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위

다른 세계에서 온 종족처럼
약에 취한 사람처럼
비틀비틀 7월의 오후를 걷는다
비현실적인 하늘과 구름
비현실적인 길과 사람들
비현실적인 녹색
비현실적인 몸상태
비현실적인 세계
비현실적인 너
사랑일까, 생각하다 뭉게지는 머릿속
태양 아래 녹아버린 나
너에게 무너져버린 나
비현실적인 나
녹아버린 세계
AND

매미

 

날이 더워야 운다

뜨겁다고 운다

한 번 왔다가 한 번 간다고
그러니 그냥 두라고
울기 위해 태어났다고

오래 기다렸다고
아직 며칠 더 남았다고
살고 싶다고 운다
뜨겁게 운다

AND

균열


너랑 나 사이에는 균열의 씨앗이 있어
그 씨앗이 부풀어 오르고 무럭무럭 자라면 안녕하는거지

너의 눈물로 균열의 씨앗에 싹을 틔워서
거름을 듬뿍 준 땅에 묻고 물을 줬더니
싹이 나왔다
때때로 물을 줬더니 무럭무럭 자라서
어느새 내 키보다 큰 나무가 됐다
나는 나무가 잘 자라도록 근처의 풀을 베줬고
그러다 지치면 나무 그늘에 앉아 쉬었다
열매가 많이 달리라고
해마다 죽은 고양이와 개를 나무 옆에 묻었다
어느해 6월에 보라색 꽃이 피었다
너무 예뻐서 나비들은 길을 잃고
꽃을 본 사람들은 넋을 잃었다
꽃진 자리마다 갈라진 열매가 맺혔다
가을에 새빨갛게 익은 열매를 따다가
장에 나가 팔았다
따내도 따내도 열매는 자꾸자꾸 달렸다
다들 맛있다고 난리였다
사람들이 줄을 서서 열매를 사갔다
나는 먹지 않았다
머지않아 세계가 갈라졌고
나는 균열의 그늘에 앉아서 세상의 균열을 마지막까지 지켰다
AND

인생을 굵게 살면 굵은 똥을 싼다
가늘게 살면 가는 똥을
토끼처럼 순하게 살면 토끼똥을
어설프게 살면 설사를
개똥같이 살면 개똥을
밝은 마음으로 살면 향기로운 똥을
어두운 마음으로 살면 시커멓고 냄새나는 똥을 싼다
간당간당 살면 똥도 간당간당하다
삶이 굵지 않아도 많이 먹으면 굵은똥을
조금 먹으면 가는똥을
풀만 먹으면 초록색똥을
매일 같은 걸 먹는 나와 아내는 같은 냄새가 나는 똥을 싼다

꽃만 먹고 꽃똥을 누고 싶다
많이 먹고 많이 누고 싶다
내 똥 위에 벌들이 다녀가면 좋겠다
그러면 나는 꽃이 되어 피어날텐데
AND

고향

서울시 양천구 신월동 신영시장
인생의 8할을 살아낸 곳
강서구가 양천구가 되고
해마다 어린아이 하나씩 빠지던
똥냄새나는 개천은 메워지고
시장엔 이름이 생겼다
제비가 사람보다 낮게 날아다니던 시장 골목
친구 아버지가 하던 양복점 명동라사
오락실 마치고 친구네 중국집에서 먹었던 짜장면
나랑 생일이 같은 친구가 살던 이불집 2층
함께 세들어 살던 곰보 아줌마네 붕어빵
은영이라는 예쁜 이름을 가진 그 아줌마네 딸
친구들과 어울려 치고 받기도 하던 588 종점

그렇고 그런 세상에
그렇고 그런 나이가 된 친구들 모여
과거와 현재를
누구하나 특별히 다를 것 없는 현실을 마신다
마시고 또 마시면 과거는 되살아 나고 현재는 사라진다
비틀거리며 아버지 주무시는 집으로 돌아가는 이곳이 고향이다
AND

안개

당신에게 가는 길을 알고 있지만
안개속에서 길을 잃고 싶었습니다
삽당령 정상 해발 680미터
버들고개 정상 해발 620미터
강릉시와 정선군의 경계
그 중간 어디쯤에서 길을 잃었습니다
안개 속을 걷고 걷고 또 걷다가
안개가 걷히면 다시 길을 잃은 그 자리이길
다시 안개비 내리면
떠날 수 없는 몸이 안개와 하나 되어 길 위를 떠돌기를
그렇게 밤새 떠돌다가
아침 햇살에 부서져 영영 사라지기를 바랐습니다
당신과 헤어진 경계에서 쭉 머물다가
그렇게 사라지고 싶었습니다
당신에게 가는 길을 알고 있기 때문에
안개속에서 길을 잃었습니다
AND

당신보다 오래
누구보다 오래
무엇보다 오래
지구보다 오래 살고 싶다
사라지지 않은 내가
절멸하는 인류와
식어가는 태양을 지켜보고 싶다
수 억 년 동안을 혼자 지내다가
외롭고 외로워서 흘린 눈물로
우주의 마지막을 적시고 싶다

그때 너에게 돌아가고 싶다

- 네가 죽으면 나는 어떡하지?
- 살아야지
AND

미지의 세계

- 누군가는 계속 살아 왔지만 나는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 곳

- 밍밍한 귤처럼 시지도 달지도 않지만 그런데도 누군가 살고 있는 곳

- 나와 다른 존재가 살고 있는 곳

- 모든 신들이 사라진 곳

- 기대가 없이 살기 위해 미지의 세계로 왔다.

- 마음속엔 어떤 기대가 있지만 겉으론 아무 희망도 없는 척한다

- 내 발이 닿자마자 이 땅에 희망이 넘쳐 흐른다

- 나는 낯선 이방인

- 그곳에 모험은 없네 다만 낯선 바람이 불고 날선 비명 소리가 들린다

- 희망을 찾다가 너를 만났네. 너는 미지의 세계

- 오직 너만이 존재하는 세계

- 남국의 바닷가도 남극의 얼음벌판도 아닌 미지의 세계

- 새로운 곳에선 뭔가 다를 줄 알았지만 절망의 반대편에 도 다른 절망이 있었네

- 보통으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또 그것이 얼마나 큰 죄인가.


미지의 세계


남국의 바닷가도 아니고
남극의 얼음 위도 아니다
나와 다른 존재가 살고 있는 곳
누군가는 계속 살아 왔지만
누구도 알지 못하는 곳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한 곳
모든 신들이 사라진 곳
시지도 달지도 않은 밍밍한 귤처럼
아무런 기대 없이 여기에 있고 싶다
이곳에선 낯선 바람만이 불고
간간히 날선 비명 소리가 들린다
나는 낯선 이방인이다
마음속에 희망을 버리지 못한 죄로
이곳에서 너를 다시 만났다
너는 여전히 나와 다른 種族
너는 미지의 세계
오직 너만이 존재하는 세계
절망의 반대편에 있는 또 다른 절망
나는 미지의 세계
오직 나만이 존재하는 세계

-> 완결성이 약함

AND

태풍 후


바람의 흔적만 남은 길을 새기고
그 길의 끝에서 춤추는 바다를
그 바다의 끝에 드리운 구름을 새겼다

구름을 따라 가다가
구름에 잠긴 산을 새기고
그 안에 자작나무 한 그루를 새겼다

나무 그늘에 앉아 담배를 피우다가
담배 연기와 연기를 피해 달아나는 나비를
나비가 내려 앉은 들꽃 한 송이를
옅은 공기와 꽃잎의 떨림을 새겼다

온종일, 빈 가슴에
너만 새기고 다녔다

모든 흔적 지워진 날
너만 지우지 못했다
AND

 백두대간 어느 자락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다. 소나무 묘목을 심었고, 70년대에 심은 소나무와 잣나무에 벌레약을 쳤다. 요즘은 올해 나무 심은 자리와 이미 나무가 심겨진 자리에 풀을 베고 있다. 하루에 일곱 타임까지는 괜찮은데, 여덟 타임 돌리고 나면 집에 와서 많이 힘들다. 이게 일당 7만원 짜리가 아닌데, 라고 생각하니 더 그렇다. 작은 조직이지만 지소장과 사무실 직원들, 나같은 일용직들 사이에 여러가지 이해관계가 많이 얽혀있다. 이 거미줄은 일용직 10명의 관계에도 적용된다. 이런게 눈에 보이면 피곤한 법이다.


 농산물 품질 관리사 1차 시험에 합격했다. 시험이 1년에 한 번 뿐인데 2차 시험 접수 일자 마지막날 접수하러 들어갔다가 접수 마감 시간이 지나서 접수하지 못했다. 3년전부터 갖고 싶었던 자격증인데, 일이 더럽게 꼬였다. 내 탓인데, 내 탓이 아니라 남 탓이고 세상 탓인 것 같다. 며칠 지나면 괜찮아지겠지.

 

 동갑인 동료 하나가 메르스 자가 격리 대상자임을 속이고 며칠 동안 출근했다가 들켰다. 회사랑 동료들은 그 사실을 모른다. 산에서 일하던 중에 보건소 직원에게 밭에 있다고 거짓말을 하고 - 내가 다 듣고 있었는데 - 나한테는 아이가 열이 많이 나서 집에 빨리 가야겠다고 집에 좀 태워 달라고 했다. 인간이 아무리 무지하더라도 이럴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 친구의 일당 6만 2천원 때문에 동료들이 다 사지로 갈 수도 있었던 사건이다. 이 친구는 할머니가 돌아가시던 날에도 -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셔서 할머니가 이 친구를 키웠다고 한다. 그날 아침에 병원에 가셨다. - 퇴근 후 그 친구 집 앞에서 헤어지면서 내게 담배 몇 개피를 얻어갔다. 당시에 인간이란 어쩔 수 없는 것인가, 생각했었다. 자신의 관리 소홀을 쉬쉬 넘어가려고 하는 보건소 직원의 태도, 별일 없을 것 같으니 그냥 넘어 가자고 했던 사무실 직원, 결국 계속 이 친구랑 함께 일하고 있는 내 모습이 나라 돌아가는 꼴이랑 크개 다르지 않다. 역시, 인간이란 어쩔 수 없는 것인가, 생각한다.

 거짓말을 많이 하는 이 친구를 멀리하고 있다.  

 '스쳐가는 인연은 무심코 지나쳐라.' 법정 스님의 말이다. '스쳐가지 않는 인연도 있는가' 내 대답이다. 무심코 살아가기가 쉽지 않으니 이런 말이 나왔으리라.

 

 컴퓨터 앞에 앉아서 글을 쓰고, 휴대전화를 들여다본다. 수입 식재료를 구입하고, 외식을 한다. 자동차를 타고, 기름 보일러를 돌린다. 추운날에는 따뜻한 물로 씻고, 어떤날은 생수를 사 먹는다. 페이스 북에 좋아요가 많으면 기분이 좋고, 어느 일요일 아침에는 흰 쌀밥에 스팸을 구워 먹고 행복했다.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위하지 않는 세상(정치)을 내가 욕할 자격이 있을까? 

 나이 40이 가까운 지금

 그렇고 그런 세상에 공범이 되었다.

 무심한 듯 외면하자. 무심코 지나치듯 살자

 

 볼음도에서는 망고가 위로가 됐고 요즘은 나무를 보는 게 위로가 된다.

AND

복숭아를 먹다

엄마 생각이 나면
바닷가에 가서 복숭아를 먹는다
복숭아 태몽을 꾼 엄마
물놀이를 마친 내게 복숭아를 건넸던 엄마
크게 한 입 깨물면 물큰 흐르는 과즙이 엄마 젖인 것 같다
사슴벌레가 복숭아 먹듯
나는 엄마를 먹고 자랐다
벌레 먹은 복숭아가 못쓰게 되듯이
엄마는 병들었다
복숭아는 흐르는 과일
흐르는 것은 눈물
엄마가 흘러간 삶을 따라 눈물이 흐른다
먼 데 있는 엄마
보고 싶은 엄마
자꾸 생각나는 엄마


AND

구원


저녁을 먹고 누웠다
눈을 감으니 십자가가 반짝인다
다시 태어나기 싫어서
교회는 다니지 않는데
나에게 구원이 내리는 걸까
오늘 잘못한 일들을 벌하려는 걸까
새벽에 나가서 일당 7만 원 짜리 풀베기 한 것이 죄인가
풀들에게 사죄해야 하나
일이 힘들어서 담배를 많이 피웠다
내 마음대로 담배도 못 피우나
퇴근길에 혼잣말로 앞차 운전자를 욕했다
저녁 뉴스를 보다가 대통령을 욕했다
듣지 못하는 사람에게 욕도 못하나
생각하는데
십자가에 메시아의 그림자가 겹친다
아내가 눈을 뜨라고 한다
형광등이 십자가 모양이다
방에 누워서 아내에게 구원 받았다

AND

악몽 4


눈을 감고 있어도 안다

얼굴이 없는 존재가
내 입을 벌리고 가윗날을 갈고 있다
내 가슴위에 양반 다리를 하고 앉아 있다
히죽거리며 무쇠 가위를 갈고 있다
침이 고인다
쇳물이 고인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라도 된 거 같은 기분이다
구원자가 말한다
철은 드는 게 아니라 먹는거다

쇳물을 삼키고
철도 못든채 잠에서 깼다
AND

새벽 네 시, 편의점

허우대가 멀쩡한 청년이 편의점 앞에서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고 두리번 거린다
너도 오늘 헤어졌구나
너는 젊고 허우대라도 멀쩡하지
입술 앞에까지 튀어 나왔던 말을 삼켰다
그 친구 옆에 주저 앉아 울어버렸다
계산대에 술병을 올렸다
마스크를 쓴 알바생이 반사적으로 디스에 손을 뻗길래
까멜을 달라고 했다
메르스에라도 걸려 버릴까
이름도 모르는 그녀와 나를 이어주던 실타래가 한 순간에 끊어졌다
어차피 오늘은 끊어진 날이다
모든 만남은 헤어져야 한다
허나, 그것이
모든 생에 끝이 있기 때문은 아니다
하여, 이별은 결코 끝이 아니다
허나, 오늘까지는
아니, 언제까지는
오늘의 이별을 끝으로 하자
그리고 살아가자
그래도 살아가자
AND

들꽃

 

꽃을 피우기 전까지
아무도 나에 대해 알려하지 않았다
누가 내 이름을 물으면...
그냥 풀이라 했다
잡초라 했다

꽃을 피우고 나서도
몇 번의 눈길만 받았다
누가 내 이름을 물으면
모른다고 했다
쓸모 없는 꽃이라 했다

허나, 나는 내 우주를 살았고
이 우주를 이어갈 꽃을 피웠다

AND

해바라기

 

향기 없는 꽃이 교차로에서 냄새를 맡는다
꿈의 경계에서 헤어진
연인의 냄새를 찾아 나섰다
잘려나간 풀냄새를 따라 북쪽으로 걸었다
해바라기 모양의 간판을 단 선술집을 만났다
여주인이 테이블에 꽃안주를 내밀었다
- 당신, 해바라기 향기가 나네요
- 그게 제 이름인가요? 해바라기도 향기가 있나요?
여주인이 꽃술을 잔에 따랐다
- 향기 없는 꽃이 있나요?
- 저는 향기를 잃었어요
향기 없는 꽃이 술을 마셨다
- 제가 당신의 향기를 맡았으니 이제부터 당신은 저의 꽃이에요
- 아니오. 저는 다시 길을 떠나야만 해요
- 그렇다면 해를 따라 걸으세요
향기 없는 꽃은 해를 따라 걸었다
해바라기 향기에 대해서 생각했다
해가 그날의 마지막 빛을 길의 끝에 머금었다
그곳에서 여주인을 다시 만났다
웃고 있는 여인에게서 헤어진 연인의 냄새가 났다
해바라기 향기가 났다
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