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새벽 공기가 차다
습관적으로 얇은 이불을 덮고 잤다가
찬 기운을 못 견디고 잠이 깨서는
두꺼운 이불을 덮고 잠든
네 품에 파고 들었다
세월이 삶보다 빠르다
삶은 세월가는 속도나 겨우 쫓을 뿐이다
나는 당신 품에 파고들 뿐이다
아무리 파고 들어봐야
너에게 겨우 닿을까말까 할 뿐이다
그러다 겨울이 오고
우리는 서로를 알지도 못한 채
제대로 한 번 닿아보지도 못한 채
지나간 계절 속에 사라질 것이다
평생이 그렇게 세월을 따라 흘러갈 것이다
AND

 4박 5일간 출장 다녀왔다. 일용직이 출장이라니, 좀 웃긴다. 봉화, 영주, 예천 문경, 상주, 구미, 대구, 의성, 성주, 경주, 포항을 다녔다. 운전 하느라 피곤했는데, 무사고로 돌아와서 기쁘다. 경주에서 삽당령으로 돌아올 때, 7번 국도를 타고 북쪽으로 올라왔다. 올라오는 내내 국도변 곳곳에 있는 삶에 대해서 생각했다.

 경북 지역을 돌면서도 마찬가지였다. 읍내에 들어서면서 하나 둘씩 간판들이 보이기 시작하면 이 사람들은 다 뭐 해서 먹고 살까, 생각했다. 봉화 춘양의 골짜기에 예쁘게 가꿔진 밭들을 보면서 이 밭 주인들은 다 뭐 해서 먹고 살까, 생각했다. 얼마전에 <위로 공단>을 봤는데 그때도 같은 생각을 했다. 그러다가 나는 뭐 해서 먹고 살고 있나, 생각했다. 이내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처량하고 슬퍼졌다. 요즘 아내가 느끼는 무력감도 이와 비슷한 것이리라.

 점점 몸이 편해지는 (마음은 불편해지더라도) 물질적인 풍요를 조금만 벗어날 수 있으면 나도 위로 공단의 그녀들도 약간의 농사로 먹고는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볼음도에서 거의 근처까지 갔었는데, 아쉽게 됐다. 농사를 조금만 짓더라도 확실한 내 땅이 있는 편이 좋다고 생각한다. 결국 땅이라는 물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다만 아직 젊으니까 내 땅을 조금 갖고 싶은 지금의 마음도 괜찮다고 자체 위로한다.

그건 그거고,

어째서 당신은 골프를 치는가?
그러는 당신은 왜 치지 않는가?

당신은 어째서 (만든이의 정성을 무시하고) 식당에서 밥을 남기는가?
그러는 당신은 왜 반찬그릇까지 깨끗히 비우는가?

당신은 왜 설악산 케이블카에 찬성하나?
그러는 당신은 왜 반대하나?

세상은 서로 정반대를 지지하는 이유들 간의 충돌이다. 이것은 어쩔 수 없다. 반대에게 설득 당하거나 설득 당하지 않을 뿐이다.

헌데,

어째서 다른 사람들의 삶을 힘들게 하는가?
그러는 당신은 그러지 않는가?
어째서 당신은 다른(어려운) 사람들을 돕는가?

는 이유의 충돌과는 다른 문제다. 자신의 이유로 남의 삶을 힘들게 하지 마라.

좀 더 생각을 확장하면 이것도 매 한 가진가?

출장 가서 이런 생각을 했다.
AND

그리움 나무 2

점점 작아지기만 하던 아버지
결국은 재가 되었네
소원대로 강에 뿌렸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돌아오는 길
눈물만 강가에 스몄네
아버지 뿌린 자리에 꽃이 피었네
꽃잎이 강물 위로 덤덤하게 흘러갔네
덤덤하던 아버지를 닮았네
아버지의 씨앗인가
어린 막내 동생 같았네
꽃 피웠던 나무는 점점 자랐네
나보다 키가 큰 나무가 됐네
나는 점점 작아질 뿐이었네
해마다 아버지 뿌린 계절이면
나무위로 붉은꽃이 만발하고
나는 그 꽃잎들 다 흘러 내리도록
강가를 홀로 지켰네
이제 내가 흘러갈 시간이 왔고
나는 이렇게 대를 이었네
보고 싶은 사람도 없고
그리운 것도 없네
AND

사랑

내 이름으로 우물을 파고
그 우물에서 네 이름을 길어다가
밥을 지어서 함께 먹는다
AND

탕장탕국수수


탕수육+짜장면 2
탕수육+짜장면+짬뽕
탕수육+짬뽕 2
갈육내만콩막
비개장두국국
탕장탕국수수

중화요리일체
강릉시 홍제동 태광식당
AND

불면 - 그림자 놀이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형태도 대상도 없고
시작도 끝도 없다
잠들지 못하는 새벽만 남았다
그래서 꼬리를 잘랐다
마음속에 검은피가 흘러나왔다
핏덩이가 스물스물 일어나더니
내 입을 벌리고 나왔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했지만
생각을 잘라버릿 탓에
머릿속이 하얘졌다
검은 내가 검은 피눈물을 흘렸다
그러더니 창문을 열고 가출했다
나는 나의 어둠을 찾아 나섰다
어둠이 남긴 핏자국을 쫒았다
끊어진 생각 때문에
곧 목표와 방향을 상실했다
삶에 이유가 사라졌다
그러다 내 그림자를 봤다
긴 혀를 내밀고 웃고 있었다
다시 한 번 잠이 달아났다
AND

평생

안개속을 걷고 있었다
네가 내 이름을 불렀다
끊어진 길의 끝에서
그제서야 앞이 보였다
벼랑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네가 내 목숨을 구했다
너는 그 사실을 평생 기억하라고 했고
나는 그러겠노라 했다
네가 내 평생이다
AND

밤바다

밤바다를 보며 술을 마신다
한 여인이 모래 사장에 앉아서 하염없이 파도를 맞고 있다
차마 가까이 가지 못하고 여인의 뒤쪽에 자리를 잡았다
파도는 아무것도 기다리지 않는데
여인의 뒷통수는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다
나는 당신을 기다리며
아무것도 기다리지 않는 하늘이며 나무 같은 것들만 생각하고 있다
아무 소용없는 술만 마시고 있다
여인은 몸이 젖고
나는 마음이 젖고
아무리 젖어도 우리는 파도가 될 수 없고
여인은 파도에 휩쓸리고
당신은 내 마음속에 스미고
파도가 지나간 자리에 여인은 사라지고
내 마음속 당신도 사라지고
나는 아무것도 기다리지 않으려고
혼자서 술만 마셨다


AND

가을

가을에 태어났다
가을은 나의 계절이다
저녁마다 귀뚜라미가 울기 시작하면
떠난 당신이 돌아올 것 같고
술도 덜 취하는 것 같다
소주 한 병에도 비틀거리던 내가
댓병 술에 소금 안주로도 멀쩡하다
그래서 이 계절에는
누군가와 술을 마시고 싶다
기왕이면 기분좋게 미녀와 마주 보고 마시고 싶다
세월탓, 세상탓을 하며 술잔을 기울이다가
멀리서 빛이 보이는 시간에 고주망태가 되고 싶다
엉엉 울고 싶다
내 얘기를 가만히 듣기만 하던 미녀가 함께 울어주면 좋겠다
그제서야,
나는 내 탓이라고 다 내 탓이라고 할텐데
거짓말이라고 다 거짓말이라고 할텐데
속도 버리고 나도 버리고 겨울을 맞을텐데
다시는 너를 그리고 나의 계절을
기다리지 않을텐데

AND

풍경

언덕 너머의 풍경을 보고 싶었다
물 한 모금 먹고 싶었지만
걸음을 재촉했다
종아리를 타고 허벅지까지 통증이 올라왔다
고통을 꾹꾹 눌러 참았다
정상에 올랐다
당신이 활짝 웃고 있었다
- 늦었다고, 왜 이제 왔냐고, 오래 기다렸다고
눈물을 머금고 웃고 있었다
- 늦었다고, 미안하다고, 오래 기다렸냐고
정오의 태양 아래 당신을 안았다
당신의 손을 잡고 다음 언덕을 오르기 시작했다
풍경 따위 아무 상관 없었다

-> 짤은 잔대꽃

AND


새벽에 눈을 떴다
머리 위로 선풍기 소리
창 밖에선 매미 울음 소리
다리 끝에선 아내가 이 가는 소리가 들린다
눈앞에 이불 밖으로 나온 아내 발이 보인다
더워서 밤새 뒤척이다 결국 거꾸로 누웠나 보다
두 발을 곱게 포개고 잠들었다
희고 작다
발등에 주름이 늘었다
나와 다른 길을 걸어온 시간이 많은 발
함께 걸은 시간이 따로 걸은 시간보다 많아질 발
못된 나를 참아주는 발
못난 나를 사랑하는 발
손으로 살짝 붙잡고 쓰다듬었다
고슴도치가 몸을 웅크리듯
거북이가 껍질 안에 들어가듯
잽싸게 이불 안으로 들어가는 발
나랑 같은 굳은살이 박힐 발
날 신고 어디든 가도 좋은 발
내가 사랑하는 발

-> 2안


 

새벽에 눈을 떴다
머리 위로 선풍기 소리
창 밖에선 매미 울음 소리
다리 끝에선 아내가 이 가는 소리가 들린다
눈앞에 이불 밖으로 나온 아내 발이 보인다
더워서 밤새 뒤척이다 결국 거꾸로 누웠나 보다
두 발을 곱게 포개고 잠들었다
희고 작다
발등에 주름이 늘었다
나와 다른 길을 걸어온 시간이 많은 발
함께 걸은 시간이 따로 걸은 시간보다 많아질 발
못된 나를 참아주는 발
못난 나를 사랑하는 발
손으로 살짝 붙잡고 쓰다듬었다
놀란 거북이가 껍질 안에 숨듯
잽싸게 이불 안으로 들어가는 발
나랑 같은 굳은살이 박힐 발
함께 어디를 가도 좋은 발
내가 사랑하는 발

AND

한 달 넘게 예초기 돌리고 있다. 어떤날은 시작하기도 전에 힘들고 어떤날은 점심 먹을 때 되면 힘들고 어떤날은 오후에 힘들고 어떤날은 집에 도착하면 녹초가 된다. 결론적으로 힘들다. 힘드니까 집에 오면 술이 땡기고 담배도 많이 피운다. 그러니까 다음날 또 피곤하고 피곤하니까 짜증도 난다. 악순환이다. 나무랑 산, 꽃을 보는 건 좋지만 사람들 보는 건 지겹고 짜증날 때가 많다. 사실 어디서 뭘해도 이 악순환이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가시가 밖힌 원형 바퀴 위를 계속 걷게 해주는 것이 아내다.

어느날 아침에 전날 저녁 먹은 그릇을 씻어 놓고 출근했다가 오후 6시에 집에 돌아와서는 아내가 일어나서 뭔가 차려 먹고 나간 그릇이 싱크대에 있는 걸 보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살아야 사랑도 한다. 그래서 나는 너를 사랑한다. 나는 이렇게 너를 핑계로 살아간다. 그 사실을 아는 것도 사랑이다.

삶과 사랑은 닭과 달걀처럼 누가 먼저인지 모르지만 한 배에서 나왔다. 그래서 둘은 한통속이다. 너랑 나는 한 배에서 나오지 않았는데도 한통속이다. 위험한 한통속이다.

너는 나를 본다.
웃는 나, 찡그린 나,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나.
나는 너를 본다.
웃는 너, 화난 너, 무방비 상태로 잠든 너.
우리는 서로를 본다.
서로를 보는 지금이 사랑이다.

이건 삶은 힘든데
너를 사랑하는 이야기

얼른 겨울이 오면 좋겠다. 몇 번의 겨울이 지나고 계획한 일이 뜻대로 안됐을 때도 나는 여전히 너를 사랑할 것이다. 그러니 얼른 겨울이 오면 좋겠다.

열대야에도 귀뚜라미는 운다. 곧 가을이다.

p.s
- 엊그제 지후가 '포비' 얘기를 했다. 포비가 말 안 들어서 훈련 시킨다고 힘들게 했던 얘기를 했다. 얘기 듣고 잠깐 슬펐는데. 오늘까지 계속 생각난다. 자꾸 슬프다. 뭐든 기르지 말아야겠다. 모든 만남은 헤어져야 하니까. 그건 너로 족하니까. 너는 나에게 독점적이니까.


-> 짤은 나리꽃 피기 전

AND

종말

마지막 별이 졌다
새로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어둠과 어둠과 또 어둠
그 어둠속에서
방향을 잃었다
길을 잃었다
너를 잃었다
나를 놓았다
마지막 별이 지고
모두가 저물었다
AND

그리움 나무

꿈에 그리운 사람이 나타났다
말 없이 씨앗 하나를 건냈다
잠에서 깨서 소리 없이 울었다
손에 그 씨앗이 들려 있었다
집 앞에 심었다
잊고 살다가 어느날 
나무 한 그루를 발견했다
또 잊고 살다가 어느해에 
내 키보다 커진 나무를 보았다
계속 잊고 지내다가 
나무 그늘에 앉아 쉬고 있는 나를 눈치챘다
그렇게 그렇게 살다가
내가 묻힐 나무인 걸 알았다
나도 그리운 사람이 될 것을 알았다


AND

있는 그대로 아름다운 것들 곁에 있고 싶다
하늘
구름
바다
파도
나무
그늘








고,


AND

이름


음식이 아니라 음식점 이름을 먹는다
옷이 아니라 브랜드 이름을 입는다
캐슬이란 이름이 붙은 아파트에 산다
사람들이 그렇게 허명을 먹고 산다
삶이 아니라 이름을 산다
나도 그렇게 살았다
그렇게 살다 네 이름을 알았다
네 이름을 부르면 온몸에 생기가 돈다
네 이름을 부르면 얼굴에 웃음이 번진다
네 이름을 부르면 비로소 내가 내가 된다
니 이름이 아니라
니가 있어서
너를 사랑해서
그래서,
살아간다
이름없이
AND

이웃



주인집 할머니는 돈이 많아서 그런지 사람이 좋고 여유가 있어 보인다
돈이 많아선지 돈을 더 벌려곤지
집 뒤에 셋집을 세 채 더 지었다
우리집은 그 중에 가운데 집이다

주인집 2층 남자는 오래 씻는다
매일밤 11시가 되면 샤워기 물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코도 풀고 가래도 뱉으며 열심히 씻는다
어떤날은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샤워기에서 물 나오는 소리가 계속되면
아내는 가끔 밖에 비가 오냐고 묻는다
나는 아니라고 아직도 모르냐고 면박을 준다
그래 놓고 우리는 마주 보고 웃는다
그 남자는 가끔 중학생 딸을 혼낸다
화가 나서 소리를 지르며 혼낸다
우리는 무서워서 옴짝달싹 못하고
남자의 호통이 그치기를 기다린다

우리 옆집 아저씨는 우리 아버지랑 동갑이다
일거리가 없어서 거의 집에 있다
주말 오후에 마루에 가만히 있으면
아저씨 코 고는 소리가 들린다
어떤날에는 아들 내외가 손주를 데리고 온다
그러면 옆집에서 아기 웃음 소리와 울음 소리, 어른들 웃음 소리가 들린다
손주가 떠난 날 밤에 옆집 아줌마가 아저씨에게 욕을 하면서 소리를 질렀다
똑바로 안하면 이혼이라고 했다
옆집이랑 우리집은 마루가 붙어있다
아줌마의 욕설은 우리집 구석구석까지 퍼진다
며칠후에 아저씨랑 아줌마가 다정하게 손을 잡고 어딘가로 가는 모습을 봤다
그리고 며칠후에 아줌마는 또 소리를 질렀다
나랑 아내는 잠도 자지 못하고 아줌마의 화가 풀리기를 기다렸다

또 다른 옆집 아저씨는 혼자 사는데
어디서 무슨일을 하는지
아주 가끔 집에 온다
밤늦게 술에 취해서 온다
누구랑 같이 온 것도 아닌데
누군가에게 소리를 지른다
몸을 가누기가 힘든지
쿵쿵 벽에 몸을 부딪치는 소리가 들린다
우리는 그 아저씨가 잠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잔다
다음날 아침에 옆집 문에는 자물쇠가 걸려있다

우리는 대체로 조용하지만
가끔 아내가 나에게 화를 낸다
그럴때면 아내보다 이웃들에게 미안하다

우리는 좋은 이웃들과 조용히 산다

AND

수평

바다는 기울지 않는다
바다는 수평이다
삶도 출렁거려봐야 수평이다
AND

35도 씨, 여름

과일가게 수박도 더워 보이는 날
몸이 쉰 옥수수가 되도록 일을 했다
삶이 괴롭고 형편이 좋지 않다고
푸념하는 동료와
개고기 전골을 먹고
호기롭게 계산을 했다
실내 온도 35, 샌드위치 판넬 집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는 아내에게
힘들다고 마음속으로만
괜한 짜증을 부렸다
찬물을 들이 부어도
식지 않는 몸뚱이가 얄밉다
덥다고 저리 떨어지라는 아내에게
미안해서 찍소리도 못하고
등을 돌린채 잠을 청했다
삶이 괴로운 사람들을
나보다 형편이 좋지 않은 사람들을
떠올리기도 전에 잠들었다
AND

8월 1일, 휴가, 강릉, 2015년

퇴근 후에는 더위를 피해 도서관에서 만화책을 읽었다
남들 다 가는 피서 대신 맛있는 거라도 먹자는 아내와
주말 저녁, 동네 식당에서 파스타를 먹었다
계산을 위해 주방에서 나온 남자의 이마에 땀방울이 가득하다
혼자서 장사를 하는 주인 남자가 안타까웠다
힘드시겠어요, 하니
신경 못 써드려 죄송합니다, 한다
선량한 눈을 가진 전라도 사내의 말에서는 선함이 묻어 나온다
초면에 서로 미안한 사이가 됐다
사내는 어쩌다 강릉까지 오게 됐을까
서울에서 나고 자란 나는 또 어쩌다가 강릉까지 왔을까
밥 한 번 사 먹는 일이
보통으로 사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
아무것도 모르는 척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는 세상에게 얼마나 큰 죄인가
보통날이 보통날이 아니다
AND

7월 23일, 휴가, 서울, 2015년

화장실 문을 여니 브람스가 흘러 나온다
양변기에서 엉덩이를 떼자마다 물이 저절로 내려간다
수도꼭지 아래 손을 갖다대니 자동으로 물이 나온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움직이기 시작한 에스칼레이터에선 고무 타는 냄새가 난다
자동의 결정체인 백화점 8층 커피숍에서 커피를 마시며 누군가를 기다렸다
한껏 멋을 부린 결혼 정보 업체 직원이
시골장터에서 노인들에게 약을 팔듯이 순진해 보이는 여자에게
계약서 작성을 유도하고 있다
고무신을 신고 끈적거리는 아스팔트 위를 걸어도
세상에 부끄러울 것 하나 없이 살았다고 생각해도
그렇고 그런 세상에 공범일 뿐이다
이런 생각조차 시끄럽다고 매미가 시끄럽다
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