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리


순댓국 집에서 혼자 밥 먹는데
숟가락을 두 개 꺼냈다
자리가 하나 빈다
결혼을 하려고 하니까 네가 없다
네 손에 내 손을 비빌 때 흐르던 정전기가 그립다
내 손이 자리를 잃었다
내 세계에 울려 퍼지던 네 웃음소리가
환청으로만 내 귓가에 맴돈다
아, 이것은 실제 하지 않는 것
네 웃음도 자리를 잃었다
너는 퇴색이란 단어를
눈을 빛내며 말하던 사람
나는 비밀이 많은 사람
너는 모르는 것이 많았던 사람
내가 속내를 털어놓는 건 내 친구지만
내가 사랑하는 건 당신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일부러라도 달아나고 싶었다
문득,
어느샌가,
돌아보니,
그러하였던 것들 중에
네 빈자리가 있다

AND

부음을 듣다

깊은 잠에 빠진 아내의 발이
옆에 누운 내 다리 밑으로 파고 들고
고요한 숨소리가 유난히 선명한 새벽에
무방비 상태의 아내가
나를 가장 사랑하는 안온한 시간에
먼데 있는 사람의 부음을 들었다
잠이 달아나고
시간이 멈추었다
나는 아직 죽음을 모르는구나
진실로 죽고 싶은 적이 없었구나
가장 큰 슬픔을 모르는구나
그 깊이를 모르는구나
마음이 안 좋다는 말을
살면서 처음 마음으로 알았다
살아서 사람이니
살아야 사람이니
살아야 한다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
헌데 살아야 한다는 한 줄이
누구를 위한 것인가
삶과 죽음이 한통속이란 것이
아무런 위로도 되지 않는다
강단있고 선량한 당신의 눈을 생각하며
살아 있는 우리를 위해서
살아간다고
그래도 살아간다고
당신에게 편지를 써야겠다
AND

겨울


입동 지나니 시간이 안간다
시간이 얼어붙었나
나는 겨울비에 얼어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
가만히 밤이 오고
다시 비가 내린다
어제 날짜까지의 컵라면에
어제 해 둔 찬밥을 말아서
콧물을 훌쩍이며 먹는다
파리 한 마리가 라면 위를 난다
이 집에 썩는 것이라곤
내 몸뚱아리와 녀석 몸뚱아리 뿐이다
날 수 있는 몸이 부러워서
그냥 둬도 얼어죽을 녀석을
어차피 썩어갈 녀석을 때려잡는다
어째서일까
파리를 잡아도 밥을 먹어도
멈춘 시간에 허기만 쌓인다
허기진 삶을 먹는 일로만 채웠더니
뱃속에 사막 같은 똥이 들어찼다
수음을 하다가 똥을 싸고
똥을 싸면서 담배 연기를 내뿜는다
쏟아내는 일들로 허기가 채워질까
결국, 먹는 일로 허기를 채우려
어제 날짜까지의 컵라면에
어제 끓여둔 물을 붓고
다시 어두운 식탁에 앉는다
어디선가 날아온 파리 한 마리
식탁 위를 날다 라면 위에 앉는다
이번엔 애써 잡지 않는다
나는 어제까지만 살았다

AND

'한국에서 돈 벌려면 학원을 해야 한다.'
언젠가 노량진에서 술 마시다가 친구에게 들은 말이다.

어제 불후의 명곡 지오디 편을 보는데 문득, 에이치오티, 지오디 등으로 대표되는 아이돌 1세대 이후의 우리나라 아이돌은 학원 산업의 결과물이란 생각이 들었다. '돈 된다. 학원 내자.' 이런 느낌이랄까

걸그룹 여자친구의 퍼포먼스를 처음으로 봤는데, 정말 열심히 하더라. 틴탑이란 팀도 마찬가지였다. 직업이니까 당연히 열심히 하는걸까? 나는 농사 지을때를 포함해서 내 직업에 한 번도 최고의 전력을 다한 적이 없다. 글 쓰기는 전력을 다하는 편인데, 아직 직업이 아니라 그런것 같다. 여하튼 그들의 무대가 보기 좋았다. 오프닝 공연을 했던 지오디는 여유와 관록이 느껴졌다. 다 내 또래들인데 벌써 뱃속에 영감님이 들어앉은 느낌이랄까. 아이돌이란 게 평범하게 학교 다니는 사람들보다 일찍 직업 전선에 뛰어들다보니 이런저런 일들도 남들보다 빨리 겪을 것이고 업계 특성상 더러운 꼴도 많이 보다보니 순차적으로 세상을 사는 사람들보다 빨리 늙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하려던 얘기로 돌아가서, 공무원 시험 공부하듯. 노래며 랩, 춤을 배워서 뛰어난 친구들이 데뷔한다. 데뷔라는 1차 경쟁을 통과해도 다른팀보다 유명해지고 살아 남아야 하는 2차 경쟁이 기다리고 있다. 과학고등학교 학생들이 명문대 가려고 경쟁하는 거랑 비슷하다. 다 잘하는 데 남들보다 더 잘해야 한다. 여러 단계를 거치며 우승자를 뽑는 오디션 프로도 이거랑 같은 구조다. 근데 심사위원들이 좋아하는 참가자는 대체로 학원 안 다닌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친구들이다. - 외국에서 온 친구들 - 그런 친구들을 뽑아서 자기네 학원에 데려간다. - 케이팝 스타가 그렇지 - 대학입시로 치자면 수능 만점자 같은 건데, 그런 친구들도 업계에서 이름을 떨친다는 보장이 없다.

엔터테인먼트 사업 뿐 아니라 사회 전체가 젊은이들에게 너무 한정된 꿈과 그 꿈을 이루기 위한 경쟁을 강요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미디어가 그걸 돕고 주위 사람들은 부추긴다. 슬프고 아픈일이다.

항상 의심하면서 살아야지.

덧붙임,

얼마전에 우연히 소녀시대가 라이온 하트 부르는 걸 봤는데, 깡마른 친구들이 흰 옷을 헐벗은듯 하게 입고 나왔더랬다. 팬들에게 미안하지만 전쟁고아들 보는 거 같았다. - 북두의 권 -

올해 정말 좋게 들은 걸그룹 노래 3곡

1. 여자친구 - 오늘부터 우리는, 노래가 그냥 좋았다.
2. 러블리즈 - 아추, 작년에 에이핑크가 부른 미스터 츄란 노래를 많이 들었는데 그 곡은 약간 평범한 진행으로 좋다는 느낌이라면 이 곡은 뭔가 다르다
3. 레드벨벳 - 덤덤, 테일러 스위프트가 최근에 이런곡들 많이 하는 거 같던데.
AND

나무

나무는 평생 한 자리에서만 사랑한다
나이테 하나씩 늘어갈 수록
그 자리에서 점점 둥글게 커가는 인생
그것이 그대로 삶인 나무
나무가 되지 못하고 흔들리는 내 사랑은
잠시도 가만히 있질 못하여
이리저리 삐뚤빼뚤 튀어 나가려고만 한다
당신에게서 다른 당신에게로
그리고 또 다른 당신에게로
자꾸만 다른 곳을 보려고 한다
하여 이제부터 나는 나무를 사랑하련다
첫사랑의 이름을 붙인
나의 자작나무 은수
너를 부둥켜안고 둥글게만 둥글게만 사랑하련다
그렇게 억겁의 시간이 흐르면
나도 나무가 되련다
AND



사랑이 그 자체로 詩인 것처럼
죽음도 그 자체로 詩다
죽을만큼 사랑한다는 건 시시한 詩
죽어서도 사랑한다는 건 거짓부렁 詩
산자가 죽은자를 사랑하는 건 세상에서 가장 슬픈 詩
사랑의 詩를 팔아서 너에게 따스한 밥을 먹이는 건 안타까운 詩
그런 너의 죽음은 팔아서는 안되는 詩
AND

뜨끈뜨끈해


뜨끈뜨끈해 뜨끈뜨끈해
너를보면
뜨끈뜨끈해 뜨끈뜨끈해
내 마음이
뜨끈뜨끈해 뜨끈뜨끈해
불꽃처럼

말랑말랑해 말랑말랑해
너를보면
말랑말랑해 말랑말랑해
내 마음이
말랑말랑해 말랑말랑해
젤리처럼

끈적끈적해 끈적끈적해
너를보면
끈적끈적해 끈적끈적해
내 마음이
끈적끈적해 끈적끈적해
송진처럼

뜨끈뜨끈해 뜨끈뜨끈해
말랑말랑해 말랑말랑해
끈적끈적해 끈적끈적해

 

song ver


뜨끈뜨끈해
너를보면(1 4)
뜨끈뜨끈해
내 마음이(1 5)
뜨끈뜨끈해
불꽃처럼(1 3)
뜨끈x3 (1 5 4 1)

말랑말랑해
너를보면
말랑말랑해
내 마음이
말랑말랑해
젤리처럼
말랑말랑해x3

끈적끈적해
너를보면
끈적끈적해
내 마음이
끈적끈적해
벌꿀처럼

뜨끈뜨끈해 내 마음이 뜨끈뜨끈해 햇살처럼(1 4 1 5)
말랑말랑해 내 마음이 말랑말랑해 꿈속처럼
끈적끈적해 내 마음이 끈적끈적해 키스처럼

뜨끈뜨끈해 뜨끈뜨끈해(1 4)
다정한 날 봄비처럼 뜨끈뜨끈해(1 5 4 1)
뜨끈뜨끈해 뜨끈뜨끈해(1 4)
너를 보는 내 마음이 뜨끈뜨끈해 

AND

일자무식 뮤즈

너는 수학여행 때도 서울 구경 못한
강원도 촌놈
네가 나에게 많이 하는 말,
내 말이 맞제
내 마음 알제
알제는 알제리의 수도
그르니에와 까뮈의 도시
하지만 너는 까뮈를 모른다
내가 너에게 자꾸 하는 말,
너는 나의 뮤즈
하지만 너는 뮤즈란 말을 모른다
일자무식이 뭔 말인지 알지만
일자무식인 나의 뮤즈
구리스가 없으면 세상이 뻑뻑하게 돌아간다고
실리콘이 없으면 틈이 안 메워져서 세상이 헐겁게 돌아간다고
불이 없으면 겨울에 추워 빠져서 살 수가 없다고
철은 드는 게 아니라 먹는 거라고
이건희 갸는 병원비 걱정이 없다고 하며,
웃기만 하는 나의 뮤즈
사람이 사리분별을 할 줄 알기 때문에 사람이지만
사람은 금전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고
그래서 본인은 분별없이 산다고 하며,
인상을 찡그리기도 하는 나의 뮤즈
AND

모습

어느 아침, 기억을 잃은 어제를 후회하며
인생은 쌓아가거나 쌓여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당신을 만나고 당신과 헤어지고
또 당신과 만나고 당신을 사랑하고
헤어지지 않으리라 결심했다가
이내 헤어지고는 괴로워하고
괴로워하는 일들이 쌓이고 쌓여서
내가 내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아가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거라 생각했다

오늘 아침, 어제에 대한 또렷한 기억들에 괴로워하며
술잔 앞에 쏟아졌던 당신의 말을 생각한다
인생은 깎아가는 것이라고
삶은 언제나 깎여나갈 뿐
쌓여서 나아가는 인생 따위는 없다고
남아 있는 목숨처럼
지나간 시간만큼 줄어들기만 할 뿐이라고
그러니 괴로워 말고 다시 시작하자고
당신은 말했다

생의 모습은 쌓이지도 깎이지도 않는다
이제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
AND

월급날

퇴근길에 비를 맞습니다
자전거 위에 앉은 안경 위로
빗줄기가 식은땀이 되어 흐릅니다
눈앞이 흐립니다
마트 앞에서 전화기를 들여다보며
입금 문자만 기다립니다
오늘도 한 잔 마셔야 잠들 수 있습니다
집에 돌아와서 비를 씻습니다
구겨진 허리를 벽에 기대고 술을 마십니다
통증이 사라지고 피로가 가십니다
망각이라는 미궁속으로 점점 빠져들어 갑니다
내일은 월세도 내고
얻어 피운 담배도 갚아야 합니다
내일 같은 것 없어도 좋겠습니다
점점 추워지고 겨울밤은 까맣습니다
당신이 없어도
서럽지는 않습니다
AND

다음주 월요일이 아버지 생신이라 엄마가 이번 일요일에 우리 부부를 오산으로 소환했다. 주말마다 일정이 있어서 피곤하긴 한데, 엄마가 문어 먹고 싶다고 해서 한 마리 사 들고 가기로 결정했다.

어제 영화 '나쁜 나라'를 봤다. 영화적인 완성도보다는 기록으로서의 가치가 더 중요할 수도 있는 법이다. 해도해도 아무것도 되지 않을 때의 절망을 본다. 거리에서 자고 첨탑에 올라가고 머리를 밀고 곡기를 끊어도 법이란 것이 시스템이란 것이 꿈쩍도 하지 않고 되려 손가락질 하는 사람들만 늘어날 때의 절망을 본다.

지난주에 동료들이랑 이런저런 얘기하다가 놀러 가다 잘못 되서 죽은 걸 국가 세금으로 보상금을 그렇게 많이 주냐, 수학 여행 한 번 잘 보냈다가 대박났다. 처음에 좀 슬프지만 지금쯤은 휘파람 불면서 놀러다닌다는 얘기를 들었다. 이얘기를 한 양반이 21살 먹은 아들을 끔찍히 아끼는 양반이라 본인 아이라도 그렇겠냐고 물으니 자긴 그럴 것 같다고 했다. 머리로 들이 받을까 하다 참았는데, 그냥 들이 받을걸 그랬다.

타인의 슬픔에 공감하는 능력이 부족하다기 보다는 인간의 자질이 부족한 사람이다. 어디서부터 잘못 됐는지 모르지만 아마 아주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야할 터이다. 교육이란 게 중요한 이유다. 이 양반이랑 말을 섞을 수가 없다.

우리 엄마는 박근혜를 너무 좋아하는데, 11월 어느날 내가 전화했을 때, 곧 40살이 되는, 박근혜의 박 자도 듣기 싫어하는 나에게 날이 추워졌으니 따뜻한 물로 씻으란 말을 했다. 부모 자식이란 이런 것이다. 세월호는 정치색이나 이념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돈이 문제가 아닌 것이다. 가족의 죽음을 실시간으로 본다는 것을 내가 물에 잠기는 것 같은 기분을 나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나쁜 나라'는 국민 말고는 아무것도 믿을 수 없다는 희망적인 수식어를 붙였지만 보상금이 어쩌고 하는 사람들이 많은 나라는 정말 나쁜 나라다. 이 나라에서 무엇을 어찌할까.

어제 어머니 두 분이 오셔서 말씀을 하시는데 '국민'이란 단어를 많이 쓰셨다. 마음이 이팠다. 민주주의 국가에 사는 '시민'이 아니라 '국민'이란 단어를 쓰시는 보통 사람들에게 국가도 국민도 절망만을 강요한다.

사람은 사리분별을 할 줄 알아서 사람이다. 보통의 인간이라면, 민주주의의 시민이라면 언제까지나 세월호를 기억해야 한다.
AND

스토커 - 인간적인 짝사랑

인간성이 지극하면
비인간적이 된다
너무 인간적이란 말은
비인간적이란 말이다
인간적으로 너무 예뻐
인간적으로 너무 커
인간적으로 너무 괴로워
인간적으로 이러지 말자
인간적으로 인간적으로 더 인간적으로
우리는 인간이지만
너무 인간적이다
인간적으로 너를 너무 사랑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비인간적으로 살고 싶다
너는 이런 나에게
부담스러우니 저리 가라고
이제 그만하라고
인간적으로 너무하다고 한다


AND

무방비

여름에 굴복해 늘어진 채
내 옆에 누운 애인
양 손에 과자를 쥐고 침을 흘리며
유모차에 누워 잠든 아기
초등학교 정문 앞 문방구 뽑기에
넋을 놓은 꼬맹이들
말복 더위 집에 가다 지쳐
그늘진 길가에 앉아 쉬는 할머니
염색을 마치고 머리 감으려고
고개를 젖히고 의자에 누운 아가씨
치과 진료대에 아아, 하고
입 벌리고 누운 아줌마
결혼 전날
때밀이에게 몸을 맞긴 새신랑
만취 상태에서 마늘 냄새 풍기며
졸음운전하는 아저씨
나는 무방비 상태인 것들을 사랑한다
온통 무방비 상태인 이 세상을 사랑한다
하여,
너의 무방비 앞에
속수무책으로 무방비가 된다
이것이 무방비적인 나의 사랑
AND

체 게바라

내년이면 체가 죽은 나이를 산다
별일 없으면 다음달에 우리 나이로 마흔이 된다
빌어먹을 한국 나이
빌어먹을 빠른 생일
나는,
지금까지는 형이었지만
곧 친구가 되는 그처럼
의기롭게 죽지도 못하고
역사에 이름 한 방울 남기지 못하고
의사 면허 같은 것도 하나 없고
훌륭한 일기를 쓰지도 못하고
떠돌이도 되지 못한 채
나이 먹을 수록 점점 구태의연해 지기만 한다
뻔한 말, 뻔한 사랑, 뻔한 돈, 뻔한 이기심
얄팍한 자존심과 더 얄팍한 애국심으로
하루하루를 연명한다
오늘을 위해 한 일이 없으니 뭐라도 하자는 심정으로
널 품고 나니 세상이 감옥 같다는 핑계로
술을 고되게 먹는다
세상 살며 무리하는 법이 없는데
술 마실 때만 무리한다
설탕이 빠진 밀크 커피를 뽑아내는 커피 자판기 마냥
뭔가를 놓치고 있다
설탕을 채우던 자판기 아줌마가
젊은 사람이 안됐다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더니
커피 설탕 프림이 모두 들어간 밀크 커피를 한 잔 뽑아준다
고맙다고 구태의연한 인사를 날리고
담배를 입에 물어본다
커피와 담배,
이 뻔할 뻔 자같은 뻔뻔함이여
사주가 똑같은 인생도 갈라지는 판이니
내가 그처럼 될 순 없다
이유 없이 사라져도 괜찮은 것이 있다
그게 나는 아니길 바라며
오늘도 내일까지 마셔야겠다
이런 마음을 먹는 내가 부끄럽고
그에게 미안하다
그가 나를 모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그를 아는 것이 내 죄다
그래도 내년에 죽고 싶진 않다
AND



어떤 사내의 마음에 작은 강이 있어
그 강에 아주 작은 물고기 한 마리 살았다
물고기가 바깥 세상을 동경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어느날 그이의 마음에 큰 비가 내려
물고기는 마음 밖으로 헤엄쳐 나왔다
곧 비가 그치고 햇살이 쏟아졌지만
물고기는 돌아갈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자신이 따스한 햇볕 아래 말라 죽을 운명임을 알았다
조금 남아있던 물도 모두 말라 버리고
모래땅 위에서 물고기가 마지막 숨을 몰이쉬던 그때,
마음에 아주 작은 강을 가진 한 소녀가 있어
물고기를 발견하곤 가슴에 품었다
물고기가 죽음을 원했는지
강으로 다시 돌아가는것을 원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소녀의 마음이 넘칠 큰 비가 내릴 때까지
소녀와 함께 살게 되었다
사내와 소녀는 헤어진 연인일 수도 있고
우연히 만나 사랑에 빠질 수도 있을 것이다
작은 물고기가 계속 이렇게 살고 싶은 지는 알 수 없지만
살아 있다면 누군가의 마음 속일 것이다
깊거나 얕거나 넓거나 좁은
마음의 강일 것이다
살아 있다면 누군가의 마음 안에서 꿈틀거릴 것이다
AND

을지로 4가

가슴 속에 앙금이 쌓이듯
술이 내려오는 날이 있다
나는 끝없이 가라앉는 사람
사과는 땅에 떨어지고
풍선은 하늘로 오른다
큰사과는 제삿상에나 올려야지
풍선은 영어로 블룬 불른 불륜이지
사과는 썩고
풍선은 터진다
나는 썩어 터지는 사람
내 이름까지가 내 주소고
집이 있는데 갈 곳이 없다
나에게 자신이 없다
하여,
그저 을지로 4가에서 내리고 싶었다
1가도 2가도 3가도 아닌
5가도 8가도 아닌
특별한 일 없으면 특별할 일 없는
을지로 4가 한복판에
나무처럼 그냥 우두커니 서 있고 싶었다
지하철역 환승통로 에스칼레이터에
홍수처럼 쏟아지는 사람들과
청계천 다리 위 인파 사이로
회색떼가 묻은 흰 비둘기의 치욕을 본다
오늘 날씨를 오늘 아침에 못 맞추는
일기예보 같은 삶이여
행운인지 불행인지
내게는 아직 가장 작은 액운도 닥치지 않았다
일기예보는 틀려야 맛이지
언젠가는 맞닥뜨릴 불행을 기다려야지
어느덧 술이 머리 끝에 차올랐다
자, 이제 집에 가야지
AND

라면

먹어도 먹어도 허기지는 세상
가난은 허기로 허기를 채우고
주린 배를 움켜잡는 일
우린 가난한 건 아니라며
라면 먹자고 하니
아내가 웃는다
라면 물이 끓는데
부당한 일들로 가득한 세상 때문에
내 속이 끓는다
계란을 깨 넣는데
부정으로 가득한 내 마음에 금이 간다
세상이 하라는대로
순응하고 살았는데도
저녁을 먹었는데도
한 개로는 부족해서
세 개를 끓인다
세계의 우울이 국물 속에 잠긴다
후루룩 짭짭 후루룩 짭짭
만화 같은 인생
만화 같은 사랑
설거지는 내일로 미루고
세상 근심 다 잊고
오늘은 널 사랑해야지
새로 태어날 각오로
깊은 잠을 자야지
AND

낮술

뒤틀린 입으로 썩은 말을 내밷듯
뒤틀린 손가락으로 오타에 썩은 글을 써내려한다
취했다
보잘것 없는 세상이 힘에 겨웠다기엔
결국은 취할 내가 가당치도 않아서
그냥 취했다
마지막엔 잔까지 마실 지경이니
첫 잔은 반 만 마시고도 이렇게 대취하였다
모처럼 만나서
맹물 먹고 얘기하긴 부끄러워서
해 넘어가기도 전에
태양 앞에 부끄러운 민낯을 보이는 중이다
죽지 못해 산다면서 죽도록 술을 마셨다
오후 한 시에 새벽 한 시만큼 취했다
적막이 흐르는 아구탕 집에서
당신과 단 둘이 소주를 마셨다
갈 곳은 한 곳 밖에 없는 것을
알고도 취해버렸다
이토록 사랑하는 당신과 술을 마셔도
취하여 오늘이 사라지고 나면
평소엔 잊었던 원망만 떠오른다
당신에 대한
아내에 대한
세상에 대한,
당신을 닮은 달의 그림자여
어서 모습을 보여
나를 너의 길로 이끌어다오
무엇이라도 탐하고 싶지만
부끄러워 탐할 수 없는
이 환한 오후를 지워다오
마침 나보다 더 오래 살았을 전봇대가 보인다
피곤의 냄새가 나는 오줌을 누고
전봇대에게, 나를 기다린 너에게
나는 미안해졌다
시간이 거꾸로 흘러도 삶은 앞으로만 나아가고
세상이 끝나도 우리의 사랑은 끝나지 않는다
나는 겨울을 못 버티는 어린 싸리나무
죽기 전에 너를 안고 싶다
탐욕스럽게 적어댔지만
별 내용도 의미도 없는 것들 뿐이다
획실한 한 가지는
네가 있기 때문에 내가 외롭다는 것
그래서 더욱
죽기 전에 너를 안고 싶다
너는 이 세상에서 나를 찾아온 유일한 사람
그러니 더욱
죽기 전에 너를 안고 싶다
이 모든 것은 소득 없는 각성
그러니 더더욱
술이 깨기 전에
밤이 오기 전에
마지막으로 너를 안고 싶다
이 모든 사탕발림이
대낮에 대취한 까닭이다
그래도 너를
안고 싶기 때문이다
사랑하기 때문이다
AND

위축

멈추지 않고 딸꾹질 천 번 하면 죽는다는데
언제 시작했는진 몰라도 900번을 넘겼다
언제 시작했는진 몰라도 이유는 확실하다
100 딸꾹, 99 딸꾹
98, 97, 96, 95.......
딸꾹 딸꾹 딸꾹 딸꾹
너 떠나며 수축된 횡경막이
좀처럼 제자리를 찾지 못한다
나는 당신 앞에서 위축되는 사람
이별통보에 벙어리가 되어서
이유도 묻지 못하고
이렇게 죽어 간다
죽는다면 육교 위에서라고 생각했다
육교 한 가운데 올라섰는데
오후와 하늘 사이의 거리가 멀다
하늘길을 건너기까지 열 번 남았다
백초라면 인생을 정리하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10 딸꾹
9 딸꾹
8, 7, 6, 5........2
딸꾹 딸꾹 딸꾹 딸꾹
너는 돌아오지 않는다
아, 극적 반전도 없는
위축되는 축생이여
이번이 마지막이다
딸꾹
딸꾹질 1000번에도 죽지 않는
건강한 몸이 반전아닌 반전이구나
위축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집에 가서 냉수 한 잔 먹고
육교로 돌아와서
새로운 사랑을 찾아야겠다
AND

대설주의보
 
죄 지은 것도 없는데
첫눈에 대설주의보 내렸다
사흘째 눈이 내리고
나는 다시 눈을 치운다
쌓이는 속도가
치우는 속도보다 빠르다
소용없는 일에
하염없이 매달려 있다
눈삽 가득 눈을 모아
집 앞 개울에 밀어 넣는다
풍덩,
아뿔사,
물이 검다
그 검은 물에 흰 눈이 녹아 내린다
검게 녹아 사라지는 눈덩어리여
내 죄를 알려주는가
이번 생은 가망이 없다고 하는가
눈은 계속 내리고
나도 계속 검은 발자국을 놀린다
AND

방황


터미널에 내려 비를 맞는다
무거운 짐가방이여
이 비는 나를 환영하는가 만류하는가
낯선 도시의 백화점 화장실에서
속을 비우고 몸이 가볍다
이 똥은 새로운 시작의 신호인가 끊지 못한 미련의 덩어리인가
구름에 닿을 수 있을 것 같아 언덕에 오른다
가파른 내리막만이 나를 기다린다
몇 번이고 너에게 전화를 하지만
없는 번호라는 응답만 들려온다
온전치 않은 욕망으로 술을 마시고
국밥으로 해장을 한다
흘린 밥알을 주워담듯
깨진 욕망들을 서둘러 주워 담는다
밤에 떠올랐다 아침이면 사라질 생각처럼
몰려드는 욕망이 사그라지길 기다릴 때다

지금은


AND

아파트


새들이 사는 높이에서
사람들이 살아간다
밥을 먹고 똥을 싸고 잠을 잔다
날갯짓은 하지 않는다

새들이 사는 높이에서
사람들이 추락한다
각자의 무게를 짊어지고 떨어진다
떨어진다 떨어진다 떨어진다
날갯짓은 하지 않는다

새는 날개를 사람은 무게를 짊어지고 산다

(나는 땅에 닿기 전에 날개를 펼치리라
그 날개가 깃털이 달리지 않은 날개더라도)
AND

첫눈

눈은
네 마음처럼
내 마음처럼
환하고 어두운 날 내린다
첫매에 불알 터진다고 첫눈을 조심하랬는데
너랑 헤어진 마당에 조심할 것도 없다
매일 다니던 길에 눈이 쌓였다
풍경이 바뀌었는데도
너를 향한 내 마음은 그대로 그대로
내 마음같이
어쩌면 네 마음같이
오늘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며 눈이 내린다
사박사박 소복소복
보고픈 사람
그리운 이름
가만히 밤이 내리고
그 위에 내 마음같이
첫눈 내린다
AND

월요일 점심의 불륜


(나는 삿된 생각이나 해쌌는 평범한 중생
엄청 삿된 생각을 하는 엄청난 중생
엄청난 중생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엄청 삿된 중생)

생이 허무하다는 사실이
어떻게 변할 수 있을까
한 번도 전력을 다하지 않은 삶
멍하니 죽고 싶다

산을 넘는 태양과
몰아치는 파도는
아무런 구실이 없다
허나 사랑은 인간이 하는 것
이별은 모든 인간을 망치는 법

인간은 구실이 있어야 뭐든 잘한다
눈물 한 방울 떨굴래도 공짜는 없다
너는 내가 살아가는 구실
월요일 점심에 너와 마주 앉아
여러 감정이 뒤엉킨 회덮밥을 먹으며
너에게 잘 하고 싶다

내가 너에게 전력을 다하고
너도 뭔가를 구실로 나에게 잘하면
그때는 사랑이며 이별이며
인간이니 구실이니 하는 것들 다 잊고
멍하니 죽고 싶다
AND

 달 식민지의 자유민들이 지구로부터 독립을 이루어낸다.는 간략한 스토리다. 작품 내내 재기발랄한 위트가 넘치고 마지막에는 쓸쓸한 여운을 남긴다. 브라이언 싱어가 영화로 만든다는 소문이 있다.

 달 세계의 독립을 선언하고 헌법을 만드는 과정에서 인상적인 구절이 있어서 옮긴다. 국운이 기울어진 - 인류의 운명도 - 이 시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많다. "Distrust the obvious, suspect the traditional."

 

p. 458 

 "의원 동지 여러분, 정부란 불과 핵융합처럼 위험한 하인이며 두려운 상전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자유를 유지할 수 있다면 말이지요. 여러분은 다른 어떤 폭군이 아니라 여러분 자신의 손에 의해서 더 빨리 이 자유를 상실할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하기 바랍니다. 좀더 천천히, 더 신중하게 모든 어구가 의미하는 결과를 해석해야 합니다. 저는 이 헌법 제정 위원회가 그러한 연구에 10년 동안 매달린다고 해도 별로 유감스럽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1년도 안 돼서 보고서를 내놓는다면 두려움을 느낄 것입니다.

 당연한 것을 불신하고 전통적인 것을 의심하십시오........ 과거 인류는 스스로 정부라는 안장을 얹었을 때 별로 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나는 초안 보고서 한 장에서 달 세계를 선거구별로 분할하고 주기적으로 인구에 따라 의원 수를 다시 배분하기 위한 위원회를 설치하자는 제안을 보았습니다. 

 이것은 전통적인 방식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의심을 받아야 하며, 무죄가 증명될 때까지는 유죄라고 간주해야 합니다. 어쩌면 여러분은 이것밖에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내가 다른 방법을 제시해 볼까요? 인간이 사는 장소가 그 인간을 규정하는 가장 덜 중요한 요소임을 틀림없습니다. 선거구는 직업에 따라 유권자를 분할함으로써 만들 수도 있습니다..... 또는 연령별로.... 심지어 알파벳 순서로도 가능합니다. 또는 유권자를 나누지 말고 모든 의원을 전국구로 선출할 수도 있습니다. 달 세계 전역에 알려진 사람이 아니라면 당선 되는 것이 어려울 것이라는 이유로 반대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달 세계를 위해 가장 좋은 일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심지어 여러분은 가장 적은 표를 얻은 후보를 당선시키는 것까지 고려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인기가 없는 사람은 새로운 독재자가 될 가능성이 가장 낮은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터무니없어 보인다는 이유만으로 그 제안을 거부하지는 마십시오. 무엇이든 천천히 생각해 본 후에 결론을 내려야 하는 것입니다! 과거 역사에서 대중적인 인기를 얻어 선출된 정부가 다른 정부보다 더 나았던 것도 아니며 때로는 명백한 압제자들보다 훨씬 나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대의 정치 체제가 여러분의 최종적인 결론이 된다 해도 여전히 선거구를 지역으로 나누는 것보다 더 나은 방식으로 이것을 성취할 방법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를테면 여러분 각자는 1만 명가량의 주민을 대표합니다. 약 7000명의 유권자에 해당하는 셈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가운데 일부는 소수 거주 구역에서 선출되었습니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선거 대신에 4000명의 시민이 서명한 청원서로 공직에 나갈 자격을 부여받는다고 가정합시다. 그렇다면 그는 4000명의 사람은 확고하게 대표하지만, 반대로 불평하는 소수파는 전혀 대표하지 못하는 셈입니다. 지역구 내에서 소수파인 사람들도 다른 청원서를 받거나 다른 청원서에 서명하는 것은 자유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모든 사람이 그들이 선택한 사람을 대표로 세우게 됩니다. 어쩌면 8000명의 지지자를 가진 사람은 이 기구 안에서 두 개의 투표권을 가질 수도 있겠지요. 해결해야 할 난점, 반발, 현실적인 문제들이 산적해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그럿을 헤쳐 나갈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대의 정치 시스템의 만성적인 병폐를 피하고, 공민권을 박탈당했다고 느끼는(사실 옳은 느낌이지요!) 불만 있는 소수파들이 생겨나는 것을 방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무엇을 하든, 과거에 구속받지는 마십시외!

 저는 의회를 양원제로 하자는 제안을 보았습니다. 훌륭합니다. 입법에는 장애물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 하지만 전통을 다르는 대신에, 저는 입법가들로 구성된 하나의 기관과, 오로지 법률을 폐지하는 것만을 임무로 삼는 또 하나의 기관으로 나눌 것을 제안합니다. 입법 기관은 정족수의 3분의 2의 찬성으로 법안을 통과하게 하고.... 폐지 기관은 3분의 1만 찬성해도 어떤 법이든 폐지할 수 있게 하는 겁니다. 터무니없다고요?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법안이 여러분 가운데 3분의 2의 찬성을 얻을 수 없을 정도라면 쓸모없는 법률이 될 가능성이 높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어떤 법률이 3분의 1이나 되는 사람들에게 거부감을 준다면 그런 법률은 차라리 없는 편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저는 여러분이 헌법을 작성하는 데 '부정'이라는 훌륭한 미덕에 관해 깊이 생각하길 바랍니다! 부정을 강조합니다! 정부가 영원히 해서는 안 된다고 금지하는 숨낳은 일들로 여러분의 문서를 가득 채우십시오. 병역 징집 없음..... 출판, 언론, 여행, 집회, 종교, 교육, 통신, 직업의 자유에 아무런 사소한 간섭도 없음...... 납세자가 동의하지 않는 어떠한 세금도 없음..... 동지 여러분, 만일 여러분이 5년 동안 역사 연구를 하고 여러분의 정부가 절대로 하지 않겠다고 약속해야 할 사항들을 여러 가지 생각한 후에 여러분의 헌법을 그렇게 부정으로 가득한 문서로 만든다면 저는 그 결과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가장 두려원하는 것은 실행이 요구될 듯한 무언가를 '하도록' 정부에 권력을 부여하는, 성실하고 선량한 의도를 지닌 사람들의 확신에 찬 행동입니다. 지구의 달 세계 총독부가 대중의 인기를 얻어 선출된 성실하고 선의를 지닌 사람들이 대단히 고귀한 목적을 위해 만들었다는 사실을 잠시도 잊지 마십시오. 이제 어의 이러한 생각을 말씀드리고 여러분에게 어려운 산고를 맡깁니다. 감사합니다.

 

 

AND

일요일 아침

뱃속에 밥을 좀 집어 넣으니
커피가 땡긴다
커피 향기를 맡으니
담배를 피우고 싶다
이어서 양치를 한다
무료한 시간이 오자
잠든 너를 깨우고 싶다
비 내리는 일요일 아침
세상에서 나와 교감할 수 있는
단 한 사람
그러나 새벽에 잠든 너를
차마 깨우지 못하고
바라만 본다
너는 깨지기 쉬운 사람
너를 바라보기만 하는 일도 조심스럽다
내가 세상을 욕하면 그 욕을 다 들어야 하는 사람
내가 방귀를 뀌면 그 냄새를 맡아야 하는 사람
나랑 같은 냄새가 나는 똥을 싸는 사람
우주가 아무리 넓어도
널 보는 것 말고는 웃을 일이 없다
나는 너로 귀결된다

AND

귀머거리 공주

폭정을 일삼던 왕은
성난 군중들에 의해
단두대에 올려졌고
본인처럼 되지 말란 유언을 공주에게 남겼습니다
왕은 딸의 귀가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백성들은 아비를 잃은 공주를 불쌍히 여겨
그녀를 여왕 자리에 앉혔습니다
백성들도 여왕의 귀가 들리지 않는다는 걸 몰랐습니다
알았더라도 공주를 더 가엾게만 여겼을 거에요
공주는 왕좌에 오르자마자
아버지를 죽이는데 가담한 사람들을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죽였습니다
공포로 나라를 다스리려고 했습니다
처음엔 신하들이 만류했지만
여왕이 귀머거리인 것을 알고나자
신하들은 여왕의 말에 고개만 끄덕였어요
귀머거리 여왕은 말도 잘 못했지요
한 번도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에요
그녀가 말을 하면
사람들은 '저게 지금 뭐라는 거야' 생각했지만
누구도 그녀에게 그렇게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귀머거리니까요
자신들이 그녀를 여왕으로 만들었으니까요
아주 우연히 여왕은 자신이 소리를 들을 수 없다는 걸 알게 됐어요
왕궁 안의 산책길에서 어떤 새도 울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한 거에요.
여왕은 외로워졌습니다
홀로 거리로 뛰쳐나간 여왕은 사람들 앞에서
외롭다고 소리질렀습니다
누구와도 얘기해 본 적 없는 여왕의 말은
죽여줘로 들렸습니다
사람들은 여왕이 미쳤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여왕에게 돌을 던졌고
어떤 신하도 그것을 막지 않았습니다
귀머거리 여왕은 자신이 귀머거리란 걸 알자마자
그렇게 돌에 맞아 죽었어요
그래도 세상은 평화롭지 않았답니다
또 다른 귀머거리가 왕이 됐거든요
AND

성수(Aqua Benedicta)


원 없이 죽을 수 있게
생명보험을 들었다
집에 불을 지르고 죽으려고
화재보험도 들었다
남아 있는 사람들이
조금은 덜 슬프게 나를 기억하겠지
조금은 더 오래 기억하겠지
돈은 세상에서 가장 독한 독이지만
평생 물만 먹고 살 수는 없는 법이다
남은 식구들이 한 번도 행복한 순간 없이
살다가게 하고 싶지 않다
죽기 전에 꽃집에 전화해서
'축사망'이 적힌 화환을 주문했다
갑자기 눈물이 난다
눈물이 마를 무렵
아내가 뒤에서 나를 안는다
살자고
같이 살자고 운다
내 뒷목에 떨어진 눈물로
축복받은 나는
깨끗해진 나는
살아야겠다
어떻게든 살아야겠다
너랑 살아야겠다

AND

나는 약해빠졌다.

어제 비를 맞고 일했다. 피곤해서 오늘 쉬었다. 지금 하는 일은 아니, 지금 내 상황은 피곤하다고 쉴 수 있는 여유가 있다. 무리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이런 여유가 미안하다. 나보다도 처지가 안 좋은 사람들을 생각하니 그렇다. 나의 뮤즈 jk도 일 하기 싫었겠지만 툴툴거리면서 출근했을 것이고 몸이 약한 s형도 주중에 빠지면 월차(월차란 건 없어졌다는데, 왜 우리에겐 있는걸까?)가 없어지니까 출근했다. 다른 동료들도 마찬가지다. 내가 동료들에게 미안할 일은 없는데, 그래도 내가 좋아하는 몇몇 사람들에게는 오늘 쉰 게 미안하다. 그래도 무리하고 싶지 않다.

쉬는 김에 우체국에 가서 신춘문예 응모작들을 10곳에 보냈다. 되면 좋겠지만 안되도 그만이다. 가끔 어째서 내가 쓰고 있나, 생각한다. 세상에 대한 미안함 보다는 풀지 못한 내 욕구를 쏟아내는 쪽에 가깝다. 내가 좋아하고 나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내 글을 좋아하면 좋겠다. 헌데 세상에 대해서 쓰지 못한다면 이 모든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으니까 그래도 당분간은 계속 쓰겠지.

내 마음은 건조하다.

야구에서 일본을 이겼다. 극적인 게임이었지만 그렇게 뭉클하지 않다. 아내가 여러 동물 동영상을 보여주면서 '넌 뭐가 신기해?' 라고 묻는다. 세상 다 산 노인네처럼 그다지 신기한 게 없다. 어지간한 일에는 감정이 크게 동요하지 않는다. 낮에 메모 정리하다 보니 볼음도에서 이런 걸 적었더랬다. '엊그제 우리 쌀로 밥을 해 먹었다. 맛있었다. 내가 농사 지은 쌀을 먹는 기쁨은 없고 그냥 맛있다는 생각만 했다. 건조한 계절을 따라 나도 건조해져 간다. 올해로 서른일곱이 되었다. 나이 먹는 일에 아무런 느낌도 없다. 그저 그뿐이다.' 요즘 이때보다 더 메마른 것 같다.

방금 전에 탕파에 물을 채우면서 아내가 웃었다. 그걸 보니까 마음이 풀려서 나도 활짝 웃었다. 아내도 내가 웃는 걸 봤겠지. 네 웃음 때문에 내 하루가 있다. 가까운데서부터 먼데까지 세상 여기저기에 미안하지만 네 웃음이 다 잊게한다. 보통 여섯시에 일어난다. 내가 가장 총명한 새벽 시간에 가장 깊은 잠에 빠진 세상을 잊고 잠든 너를 보면서 아무도 못 보게 혼자만 활짝 웃는 게 내 기쁨이다. 너랑 나는 다른 시간을 살더라도 너는 내가 살아가는 구실이다. 너를 구실로 내일 또 살아야지. 세상에 미안한 마음으로 살아야지.

결국은 또 사랑 얘기.
AND

물회


옛 연인을 만났다
여관방에 마주 앉았다

오랜만이네
응, 그러네

당신은 물회 앞에서 울고
나는 당신 앞에서 오징어를 씹는다

맛이 추억처럼 비리다

언제였을까

가장 좋았던 시절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음을
침묵마저도 아는 새벽이다

뱃속의 나비가 날갯짓을 하고
비릿한 슬픔이 나를 감싼다

나를 안고 울다 잠든 당신을 안고
나도 눈물 속에 잠든다
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