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흔적만 남은 길을 새기고
그 길의 끝에서 춤추는 바다를
그 바다의 끝에 드리운 구름을 새겼다
구름을 따라 가다가
구름에 잠긴 산을 새기고
그 안에 자작나무 한 그루를 새겼다
나무 그늘에 앉아 담배를 피우다가
담배 연기와 연기를 피해 달아나는 나비를
나비가 내려 앉은 들꽃 한 송이를
옅은 공기와 꽃잎의 떨림을 새겼다
온종일, 빈 가슴에
너만 새기고 다녔다
모든 흔적 지워진 날
너만 지우지 못했다
백두대간 어느 자락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다. 소나무 묘목을 심었고, 70년대에 심은 소나무와 잣나무에 벌레약을 쳤다. 요즘은 올해 나무 심은 자리와 이미 나무가 심겨진 자리에 풀을 베고 있다. 하루에 일곱 타임까지는 괜찮은데, 여덟 타임 돌리고 나면 집에 와서 많이 힘들다. 이게 일당 7만원 짜리가 아닌데, 라고 생각하니 더 그렇다. 작은 조직이지만 지소장과 사무실 직원들, 나같은 일용직들 사이에 여러가지 이해관계가 많이 얽혀있다. 이 거미줄은 일용직 10명의 관계에도 적용된다. 이런게 눈에 보이면 피곤한 법이다.
농산물 품질 관리사 1차 시험에 합격했다. 시험이 1년에 한 번 뿐인데 2차 시험 접수 일자 마지막날 접수하러 들어갔다가 접수 마감 시간이 지나서 접수하지 못했다. 3년전부터 갖고 싶었던 자격증인데, 일이 더럽게 꼬였다. 내 탓인데, 내 탓이 아니라 남 탓이고 세상 탓인 것 같다. 며칠 지나면 괜찮아지겠지.
동갑인 동료 하나가 메르스 자가 격리 대상자임을 속이고 며칠 동안 출근했다가 들켰다. 회사랑 동료들은 그 사실을 모른다. 산에서 일하던 중에 보건소 직원에게 밭에 있다고 거짓말을 하고 - 내가 다 듣고 있었는데 - 나한테는 아이가 열이 많이 나서 집에 빨리 가야겠다고 집에 좀 태워 달라고 했다. 인간이 아무리 무지하더라도 이럴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 친구의 일당 6만 2천원 때문에 동료들이 다 사지로 갈 수도 있었던 사건이다. 이 친구는 할머니가 돌아가시던 날에도 -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셔서 할머니가 이 친구를 키웠다고 한다. 그날 아침에 병원에 가셨다. - 퇴근 후 그 친구 집 앞에서 헤어지면서 내게 담배 몇 개피를 얻어갔다. 당시에 인간이란 어쩔 수 없는 것인가, 생각했었다. 자신의 관리 소홀을 쉬쉬 넘어가려고 하는 보건소 직원의 태도, 별일 없을 것 같으니 그냥 넘어 가자고 했던 사무실 직원, 결국 계속 이 친구랑 함께 일하고 있는 내 모습이 나라 돌아가는 꼴이랑 크개 다르지 않다. 역시, 인간이란 어쩔 수 없는 것인가, 생각한다.
거짓말을 많이 하는 이 친구를 멀리하고 있다.
'스쳐가는 인연은 무심코 지나쳐라.' 법정 스님의 말이다. '스쳐가지 않는 인연도 있는가' 내 대답이다. 무심코 살아가기가 쉽지 않으니 이런 말이 나왔으리라.
컴퓨터 앞에 앉아서 글을 쓰고, 휴대전화를 들여다본다. 수입 식재료를 구입하고, 외식을 한다. 자동차를 타고, 기름 보일러를 돌린다. 추운날에는 따뜻한 물로 씻고, 어떤날은 생수를 사 먹는다. 페이스 북에 좋아요가 많으면 기분이 좋고, 어느 일요일 아침에는 흰 쌀밥에 스팸을 구워 먹고 행복했다.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위하지 않는 세상(정치)을 내가 욕할 자격이 있을까?
나이 40이 가까운 지금
그렇고 그런 세상에 공범이 되었다.
무심한 듯 외면하자. 무심코 지나치듯 살자
볼음도에서는 망고가 위로가 됐고 요즘은 나무를 보는 게 위로가 된다.
구원
저녁을 먹고 누웠다
눈을 감으니 십자가가 반짝인다
다시 태어나기 싫어서
교회는 다니지 않는데
나에게 구원이 내리는 걸까
오늘 잘못한 일들을 벌하려는 걸까
새벽에 나가서 일당 7만 원 짜리 풀베기 한 것이 죄인가
풀들에게 사죄해야 하나
일이 힘들어서 담배를 많이 피웠다
내 마음대로 담배도 못 피우나
퇴근길에 혼잣말로 앞차 운전자를 욕했다
저녁 뉴스를 보다가 대통령을 욕했다
듣지 못하는 사람에게 욕도 못하나
생각하는데
십자가에 메시아의 그림자가 겹친다
아내가 눈을 뜨라고 한다
형광등이 십자가 모양이다
방에 누워서 아내에게 구원 받았다
들꽃
꽃을 피우기 전까지
아무도 나에 대해 알려하지 않았다
누가 내 이름을 물으면...
그냥 풀이라 했다
잡초라 했다
꽃을 피우고 나서도
몇 번의 눈길만 받았다
누가 내 이름을 물으면
모른다고 했다
쓸모 없는 꽃이라 했다
허나, 나는 내 우주를 살았고
이 우주를 이어갈 꽃을 피웠다
향기 없는 꽃이 교차로에서 냄새를 맡는다
벌의 노래
하품을 하는데 입 안에 벌이 들어왔다
얼른 입을 닫았다
입 안에서 벌이 춤을 췄다
그 소리가 몸 전체에 울렸다
몸이 저절로 춤을 췄다
혀를 말았더니
놈이 혀 끝을 쐈다
아파서 이를 앙시물었다
찍, 소리가 났다
씹어 삼켰다
쏘인 혀가 놈의 날개와 몸과 눈과 꼬리를 느꼈다
어쩐지 단 맛이 났다
혀가 붇기 시작하고
갑자기 저절로 노래가 나왔다
온몸을 떨며 노래를 불렀다
부은 혀가 입을 틀어 막았는데도
계속해서 달콤한 노래가 나왔다
붕붕붕 붕붕붕
내 주위로 몰려든 벌들이 춤을 췄다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주사를 놔줬다
붓기가 가라앉고 노래가 멈췄다
벌들은 떠나고
쓸쓸한 바람이 불었다
다시는 노래를 할 수 없었다
1밀리 차이로 괜찮아가 쇈찮아가 된다
빈 가게
사랑하는 당신,
비 오는 날에 빈 가게에서 만나요
다방 외상값은 기름 종이에 적어두고
비 오는 날은 빈 가게에서 만나라잖아요
그래서 우리는 텅 빈 가게에서 만납니다
우리는 빈 가게에서 사랑을 합니다
사랑은 공허하기 때문이에요
우리는 부둥켜안고 먼지투성이의 바닥을 뒹굽니다
서로의 뼈와 살을 탐합니다
주인도 없고 물건도 없는 그곳에선
텅 빈 진열대만이 우리를 훔쳐 볼 거예요
그 시선이 부끄럽다면 부끄럽지만 그렇게 부끄러울 것도 없어요
모든 열기를 뿜어내고서
우리는 서로의 몸에 붙은 먼지를 털어주면서 웃습니다
그리곤 입을 맞춥니다
사랑의 기쁨이 텅 빈 가게를 가득 채울거예요
그리고 우리는 주인 없는 카운터에 빈손을 내밀고 가게를 나옵니다
우리는 뼈다귀 해장국도 먹지 않고 헤어집니다
어차피 지금 내리는 비가 우리의 끈적함을 씻어낼 것을 알기 때문이에요
먹어도 먹어도 생도 사랑도 공허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에요
비 오는 날의 빈 가게는 그런것이기 때문이에요
내 사랑,
우리 비 오는 날에 빈 가게에서 만나요
다음에도 그 다음에도요
큰 형이 교통사고로 죽자
어머니는 홧병으로 죽었다
둘째 형은 자살을 하고
얼마 후 아버지는 암에 걸려 죽었다.
죽은 신들이, 살아있는 나를 내려다 보았고
나는 꿈에서 관을 짰다
누군가, 관을 짜는 꿈은 집을 사는 꿈이라고 했다
그래서 빚을 내서 다 같이 살 던 집을 샀다
점심을 먹다가 식사예절 타령을 하는 동료에게 욕설을 퍼붓고 집에 왔다
일용직 처지에 대출 이자 내기도 빠듯하니 내일 또 그 인간의 얼굴을 봐야한다
셋째 형이랑 저녁을 먹었다
가족이란 게 오랜만이다
장애인 직업 재활 시설에서 일하는 형이 밥값을 냈다
누워서 오늘 있었던 일을 생각하다 잠들었다
삶이 물처럼 흘러간다
안쓰러워 하고 애쓰는 일들이 다 아무것도 아니다
고요
빛의 반대편은 어둠
오른쪽의 반대는 왼쪽
어둠의 왼편은 빛의 그림자
너는 빛이 없는 곳에서 온 존재
나는 너의 그림자
너를 사랑하는 건,
너와 나만이 있는 고요
너와 내 숨소리만 있는 고요
그 조차도 사라진 고요
그 고요 속에서
텅빈 반대편을 보면서
평행선의 한쪽을 걷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