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치는 가을


왜 아무도 흘러 넘치는 가을에 대해서 쓰지 않지?
뭐라도 적지 않으면 내일이 오지 않을 것 같은 계절과
그래도 내일이 온다면 감격이 더해질 계절에 대해서
첫 번째 바람이 부는 날
꽁꽁 싸매고 등교하는 아이들을 보고도 
아직은 아니라고 할 수 있는 오늘
아직은 아니라고
아직은
아직은 아니라고
내 마음속에 넘치는 무엇
그것은 너지만
아직은 아니라고
아직은
아니라고
AND

닭도리탕을 먹다

닭에게 미안하지만 또 닭요리를 먹는다
다행히 수컷으로 태어나서 바로 죽지 못하고
불행히 30일만 살다가 내 눈앞에 고기로 나타난 닭
단골집 사장님에게 1시간 전에 말해둔 닭도리탕
도리는 새
고개를 도리도리
고개를 절래절래
닭을 단도질해서 만드는 닭도리탕
양파, 감자, 고추, 당근
이것저것 다 섞어 끓이는 닭도리탕
여럿이 섞여서 함께 먹고
소주랑 맥주를 섞어 먹고
침도 섞이고 술잔도 섞이고
나중에는 숟가락도 섞이고
그러고도 모자라 밥까지 볶아먹는 닭 볶음탕
회식날 정성껏 닭도리탕을 먹었다
AND

​계절
봄엔 무엇이든 올라오고 가을엔 모든것이 내린다
여름은 가파르게 증발하고 겨울은 깊숙히 쌓인다 
AND

부광식육점

가게 앞 빨랫줄에 나란히 걸린 목장갑
기름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뽀얀 목장갑
가을볕에 억새마냥 반짝이는 하얀 목장갑
육식은 뼈를 잡고 살을 뜯는 일
생의 모든 기억은 피와 뼈의 투쟁
기억은 남거나 사라지는 것
바람을 맞으며 몸을 말리는 태연한 목장갑 
부자가 되지 못한 어느 칼잡이의 손때가 묻은 오래된 목장갑    
AND

양념치킨을 먹다

치킨을 먹는다
둘이 먹으니 반반으로
내 전화번호만 보고도 집 주소를 아는 치킨집 사장님
많은 것을 들켜버리고 사는 세상
먹어야만 삶은 이어지고
닭고기 밀가루 기름 물엿
고기도 좋아하고
튀김도 좋아하고
단 것도 좋아하는 나
남은 양념까지 박박 긁어 먹는
영혼을 잃고 먹고야 마는 영혼의 맛
당신과 함께 먹는 치킨
치킨의 다른 이름은 행복
양념치킨은 행복의 네 제곱
AND

북서풍이 있던 자리


지난날 날개가 돋았던 자리
지금은 내 손이 닿지 않는 자리
혹한의 찬바람이 시작하는 자리
언젠가 당신이 나를 할퀴고 갔던 자리
내 등판의 북서쪽

여보, 등 좀 긁어 줄래요?
AND

나무의 유래

나무 이름을 아는 일이 좋다
나무를 왜 나무라고 부를까 생각하면 좋다
참나무를 부르는 몇 가지 이름을 안다는 사실이 좋다
집 앞에 오래된 가래나무와 버드나무가 있어서 좋다
오래 살았거나 특별한 사연이 없어도 그저 이름을 아는 일이 좋다
아카시아 나무와 회화나무를 헷갈려도 좋다
산수유 열매가 붉게 익어가는 계절이 좋다
보리수 나무 아래서 눈을 감고 잠시 가만히 있는 일이 좋다
가을밤 당단풍나무 아래서 혼자 깡소주를 마셨던 날도 좋았다
어느 겨울 혼자 찾아간 산에서 당신 이름을 붙여 주었던 자작나무가 좋다
문득 고개를 들어 엄마의 이름을 닮은 명자나무 꽃을 보는 일이 붉고 슬프다
유래를 떠올리는 일이 좋다
AND

낮은집
강물보다 낮은 곳에 집이 있다
둑 하나를 경계로 물 흐르듯 늘어선 오래된 건물들
강물보다 낮은 곳에 사람이 산다
울고 웃고 먹고 싸고
비가 와도 걱정 가물어도 걱정​
사는 것은 다 짜내는 일
넘치거나 넘치지 않는 일
마음처럼 흘러가 사라지지 못하는 일
강물보다 낮은 곳에 흐르지 못하는 사람이 산다
AND

지독한

지독한 커피를 한잔 마시고
커피잔이 테이블에 닿기전에
너에게 '안녕'이라고 했다
너무 지극했거나 지나치게 과했던
지독한 사랑
시작과 끝이 같은 지독한 말, 안녕​
AND

마흔번 째 생일


태어나 14601일 째를 살고 있다
축하를 받으며

반대로 가고 있다는 생각도 했고
마음이 무너져 내리기는 여러번이다

사는 동안 해가 거꾸로 넘어가거나
달이 부서지거나 한 일이 없다

빼도박도 못하는 사십이란 숫자

달이 지구를 일만사천 바퀴 돌 동안
마흔 번도 돌아보지 못한 삶

14000이란 숫자에 더해진 하루
남은 생에 몇 개의 숫자가 더해질까

오늘밤은 달이 참 밝다
AND

가끔 하는 생각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나라에 가겠다
그 나라에도 여관이 있다면 가장 싼 여관에 달방을 얻겠다
매일 시장을 돌아 다니며 가장 허름한 음식으로 끼니를 잇겠다
돈이 떨어지면 그때부터는 일을 해야겠지
말도 통하지 않는 사람들과 함께 돌덩어리를 옮기고
섞이지 않는 말로 밥 숟가락을 섞겠다
입과 귀를 닫고 살 것이다
방과 나의 침묵만이 흐르는 작은방에서 매일 새로 태어나는 꿈을 꿀 것이다
다시는 무언가에 휩싸이지 않을 것이다
AND

소리

나의 속도와 세계의 속도가 부딪치는 소리
나의 속도와 당신의 속도가 어긋나는 소리
말의 속도들이 부딪쳐 만드는 소리
보이지 않는 속도 때문에 소리조차 없는 소리
소리에 소리를 물고 이어지는 소리 
AND

어느 개의 일기

좋아 죽겠다고 쭉쭉 빨아댈 때는 언제고
왜 나를 처음 와 본 휴가지에 두고 갔나
유기(遺棄)라는 어려운 말 쓰지 마라
당신들이 어떤 핑계를 대든 나는 버려진 것
이대로 가엾어져 결국 굶어 죽게 되는 것
버려진 오디오처럼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게 되는 것 ​
당신들은 나를 사랑하지 않았으며
무엇도 사랑할 수 없다
AND

나이

​나도
내 앞에 사람도
지금은 온화한 나이
뱃속에선 여전히 그때처럼 뭔가가 끓어 오르는데
태연한 얼굴로 마주보고 앉았다
불꽃이 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차가움도 남지 않있다
건조한 말빛으로 서로의 안부를 묻고
차가운 술을 먹는다
뱃속이 식는다
나도
당신도
지금은 그런 나이
그때는 언제였을까
AND

바다는 하나

고등어 연어 노르웨이
갈치 아랍에미리트
명태 가자미 러시아
대구 임연수 미국
홍어 아르헨티나
민물장어 캐나다
바다장어 오징어 페루
낙지 베트남
쭈꾸미 태국
문어 베네수엘라
흰다리새우 에콰도르
붉은 새우 중국
날치알 인도네시아
소라 터키

먹는 뱃속은 다 달라도
바다는 하나
AND

좋겠다


주유소 사장들은 기름값 걱정 없어 좋겠다
편의점 사장들은 담뱃값 걱정 없어 좋겠다
김밥천국 사장은 백 가지 음식 중에 골라 먹을 수 있고
옷가게 사장은 매일 새옷을 입을 수 있어 좋겠다
​약국 사장은 몸이 아파도 걱정이 없고​
병원 사장은 입원비 걱정이 없어 좋겠다
건물주는 임대료 걱정 없고
회장님들은 최저임금 걱정 없어 좋겠다

​고깃집 사장은 라면있는 집이 부럽고
반찬가게 사장도 저녁 반찬 거리가 걱정인데

​​재벌 총수는 걱정도 부러운 것도 없고
세상을 올려다 볼 일도 없고
문어발로 세상을 꽉 붙잡고 있으니

씨팔, 세상에서 제일 좋겠다
AND

옥수수

피서지 노점상에서 할머니가 삶아 파는 한 개 천원짜리 옥수수를 먹고
맛있다. 옥수수가 이렇게 맛있는 것이었나 생각했다면
당신은 철이든 것이다
처마에 매달아 잘 말린 옥수수 낱알을 하나하나 뜯어내고
모종을 만들어 밭에 심고
제초제도 뿌리고 거름도 줘가며 한 줄기에서 두 개의 옥수수가 달리도록 키우고
땡볕 아래서 수확해서 솥을 걸고 불을 피워 쪄내는 옥수수의 맛을 알면
솥뚜껑을 열자마자 여름안으로 퍼져 나가는 연기의 열기를 알면
옥수수 한 알에서 시작해서 한 자루에 수백개의 씨앗이 달리는
이 지독한 순환을 깨달으면
당신은 철이든 것이다
당신이 어떤 삶을 살았든
옥수수 맛을 알 때부터 당신은 철이든 것이다
AND

여름 생각

아침부터 매미가 우니
제법 여름같다
아, 따뜻하다.
감탄으로 여름을 넘기는 사람들
겨울에도 처지가 바뀌지 않을 사람들
누군가는 날씨 때문에 죽고
누군가는 자존심 때문에 죽고
다 울고난 매미는 죽어 나무에서 떨어질 것이다
그 와중에도 떵떵거리며 살고있는 사람들 사람들
새들도 숨어버린 더위 한 복판에 서서
내 처지가 매미보다 나은지 생각하며
싸구려 아이스커피를 마신다
씨발. 따뜻하다.
AND

당신에게

당신이 같이 밥이라도 먹자고 하면
우리들은 마음속으로 고개를 젓는다
당신이 열변을 토할 때
우리들은 고개만 끄덕여준다
당신이 술에 취해 외롭다고 소리를 질러도
우리들은 개가 짓는다 외면한다
당신이 누군가와 시비가 붙었을 때
우리들은 지랄병이 도졌다 생각한다
당신이 우리곁을 떠날 때
우리는 겉으로도 웃고 비로서 속으로도 웃는다
누구도 당신을 알아주지 않는다
누구도 당신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다
당신이 누군가를 우습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AND

시속 100km

고속도로 위에선 과거가 시속 100km로 뒤로 밀려난다
과거는 뜨겁고 미래는 차갑다
시속 100km
단속에 걸리지 않는 속도
내 육체를 뛰어넘는 속도
17일 동안 지구 한 바퀴를 돌 수 있는 속도로
먼저 도착한 미래에서
조수석에 앉은 당신의 차가운 혀를 내 혀로 감싼다
얼어붙지 않도록
아니, 하나로 얼어붙도록
석양을 따라 뒤쫓아 오는 과거를 바라보며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시속 100킬로미터의 사랑을 한다
AND

삼계탕을 먹다

입안에서 닭뼈가 구른다
한번에 살을 발라내지 못하자
닭뼈를 굴리며 생각이 생겼다
엄마말 잘 들으면 그런것처럼
입안의 닭뼈도 피가 되고 살이 될까
닭뼈가 내뼈가 되고
닭살이 내살이 되고
똥이 되고 흙이 되고
유식한 말로 순환이라고 부르고
손가락으로 원을 그려본다
누군가는 삼계탕을 먹다가 닭 목뼈가 목에 걸려 죽기도 할 것이다
입안에서 또 다른 닭뼈가 구른다​
AND

커피를 내린다 

커피를 내린다
저녁마다
무슨 의식이라도 되는 것처럼
커피콩을 갈고
내린 커피를 밥사발에 따른다
여기까지만 의식이다
내 베란다에서 내 담배를 피우며
내가 내린 커피를 마신다
밥사발에
커피는 아직 내 것이 아니다
술에 취한날도
저녁밥을 굶은날도
커피를 내린다
밥사발에
저녁마다
내 것이 아닌 커피를 미시고
내가 되는 꿈을 꾼다
AND

머리를 긁다
머릿결이 시작되는 정수리에 딱지가 앉은 걸 알았다
딱지를 뜯어내자 몸 가장 높은 곳에서 피가 솓아 올랐다
퐁퐁퐁 퐁퐁퐁
급한 마음에 먹고 있던 수박씨로 구멍을 막았다
잊고 살다가 그 자리에 싹이 돋은 것을 알았다
머리를 감고 밥을 먹으니 당연한 일이라 생각했다
줄기가 굵어지고 잎이 무성하더니 꽃이 피고 수박이 달렸다
그제서야 머리 꼭대기에 식물 하나씩 키우는 사람들이 보였다
이 사람은 소나무를 키우는군
나도 나무를 키웠으면 좋았을텐데
저 고추는 어떻게 겨울을 날까
내 수박도 얼어죽지 않으려면 털모자를 준비해야겠군
세상엔 이름 모를 식물들이 사람 숫자 만큼이나 많군 
다들 생활이란 명분으로 정수리에 구멍 하나씩은 파고 있지
안심한 나는 주먹만큼 커진 수박을 툭툭 쳤다
퉁퉁퉁 퉁퉁퉁
기분좋은 소리가 났다
AND

부패

김치찌개를 먹었다
한 번 먹을 만큼 남았다
여름 가스렌지 위에서
냄비에 담긴 채 김치찌개의 부패가 시작된다
김치는 만들어지는 순간 부패하기 시작한다
배추는 밭에서 잘라지는 순간 부패하기 시작한다
찌개에 들어간 돼지고기도 죽어지고 토막나 부패한 것이다
다른 재료들도 마찬가지다
먹고 남은 찌개는 냉장고에 두어도 부패한다
끓이고 끓여도 결국은 부패한다
부패는 썩는다와 같은 말
만물이 썩어가는 세상에서
점심을 같이 먹은 우리는 사랑이란 이름으로 썩고 있다
AND

우문현답 5

일리는 항상 여러 갈래로 있는데
왜 일리있다의 일자는 한일자를 쓰나
그 일리가 여러 일리 중 하나기 때문이다
AND

비 냄새

비가 온다
비 냄새가 난다
마른 아스팔트를 때린 비 냄새
흙 안으로 스며드는 비 냄새
자동차 매연과 섞인 비 냄새
초록의 잎들에 닿은 비 냄새
내 머리카락에 닿은 비 냄새
내 땀과 섞인 비 냄새
비 냄새는 모든 냄새를 바꾼다
비 냄새는 비 냄새랑만 닮았다
여전히 비가 온다
사랑했던 얼굴이 내린다
세상을 적시는 당신 냄새
내 마음에 스며든 당신 냄새
비 냄새는 당신 냄새를 닮았다
당신 냄새는 당신 냄새랑만 닮았다
AND

청량리

백화점 식당가에서 점심을 먹는다
언제부터 여기 백화점이 있었을까
백화점은 만물의 상징, 풍요의 표상
쩝쩝대며 밥을 먹는 사람들 표정에 여유가 있어 보인다.
나도 그들에게 그래 보일까
나는 그들을 보지만 그들은 나를 보지 않는다
역을 나와 대로를 걷는다
직접 본적은 없지만 청량리 588의 흔적은 없다
사람들이 사라지자 기억도 사라졌다
나는 무엇이 두려운지 골목으론 가지 못한다
수 많은 간판들, 자동차들, 사람들
다들 바삐 움직이는군
나는 그들을 보지만 그들은 내게 아무 일도 없다는 걸 모른다
다 끝난 것 같은 식당에 들어가 혼자 술을 먹는다
건너편엔 여럿인 무리들도 있다
나는 낮술을 하는 그들을 보고 그들도 나를 본다
서로를 바라보는 침묵 속에서
갑자기 공평해진 동대문구 청량리동 오후 세 시
아직은 끝나지 않은 오늘
AND

붉은

붉은 옷은 자신감이다
절대로 지지 않는다는 마음이다
붉은 입술은 매혹이다
너는 가장 아름다운 존재다
너의 상처에 붉은 피가 고인다
붉은 것은 살아있다는 증명이다
너의 붉은 심장으로 붉은 피가 넘나든다
붉은 것은 살겠다는 의지다
너는 붉은 눈으로 나를 본다
너의 붉은 눈빛에는 이면이 없다
차디차게 붉어진 나는 차갑게 식지 못한다
AND

질문으로 끝나는

베개가 꺼졌다
납작해진 것을 어느밤
만취한 상태로 알아챘다
호떡처럼 납작만두처럼
잔뜩 수그린 삶
누가 알아주지 않는 것이 슬퍼도
내겐 당신이란 이름이 있었다
사랑은 납작해지고 당신 이름은 부풀어 올라
터지고 나면 당신 이름도 만두가 될까
납작한 삶의 끝에 납작해진 이름만 남을까
AND

등산

산 정상
구멍난 바람이 구멍난 가슴을 통과한다
괜히 멋쩍어서 머리를 긁는다
땀 냄새 묻은 머리카락이 나풀나풀 떨어진다
바람에 날리고 나뭇잎과 함께 썪을 내 머리카락
어쩌면 나보다 세상에 오래 남을 흔적을 남기고
산을 내려오는 길은 발걸음이 가볍다
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