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 후


바람의 흔적만 남은 길을 새기고
그 길의 끝에서 춤추는 바다를
그 바다의 끝에 드리운 구름을 새겼다

구름을 따라 가다가
구름에 잠긴 산을 새기고
그 안에 자작나무 한 그루를 새겼다

나무 그늘에 앉아 담배를 피우다가
담배 연기와 연기를 피해 달아나는 나비를
나비가 내려 앉은 들꽃 한 송이를
옅은 공기와 꽃잎의 떨림을 새겼다

온종일, 빈 가슴에
너만 새기고 다녔다

모든 흔적 지워진 날
너만 지우지 못했다
AND

 백두대간 어느 자락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다. 소나무 묘목을 심었고, 70년대에 심은 소나무와 잣나무에 벌레약을 쳤다. 요즘은 올해 나무 심은 자리와 이미 나무가 심겨진 자리에 풀을 베고 있다. 하루에 일곱 타임까지는 괜찮은데, 여덟 타임 돌리고 나면 집에 와서 많이 힘들다. 이게 일당 7만원 짜리가 아닌데, 라고 생각하니 더 그렇다. 작은 조직이지만 지소장과 사무실 직원들, 나같은 일용직들 사이에 여러가지 이해관계가 많이 얽혀있다. 이 거미줄은 일용직 10명의 관계에도 적용된다. 이런게 눈에 보이면 피곤한 법이다.


 농산물 품질 관리사 1차 시험에 합격했다. 시험이 1년에 한 번 뿐인데 2차 시험 접수 일자 마지막날 접수하러 들어갔다가 접수 마감 시간이 지나서 접수하지 못했다. 3년전부터 갖고 싶었던 자격증인데, 일이 더럽게 꼬였다. 내 탓인데, 내 탓이 아니라 남 탓이고 세상 탓인 것 같다. 며칠 지나면 괜찮아지겠지.

 

 동갑인 동료 하나가 메르스 자가 격리 대상자임을 속이고 며칠 동안 출근했다가 들켰다. 회사랑 동료들은 그 사실을 모른다. 산에서 일하던 중에 보건소 직원에게 밭에 있다고 거짓말을 하고 - 내가 다 듣고 있었는데 - 나한테는 아이가 열이 많이 나서 집에 빨리 가야겠다고 집에 좀 태워 달라고 했다. 인간이 아무리 무지하더라도 이럴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 친구의 일당 6만 2천원 때문에 동료들이 다 사지로 갈 수도 있었던 사건이다. 이 친구는 할머니가 돌아가시던 날에도 -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셔서 할머니가 이 친구를 키웠다고 한다. 그날 아침에 병원에 가셨다. - 퇴근 후 그 친구 집 앞에서 헤어지면서 내게 담배 몇 개피를 얻어갔다. 당시에 인간이란 어쩔 수 없는 것인가, 생각했었다. 자신의 관리 소홀을 쉬쉬 넘어가려고 하는 보건소 직원의 태도, 별일 없을 것 같으니 그냥 넘어 가자고 했던 사무실 직원, 결국 계속 이 친구랑 함께 일하고 있는 내 모습이 나라 돌아가는 꼴이랑 크개 다르지 않다. 역시, 인간이란 어쩔 수 없는 것인가, 생각한다.

 거짓말을 많이 하는 이 친구를 멀리하고 있다.  

 '스쳐가는 인연은 무심코 지나쳐라.' 법정 스님의 말이다. '스쳐가지 않는 인연도 있는가' 내 대답이다. 무심코 살아가기가 쉽지 않으니 이런 말이 나왔으리라.

 

 컴퓨터 앞에 앉아서 글을 쓰고, 휴대전화를 들여다본다. 수입 식재료를 구입하고, 외식을 한다. 자동차를 타고, 기름 보일러를 돌린다. 추운날에는 따뜻한 물로 씻고, 어떤날은 생수를 사 먹는다. 페이스 북에 좋아요가 많으면 기분이 좋고, 어느 일요일 아침에는 흰 쌀밥에 스팸을 구워 먹고 행복했다.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위하지 않는 세상(정치)을 내가 욕할 자격이 있을까? 

 나이 40이 가까운 지금

 그렇고 그런 세상에 공범이 되었다.

 무심한 듯 외면하자. 무심코 지나치듯 살자

 

 볼음도에서는 망고가 위로가 됐고 요즘은 나무를 보는 게 위로가 된다.

AND

복숭아를 먹다

엄마 생각이 나면
바닷가에 가서 복숭아를 먹는다
복숭아 태몽을 꾼 엄마
물놀이를 마친 내게 복숭아를 건넸던 엄마
크게 한 입 깨물면 물큰 흐르는 과즙이 엄마 젖인 것 같다
사슴벌레가 복숭아 먹듯
나는 엄마를 먹고 자랐다
벌레 먹은 복숭아가 못쓰게 되듯이
엄마는 병들었다
복숭아는 흐르는 과일
흐르는 것은 눈물
엄마가 흘러간 삶을 따라 눈물이 흐른다
먼 데 있는 엄마
보고 싶은 엄마
자꾸 생각나는 엄마


AND

구원


저녁을 먹고 누웠다
눈을 감으니 십자가가 반짝인다
다시 태어나기 싫어서
교회는 다니지 않는데
나에게 구원이 내리는 걸까
오늘 잘못한 일들을 벌하려는 걸까
새벽에 나가서 일당 7만 원 짜리 풀베기 한 것이 죄인가
풀들에게 사죄해야 하나
일이 힘들어서 담배를 많이 피웠다
내 마음대로 담배도 못 피우나
퇴근길에 혼잣말로 앞차 운전자를 욕했다
저녁 뉴스를 보다가 대통령을 욕했다
듣지 못하는 사람에게 욕도 못하나
생각하는데
십자가에 메시아의 그림자가 겹친다
아내가 눈을 뜨라고 한다
형광등이 십자가 모양이다
방에 누워서 아내에게 구원 받았다

AND

악몽 4


눈을 감고 있어도 안다

얼굴이 없는 존재가
내 입을 벌리고 가윗날을 갈고 있다
내 가슴위에 양반 다리를 하고 앉아 있다
히죽거리며 무쇠 가위를 갈고 있다
침이 고인다
쇳물이 고인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라도 된 거 같은 기분이다
구원자가 말한다
철은 드는 게 아니라 먹는거다

쇳물을 삼키고
철도 못든채 잠에서 깼다
AND

새벽 네 시, 편의점

허우대가 멀쩡한 청년이 편의점 앞에서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고 두리번 거린다
너도 오늘 헤어졌구나
너는 젊고 허우대라도 멀쩡하지
입술 앞에까지 튀어 나왔던 말을 삼켰다
그 친구 옆에 주저 앉아 울어버렸다
계산대에 술병을 올렸다
마스크를 쓴 알바생이 반사적으로 디스에 손을 뻗길래
까멜을 달라고 했다
메르스에라도 걸려 버릴까
이름도 모르는 그녀와 나를 이어주던 실타래가 한 순간에 끊어졌다
어차피 오늘은 끊어진 날이다
모든 만남은 헤어져야 한다
허나, 그것이
모든 생에 끝이 있기 때문은 아니다
하여, 이별은 결코 끝이 아니다
허나, 오늘까지는
아니, 언제까지는
오늘의 이별을 끝으로 하자
그리고 살아가자
그래도 살아가자
AND

들꽃

 

꽃을 피우기 전까지
아무도 나에 대해 알려하지 않았다
누가 내 이름을 물으면...
그냥 풀이라 했다
잡초라 했다

꽃을 피우고 나서도
몇 번의 눈길만 받았다
누가 내 이름을 물으면
모른다고 했다
쓸모 없는 꽃이라 했다

허나, 나는 내 우주를 살았고
이 우주를 이어갈 꽃을 피웠다

AND

해바라기

 

향기 없는 꽃이 교차로에서 냄새를 맡는다
꿈의 경계에서 헤어진
연인의 냄새를 찾아 나섰다
잘려나간 풀냄새를 따라 북쪽으로 걸었다
해바라기 모양의 간판을 단 선술집을 만났다
여주인이 테이블에 꽃안주를 내밀었다
- 당신, 해바라기 향기가 나네요
- 그게 제 이름인가요? 해바라기도 향기가 있나요?
여주인이 꽃술을 잔에 따랐다
- 향기 없는 꽃이 있나요?
- 저는 향기를 잃었어요
향기 없는 꽃이 술을 마셨다
- 제가 당신의 향기를 맡았으니 이제부터 당신은 저의 꽃이에요
- 아니오. 저는 다시 길을 떠나야만 해요
- 그렇다면 해를 따라 걸으세요
향기 없는 꽃은 해를 따라 걸었다
해바라기 향기에 대해서 생각했다
해가 그날의 마지막 빛을 길의 끝에 머금었다
그곳에서 여주인을 다시 만났다
웃고 있는 여인에게서 헤어진 연인의 냄새가 났다
해바라기 향기가 났다
AND

마당에서

까마귀 우니
개가 짖는다
고양이는 툇마루에 동그마니 앉았다
너 때문에
내 마음이
울다가 짖다가 주저 앉았다


상반기 끝 ^^
AND

벌의 노래


하품을 하는데 입 안에 벌이 들어왔다
얼른 입을 닫았다
입 안에서 벌이 춤을 췄다
그 소리가 몸 전체에 울렸다
몸이 저절로 춤을 췄다
혀를 말았더니
놈이 혀 끝을 쐈다
아파서 이를 앙시물었다
찍, 소리가 났다
씹어 삼켰다
쏘인 혀가 놈의 날개와 몸과 눈과 꼬리를 느꼈다
어쩐지 단 맛이 났다
혀가 붇기 시작하고
갑자기 저절로 노래가 나왔다
온몸을 떨며 노래를 불렀다
부은 혀가 입을 틀어 막았는데도
계속해서 달콤한 노래가 나왔다
붕붕붕 붕붕붕
내 주위로 몰려든 벌들이 춤을 췄다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주사를 놔줬다
붓기가 가라앉고 노래가 멈췄다
벌들은 떠나고
쓸쓸한 바람이 불었다
다시는 노래를 할 수 없었다

AND

괜찮아

  

1밀리 차이로 괜찮아가 쇈찮아가 된다
괜찮아 그냥그냥 사는거지
쇈찮아 그냥그냥 사는거지
괜찮든 시원찮든
그냥그냥 사는 건 다 똑같다
암만해봤자
밥 한끼 먹는 건 다 똑같다
세상에 쓰레기나 하나 더하고 가는 건
여름엔 덥고 겨울엔 추운 건
도처에 즐비한 삶 중에 하나인 건
여기에 이런 삶이 있습니다, 라고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이런 삶이 있는 건
나무 한그루, 밤바다, 당신
그것이 무엇이든
기대어 사는 건 다 똑같다
1밀리 차이로
다 똑같다
AND

빈 가게


사랑하는 당신,
비 오는 날에 빈 가게에서 만나요
다방 외상값은 기름 종이에 적어두고
비 오는 날은 빈 가게에서 만나라잖아요
그래서 우리는 텅 빈 가게에서 만납니다
우리는 빈 가게에서 사랑을 합니다
사랑은 공허하기 때문이에요
우리는 부둥켜안고 먼지투성이의 바닥을 뒹굽니다
서로의 뼈와 살을 탐합니다
주인도 없고 물건도 없는 그곳에선
텅 빈 진열대만이 우리를 훔쳐 볼 거예요
그 시선이 부끄럽다면 부끄럽지만 그렇게 부끄러울 것도 없어요
모든 열기를 뿜어내고서
우리는 서로의 몸에 붙은 먼지를 털어주면서 웃습니다
그리곤 입을 맞춥니다
사랑의 기쁨이 텅 빈 가게를 가득 채울거예요
그리고 우리는 주인 없는 카운터에 빈손을 내밀고 가게를 나옵니다
우리는 뼈다귀 해장국도 먹지 않고 헤어집니다
어차피 지금 내리는 비가 우리의 끈적함을 씻어낼 것을 알기 때문이에요
먹어도 먹어도 생도 사랑도 공허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에요
비 오는 날의 빈 가게는 그런것이기 때문이에요
내 사랑,
우리 비 오는 날에 빈 가게에서 만나요
다음에도 그 다음에도요

AND

아이들은 즐겁고
가족들은 집요하다
세상은 썩었고
나는 병들었다
하늘은 투명하고
거리는 우울하다
내 마음 속의 불온을
나는 알고 너는 모른다
당신들은 정말 나쁜놈들이고
그걸 아는 나는 더 나쁜놈이다
그 간격을 메우기가 어렵다
이 비관에서 벗어나기가 어렵다

-> 주말 내내 안 좋았다.
AND

삐딱하게


며칠동안 오른쪽 어깻죽지가 뻐근뻐근 하더니 날개가 돋았다
또 며칠동안 그 자리가 간질간질 하더니 날개가 내 키만큼 자랐다
입을 옷이 없어서 웃통을 벗고 편의점에 갔다
컵라면 값을 계산하면서 날개를 펄럭거렸더니 알바생이 웃었다
자신감이 생겨서 소주도 한 병 같이 샀다
취해선지 날개 때문인지 몸이 삐딱하니 세상이 삐딱해 보이고
사람들은 나를 외날개라고 병신이라고 놀렸다
나쁜짓을 많이해서 벌을 받았을까
착하게 살아야겠다고 생각하고 건물 옥상에 올랐다
외날개 때문인지 추락하고 있기 때문인지 세상이 계속 삐딱하게 보였다
마음속으로 착하게 착하게를 조곤조곤 말했다
착하게 착하게
삐딱하게 삐딱하게
떨어진다 떨어진다
수평이 된다

-> 마무리가 잘 안되네
AND

완벽

잠든 아내의 숨소리를 듣다가 아내의 숨과 내 숨을 겹친다
품안에 잠든 고양이의 배에 손을 얹고 있다가 그르렁거리는 그 작은 몸의 움직임에 내 숨소리를 얹는다
홀로 완벽한 것은 없다
AND

새 새끼들

사진 2015. 6. 12. 18:55


박새? 오목눈이? 딱따구리?

950고지 막사 건물 뒤에서
AND

친구가 없는 친구의 가게에서
누군가를 기다린다
친구이거나
친구의 친구이거나
내 친구이거나
누구의 친구도 아닌 누군가를 기다린다
어쩌면 나는 너를 기다린다

이것은 보내지 않을 편지를 쓰고
오지 않을 답장을 기다리는 일
마음속으로만 너을 외쳐 부르는 일
눈물이 마르기 전에 눈물을 다시 채워 넣는 일

바다는 저만치 저물어 가는데
누구도 친구의 가게를 찾지 않고
그래서 나는 나를 기다린다
새벽이 오도록 나는 오지 않는다
나는 내 발끝도 벗겨내지 못했다
AND

독재자


쿠테타를 일으켜서 독재자가 되야겠다

나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독재자가 될 것이다

군대를 없애야겠다
군대 없는 나라에는 전쟁이 없을 것이다
청년들은 나를 영웅으로 생각할 것이다
군사 쿠테타는 역사속의 일로만 남을 것이다

사교육을 없애야겠다
학원이 없어지니 아이들은 얼마나 좋을까
사교육의 원흉인 대학교도 없애야겠다
내 나라는 학벌 없는 나라가 될 것이다

아파트를 없애야겠다
층간 소음으로 사람이 죽는 일도 없고
임대 아파트 산다고 무시 당하는 사람들고 없고
주민의 멸시를 못이겨 자살하는 경비원도 없을 것이다

골프장을 없애야겠다
전 검찰총장이 캐디를 성희롱 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검찰 얘기가 나온 김에 검찰도 없애야겠다
경찰도 없애서 사람들이 마음껏 집회를 열 수 있도록 해야겠다

기업 총수가 나에게 뇌물을 주면 뇌물은 뇌물대로 받고 법인세는 더 올려야겠다
내가 받은 뇌물로는 맛있는 걸 사 먹고 올려 받은 세금으로는 국민들을 먹여야겠다
말을 안 들으면 재벌을 해체하는 것도 괜찮겠다

내 마음대로 법을 바꿔야겠다
먹는걸로 장난치는 사람은 평생 감옥에서 자기들이 팔아치운 것만 먹도록 해야겠다
광화문 광장을 불구덩이를 만들어서 내 마음에 안드는 놈들은 다 거기에 던져넣겠다

원전을 없앨 것이다
밀양의 할매들이 얼마나 나를 좋아할까
전기가 모자라다고 하면 서울 한복판에 초대형 원전을 만들어도 좋겠다

교회를 없애야겠다
교인들은 십일조를 안 내도 되니 참 좋겠다
천당에 못가서 불안할까
아니, 기도만 하고도 천당에 간다고 생각하니 좋을 것이다.

부정선거가 판치지 않도록 선거제도도 없애고
비정규직이 문제니 기업들을 싹 다 없애야겠다
대법관들의 목을 자르고
혼자서 내 마음에 맞게 헌법을 써야겠다

뭐든 문제가 생기면 다 없애야겠다
독도도 없애고 국회도 없애고 fta도 없애고 여객선도 없앨것이다
노점상 단속 못하게 노점상 다 없애야겠다

순서대로 없애기도 귀찮으니 한꺼번에 싹 없애야겠다
이렇게 다 없애고 나면 누구도 나를 못 없앨것이다
그때가 되면 내가 제일 큰 문제니 나를 없애야겠다

자식을 갖지 않을테니
사람들은 오직 나만을 위대한 독재자로 기억할 것이다

독재자가 되기전에
우선 해장술부터 먹어야겠다

-> 언젠가 장난으로 써둔 것


AND

재미


내 발바닥에 닿은 네 종아린 이렇게나 부드러운데
사는 일이 재미가 없다
내 손끝이 너의 갈라진 곳에 닿을 때
이 온기만 있다면 아무것도 통하지 않아도 좋은데
사는 일이 재미가 없다
내 장난에 네가 활짝 웃어도
꿈 속에서 너의 냄새를 맡아도
사는 일은 여전히 재미가 없다
새들이 울기 시작하는 시간, 눈도 뜨지 못하는 너의 뺨에 입을 맞추고
숨길 수 없는 안도감을 느끼며 일을 나가도
월급날, 너와 오징어 회를 먹고 배가 불러도
사는 일은 여전히 재미가 없다
내 마음대로 내 양껏 살아도
뜻대로 되는 일이 없다
마음처럼 되는 일이 없다
살아도 살아도
사는 일만은 재미가 없다
이것만은 어찌할 수가 없다
AND

아가야


애 낳아서 키우기 어려운 시절이라고 한다
페이스 북 생일 알림을 보면 어디에나 즐비한 것이 삶이다
여기저기 올라오는 사진들을 본다
절반은 먹는 거고 나머지 절반은 아기다
사람들은 먹고 살기 어렵고 아이 기르기 힘든 이런 시절에 먹고 아이를 낳는다
애 낳아서 키우기 쉬운 시절은 없었다
이런 시절에 태어났으니 이런 시절의 아이가 되면 그만이다
그러다가 이런 시절의 어린이가 청소년이 어른이 되면 그만이다
영원한 존재는 없으니 인류는 절멸을 향해 나아갈 뿐이다
그러다가 또 이런 시절의 아이가 태어날 것이다
그 아이 또한
필멸을 향해 살아갈 것이다
아가야, 살아서 보자

-> 치과에서 순서 기다리다가 막 써지름.
AND

배고픈 사자들이 기린의 긴 목을 뜯어 먹는다
금연중인 내가 문득 아내 팔뚝을 물어 뜯는다
인간이고 동물이고
배고프면 먹고 화나면 물어 뜯는다
사는 게 다 거기서 거기다

-> 디벨롭 필요함


AND




5월산이 온통 초록이다
초록도 다 같은 초록이 아니다
나무 한 그루 한 그루가 색이 다르다
색이 다른 것들이 모여
숲이 되고 산이 되듯이

결이 다른 사람들이
가족으로 친구로 연인으로
함께 살아 간다

그래,
너와 나는 결이 다르다

다른이의 시간에 나의 시간으로 응답할 수 없듯이
나는 당신에게 무엇으로도 응답할 수 없다

우리는 결국 남이다
AND

세상의 끝에 서서
세상 끝의 단어로
세상의 끝을 설명하는 문장을 적고 싶다

해거름에 저물어 가는 인생을 보았다

세상 끝의 해거름을 보면서
세상에 없는 단어로
세상에 없는 문장을 만들고 싶다

그 한 줄로 세상의 모든 것을 설명하고 싶다
그 문장이 나이고 내가 그 문장이면 좋겠다
그랬으면 좋겠다
AND

지친 몸을 쉬려 일찍 자리에 누웠다
밤이 오는 소리가 피곤하다
누워서 왼쪽으로 고개를 돌렸더니
당신이 누웠던 베개 위로 당신 얼굴이 겹친다
새근새근 당신 숨소리 들린다
그 배개를 가슴에 안고 잠들었다
무거운 쇳덩어리가 내 몸을 누르는 꿈을 꿨다
끌어 내리려 해도 발버둥을 쳐봐도
가슴의 쇳덩이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깃털같던 당신의 무게가
당신이 없는 밤이
삶이
이리도 무겁다
AND

이남곡 선생 페북에서 먼저 마음에 그려지고 그대로 한다,는 문장을 읽었다. 글의 맥락은 아주 소소한 일을 하는데 구체적인 그림을 그리고 그대로 하니 기분이 좋았다는 것이다. 메모장에 옮겨 적고 그 아랫줄에 결국 인간은 자기 하고 싶은대로 한다,고 적었다. 아내에게 말했더니 그냥 하고 싶은대로 하는 게 아니라 먼저 그림을 그린다는 게 중요한 거라고 했다. 즉흥적으로 순간순간을 버텨내기도 하겠지만 짧게는 오늘 하루에서부터 길게는 남은 생 전체를 미리 머릿속에 그리는 것이 필부의 삶이다. 그렇다면 어떤 그림을 그리느냐가 중요하다.

새벽의 페북에서 신영복 선생의 책 '공감'의 일부분을 캡쳐해 뒀다. 그 사람의 생각은 그이가 살아온 인생의 결론이고 남이 바꿀 수도 없고 바꾸려고 해서도 안된다. ~ 그래서 강의의 상한이 공감이고 당신도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하는 공감이 위로와 격려와 약속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내 식으로 이해하자면 결국 뭐든 저 하고 싶은대로 하겠지만 공감하면서 저 하고 싶은대로 해야한다는 얘기다. 공감을 하자면 공감할 사람이 필요하고 완고한 마음의 문도 바람이 통할 만큼은 열어야 한다.

인생이란 게 누군가와 함께 자신만의 그림을 그리는 일이다. 누군가가 사람일 필요는 없다. 그것이 물건(돈)이면 별로고 나무나 산, 애완동물이면 괜찮지 않을까? 어느날의 메모에 '사람보다 산이 좋다.'고 적었더랬다. 메모는 메모일 뿐이고 나는 사람이 좋다.


AND

큰 형이 교통사고로 죽자
어머니는 홧병으로 죽었다
둘째 형은 자살을 하고
얼마 후 아버지는 암에 걸려 죽었다.
죽은 신들이, 살아있는 나를 내려다 보았고
나는 꿈에서 관을 짰다
누군가, 관을 짜는 꿈은 집을 사는 꿈이라고 했다
그래서 빚을 내서 다 같이 살 던 집을 샀다
점심을 먹다가 식사예절 타령을 하는 동료에게 욕설을 퍼붓고 집에 왔다
일용직 처지에 대출 이자 내기도 빠듯하니 내일 또 그 인간의 얼굴을 봐야한다
셋째 형이랑 저녁을 먹었다
가족이란 게 오랜만이다
장애인 직업 재활 시설에서 일하는 형이 밥값을 냈다
누워서 오늘 있었던 일을 생각하다 잠들었다
삶이 물처럼 흘러간다
안쓰러워 하고 애쓰는 일들이 다 아무것도 아니다

AND

고요


빛의 반대편은 어둠
오른쪽의 반대는 왼쪽
어둠의 왼편은 빛의 그림자
너는 빛이 없는 곳에서 온 존재
나는 너의 그림자

너를 사랑하는 건,

너와 나만이 있는 고요
너와 내 숨소리만 있는 고요
그 조차도 사라진 고요
그 고요 속에서
텅빈 반대편을 보면서
평행선의 한쪽을 걷는 일

AND

버스정류장 벤치에 앉아서 아내를 기다리고 있었다
옛 애인이 다가와 내 무릎 위에 앉았다
여자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여자의 손이 내 목을 감쌌다
부러울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품안의 여자와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입을 맞췄다
혀가 뜨거웠다
그때 아내가 도착했다
나는 얼른 애인을 안은 팔을 풀었다
애인은 내 무릎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우리는 아무일도 아니라는 듯 셋이서 인생에 대해서 얘기했다

우리는 평생 사는 일에 서툴다
AND

봄비

벚꽃 지기전에 사랑을 마치려
아침부터 고양이들이 슬프다
꽃 진 자리 언제나 참혹하다
AND

먹다


너는 나랑 기역자로 앉아서 밥을 먹고 싶고
나는 너랑 니은자로 앉아서 술을 먹고 싶다
기역을 아무쪽으로나 두 번 돌리면 니은이다
그래서
나는 너랑 기역자로 앉아서 술을 먹고
너는 나랑 니은자로 앉아서 밥을 먹는다
마주보지 않아도
나란히 앉지 않아도
그대로 좋은것이다
친구가 함께하여 디귿자로 앉아도
거기에 한 친구가 더하여 미음자로 앉아도 좋은것이다
아무렇게나 앉아도
함께 먹는 일은
그것으로 좋은 것이다

- > 5.18에 이런 걸 썼네.


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