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발소에서

나이 먹어도 자라는 게 머리칼이다
초로의 이발사가 아들뻘인 내 머리를 자르며
내 세월과 자신의 세월을 함께 잘라낸다
이발소에서는 정수리 냄새며 비듬같이
추한 것들을 남에게 보여야 한다
누구에게도 반말을 할 수 없는 이발사와
고개를 숙여 머리를 감고 겸손해지는 나
남의 머리를 감겨주는 두터운 손으로
떡을 주물렀어도 좋았을 것이다
나무를 만지는 목수가 될 수도
농부나 어부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도 아니라면 마술사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발사에게 무방비 상태인 몸을 맡기고
세월의 무게를 덜어낸다
삶의 어디쯤엔가 닿아있던 수염까지 밀어버리고
다시 세상으로 나서는 길에
머리가 가볍다
AND

의문

의도의 의도를 알 수 있을까
무의미에 의미가 있을까
빛의 그림자를 잡을 수 있을까
소중한 사람이 한 명도 없는 사람도 있을까
꿈의 경계에서 헤어진다는 건 어떤걸까
인연의 끈을 놓지 않은 인연이 다시 이어질 수 있을까
널 붙잡지 않고 내 삶을 붙잡을 수 있을까
마음도 인큐베이터 안에 넣을 수 있을까
나의 슬픔과 절망을 지울 수 있을까
내게도 선명하고 투명한 내일이 있을까
고흐의 해바라기는 왜 열 다섯 송이일까
얼레지는 어째서 이름이 얼레지일까
그리고 봉황은 왜 깊은 뜻을 가졌나

AND

장수 목욕탕

온탕 안에 노인 셋
나이 마흔을 먹어도
노인들 앞에선 조심스러운 것이 조선 사람
잔물결이 그들에게 파장이라도 될까
조심스레 탕에 몸을 담근다
머리가 벗어진 노인 하나
비틀거리며 탕에서 나온다
늘어진 목과 가슴과 배를 내놓고
늘어진 불알을 닦는다
꼼꼼하게 닦는다
덜렁거리는 생식기가 생의 마지막 증명일까
방탕하거나 자유롭거나 규정적이거나 완고했을 그것을 닦는다
남은 생에 무엇을 부여잡을까
노인은 시간을 붙잡으려는듯
늘어진 생식기를 부여잡았다
이곳 이름이 장수목욕탕이지
젊어지지 않는 열매는 아무 쓸모가 없지
그래도 목욕을 하고 새로 태어나야지
그리고 장수해야지

AND

술래잡기


할머니가 집을 나선다
양손에 보따리를 들었다
구부러진 허리로 구불구불 걷는다

감자밭, 고추밭을 지나
오이덩굴, 수세미 덩굴을 지나
할머니의 고무신은 막다른 곳에서 우뚝 멈춘다

할머니, 어디가세요
누구요? 난 우리집에 가오
할머니 저랑 같이 집에 가요
누군지 손이 참 곱소

할머니의 보따리를 한 손에 들고
남은 손으로 할머니 손을 잡고 집에 돌아온다

끝나지 않는 술래잡기
나는 영원한 술래
AND

당신 발가락

당신은 예쁘다
발가락이 예쁘다
당신의 작은 뒤통수와 복숭아뼈와 귓불도 예쁘지만
당신의 발가락은
세상에서 제일로 예쁘다
너무 예뻐서 이 세상의 발가락이 아닌 것 같다
입에 넣고 잘근잘근 씹고 싶다
담배연기를 뿜어 주고 싶다
이런 나에게 변태라고 하는 당신의 입술도 예쁘지만
당신의 발가락은 정말이지 하루 종일 쳐다봐도 예쁘다
냄새도 예쁘다
냄새를 맡으려는 나를
하지말라고 하면서 걷어차는 당신은
발가락이 예쁘다
AND

터미널 고로께
 

강화 터미널, 터미널 빵집
빵 만드는 아저씨는 바게트처럼 무뚝뚝한데
빵 파는 아주머니는 크림빵처럼 사근사근하다
터미널 빵집 고로께는
어렸을 때 엄마가 사줬던
태어나서 처음 먹었던 고로께 맛
열 다섯 살, 첫 데이트의 맛
그리움의 맛이 난다
내가 빵집 주인 내외의 속사정을 모르듯이
그들도 나를 고로께 총각으로만 안다
고로께라고 항상 무덤덤한 것은 아니다
어떤날에는 그들 때문에
어떤날에는 나 때문에
슬프고 힘든 고로께도 있었을 것이다
가벼운 안부를 묻고
웃는 얼굴로 인사를 하며
아주머니에게 값을 치렀어도
속으로는 눈물을 흘리며
입가에 기름을 묻힌 날이
당신 생각에 고로께 속의 감자처럼 마음이 으깨진 날이
엄마 생각에 입가와 눈가가 함께 번들거린 날이 많았다

AND

불온


남편이 있는 여자를 만나고 싶다

그 여자 옆에서 신발끈을 고쳐 매고
바다에 가서 부표처럼 떠 있는 갈매기들을 보고
자판기 커피를 마시며 눈빛을 마주치다가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차창 밖의 이별을 만끽하고 싶다

여자의 아파트 지하 주차장
어두침침한 천변의 자동차 안
또는 그녀의 부엌에서
남편이 있는 여자를
남편이 부서지도록 안고 싶다

무너져버린 남편에게 들켜서
여자는 나쁜년이 되고
나는 이 세상 모든 욕지거리의 주인공이 될 것이다
남편에게 원 없이 얻어 맞을 것이다
피떡이 된 내 옆에서 울고 있는 여자에게
피묻은 혀로 사랑한다고 말할 것이다
웃으면서 말할 것이다

아내에겐 비밀로 하고
남편이 있는 여자를 만나고 싶다


AND

장마


모래가 흙이 되도록
바다가 넘치도록
장맛비 내린다
비가 시작한 날에 너랑 헤어졌다
모든 일에는 연유가 있고
모든 인연은 헤어져야 한다
파도, 모래, 바람, 바위, 그리고 나
네가 없어도 낯설지 않은 바닷가에서
오늘은 무엇도 생각하고 싶지 않다

랍스터는 100년을 살면서
죽을 때까지 짝짓기를 한다는데
항상 새 짝을 찾으니 이별이 쉬울까
300년도 넘게 산다는 장수 거북은
오래 사는만큼 이별에도 덤덤할까
흙은 태고적부터 흙이었을텐데
비를 맞는 모래처럼
일렁이는 파도처럼
언젠간 나도 무심해 질 수 있을까
바닷속에 살고 싶다

내 마음 아랑곳 않고
장맛비 근면하게 내린다
AND

 어제 오후에 일하다가 벌에 쏘였다. 왼쪽 아래 턱에 쏘였는데, 본래 벌을 안 탔던데다가 쏘인 자리가 붓지도 않길래 대수롭지 않게 계속 일했다. 그런데 한 30분 정도 지나면서부터 온 몸이 가렵기 시작했다. 안되겠다 싶어서 바로 퇴근했다. 왕산면 보건소에는 주사약이 없다고 해서 강릉의료원까지 내려왔다. 현장에서 의료원까지 아무리 빨리 밟아도 50분은 소요된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계속 가렵고 가슴은 답답해왔다. 무사히 병원에 도착했고 주사 맞고 약 먹고 나았다. 그 덕분에 오늘 쉬게 됐다. s형은 벌에 쏘였다가 죽을 뻔한 사람을 알기 때문에 신속하게 이런저런 대처를 해줬고 친구 j도 총알처럼 운전을 해줬다. 사무실 직원들도 응급실에 다녀갔고 집에 도착하면 내가 먼저 전화 드려야지 했던 동료들에게 안부를 묻는 전화가 왔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인간이 타인에 대한 관심과 걱정 없이 살 수 있을까?

 언젠가 손에서 미끄러진 비누가 엄지 발톱을 때렸다. 들을 사람도 없는데, 악,하고 소리를 질렀다. 지난주에 아카시아 열매를 채집했다. 집에 와서 씻는데, 뜨거운 물을 몸에 끼얹자마자 아,하고 소리를 질렀다. 나도 몰랐는데, 열매 채집하면서 몸 군데군데 아카시아 가시에 긁혔던 모양이다. 그제서야 긁힌 상처들이 눈에 들어왔다. 어제 벌에 쏘인 사건도 그렇고 직접 당하는 고통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이렇게 선명하다. 하지만 남의 고통을 공감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자세히 밝히긴 어렵지만 지난주에 회사에서 의료보험 사건이 있었다. 우리끼리 뭉쳐서 내용을 자세히 알아보려는 노력은 하지 않고 각자 납부할 돈을 내는 것으로 끝나는 진행이 마음에 안 들었지만 나는 직접 고통을 받은 대상자가 아니기 때문에 기분만 나쁜 채 참았다. 세상이 사람들을 각자도생으로 몰고 간다. 페친 전성원 선생이 본인 타임라인에 각자도생의 해결책도 각자도생인 세상에 대해서 한탄하는 멘트를 날렸다. 내 머릿속에 이민이라던가 안정적인데 취직한다던가 하는 생각을 하는 것도 결국은 해결책을 각자도생에서 찾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영덕에서 원전 유치 찬반 주민투표가 시작됐다. 경주에는 방폐장이 들어섰고, 밀양에는 송전탑이 세워졌다. 강정도 그렇고 설악산, 가리왕산도 그렇고 속수무책으로 당하고만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응급실의 여의사는 벌에 쏘이면 즉각적으로 대처할 방법도 없이 50분 간 차를 타고 병원에 와야하는 나의 작업 환경에 대해서 걱정하는 멘트를 하고 조심해서 일하라고 했지만 나랑 동료들은 그런건 크게 상관하지 않는다. 이 간극을 메우기가 어렵다.

 모든것은 이어져 있다. 생각에만 그치지 말고 뭔가를 아주 작은 것이라도 타인에 대한 관심과 걱정을 드러낼 수 있는 무언가를 해야한다. 

 요즘 얼굴보기 불편한 동료들도 생기고 했었는데, 마음을  다잡고 다 같이 잘 지내도록 노력해야겠다. 시작은 항상 가까운데서.

AND

그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고요를 살았다
자궁안 양수속을 부유하는 고요
격렬한 사랑을 나누고 지쳐 잠든 고요
결코 물리칠 수 없는 고요를 살았다
이것은 그의 고요가 부서지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녀는 불같은 열정을 살았다
알을 깨고 세상에 나오는 아기새의 열정
온 몸이 숨길 수 없을 정도로 달아오르는 사랑의 열정
절대 꺾이지 않는 열정을 살았다
이것은 그녀의 열정이 무너지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와 그녀는
낮과 밤, 빛과 그림자, 해와 달
만날 수 없는 인연
그는 남풍에 실려 북쪽으로만
그녀는 북풍에 휩싸여 남쪽으로만 몸을 뉘였다
지상의 모든 바람이 사라진 밤
마침내 두 사람은 이 별의 끝에서 만났다
둘의 손끝이 닿자마자
원래 하나였다는 듯
불꽃처럼 타오르는 차가운 달이 되었다
그리고 오늘
지상에는 불같은 눈이 내린다

이것은 세상 끝의 사랑 이야기


AND

결혼

어차피 세상은 혼자 사는 걸 몰랐다
난 가족밖에 모르는데
아내를 모르겠다
두 딸은 애엄마 말만 잘 듣는다
애들 마음도 잘 모르겠다
결국 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
가끔 만나 서로 자기 아내 욕하던 친구는
아내랑 사이가 좋아졌는지
요즘은 얼굴 보기가 어렵다
이혼한 한 친구는
해도 후회 안해도 후횐데
해 보고 후회하면 되돌릴 수 없으니까
안 해 보고 후회하는 게 낫다고 한다
아직 결혼 하지 않은 친구는
항상, 그때 이혼했어야 한다고 한다
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
그때가 언제인지 모른다
오늘밤도 취해서
가족들 품으로 향한다
나는 유혹에 약한 사람
어쩌면 내 아내는 고혹적인 사람
이것이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유일하게 아는 사실
AND

이유

나무는 항상 그 자리에 서 있기 때문에 좋다
바다에는 건물을 못 짓기 때문에 바다가 좋다
사람들이 다 싫고 심지어 부모님도 싫은데
나만은 좋다는 당신이 좋다
내가 좋아하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는데
너는 이유도 없이 나를 좋아하고
나는 그게 미안하다
깨물고 싶을 정도로 뭔가가 좋은 걸
널 만나고 알았다
나한텐 너 밖엔 없는데
부모보다도 내가 좋다는 너는
나말고 다른 남자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한다
이유도 없이 그렇다고 한다

AND

겨울비

퇴근 후 너에게 가는 길
짧아질대로 짧아진 해가
사라지는 속도를 높이고
빛과 어둠의 경계에서
흩어지는 물냄새
곧 비가오려나
난는 너에게만 격정적이다
AND

우리집 - 산골 총각 이야기 -


강원도 정선군 임계면 직원리 산 18-3
우리 동네는 백복령 골짜기
할머니들만 사는 동네
사람들이 오지라고 부르는 동네
우리집은 지금처럼 혼자되기 전에
가족들과 함께 살던 집
일 마치면 쏜살같이 집에 가는 나를 보고
어떤 동료는 꿀단지를 묻어놨냐며
구들장 한 번 뜯어봐야 한다고 하지만
그런 거 뜯어봐야 그리움 뿐
관을 짜는 꿈을 꾸고서
일용직 벌이에 대출을 껴서 산 집
대출을 낀 집이라도 집에 가면 마음이 편하다
내가 장군이랑 부하랑 다 해 먹는다
내 집에서 내가 내 마음대로 하고
대통령도 내가 해 먹으니 만수르도 부럽지 않다
나한테 뭐라도 할 사람이 한 놈도 없다
결혼하면 한 놈 생기겠지만 가망이 없다
이렇게 편한 집에서 테레비를 본다
뉴스를 보면 가슴이 답답하다
채널을 돌려 스폰지 밥을 보면 머리가 맑아진다
어떤 날에는 뉴스를 보다가 야동을 본다
피가 거꾸로 솟기는 뉴스나 야동이나 한 가지다
자려고 누워서 라디오를 듣는다
아버지 어머니 살아 계시던
옛날 생각이 나는 노래가 흘러나오고
울면서 내가 속으로 뭐라 했는지는
나만 안다
하늘에서 날개가 내려오고
좀 있다 천사가 따라 내려왔는데
내가 하룻밤만 자고 가라고 했더니
그 천사가 우리 집에 눌러 사는 상상을 하다가
이 세상에 없는 그리운 사람을 불러내는 장난감을 생각하다가
오늘도 언제 잠드는지 모르고 잠든다

AND

그랜드 캐니언에 암매장해도 시원찮을
그랜드캐년과 그랜드캐놈들이 득실거리는 세상에서
그래도 먹고 사는 게 먼저인 세상에서
부끄러운 줄은 알아서
포기라는 말은 쓰지 않고 포기해 버리는 세상에서
나는 밥도 먹기 싫고
포기해 버리는 나도 싫고
글자 나부랭이를 적고 있는
지금 이 순간도 싫은 세상에서
네 마음 따라 흔들리는 내 모습이 보기 좋았다
네가 슬픈날에 난 고개를 떨구고
네가 기쁜날에 난 이를 드러내고 웃는다
그러니 당신,
악착같이 밥 챙겨 먹고
억울한 일이 있어도 잠 푹 자고
포기하지 말고 웃으며 싸워라
그러면 나도,
이 싫어 빠진 세상에서
환하게 웃으며 너에게로 갈테니
AND

주말에 잘 놀고 잘 쉬었다.

친구들 모여 얘기하고 노래부르고 술 마시고 다음날 과수원에서 사과 따고 영화보고 얘기하고 노래 부르고 놀았다.

우리들을 하나로 묶는 키워드는 가난이다.

대출 받은 돈으로 가게 처마를 내리고 농사로 정착이 어려워 정처없이 이사를 다닌다. 대략 이런식이다. 어떻게든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서 밥은 굶지 않는 세상이라지만 부끄러워서 밥을 굶을 수도 있다는 양반도 있었다. - 송파 세 모녀가 생각나서 쓸쓸해진다. -

일요일엔 아내랑 올해만 두 번 이사가야하는 상황을 맞은 분의 가게에서 커피를 마셨다. 형님은 커피도 한 잔씩 더 만들어 주시고 쿠키도 하나 주셨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 선한 사람들, 남한테 해코지 하지 않는 사람들과 주말을 보냈다.

살았으면 죽어야지. 요즘 많이 하는 생각이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가장 큰 원칙은 남한테 해코지하지 않는 것이고, 감당할 수 있는 만큼 살았는데 살기가 어려우면 죽어도 할 수 없다, 고 생각한다.

지난주에 이계삼 선생이 '오늘의 교육'에 쓴 글( http://combut.maru.net/xe/journal_list/2327)을 몇 번 정독했다. 현재의 작은 사건들을 다 하나의 파국으로 인지하고 현재와 단절하여 앞으로 나갈 수 있는 무언가를 공동으로 모색하는 것이 생태적 교육의 시작이란 맥락의 글이다.

아는 형님이 '연대는 옆에 앉아 있는 것'이라고 하시면서 여기저기 투쟁 현장에 다니신다. 가끔 아내에게 말하길 그분은 그럴 이유가 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투정 부린 것이 부끄럽다.

이계삼 선생의 글은 옆에 앉아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내 생각을 이야기하고 공감하고 그 이야기를 다른 곳에 전달하는 과정을 통해 그들은 그들대로 연대한 자는 연대한 자대로 현재의 파국을 잘라낼 힘을 얻는다,는 맥락이다.

가난한 우리들이 대가를 바라지 않고 과수원에서 사과를 따고 쉬는 중에는 우리들 각자의 실패를 이야기 하기도 하면서 자연스럽게 '함께 한다'는 마음이 들었다. 기분 좋은 일이다. 이런것이 연대다. 더구나 마음씨 좋은 선배 부부가 사과도 잔뜩 챙겨줬다.

박정희 예찬자들의 마음을 생각한다. 강제든 뭐든 같은 시기에 힘든 일을 모여서 한 것이 새마을 운동이 아닌가. 그렇게 형성된 박통에 대한 좋은 마음이 쉽게 사그러질리 없다. 새마을 운동 이후에는 이웃이고 공동채고 다 사라져 버렸으니 새롭게 그때와 비슷한 경험을 하기도 어려운 일이다. 군대에서 이유도 없이 힘든 훈련을 마치고 전우애라는 게 생기는 것이나. 노가다 판에서 하루 일을 깔끔하게 마치면 기분이 좋아서 저녁에 술 한 잔 먹는 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다 연대라고 할 수 있겠다.

지금 젊은 사람들은 새마을 운동 같은 것이 아니라 자발적이고 새로운 개념의 연대를 해야 한다. 두물머리 친구들이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강릉쪽도 뭔가 명확한 것을 하진 않지만 지난 주말처럼 함께 모여 노는 것만으로도 나쁘진 않다.

술에 취해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 땡깡 부리고 부정적인 견해를 고집하지 말아야겠다. - 내 오래된 술버릇이다. - 내 몸이 힘들다고 나는 살아가는 것이 투쟁이야, 라고 할 것이 아니라 좀 더 바지런하게 몸을 움직일 일이다. 물론 감당할 수 있는만큼만.

시도 좀 더 밝은 걸 써야겠다.
AND

세기의 사랑

19세기에 없었고
20세기엔 있었지만
21세기엔 없는 것들과
20세기에 태어나서
21세기에도 계속 있는 것들이 있다
사라지지 않고 우리 곁에 있으면서
계속 같은 이름으로 불리는 것들이 있다
일테면 냉동만두 같은 것
너와 나,
20세기에 태어나서 서로를 알았다
21세기에도 사랑이 이어져 결혼을 했다
이혼은 아직이다
우리 사랑은 세기의 사랑
냉동만두 같은 사랑


AND



꿈속에서만 이어지는 세계가 있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당신의 안부를 묻는 세계
하지만 당신이 없는 세계
눈물만 남은 세계
눈물이 흘러 강이 되고 바다가 되는 세계
내가 그 바다에 빠져 죽지도 살지도 못하고 있는 세계
하늘에서 내려온 밧줄을 잡고 너에게로 올라가는 세계
끝도 없이 올라만 가다가 구름 속에 갇혀서 또 울어 버리는 세계
추락할 자유를 잃어버린 세계
꿈인 줄 알고도 마음대로 깰 수 없는 세계
잠을 깨도 여전히 네가 없는 세계
영원히 꿈이면 좋을 세계


AND

첫사랑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 해본 일 중에
너랑 같이 한 게 많다
게장 백반을 먹었다
갑각류 알레르기가 있다는 걸 알았다
바다 수영을 했다
죽을 뻔했다
설악산 정상에 올랐다
내려오는 길에 숨겨온 소주를 한 잔씩 먹고 서로의 술냄새를 나눠 가졌다
하여, 너는 나의 첫사랑
네가 없었으면 나는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인데
오늘 나는 바다가 보이는 막걸리 집에서
외지에서 온 여인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그 여인은 나랑 같은 담배를 피우는 사람
실패라는 말을 너무 섹시하게 하는 사람
도시와는 어울리지 않는 야생초 같은 사람
내일 또 보고 싶은 사람
처음 만난 여자는 다 예쁘고
두 번 보면 정이 든다
당신은 나의 첫사랑
당신과 하는 사랑은 처음이다
사랑은 언제나 첫사랑
너랑 헤어지는 것도 태어나서 처음

AND

과부 킬러

 

아가씨 앞에서는 말을 못해도
아줌마 앞에서는 말이 잘 나온다
사람들은 나를 과부 킬러라고 부른다
오백 원짜리 껌이 비싸다고 하니
처음 보는 슈퍼 아줌마가 사과 반쪽을 나눠주고
혼자 가을산에 버섯 따러 갔다가
박카스 아줌마랑 박카스를 나눠 먹으며
속 깊은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동네 할머니들은 집에 불이 안 켜지거나 보일러가 고장 났을 때
힘 쓸 일 있을 때
항상 나를 찾는다

나는 산골에 사는 노총각
나는 과부 킬러
그런데 부끄러워서
첫사랑 이름을 모른다
성은 이 씬데 이름은 모른다
뽕나무 아래서 오디 따 먹고
시퍼래진 혀를 내밀고 웃던
피나무 열매 따다
목걸이 만들어 목에 걸어 주었던
옥수수 밭에서 입을 맞추고 겅중겅중 뛰었던
다른 놈들 다 싫고 나만 좋다고 했던
쪽지 한 장 남기지 않고
서울로 시집 가버린
첫사랑 이름을 모른다

AND

가을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보면
오래된 자동차를 타고 떠나고 싶다
이 계절은 오직 떠나기 위해 이름 붙여진 것
당신은 날마다 어제 머물지 않았던 곳으로 떠나는 사람
나는 당신에게 가려하지만
무작정 내딛은 내 발은 결코 너를 향하지 못한다
텅 빈 하늘은 네가 없는 세상
너 없는 세상은 순백의 도화지
나는 손이 없는 화가
입으로만 그려낸 내 메아리는
너에게 닿지 않는다
빈 도화지에 불타는 구름 한 점 그려 넣을 수 있다면
너에게 닿을 텐데
너를 그려 넣을 수 있다면
혼자서도 다음 계절을 맞을 수 있을 텐데
낙엽 떨어지는 이 가을을 그려 넣을 수 있다면
말없이 사라질 수 있을 텐데

늦었다는 말은 체념하기 어려운 슬픔

AND

2015년 10월 26일

나라꼴이 닭장이 되버린 2015년 10월 25일에
나는 평화니 비폭력이니 연대니 하는말들 따윈 다 치워버리고
선한 얼굴, 억울한 마음, 눈물 같은 것도 다 버려버리고
손에 광선검을 쥐고 싶다
닭장과 국회의사당을 가루고 만들고
제 2 롯데월드를 잘라내고
4대강의 물길을 막은 보를 도려내고 싶다
밀양 송전탑과 제주 강정 기지에도 내 검끝을 드리우리라
또 만화에 나오는 이상한 열매라도 하나 먹고
고무인간이 되고 싶다
대통령이니 국회의원이니 하는 인간들 가슴팍에
기다란 드롭킥을 날리고 싶다
많이 가졌음에도 더 가지려고 하는 것들 얼굴에
장렬한 싸다구를 먹이고 싶다
종북, 주체사상, 어버이 따위 말을 내뱉는 인간들을
늘어난 팔로 송두리채 품에 낚아채서 진도 앞바다에 던져버리고 싶다
이런 생각만으론 울분이 가시지 않는
2015년 10월 26일에
나는 울분이 가시지 않는 생각만 하고 있다



AND

밤이 사라졌다


달이 부서지고 밤이 사라졌다

나는 목소리가 없는 가수
너는 귀가 없는 관객
너는 어둠 속의 댄서
나는 보이지 않는 관객

내 몸에서 나온 노래는 
네 몸으로만 올라탄다
네 몸짓은 오직 어둠만을 타고
내 몸에 닿는다

우리는
세상의 절반을 잃은 세상에서
교미하듯 교감하는 유일한 생명


AND

너는 나보다 작은 생명체
너의 작은 움직임 하나하나가 나에게는 어떤 경이로움
네가 세상끝의 고결함을 지니고 있더라도 나는 그것을 무너뜨릴 수 있을거야
너를 엿으로 만들어서
입 안에 말아 넣고 음미할거야
네 몸은 이분법적이야
두 개로 갈라진 젖가슴
차가운 피부와 뜨거운 심장
나는 뱀장어야 네 차가운 젖가슴 사이를 미꾸라지처럼 헤엄칠거야
그리고 나는 가장 작은 생명체
네 뜨거운 심장에서 흘러나와 혈관 속을 떠나닐거야
네 피가 내 눈을 적시면
난 눈물이 뭔지 알거야
네가 슬플 때 난 네 눈물이 되어 세상에 나올거야
나는 너의 밥그릇을 적시고
이번엔 네가 나를 삼킬거야
그제서야 우리는
쾌락과 눈물 없는 삶이 없다는 걸
우리가 사랑이라는 걸 알거야
AND

가을산에서 솔방울을 딴다. 솔방울에서 씨앗을 받아서 나무가 대를 잇도록 하는 것이 내 일이다. 열매를 맺고 낙엽을 떨구는 10월의 나무들을 보고 있자니 자연은 알아서 겨울을 준비하는데 나는 그러지 못하고 있단 느낌이다.

퇴색한 것들을 휴대폰 카메라에 담는다. 그러면서 결국은 빛이 바래지고 바스라질 내 모습을 생각한다. 모든것이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만이 마지막까지 남을 하나의 명제다.

메모를 정리한다. 마음속에서 사그라든 문장을 지우고 또 지운다. 우리가 모두 사라질 것이고 그럼에도 내게는 너 뿐이다. 모든 사라질 것들에게도 의미가 있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난다. 여섯시에 일어나서 내가 가장 총명한 시간에 가장 깊은 잠에 빠진 아내를 본다. 정반대의 싸이클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닿아있다. 엊저녁에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돈 맥클레인의 빈센트를 듣다가 가사가 참 좋다고 했더니 아내가 내 말뜻을 이해하고 웃었다. 난 starry night이 무슨 뜻인지도 모른다. 이런 순간이 나를 기쁘게 한다.

내일 결혼식 때문에 오늘 서울 간다. 친구들과 술약속을 잡았더니 아내가 '너는 나랑만 떨어지면 술이냐.'고 한다. 너를 제외한 모든 추억이 다 술이라고 했다. 이런 순간도 나를 기쁘게 한다.

사는 게 남루하고 지루했다가 너를 보면 괜찮아졌다가 함께 울고 싶었다가 힘내야지 생각했다가 우리가 안타깝고 안쓰러웠다가 그러다가 웃다가 너는 세상에 우리 건 없다고 하고 나는 인사말만 아는 이국땅에서 평생 인사만 하면서 이방인으로 살아도 지금보다 나을 것 같단 생각을 한다.

결국은 또 사랑얘긴가?
뭐가 뭔진 모르겠지만 직업이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써야지.



AND

현재진행형


인사말만 아는 이국땅에서
일테면 아르헨티나 최남단 우수아이아 같은 곳에서
올라, 께딸, 그라시아스 같은 말만 하면서 평생 이방인으로 살았으면

강원도 정선군 해발 700미터 백복령 골짜기에서
감자랑 수수 심어 먹고
겨울엔 고구마 쪄 먹으면서
굶어 죽거나 얼어 죽지 않을 정도로만
그럭저럭 살았으면

누구도 살지 않은 삶
레퍼런스가 없는 삶
그래서 예술적인 삶을 살았으면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고요를 살 수는 없다
현실은 모든 것이 모든 것의 레퍼런스

삶은 그저 현재 진행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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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기월식


지구 그림자가
한 걸음씩 달을 가린다
나는 밤의 한 가운데서
지구의 속도로 죄를 씻는다
내 죄가 새까맣게 지워질까
지구는 어째서 죄 없는 달을 가려
자신의 죄를 씻으려 하나
아무것도 의심하지 말라
지구를 털어낸 달은
둥글게,
둥글게만 빛나고 있다


AND

잘못

우리는 이유를 붙일 줄 몰라서
이유도 없이 술을 마셨다
혀가 타도록 독주를 마셨다
다음날 해장술을 먹다가
술버릇이 잘못됐다고
다시 태어나란 얘기를 들었다
난 잘못한 것도 없다고 했더니
너는 그게 잘못이라고 했다
가만히 있으면 속만 상하는 세상에
너를 제외한 모든 추억이 술이다
너는 나에게만 직설적이다
AND

체념

심장이 터져봤자 피바다
세계를 한 단어로 압축해도 세계
그리고
나는 나
AND



판에 박힌 말만 내뱉는 혀가 싫었다
맛있는 것만 찾는 꼴이 보기 싫었다
혀를 잘랐다
잘라낸 자리가 꾸득꾸득해지고
자른 혀가 딱딱해질 무렵
너를 만났다
너는 남쪽에서 온 소녀
사랑에 빠졌다
말로 마음을 전할 방법이 없어
편지를 적었다
판에 박힌 글이었다
진심이 전해질리 없었다
손가락도 잘라낼까 생각하다가
주머니에서 혀를 꺼내서
네 손바닥에 내 이름을 적었다
다음 단어를 시작하기도 전에
네가 나를 안았다
네 이마와 뺨과 입술에
내 혀를 갖다댔다
네 입안에 혀를 집어 넣자
혀에 침이 고였다
그대로 키스
흥건한 침으로 사랑의 춤을 추었다
사랑의 말을 할 수 있게 됐다
아, 너는 혀가 없는 사람
다시 혀를 자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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