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꿈

어젯밤 꿈에서 나는 새파란 젊은이였다
뭔가를 열띠게 설명하고 있었는데
온 몸에 자신감이 흘러넘쳤다
잠에서 깨자마자 담배를 꺼내 물고
베란다 의자에 앉았다
창 밖에선 새들이 하늘춤을 춘다
아직 해 뜨기 전인데도
나는 새들보다 늦었다
20년 전엔 없던 베란다
입김과 담배 연기가 뒤섞이고
젊음은 베란다와 맞바뀌기도 하는 것
지금 이 순간은 또 무엇과 바뀔까
괜히 뱃속만 뜨겁다
AND

폐허

내게 폐허에 대해서 말하지 말라
삶과 죽음이 일 센티미터 간격에 있는 일 제곱미터 짜리 공간에서
죽음은 일 센티미터미터마다 백 분의 일의 확률을 좁히며 나에게로 왔다
사랑의 폐허가 그렇더냐
아니면 이별이 그렇더냐
모든 폐허는 내 앞에 겸손하고
나는 모든 폐허 앞에 겸허하다
그러니
내게 폐허의 ㅍ자도 꺼내지 말라
AND

사랑가

 

사랑을 다 모아서
노래를 부른다(1 5 6 5)

너에게 가 닿도록
내 진심을 다해서(1 5 6 5)

사랑은 다른 말로도 사랑(1 5 6)
이런 몹쓸 이율배반(2maj 5 6)

뒤로 물러서지 않는 것(1 5 6)
병적으로 파고드는것(2maj 5 6)
 
1 5 6 5

사랑이란 이름의
노래를 부른다(1 5 4 5)

너를 향한 마음을
네가 들을 수 있게(1 5 4 5)

나이 오십에도 투정이 느는 것
네가 나는 아닌데 네가 너도 아닌것(1 5 4 5)
우리가 남이 아닌 일(1 2 6)

어떤 말로 표현하든
아니, 말로 못해도(1 5 4 5 )
너랑 같이 있는 게 세상에서 제일 좋다(1 5 6 5)

당신이 살아있어 줘서 고마운 거(1 5 6 5)
물음표가 없는 두 글자(1 2 6)

사랑이란 이름의
노래를 부른다(1 5 6 5)
네 안에서 내 손이 불타고 있어(1 2maj 6 1)

AND

어른

브로콜리를 데쳐 먹을 줄 아는 것
통북어랑 먹는 맥주맛을 아는 것
계절 따라 마음이 변해도
마음따라 살 수만은 없다는 걸 아는 것
영원한 것을 의심할 줄 알고
사랑도 조금은 아는 것
이것저것 아는 게 많지만
생의 비밀은 끝내 모른다는 걸 아는 것
다만 쓰디쓴 생을 소주 한 잔으로 넘겨 버릴 줄 아는 것
AND

우리는 왜

터널은 단축
터널안에선 생이 줄어든다
모든 생명이 살기 위해 태어났으나 죽는다
가장 아름다운 땅 위에서도 지치고 볶는다
모든 핑계로 술이나 마셔버린다
술이나 마신 핑계로 날이 밝아오고
이불 밖이 추운 계절을 지난다
산다
AND

카스테라

점심을 거르고
커피나 마실까 들어간 빵집
구석 테이블에 카스테라를 먹는 할머니
부드러운 빵을 갈비 먹듯 뜯어 먹는다
우유도 한 모금
우물우물 우물우물
콩나물 값 깎아가며
자식들에게 사주었을 카스테라
오래된 이름 카스테라
세상에서 가장 슬픈 빵
AND

참수

거미 한 마리 모기 머리를 삼긴채 죽었다
가장 안온한 곳에서 꽤나 행복한 순간에
매달린 삶을 매달린 죽음으로 마쳤다
한 줄기 찬 바람에 끝나버린 삶
이것은 때가 된 죽음인가
모든 죽음이 때가 된 죽음이라면 세상은 공평한 것인가
참수당한 모기는 본인의 처지를 납득할 수 있나
두 개의 죽음이 매달린 거미줄이 바람에 흔들린다
나도 따라 흔들린다
AND

온기

새벽에 잠든 당신을 안아본 게 얼마만인지
이 가는 소리와 작은 뒤척임
아, 곤히 잠들었구나
당신의 온기에 나는 잠이 깬다
손을 겹쳐 보려다가 깨닫는다
내 오른손은 네 오른손과는 맞닿지 않는구나
내 오른손과 겹친 너의 왼손
반대라야 만나지는 인연
이 온기로 나는 너를 넘어 나를 산다
오늘을 산다
AND

꽃말


나의 꽃말은 너
너의 꽃말은 그사람
얼레지의 꽃말은 질투
얼레지는 너무 슬퍼서 이름도 얼레지

AND

자신

먼데 있는 어머니께
어머니의 새남자에게
내 옆의 당신에게
내가 나인 나에게

다가오는 계절에게
자리를 지키는 나무에게
지는 나뭇잎에게
낙엽을 밟는 나에게

오늘,
어디서부턴가
하늘이 어둡고
시간이 부서졌다

두통처럼 갈라진 세상에서
자신이 없는 나에게

자신이 없다
AND

가을

온갖 식물들이 씨앗을 떨구느라 난리다
겨울을 버텨도 모든 씨앗이 피어나지 못함을 알기에
가을은 슬픈 계절이다
AND

새출발

뭐라도 적어볼까
누웠다
누워서도 손이 움직이고 의식이라 부를 수도 있는 것이 작동한다
충분히 시작할 수 있다
이건 새출발은 아니다
이미 출발했는데 또 출발한다는 건 서투른 위안이다
나는 바다 건너 나라의 대통령이 오늘 무슨말을 했는지 안다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세상의 모든 표면이 내 앞에 있다
이런 세상이라니
내 몸을 지탱할 밥을 먹으며 평생 가보지도 못할 나라에 사는 사람들의 배고픔을 안다
내 삶과 먼곳에서 동시에 벌어지는 일들을 너무도 많이 안다
이런 세상이라니
뻔히 눈에 보이는 동시대를 침묵으로 일관할 수 있나
어설픈 마음 씀이 침묵보다 비겁하다
자려고 누웠다가
연필과 종이도 없이 엄지손가락 두 개만으로
이렇게 아무렇게나 휘갈겨쓰며 낮에 본 버섯을 떠올리는 세상이라니
그 버섯은 진짜였을까
전망이 없는 정상
실체가 없는 실재
실재가 없는 실제
밑이 없는 바닥에 혼자 누워서
반성이 없는 내일을 생각하는 밤
이 손가락질이 자정을 넘기지 말아야지
내일은 새출발을 해야지
AND

마흔 생일

날이밝기도 전에 눈을 뜨는 날이 많다
의자에 오래 앉아만 있어도 무릎이 시리다
등줄기에 땀이 흐를때까지 열탕에 몸을 담근다
해마다 사람이 태어나니 해마다 새 돈도 찍는데
반짝이는 총명함이 사라진 공터에 빈 기억만 나뒹군다

사랑을 장담하지만 그 사랑을 확신하진 못한다

이게 가장 슬프다
AND

술은 내가 마셨는데 아내가 비틀거린다
아내의 걸음걸이를 따라 달도 비틀거리고
아내의 손을 잡은 내 마음도 비틀거린다
모두를 비웃고 싶은밤 비웃고만 싶은밤
달 그림자만 내 발걸음을 비웃는다
비틀비틀 당신은 어디로 가나
뒤틀린 나는 어디로 가나
두 손 꼭 잡은 우리는
어디로 가나
AND

산신제

시루떡 뒤쪽으로 바나나 한 송이
- 산신도 물 건너 것을 먹어봐야지

코피가 흐르는 돼지 머리 
- 돼지가 고뿔이 들었나

냉큼 절을 하고
오만원 짜리 지폐로 피를 막는다
- 아프지 않게 다치지 않게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니니
두 번이 아니라 세 번 절 한다
- 팔자가 참 좋으십니다

신이라면 신답게
인간이라면 인간답게
-예이 예이 예이

인간이 만든 신이라면 인간답게
나약하고 모자라게
- 유세차 유세차 유세차
AND

발전

발전이 뭘까
사전에선 더 낫고 좋은 상태, 더 높은 단계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해
새거는 다 더 좋은 거라고 생각해서 새 건물을 지으면 그걸 발전이라고 하나봐
먼저 있던 건물보다 높은 건물을 올리니까 발전이라고 하나봐
오피스텔 꼭대기 층에 사는 사람은 가장 발전한 사람이고 다세대 주택 반지하에 사는 사람은 발전이 없는 사람인거지
동네에 새 건물이 많으면 발전한 동네라고 해
공사현장이 많으면 발전하는 중이라고 해
발전하고 발전해서 하늘에 닿으려고 해
높아지는 건 나아지는 것
첨탑이나 굴뚝 지붕에 올라간 사람은 더 이상 발전하지 말라고 강제로 내려오게 하려고 해
발전도 마음대로 못하는 발전하는 세상
발전이란 말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세상이 내가 사는 세상이겠지
4평 반지하 방에서 이 글을 쓰고 싶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네
내 집은 열 평 전셋집이거든
그래도 내 주위에 발전하는 사람은 없지
이게 내 마지막 위안이야
AND

어둠속에서

여러 색의 어둠이 바닥을 덮고 있다
기원을 알 수 없는 어둠 한 가운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도 모르는 내가 서 있다
어디선가 가는 빛이 스며 들어온다
어둠은 하나 둘 본래의 색을 드러낸다
가만히 나타난 내 그림자를 보고
내가 모르는 나도 나라는 걸 안다
외면하려는 나도 나라는 걸 안다
AND

소년

소년은 다리가 없다
소년은 날개가 있다
소년은 걷지 못한다
소년은 날지 못한다
한 번도 펼쳐 보지 못한 날개를 가슴속에 구겨 넣고
어떤 소년은 평생을 소년으로 산다
AND

마흔

여름과 가을의 중간
선풍기를 틀어도 되고 안 틀어도 되는 계절
봄은 기억속에만 겨울은 두려움으로만 있는 시기
아직이란 말보단 벌써란 말이 더 입에 붙기 시작하는 나이
AND

숙취

눈을 뜨자마자
곁에 없는 것들 생각에 울어버렸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흐르는데
이마에선 식은땀이 나고
속이 불편하고
변기에 앉아서도 눈물이 나는데
주르륵 설사를 하고
여전히 속은 불편하고
뱃속의 것을 게우고
속도 없이 눈물이 나고
술이 다 깨도록 속절없이 울기만 했다
AND

카톡

카톡 프로필을 보면
사는 게 다 거기서 거기다
애를 키우던지
개나 고양이를 키우던지
본인이 이쁜걸 봤던지
본인이 이쁘게 나왔던지
뭘 키우면 그게 이쁘고
뭘 안키우면 지가 이쁘다
AND

만두송   song ver

 

찐빵을 보니까  1
만두가 땡기네  3
당신은 만두국을 싫어하지만  4  5
만두국 먹고 피우는 담배는 참 맛있지  1  3  4  5  1

만두는 물만두
만두는 군만두
나는 만두국
딩신은 순대국  1 3 2 5

담배를 피우니까
커피가 땡기네
아메리카노 보단 찐한 밀크커피로
달달한 커피에 피가 끈적거리네

담배는 독하게
커피는 진하게

물보다 진한 피
피보다 진한 너

찐빵을 보니까
만두가 땡기네

만두국을 안 먹는
피보다 진한 너

만두는 물만두
만두는 군만두

만두국을 안 먹는
피보다 진한 너 2 5 1

AND

절반

누군가 말했지
밤꽃이 피면 반이 지난거라고
하지 무렵,
우리는 반짝이는 생의 반을 지나 어둠으로 기울기 시작하지
몸도 기울고 마음도 기울어 어둠에라도 기대야만 살지
기대어 사랑을 속삭일 어둠이 당신이라면 좋겠어
그렇게 점점 당신에게 기울다가
낮과 밤의 길이가 그 경계까지도 같은 날
생을 공평하게 들여다보는 단 하루가 오고
그날 당신과 서로의 이마를 쓰다듬으면 좋겠어
똑같은 만큼 서로 주고 받는 사랑이 아니라도 좋아
남은 날들의 절반과 그 절반의 절반도 그렇게 함께하면 좋겠어
AND

옛날사람

옛날 사람이 되고 나니
나보다 옛날 사람이 별로 없다
진짜 옛날 사람이 되고 나니
못했던 일만 생각난다
미안했던 일만 생각난다
고맙단 말은 하지 않았다
감사 인사도 받지 못했다

나는 옛날 사람
너에게 집중하지 못했던 그때가 떠오른다
나는 옛날 사람
너는 미래에 있겠다고 했다
나는 옛날 사람
내일과 희망은 당신들의 몫

나는 옛날 사람
어제만 사는 옛날 사람
AND

여름

마음과 마음이 부둥켜 안으니 마음에서도 땀이 난다
뒤섞인 땀에서 마음의 단내가 난다
여름이 지나고 있다
AND

피자를 먹다 - 시카고 피자 -


피자를 먹는다
냉장고 안에서 이틀
차갑게 식은 정통 아메리칸 스타일
치즈까지 단단해진 시카고 피자

피자를 식히려면 냉장고가
피자를 사려면 마트 회원카드가
회원카드를 만드려면 돈도 자동차도 필요하다
필요를 따라 올라가면 물건의 목록은 하늘에 닿는다

포장 박스도 따뜻할 때 먹으라 권유하지만
냉장고는 있어도 전자렌지는 없어서
살며 모든 걸 가질 순 없다는 걸 알기에
차가운 치즈를 곱씹는다

시카고에 아는 사람 한 명 없고
오래된 팝송과 마이클 조던만 떠오르지만
시카고에서 오지도 않은 시카고 피자를 먹는다


AND

리퍼블릭 오브 코리아

오천만명의 사람
적어도 팔천만 마리의 닭
사람과 닭을 합친 숫자보다 많은 나무
해운대 해수욕장 백사장의 모래만큼 많은 모래
모래는 시멘트와 섞여 건물이 되고
나무는 산불에 타고 예수처럼 못이 박힌다
전염병에 걸리지 않은 닭들이 생매장 되고
사람이 사람을 돈으로 사고 판다

오, 자유 대한민국
아, 위대한 공화국

나는 자유가 뭔지 모르고
공화국은 더욱 모르는 사람
바다 건너 나라에 사는 여가수의 성격까지 알 수 있는 세상에서
내가 보고 들은 일에만 기뻐하는 사람
내 몸에 와 닿는 불의에만 분개하는 사람
나의 반대편에 당신이 있다는 걸 모른척 하는 사람
그러면서 당신에게 사랑을 말하는 사람
꼬리를 물어 다시 앞으로 돌아오는 말의 반복을 알면서도 반복하는 사람
절대 그 말을 번복하지 않는 사람
오천만명 중에 한 사람
AND

하구에서

바다와 강이 서로를 밀어낸다
한쪽으로 넘치거나
반대쪽이 마르지 않도록
때로는 강하게 때로는 조금 약하게
낮과 밤이 서로를 밀어내는 만큼만
달이 지구 주위를 돌고 지구가 태양을 도는 만큼만
닿으면 부서져 버리는 거리만큼만
딱 그만큼의 힘으로
딱 그만큼의 사랑으로
흐릿하게 무너지는 경계에서도
바다는 바다고 강은 강이어서
나도 나일 수밖에 없어서
두 눈 감아버리는 하구에서
사랑이라고 사랑이라고
바다와 강이 서로를 밀어낸다
AND



입술에 닿지도 못한 술 한 잔에
세상의 모든 활자가 나에게로 오는 밤
세상의 모든 시가 나에게로 오는 밤
세상의 모든 글이 나에게로 오는 밤

생의 비밀을 안다고 생각했던
나는 아무것도 기억할 수 없다
누굴 만나도 자신 있었던
나는 단 한 음절만 적어 낼 뿐이다

너,
너 쉼표

잠깐 쉬었다가 다시
너.

이번엔 쉬어갈 틈 없는
너?

나인지 너인지
너!

단호하게 마치는


네가 나에게로 오던 밤의
너...
AND

배탈


크릴새우가 플랑크톤을 먹고
정어리가 크릴새우를 먹고
백상아리랑 범고래가 정어리를 먹고
인간은 정어리 통조림과 상어 지느러미와 고래 내장을 먹는다

지렁이가 흙을 먹고
잠자리가 모기를 먹고
닭이 지렁이랑 잠자리를 먹고
개가 닭을 잡아 먹고
인간은 닭개장도 개장국도 먹는다

결국 인간이 인간을 먹는다
더 배고픈 인간이 덜 배고픈 인간을 먹는다
사실은 배부른 인간이 배고픈 인간을 먹는다
합법적으로도 불법적으로도 먹는다

그래야 인간이라고
그게 인간이라고
새우 뱃속의 플랑크톤이
지렁이처럼 길게 까무러친다

이 지극한 순환에
배고픈 나는 배탈이 났다
AND