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으로 끝나는

베개가 꺼졌다
납작해진 것을 어느밤
만취한 상태로 알아챘다
호떡처럼 납작만두처럼
잔뜩 수그린 삶
누가 알아주지 않는 것이 슬퍼도
내겐 당신이란 이름이 있었다
사랑은 납작해지고 당신 이름은 부풀어 올라
터지고 나면 당신 이름도 만두가 될까
납작한 삶의 끝에 납작해진 이름만 남을까
AND

등산

산 정상
구멍난 바람이 구멍난 가슴을 통과한다
괜히 멋쩍어서 머리를 긁는다
땀 냄새 묻은 머리카락이 나풀나풀 떨어진다
바람에 날리고 나뭇잎과 함께 썪을 내 머리카락
어쩌면 나보다 세상에 오래 남을 흔적을 남기고
산을 내려오는 길은 발걸음이 가볍다
AND

감기

화단에 가래를 뱉었다
크흑, 퉤
물큰한 덩어리가
가녀린 잎에 묻었다가
미끈하게 아래로 떨어진다
아직은 꽃이 피지 않은 계절
내 안의 더러운 것에 닿고도
꽃을 피우고 씨앗을 맺을 생명
나도 살아야지
감기는 가볍게 이기고
더러운 것을 뱉으며 살아야지
더러운 것이 묻어도 살아야지
AND

거미줄

거미는 어디 갔을까
거미줄을 쳐놓고 거미집에 갔구나
이슬 맞은 거미줄을 두고 거미집에 갔구나
거미줄에 파리가 걸렸다
파리를 잡아 먹고 거미는 거미집에 갔구나
거미줄에 거미가 걸렸다
내 마음에 빈집을 만들어주고 당신은 거미집에 갔구나
AND

외사랑

나는 고막이 없는 사람입니다
조심하지 않으면 안에서부터 부서져 버립니다
당신은 따뜻한 누군가가 필요한 사람입니다
내 귓속으로 들어와서 조용히 속삭이세요
싫다고 내가 싫다고
그러면 나는 온몸을 떨며
더이상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거에요
AND

피곤

깨끗한 걸 적고 싶어서 이를 닦았다
입 안이 깨끗해야 착한 말을 쓸 수 있다
깨끗하지도 착하지도 않은 나
내가 사는 세상도 당연히 그러하고
말라빠진 치약을 짜내듯
억지로 갖다 붙인 이유라도 있어야 내일을 산다
비가 와도 깨끗해지지 않는 세상
폭풍우 치는 밤 세상의 모든 치약을 짜내도 착해지지 않을 세상
세상이 먼저인지 착한 게 먼저인지
착한 것도 너무 깨끗한 것도 재미 없으니
냄새 나는 발은 내일 아침 출근 전에 닦자
마지막 남은 치약을 짜내서 박박 발을 닦자
AND

폭우

흙, 바위, 나무
미련, 후회, 기대​
​다 흘려 버리는 비
다 씻고 지나가는 강물
추억도 후일담도 없이
돌아가고 싶지 않은 마음까지
남김 없이 지워버리는 비
폭우 지나고 한 곳에 뒤엉킨 것은
남은 사람
AND

검은 그림자

검은 그림자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밤의 끝에서 네 그림자를 부서지도록 안는다
보이지 않은 채 존재하고
무게도 없이 손에 잡히는 너
나는 어둠 속에서만 너를 사랑한다
나의 실체가 너의 실체에 닿을 때
나의 그림자가 너의 그림자와 겹치고
모든 것이 뒤섞여 하나인 그림자의 사랑
아침이면 모든 것이 끝나는 사랑을 한다
그리고 암흑 속에서
얼마 남지 않은 나의 사랑 이야기를
문신을 새기듯 너의 그림자 위에 눌러 적는다

 


AND

치기

딱 한 두 걸음 비틀거릴만큼 취했다
딱 내가 나인 만큼만 취했다
딱!
너에게 전화를 한다
받지 않을 것을 안다
딱 그만큼 취했다
구체적이지 않게 취했다
슬퍼지지 않을 만큼만
울지 않을 만큼만
한 잔 더 먹고 싶지만
부를 사람이 없는 시간이다
아니, 애초에 부를 사람은 없다
딱 그만큼 취했다
딱! 딱!
AND

이사

강원도 정선을 관통하는 42번 국도
이삿짐을 실은 트럭이 내 앞을 달린다
용달이란 말이 어울리는 오래된 트럭안에
빛바랜 초록색 비키니 옷장이 나부댄다
오래된 물건 오래된 삶이 굽은 길 위에 있다
용달 기사도 이사차에 탄 노부부도
그들을 추월한 나도 가늠할 수 없는 생을 달린다
AND

식성

물에 빠진 만두를 먹지 않는 아내​
물에 빠진 순대를 먹지 않는 장모님
물에 빠진 물고기 국물을 먹지 않는 장인 어른
만둣국, 순댓국, 매운탕을 다 좋아하는 나
식성이 다른 장모, 장인은 항상 두렵지만
식성이 달라도 세상에서 가장 좋은 건 아내
AND

비 오는 날

개미가 흙 속으로 숨었다
제비가 지붕 아래로 숨었다
물고기는 물 속으로 숨고
사람들은 우산 아래로 자동차 안으로 숨었다
숨 쉬러 땅 위로 나온 지렁이가 꿈틀댄다
깡마른 몸뚱이로
숨어살던 서러운 생 위로 비가 흐른다
비 그치고서야 발견되는 죽음이 있다​
AND

모양

당신 가슴에 얼굴을 묻고
심장 소리를 듣는다
당신이 깰까 싶어
그 소리의 모양을 숨죽여 그린다
모양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조심조심
그렇게 그려낸 내 사랑의 모양
너는 나의 모양이다
AND

노래

자동차가 없는 세계
아스팔트가 없는 세계
플라스틱이 없는 세계
나무와 흙과 공기와 바람 그리고 물
살아 숨쉬는 것만 존재하는 세계
과거이거나 미래인 세계
그곳에서 나 너와 함께 노래를 부르리
우리만 아는 말로 사랑의 노래를 부르리
지상의 마지막 날 끝나지 않는 노래를 부르리
아스카라타브라 아스카라브라타
아이루미네르타 아이루미르타네
이스코미노시스 이스코미스노시
그때 모든 것이 숨을 죽이리
너와 나 노래가 되어 사라지리
AND

선 위를 걷는다

선 위를 걷는다
천지사방이 어둠
발 아래 가늘게 보이는 선을 따라 걷는다
선 위를 걷는다
누군가 나를 따라오고 있다
숨소리만 들린다
선 위를 걷는다
점점 자신이 없다
선이 갈라진다
어느쪽을 선택해도 마찬가지
선이 희미해진다
선 위를 걷는다
추락할 때까지​
그러니까 끝까지
AND

정시퇴근

방에 와서 밥을 먹고
방바닥을 닦아냈다
기타를 조금 치다가
설사를 했다
싱크대에서 세수를 했고
음악을 틀어놓고 만화책을 봤다
중간중간 담배를 피웠다
그러다 자정이 됐고 눈이 벌겋다
하품을 하는데 입 안에서 네가 나왔다
나는 내 방에 혼자 있고
너는 우리집에 혼자 있다
우리는 이 우주에서 서로 떨어져 있다
하품을 해서 조금은 눈물이 났다
AND

제비를 보다

제비 한 마리가 난다
올해 첫 번째 제비를 본다
봄보다 먼저 찾아오는 제비는 없으니
이제 봄이려니 한다
기다렸던 것은 아니다
제비는 때를 알고
나는 제비를 본다
AND

파문

퇴근길
다리 위에서
오리가 잠수한 자리를
그 파문을 바라보다가
먹이를 물고 솓아오른 오리가
해지는 쪽으로
멀리 한 점이 되어가는 것을 본다
삶이 파문인 것을 본다
AND

어느날의 일기

피곤한 저녁
라디오를 들으며 캔맥주랑 같이 뒹굴다가
갑자기 마음이 동해 물티슈로 방바닥을 닦았다
먼지가 묻어나온 물티슈를 쓰레기통에 버리고는
세수를 하지 않은 것이 마음에 걸려 물티슈로 얼굴을 닦고 그대로 잤다
AND

보는 봄​

땅을 보다가
꽃을 보고
나비를 보고
바람을 보고
하늘을 보고
나무를 보고
초록을 보고
너를 보고
나를 본다
봄은 보는 것이라 봄이다
(너를 보고 내 그림자를 본다)
AND



술을 먹는다
삶은 생과 같은 말
생은 서럽고
사실 삶은 서럽다는 말보다 더 서러운 것
사랑까지 포함해서 시옷은 다 슬프고
슬프다는 말도 시옷으로 시작한다
술 넘어가듯 술술 풀리지 않는 하루하루
달콤한 사탕이 사탕발림이 되는 것이 인생
나의 속임수에 당신들은 울고 웃고
나 또한 당신들에게 그러하다
내 숨이 멈출 때 모든 거짓이 멈추니
삶은 슬프다 끝나는 것
술을 먹는다 차분히
눈 쌓이듯 슬금슬금 취한다
생이 무엇이고 사랑이 무엇이냐
슬픔도 다 거짓이다
세월이란 말도 슬퍼진지 오래고
시옷은 다 슬픈데
정작 가장 슬픈 이별엔
시옷이 없다
AND

컵라면을 먹다 2

​컵라면을 먹는다
그리움에 생이 허하여 술을 마시고
마신 술에 속이 허하여 컵라면을 먹는다 
싸구려 용기에 새우가 그려진 컵라면을 먹는다
컵라면을 불려서 먹어야 해장이 된다던 엄마의 말
엄마는 자식들 건사한다고 허리가 휘도록 술을 마셨다
내가 술로 중년이 된 사이 술로 노파가 된 엄마
갈비뼈에 금이 가도록 술을 마신 엄마
언젠가의 엄마처럼 면발도 새우건더기도 나도 퉁퉁 부었다​
한 나라에 살아도 자주 보지 못하는 엄마
목소리를 들으면 눈물이 날 것 같아
전화도 못하고 불어터진 컵라면을 먹는다
AND

우는 것은

우는 것은 하늘입니까 바다입니까
3월에 눈 내리고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우는 것은 하늘입니까 바다입니까
당장이라도 녹아 내릴 것같은 수평선은
분명 무엇인가는 울고 있는 까닭입니다
우는 것은 하늘입니까 바다입니까
아니면 잊지 못하는 나입니까
그저 그런 나입니까
AND

봄바다

걷고 또 걸어서 강 끝
육지와 육지를 잇는 마지막 다리
그 앞에 봄바다
봄은 봄 바다는 바다
그런데 봄바다
모든 강은 바다로 이어지고
너무 당연해서 기록조차 되지 않는 말들
끝은 시작
같은 자리에 다른 이름
시작과 끝이 뒤엉킨 어지러운 봄바다
봄은 봄 바다는 바다
나는 나
나는

AND

끼니를 거르다

특별한 이유도 없이
끼니를 걸렀다
배고픔이 빈 속에 사그라드는 일이 오랜만이다
그간 참 규칙적으로 먹었구나
이유도 없이 밥을 거르는 호사를 누릴만큼
내 삶이 올바른 것 같지 않은데
꼬박꼬박 먹고 사는구나
배고픔을 잊고 사는구나
뭔가 잘못 된 건 아닐까
지금의 나를 버릴 자신이 있나
항상 끼니를 거르는 삶 속으로 뛰어들 용기가 있나
꼴랑 한 번 거른 끼니에
나는 이 모든 생각들에 자신이 있나
특별한 이유도 없이 
끼니를 걸렀다
AND

컵라면을 먹다

​비 개인 아침 옥상
물 고인 바닥마다 파란 하늘이 있다
사발면이란 이름이 붙은 컵라면을 먹는다​
옥상은 기억의 장소
컵라면은 사색의 음식
뭘 먹든 떠오르는 당신 얘기를 
더는 적지 않으려 했지만
사발이란 이름만큼 예쁜 스티로폼 용기 안에
당신 얼굴이 라면 기름과 섞여있다
국물까지 싹 비우고나면
남는 것은 텅빔
텅빈 하늘을 밟고서 
컵라면을 먹었다​
AND

삼겹살을 먹다

회식
삼겹살을 먹는다
왜 회식날은 삼겹살을 먹을까
너무도 가볍게 결정되는 삼겹살의 운명
일 인분 만 이 천 원이 너무 무겁진 않은  리퍼블릭 오브 코리아
삼겹살이 없던 시절에
우리는 뭘 먹고 실았을까
그 보다 오래 전 돼지가 먹히기 위해서만 키워지기 전에
우리는 뭘 먹고 살았을까
세상은 이미 다 지나간 일이라고 하는데
내 하루는 늘 퍽퍽하고
내가 지금 소주와 함께 삼키는 것이 살덩인지 뼈인지 아니면 기억인지
질문도 다 던지지 못하고 가는 생에
답을 정해둔 질문으로 가득한 삼겹살 얘기가
무슨 질문인지
모든 팀장들은 술을 잘 먹는데
대체 얼마나 술을 마셔야 팀장이 되는지
이 또한 무슨 답이 정해진 질문인지
왜 삼겹살을 먹으며
나는 질문만 남기는지
대체 왜
AND

우문현답 4

야. 너 왜 그랬어?
죽을 거 같아서.
이 새끼야 너 안 죽었잖아.
AND

순댓국을 먹다

피곤했던 하루
하소연 할 사람 없어 더는 갈 데 없는 하루
혼자서 순댓국을 먹는다
기분상 소주도 한 병 먹는다
돼지 내장들이 뚝배기 안에서 부글부글 생을 끓이고
건너 테이블엔 마주 앉은 연인
순댓국은 사랑의 메뉴
순대를 빼고 순댓국을 시키던 당신이 떠오르고
오직 먹히기 위한 삶을 살았을 돼지 머리로 이어진다
머릿속에 취한 피가 도는 걸 보니
나란 인간은 먹기 위해 태어난 존재
터덜터덜 집으로 가는 길
돼지 내장들이 내 내장 안에서 부들부들 생을 죽인다
피곤했던 하루
혼자서 순댓국을 먹었다

AND

소고기를 먹다

입 안에 기름기 가득 소고기를 먹는다
입술이 번들거리도록 소고기를 먹는다
미끈한 키스같은 등심을 곱씹는다
붉어진 당신 얼굴을 보며 붉은 고기를 굽는다
소는 짧은 생에 울다 죽었다
소고기보다 눈물이 붉다
눈물보다 당신이 붉다
붉은 마음으로 이별 소고기를 먹는다
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