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생과 잠의 경계 어딘가에
이승과 저승의 경계처럼
삶도 아니고 죽음도 아닌 거기에
온전한 나의 세상이 있다
하늘도 땅도 해와 달과 별도 없는 곳
백 만 개의 언어가 하늘을 떠돌고
그 글자들 사이사이로
내가 아는 얼굴들이 팔 다리도 없이
내게로 다가오며 공허의 비명을 지른다
이곳의 말과 얼굴과 소리안에
나는 없다
너는 없다
전부 나이거나
전부 너인 세계
우리가 아닌 세계
아무것도 갈구하지 않는 세계
깨어나면 아쉽고 잠이 들면 계속 이어지지 않는
그런 세계가 있다
AND

보고 싶다

나이 어린 조카들이
동생과 이혼한 지들 엄마 보고 싶다고 운다
명절에 부모들이 상에 치킨과 피자를 올려놓고 운다
믹스 커피를 마실 때마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생각난다
한 청년이 막걸리집 문 앞에서 비를 맞으며 영숙이란 이름을 목놓아 부른다
어쩌면 이 청년이 나였을까
깊은 밤 선잠에서 깨자 마자 네 얼굴이 떠올라서 운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일,
보고싶다
AND

툇마루

온종일 콩밭에 김을 매고
더 이상 지칠 수도 없는 몸으로
툇마루에 앉아서
지는 해를 바라보며
막걸리를 마셔본 적 있는가
나를 찾아온 친구와 함께 술을 마시다
석양을 맞으며 대자로 뻗어서
잠들어 본 적 있는가
겨울 오후 먹이를 찾아 툇마루에 올라온
고양이 새끼를 쓰다듬은 일은 어떠한가
비 오는 날 툇마루에 누워
떨어지는 빗방울을 세며 담배를 피워도 좋을 것이다
담배 연기는 하늘로만 하늘로만 흩어질 것이다
그 툇마루에 햇빛과 달빛과 별빛이
당신과 나의 삶이 그리고 죽음이
쌓이고 쌓이고 또 쌓일 것이다
AND

실업급여


병신년 겨울
우랄 블로킹이 만든
우라질 추위

내 동료이거나
학교 후배
친구의 아내이거나
옆집 아저씨
아버지의 친구이거나
나보다 두 배는 오래 살았을 아주머니

정년이거나
계약이 끝났거나
회사가 망했거나
억지로 그만두게 됐거나
아직 밀린 돈을 못 받은 사람들
나랑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고용센터에 모였다

일 마치면 몸이 힘들어서
일 없으면 마음이 괴로워서
매일 술을 마시고
담뱃값이 아무리 올라도
어려서 배운 담배는 끊을 길이 없다
월세 살고 백 만원 짜리 고물차를 타도
각종 세금을 한 번도 밀려본 적 없다

이런 나에게
그 동안 고생 했다고
얼른 다시 일 하라고
나라에서 돈을 주네
겨울에 일 없는 일용직에게
먹고는 살라고 공짜돈을 쥐어주네

이렇게나 친절한 내 나라에게 감사할까
이런 나라를 만들어 준 조상님께 감사할까
무엇에 감사해야 할 지 모르겠는 사이에 교육이 끝났다

- 이따가 돈 입금될거에요

사람들이
그리고 삶들이
소리없이 흩어진다
AND

권태기


이유도 없이 네가 너무 예뻐서
비정상이란 소릴 들었는데
요즘은 이유도 없이 당신이 밉다
당신 목소리만 들어도 화가 난다
한 마디 한 마디가 내 속을 박박 갈아 먹는다
네 말이 입을 벌려 나를 잡아 먹는다
네 얼굴을 보는 일이 나를 겁박한다
밥도 설거지도 청소도 빨래도 다 귀찮다
세상을 잘못 살았을까
너를 사랑하지 않게 된 걸까
분을 못 견디고
당신 앞에서 독을 내뿜고
남들 앞에서 당신에게 면박을 준다
이런 못난 나를 보고도
괜히 큰소리치지 말라고 웃어넘기는 아내가 예쁘다

오늘밤에
우리 좀 더 적극적으로 잘래요?

AND

흐르다

강물이 흐르고
파도가 흐른다
세월이 흐르고
삶이 흐른다
내가 흐르고
당신이 흐른다
당신 젖가슴 사이로
내 팔이 흐르고
내 다리 사이로
당신 다리가 흐른다
서로에게 기대어
우리가 흐른다
AND

도플갱어

시베리아 어디쯤에 사는 고려인 중에
나랑 똑같이 생긴 사람 하나 있으면 좋겠다
담비털로 만든 목도리를 두른 그이가
바이칼 호수에서 물고기를 잡고
툰드라 지역에서 순록을 기르고
순록 가죽을 밀이나 감자와 교환하고
백야의 여름밤엔 동굴 같은 집에서 나와
하늘을 보며 아내와 술도 한 잔 마시고
집 안에는 나를 닮은 아이들이 끌어안고 잠들어 있으면 좋겠다
나랑 마음씨는 다르겠지만
또 다른 나는 그렇게 살아줬으면 좋겠다
AND

삼치 조림


잘 다듬어진 생물 삼치
한 겨울에도 싱싱한 제주도 무우
냉장고에서 썩지도 않는 철지난 마늘
이토록 편하고 쉬운 세상에
간장 고추장 설탕 고추가루 같이 기본적인 양념만 있으면
누구나 만들 수 있는 쉬운 요리
당신을 위해 만들지만
나를 위해서 무우 위에 감자도 깔고
내가 바라는 우리 사랑처럼
그 위에 삼치를 예쁘게 덮고
이것저것 섞은 양념장을 생선 위에 얹는다
간도 보지 않은 내 사랑이 익어간다
아차, 사랑을 너무 쉽게 생각했을까
양념장에 설탕을 넣지 않았네
달콤함이 빠진 사랑은 너무 슬프지
익어가는 생선 위에 설탕을 뿌린다
뒤늦게 간을 본다
아차차, 너무 달다
달콤하기만한 사랑은 마지막에 울게 되지
하지만 이제 돌이킬 수 없다
이런 내 조바심도 모르고
달지만 맛있다고 밥 한 그릇 뚝딱 해치우는
당신 모습이 찐하다
사랑은 달아도 짜도 상관 없는 것
간을 못 맞춘 삼치조림 같은 것


AND

그리움


내 그리움의 가로와 세로를 곱하면
9만 제곱미터, 삼만평짜리 들판이 된다
거기에 당신을 가두고
내 그리움의 높이만큼 벽을 쌓는다
내 사랑에 갇혀 꼼짝달싹 못할 당신을 바랐으나
당신은 지붕이 없는 내 울타리의 빈틈으로
자꾸만 삐져나오고
내 그리움으로 하늘까지는 가릴 수 없음이
내 안에 있지 않은 당신이
나는 서럽다
이 운명인지 필연인지 모를 일에
사랑인지 집착인지 모를 일에
손끝이 뭉게지도록
쉬지 않고 돌담만 쌓아 올리고 있다

AND

우리집

해 들어오면 덥고
바람 들어오면 춥다
햇볕 통하면 따뜻하고
바람 통하면 시원하다
당신 얼굴에 내 그림자가
내 몸에 당신 그림자가 들어오고
눈빛 마주칠 때마다
너와 내가 서로 통하는 곳
월세 30만원
월드클라스 우리집
AND

띠동갑 - 삼재(三災)

나는 회사에서 구조조정 얘기가 나오는데
너는 커피 가게 알바를 하며 취업 준비를 하고 있네
나랑 같은 버스를 타기 위해 무단횡단을 하고 내쪽으로 총총 다가오던 너
같은 정류장에 내려서 다른 색깔의 지하철을 탔던 너
너는 흰옷을 입었고
나는 마음이 발가벗겨진 그날
그렇게 얼굴 한 번 보고는
애인이 있는 너에게
일주일에 한 번씩 애인 있냐고 물었던 나
널 어떻게 해야될지 모르겠어서
가만히 있었던 나
초면에 사랑했으니
이제는 이별해도 무방하다
우리는 삼재(三災)도 같이 들어왔다 같이 나가는 띠동갑
삼재가 시작되는 올해에
아직 음력설이 지나지 않은 연초에
오해 없이 미련 없이
그저 헤어지자
삼 년만 서로 괴로워하자
AND

떠돌이

대리석 욕조에 몸을 담그고
최고급 호텔에서 잠을 자도
팔도강산에 하룻밤 재워 주겠다는 친구들이 있어도
매일밤 나를 안아주는 여인이 바뀌어도
내 방 하나 없는 인생은
당신이 없는 삶은
푸석푸석할 뿐
먼지로 떠돌 뿐
AND

오후 세 시의 시장 아저씨

1톤 트럭 짐칸에서 튀김옷을 반죽하는 아저씨
정육점 냉장고를 청소하는 아저씨
김이 모락모락 나는 떡을 매대에 올려놓는 아저씨
브로콜리며 양상추 같은 걸 정리하고 있는 아저씨
전 부치는 아줌마 뒤에서 그릇 설거지 하는 아저씨
기름솥에 닭 집어넣는 아저씨
늦은 점심을 허겁지겁 먹는 생선가게 아저씨
내일 빵을 위해 밀가루 반죽하는 아저씨
폐업정리를 외치는 속옷가게 아저씨
지나는 사람들을 멍하게 바라보는 족발집 아저씨
손님과 소주 한 잔 찌끌이는 순대국집 아저씨
결혼 전까지 나를 키워준 시장 골목
지난달에 문을 닫은 명동라사
굳게 내려진 셔터
지금은 세상에 없는 우리 아버지

AND

오늘밤


만취하면
사랑 그까짓 것
적당히 취하면
사랑 그런 것
맨정신엔
당신 뿐

오타를 바로 잡을 수 있을 만큼만 취한 밤에
이 한 줄을 쓰기 위해 빽 스페이스 열 번을 누른 밤에
'어'가 아가 되고 '여'가 야가 되는 밤에
글을 마칠 때면 세상이 끝나도 모를만큼 무너저 버릴 것 같은 밤에
허세만 남은 밤에
당신이 곁에 없는 이 밤에
사랑이란 말을 함부로 할 수 있는 오늘밤에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AND

길을 걷다가 별 이유도 없이 반대편에서 걸어오던 7살 짜리 애를 개패듯이 팼다. 바닥에 누워서 꼼짝도 못하는 애 머리를 발로 짓밟고 만 원 짜리 한 장을 입에 구겨 넣었다. 이렇게 하면 법적으로 아무 문제 없는 나라가 있다. 그 어린이가 50년 후에 나를 찾아냈다. 사과를 원하는 친구에게 나는 이미 50년 전에 끝난 일이고 법적으로도 문제가 없다며 차갑게 고개를 돌린다.
가슴이나 머리, 둘 중에 하나만 있는 사람이라면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이런 나라에 살 수 있을까?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쉽게 설명하면 이런거라고 생각한다.
원통해서 나오는 피눈물이 아니라 할머니들 가슴에서 나오는 뜨거운 눈물로 과거를 용서할 수 있는 사과를 원한다.

오늘 수요시위 다녀왔다.

속상하고 욕 나온다.
AND

날아갈까


돌아가신 할머니 방에는
잡동사니가 쌓이고
내 방에는 버리지 못한 책이며
옷가지들만 쌓인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내 방을 퇴적암 같다고 놀리고
더는 새로울 것이 없는 방에서
오래된 친구와 술을 마신다
술병이 쌓이고
빈 그릇이 쌓이고
추억이 쌓인다
멈추지 않는 시간까지도
모두 쌓이는데
10년을 쌓아온 사랑만은
날개도 달지 않고 날아갔다
나에게만은 대담했던 너
내 안의 작은새여
잘했다고 떠들어 봐야
결국은 나를 겹겹이 감싸주던
널 찾고 있다
네 외로움을 모르고 너를 만났다
미안함은 계속 쌓여가고
무거워진 나는
어떻게 너에게 날아갈까

AND

영어공부


우리 지금부터 영어로만 말할까

예스, 알러뷰
뭐래
예스, 알러뷰
왜 이래
예스, 알러뷰
헤이 유
예스, 알러뷰
왓아유 토킹어바웃 베이비
예스, 알러뷰
죽을래?
예스, 알러뷰

내가 아는 유일한 영어
예스,
알러뷰
AND

애주가

 

해장침을 맞아가면서도 마신다
술로 몸이 힘들어도 하루 쉬고 다음날 마시면
다시 나를 살아있게 한다
정월대보름엔 보름달만큼 취하고
크리스마스 이브엔 예수 태어나는 줄도 모르고 마신다
필름이 끊기면 그런가보다 한다
반쯤 꼬인 혀로 세상에 대한 독을 내뿜는 일이
대취한 다음날 오후에 찾아오는 마음의 평온함이 너무 좋다

술 먹다가 내 앞에 앉은 사람과 눈을 마주치고 얘기하면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
나는 매일 새롭게 사랑하는 사람
마셔도 마셔도 후회는 없다
AND

대설

눈이 내리붓는 날
교통이 통제된
414번 지방도에
차를 몰고 가서
만항재에서 담배 한 대 피우고
세상이 내게만 허락한
눈풍경을 보다가
너무 아름다워서
그 자리에 서서 밤새 펑펑 울고
내 키를 덮도록 내린 눈에 묻혀서
얼어 죽고 싶다
AND

양꼬치를 먹다 - 가리봉 양꼬치 -


중국 사람이건 한국 사람이건
후줄근한 사람이 후줄근하긴 세계 공통이다
북쪽 대륙 사람의 얼굴에
추위와 피로를 잔뜩 묻힌 사내가
퇴근 시간도 전에 혼자 앉아서
양꼬치를 씹는다
밤을 맞이하는 의식을 치르듯이
한 점 한 점 양념을 발라서
한 점 한 점 정성스럽게
쇠막대기에서 뽑아 먹는다
술도 한 잔 없이
양꼬치 1인분을 먹고
후줄근한 만 원 짜리 한 장을
테이블 위에 딱 소리 나게 올려 놓고는
가게를 나간다

어디 잘 곳은 있습니까?
조선말로 묻지 못하였다

사내가 나간 자리를 또 다른 사내가 채운다
출입문 앞자리는 혼자 앉아서
저녁 식사를 해결하는 자리
이번에도 북쪽 대륙의 얼굴이다
스물 다섯이나 되었을까
말끔하게 차려 입은 젊은이다
미리 시켜 놨을까
자리에 앉자 마자 물만두가 나온다
만두 한 개 한 개를 간장 그릇에 담그고
만두피 전체에 간장을 듬뿍 발라서
빠른 속도로 먹어 나간다
혼자 먹는 저녁은 종교와 같은 것
젠틀하게 사장에게 오천원을 건네곤
이제 막 불을 밝히는 거리 속으로 사라진다

저기요, 물만두도 한 접시 주세요
혼자 양꼬치를 먹던 나는
중국인 사장에게 수줍게 조선말을 했다


AND

사랑


보일러 한 번 안 돌리고
소한 추위를 맞아도
온수매트 위에
납작 엎드려서
서로 깍지를 끼고 자도
자고 일어난 아침이면
수족냉증이라
이 세상 사람 것 같지 않던
네 차가운 손과 발에
온기가 도는 일

AND

명언

명언의 반대말도 명언이다
아니면 궤변인가
아는 것이 힘이다
모르는 것이 죄다
모르는 것이 약인가
명언의 반대말도 명언이다
AND

기울기


y=ax
y는 당신
x는 나
a는 내 사랑의 기울기
a값이 뭐든
나는 당신쪽으로만 기운다
많이 기운날도 있고
조금 기운날도 있다
우리 사랑은 평면 위에 끝없이 뻗어나가는 직선
일차 함수 같은 직선의 사랑

AND

오징어 볶음


나는 우리집에서 요리를 제일 잘 하는 사람
간 안 보고 요리해도 다 맛있다
헌데, 점심은 귀찮아서 김치 볶음밥
저녁엔 뭐라도 만들어 먹어야지
종일 일하고 돌아온 당신과
맛있게 먹어야지

먼저 담배 냄새나는 손을 비누로 씻는다
당신이 좋아하는 양파는 많이 넣어야지
당근이 하나 밖에 없네
감자도 넣어야겠다
양념장에 들어갈 마늘도 준비해야지
양파 껍질을 벗기면서
매일 새로운 당신을 생각한다
당근을 자르면서
갈라지지 않는 우리 사랑이 자랑스럽다
양파 당근 감자를 순서대로 볶는다
오징어를 넣기 전에 양념장을 만든다
고추장 고춧가루 간장 마늘 소주 참기름을 뒤섞는다
언젠가 뒤섞인 사랑 때문에
당신과 나 모두 엇나간 적이 있었다
오징어를 넣고 양념장을 넣는다
오징어는 바다 생물
약불에 끓이면 물이 나온다
매일 샘솟는 내 사랑 같다
나는 먹지 않지만
당신이 좋아하는 대파를 넣는다
마지막엔 강불로 졸여서 마무리
요리의 끝이 사랑의 시작
소면을 삶아서 같이 먹을까, 생각하며
당신을 기다린다

친구한테 술 먹자고 전화가 온다

여보, 미안해요
오늘 저녁은 혼자 먹어요

AND

사랑, 그게 다 무엇이냐

사랑, 그게 다 무엇이냐?

일곱살 먹은 아이가 아빠 또 결혼해, 라고 아내에게 묻는 것?
내 애인과 정반대인 사람에게 끌리는 것?
내 팔에 바늘을 찌르는 간호사 언니를 보기 위해 때마다 헌혈하는 것?
나보다 동생일지도 모르는 미장원 아줌마가 나한테 잘해주는 것?
노래방에서 환상의 여인을 만나는 것?
심사숙고 해서 끓인 라면을 이름도 모르는 너와 함께 먹는 것?

나는 짝꿍이 없으면 담배도 못 피우는 사람

오늘은 그저
복상사하기 좋은 날
너와 나 모두가 좋은 날

사랑, 그게 다 무엇이냐?
AND

수녀원을 나오다


모든 것을 버리고
수녀가 되려 했다

수녀원의 모든 십자가에는
죽은 예수가 매달려 있고
나는 날마다 죄인이었다

죄인으로 살고 싶지 않아
수녀원을 나왔다

나는 남의 말을 듣지 않고
열정적으로 떠들던 사람
수녀원에서는 폭발하지 않고
반감됐던 분노가 요요현상으로 되돌아 왔다

- 이런 지랄 씹탱구리

나는 멀건 가깝건
되짚어 가는 걸 싫어하는 사람
수녀원을 나와서 사주를 배웠다
사주를 가르쳐 준 사람이
나는 뜨거운 사람이라고 했다

연월일시 천간 지지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

나는 불을 갖고 태어난 사람
나는 화를 태워야 사는 사람
나는 남자 운이 없는 사람

모든 일상이 기도였는데
기도가 사주가 되어 돌아왔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지만

나도 세상도 그대로인 게
내 인생이 내 사주를 닮은 게

조금 쓸쓸할 뿐
조금 씁쓸할 뿐
AND

금연


담배를 끊으면
새 사람이 될 줄 알았는데
그렇질 않네
나는 줄 게 없으면
미안해서 개도 부르지 못하는 사람인데
왜 모질다는 소리까지 들어가며 끊었을까
담배는 끊는 게 아니라 평생 참는 거라는데
언제까지 참을 수 있을까
나는 니가 보고 싶어서
자다 깨서도 우는 사람인데

그리움의 연기를 내뱉지 않으면
너를 내 가슴속에만
계속 묻어둘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꿈에서만 보고 싶을 줄 알았는데
그렇질 않네
너는 찻집에서 처음 만난 낯 모르는 사람에게
꽃을 줘서 보내는 사람인데
겨울 지나 봄이 올 때처럼
한꺼번에 나에게 불어온 바람이었는데

이 밤이 다 타도록
빈 재떨이만 쳐다보고 있다
애꿎은 라이타만 만지작거리고 앉았다

AND

버려진 볍씨

여기, 종자로 남겨졌으나
싹을 틔우지 못한 볍씨가 있다
껍데기를 벗고
익혀져 밥이 되지도 못하고
싹을 틔워
대도 잇지 못한 볍씨가 있다
같은 운명의 동료들과 함께
논 가장자리에 버려진
볍씨가 있다
그 볍씨를 지나가던 새가 먹는다
그 새가 살아서 대를 잇는다
그 새를 또 다른 새가 먹는다
또 다른 새가 똥을 눈다
또 다른 새가 대를 잇는다
또 다른 새를 인간이 먹는다
인간이 대를 잇는다
그리고 언젠간 죽는다
똥은 거름이 되고
죽은 것들은 흙이 된다
이렇게,
버려진 볍씨 하나가
세계의 균형과 우주의 질서 안에 있다
내 안에 있다
AND

교차로에서

깨져 버린 약속 같은 날
하늘에선 비가 내리고
나는 교차로에서,
엇갈린 연인들의 운명을
몸을 던진 여인의 흔적을 쫓는다
비가 먼저 그쳤을까
밤이 먼저 찾아왔을까
거리는 정적 속에 붉은 빛을 밝힌다
나는 새로운 약속을 만들고
그것마저도 깨져 버리길 바라며
황급히 교차로를 떠난다
AND

겨울

엄마가 꽁꽁 싸매준대로 입고
자기 몸통만한 가방을 매고
학교에 가는 꼬마들
버스에서 방금 내린 여인의
겹겹을 벗겨 내리면
우주가 기다릴까
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