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 루덴스

세상을 끝장낼 것 같은 바람이 불어도
질 때가 되지 않은 꽃은 떨어지지 않는다
오직 인간만이 꽃을 꺾는다
AND

이유

너는 이유를 묻지 않았다

툭하면 넘어지는 너 때문에
네 발만 보며 걸었다
혹시 네가 이유를 물으면
네 발이 너무 예뻐서, 라고
고개를 숙인 채 얼굴을 붉히며 답하려고 했다
그 마음이 거짓은 아니었지만 진심도 아니었다

그래서였을까

나도 이유를 묻지 않았다
네 뒷모습을 똑바로 보지 않았다
슬픔이 꽃잎으로 떨어지는 계절에
후두둑후두둑 부서지는 날에
이유를 묻지 않은 이유로
봄날 민들레 들여다보듯
땅만 들여다보고 산다

꽃 진 자리 언제나 참혹하다
AND

선거는 제도고 투표는 행위인데, 두 가지를 헷갈리는 사람들이 많다. 틀리다와 다르다를 헷갈리는 것과 같다.

암튼 총선이 끝났다. 유권자 열 명 중에 네 명은 투표를 하지 않았고 제 1야당이 여당보다 많은 의석을 얻었다. 찰스네 당은 호남에서 예전 김종필의 자민련이 충청도에서 가졌던 지위를 획득했다.

억지로라도 다 같이 모여서 으쌰으쌰 했고 그것이 경제 발전에 이바지 했다고 믿는 새마을 운동 세대들의 판타지는 이번 총선으로 끝난 느낌이다. 시간도 많이 흘렀고 먹고 살기가 그만큼 팍팍한거라고 본다.

선거는 제도의 허점과 단점을 떠나서 국민들이 뭔가를 보여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정치 행위다.

호남이랑 안산, 경주의 선거 결과는 이해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데, 강원도는 답 없다.

나는 강원도에 살면서 새누리를 찍었을지도 모르는 사람들과 종편만 보는 사람들과 항상 부대끼며 같이 울고 웃기도 하며 살아간다.

오늘은 13명이 함께 나무 750그루를 심었다. 잘난놈, 못난놈이 있는 게 아니라 이런놈, 저런놈이 있다.

나이 먹으면서는 내가 어떤놈인지 고민하며 살질 않는다. 남들한테는 이런놈 저런놈이더라도 내가 어떤놈인진 알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다.

강원도 답 없다고 적었지만 총산 결과는 내가 모르는 수 많은 일들이 쌓이고 쌓인 결과일테니, 나도 남이 모르는 수 많은 일들을 쌓아가고 있을테니 그저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

그래도 어디가서 '선거했냐?' 고 묻지는 말자.
AND

소주

우리의 이 지난한 가난에
먹는 걸 빼면 남는 게 없어서
저녁 먹고 산책을 나갔다가
떡볶이 1인분 순대 1인분을 먹었다
술이 빠지면 가난이 슬퍼해서
소주도 한 병씩 마셨다
몸이 얼큰해지니 마음이 따라와서
한 병씩 더 마셨다
포장마차 주인이 그만 마시라고 해서
일단 밖으로 나왔다
안이나 밖이나 가난은 변함 없고
우리의 이 지난한 마음에
술을 빼면 남는 게 없어서
우동 국물에 한 병씩 더 마셨다
뗄 거리가 없어도 한 잔 마시니 기분이 좋다
내일을 어찌 넘길지 몰라도
우릴 보고 웃는 달을 보니 기분이 좋다
우리의 이 지난한 가난에도
소주에 취한 기분이 좋다
AND

노화


나이 마흔이면
노화를 말하는 게 농담이 아니다

왼손에 칫솔 오른손에 치약을 들고
칫솔이 안 보인다고 화를 낸다

매년 보는 꽃 이름이 생각나지 않고
매일 보는 나무 이름을 더듬는다

네 시 방향으로 가라는데 좌회전을 하고
없다를 엇ㅂ다로 쓴다

밥 먹을 때 자꾸 입가에 국물을 흘리고
어디 앉았다 일어날 때 신음 소리를 낸다

모든 것을 다 잊고 내 마음까지 잃어도
당신이 나를 잊어도 너만은 잊지 않으려고

틈날 때마다 허공에 네 얼굴을 그린다
그리고 그 옆에 네 이름을 적는다
AND

첫사랑


방에 떨어진 머리카락과 먼지를 모아서 담뱃불에 지지며 단백질 타는 구수한 냄새를 맡던 중에
그녀에게 만나자는 연락이 와서 나가려고 급하게 양치질을 하는데
똥이 마려워서 칫솔을 물고 변기에 앉아 빤스에 붙은 털을 보다가
휴지가 없는 걸 알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휴지를 가져 왔던 날
그녀와 밥을 먹다가 어설프게 잠깐만, 말하고 화장실에 가서 바지 자크를 내리려는데 이미 자크가 내려가 있던 날

그녀의 손이 내 손에 포개졌고
내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닿았다
AND

간격


너와 나 사이에 존재하는 약간의 틈
그곳을 지나는 공기의 공기 흐름
붙잡지도 않고 밀어내지도 않는 힘
뱃속 가장 깊은 곳은 보여주지 않는 일
사랑이라는 말로 선을 긋고
서로를 완전히 드러내지 않는 것
살을 맞댄 두 몸뚱이 사이를
땀이 되어 미끄러지는 이질감
AND

이기심

사랑이라는 말 앞에
너, 당신, 그대 중에
어떤 말이 좋을까
종일 그 생각만 하다가
결국,
내 이름을 적어 넣는다
AND

봄 바람

바람은 쾌활하고
아가씨들 치마는
벌렁벌렁 들린다
두 눈 시퍼렇게 뜨고도
봄에 당하기만 한다

AND

부수다


눈앞에 벚꽃 날리고
눈 감으면 그때가 떠오른다
우리만 아는 벚나무를 찾아가
손에 닿지 않는 꽃을 움켜쥐려
네 어깨 위에 올라타고서
타오르며 피어오르던 꽃
내 손으로 부수었다
그리고 여름이 오기 전에
내 욕심이 너를 부수었다
봄은 짧구나
계절 중에 봄만 홀로 외자로구나
눈앞에 벚꽃 부서지고
눈 감으면 그대가 떠오른다

AND

네 마음

아픈 너를 집에 두고
퇴근 후 친구를 만났다
미안한 마음에 급하게 술을 마셨다
술 잔에 네 얼굴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게 미안해서 더 빨리 마셨다
집에 가는 길에는
다른 여자에게 전화를 해서 네 얘기를 했다
미안한 마음에 아이스크림을 사갔다
같이 먹으면서 슬쩍 네 얼굴을 봤다
아이스크림을 뜨는 네 작은 손을 보면서
다 미안하다고 했다
웃으면서 괜찮다고 하는 너를 보고서야
내 마음이 웃는다

세상에 유일하게 너보다 예쁜 게
너보다 예쁜 네 마음
AND

축제의 밤


개나리는 노란색
진달래는 분홍색
봄은 무슨색일까

벚꽃 축제에 와서
사람에 밀려다니며
당신을 사랑한다

둘만 남은 새벽 거리에서
내 가슴에 얼굴을 묻은 당신
당신을 휘감은 내 두 팔

꽃잎은 내 마음처럼 두둥실
당신 머리 위에 올라 앉고
꽃향기에 취해 이대로 이대로

아, 봄이로구나
내 마음 발가벗기는
새하얀 봄이로구나
AND

지금

이제와 얘기지만
너를 사랑하는 게
지금이라서 좋다
전에도 사랑을 말했지만
지금 내 모습이 좋고
지금 네 모습을 사랑한다
너를 가장 사랑하는 건
언제나 지금이다
AND

감자

산수유 꽃 어지간히 피었다
닭똥 거름 넣은 밭에
감자를 심는다
왠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고
감자를 캘 때 주렁주렁 매달려 있을
당신 얼굴이 떠오르고
너를 곱게 일구리라 다짐한다
닭똥같은 내 눈물도 거름이 될까

봄은 허투르구나,
마음엔 벌써 감자꽃이 피었다
AND

분산된 애정

여름이면 그늘을 찾고
겨울에는 양지를 찾는다
몸도 하나 마음도 하나라
몸은 그녀를 갈구하고
마음은 너를 향한다
바람이 우리를 향하고 있는데
그녀는 왜 우나
햇살이 너를 향하고 있는데
너는 왜 나를 등지나
기울어지는 내 몸은
나에게로만 나에게로만
쓰러지는 내 맘도
나에게로만 나에게로만
AND

껍데기

금강불괴도 나이를 먹고
꽃은 때 되면 일제히 피고 진다
달도 차면 기운다는데
수박을 먹어도 껍데기만 남기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고
피어나지도 기울지도 못하는
껍데기로만 산다
땅구덩이를 파서 나무라도 심으면
어딘가 채워질까
그 나무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으면
그 열매에서 떨어진 씨앗이 대를 이으면
나도 원없이 기울 수 있을까
봄날 땅구덩이를 파며
어둠뿐인 터널을 통과하고 있다
AND

우리


나는 네 옆에 있고
너는 내 옆에 있고
나는 너를 안아주고
너는 나를 안아주고
나는 너를 위해주고
너는 나를 위해주고
나는 너를 지켜주고
너는 나를 지켜주고
나는 너 때문에 웃고
너는 나 때문에 웃고
나는 널 위해 울고
너는 날 위해 울고
나는 네 눈물 닦아주고
너는 내 눈물 닦아주고
나는 너로 인해 살고
너는 나로 인해 살고
나는 너
너는 나
이것이
우리

AND

볼음도에 있을 때 이런 생각을 했다.

동네 산에 영지버섯이 있는 이유는 동네분들이 예전에 영지버섯을 재배했었기 때문이다. 산삼이 있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척박하다면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 가기 위해서 위해서 할머니 할아버지 아저씨 아줌마 형님 형수님들이 행한 어떤 노력들이 세월과 함께 쌓였고 갑자기 외지에서 들어온 나는 그 노력 위에 숟가락을 얹는 느낌이다. 하지만 나의 노력도 그렇게 쌓여가겠지. 대를 이어 살아간다는 게 이런거겠지.

강릉 와서는 이런 느낌이 약하다. 여전히 누군가와 함께 서로의 노력에 기대서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구체적으로 와닿질 않는다. 농사를 짓지 않는 탓이 가장 클까? 요즘 농사는 그렇지 않지만 농사란 건 씨앗을 받아서 대를 잇는 일의 반복이다. 그 반복을 통해서 세상을 보는 눈이 넓어지고 속이 깊어진다. 단, 살아 가기 위해서 아둥바둥 농사 지어서는 그러기 어렵다고 본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어떻게 할지 알면서도 자꾸 묻는다.

볼음도에서는 집안에 항상 고양이 망고가 있고 집 밖에서는 강아지 포비가 나를 볼 때마다 펄쩍펄쩍 뛰었다.

그때 생각이 나네. 얼마전 일인데도 아주 오래전 일처럼 느껴진다.
AND

젓가락질

나는 젓가락질을 예쁘게 잘 한다
왼손 오른손 다 잘한다
그런데 나는 집도 없고 땅도 없다
세상에 가치 있는 건 쥐뿔도 못 가졌다

주인집 아줌마는 집도 땅도 돈도 있다
외출할 때는 라이방을 걸치고 멋을 부린다

아줌마는 가끔 나랑 술을 마신다
몇 잔 먹다보면 오빠 생각이 난다면서
아들뻘인 나를 부둥켜 안고 운다
그런 아줌마의 젓가락질은 보기 안쓰럽다

겨울 지나 봄이 와도
내 젓가락질은 여전히 예쁘고
아줌마도 여전히 잘 운다

세상 참 공평하다
AND

귀욤새와 독버드


넌 나의 보살
술 먹고 핸드폰 잃어버린 나를 참아준다

넌 나의 2단 추진체
난 너만 있으면 태평양을 건너 아메리카 대륙까지도 단 번에 간다

넌 나의 귀여운 작은새
제이 지 와이프는 비욘세 내 색시는 귀욤새

나는 너의 독버드
네 말이라곤 죽어도 안 듣고
말로만 글로만 사랑한다고 한다
다만 널 위해서라면 개도 되고 새도 된다

그런데 말이지,

나는 너를 보고 자는 데 너는 벽을 보고 잔다
내가 보고 싶다고 하면 사는 게 걱정이라고 한다
바쁜 일 없을 때만 가끔 내가 보고 싶다고 한다
너에게 부탁을 하는 나에게 넌 명령을 한다

그래도 말이지,

넌 나의 귀욤새
난 너의 독버드

AND

시와 당신


詩보다 봄이 좋다
이런, 시봄

詩보다 밥이 좋다
이런, 시밥

詩보다 좋은 게 암만 많아도
전부 다 시시하기만 하고

세상에서 당신이 제일 좋다
AND

겨우살이

참나무 이파리 모두 떨어진 계절에
나무 꼭대기에 붙은 겨우살이를 본다
겨울에만 겨우 모습을 드러내는 겨우살이는
겨우겨우 살아가는 지금 내 모습을 닮았다
나무에 매달려 홀로 푸른 모양새가
엄마한테 달라붙어 살던 내 어린날을 닮았다
암에 걸린 우리 엄마 물 끓여 먹이려고
기어이 나무에 올라서 가지를 잘라낸다
겨우라도 좋으니 죽지 말라고
이번 겨울은 넘겨야 한다고
그래야 당신도 살고 나도 산다고
나를 닮은 겨우살이를 땄다
AND

옆집 아줌마


새벽에 잠이 깼다
샌드위치 판넬을 통과하는 옆집 아줌마 목소리

야, 이 씨발새끼야. 나이를 육십을 넘게 처먹었으면 인간답게 좀 살아.
응? 육실할 놈의 개새끼야.

뭐라 변명을 늘어놓는 아저씨는
우리 아버지랑 동갑

개새끼랑 웅얼웅얼의 반복
나와 아내는 어느틈에 다시 잠이 들었다

밤새 고함을 지른 아줌마는
아침에야 잠이 들었을까

곤히 잠든 아내를 보다가
다녀올게요, 이마에 입을 맞추고

옆집 세탁기 소리에 맞춰
칫솔질을 하고 집을 나서는데

옆집 아줌마랑 딱 마주쳤다
안녕하세요, 웃는다

고개도 끄덕이지 않고
휙, 나를 지나치는 아줌마

주인집 마당엔 매화가 피었고
나는 봄날 찬바람을 맞았다


AND

그림


곧 사라질 구름 위에
네 이름을 그린다

바람이 지나간 자리마다
네 얼굴을 그린다

그러고도 그리워서
자꾸만 너를 그린다

그려도 그려도 그립고 그리워서
텅빈 내 그림자를 너로만 채운다
AND

장기이식

사채빚을 못 갚았다
목에 칼이 들어오고서야
간을 반 정도 잘라내도
죽음은 멀리 있다는 걸
신장이 콩팥이고
두 개씩 있다는 걸 알았다
영화에서만 보던
장기 이식을 마치고
담배 연기는 근심을 날린다
토끼 간을 구워 먹으면
간이 빨리 회복될까
빚 청산하고 남은 돈으로
분식집에서 순대를 시킨다
아줌마, 간 많이 주세요.
AND

이사

벌판을 나와 바다를 건너
벌판을 지나 고개를 넘어
또 다른 벌판으로 가네
눈치를 보며 힐끔힐끔 내리던 눈이
대관령 고개를 넘자마자
뚜벅뚜벅 비가 되었네
강릉 사람이 되었네
AND

보살집


태어난 날과 시간을 읊조리는
보살님의 그윽한 눈동자

제 꿈을 당신께 맡기겠습니다
제 미래를 님에게 사겠습니다

두려움의 반대편에서
온화한 낙관을 제게 주세요

어쩌면 좋을지 알지만
어쩌면 좋냐고 묻고
어쩌란 대답을 듣는다

5만 원 어치 희망을 품고
보살님을 뒤로한다
AND

불온 3

권태기에 찾아온 손님과
세계관을 협상한다
당신은 관상용이 아니라
품어야 하는 사람
그래야 내가 사는 사람
그렇게 일단락 지어지는 사람
물에 들어가 욕심을 씻어내고
숨이 넘어갈 듯 웃는 여자를 안는다
만신창이로 집에 가는 길
세상에서 가장 예쁜 사람에게 따 주려고
눈에 담아둔 별이 보이지 않는다
오늘을 무사히 마쳤으니
메주 같은 발로 걷고 뛰며
하루하루를 갉아 먹는 삶을
내일도 살아야지
내 집 같은 아내와
함께 살아야지
AND

블루스와 부르쓰


4분의 4박자
12마디 블루스
둥~두 둥~두
둥~두 둥~두
셔플리듬이 영혼을 깨운다
쇳덩이에 발목을 묶인
흑인 노예들의 한과
고향 잃은 설움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 완성한
라큰롤의 뿌리

리듬도 박자도 중요치 않아
시작은 있지만 끝은 없다
처음 만난 사람을 부둥켜 안고
싸구려 색소폰 소리에 흐느껴 무너지는
무너지고 부서져도 다시 일어서는
서럽고 서글퍼도 계속 살아가는
무정 부르쓰, 추억의 부르쓰, 황혼의 부르쓰
블루스도 부르스도 아닌
남조선 부르쓰


AND

다이어트

한 해 두 해 지나갈 수록
하나씩 하나씩 쓰면 쓸 수록
조금씩 조금씩 몸이 커진다

지방이 잔뜩 낀 생각과 글에 지친다
가녀리고 푸석푸석하지만
기름기 없이도 맛깔나는 문장을 쓰는
낭창낭창한 사람이고 싶다

탐욕으로 번들거리는 사랑이 아니라
수수하지만 스스로 빛나는 사랑을 하고 싶다

내 멋대로 살 건데
멋이 없으면 말짱 도루묵이라
스스로가 납득할 수 있는 사람
세상에게 지지 않는 사람이 되려고

요즘 나 소식하잖아
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