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물건이 너무 흔하다." 고 자주 말한다. 부정적인 의미로 말하는 것이데, 실제로는 언제든 그 흔한 물건을 소비할 수 있다는 마음으로 살고 있다.
변산에 있을 때, 볼음도에 있을 때, 강릉에서만 생활할 때가 지금 강릉과 정선을 왔다갔다 하면서 살 때보다 심적으로 많이 편했다. 생활 반경(세계)이 넓어지면 어려움도 많은 법이다. 처음으로 다른 동네에 갔을 때, 처음으로 시외버스를 탔을 때, 처음으로 외국으로 나갔을 때의 기억이 강렬할 수밖에 없다.
나는 절제할 수 있을까? 지난주에 영화 'arrival'을 봤고 이번주엔 이 책을 읽었다. 영화의 결말은 해석에 따라 희망일 수 있지만 나는 '정해진 결론을 향해 가는 인간' 이라는 부정적인 느낌으로 봤다. 나는 절제할 수 있을까?
자신이 없다.
비 소유를 포기라고 말한다면 이는 역으로 소비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 된다
나 자신의 구현을 위해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것들, 혹은 지루하거나 힘겨운 삶의 대안을 유럽 어딘가 다른 곳에서 혹은 지구상 어딘가 다른 지점에서 훨씬 수월하게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한 국가의 영토 내에서 취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욕구가 커졌기 때문에 영역을 확장해야 하는 제국주의 국가 권력처럼 개인도 이제는 행동반경을 지속적으로 넓혀가고 있다. 행복은 비행기를 타야 갈 수 있는 곳에 있다.
유럽연합의 농업보조금은 식품이 부족해 질 것을 염려해서 주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식품 가격을 최소화하면 남는 돈으로 스마트폰을 사고 여행을 가고 집을 장만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농업보조금을 주지 않아도 유럽에선 아무도 굶지 않는다. 그 반대로 오히려 환경과 건강이 좋아질 것이다. 우선 친환경농법과 소규모 농장의 기회가 상승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하다. 그 결과 생필품의 가격이 상승할 것이며 이로서 식품이 차지하는 가계 비율도 높아질 것이다.
개인이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의 한계가 점점 더 퇴보함과 동시에 이를 대신 해결해 주는 대행업이 괴물처럼 성장했다. 이런 '편의주의' 속에서도 물리학적 원칙은 변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누군가는 불편하고 더러운 일을 해야 한다.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에 한계가 없어 보인다. 아시아, 라틴아메리카나 아프리카의 소위 '스웻샵'은 불편하고 더러운 일은 지구상의 다른 곳으로 보내버리는 현상이 생산 과정의 당연한 일부가 되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과거에 수작업으로 직접 생산하거나, 동네 가게에서 물건을 사던 시절이나, 이웃 간의 도움에 의존해서 살던 시대에는 때때로 결핍을 겪어내는 능력이 있었다. 그런데 구매 가능한 상품의 종류가 늘고, 서비스와 자동화가 한 단계 발전될 때마다 우리의 존재 자체가 한 걸음씩 더 소비 체계에 운명적으로 내맡겨지고 있다.
우리에게 남은 유일한 구제책은 한계에 도달한 외부 의존적 공급 체계를 무너뜨리는 것이다. 그래야만이 그동안 도달한 낙하 고도를 조금이라도 낮출 수 있다.
집광판을 생산하기 위해선 예나 지금이나 화석연료를 투입해야 한다. 집광판 생산에 필요한 규소는 1200-1400도 사이로 가열해야 하는데 재생 에너지로는 아직 이런 고열을 낼 수 없기 때문이다. 풍력 에너지 역시 유사한 문제를 안고 있다. 풍력 발전기를 제조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부품이 백퍼센트 재생 에너지로만 생산될까? 이 조건이 채워지지 않는한 재생 에너지는 에너지 재생이라는 과제를 수행하지 못하는 낙제생일 수밖에 없다.
한 기업이 원가를 절감해서 가격을 낮추어 경쟁력이 높아지면 일반적으로 수요가 증가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효율이 높아지면 수요가 늘고, 이로 인해 오히려 자원 소모가 증가하게 될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패시브하우스, 3리터 자동차, 에너지 절약형 전자제품 등 절약형 생산품의 형태로 드러나는 효율적 장점은 소비자에게 경제적으로 유리하게 작용한다. 그 결과로 다른 상품에 대한 구매력이 상승한다.
현재 무서운 속도로 번지고 있는 에너지 집약적 라이프스타일을 볼 때, 특히 자기 구현을 위해 크고 작은 전자기기들이 꼭 필요하다는 사실과 이들이 제공하는 편리함에 모두 익숙해 졌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그 이전의 시간으로 되돌아가라는 요구는 비현실적이다. 이는 감당하기 어려운 절제를 요구하는 것이며, 녹색의 힘으로 성장하면 절제가 필요 없다는 약속에 대한 정면도전이기도 하다.
경제가 지속적으로 성장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면 생태계에 아무런 부담도 주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생태계에 아무런 부담도 주지 않는다면 경제 성장을 이룰 수 없다.
경쟁을 물리치고 올라 온 사람이 많을수록 앞장섰다는 느낌은 소멸되기 마련이다. 자신의 사회적 위치를 방어하고 다시 쟁취하거나 상승시키기 위해서는 별 만족감 없이 늘 새로운 재화를 소비해야 한다는 결론이 얻어진다. 그렇다면 소비에 매달리면서도 이로 인한 행복감이 같이 상승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은 그리 모순이 아닌 셈이다. 소비와 행복감 사이의 역동성은 국각 간 무장 경쟁의 나선형과 유사하게 진행된다. 더 이상 상승하지 않을 행복의 수준을 유지하거나 다시 얻기 위해 소비해야 하는 양이 점점 더 상승하기 때문이다.
지역화폐는 경계를 이탈하여 길게 늘어진 제품 생산 고리를 단축시킨다. 이런 지역화폐가 금리에 묶이지 않고 유통되는 경우 성장 압박을 추가적으로 감소시킬 수 있다.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경로 중에서 가장 짧은 것은 완전한 혹은 순수한 생계형 경제다. 예를 들어 몇몇이 모여 공동 경작을 하는 경우, 그 사람은 무전이라는 극히 낮은 자본을 투입하여, 이익을 배출하지 않고 이자도 없고 그로 인해 성장에 대한 압박감도 없는 공급 행위에 가담하게 된다. 직장 생활에 소요되는 시간을 줄이면 자급과 타급을 병행하여 금전적 수입에 대한 의존도를 줄일 수 있다. 사회 봉사, 예술적 취미 생활 외에 도시농업을 도구로 한다면 세 가지 유형의 아웃풋이 가능하며 이를 통해 산업 제품을 일부라도 대체할 수 있다. 1. 공동 이용으로 이용 효율 증가 2. 이용 수명 연장 3. 자가 생산 세 가지 아웃풋 유형이 개인적인 취향, 소양 및 여건에 따라 서로 연동된다면 더욱 풍부한 자산이 될 수 있으며, 탈성장 경제로 인해 크게 감소될 수입을 충분히 보충할 수 있는 저금통 역할을 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산업 생산이 반으로 줄고 그에 따라 수입이 반으로 줄었다고 해서 반드시 생활 수준도 반감되는 건 아니라는 뜻이다. 하나의 소비 상품이 두 배로 이용되고 수명이 두 배로 길어지면 산업 생산량의 반으로도 제품에 내게된 소비 기능 혹은 서비스에 대한 욕구가 필요한 만큼 충족될 수 있다.
세상을 구제하거나 좋게 만들거나 더 평등하게 할 수 있다는 그럴싸한 정책적 요구 사항이 넘쳐나고 있으나 이런 변화가 오는 경우 실제 어떤 상황이 발생할 것인지에 대한 실증적 체험이 결여되어 있다. 성장 사회가 야기한 문제를 해결할 기술적인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신중하게 받아들인다면, 유일하게 떠오르는 해답은 '절제'다. 절제는 지금 우리의 라이프스타일에 어쩔 수 없이 영향을 줄 것이다. 자신의 라이프스타일을 스스로 의문에 붙이지 않는 사람은 절제를 요구하는 정치가에게 표를 주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