것 같다
이름만 겨우 아는 앞사람에게
너에게 못한 말을 쏟아내고
그리움만 남은 밤
그리움의 반대말은
나인가 너인가 아니면 감자탕인가
밥까지 볶아 먹고
상 위엔 김가루가 붙은 숟가락
김가루의 반대말도
숟가락의 반대말도
감자탕의 반대말도
결국엔 너


AND

살아야한다


내 나이 마흔
나 태어났을 때 살아있던 사람 절반 이상이 죽었다
40년 동안 죽은 사람도 많지만 새로 태어난 사람은 더 많다
그러니 세상이 그만큼은 바뀌었을까
오직 죽음으로만 한 시절이 끝나고
나 사는 동안 혁명은 일어나지 않는다
모든 존재가 태어나서 가는 길은 하나고
도처에 편의점처럼 쉬운 죽음이 있음에도
나와 내 주변의 죽음은 그리스 비극에서처럼 쉽지 않다
나보다 훨씬 오래 살았을 느티나무 아래서
해 넘어가는 쪽을 보며 마른 담배를 피운다
독한 연기가 가지에 닿고 잎에 닿는다
미안한 마음으로 이렇게 또 하루가 지나고
살아서는 세상이 바뀌지 않음을 알아도
살아야한다
죽을때까지는
살아야한다
AND

가을밤


씨팔, 그게 아니라고
당신이 틀렸다고

악에 받쳐 소리를 지르려다
꿈에서 깼다

가슴 속 하나 가득
풀리지 않는 덩어리

미처 끝내지 못한 말이
공기 속을 떠돌 때

벌떡 일어난 내 등을 쓰다듬는 당신의 손
걱정하는 당신 이마를 어루만지는 내 손

우리들의 가을밤은

그것이면 되었다
그것으로 족했다
AND

말장난


말이 없는 말
소용 없는 소용
진실이 아닌 진실
존재하지 않는 존재
진심이라고 믿는 진심
질리도록 지겨운 진리
글을 잊은 문장은 말이 없고
위안인지 망각인지 양귀비 꽃말같은 밤
무력감에 마신 술 기운에 더 무력해지는 밤
당신 때문에 아닌데 다 당신 때문이라고 소리질러 버리는 그런 밤
말장난 같은 밤
AND

 지진 때문이 아니라 지진 후의 막막함 때문에 잠이 안온다. 정선엔 진동이 없었다. 강릉, 속초에선 느꼈다고 한다. 나는 페북에서 지진 소식을 보자마자 아내랑 원전부터 떠올렸다. 지진 소식이 나올까 싶어서 튼 테레비 뉴스에선 자막으로만 원전은 정상가동 중이라는 소식을 전했다. 이 정도 지진이면 계속 지진 관련 방송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생각했지만 tv에선 대통령과 여야 대표가 만난 그림이 오랫동안 나왔다. 물 사러 밖에 나왔다가 술 마시던 동료들이랑 잠깐 함께 했는데, 직접 나에게 오지 않은 지진을 별로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 분위기였다. 그게 싫었지만 결과적으론 나도 마찬가지다.

 늘 '나도 마찬가지고 이런것이 인간이라 어쩔 수 없다.' 에서 멈춘다. 세상에서 가장 논리정연한 말로 무너져가는 이 나라를 비판하고 비인간적이고 비논리적인 세상을 개탄하는 일이 현실을 바꾸지 못한다. 견디다 못해 손에 돌멩이라도 집어드는 일과 곡기를 끊는 일도 현실을 바꾸지 못한다.

 현실은 그저 현실. 그렇다면 나를 바꿔야할까? 바뀐 나도 그저 나. 1분 전의 나, 1분 후의 나, 지금을 흐르는 나.

 어제 영화 밀정을 봤고 오늘 문혁과 인간에 대해서 쓴 위화의 산문을 몇 개 읽었다. 그 영향으로 가끔 하는 생각을 또 한 번 하게 된 나는 그저 나.

 새벽에 일어나 우물에서 물을 긷고 - 또는 냇물을 떠다가 - 아궁이에 불을 지펴 물을 데우고 물이 끓으면 표주박에 맥심 모카골드 인스턴트 커피를 끓여 먹는다. - 아궁이에 불을 지피려면 나무도 미리 해둬야겠지. 이 커피 참 맛있겠다. -
 자기가 경험해보지 못한 (옛날의) 방법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저런 이유들이 있지만 결국 제 좋은대로 할 뿐이다. 인간이란 그러한 자기를 인정해 주고 좋아해주는 사람,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을 찾는다.
 
 산다는 게 그저 이런 것 같다. 인간이 인간을 넘어서기가 어렵다.
AND

드라이브


나는 앞차를 따라가고
뒷차는 나를 따라오네
나는 두 차 사이에 갇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길을 가네

앞차는 그 앞차를 따라가고
뒷차 뒤에는 또 뒷차가 있네
서로가 서로에게 갇혀서
벗어날 수 없는 길을 가네

내가 앞차를 앞지르고
뒷차가 나를 앞질러도
아무리 앞뒤가 바뀌어도
선두도 없고 끝도 없는 길을 가네

나를 앞지르던 뒷차가
건너편에서 오던 차와 부딪쳤네
선을 넘는 것은 모험
안전한 모험은 없네

아, 모순 없는 인생

순간 사라질 순 없기에
계속 이 길을 가네
삶은 살아야하는 것이기에
계속 이 길을 가네
AND

드라이브 - 9월 닭목령 -


천지사방에 나 밖에 없는 410번 지방도
짧아진 해의 끝을 쫓아 너에게 가는길
물큰한 여름 풀냄새는 빠르게 스치고
가을은 네 기다림처럼
한 잎 한 잎 내 앞에 내린다
AND

풍요


내가 싼 똥을 보고
어제 이렇게 많이 먹었나
스스로 놀랄 때가 많다
AND

툭,

툭,
누군가 내뱉은 말을 듣고
툭,
가을 감나무에서 감 떨어지듯이
툭,
비밀을 털어 놓는다
툭,
빗발치는 빗소리처럼
툭,
끊어진 사랑이여
툭,
주저앉은 마음이여
툭,
쉽게 부서지는 것들이여
툭,
떨어지는 눈물이여
툭,
털어낼 수도
툭,
놓아버릴 수도 없는 삶이여
AND

36.5도


며칠 째 몸이 뜨겁다는 당신 귓속에 체온계를 넣는다
딸깍, 36.5도

안심하고 기분이 좋아져 내 배꼽에 체온계를 넣는다
딸깍, 36.5도

- 더러워
- 배꼽에 때 파내면 병 걸려

당신 배꼽에도 체온계를 넣는다
딸깍, 36.5도

- 누가 그래
- 밤에 발톱 깎으면 안되는 거랑 똑같은 거야

당신 발에 체온계를 갖다댄다
딸깍, 더러워

더럽다며 깔깔 웃는 당신과
미신처럼 맹목적으로 배꼽을 맞추며 산다

36.5도 짜리 사랑을 한다
AND

씨팔, 암


암에 걸릴 것 같은 세상에서
암에 걸릴 것 같은 일을 당해도
암에 걸릴 것 같다는 말은 하지 말자
암에 걸려서 가진 놈들만 배불리지 말자

씨팔 소리가 절로 나오는 세상에서
씨팔 소리가 절로 나오는 일을 당해도
씨팔 소리를 입 밖으로 내뱉지 말자
옆에 있는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그 소리를 듣게 하지 말자

씨팔, 암에 걸리지 말자
AND

반환점


보고 제출 요청 알림
기안 검토 협조 결재의 삶

장복중인 항생제처럼
더 곪지만 않도록

반복반복반복

마음에 부레가 생기고
부력을 갖게 됐네

나무 토막 하나 없이
바다를 떠도는 조난자처럼

반환점을 찾아
허공을 떠도는 신세

예정된 하루와
끝을 알고 하는 사랑
그리고 세상이 바라는 생각

반환점으로 향하는 삶은 가짜입니까
AND

뻔한 얘기


새가 되서 날고 싶다
나만 오를 수 있는 높이에서
당신만 나를 볼 수 있는 자리에서
까마득한 세상을 내려다 보고 싶다

흰긴수염 고래가 되고 싶다
바다 가장 깊은 자리에서
세상 반대편까지 닿는 낮고 낮은 울음으로
인간들 몰래 당신을 부르고 싶다

시절이니 세상이니 하는 것 없이
그저 사랑받는 사람이 되고 싶다
오래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
오직 당신에게만 그리고 당신만을

그렇게 뻔한 사랑을 하고 싶다
AND

굿모닝


눈뜨자마자 마당에 나와서
굿모닝 담배를 피우는데
감나무에서 아기 고양이가
옆집 담 위로
툭,
아이고 놀라라
또 한 마리가
툭,
아이고 아이고
놀라라 놀라라
호기심으로
경계심으로
나랑 눈을 맞추다가
팔을 뻗어볼까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담 너머로 사라진다
굿모닝
그리고
굿바이
AND

부처님은 거인족


사리가 여덟 섬 네말이라니
부처님은 거인족이었을까
손오공이 손바닥 안에 있었다니
부처님은 거인족이 맞나봐
거인족 부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쿵!쾅!쿵!쾅! 세상을 짓밟고 다녔을까
먹기도 많이 먹었을거야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일도 좋았을거야
다만 세상에 하나 뿐인 존재라 많이 외로웠을거야
그래서 그 많은 사리를 세계 방방곡곡에 뿌렸나봐

백년도 못 살고 죽었다는 걸 보면
결국 부처님도 자기 손바닥 안에 있는
나약한 인간이었나봐
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